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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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총파업은 노동자들이 정치적 또는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직업 또는 특정 산업의 노동자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파업 형태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처음 등장하여 노동 운동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정치적 개혁을 위한 정치 파업과 자본주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 파업으로 구분된다. 총파업은 윌리엄 벤보, 미하일 바쿠닌, 혁명적 신디칼리즘 등 다양한 사상가와 운동가들에 의해 제안되고 발전했으며, 제1인터내셔널, 제2인터내셔널 등 국제 노동 운동 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등에서 대규모 총파업이 발생했으며, 미국에서는 태프트-하틀리법 통과 이후 총파업의 정의가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1946년, 2009년, 2022년 등 다양한 총파업 사례가 존재하며, 사회적, 정치적 쟁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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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파업 - 9월 총파업
9월 총파업은 1946년 9월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반발하여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대규모 파업으로, 쌀 배급, 임금 인상, 노동 운동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미군정의 강경 진압으로 1946년 가을 항쟁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 총파업 - 원산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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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유형 | 파업 |
참여 범위 | 노동 인구의 대부분 |
목표 | 경제적 요구 정치적 요구 |
배경 및 특징 | |
목적 | 고용주에게 압력을 가함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함 |
기간 | 다양함 (수일 ~ 수주) |
강도 | 사업장 폐쇄 경제 활동 중단 |
정치적 총파업 | |
목표 | 정부 정책 변경 사회 시스템 변화 |
특징 | 광범위한 시민 참여 대규모 시위 동반 |
예시 | 러시아 혁명 1926년 영국 총파업 |
주요 성공 사례 | |
예시 |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폴란드 연대 운동 |
주요 실패 사례 | |
예시 | 프랑스 1968년 5월 총파업 |
각국별 총파업 | |
영국 | 1926년 영국 총파업 |
프랑스 | 프랑스 1968년 5월 총파업 |
폴란드 | 연대 운동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
러시아 | 러시아 혁명 |
미국 | 미국 대공황 시기 파업 |
일본 | 1947년 2월 1일 파업 봄 투쟁 |
관련 용어 | |
관련 용어 | 파업 노동 운동 사회 운동 시민 불복종 |
참고 자료 | |
참고 자료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총파업 옥스퍼드 참조 - 총파업 1914-1918 온라인 백과사전 - 총파업 |
2. 역사
총파업은 19세기 유럽에서 처음 등장하여 노동 운동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 1893년 벨기에에서는 남성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세계 최초의 총파업이 발생했다.
- 1905년 러시아 1905년 혁명
- 1919년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 1920년 독일 컵 폭동
-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 연합군의 루르 점령
- 1925년 중국 5.30 사건
- 1925년 중국 광저우 장항 대파업
- 1926년 영국 총파업
- 1947년 대한민국 2.1 총파업 (강제 중단)
-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
- 1971년 일본 오키나와 11.10 총파업 (오키나와 반환 협정 반대 결의)
- 1975년 일본 쟁의권 파업
- 1991년 소련 8월 쿠데타
-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 2010년 튀니지 재스민 혁명
- 2019년 홍콩 홍콩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반대 운동
연도 | 국가 | 내용 |
---|---|---|
1926년 | 영국 | 영국노동조합회의(TUC) 주도의 총파업 (360만 명)[5][6] |
1946년 | 대한민국 | 노동조합전국평의회 9월 총파업 |
1947년 | 프랑스 | 마셜 플랜 반대 총파업 |
1968년 | 프랑스 | 5월 혁명 |
2009년, 2022년 | 대한민국 |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 한국교육방송협회 노동자들의 이스라엘 방송 기관 폐쇄 반대 총파업 |
2. 1. 초기 개념
19세기 이전에는 총파업과 유사한 형태의 저항은 존재했지만, 체계적인 개념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안식년과 희년, 로마 공화정 시대의 플레브스의 분리 등이 총파업의 전신으로 여겨진다.[5][6]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에티엔 드 라 보에티,[6] 계몽주의 시대의 장 메슬리에,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등이 총파업에 대한 초기 개념을 제시했다.[7] 프랑스 혁명 시기, 장 폴 마라, 실뱅 마레샬, 콩스탕탱 프랑수아 드 샤세뵈프 등은 상인과 기업가뿐만 아니라 산업 노동자와 농장 노동자를 포함하는 파업을 제안했다.[7] 콩스탕탱 프랑수아 드 샤세뵈프는 그의 저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맞서 "사회에 유용한 모든 직업"의 총파업을 제안했다.[8]2. 2. 19세기: 총파업 개념의 발전
19세기 초, 영국의 급진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퀘이커이자 구두 제작자인 윌리엄 벤보는 총파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제안했다.[1] 벤보는 정치 활동으로 체포된 후 개혁주의를 버리고 반권위주의적이며 반교권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2] 노동계급 전국 연합 회의에서 벤보는 개혁 법안의 진행에 불만을 표출하고 정부에 대한 무장 저항을 촉구했다.[3]
1832년 1월, 벤보는 "생산계급의 대규모 국민 휴일과 의회"라는 팸플릿을 통해 총파업을 제안했다.[4] 그는 노동자들이 한 달간 "휴일"을 선포하고, 노동자 평의회를 구성하여 사회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 이 "휴일"은 처음에는 노동자들의 저축으로, 이후에는 부유층의 "기여금"을 징수하여 재정적으로 지원될 것이었다.[6] 팸플릿 발행 몇 달 후, 벤보는 "국민 휴일"의 "예행 연습"으로 10만 명 규모의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7]
개혁 법안 통과로 벤보의 노동계급 전국 연합을 포함한 급진주의 운동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6년 후, 정치 개혁에 대한 환멸이 커지면서 차티스트 운동은 벤보의 "국민 휴일"을 채택했다.[8] 1839년 8월, 차티스트들은 국민 휴일을 실시할 계획이었지만, 벤보의 체포로 중단되었다.[9] 벤보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감옥에서 차티스트 활동을 계속하려 했으나 퍼거스 오코너에 의해 파문된 후 정치 활동을 중단했다.[10]

1842년 4월, 두 번째 차티스트 청원이 영국 의회에서 거부된 후, 최초의 총파업이 발생했다.[11] 이 파업은 스태퍼드셔 탄광에서 시작되어 스코틀랜드에서 남웨일스까지 공장, 제분소, 광산으로 확산되며 더 공정한 임금과 근무 조건을 요구했다.[12] 초기에는 정치적이지 않은 요구였지만, 8월에 차티스트 운동과 연계되면서 혁명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군 개입으로 시위가 진압되고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파업은 강제로 종료되었다.[13]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파업은 1854년 스페인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는 진보적인 시대를 열어 스페인 노동자들에게 여러 시민의 자유를 확대했다.[14] 그러나 새로운 당국이 결사의 자유와 파업을 다시 금지하면서 노동 불안이 커졌고, 이는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1855년 카탈루냐 총파업으로 이어졌다.[15] 수개월간의 파업과 협상 시도 끝에, 레오폴도 오도넬의 쿠데타로 총파업은 진압되고 헌법 초안은 정지되었다.[16]
2. 3. 제1인터내셔널과 총파업 논쟁
국제노동자협회(IWA)는 총파업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지였다. 1868년 브뤼셀 의회에서 세자르 드 파프는 총파업을 전쟁 방지 수단으로 제안했다. 그는 전쟁을 지배 계급이 노동자들을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보았고,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여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1] 칼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주장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2]미하일 바쿠닌은 1868년 브뤼셀 의회에서 총파업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 정치 참여를 거부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터내셔널이 노동조합들이 파업을 혁명적 총파업으로 발전시켜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계파는 국가 전복을 위한 혁명적 총파업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국가 권력을 장악할 정당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4] 1872년 헤이그 의회에서 마르크스는 바쿠닌의 반권위주의 계파를 축출하려 했다.[5]
이에 대한 반응으로 축출된 파벌들은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총파업을 옹호하는 신디칼리즘적 관점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인터내셔널을 파업을 지원하고 혁명적 총파업으로 발전시켜 국가를 전복하고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수립하는 조정 기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1873년 제네바 의회에서 벨기에 대표들은 사회혁명을 위한 전술로 총파업 채택을 제안했고, 주라 연맹은 임금 인상을 위한 소규모 파업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지지했다. 제네바 의회에서의 파업 논의는 아나코-신디칼리즘의 기초를 마련했다.[7]
2. 4. 혁명적 신디칼리즘의 부상
19세기 말, 혁명적 신디칼리즘은 총파업을 혁명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하며 등장했다. 1886년 헤이마켓 사건은 미국에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총파업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노동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1] 프랑스 노동총연맹(CGT)은 총파업을 통해 노동 시간 단축, 임금 인상, 주말 도입 등 노동 조건 개선을 이루어냈다.[2]
1886년 5월 1일, IWPA는 8시간 노동제를 위한 전국적인 총파업을 조직했고, 미국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총파업의 중심지였던 시카고에서는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탄압에 대한 항의가 폭동으로 확대되었다.[1]
유럽의 아나키스트들은 IWPA의 총파업에서 영감을 받아 총파업을 혁명적 수단으로 재고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아나키스트 조셉 토르텔리에르(Joseph Tortelier)가 혁명적 총파업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이탈리아와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에게도 확산되었다. 알버트 파슨스의 아내 루시 파슨스(Lucy Parsons)도 혁명적 총파업을 자신의 강령에 채택했으며, 이는 산업 노동자 세계(IWW)의 창립 원칙이 되었다.[3] 혁명적 총파업을 강령에 최초로 채택한 노조는 프랑스의 노동총연맹(CGT)였다.[4]
20세기 초, 전 세계적으로 총파업이 확산되었으며, 1905년 러시아 혁명, 1909년 스페인 총파업, 1910년 포르투갈 혁명 등 혁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2. 5. 제2인터내셔널과 총파업 논쟁
제2인터내셔널에서도 총파업은 주요 논쟁거리였다.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브 에르베, 에두아르 발랑, 케어 하디 등은 총파업을 지지했지만, 독일 사회민주당 등은 반대했다.[1]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극좌파 회원들은 정치적 양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총파업을 지지했다.[1]
암스테르담 국제 무정부주의자 회의에서는 피에르 모나트와 에리코 말라테스타 사이에 총파업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모나트는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적 총파업을 조직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경제를 가진 무정부 사회 건설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 반면 말라테스타는 총파업이 국가 군대와 맞설 수 없는 "마법의 무기"라며 비판했다.[3]
2. 6. 20세기 이후의 총파업
1926년 영국 총파업은 석탄 산업에서 시작되어 운송 및 철강 부문 등에서 175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으나,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실패했다.[5][6]1968년 5월 혁명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규모 총파업으로, 자세한 내용은 원본 소스에 언급되지 않았다.
IWW는 총파업을 통해 자본가를 대체하고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IWW의 창립 원칙에는 루시 파슨스(Lucy Parsons)의 혁명적 총파업 강령이 포함되었다.[9]
태프트-하틀리법은 요약에 언급되었지만, 원본 소스에서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으므로 생략한다.
연도 | 국가 | 내용 |
---|---|---|
1926년 | 영국 | 영국노동조합회의(TUC) 주도의 총파업 (360만 명) |
1946년 | 대한민국 | 노동조합전국평의회 9월 총파업 |
1947년 | 프랑스 | 마셜 플랜 반대 총파업 |
1968년 | 프랑스 | 5월 혁명 |
2009년, 2022년 | 대한민국 |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 한국교육방송협회 노동자들의 이스라엘 방송 기관 폐쇄 반대 총파업 |
총파업은 목표와 방식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3. 유형
3. 1. 정치 파업
정치 파업은 정부 정책에 대한 항의, 정치 개혁 요구 등을 목표로 한다.[9] 1947년 미국에서는 반노조법인 태프트-하틀리법이 통과된 이후, 총파업은 노동쟁의 연대의 수단에서 사회, 정치, 경제적 저항의 일반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미 의회는 여성 주도의 1946년 오클랜드 총파업 여파로 이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노조 노동자들이 취한 행동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연대 행동과 총파업 자체를 불법으로 만들었다. 태프트-하틀리법 통과 이전에는 총파업이란 여러 노조가 다른 파업 노조와 연대하여 공식적으로 파업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법은 한 노조가 다른 노조를 지지하기 위해 파업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현대에 들어 총파업의 정의와 관행은 노조가 종종 조정하지만 공식적이거나 장기적인 파업이 아닌, 대규모 행동의 주기적인 날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3. 2. 혁명적 파업
혁명적 파업은 자본주의와 국가(정치체)를 사회 혁명을 통해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9] 게르하르트 니마이어(Gerhart Niemeyer)는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혁명적 연습"으로서의 총파업,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5월 1일(국제 노동절)의 1일 시위, 그리고 국가 간 전쟁을 막기 위한 이론적 메커니즘을 혁명적 파업의 다른 형태로 보았다.[10]
랄프 채플린(Ralph Chaplin)과 스티븐 나프트(Stephen Naft)와 같은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자들은 지역적 파업에서 산업 전반의 파업, 전국적 파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적 파업에 이르는 네 가지 수준의 총파업을 확인했다.[11]
3. 3. 기타 유형
게르하르트 니마이어는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혁명적 연습"으로서의 총파업,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인 5월 1일 (국제 노동절) 1일 시위, 국가 간 전쟁을 막기 위한 이론적 메커니즘 등 다양한 총파업 유형을 제시했다.[10]
랄프 채플린과 스티븐 나프트 같은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자들은 지역 파업, 산업 전반 파업, 전국 파업, 혁명적 파업 등 네 가지 수준의 총파업을 구분했다.[10][11]
4. 주요 쟁점
총파업은 노동 운동의 중요한 전략이지만, 그 효과와 정당성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4. 1.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논쟁
제2인터내셔널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선거를 통한 정치적 권리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총파업을 지지한 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적 수단으로 총파업을 옹호했다.[1] 이러한 관점 차이는 1893년 취리히 의회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에서 추방되고, 이후 의회 참석이 금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2]
프랑스의 총노동조합(CGT)과 네덜란드의 전국노동사무국(NAS)의 무정부주의적 노조 대표들은 계속 참여하려 했지만,[3] 1896년 런던 의회에서 폭행을 당한 후, 인터내셔널을 떠났다.[4]
무정부주의자들의 총파업 옹호는 인터내셔널 내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혁명적 총파업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여 싱디칼리스트들과의 인기를 높였다.[5]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총파업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지만,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극좌파 회원들은 정치적 양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총파업을 받아들였다.[6]
인터내셔널에서 완전히 배제된 무정부주의자들은 1907년 암스테르담에서 국제 무정부주의자 회의를 개최했다.[7] 이 회의에서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피에르 모나트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모나트는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적 총파업을 조직하는 데 있어 노동조합의 중심적 역할을 옹호했다.[8] 그러나 말라테스타는 싱디칼리스트들의 계급 환원주의에 반대하며 총파업을 비판했다.[9]
4. 2. 신디칼리즘과 총파업
신디칼리즘은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장악하고 산업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산업노동자 세계 산업 노동 조합(IWW)은 1910년에서 1911년 사이에 총파업을 완전히 받아들였다.[12] IWW 이론에 따르면 총파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가들을 대체하고 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노동자들에게 넘기는 것이다.[12]1911년 뉴욕시에서 있었던 연설에서 IWW 조직자인 빌 헤이우드는 경제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총파업이 정당하다고 믿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자본가들은 이익이 발생하는 한 공장을 계속 운영하지만, 이익을 방해하는 일이 발생하면 파업을 하고 노동 계급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동 계급은 항상 자본가의 재산에 대한 이익을 챙기도록 가르침을 받아왔다고 비판했다.[12]
빌 헤이우드는 산업별 노동 조합주의가 총파업을 가능하게 하고, 총파업이 산업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다.[12] Wobbly 이론에 따르면, 전통적인 파업은 노동자들의 임금, 근무 시간, 근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이러한 파업은 노동자들이 계급 투쟁과 산업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궁극적인 총파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에 대해 스스로 교육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훈련이기도 하다. 최종 총파업 동안 노동자들은 직장을 점거하고 장악하며, 산업 민주주의를 시작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전에 산업을 운영하기 위해 기술 및 관리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12]
노동사학자 필립 S. 포너에 따르면, Wobbly의 산업 민주주의 개념은 IWW 이론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자세히 제시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부 사항은 "사회의 미래 발전"에 맡겨진다. 그러나 산업 민주주의는 "낡은 껍질 안에 세워진 새로운 사회"가 될 것이며, 산업 노동 조합원들은 민주적 원칙에 따라 산업을 운영하도록 스스로 교육하고, 생산 및 유통과 같은 문제는 노동자 자신이 관리할 것이다.[12]
1927년 IWW는 무정부주의자 페르디난도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의 처형에 항의하는 3일간의 전국적인 파업을 촉구했다. 이 촉구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반응은 월센버그 석탄 광산 지역에서 나왔는데, 1,132명의 광부들이 일을 하지 않았고 35명만이 일터로 나갔다. 이러한 참여율은 1927년 콜로라도 석탄 파업으로 직접 이어졌다.
2011년 3월 18일, 산업노동자 세계 산업 노동 조합은 위스콘신 주지사 스콧 워커의 제안된 노동법에 대한 시위에 대한 후속 조치로 총파업을 지지했다. 이는 위스콘신 주 남중부 노동 연맹(SCFL)이 이러한 입법 제안에 대한 대응으로 주 전역 총파업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후였다.[13][14]
5. 한국의 총파업 사례
연도 | 내용 |
---|---|
1946년 | 노동조합전국평의회 9월 총파업 |
2009년 |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리해고 시행에 반대하는 총파업 실시. |
2022년 | 한국교육방송협회 노동자들이 이스라엘 방송 기관 폐쇄에 반대하는 총파업 실시 |
참조
[1]
논문
Democracy's New Song: "Black Reconstruction in America, 1860-1880" and the Melodramatic Imagination
[2]
논문
Rewriting History: The Publication of W. E. B. Du Bois's "Black Reconstruction in America" (1935)
[3]
논문
Black Reconstruction: An Essay toward a History of the Part Which Black Folk Played in the Attempt to Reconstruct Democracy in America, 1860-1880 by W. E. Burghardt Du Bois
[4]
논문
Black Reconstruction: An Essay Toward a History of the Part Which Black Folk Played in the Attempt to Reconstruct Democracy in America, 1860-1880 by W. E. Burghardt Du Bois
[5]
서적
The General Strike: The Politics of Industrial Confl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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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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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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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7
[8]
간행물
Sheet Metal Workers' Journal
Amalgamated Sheet Metal Workers' International Alliance
[9]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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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eenvogu[...]
2022-01-30
[10]
서적
The General Strike
https://archive.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2023-02-20
[11]
서적
The Social General Strike, Debating Club No. 1
1905-06
[12]
간행물
The General Str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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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3-16
[13]
웹사이트
General Strike in Wisconsin!
http://www.iww.org/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201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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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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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least 25 crore workers participated in general strike; some states saw complete shutdown: Trade unions
https://www.deccan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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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ddc.vt.e[...]
20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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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online.wsj.co[...]
201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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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chers strike fuels unrest in polarized Honduras
https://www.sandiego[...]
201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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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www.abc.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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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nisian general strike to cancel international flights, and halt land and sea transpor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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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서 수만명 ‘팔레스타인 지지’ 집회…“가자지구 학살 규탄”
프랑스 ‘긴축 반대’ 총파업 50만명 운집…“부유층 과세, 마크롱 퇴진”
금융노조 ‘주 4.5일제’ 총파업 임박…사쪽 “시기상조·고객불편”
총파업 코앞 다가온 금융노조…26일 은행권 올스톱할까
② 정규직, 그들만의 노동운동 : 절박한 비정규직 고통 외면
경기버스노사 단체교섭 최종 결렬…조정까지 불발 시 다음달 1일 총파업
노란봉투법에 날개 단 ‘귀족노조’…주4.5일제 하자는 금융노조 총파업 결의
금융노조, 끝내 총파업 결의
금융노조, 26일 총파업 결의…4.5일제·5% 임금 인상 등 요구
건설현장서 또 ‘밥그릇 챙기기’ 파워게임 번질라…새 정부와 함께 돌아온 건설노조 [기자24시]
친노동 드라이브 믿고 곳곳서 ‘으름장’...금융 노조도 “주 4.5일 안되면 파업”
"이참에 주4.5일제 밀어붙이자"
프랑스 총리 ‘긴축 재정’ 승부수…의회에 ‘정부 신임 투표’ 요청
4.5일제 시동 건 IBK노조 …“우선 수·금 5시 퇴근” 요구
[표] 외국환율고시표
[표] 당좌거래정지
[단독] ‘성과급 논란’ SK하이닉스, 창사 이래 첫 총파업 투쟁 결의대회 개최
전국 공항 노동자, 여름 휴가철 성수기 앞두고 총파업 예고
“노란봉투법 즉각 처리를” 민주노총, 도심 총파업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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