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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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수부장군은 일본의 고대 군사 관직으로, 무쓰국과 데와국의 방위를 담당했다. 나라 시대에는 오노노 아즈마비토가 초대 진슈쇼군으로 임명되었으며, 다가 성에 진수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이사와 성으로 이전하면서 무쓰 국부와 분리되어 행정 관료화되었다.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 이후에는 데와국까지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특히 세이와 겐지 가문에서 대대로 진슈부장군을 역임하며 명예로운 관직으로 여겨졌으나, 가마쿠라 막부 개창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겐무 신정 시기에 잠시 부활하기도 했으며, 남북조 시대를 마지막으로 임명이 끊겼다. 에도 시대에는 닛타 요시시게에게 추증된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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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혁
나라 시대의 오노노 아즈마비토가 초대 진슈쇼군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령부는 처음 '진쇼'(鎮所)로 불리다 나중에 '진슈후'로 불렸다. 진키 원년(724년)에 다가성(多賀城)에 성곽이 축조된 후에는 그곳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진슈쇼군은 무쓰, 데와 양국에 주둔하는 병사[16]를 지휘하고 평시에 단 한 명의 장군으로서 양국의 북방에 있던 에미시와 대치하여 양국의 방위를 통괄했다.[17] 무쓰노카미나 무쓰 안찰사가 진슈쇼군을 겸임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세이이타이쇼군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엔랴쿠 21년(802년)에 이사와 성을, 22년(803년)에 시바 성을 쌓았다. 축성과 함께(혹은 몇 년 뒤) 진주후는 이사와로 이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20] 이사와로 옮기기 전의 진수부장군은 무쓰노카미나 무쓰 아제치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아 정군 양권을 아울러 북방을 다스리는 직책이었으나, 이전 후에는 전임이 되어 무쓰노카미보다 지위가 약간 낮아졌다.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의 발생으로 아키타 성의 기능도 진수부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현지 지휘관으로서 데와 국까지 미치는 군사 지휘권을 부여받아 부활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21]
진수부장군은 무사 가문에게 명예로운 관직으로 여겨졌고, 많은 무사가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 특히 세이와 겐지의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에게 진수부장군 직책이 맡겨졌다.[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연 이후에는 세이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이 상설직이 되었기 때문에 진수부장군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1] 그러나 겐무 신정 하에서는 일시 부활하여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 기타바타케 아키노부 등이 임명되었다.[1] 남북조 시대를 끝으로 진수부장군은 더 이상 임명되지 않았다.[1]
2. 1. 다가 성 시대
진슈쇼군[14]의 기원은 명확하게 기록된 사료는 없으나, 알려진 바로는 나라 시대의 오노노 아즈마비토(大野東人)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그가 초대 진슈쇼군이었다고 한다. 사령부는 처음 '진쇼'(鎮所)로 불리다 나중에 '진슈후'로 불렸다. 진키 원년(724년)에 다가성(多賀城)에 성책이 축조된 후에는 그곳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가에는 또한 무쓰 국부가 놓여 있었다.진슈쇼군은 무쓰, 데와 양국에 주둔하는 병사[16]를 지휘하고 평시에 단 한 명의 장군으로서 양국의 북방에 있던 에미시와 대치하여 양국의 방위를 통괄했다.[17] 무쓰노카미나 무쓰 안찰사가 진슈쇼군을 겸임하여, 정치권과 군사권 모두를 갖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2. 2. 이사와 성 시대
세이이타이쇼군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엔랴쿠 21년(802년)에 이사와 성을, 22년(803년)에 시바 성을 쌓았다. 축성과 함께(혹은 몇 년 뒤) 진주후는 이사와로 이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20] 이사와보다 앞서 시바에 설치되었던 시기도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의 진수부장군은 무쓰 국부와는 떨어져서 이사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이사와로 옮기기 전의 진수부장군은 무쓰노카미나 무쓰 아제치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아 정군 양권을 아울러 북방을 다스리는 직책이었으나, 이전 후에는 전임이 되어 무쓰노카미보다 지위가 약간 낮아졌다. 행정관화된 장군의 직권이 국사의 직권과 중복되는 부분도 있어 장군과 국사의 격렬한 대립이 종종 일어났다. 이 때문에 진수부장군은 조기에 뛰어난 무사에게 주어지는 명예직으로 변모하여 진수부에 있는 일도 적어졌고, 무쓰진수부는 무쓰국부보다 먼저 일단 실질적으로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의 발생으로 아키타 성의 기능도 진수부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현지 지휘관으로서 데와 국까지 미치는 군사 지휘권을 부여받아 부활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21] 한편 진수부장군 자체가 아니라 기요하라 씨가 진수부, 아키타 성 양쪽의 재청관인들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위에 무쓰노카미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22]
2. 3. 이후
진수부장군은 무사 가문에게 명예로운 관직으로 여겨졌고, 많은 무사가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 특히 세이와 겐지의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에게 진수부장군 직책이 맡겨졌다.[1] 쓰네모토의 적남 미쓰나카, 미쓰나카의 아들 요리미츠, 요리노부를 비롯해 특히 요리노부의 가계인 가와치 겐지에서 요리노부 이후, 요리요시와 요시이에 부자가 진수부장군으로 임명되었다.[1] 쓰네모토 이래 요시이에까지 5대에 걸친 진수부장군 임관은 요시이에나 그 조상들의 무명(武名)과 어우러져 일본에서 무가의 도료로써 가와치 겐지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다.[1]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연 이후에는 세이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이 상설직이 되었기 때문에 진수부장군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1] 그러나 겐무 신정 하에서는 일시 부활하여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 기타바타케 아키노부 등이 임명되었다.[1] 다만, 이 인사는 관위상당제를 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키이에 자신의 주청에 의해, 3위 이상의 공경이 이 직에 임관할 때에는 '''진수부다이쇼군'''(진수부대장군)이라고 호칭해, 세이이타이쇼군과 동격으로 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 남북조 시대를 끝으로 진수부장군은 더 이상 임명되지 않았지만,[1] 에도 시대에 들어서 도쿠가와 쇼군가의 선조로 여겨진 닛타 요시시게에게 진수부장군이 추증되었다.[1]
3. 역대 진수부 쇼군 목록
진수부장군(진수부 쇼군)을 역임한 인물 목록이다. 사료상 명확한 인물을 임관 순으로 배열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70여 명에 이르기 때문에 누락이나 미비가 있을 수 있다. 계도(系図)류에만 보이는 인물에 대해서도 추정에 의해 일부 보충(※표)했다. 사료성의 문제 등으로 의문이 있는 인물은 참고로 말미에 게재했다.
참조
[1]
문서
Adolphson, 2007: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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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Kenkyusha's New Japanese-English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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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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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kugakuin University, Institute for Japanese Culture and Classics,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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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략』(日本紀略) 엔랴쿠 13년 음력 1월 1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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菅野文夫 199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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