제1차 고구려-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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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은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한 전쟁이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실패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를 위협했고, 연개소문의 집권과 대당 강경책으로 전쟁의 빌미가 마련되었다. 당나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의 끈질긴 저항과 겨울의 추위로 인해 철수했다. 이 전쟁은 당나라의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소규모 국지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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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전쟁은 7세기 중후반 당나라가 동아시아 강자로 부상하며 고구려에 강경 정책을 펼치고, 연개소문 집권 후 내부 혼란과 당-신라 동맹이 형성된 배경 속에서 645년부터 668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으로, 고구려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내부 분열로 멸망했다. - 645년 중국 - 안시성 전투
안시성 전투는 645년 고구려와 당나라 간에 벌어진 전투로, 고구려가 험준한 지형과 뛰어난 방어 전략으로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사건이다. - 645년 한국 - 고구려-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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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고구려-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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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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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제1차 고구려-당 전쟁 |
부분 | 고구려-당 전쟁 |
시기 | 645년–648년 |
장소 | 랴오둥반도, 한반도, 발해, 황해 |
결과 | 고구려의 승리 |
영향 | 고구려-당 전쟁의 연장, 백제와 신라의 조선 왕조를 포함한 전쟁 범위 확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당나라 |
지원군 1 | 동돌궐, 신라 |
교전국 2 | 고구려 |
지원군 2 | 말갈 |
지휘관 | |
당나라 지휘관 | 당 태종 |
당나라 지휘관 (세부) | 이세적 이도종 장손무기 장량 위치경덕 계필하력 설만비 아사나사예 아사나사마 아사나미사 집실사력 잠문본 유홍기 장검 양사도 설인귀 |
고구려 지휘관 | 연개소문 |
고구려 지휘관 (세부) | 안시성 성주 (양만춘) 고정의 고연수 고혜진 손대음 고죽리 |
병력 규모 | |
당나라 | 113,000명 |
고구려 | 최소 200,000명 |
2. 배경
수나라가 고구려-수 전쟁에서 크게 패한 뒤, 617년 이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이세민은 각지의 반란군을 제압하고 중국을 재통일했으나,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 끝에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626년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곧 당 태종이다.
태종은 동돌궐을 제압하는 등 주변국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한편, 고구려는 고구려 영류왕이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으나, 태종 즉위 후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 행위를 노골화했다. 631년 당나라는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헐어버렸고, 같은 해 영류왕은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했다.
640년 영류왕은 세자를 당나라 국자감에 입학시키는 등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641년 당나라가 진대덕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정세를 염탐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보장왕을 옹립하고 대막리지에 올라 권력을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책을 펼쳤고, 신라 김춘추의 화친 요청을 거절했다.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나라가 중재에 나섰으나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은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주장했다.
644년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역을 명분으로 고구려 침공을 결정했다. 그는 요동이 원래 중국 땅이며,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중국과 고구려의 원한을 갚는 일이라 주장했다.[8]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태종은 자신감을 가지고 전쟁을 강행했다.
2. 1. 고구려의 성장과 동아시아 정세
수나라는 고구려-수 전쟁에서 크게 패했지만, 수 양제는 양저우 별궁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 실패와 대규모 토목 공사로 국력이 약해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지방 호족들은 독립적인 정부를 세웠다. 귀족 계층인 관롱집단마저 등을 돌려 수나라는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617년, 이연은 반란에 가담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황태손 양유를 황제로 세웠다. 이연은 수의 대승상이 되었고, 수 양제가 우문화급 형제에게 암살되자 당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 이연은 둘째 아들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이세민은 각지의 호족 세력과 반란군을 제압하고 624년 중국을 재통일했다. 이세민의 인기가 높아지자 형 황태자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은 이세민을 죽이려 했으나,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에게 살해당했다. 이연은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양위했으며, 이세민은 당 태종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했다. 당 태종은 630년 동돌궐을 제압했고, 거란과 해, 습, 실위가 당에 복속했다.
중국에서 이러한 혼란이 일어나는 동안, 고구려는 전쟁으로 흐트러진 국내 상황을 수습하고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포로가 된 한인(漢人)을 송환하고 고구려의 포로를 찾아왔다. 624년 당에 조공하고 당 고조로부터 고구려왕에 봉해졌으며, 봉역도(封域圖)를 바치고 제후국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당 태종 즉위 후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 행위를 시작했고, 631년에는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헐어버렸다. 같은 해 영류왕은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하고 연개소문에게 감독을 맡겼다. 연개소문은 강경 외교론자였으며, 이는 온건파 귀족들과의 갈등을 일으켰다.
당나라는 635년 토욕혼, 640년 고창국을 격파하여 세력을 강화했다. 640년 영류왕은 세자를 당나라 국자감에 입학시켰으나, 641년 당나라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 정세를 염탐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었다.
642년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영류왕과 여러 대신들이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으나, 연개소문은 군사를 모아 대신들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웠다. 연개소문은 대막리지에 올라 권력을 장악하고 대당 강경책을 펼쳤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받은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요청했지만 연개소문은 거절했다.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견제를 요청했고, 당나라 사신 상리현장이 고구려에 협박했으나,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은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답했다.
당 태종은 644년 장엄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거부하고 그를 가두었다. 당 태종은 "요동은 원래 중국 땅"이라며 고구려 정벌을 준비했다.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당 태종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644년 10월,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역을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8]
고구려는 동명성왕이 한나라를 격파한 후 거의 700년 동안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 광개토대왕 치세(391~413)에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되어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한반도의 느슨한 통일을 이루었다. 5세기 말, 고구려는 내분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551년,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한강 유역을 공격했다. 신라는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유역 전체를 확보했다. 백제는 신라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국왕이 사망했다. 신라는 황해로 진출하여 중국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신라와 중국 왕조 간의 관계 강화로 이어졌고, 7세기에는 동맹 관계가 되어 고구려를 양면에서 위협했다.
6세기 말,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수나라는 4차례 침략했지만 모두 패했다. 특히 612년, 수 양제는 최대 10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참담하게 실패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은 수나라를 약화시키고 멸망을 앞당겼다.
7세기, 당 태종은 630년에 동돌궐을 정복하고 640년에 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한 후 고구려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예전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 지역의 주요 세력이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정복이라는 개인적인 야망을 품고 있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영류왕이 연개소문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반대하는 관리들을 죽인 후 보장왕을 새로운 고구려 왕으로 옹립했다. 그 이후 연개소문은 꼭두각시인 보장왕을 통해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약 40개의 요충지를 점령했다. 643년, 신라 선덕여왕은 고구려-백제 동맹의 공격을 받자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 태종은 상리현장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부했다.[1]
2. 2. 당나라의 등장과 팽창 정책
수나라가 고구려-수 전쟁에서 크게 패배한 후, 617년 이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이세민은 각지의 반란군을 제압하고 중국을 재통일하였으나,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 끝에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626년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곧 당 태종이다.태종은 동돌궐을 제압하는 등 주변국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한편, 고구려는 고구려 영류왕이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으나, 태종 즉위 후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 행위를 노골화했다. 631년 당나라는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헐어버렸고, 같은 해 영류왕은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했다.
640년 영류왕은 세자를 당나라 국자감에 입학시키는 등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641년 당나라가 진대덕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정세를 염탐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보장왕을 옹립하고 대막리지에 올라 권력을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책을 펼쳤고, 신라 김춘추의 화친 요청을 거절했다.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나라가 중재에 나섰으나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은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주장했다.
644년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역을 명분으로 고구려 침공을 결정했다. 그는 요동이 원래 중국 땅이며,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중국과 고구려의 원한을 갚는 일이라 주장했다.[8]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태종은 자신감을 가지고 전쟁을 강행했다.
2. 3. 고구려 내부의 권력 투쟁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후, 고구려는 당나라와 표면적으로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고구려-수 전쟁 때 포로가 된 한인(漢人)들을 당나라로 송환하고,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8] 624년에는 당 고조로부터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에 봉해지기도 했다.그러나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이 즉위하면서 당나라의 대외 정책은 강경하게 변했다. 631년 당나라는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리는 등 고구려를 자극했다.[8] 같은 해 영류왕은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를 시작하고, 강경파인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감독을 맡겼다.
640년 영류왕은 세자 고환권(高桓權)을 당나라 국자감에 입학시키는 등 유화책을 계속 폈지만, 641년 당나라는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고구려의 정세를 염탐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었다.
642년, 연개소문의 세력이 커지자 영류왕과 온건파 귀족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다. 이를 눈치챈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100여 명의 대신들을 살해하고, 보장왕(寶藏王)을 옹립했다. 연개소문은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라 권력을 장악하고, 대당 강경책을 추진했다.
한편,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연개소문은 고구려-수 전쟁 때 신라가 빼앗은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거절했다.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 태종은 연개소문에게 신라 공격 중단을 요구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무시했다.[1]
2. 4. 신라의 위기와 당나라와의 동맹
618년 당나라가 건국된 이후, 고구려는 당나라와 표면적으로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을 서로 교환하고, 624년에는 당에 조공을 바치며 제후국임을 인정했다.[8]그러나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 태종은 고구려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631년에는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리는 등 노골적인 적대 행위를 시작했다.[8] 같은 해 영류왕은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하고, 강경파인 연개소문에게 감독을 맡겼다.
당나라는 635년 토욕혼,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키며 세력을 확장했고, 고구려는 점차 고립되었다. 640년 영류왕은 왕자 고환권을 당나라 국자감에 입학시켜 전쟁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려 했으나, 641년 당나라는 진대덕을 보내 고구려의 정세를 염탐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었다.[8]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면서 고구려는 대당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받던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시도했지만, 연개소문은 고구려-수 전쟁 때 신라가 빼앗은 땅을 반환하라며 거절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나라는 643년 상리현장을 보내 고구려를 압박했으나 연개소문은 신라 땅 반환 없이는 화친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1] 644년 당 태종은 장엄을 보내 재차 압박했지만, 연개소문은 그를 가두고 당나라와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8]
이러한 상황은 결국 644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으로 이어졌다.
3. 제1차 고구려-당 전쟁 (645년)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고구려 왕을 시해한 것을 구실로 삼아 644년에 침략 준비를 시작했다. 645년 전쟁이 발발하자 당은 이세적의 지휘 아래 6만 명의 당나라 군대와 부족 병력을 유주 (현재의 베이징 및 주변 지역)에 집결시켰다. 태종은 친히 1만 명의 갑옷 기병을 지휘했으며, 해상에서는 500척의 대규모 함대가 4만 명의 징집병과 3,000명의 문관을 요동반도로부터 한반도로 수송했다.
645년 5월 1일, 이세적의 군대는 요하를 건너 고구려 영토로 진입하여 북쪽으로 진격, 적을 기습했다. 5월 16일, 개모성을 포위하여 단 11일 만에 함락시키고 2만 명의 인구와 10만 석(6백만 리터)의 곡물을 탈취했다. 이세적은 이후 요동성으로 진격하여 4만 명의 고구려 구원군을 격파했고, 며칠 후 태종과 그의 갑옷 기병이 합류하여 6월 16일에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6월 27일, 당나라 군대는 백암성에 도착했고, 7월 2일 고구려 사령관은 항복했다. 당 태종은 도시를 약탈하거나 시민을 노예로 삼지 말라고 명령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가 대패한 이후, 당군은 안시성으로 진격한다. 7월 18일,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 외곽에 도착했다. 당 태종은 15만 명으로 구성된 고구려와 말갈의 대규모 구원군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7월 20일, 양측은 주필산 전투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나라 군대가 승리했다. 대부분의 고구려 군대는 패배 후 흩어졌고, 나머지는 인근 언덕으로 도망쳤지만, 당나라의 포위 공격을 받은 다음 날 항복했다. 당나라 군대는 36,8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1]
승리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군대는 양만춘이 지휘하는 안시성을 돌파할 수 없었다.[2] 당나라 군대는 하루에 여섯, 일곱 번이나 성을 공격했지만, 방어군은 매번 그들을 격퇴했다.[3] 며칠, 몇 주가 지나면서 태종은 안시성 포위를 포기하고 고구려 깊숙이 진격하는 것을 여러 번 고려했지만, 안시성은 원정 중에 포기하기에는 너무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당나라는 거대한 토성을 건설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지만, 당나라 군대의 3일간의 격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방어군이 점령하여 성공적으로 지켜냈다.[4]
고구려 군대는 수개월 동안 성을 지켜냈다. 전투가 요동반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겨울이 10월 초부터 다가왔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날씨가 훨씬 추워지고 식량이 줄어드는 등 당나라 군대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태종은 10월 13일에 고구려로부터 철수를 명령했다.
3. 1. 당나라의 침공과 초기 전투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에 수륙 양면으로 약 8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당 태종은 다음 해 2월에 낙양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으며, 돌궐과 거란으로 구성된 이민족 군대도 다수 동원되었다.당 태종은 정예군 수십만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요동을 향해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 이세적은 6만의 요동도행군을 이끌고 현도성으로 향했고, 이도종에게 6만의 군사로 신성을 치게 하고, 선발대 장검에게 6만의 군사로 건안성을 치게 했다. 당 태종의 친정군인 어영군 20만이 뒤를 따랐고, 장량이 이끄는 수군 2도행군 12만 명(상륙군 4만 3천 명 포함)과 1000척의 함대가 등주에서 출발하였다.
이세적의 당 선봉 요동도행군은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우회하여 고구려가 예상치 못한 북쪽 통정진으로 진군하였다. 5월 1일(음력 4월 1일), 이세적이 이끄는 당의 선봉 요동도행군은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다. 현도성이 쉽게 함락되자, 5월 5일(음력 4월 5일) 선봉부대의 부대총관 강하왕 이도종은 군사 6만여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요동지역 제1의 요지인 신성에 이르렀다. 5월 15일(음력 4월 15일), 이도종은 이세적의 요동도행군과 합류하여 개모성으로 이동하였다. 5월 26일(음력 4월 26일),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점령하고, 개모성의 인구 2만 호(약 14만 명)와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
한편, 영주 도독 장검이 6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의 남쪽 하구를 건너 건안성을 급습했다. 장량은 1000여 척(약 12만, 상륙군 4만 3천)의 당 수군을 거느리고 산둥의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5월 31일(음력 5월 1일), 비사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신성과 건안성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반격으로 밀려난 당군은 요동성에서 수일간 전열을 정비한 후 작전회의를 거쳐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안시성으로 진격한다. 선봉이었던 요동도행군 제1군 장사귀가 이끄는 선발부대가 안시성 부근에 도달하여 안시성의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 때, 설인귀가 단창필마로 뛰어들어가 고구려군 장수 한 명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웠다.
요동 방어선 북단의 신성, 최남단의 건안성이 당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으나, 중앙의 요동지역 최대의 요동성과 주변 백암성, 개모성 등이 차례로 함락되어 요동의 위기는 극단을 치달았다. 6월 11일, 당 태종의 당 대군은 남하하여 안시성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요동 방면에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자, 거국적인 15만 대군을 긴급히 요동 방면으로 급파하였다.
6월 20일, 당의 대군을 맞아 고구려의 대군은 안시성 부근에 도착하여 강 건너 당군을 마주 보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하게 되었다. 태종은 연개소문의 고구려 국왕 살해를 구실로 삼아 침략을 준비했고, 645년 4월에 장군 이세적의 지휘 아래 6만 명의 당나라 군대와 불특정 수의 부족 병력이 유주 (현재의 베이징 및 주변 지역)에 집결했다. 태종은 친히 1만 명의 갑옷 기병을 지휘했으며, 해상에서는 500척의 대규모 함대가 4만 명의 징집병과 3,000명의 문관을 요동반도로부터 한반도로 수송했다.
5월 1일, 이세적의 군대는 고구려 영토에 진입하여 요하를 건너 북쪽으로 진격하여 적을 기습했다. 5월 16일, 그들은 개모성을 포위하여 단 11일 만에 함락시키고 2만 명의 인구와 10만 석(6백만 리터)의 곡물을 탈취했다. 이후 이세적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여 4만 명의 고구려 구원군을 격파했고, 며칠 후 태종과 그의 갑옷 기병이 합류하여 6월 16일에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6월 27일, 당나라 군대는 백암성에 도착했고, 7월 2일, 고구려 사령관은 당나라에 성을 항복했다. 7월 18일,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 외곽에 도착했고, 태종은 15만 명으로 구성된 고구려와 말갈의 대규모 구원군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7월 20일, 양측은 주필산 전투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나라 군대가 승리했다. 대부분의 고구려 군대는 패배 후 흩어졌고, 나머지는 인근 언덕으로 도망쳤지만, 당나라의 포위 공격을 받은 다음 날 항복했다. 당나라 군대는 36,8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3. 2. [[주필산 전투]]
645년 7월 20일,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와 고구려 군대가 맞붙었다. 당 태종은 15만 명으로 구성된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세적에게 1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고구려군을 유인하게 했다. 동시에 장손무기 등 다른 당나라 장수들에게는 은밀히 적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 군은 승리했고, 패배한 고구려 군대는 대부분 흩어졌다. 남은 고구려 군은 인근 언덕으로 피신했지만, 당나라 군의 포위 공격에 다음 날 항복했다. 당나라 군은 36,8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으며, 이 중 3,500명의 장교와 족장은 중국으로 보내졌고, 3,300명의 말갈 군인은 처형되었다. 나머지 일반 고구려 병사들은 석방되었다.[1]이 주필산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군대는 양만춘이 지휘하는 안시성을 함락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3. 3. [[안시성 전투]]
645년 7월 18일,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 외곽에 도착했다. 당 태종은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 15만 명이 구원병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이세적에게 1만 5천 명의 군대를 주어 고구려군을 유인하게 하고, 장손무기 등에게는 은밀히 적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1] 7월 20일, 양측은 주필산 전투에서 격돌했고, 당나라 군대가 승리했다. 패배한 고구려군은 대부분 흩어졌고, 일부는 인근 언덕으로 도망쳤으나 당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다음 날 항복했다. 당군은 36,800명의 고구려군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 중 3,500명의 장교와 족장은 중국으로 보내고, 3,300명의 말갈 군인은 처형했으며, 나머지 일반 고구려 군인들은 석방했다.[1]그러나 당군은 양만춘이 지휘하는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2] 당군은 하루에도 여섯, 일곱 번씩 공격을 퍼부었지만, 안시성 군사들은 매번 이를 막아냈다.[3] 당 태종은 안시성 포위를 풀고 고구려 깊숙이 진격하는 방안을 여러 차례 고려했지만, 안시성을 배후에 남겨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2] 당군은 거대한 토성을 쌓아 공격을 시도했으나, 3일간의 격전 끝에 오히려 안시성 군사들에게 토성을 빼앗기고 말았다.[4]
고구려군은 수개월 동안 안시성을 지켜냈다. 10월 초, 겨울이 다가오면서 날씨가 추워지고 식량이 부족해지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당 태종은 10월 13일에 철수를 명령했다.[4] 당 태종은 안시성 성주에게 후한 선물을 남겼으나,[2] 철수 과정은 험난했고, 많은 군사들이 겨울 폭풍에 희생되었다.[4]
3. 4. 신성, 건안성 전투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기습했다. 5월 16일, 개모성을 함락하고 많은 인구와 식량을 탈취했다.[1] 이후 요동성으로 진격, 고구려 구원군을 격파하고 6월 16일 요동성을 함락시켰다.[1]6월 27일, 당나라 군대는 백암성에 도착했고, 7월 2일 고구려 사령관은 항복했다. 태종은 약탈과 노예화를 금지했다.[1]
한편, 장검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건안성을 급습했으나, 건안성과 주변 성들의 저항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장량이 이끄는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시켰지만, 오골성에서 출동한 고구려 지원군은 계필하력에게 큰 부상을 입히는 등 당나라 군에 타격을 입혔다.
백암성은 성주 손대음의 배신으로 6월 1일 함락되었다. 태종은 항복한 백암성 주민들을 보호하고, 다른 성에서 온 군사들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1]
이후 당나라 군은 다시 신성을 공격했으나, 굳건한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건안성 역시 고구려의 방어에 성공했다.[1]
4. 제1차 전쟁 이후의 국지전 (646년 ~ 659년)
646년, 당나라는 고구려를 제외한 유일한 위협 세력이었던 북쪽의 설연타를 멸망시켰다. 철륵의 11개 부족장이 사신을 보내 당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쳤다.[9]
647년, 보장왕 6년에 당 태종은 마지막 남은 숙적인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려 했다. 당 조정에서는 고구려가 산에 의지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조기 함락이 어렵고, 백성들이 식량 부족을 겪고 있다는 점을 들어, 소규모 군사로 번갈아 침략하여 방어에 지치게 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장기적인 전략을 채택했다. 이는 고구려를 단번에 정복하기 어려운 상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9]
당 태종은 유격전에 능한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 이해안을 보좌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해주로 진격하게 했다. 또한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성으로 진격하게 했다. 이세적의 군대는 요수를 건너 남소 등 몇 성을 공격하고 외성을 불태웠다.[9]
가을 7월, 당은 우진달과 이해안을 다시 보내 고구려 국경에서 100여 차례 싸웠다. 당군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까지 진격했으나,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에게 3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배했다. 당 태종은 대규모 해상 침공을 위해 송주 자사 왕파리에게 강남 12주의 장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했다.[9]
당 태종은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 배행방을 보좌관으로 삼아 3만여 명의 병력과 누선을 이끌고 해주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9]
648년, 보장왕 7년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신감이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역산에서 고구려군 5천 명을 격파했다. 그날 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했으나 당군의 복병에 물러났다.[9]
당 태종은 고구려가 피폐해졌다고 판단, 다음 해에 30만 대군으로 멸망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신하들은 1년 치 군량미와 선박 준비의 필요성을 들어 검남 지역 백성들에게 선박 건조를 맡길 것을 제안했다. 당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강위를 검남도에 파견했으나, 검남도의 배는 크기가 매우 컸고, 수로를 통해 내주로 이동해야 했다.[9]
당은 설만철에게 고구려 안쪽을 공격하게 했다. 설만철은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성 성주 소부손이 1만여 명의 병력으로 방어했으나, 배행방이 이끄는 당군에 패배했다. 박작성은 험준한 요새였기에 함락되지 않았다. 고구려는 오골성, 안지성 등에서 3만여 명의 구원군을 보냈으나, 설만철이 이끄는 당군과 격전 후 물러났다.[9]
당 태종은 이도유에게 군량과 기계를 오호도에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대규모 정벌을 위한 준비였다.[9]
649년, 보장왕 8년 여름 4월,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고구려 정벌은 중단되었고, 당과의 국지전도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당 태종은 유언으로 고구려 침공을 중단하라고 명했다.[9]
당에서는 당 고종이 즉위하고 장손무기가 권력을 잡으면서 영휘의 치라 불리는 안정적인 정세가 이어졌다. 이후 측천무후와의 권력 투쟁으로 대외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9]
654년, 보장왕 13년 겨울 10월, 고구려는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안고에게 군사를 주어 거란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거란의 송막 도독 이굴가가 신성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5백 명을 죽이는 등 승리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냈다.[9]
655년, 보장왕 14년,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백제, 말갈이 신라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점령하자, 김춘추는 당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은 정명진과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다. 정명진은 645년 비사성을 함락시킨 유격전 전문가였다. 정명진의 당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여 1천여 명의 피해를 입히고 외성과 촌락을 불태운 뒤 철수했다.[9]
658년, 보장왕 17년 여름 6월, 정명진과 설인귀가 요서 지역을 기습했다. 설인귀는 적봉진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군사 1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고구려는 두방루에게 3만 병사를 주어 요격하게 했고, 정명진, 설인귀의 당군과 격전이 벌어졌다.[9]
659년, 보장왕 18년 겨울 11월, 설인귀가 단독으로 군대를 지휘하여 고구려 요서 지역을 침범했다. 온사문이 요격하러 출병, 횡산(요양 부근 화표산)에서 설인귀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9]
설인귀의 당군은 석성으로 침입하여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설인귀는 단기로 진격하여 고구려 신궁을 생포하는 활약을 보였다.[9]
5. 전쟁의 결과와 영향
645년 9월 18일, 당 태종은 요동 지역의 추위와 병사 및 군마 관리의 어려움, 군량 부족을 이유로 철수를 명령했다.[3] 9월 20일 당나라 군대는 점령했던 요동성에 도착했고, 다음날 요택으로 퇴각했다. 퇴각로는 3개가 있었으나, 요하 하구는 건안성이 버티고 있어 갈 수 없었다. 당나라 군대는 요하 중류로 가는 대신 진흙밭인 요택을 건너는 길을 택했는데, 이는 요동 지역의 고구려군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태종은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을 맡겼다. 요수를 건너려 했으나 습지로 인해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1만 명의 군사로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게 했다. 태종도 직접 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 태종은 포구에 이르러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했다. 20일 동안의 퇴각 동안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 군사들의 옷이 젖고, 폭풍과 추위로 동사한 군사가 매우 많았으며, 소와 말 10마리 중 7~8마리가 죽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일각에서는 고구려군이 후미를 공격해 입은 피해를 추위 때문이라고 핑계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당 태종은 퇴각하는 길에 "만일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라고 말했다. 근대 역사학자 신채호는 태종이 패전의 수치를 감추고자 전과를 부풀리고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베이징 일대 또는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당나라 군이 요동성이 아닌 요택으로 퇴각한 점, 많은 양식을 탈취했음에도 군량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서둘러 퇴각한 점, 황제가 직접 퇴각을 도운 점, 구체적인 피해 상황을 밝히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이 전쟁을 당나라의 패배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퇴각로가 요동 주요 성을 우회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고구려군이 요동성 등 10성을 회복했을 것이라고도 추정한다.
한편, 항복한 고연수는 분개와 한탄 끝에 홧병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장안에 도착했다.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민충사를 창건했다.[4][5][6]
647년, 관계를 정상화한 후 당 태종은 다시 고구려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3만 명의 병력으로 원정을 준비했다. 고구려를 약화시키기 위해 소규모 공격을 명령했고, 일부 당나라 관리들은 1년 치 식량 비축과 더 많은 군함 건조를 조언했다. 검남도는 이전에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어 이 지역에서 배를 건조할 것을 제안했고, 황제는 좡 웨이를 보내 배를 건조하게 했다. 그러나 검남도 백성들은 배 건조 능력이 없어 목재 공급만 담당하게 되었다.
649년,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이 작전은 취소되었다. 당 고종 즉위 후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일련의 전쟁을 시작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켰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고구려는 후계자 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667년, 나·당 연합군은 망명한 연남생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침략했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 역사적 평가 및 의의
고구려는 멸망했기 때문에 고구려 관련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 중국 측 사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와 이를 바탕으로 쓴 삼국사기 정도에 의존하며, 최근 발견되는 고구려 유민 묘비명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중국 측 역사서는 승전 기록은 과장하고 패전 기록은 누락하는 경우가 많다.[1]
중국 측 사서에 의존하다 보니, 후대에 전해지는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중국에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혔던 인물들(손대음, 고연수, 고혜진, 고돌발 등)뿐이다. 1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에 투항하지 않은 고구려 측 장군이나 지휘관은 주필산 전투의 대대로 고정의만이 이름만 전해질 뿐이다.[1]
이는 고구려 멸망 때까지 고구려-당 전쟁 동안 계속 이어지며, 결국 당나라에 투항한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과 그 자손들, 묘비명으로 밝혀진 고구려 유민 고질, 고현, 고족유, 이타인 등만이 전해진다.[1]
전쟁 관련 기록도 누락되거나 과장된 경우가 많다. 당태종의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한 이후 주필산 전투까지 상당한 시간 동안의 기록이 없으며, 끝까지 함락되지 않은 신성, 건안성 전투 기록도 생략되어 있다. (신성, 건안성 전투는 주필산 전투와 667년 금산 전투와 더불어 당나라 초기 고구려와의 4대 전투 중 하나이다.) 안시성 전투 때문에 잘 알려진 주필산 전투 또한 전투 초기 당군의 승리 부분만 남아 있고 이후 기록은 전혀 없다. 현대 학자들은 정예 당나라 대군이 단지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회군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주필산 전투처럼 양측 수십만이 격돌한 큰 전투에서 남은 기록은 초전에 고연수, 고혜진이 항복한 기록뿐이기 때문이다.[1]
신채호는 중국 야사 및 전설, 베이징 인근의 고구려 관련 지명을 근거로 연개소문이 도망가는 당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중국에는 다음과 같은 야사 및 전설이 전해진다.[1]
- 산둥성 봉래시: 봉래 인근에서 당 태종과 연개소문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당태종의 형이 전사했다.
- 산둥성 즉묵시: 당 태종이 산동성 즉묵 마산에서 연개소문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힐 뻔했으나, 신라 출신 용양장군 김걸이 당 태종을 구하고 자신은 연개소문에 의해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장쑤성 비주의 전설: 고구려군과 당의 설인귀군 간의 격전이 있었다.
- 장쑤성 숙천의 전설: 연개소문이 당의 설인귀군과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는 전설이 있다.
- 장쑤성 염성의 전설: 염성 건호현에는 몽롱탑(朦朧塔) 전설이 내려온다.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다 거미줄이 쳐진 빈 우물에 숨어 살아났는데, 나중에 이 은공을 잊지 못해 그 우물이 있는 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어둡고 어려움(朦)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 줘 목숨을 건졌다는 데서 몽롱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 장쑤성 금호: 고려성이 있는 지역이다.
참조
[1]
간행물
Old Book of Tang (199上)
[2]
웹사이트
https://zh.wikisourc[...]
[3]
웹사이트
Record of Restoring the Buddha Relic at Minzhong Temple
http://museum.sinica[...]
Academia Sinica
[4]
서적
Beijing – A Concise Histo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11-02
[5]
서적
Encyclopedia of China: History and Cultu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11-02
[6]
서적
Beijing
https://books.google[...]
Reaktion Books
2016-11-02
[7]
간행물
旧唐書199上
[8]
문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
[9]
뉴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문은 중국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의 묘비명에 부친의 이름이 고문으로 나와 있어 그 동안 동일인으로 알려졌으나 고자의 부친 고질(高質)의 묘지명 또 다시 출토되어 전혀 다른 인물로 확인되었다. : 고구려 유민 고질(高質) 묘지명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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