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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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스파는 1830년 페르난도 7세가 살리카법 폐지를 시도하고, 그의 동생 카를로스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시작된 스페인의 정치 운동이다. 이들은 살리카법에 따라 카를로스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카를리스타 운동을 일으켰고, 1833년부터 1876년까지 세 차례의 카를로스 전쟁을 겪었다. 카를로스파는 "하느님, 조국, 푸에로스, 왕"을 좌우명으로 하며, 가톨릭 신앙, 강한 애국심, 지역 자치, 왕권을 옹호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편에 섰으며, 프랑코 사후에는 쇠퇴했다. 카를로스파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으며, 현재도 카를리스타 정체성을 주장하는 정치 조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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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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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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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지지 대상 |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데 보르본과 그의 후계자들의 스페인 왕위 계승권 주장 |
이념 | 정통주의 반자유주의 반의회주의 보수주의 가톨릭 근본주의 지역주의 농본주의 |
정치적 입장 | 극우 |
역사 | |
창립 | 1833년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데 보르본 카를로스 5세 (스페인) 카를로스 6세 (스페인) 카를로스 7세 (스페인) 하이메 3세 (스페인) 알폰소 카를로스 데 보르본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
관련 단체 | 레케테 전통주의자 공동체 |
언어별 명칭 | |
스페인어 | Carlismo |
카탈루냐어 | Carlisme |
바스크어 | Karlismoa |
2. 기원
카를리즘의 기원은 19세기 초 스페인의 왕위 계승 분쟁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18세기 초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가 들어서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을 제한하는 살리카법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1830년 페르난도 7세는 1830년 국사제도를 통해 살리카 법을 폐지하고 딸 이사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3] 이에 반발한 페르난도 7세의 동생 카를로스 데 몰리나 백작은 살리카 법에 따른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카를리스타 운동을 일으켰다.
나폴레옹 1세 점령 이후, 스페인 정치 세력은 앙시앵 레짐을 지지하는 "절대주의자"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로 나뉘었다.[4] 페르난도 7세의 통치는 이러한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
카를리스타 전쟁 이전 스페인은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으며, 자유주의 정부의 경제 조치(공유지 및 교회 재산 몰수 등)는 소규모 농장의 생존을 위협하고 빈곤을 확산시켰다.[1] 종교 문제 또한 카를리즘 발생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반성직주의 정책은 가톨릭 신자, 특히 농촌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1] 중앙 집권화와 균일한 행정을 추구한 자유주의 정부의 정책은 지역 특수주의 감정을 자극하여, 카를리즘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
2. 1. 왕위 계승 분쟁
18세기 초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가 들어서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을 제한하는 살리카법이 도입되었다. 1830년 페르난도 7세는 1830년 국사제도를 통해 살리카 법을 폐지하고 딸 이사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3] 이에 반발한 페르난도 7세의 동생 카를로스 데 몰리나 백작은 살리카 법에 따른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카를리스타 운동을 일으켰고, 이는 1833년부터 1876년까지 카를로스 전쟁으로 이어졌다.[5]2. 1. 1. 논란이 된 왕위 계승 시스템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아들이 없으면 딸이, 형제가 없으면 자매가 상속받는 남성 선호 장자 상속제를 따랐다. 아라곤 지역은 준 살리카법을 선호했다. 13세기 후반 "7부 법전"은 이러한 상속 규칙을 규정했다.1700년 11월 1일,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서 변화가 생겼다. 프랑스 왕가는 살리카법을 적용해 여성 상속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상속 질서를 준 살리카 시스템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펠리페의 부계 혈통에서 모든 남성이 소멸되지 않는 한, 어떤 여성도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 등 프랑스-스페인 합의를 원치 않는 국가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카를로스 4세는 1789년 칙령으로 전통 질서로 복귀하려 했으나, 1830년 페르디난드 7세가 병에 걸리고 자녀 없이 아내가 임신하면서 상속 문제가 긴급해졌다. 페르난도 7세는 1789년 칙령을 공포, 여자아이여도 왕위를 보장했다. 이로써 이사벨 공주는 페르난드의 형제 인판테 카를로스보다 왕위 계승에서 앞섰다. 인판테 카를로스는 이전까지 추정 상속자였다.
그러나 많은 동시대인(왕의 형제와 방계 부르봉 가문 등)은 상속 변화가 불법이라고 여겼다.[4] 이들은 카를리스타 당을 형성, 인판테 카를로스가 이사벨 2세보다 우선권을 갖는 준 살리카 상속법만을 인정했다.
2. 1. 2. 역사적 연대표
- 1713년 5월 13일: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첫 번째 군주인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의회(코르테스 헤네랄레스)와 함께 "아우토 아코르다도"를 통해 스페인 왕위 계승 질서를 시에테 파르티다스에 명시된 내용에서 변경했다. 이전의 남성 우선 장자 상속 규칙과는 달리, 펠리페 5세는 반 살리카법을 제정하여 자신의 남성 계통에서 내려온 모든 왕위 계승 남성이 단절된 후에만 여성 또는 그녀의 후손의 즉위가 가능하도록 했다.
- 1789년: 카를로스 4세 통치 기간, 코르테스는 전통적인 시에테 파르티다스의 왕위 계승 질서로 복귀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 법은 부르봉 왕가의 방계(시칠리아 분가 및 파르마 분가)의 항의로 인해 공포되지 못했는데, 그들은 이 법이 자신들의 상속권을 침해한다고 여겼다.[1]
- 1812년: 새로운 스페인 헌법은 시에테 파르티다스에 따라 왕위 계승 규칙을 명시했다.[2]
- 1830년 3월 31일: 당시 후사가 없었고 네 번째 부인이 임신 중이던 페르난도 7세는 1789년의 법을 비준하는 1830년 국사제도를 공포하여 펠리페 시대 이전의 왕위 계승 질서를 다시 확립했다.[3]
- 1830년 10월 10일: 미래의 이사벨 2세가 페르난도 7세에게서 태어났다. 여러 궁정 음모 이후, 1832년 국사제도가 최종적으로 승인되었다. 당시까지 추정 상속인이었던 페르난도의 동생인 인판테 돈 카를로스는 자신의 권리를 빼앗겼다고 느껴 포르투갈로 떠났다.[4]
- 1833년–1876년: 카를로스 전쟁[5]

2. 1. 3. 페르난도 7세 사망(1833년) 이후의 정치 지형
나폴레옹 1세 점령 이후, 스페인 정치 세력은 앙시앵 레짐을 지지하는 "절대주의자"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로 나뉘었다.[4] 페르난도 7세의 통치는 이러한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른바 자유주의 삼 년 (1820–1823)은 군사적 쿠데타 이후 1812년 헌법을 복원했지만, 불길한 10년 (1823–1833)이라 불리는 국왕의 절대적인 통치 10년이 뒤따랐다.집권 세력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었다. ''Apostólicos''로 알려진 절대주의자(또는 왕당파)의 급진파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반자유주의자인 몰리나 백작 돈 카를로스를 지지했다. 1832년 10월, 페르난도 7세는 프란시스코 세아 베르무데스 아래 온건 왕당파 정부를 구성하여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아스투리아스 공주 (미래의 이사벨 2세)를 새로운 왕위 계승자로 받아들였다.
2. 2. 사회경제적 요인
카를리스타 전쟁 이전 스페인은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으며, 이는 대륙 아메리카 지방의 상실과 국가 파산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자유주의 정부의 경제 조치(공유지 및 교회 재산 몰수 등)는 소규모 농장의 생존을 위협하고 빈곤을 확산시켰다.[1] 종교 문제 또한 카를리즘 발생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반성직주의 정책은 가톨릭 신자, 특히 농촌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1] 중앙 집권화와 균일한 행정을 추구한 자유주의 정부의 정책은 지역 특수주의 감정을 자극하여, 카를리즘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3. 역사
카를리즘의 역사는 크게 네 단계로 구분된다.
- 카를리스타 전쟁 (1833–1876): 카를리스타가 주로 군사적 수단을 통해 권력을 잡으려 했던 시기로, 카를리즘을 스페인 정치사의 중심 무대에 올려놓았다. 이 시기에 카를리즘은 100년 이상 유지될 문화적, 사회적 형태를 발전시켰다.
- 제1차 카를리스타 전쟁 (1833–1840): 이사벨 2세를 지지하는 섭정 두 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세력과 카를로스 5세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내전이었다. 카를로스파의 목표는 절대 군주제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은 섭정을 지원하여 카를로스파 군대와 맞섰다.
- 스페인 결혼 사건 (1846): 프랑스, 스페인, 영국 사이에서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와 여동생 루이사 페르난다의 결혼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 제2차 카를리스타 전쟁 (1847–1849): 카를로스 6세를 왕위에 올리려는 카탈루냐 봉기였다. 갈리시아에서도 소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이사벨 2세와 카를로스 6세의 결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벌어졌지만, 이사벨 2세는 프란시스코 데 보르본과 결혼했다.
- 1860년 원정과 그 여파: 몬테몰린 백작은 프로나운시미엔토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카를리즘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그의 계모 마리아 테레사 드 브라간자 공주의 도움으로 겨우 구원받았다.
- "영광스러운 혁명" (1868): 이사벨 2세는 진보 혁명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수장 카를로스 7세 아래의 카를리즘은 많은 정치적 가톨릭교도와 보수주의자들의 집결지가 되었으며, 스페인 정부에 대한 주요 우파 야당 세력이 되었다.
- 제3차 카를리스타 전쟁 (1872–1876)
-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 (1936–1975): 군사 훈련을 받은 카를리스트 민병대 레케테스(Requetés)는 1936년 7월 군사 반란과 뒤이은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파(Nationalist faction) 편에 섰다. 마누엘 팔 콘데(Manuel Fal Conde)와 몰라 사이의 갈등으로 카를리스트의 쿠데타 지지 합의가 무산될 뻔했으나, 토마스 도밍게스 아레발로(Tomás Domínguez Arévalo)의 중재로 공화국 정부에 대한 반란 협력이 재개되었다. 팜플로나에서 카를리스트 군단(''tercio'')이 도시를 장악하고, 나바라 거의 전역이 점령되었다. 반군들은 ''레케테스''와 성직자의 참여 속에 잔혹한 탄압을 시작하여 2,857명에서 3,000명이 살해되었다.[11][13] 기푸스코아와 비스카이아에서 카를리스트 부대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좌익 세력과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에게 압도당했다. 1937년, 카를리스트 정치 블록은 FET y de las JONS(Falange)로 통합되어 팔랑헤(Falangism)와 합병되었다. 프랑코 정권 시기 카를리스트 민병대인 ''레케테스(Requetés)''는 스페인 제2공화국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음모를 꾸미는 많은 장군들과 상당한 이념적 차이를 보였다.[10]
- 프랑코 사후 (1975–현재):
- 1977년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서 카를로스파 상원 의원은 한 명이었다.[41]
- 1979년 총선에서 우익 카를로스파는 극우 연합 ''국민 연합''에 통합되어 의회 의석을 확보했지만, 당선된 후보는 카를로스파 출신이 아니었다.[41]
- 그 이후로 카를로스파는 의회 밖에서 활동하며, 시의회 의석만 얻었다.[41]
- 2002년, 카를로스 우고는 왕가의 기록 보관소를 국립 역사 기록 보관소에 기증했다.[42]
- 21세기에는 카를로스파 정체성을 주장하는 세 개의 정치 조직이 있다.[42]
조직명 | 지도자 |
---|---|
전통주의 공생회 | 호세 미겔 감브라 구티에레스 |
전통주의 카를로스파 공생회 | 텔모 알다스 데 라 콰드라-살세도 |
카를로스파 | 헤수스 마리아 아라곤 사마네스 |
3. 1. 카를로스 전쟁 (1833–1876)
카를로스 전쟁(1833-1876)은 카를리스타가 무력을 통해 정권 장악을 시도한 시기이다.- 제1차 카를로스 전쟁 (1833-1840): 이사벨 2세 지지 세력과 카를로스 5세 지지 세력 간의 내전.
- 제2차 카를로스 전쟁 (1847-1849): 카를로스 6세를 왕위에 올리려는 카탈루냐 봉기.
- 1860년 원정과 그 여파: 몬테몰린 백작의 권력 장악 시도 실패.
- 제3차 카를로스 전쟁 (1872-1876): 카를로스 7세의 왕위 쟁취 시도.
3. 1. 1. 공통점
세 차례의 카를로스 전쟁은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발전 패턴을 보인다.# 스페인 전역에서 게릴라 활동이 벌어지는 단계.
# 정규군 부대가 창설되어 영토 저항이 이루어지는 단계. 1847년 전쟁은 이 단계 이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 재래식 방법으로 영토가 안정되어 국가 구조가 창설되는 단계. 어떤 카를로스 전쟁도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각 전쟁의 시작 시점에서 카를로스 측에는 정규군 부대가 없었으며, 세 번째 전쟁만이 계획된 봉기의 결과였다. 첫 번째 전쟁은 양측 모두 매우 잔혹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자유주의 군대는 카를로스 지지자로 의심되는 대부분의 민간인을 학대하여 때로는 말살하려 하기도 했다. 카를리스타들은 종종 자유주의자들을 나폴레옹 군인과 요원들을 대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대했으며, 그 정도가 심하여 국제 열강은 교전 당사자들에게 "엘리엇 조약"과 같은 일부 전쟁법을 준수하도록 강요했다. 잔혹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적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카를로스주의가 첫 번째 전쟁 동안 어느 정도의 영토적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던 지역(나바라, 리오하, 바스크 시골, 내륙 카탈루냐, 북부 발렌시아)은 스페인의 다른 모든 지역에도 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 있었지만, 카를로스주의 역사를 통틀어 주요 지지 세력으로 남았다. 특히 나바라, 아스투리아스, 바스크 지방의 일부 지역에서 카를로스주의는 1960년대 후반까지 상당한 정치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3. 1. 2. 카를리스타 군사 지도자
- 토마스 데 수말라카르게이
- 마누엘 산타 크루스 로이디
- 라몬 카브레라

3. 2.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 (1936–1975)
스페인 제2공화국 시기, 군사 훈련을 받은 카를리스트 민병대 레케테스(Requetés)는 1936년 7월 군사 반란과 뒤이은 스페인 내전에서 자연스럽게 국민파(Nationalist faction) 편에 섰다.[10] 1936년 5월, 몰라 장군(General Mola)은 레케테스(Requetés)의 수장인 이그나시오 발레스테나 아스카라테(Ignacio Baleztena)와 만나 8,400명의 자원병 지원을 제안받았다.[11][12]마누엘 팔 콘데(Manuel Fal Conde)와 몰라 사이의 갈등은 1936년 7월 4일 카를리스트의 쿠데타 지지 합의를 거의 무산시킬 뻔했지만, 토마스 도밍게스 아레발로(Tomás Domínguez Arévalo)의 중재로 공화국 정부에 대한 반란 협력이 재개되었다.
최고 카를리스트 권위자인 알폰소 카를로스 공작은 이 합의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몰라는 이미 봉기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카를리스트 나바라 의회(''Junta Navarra'')와 직접 협상하고 있었다. 7월 19일, 팜플로나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카를리스트 군단(''tercio'')이 도시를 장악했다. 며칠 만에 나바라 거의 전역이 군대와 레케테스(Requetés)에 의해 점령되었다.
반군들은 ''레케테스''와 성직자(나바라 카를리스트의 핵심)의 직접적인 참여 속에, 불편한 자, 온건 진보주의자, 바스크 민족주의 주민과 인물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살해는 2,857명[11]에서 3,000명[13]에 달했으며, 생존자들은 스페인 백색 테러(White Terror)의 끔찍한 사회적 굴욕과 복종을 겪어야 했다.
기푸스코아와 비스카이아에서 카를리스트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군사 쿠데타는 실패했고, 카를리스트 부대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좌익 세력과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에게 압도당했다. 많은 이들이 반군 지역으로 넘어가 안전을 확보하고 알라바와 나바라의 카를리스트 부대에 합류했다. 팜플로나는 북부 전쟁(War in the North)의 반군 기지가 되었다.
1936년 12월 8일, 팔 콘데는 프랑코와의 충돌로 잠시 포르투갈로 떠나야 했다. 1937년 4월 19일, 카를리스트 정치 블록은 친프랑코 성향의 FET y de las JONS(Falange)로 통합되어 팔랑헤(Falangism)와 합병되었다. 새로운 카를리스트 지도자 부르봉-파르마의 자비에르 공자(Prince Xavier of Bourbon-Parma)는 합병에 불만을 품고 새 정당에 가입한 카를리스트들을 비난했다. 그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팔 콘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나바라를 제외한 하위 카를리스트들은 대체로 새 정당 활동에 거리를 두었고, 많은 경우 아예 가입하지 않았다.[14]
3. 2. 1. 전쟁 중 (1936-1939)
스페인 제2공화국 동안 군사 훈련을 받은 카를리스트 민병대 ''레케테스(Requetés)''는 1936년 7월의 반란과 이어진 스페인 내전에서 자연스럽게 국민파(Nationalist faction) 반군 편에 섰다.[10] 1936년 5월, 몰라 장군(General Mola)은 ''레케테스(Requetés)''의 수장인 이그나시오 발레스테나 아스카라테(Ignacio Baleztena)를 만나 8,400명의 자원병이 봉기를 지원하도록 제안했다.[11][12]마누엘 팔 콘데(Manuel Fal Conde)와 몰라 사이의 분열은 1936년 7월 4일 카를리스트가 쿠데타에 충성을 맹세하는 데 거의 합의를 깨뜨릴 뻔했지만, 토마스 도밍게스 아레발로(Tomás Domínguez Arévalo) 로데즈노 백작의 개입으로 합법적인 공화주의 정부에 대한 반란 협력은 회복되었다.
최고 카를리스트 권위자인 알폰소 카를로스 공작은 이 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몰라는 봉기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카를리스트 나바라 의회(''Junta Navarra'')와 직접 협상하고 있었다. 7월 19일, 팜플로나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시내 카를리스트 군단(''tercio'')이 장악했다. 며칠 만에 나바라의 거의 모든 지역이 군대와 ''레케테스(Requetés)''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전선은 없었다.
반군들은 ''레케테스''와 성직자(나바라의 카를리스트 핵심)의 직접적인 참여와 함께, 불편한 자, 온건한 진보주의자, 바스크 민족주의 주민과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잔혹한 탄압을 즉시 시작했다. 후방에서 자행된 살해 행위는 직접적인 사망자 수가 2,857명[11]에서 3,000명[13]에 이르렀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굴욕과 복종의 스페인 백색 테러(White Terror)의 암울한 장면이 이어졌다.
기푸스코아와 비스카이아에서 카를리스트의 전망은 좋지 않았다. 군사 쿠데타는 실패했고, 카를리스트 부대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세력, 즉 좌익 세력과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에게 압도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편으로 건너가 반군 지역에서 안전을 확보했고, 알라바와 나바라의 카를리스트 연대에 합류했다. 팜플로나는 북부 전쟁(War in the North)의 반군 발진 기지가 되었다.
1936년 12월 8일, 팔 콘데는 프랑코와의 주요 충돌 후 잠시 포르투갈로 떠나야 했다. 1937년 4월 19일, 카를리스트 정치 블록은 친프랑코, 포괄적인 민족주의 정당인 ''FET y de las JONS(Falange)''로 통합되어 팔랑헤(Falangism)와 합병되었다. 국민 운동을 떠나기를 꺼렸지만, 합병에 불만을 품은 새로운 카를리스트 지도자 부르봉-파르마의 자비에르 공자(Prince Xavier of Bourbon-Parma)는 새로운 정당에 가입한 카를리스트들을 비난했다. 그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팔 콘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바라를 제외한 하위 카를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정당의 활동에서 거리를 두었고, 많은 경우 전혀 가입하지 않았다.[14]
3. 2. 2. 프랑코 정권
카를리스트 민병대인 ''레케테스(Requetés)''는 스페인 제2공화국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음모를 꾸미는 많은 장군들과 상당한 이념적 차이를 보였다.[10] 1936년 7월의 반란과 이어진 스페인 내전으로, 카를리스트는 자연스럽게, 비록 불안하게나마 국민파(Nationalist faction) 반군 편에 섰다. 몰라 장군(General Mola)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범죄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솔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11][12]1936년 5월, 몰라 장군은 ''레케테스(Requetés)''의 수장인 나바라 출신의 카를리스트 인물인 이그나시오 발레스테나 아스카라테(Ignacio Baleztena)를 만나 8,400명의 자원병이 봉기를 지원하도록 제안했고, 이는 반혁명적 반동으로 변질되었다. 마누엘 팔 콘데(Manuel Fal Conde)와 몰라(기본적으로 팔랑헤당원) 사이의 원칙적인 분열은 1936년 7월 4일 카를리스트가 쿠데타에 충성을 맹세하는 데 거의 합의를 깨뜨릴 뻔했다. 그러나 합법적인 공화주의 정부에 대한 반란 협력은 토마스 도밍게스 아레발로(Tomás Domínguez Arévalo) 로데즈노 백작의 개입으로 회복되었다.
최고 카를리스트 권위자인 알폰소 카를로스 공작은 이 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몰라는 봉기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카를리스트 나바라 의회(''Junta Navarra'')와 직접 협상하고 있었다. 7월 19일, 팜플로나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시내 카를리스트 군단(''tercio'')이 장악했다. 며칠 만에 나바라의 거의 모든 지역이 군대와 ''레케테스(Requetés)''에 의해 점령되었다. 전선은 없었다.
반군들은 ''레케테스''와 성직자(나바라의 카를리스트 핵심)의 직접적인 참여와 함께, 모든 불편한 자, 온건한 진보주의자, 바스크 민족주의 주민과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잔혹한 탄압을 즉시 시작했다. 후방에서 자행된 살해 행위는 직접적인 사망자 수(초법적 처형)가 2,857[11]에서 3,000[13]명에 이르렀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굴욕과 복종의 스페인 백색 테러(White Terror)의 암울한 장면이 이어졌다.
기푸스코아와 비스카이아에서 카를리스트의 전망은 좋지 않았다. 군사 쿠데타는 실패했고, 카를리스트 부대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세력, 즉 좌익 세력과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에게 압도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편으로 건너가 반군 지역에서 안전을 확보했고, 알라바와 나바라의 카를리스트 연대에 합류했다. 팜플로나는 북부 전쟁(War in the North)의 반군 발진 기지가 되었다.
1936년 12월 8일, 팔 콘데는 프랑코와의 주요 충돌 후 잠시 포르투갈로 떠나야 했다. 1937년 4월 19일, 카를리스트 정치 블록은 친프랑코 성향의, 모든것을 포괄하는 민족주의 정당인 ''FET y de las JONS(Falange)''인 통합되어 팔랑헤(Falangism)와 합병되었다. 국민 운동을 떠나기를 꺼렸지만, 합병에 불만을 품은 새로운 카를리스트 지도자 부르봉-파르마의 자비에르 공자(Prince Xavier of Bourbon-Parma)는 새로운 정당에 가입한 카를리스트들을 비난했다. 그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팔 콘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바라를 제외한 하위 카를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정당의 활동에서 거리를 두었고, 많은 경우 전혀 가입하지 않았다.[14]
3. 3. 프랑코 사후 (1975–현재)
1977년 6월 15일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서 카를로스파 상원 의원은 한 명이었는데, 그는 소리아 출신의 기자이자 작가인 피델 카라조로 무소속 후보로 당선되었다.[41] 1979년 총선에서 우익 카를로스파는 극우 연합 ''국민 연합''에 통합되어 마드리드에서 의회 의석을 확보했지만, 당선된 후보는 카를로스파 출신이 아니었다.[41] 그 이후로 카를로스파는 의회 밖에서 활동하며, 시의회 의석만 얻었다.[41]2002년, 카를로스 우고는 왕가의 기록 보관소를 국립 역사 기록 보관소에 기증했는데, 그의 형제인 식스토 엔리케와 모든 카를로스파 분파가 이에 항의했다.[42] 21세기에는 카를로스파 정체성을 주장하는 세 개의 정치 조직이 있다.[42]
조직명 | 지도자 |
---|---|
전통주의 공생회 | 호세 미겔 감브라 구티에레스 |
전통주의 카를로스파 공생회 | 텔모 알다스 데 라 콰드라-살세도 |
카를로스파 | 헤수스 마리아 아라곤 사마네스 |
4. 카를리스타 왕위 계승권자
(카를리스타 주장에 따른 군주 번호)
생몰
(카를로스 5세)
1833–1845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디 파르마 공녀의 차남
마리아 프란시스카 디 포르투갈 왕녀
슬하 3남
1838년
마리아 테레사 디 포르투갈 왕녀
자녀 없음
트리에스테
향년 66세
(카를로스 6세)
1845–1861

카를로스 데 몰리나 백작과 마리아 프란시스카 디 포르투갈 왕녀의 장남
마리아 카롤리나 디 양시칠리아 왕녀
자녀 없음
트리에스테
향년 43세
(후안 3세)
1860–1868

카를로스 데 몰리나 백작과 마리아 프란시스카 디 포르투갈 왕녀의 차남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여대공
슬하 2남
사생아 1남 1녀
호베
향년 65세
(카를로스 7세)
1868–1909

후안 데 몬티손 백작과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여대공의 장남
마르게리타 디 파르마 공녀
슬하 1남 4녀
1894년 4월 28일
베르테 드 로한
자녀 없음
바레세
향년 61세
(하이메 3세)
1909–1931

카를로스 데 마드리드 공작과 마르게리타 디 파르마 공녀의 장남
파리
향년 61세
(알폰소 카를로스 1세)
1931–1936
런던
후안 데 몬티손 백작과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여대공의 차남
마리아 다스 네베스 디 포르투갈 왕녀
슬하 1남 요절
비엔나
향년 8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