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윤호 (종교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윤호는 1848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난 한국 천주교 순교자이다. 1864년 전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6년 천주교 박해 때 체포된 아버지 조화서를 구하려다 함께 투옥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1866년 12월 2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생애

조윤호는 1848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에서 태어난 모태 천주교 신자이다.[1][2] 1864년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를 따라 전라북도 전주시 인근의 성지동 교우촌으로 이주하였고,[1][2] 그곳에서 교우 이 루시아와 혼인하여 부모와 함께 살았다.[1][2] 그는 깊은 신앙심을 지녔으며 용감하고 정직한 성품이었다.[1][2]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같은 해 12월 5일,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성지동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1][2]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굳건히 지켰으며,[1][2]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1][2] 1866년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1][2]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1][2] 그의 순교로 할아버지 조동섬 유스티노,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에 이어 3대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1][2]

2. 1. 출생과 성장

조윤호는 1848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에서 모태 신자로 태어났다.[1][2] 1864년, 그는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를 따라 전라북도 전주시 인근의 성지동 교우촌으로 이주했다.[1][2] 그곳에서 교우 이 루시아와 혼인하여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1][2]

그는 깊은 신앙심을 지녔으며, 아버지를 닮아 용감하고 정직한 성품이었다.[1][2] 조윤호의 가족 모두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에 충실했다.[1]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여 아버지 조화서와 다른 교우들을 체포해 심문하고 있을 때 조윤호가 집으로 들어왔다.[1][2] 아버지가 아들에게 피신하라고 했으나, 조윤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신앙을 지키기로 서로 격려했다.[1][2] 포졸들에게 조부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고 밝혔으며, 천주교 서적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1] 포졸들은 배교를 강요하며 혹독한 고문을 가했지만, 그는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1][2] 결국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 감영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1][2]

옥중에서도 조윤호는 온갖 고문을 견뎌내며 굳건하게 그의 신앙을 지켰다.[1][2] 어느 날 아버지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함께 처형해달라고 관아에 요청했으나, 당시 조선형법상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2] 관장이 배교하면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조윤호는 이를 거절했다.[1][2]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형리들은 그의 에 칼을 씌우고 달리게 하여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1]

사형장에서도 관장은 다시 한번 배교를 권유하며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조윤호는 단호히 거부했다.[1][2] 그는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1] 1866년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매우 심한 곤장을 맞은 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1][2]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1][2] 이로써 조윤호와 그의 아버지 조화서, 그리고 할아버지 조동섬 유스티노까지 3대가 순교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1][2]

2. 2. 신앙 활동

조윤호는 1848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에서 태어난 모태 신자였다. 1864년에는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를 따라 전라북도 전주시 인근의 성지동 교우촌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교우 처녀 이 루시아와 결혼하여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는 깊은 신앙심을 지녔으며, 아버지를 닮아 매우 용감하고 정직한 성품이었다. 그의 가족 모두 천주교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여 아버지 조화서와 몇몇 교우들을 체포심문하고 있을 때, 조윤호가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도망치라고 했지만, 조윤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격려했다. 포졸들에게 자신은 조부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천주교 서적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진술했다. 포졸들은 배교를 강요하며 극심한 고문을 가했으나, 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 감영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조윤호는 감옥에서도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고 용감하게 신앙을 지켰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고 관아에 자신도 함께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시 조선형법상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장은 조윤호에게 배교하면 압류된 재산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형리들이 그의 을 채우고 달리게 하여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사형장에서도 관장은 다시 한번 배교하면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조윤호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매우 경건한 태도로 십자성호를 긋고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 1866년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매우 심한 곤장을 맞은 후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이로써 조윤호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가 순교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2. 3. 체포와 심문

1866년 12월 5일, 전주 인근 성지동 교우촌이 포졸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조윤호의 아버지 조화서와 몇몇 교우들이 먼저 체포되어 심문받고 있었다. 조윤호는 이 소식을 듣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조윤호는 이를 거부하고 아버지와 함께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포졸들 앞에서 조윤호는 할아버지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고 밝혔으나, 천주교 서적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포졸들은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혹독한 고문을 가했지만, 그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결국 조윤호는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 감영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감옥에서도 조윤호는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본 그는 관아에 자신도 함께 처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형법은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장은 조윤호에게 배교하면 압류된 재산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조윤호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에 형리들은 그의 목에 칼을 씌우고 달리게 하여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사형장에서도 관장은 마지막으로 배교하면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조윤호는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는 매우 경건한 태도로 십자성호를 긋고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 1866년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그는 격심하게 곤장을 맞은 뒤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이로써 조윤호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가 순교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2. 4. 순교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전라북도 전주시 근처 성지동 교우촌을 습격하여 아버지 조화서와 몇몇 교우들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있을 때, 조윤호는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도망치라고 말했지만, 조윤호는 이를 거부하고 아버지와 함께 신앙을 지키기로 서로 격려했다. 그는 포졸들에게 조부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천주교 서적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진술했다. 포졸들은 배교를 강요하며 극심하게 고문했지만, 조윤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 감영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감옥에서도 조윤호는 온갖 고문을 견디며 강하고 용감하게 신앙을 지켰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관아에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 조선형법은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장은 조윤호에게 배교하면 압류된 재산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형리들은 그의 에 칼을 채우고 달리게 하여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사형장에서도 관장은 다시 한번 배교하면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조윤호는 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매우 경건한 태도로 십자성호를 긋고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 1866년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그는 매우 심하게 곤장을 맞은 뒤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이로써 조윤호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까지 3대가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3. 시복 및 시성

조윤호 요셉은 1968년 10월 6일 이탈리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순교 복자 시복식[2]을 통해 복자 품위에 올랐다.[3]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3-15
[3] 뉴스 "[교황 방한] 1925년·1968년·2014년…로마에서 서울까지 3번의 시복식" http://news1.kr/arti[...] 뉴스1 2014-08-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