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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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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립소는 17세기 트리니다드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이 고된 노동과 소통의 부재 속에서 노예주를 조롱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캉불레 음악을 발전시킨 음악 장르이다. 19세기에는 다양한 요소가 융합되어 현대 칼립소의 형태를 갖추었고, 카니발과 결합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칼립소는 섬의 뉴스 전달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정치적 비판과 사회적 논평을 담아왔다. 20세기 초 녹음 기술의 발전과 함께 국제적으로 확산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붐을 일으켰다. 이후 소카 음악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으며, 여성 칼립소니언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칼립소는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윈드러시 세대의 불만을 조명하는 등 저항과 자유의 노래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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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 (음악)
칼립소 음악
칼립소 왕
칼립소 왕
스타일 기원카이소
칸불레이
문화적 기원19세기 초, 트리니다드 토바고
하위 장르익스템포
베나
멘토
융합 장르처트니
처트니 소카
랩소
가스펠립소
케이던스-립소
스카
스푸지
레게톤
레게
관련 주제카리브 카니발
칼립소니안
카리브 음악 장르 목록
칼립소 텐트
피콩
샹고
오베아
엘 카야오의 칼립소
파생 장르소카

2. 역사

칼립소트리니다드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연대감을 형성하며 시작되었다. 1834년 노예제가 폐지된 후, 칼립소는 카니발 행진 음악으로 자리 잡으며 발전했고, 경연을 통해 음악적으로 성장했다. 초기에는 섬 전체에 뉴스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치 비판적인 가사 때문에 영국 당국의 검열을 받기도 했으나, 비유와 암시를 사용하는 피콩(picong) 방식으로 저항하며 명맥을 이어갔다.[20]

1914년 첫 녹음 이후 칼립소는 황금기를 맞았고, 1920년대에는 '칼립소 텐트'라는 경쟁 무대가 생겨났다. 1930년대 후반 아틸라 더 훈(Attila the Hun), 로어링 라이언(Roaring Lion), 로드 인베이더(Lord Invader) 등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로드 키치너(Lord Kitchener)가 영국에서 활동하며 칼립소 붐을 이끌었고,[21] 1956년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의 "바나나 보트"와 마이티 스패로우(Mighty Sparrow)의 "진 앤 다이나"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대중화되었다. 마이티 스패로우는 칼립소를 더욱 춤추기 좋은 스타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후 등장한 스틸 팬 악기와 1970년대 드럼 머신, 신시사이저 도입 등의 영향으로 칼립소는 소울과 결합하여 1980년대 소카(Soca) 음악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2. 1. 기원과 초기 발전

칼립소는 17세기 트리니다드에서 서아프리카의 카이소와 캉불레 음악에서 유래했다. 이 음악들은 카리브해 섬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이 가져온 것이다.[4]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고향 및 가족과의 모든 연결이 끊어졌고, 서로 대화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들은 칼립소를 통해 노예 주인을 조롱하고 서로 소통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초기 칼립소는 주로 프랑스어 기반 크리올로 불렸으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그리오'라고 불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역할은 '샹튀엘'로, 다시 '칼립소니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대 칼립소는 19세기에 다양한 요소가 융합되면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스커레이드 의식의 노래인 ''라브와'', 프랑스 크리올어 ''벨레'', 그리고 칼린다라는 막대기 싸움에서 부르던 찬트웰 등이 결합되었다. 또한, 음반 녹음 초기에는 베네수엘라의 파세오 음악의 영향도 받았다.[5] 칼립소의 초기 부상은 트리니다드의 노예들이 캉불레 드럼 연주와 음악이 곁들여진 마스커레이드 행렬을 포함한 카니발 문화를 받아들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가 트리니다드에 카니발을 도입했으며, 특히 1834년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카니발에서 열리는 칼립소 경연대회가 큰 인기를 끌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아프리카 노예들은 음악, 즉 칼립소를 통해 소통하며 연대감을 다졌다. 트리니다드의 지배 세력이 프랑스, 스페인, 영국으로 바뀌는 와중에도 이러한 연대는 지속되었다. 노예제 폐지 후 아프리카계 주민들은 카니발 참여를 허용받았고, 칼립소는 카니발 행진 음악으로 자리 잡으며 더욱 발전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 칼립소는 100년 넘게 섬 전체에 뉴스를 퍼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섬 주민들은 칼립소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 여겼다. 칼립소 가사는 섬 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루었으며, 칼립소니언들은 정치 부패와 같은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실천했다. 이에 영국 식민 당국은 검열을 시도했지만, 칼립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열이 심해질수록 칼립소니언들은 비유와 암유를 더욱 정교하게 사용하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러한 칼립소 가사의 날카로운 비판적 성격을 피콩(picong)이라고 부른다.[20]

1914년에 처음으로 칼립소 음반이 녹음되면서 칼립소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고 평가받는다. 1920년대에는 카니발에서의 칼립소 경연이 더욱 치열해졌고, '칼립소 텐트'라고 불리는 임시 무대가 설치되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칼립소니언들이 노래 실력을 겨루며 새로운 리듬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칼립소 텐트는 오늘날 트리니다드 카니발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아틸라 더 훈(Attila the Hun), 로어링 라이언(Roaring Lion), 로드 인베이더(Lord Invader)와 같은 칼립소 가수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칼립소니언들의 이름이 이처럼 화려하고 과장된 경우가 많은 것은, 칼립소 텐트에서 경쟁적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거나 상대를 깎아내리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던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2. 2. 19세기: 카니발과의 결합

현대 칼립소는 19세기에 마스커레이드 의식 노래 ''라브와'', 프랑스 크리올어 ''벨레''와 칼린다 스틱 파이팅 찬트웰 등 다양한 요소가 융합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레코딩 초창기에는 베네수엘라 파세오의 영향도 받았다.[5] 칼립소의 초기 부상은 트리inidad의 아프리카계 노예들이 캉불레 드럼 연주와 음악 마스커레이드 행렬을 포함한 카니발 문화를 받아들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 트리니다드에 카니발이 도입되었고, 특히 1834년 노예제 폐지 이후 카니발에서 열리는 칼립소 경연이 큰 인기를 얻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노예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음악, 즉 칼립소를 통해 소통하고 연대감을 형성했다. 트리니다드의 지배 세력이 프랑스, 스페인, 영국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칼립소는 아프리카계 주민들의 중요한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노예제가 폐지된 후, 이들은 카니발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칼립소는 카니발 행진 음악으로 널리 연주되었다. 카니발에서의 칼립소 경연은 점차 치열해지면서 음악적으로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 칼립소는 100년 이상 섬 전체에 뉴스를 전파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많은 섬 주민들은 칼립소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 여겼다. 칼립소 가사는 섬 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루었으며, 칼립소니언들은 정치 부패와 같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실천했다. 이에 영국 식민 당국은 검열을 시도했지만, 칼립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열이 심해질수록 칼립소니언들은 비유나 암유를 더욱 정교하게 사용하고 비판의 날을 세우며 저항했다. 이러한 칼립소 가사의 공격적인 비판성을 피콩(picong)이라고 부른다.[20]

2. 3. 20세기 초: 녹음과 국제적 확산

최초로 식별 가능한 칼립소 장르의 노래는 1912년 러비 스트링 밴드(Lovey's String Band)가 뉴욕을 방문하여 녹음한 것이다. 1914년에는 두 번째 칼립소 녹음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철공작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샹트웰 줄리안 화이트로즈(Julian Whiterose)가 부른 영어 가사 곡이 최초로 포함되었다. 줄스 심스(Jules Sims)도 보컬 칼립소를 녹음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초기 녹음 대부분은 러비(Lovey)나 라이오넬 벨라스코(Lionel Belasco)의 기악곡이었다.[6] 전시 경제의 제약으로 인해 한동안 주목할 만한 녹음이 없다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이르러 칼립소의 "황금기"가 시작되며 음악의 스타일, 형식, 구절이 확립되었다.

칼립소는 트리니다드 섬 전역에 뉴스를 퍼뜨리는 중요한 수단으로 발전했다. 정치인, 언론인, 공인들은 종종 칼립소 노래의 내용에 대해 토론했으며, 많은 섬 주민들은 칼립소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정보원으로 여겼다. 칼립소니언들은 가사를 통해 섬 생활의 다양한 소식을 전하고 정치적 부패를 비판하는 등, 사실상 언론의 역할을 하며 표현의 자유 경계를 넓혀나갔다.

영국 식민 당국의 검열 시도에도 불구하고, 칼립소니언들은 이중 의미(double entendre)와 같은 기법을 사용하여 검열의 눈을 피해 메시지를 전달하며 표현의 경계를 계속 넓혔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을 비난하는 척하면서 트리니다드 식민 정부의 정책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방식이었다. 성적인 내용, 스캔들, 가십, 정치, 지역 뉴스, 다른 칼립소니언들에 대한 비판(이를 피콩(picong)이라 부른다[20]) 등은 고전 칼립소의 흔한 주제였으며, 이는 오늘날 고전 힙합 음악과 유사한 사회 비판적 기능을 수행했다. 이러한 직설적인 내용 때문에 당시 보수적인 사회 계층으로부터 비난과 반감을 사기도 했다.

검열이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녹음이 폐기되었지만, 실제로는 경쟁 관계에 있던 미국의 데카 레코드(Decca Records)나 RCA의 블루버드 레이블(Bluebird Records) 같은 음반사들이 상대방의 음반이 미국 시장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하며 불공정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측면도 있었다.

포르투갈 이민자 출신의 사업가 에두아르도 데 사 고메스(Eduardo de Sa Gomes)는 칼립소의 초기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포트오브스페인에서 축음기 상점을 운영하며 칼립소를 홍보하고 지역 음악가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1934년 3월, 그는 로어링 라이언과 아틸라 더 훈(Attila the Hun)을 뉴욕으로 보내 녹음하게 했는데, 이들은 해외에서 녹음한 최초의 칼립소니언으로서 칼립소를 서인도 제도 밖으로 알리고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7] 곧이어 로드 인베이더도 뉴욕으로 건너갔고, 그의 노래 "럼 앤 코카콜라(Rum and Coca-Cola)"를 앤드루스 자매(Andrews Sisters)가 커버하여 히트시킨 후 벌어진 긴 법적 분쟁 끝에 뉴욕에 정착했다. 그는 윌모스 후디니(Wilmoth Houdini)와 함께 미국에서 활동하는 주요 칼립소니언이 되었다.

초기 칼립소 중에는 상 휴머니테(Sans Humanitae)처럼 재즈와 유사하게 즉흥 연주 형식을 띤 것도 있었다. 칼립소니언들은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며 사회적 논평을 하거나 서로를 비판했고, "상 휴머니테"(무자비함)를 외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아틸라 더 훈, 로어링 라이언, 로드 인베이더 등 주요 칼립소 스타들이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칼립소 스타 중 한 명인 로드 키치너가 등장했으며, 그는 2000년 사망할 때까지 히트곡을 발표했다. 1944년 앤드루스 자매가 부른 로드 인베이더의 커버곡 "럼 앤 코카콜라"는 당시 트리니다드 주둔 미군 기지로 인한 사회 문제(매춘, 인플레이션 등)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8] 이는 칼립소가 권위주의적인 식민 문화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50년대에 들어 칼립소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1956년, 자메이카계 미국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가 전통 자메이카 멘토 민요를 칼립소 스타일로 편곡한 "바나나 보트 송(Day-O)"을 포함한 앨범 ''칼립소''(Calypso)를 발표하여, 칼립소 음반 최초로 1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그레나다 출신의 마이티 스패로우는 트리니다드 음악 경연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그의 노래 "진 앤 디나(Jean and Dinah)"는 국제적인 히트를 기록했다.[9] 이 노래 역시 트리니다드 차구라마스의 미 해군 기지 폐쇄 이후 발생한 매춘 문제에 대한 사회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1956년에는 합창 지휘자 레너드 드 포어(Leonard De Paur)가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트리니다드와 바베이도스의 전통 크리스마스 음악을 합창 편곡한 칼립소 앨범 ''칼립소 크리스마스''(Calypso Christmas)를 녹음하기도 했다.[10]

칼립소 열풍은 다른 문화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자메이카''(1957)는 벨라폰테 스타일의 상업적 칼립소를 패러디했으며, 1957년에는 벨라폰테가 출연한 영화 ''태양의 섬''(Island in the Sun)을 비롯해 ''칼립소 조''(Calypso Joe), ''칼립소 히트 웨이브''(Calypso Heat Wave), ''밥 걸 고스 칼립소''(Bop Girl Goes Calypso) 등 칼립소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가 제작되었다. 배우 로버트 미첨도 캐피톨 레코드에서 ''칼립소...이즈 라이크 소''(Calypso...Is Like So, 1957) 앨범을 발표했다. 재즈 뮤지션 디지 길레스피는 제임스 무디, 케니 배런과 함께 칼립소 앨범 ''잠보 캐리브''(Jambo Caribe, 1964)를 녹음했으며, 가수 게리 "US" 본즈는 포트오브스페인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1962년에 칼립소 앨범 ''트위스트 업 칼립소''(Twist Up Calypso)를 발표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중화와 소카의 탄생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칼립소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아틸라 더 훈, 로어링 라이언, 로드 인베이더 등이 활동했으며, 그중 로드 키치너는 1940년대 후반 영국으로 이주하여 현지 카리브해 커뮤니티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1950년대 영국 칼립소 붐에 기여했으며 200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하며 히트곡을 발표했다.[21]

1944년 앤드류스 자매가 로드 인베이더의 곡을 커버한 "럼과 코카콜라"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은 당시 트리니다드에 주둔한 미군 기지로 인한 매춘, 인플레이션 등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8] 이는 칼립소가 권위적인 식민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1956년은 칼립소 대중화에 중요한 해였다. 마이티 스패로우는 트리니다드 음악 경연 대회 우승과 함께 "진 앤 디나"로 국제적인 히트를 기록했다.[9] 이 곡 역시 트리니다드 차구라마스의 미 해군 기지 폐쇄 후 매춘 문제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는 이후 "케네디 앤 크루시초프", "마틴 루터 킹" 등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었으며, 카니발 반주곡이었던 칼립소를 더 단순하고 강력한 리듬과 소울풀한 노래로 발전시켜 댄서블한 스타일로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등장은 1962년 트리니다드 독립 이후 카니발 문화의 발전과 함께 칼립소 음악의 변화를 이끌었다. 같은 해, 자메이카계 미국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는 전통 자메이카 민요 "바나나 보트 송"(Day-O)을 칼립소 스타일로 편곡하여 앨범 ''칼립소''에 수록했다. 이 앨범은 1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전 세계적인 칼립소 열풍을 일으켰다. 또한 합창 지휘자 레너드 드 포어는 트리니다드와 바베이도스의 전통 크리스마스 음악을 편곡한 ''칼립소 크리스마스'' 앨범을 발표했다.[10]

칼립소 열풍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자메이카''(1957)와 여러 영화(''태양의 섬'', ''칼립소 조'', ''칼립소 히트 웨이브'', ''밥 걸 고스 칼립소'', 모두 1957년 개봉) 제작으로 이어졌다. 배우 로버트 미첨은 ''칼립소...이즈 라이크 소''(1957) 앨범을, 재즈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는 ''잠보 캐리브''(1964) 앨범을 발표했다. 소울 가수 게리 "US" 본즈도 군 복무 후 ''트위스트 업 칼립소''(1962) 앨범을 내놓았다. 1968년에는 스리랑카의 니티 카나가라트남이 타밀어로 칼립소 스타일 노래를 발표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여성 가수들이 남성 중심의 칼립소계에 진출했다. 칼립소 로즈는 1977년 "Gimme More Tempo"로 트리니다드 로드 마칭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고, 1978년에는 "Come Leh We Jam"으로 '칼립소 킹'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를 계기로 대회 명칭은 '칼립소 모나크'로 변경되었다.[11][12]

1970년대 후반, 칼립소는 동인도 음악,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울, 펑크,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여 소카(Soca)라는 새로운 스타일로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버려진 드럼통으로 만든 악기인 스틸 팬의 등장과 대규모 스틸 밴드의 활성화, 그리고 1970년대에 도입된 드럼 머신신시사이저가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소카는 빠른 템포, 전자 악기 사용, 두드러진 베이스 라인, 춤과 관능을 주제로 한 가사가 특징이었다. 라스 쇼티 I, 마이티 스패로우, 로드 키치너, 칼립소 로즈, 슈퍼 블루, 데이비드 러더 등 많은 칼립소 가수들이 소카 스타일을 받아들였다.[13][14] 이 시기 미국 브루클린은 소카 음악 제작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15]

칼립소는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비틀쥬스''(1988)에서 해리 벨라폰테의 곡들이 사용되면서 다시 주목받았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 공주''(1989)의 주제가 "언더 더 씨"는 아카데미 주제가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칼립소의 매력을 알렸다. 1990년에는 프랑스 전자 음악가 장 미셸 자르가 자크 이브 쿠스토 헌정 앨범 ''쿠스토를 기다리며''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스틸 드럼 밴드와 협업하여 칼립소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한편, 카리브해의 섬 도미니카에서도 칼립소(현지에서는 프랑스 크레올어로 '카이소'(Kaiso)라고도 불림)가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카니발 기간 동안 중요한 음악 장르로 자리 잡았으며, 사회 문제나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16] 도미니카에서는 매년 '칼립소 모나크' 경연 대회가 열리며, 1959년 첫 우승자는 'The Observer'였고, '킹 다이스'가 가장 오랫동안 왕좌를 지켰다. 어린이를 위한 '주니어 모나크' 대회도 열린다.[4]

3. 어원

"칼립소"라는 이름은 원래 "카이소(kaiso)"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는 누군가를 응원하거나 경쟁자를 지지할 때 사용되는 에피크어 "카 이수(ka isu)"("계속해!")와 이비비오어 "카아 이소(kaa iso)"("계속하다, 나아가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1] 트리니다드에는 "카리소(cariso)"라는 용어도 있는데, 이는 "옛날식" 칼립소를 의미한다.[2] "칼립소"라는 용어 자체는 1930년대부터 기록되었다.

한편, 월드 뮤직 네트워크(World Music Network)에서 발행한 ''칼립소와 소카 가이드''의 부록에 실린 존 카울리(John Cowley)의 글 ''카니발, 캉불레, 칼립소: 전통의 형성''에서는 다른 주장을 제시한다. 이 글에 따르면, 칼립소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카루소(carrouseaux)"가 파토아와 영어화 과정을 거치면서 "칼리소(caliso)"로 변형되었고, 최종적으로 "칼립소"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카울리는 "칼립소"라는 단어가 문헌상 처음 언급된 것은 1882년 아베 마세(Abbé Masse)가 쓴 춤에 대한 묘사였다고 덧붙였다.[3]

4. 사회정치적 영향

칼립소 가수들은 칼립소 음악을 사회 정치적 논평을 제공하는 데 사용해 왔다. 특히 트리니다드 토바고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 칼립소는 섬 주민들의 일상적인 고난을 표현하고, 인종적 및 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며, 사회 질서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17] 식민 시대 동안 흑인 하층 계급은 칼립소를 통해 열악한 경제 상황과 차별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냈으며, 이는 종종 음악적 저항의 형태를 띠었다.[1]

1950년대 초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독립 운동 기간과 1962년 독립을 달성하기까지, 칼립소 가사는 영국의 식민 통치를 부도덕하고 억압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독립에 대한 열망과 반제국주의, 아프리카계 주민들의 권한 부여 메시지를 담는 경우가 많았다.[1] Growling Tiger나 로어드 키치너와 같은 가수들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유, 평등, 민주주의의 가치를 노래하거나 이주민들이 겪는 차별을 고발하며 칼립소의 사회적 역할을 보여주었다.[1][18]

1962년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독립한 이후에도 칼립소는 정치적 논평의 중요한 배출구로 기능했다. 새로운 정부에 대한 지지나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마이티 스패로우가 초대 총리 에릭 윌리엄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3] 또한, 정치인들은 칼립소 경연 대회를 통해 정치적 의제를 홍보하고 국민적 통합을 도모하기도 했다. 1953년 이후 국민운동당(PNM)은 칼립소 경연 대회를 조직하며 다양한 사회 계층의 참여를 유도하고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이를 활용했다.[17]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보급되기 전, 칼립소는 섬 전체에 뉴스를 퍼뜨리는 중요한 매체였으며, 많은 섬 주민들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 여겨졌다. 칼립소니언들은 정치 부패와 같은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영국 식민 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칼립소는 비유나 암시를 사용하는 피콩(picong)이라는 기법을 통해 더욱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갔다.[20]

4. 1. 식민지 시대: 저항과 자유의 노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음악으로 소통하기 시작했으며,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지배한 국가가 프랑스, 스페인, 영국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칼립소를 통해 연대감을 강화했다. 1834년 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 흑인들은 카니발 참여가 허용되었고, 칼립소는 카니발의 행진용 음악으로 연주되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 칼립소는 100년 이상 섬에 뉴스를 퍼뜨리는 중요한 수단으로 발전했으며, 많은 섬 주민들은 칼립소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 여겼다. 칼립소 가사는 섬 생활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칼립소니언(칼립소 가수)들은 정치 부패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옹호했다. 영국 당국은 검열을 실시했지만, 칼립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열이 심해질수록 비유나 암유를 사용하고 비판의 날카로움을 더해갔는데, 이러한 공격적인 비판성을 피콩(picong)이라고 한다.[20]

1914년 최초의 칼립소 녹음이 이루어진 시기를 칼립소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1920년대에는 카니발에서의 칼립소 경연이 더욱 치열해져 "칼립소 텐트"라는 가설 무대가 설치되었고, 수많은 칼립소니언들이 이곳에서 노래 실력을 겨루며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현재도 트리니다드 카니발에는 칼립소 텐트가 남아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아틸라 더 훈(Attila the Hun), 로어링 라이언(Roaring Lion), 로드 인베이더(Lord Invader) 등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칼립소 가수로 부상했다. 칼립소니언들의 이름이 화려한 이유는 칼립소 텐트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거나 상대를 깎아내리는 과격한 내용의 가사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식민 시대 동안 칼립소는 사회 정치적 논평의 중요한 도구였다. 특히 트리니다드 토바고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 칼립소 가수들은 음악을 통해 트리니다드에서의 일상적인 고난을 표현하고, 인종적, 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며, 사회 질서에 대한 의견과 섬 주민들의 전반적인 우려를 표명했다.[17] 흑인 하층 계급은 칼립소 음악을 사용하여 열악한 경제 상황과 차별에 항의했으며, 이는 종종 음악적 항의의 형태를 띠었다.[1]

1950년대 초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독립 운동 기간과 1962년 독립을 얻기까지, 칼립소 가사는 종종 영국의 식민 통치를 비판했다. 가사는 카리브해 사람들에게 식민 통치가 부도덕하고 억압적이라고 비판했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 식민 통치 반대,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권한 부여와 같은 메시지를 담았다.[1]

네빌 마르카노, 즉 Growling Tiger로 알려진 칼립소니언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독립을 요구하는 노래로 주목받았다. 그의 노래 "Abraham Lincoln Speech at Gettysburg"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영감을 받아 자유, 평등,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했다.[1] 이 원칙들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민족주의 운동에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그의 가사는 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널리 알려진 칼립소 가수 로어드 키치너 역시 그의 음악에서 정치적인 비판 가사로 유명했다. 키치너는 칼립소를 통해 윈드러시 세대의 불만을 조명했다.[18] 윈드러시 세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증가하는 노동 수요에 부응하여 카리브해 섬들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가족들을 일컫는다.[19] 키치너의 1948년 노래 "Windrush"는 두 가지 버전으로 존재한다. 첫 번째 버전은 영국의 식민 통치에 대한 감사와 찬사를 표현하며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두 번째 버전은 서인도 이민자들이 영국에서 겪는 차별과 문화적 소외를 다루어 카리브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 큰 공감을 얻었다.[1] 키치너의 두 번째 버전 "Windrush"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두 버전의 존재는 칼립소 음악이 사회적 논평의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4. 2. 독립 이후: 정치적 논평과 사회 비판

트리니다드 토바고1962년 독립을 이룬 후에도 칼립소 음악은 정치적, 사회적 논평의 중요한 수단으로 계속 활용되었다. 독립 이전 시기 칼립소 가수들이 영국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노래했던 것처럼[1], 독립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의 정치 상황과 사회 변화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데 사용되었다.

독립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초대 총리인 에릭 윌리엄스가 집권하자, 유명 칼립소 가수 마이티 스패로우는 윌리엄스의 승리를 축하하고 국가의 독립을 기념하는 노래 "William the Conqueror"를 발표했다.[3] 이 노래에서 스패로우는 윌리엄스의 리더십을 칭송하며 새로운 국가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는 정치인은 아니지만, 윌리 형제와 그의 능력 덕분이 아니었다면 트리니다드가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음식과 럼주를 위해 투표하곤 했지만, 요즘은 모든 인도인과 그들을 먹고 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PNM에 투표하고 있다. 작은 에릭을 칭찬하고 기뻐하라. 우리는 트리니다드에 더 나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3]

정치인들 역시 칼립소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특히 칼립소 경연 대회는 정치적 의제를 홍보하고 국민적 통합을 도모하는 장이 되었다. 칼립소 경연 대회의 기원은 노예 해방 이후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7], 1953년 이후 국민운동당(PNM)이 대회의 주요 조직자로 나서면서 정치색을 띠게 되었다.[17] PNM은 다양한 사회 계층의 참여를 유도하여 사회적 분열을 완화하고, 국가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며 국민적 단결을 촉진하고자 했다.[17]

마이티 스패로우는 독립 이후 칼립소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56년 그레나다 출신인 그는 "진 앤 다이나"라는 곡으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케네디 앤 크루시초프(흐루쇼프)", "마틴 루터 킹", "카스트로 이팅 바나나", "더 슬레이브" 등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칼립소를 꾸준히 발표했다. 그는 기존 카니발 행진곡 스타일의 칼립소를 더 단순하고 강력한 리듬과 소울풀한 창법으로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등장은 1962년 트리니다드 독립 이후 카니발 문화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고, 연주되는 칼립소 역시 더욱 춤추기 좋은 스타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음악적 변화는 마이티 스패로우의 영향력과 더불어 다른 요인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버려진 드럼통을 활용한 악기인 스틸 팬이 등장하면서 대규모 스틸 밴드가 활성화되었고, 1970년대에는 드럼 머신신시사이저 같은 전자 악기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칼립소는 1980년대에 소울과 칼립소가 결합된 새로운 장르인 소카로 발전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4. 3. 칼립소 전쟁과 피콩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 칼립소는 섬 전체에 뉴스를 퍼뜨리는 중요한 수단으로 발전했으며, 많은 섬 주민들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 여겨졌다.

칼립소의 가사는 섬 생활의 모든 면을 다루었기 때문에, 칼립소니언들은 정치 부패와 같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이에 영국 식민 당국은 검열을 시행했지만, 칼립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열이 심해질수록 비유나 암유를 사용하는 등 표현 방식이 더욱 교묘해지고 비판의 날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러한 칼립소 가사의 공격적인 비판성을 피콩(picong)이라고 부른다.[20]

1920년대에는 카니발에서 칼립소 경연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칼립소 텐트'라는 가설 무대가 등장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칼립소니언들이 서로 노래 실력을 겨루고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며 칼립소 음악을 발전시켰다. 오늘날에도 트리니다드 카니발에는 칼립소 텐트가 남아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아틸라 더 훈(Attila the Hun), 로어링 라이언(Roaring Lion), 로드 인베이더(Lord Invader)와 같은 칼립소 가수들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칼립소니언들의 이름이 이처럼 화려하고 과장된 경우가 많은 것은, 칼립소 텐트에서 경쟁적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던 문화, 즉 칼립소 전쟁과 관련이 있다.

5. 주요 칼립소니언

칼립소니언들은 단순히 노래하는 가수를 넘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 섬에 뉴스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섬 주민들은 칼립소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 여겼으며, 칼립소 가사는 섬 생활의 모든 면을 다루었다. 특히 정치 부패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비판 정신 때문에 영국 식민 당국의 검열을 받기도 했지만, 칼립소니언들은 비유나 암유를 사용하며 더욱 날카로운 풍자를 이어갔다. 이러한 공격적인 비판성을 피콩(picong)이라고 부른다.[20]

칼립소 텐트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연 속에서 칼립소니언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상대를 깎아내리는 과격한 가사를 노래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아틸라 더 훈(Attila the Hun), 로어링 라이언(Roaring Lion), 로드 인베이더(Lord Invader)처럼 화려하고 위협적인 예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1930년대 후반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대표적인 칼립소 가수들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카리브해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이주했는데, 영국령이었던 트리니다드 출신의 로드 키치너(Lord Kitchener)도 그중 한 명이었다.[21] 그는 1940년대 후반 영국으로 건너가 현지 카리브해 커뮤니티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50년대 영국 내 칼립소 붐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로드 키치너는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1956년에는 칼립소 음악 역사에 중요한 두 인물이 등장했다. 자메이카계 미국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는 전통적인 자메이카 멘토 음악인 '바나나 보트'를 칼립소 스타일로 편곡하여 발표했는데, 이 곡은 전 세계적으로 1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칼립소 음악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그레나다 출신의 마이티 스패로우(Mighty Sparrow)가 '진 앤 다이나'라는 곡으로 데뷔하여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케네디 앤 크루시초프(흐루쇼프)', '마틴 루터 킹', '카스트로 이팅 바나나', '더 슬레이브' 등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칼립소를 다수 발표하며 사회 비판적인 칼립소의 전통을 이어갔다. 또한, 기존의 칼립소보다 더 단순하고 강력한 리듬에 소울풀한 창법을 더하여 음악 스타일의 변화를 이끌었으며, 이는 1962년 트리니다드 토바고 독립 이후 카니발 음악이 더욱 댄서블하게 변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Caribbean English Usage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2] 문서 1986
[3] 웹사이트 Carnival, Canboulay and Calypso: Traditions in the Making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01-09
[4] 웹사이트 Calypso Worldwide https://universaldan[...] 2020-11-27
[5] 웹사이트 Calypso music https://www.mustrad.[...] Musical Traditions 2022-11-21
[6] 웹사이트 Lionel Belasco Artist Biography http://www.allmusic.[...] AllMusic 2022-06-07
[7] 웹사이트 "Roaring Lion (Raphael Arius Kairiyama De Leon AKA Hubert Raphael Charles, 15.6.08 – 11.7.99)" http://www.mustrad.o[...] 2010-12-30
[8] 웹사이트 Consuming the Caribbean https://books.google[...] 201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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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Governing sound : the cultural politics of Trinidad's Carnival musics https://www.worldca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12] 서적 What she go do : women in Afro-Trinidadian music https://www.worldcat[...] 2016
[13] 서적 Carnival Music in Trinidad: Experience, Music, Expressing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4] 서적 Governing sound : the cultural politics of Trinidad's Carnival musics https://www.worldca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15] 서적 Jump up! Caribbean Carnival Music in New York City https://www.worldcat[...]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16] 간행물 Soca http://dx.doi.org/10[...]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7] 서적 Revisiting Music Theory: a guide to the practice 2007
[18] 웹사이트 Calypso and the birth of British Black Music https://www.bl.uk/wi[...]
[19] 논문 The Windrush generation 2018
[20] 웹사이트 http://journals.open[...]
[21] 웹사이트 http://www.discog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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