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오친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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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로드 오친렉은 1884년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 육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영국령 인도 육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여러 지휘관을 거쳐 중동 사령관, 인도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 전역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지휘했으며,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해임되었다. 이후 인도군 총사령관으로서 인도 분할을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1946년 원수로 진급했다. 오친렉은 1981년 모로코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은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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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오친렉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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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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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The Auk (오크) |
출생일 | 1884년 6월 21일 |
출생지 | 잉글랜드 햄프셔 올더숏 |
사망일 | 1981년 3월 23일 |
사망지 | 모로코 마라케시 |
소속 | 영국 |
군종 | 영국령 인도 제국군 인도군 파키스탄군 |
복무 기간 | 1904년–1947년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병적 번호 | 115611 |
소속 부대 | 제62 펀자브 연대 |
지휘 경력 | |
주요 지휘 | 인도 및 파키스탄 최고 사령관 (1947–1948) 인도 주둔군 사령관 (1941, 1943–1947) 중동 사령부 (1941–1942) 영국 남부 사령부 (1940) 제5 군단 (1940) 북부 노르웨이 사령관 (1940) 제4 군단 (1940) 제3 인도 보병 사단 (1939) 메러트 지구 (1938) 페샤와르 여단 (1933–1936) 제1 펀자브 연대 1대대 (1929–1930) |
주요 전투 | |
제1차 세계 대전 | 메소포타미아 전역 한나 전투 제2차 쿠트 전투 바그다드 함락 |
기타 전투 | 모흐만드 전역 |
제2차 세계 대전 | 노르웨이 전역 북아프리카 전역 |
훈장 | |
훈장 내역 | 바스 훈장 그랜드 크로스 기사 인도 제국 훈장 그랜드 크로스 기사 인도의 별 훈장 컴패니언 수훈 훈장 대영 제국 훈장 오피서 무공훈장 (3회) 레지옹 오브 메리트 최고 사령관 (미국) 비르투티 밀리타리 (폴란드) 네팔의 별 훈장 (네팔) 성 올라프 훈장 그랜드 크로스 기사 (노르웨이) 군사 십자 훈장 (체코슬로바키아) 전쟁 십자 훈장 (프랑스) |
기타 정보 | |
추가 정보 | 제1 펀자브 연대 1대대 명예 연대장 (1933년 1월) 로열 이니스킬링 퓨질리어 명예 연대장 (1941년 4월) 제4 봄베이 그레네이더 1대대 명예 연대장 (1939년 7월) 제4 봄베이 그레네이더 명예 연대장 (1944년 5월) 제1 펀자브 연대 명예 연대장 (1947년) |
2. 초기 생애 및 경력
클로드 오친렉은 어린 시절 영국 육군 왕립 기병 포병대 대령인 아버지 존 클로드 알렉산더 오친렉을 따라 영국령 인도 제국의 방갈로르에서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키웠다.[20] 1892년 아버지 사망 후 영국으로 돌아와 크로우손 이글 하우스 스쿨과 웰링턴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20]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03년 인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21]
1904년 제62 펀자비 연대에 배속된 오친렉은 여러 인도 언어를 배우고 현지 병사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문화와 관습을 익혔다.[22][23] 1905년 소위로 진급 후, 티베트와 시킴에서 복무했고, 1907년 바라나시에서 디프테리아를 앓기도 했다.[20] 1909년 바라나시로 돌아와 제62 펀자비 연대 부관이 되었고, 1912년 대위로 진급했다.[25] 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26]
2. 1. 출생 및 가정 환경
클로드 오친렉은 1884년 6월 21일 햄프셔 앨더숏에서 존 클로드 알렉산더 오친렉과 메리 엘리너 (에어) 오친렉의 아들로 태어났다.[20] 그의 아버지 영국 육군 왕립 기병 포병대 대령은 어린 클로드를 영국령 인도 제국의 방갈로르로 데려갔다. 오친렉은 방갈로르에서 평생 지속될 조국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1892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20]2. 2. 교육 및 군 입문
클로드 오친렉은 앨더숏 햄프셔 빅토리아 로드 89번지에서 존 클로드 알렉산더 오친렉과 메리 엘리너(에어) 오친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영국 육군 왕립 기병 포병대 대령은 어린 클로드를 영국령 인도 제국 방갈로르로 데려갔다. 오친렉은 이곳에서 평생 지속될 조국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20] 1892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영국으로 돌아온 오친렉은 크로우손 이글 하우스 스쿨을 거쳐 장학금을 받고 웰링턴 칼리지에 다녔다.[20] 이후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903년 1월 21일 인도 육군에서 보직이 없는 소위로 임관했으며,[21] 1904년 4월 제62 펀자비 연대에 배속되었다.[20] 그는 곧 여러 인도 언어를 배웠고,[22] 병사들과 유창하게 대화하며 현지 방언과 관습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이러한 친숙함은 그의 성격에 의해 강화된 지속적인 상호 존중을 낳았다.[23]1905년 4월 21일 소위로 진급한[24] 오친렉은 이후 2년 동안 티베트와 시킴에서 복무한 후 1907년 바라나시로 이동하여 디프테리아에 걸렸다.[20] 앨더숏에서 로열 이니스킬링 퓨질리어스에서 잠시 복무한 후 1909년 바라나시로 돌아와 제62 펀자비 연대의 부관이 되었으며, 1912년 1월 21일 대위로 진급했다.[25] 오친렉은 활발한 프리메이슨이었다.[26]
2. 3. 인도에서의 초기 군 생활
앨더숏 햄프셔 빅토리아 로드 89번지에서 존 클로드 알렉산더 오친렉과 메리 엘리너(에어) 오친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영국 육군 왕립 기병 포병대 대령은 어린 클로드를 영국령 인도 제국 방갈로르로 데려갔다. 오친렉은 이곳에서 평생 지속될 조국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20] 1892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영국으로 돌아온 오친렉은 크로우손 이글 하우스 스쿨을 거쳐 장학금을 받고 웰링턴 칼리지에 다녔다.[20] 이후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1903년 1월 21일 인도 육군에서 보직이 없는 소위로 임관했으며,[21] 1904년 4월 제62 펀자비 연대에 배속되었다.[20] 그는 곧 여러 인도 언어를 배웠고,[22] 병사들과 유창하게 대화하며 현지 방언과 관습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이러한 친숙함은 그의 성격에 의해 강화된 지속적인 상호 존중을 낳았다.[23]1905년 4월 21일 소위로 진급했으며,[24] 이후 2년 동안 티베트와 시킴에서 복무한 후 1907년 바라나시로 이동하여 디프테리아에 걸렸다.[20] 앨더숏 로열 이니스킬링 퓨질리어스에서 잠시 복무한 후 1909년 바라나시로 돌아와 제62 펀자비 연대 부관이 되었으며, 1912년 1월 21일 대위로 진급했다.[25] 오친렉은 활발한 프리메이슨이었다.[26]
3. 제1차 세계 대전
오친렉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그의 연대와 함께 수에즈 운하 방어에 투입되었다. 1915년 2월 이스마일리아에서 튀르크군을 상대로 한 작전에 참여했고,[20] 같은 해 7월에는 튀르크의 위협에 맞서 아덴으로 이동했다.[20] 1915년 12월 31일, 62 펀자비 연대가 소속된 인도 제6보병 사단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위해 바스라에 상륙했다.[20] 1916년 7월, 오친렉은 소령으로 진급하여 대대 부지휘관이 되었고,[27] 같은 해 1월 한나 전투에서 튀르크군을 상대로 벌인 공격에 참여했다. 그는 이 작전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영국 장교 중 한 명이었다.[20]
1917년 2월, 오친렉은 대대 지휘관 대리가 되었고, 쿠트 제2차 전투와 바그다드 함락에서 연대를 지휘했다.[20] 그는 군사 보고서에 언급되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공적으로 1917년 우수 봉사 훈장을 받았다.[28] 이후 1918년 1월 21일 소령으로 정식 진급했고,[29] 1919년 5월 23일 임시 중령,[30] 1919년 11월 15일에는 "남부 및 중앙 쿠르디스탄에서의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명예 계급 중령으로 진급했다.[31]
3. 1. 참전 및 초기 전투
오친렉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그의 연대와 함께 수에즈 운하를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1915년 2월, 그는 튀르크군을 상대로 이스마일리아에서 작전에 참여했다.[20] 그의 연대는 1915년 7월, 튀르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아덴으로 이동했다.[20] 62 펀자비 연대가 소속된 인도 제6보병 사단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위해 1915년 12월 31일 바스라에 상륙했다.[20] 1916년 7월, 오친렉은 소령으로 진급하여 그의 대대 부지휘관이 되었다.[27] 그는 1916년 1월 한나 전투에서 튀르크군을 상대로 일련의 무의미한 공격에 참여했으며, 이 작전에서 살아남은 그의 연대 내 몇 안 되는 영국 장교 중 한 명이었다.[20]그는 1917년 2월에 그의 대대 지휘관 대리가 되었고, 1917년 2월 쿠트 제2차 전투와 1917년 3월 바그다드 함락에서 그의 연대를 이끌었다.[20] 그는 군사 보고서에 언급되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공적으로 1917년에 우수 봉사 훈장을 받았으며,[28] 1918년 1월 21일 소령으로 정식 진급했고,[29] 1919년 5월 23일 임시 중령으로,[30] 메소포타미아 원정군 총사령관의 추천으로 "남부 및 중앙 쿠르디스탄에서의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1919년 11월 15일 명예 계급 중령으로 진급했다.[31]
3. 2. 메소포타미아 전역
오친렉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그의 연대와 함께 수에즈 운하를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1915년 2월, 그는 튀르크군을 상대로 이스마일리아에서 작전에 참여했다.[20] 그의 연대는 1915년 7월, 튀르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아덴으로 이동했다.[20] 1915년 12월 31일, 62 펀자비 연대가 소속된 인도 제6보병 사단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위해 바스라에 상륙했다.[20] 1916년 7월, 오친렉은 소령으로 진급하여 그의 대대 부지휘관이 되었다.[27] 그는 1916년 1월 한나 전투에서 튀르크군을 상대로 일련의 무의미한 공격에 참여했으며, 이 작전에서 살아남은 그의 연대 내 몇 안 되는 영국 장교 중 한 명이었다.[20]1917년 2월, 그는 그의 대대 지휘관 대리가 되었고, 쿠트 제2차 전투와 바그다드 함락에서 그의 연대를 이끌었다.[20] 그는 군사 보고서에 언급되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공적으로 1917년에 우수 봉사 훈장을 받았으며,[28] 1918년 1월 21일 소령으로 정식 진급했고,[29] 1919년 5월 23일 임시 중령,[30] 1919년 11월 15일에는 메소포타미아 원정군 총사령관의 추천으로 "남부 및 중앙 쿠르디스탄에서의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명예 계급 중령으로 진급했다.[31]
3. 3. 쿠트 전투와 바그다드 함락
오친렉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그의 연대와 함께 수에즈 운하를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1915년 2월, 그는 튀르크군을 상대로 이스마일리아에서 작전에 참여했다.[20] 그의 연대는 1915년 7월, 튀르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아덴으로 이동했다.[20] 62 펀자비 연대가 소속된 인도 제6보병 사단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위해 1915년 12월 31일 바스라에 상륙했다.[20] 1916년 7월, 오친렉은 소령으로 진급하여 그의 대대 부지휘관이 되었다.[27] 그는 1916년 1월 한나 전투에서 튀르크군을 상대로 일련의 무의미한 공격에 참여했으며, 이 작전에서 살아남은 그의 연대 내 몇 안 되는 영국 장교 중 한 명이었다.[20]그는 1917년 2월에 그의 대대 지휘관 대리가 되었고, 1917년 2월 쿠트 제2차 전투와 1917년 3월 바그다드 함락에서 그의 연대를 이끌었다.[20] 그는 군사 보고서에 언급되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공적으로 1917년에 우수 봉사 훈장을 받았으며,[28] 1918년 1월 21일 소령으로 정식 진급했고,[29] 1919년 5월 23일 임시 중령으로,[30] 메소포타미아 원정군 총사령관의 추천으로 "남부 및 중앙 쿠르디스탄에서의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1919년 11월 15일 명예 계급 중령으로 진급했다.[31]
4. 전간기
오친렉은 1920년부터 1921년까지 퀘타 참모대학에서 수학했고,[28] 1921년에는 제시 스튜어트와 결혼했다.[32] 1923년 2월 인도 육군 본부에서 임시 부참모장으로 임명된 후, 1925년 9월 제1 펀자브 연대에서 부사령관이 되었다.[28] 1927년에 제국 국방 대학에서 수학했고,[34] 1929년 1월 21일 정식 중령으로 진급한 후,[34] 자신의 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28] 1930년 2월 1일, 1923년 11월 15일 자로 대령으로 진급했으며,[35] 1930년 2월부터 1933년 4월까지 퀘타 참모대학의 교관으로 재직했다.[36][37]
1933년 7월 1일에 임시 준장으로 진급했고,[38] 페샤와르 여단을 지휘했는데, 7월에서 10월 사이에 있었던 모흐만 및 바자우르 작전 기간 동안 인접한 부족 지역의 평정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지휘 기간 동안 보고서에 언급되었다.[8] 1935년 8월 제2차 모흐만 작전에서 두 번째 징벌 원정을 이끌었고, 이 공로로 다시 보고서에 언급되었으며, 1935년 11월 30일 소장으로 진급했고,[39] 1936년 5월 8일 인도 성훈 기사단으로 임명되었다.[7]
1936년 4월 여단 지휘를 떠난 오친렉은 1936년 9월까지 (반액 급여로) 실업자 명단에 올랐다가,[40] 델리에서 참모차장 겸 참모부장으로 임명되었다.[41] 그는 1938년 7월 인도 메루트 지구를 지휘하게 되었다.[42] 1938년 오친렉은 영국령 인도 육군의 현대화, 구성 및 재장비를 고려하는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위원회의 권고안은 1939년 언리 채트필드의 채트필드 보고서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보고서는 인도 육군의 변혁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인도 육군은 1939년 183,000명에서 전쟁이 끝날 무렵 2,250,000명으로 증가했다.[43]
4. 1. 참모 대학 및 결혼
오친렉은 1920년부터 1921년까지 퀘타 참모대학에서 공부했다.[28] 그는 동기생 대부분은 물론 일부 교관보다도 계급이 높았다. 그는 과정을 우수하게 통과했지만, 대학의 교육 방식이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부족했다고 평가했던 보급 및 행정 문제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1921년, 오친렉은 제시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제시 스튜어트는 1900년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서부 해안을 운항하는 블루 퍼넬 라인의 책임자였던 알렉산더 스튜어트의 딸이었다. 알렉산더가 1919년경 사망하자, 제시의 어머니는 제시와 쌍둥이 형제 앨런, 남동생 헵번을 데리고 페르셔의 이너해든에 있는 가족 영지로 돌아갔다. 당시 인도에서 휴가를 나온 오친렉은 프랑스 리비에라의 그라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테니스 코트에서 제시를 만났다. 활기차고 푸른 눈을 가진 미인이었던 제시는 오친렉보다 16살 어렸지만, 인도에서의 생활에 쉽게 적응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5개월 만에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32][33]
4. 2. 인도 육군 본부 및 연대 복무
오친렉은 1920년부터 1921년까지 퀘타 참모대학에서 교육받았다.[28] 그는 동료 학생 대부분과 일부 교직원보다 계급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우수하게 통과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의 교육 방식이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보급 및 행정 문제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32] 1921년에 제시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제시는 미국인 사업가의 딸로, 오친렉은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그녀를 만났다. 제시는 오친렉보다 16살 연하였지만 인도 생활에 잘 적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33]1923년 2월, 오친렉은 인도 육군 본부에서 임시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5년 9월에는 제1 펀자브 연대의 부사령관이 되었다.[28] 1927년 제국 국방 대학에서 수학한 후,[34] 1929년에 자신의 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28] 1930년부터 1933년까지 퀘타 참모대학의 교관으로 재직했다.[36][37]
1933년, 오친렉은 임시 준장으로 진급하여 페샤와르 여단을 지휘했다.[38] 그는 모흐만 및 바자우르 작전, 제2차 모흐만 작전 등에서 부족 평정 작전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보고서에 언급되었다.[8] 1935년 소장으로 진급했으며,[39] 1936년에는 인도 성훈 기사단으로 임명되었다.[7]
1936년, 오친렉은 참모차장 겸 참모부장으로 임명되었다.[41] 1938년에는 인도 메루트 지구를 지휘하게 되었다.[42] 같은 해, 그는 영국령 인도 육군의 현대화, 구성 및 재장비를 고려하는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위원회의 권고안은 1939년 채트필드 보고서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보고서는 인도 육군을 1939년 183,000명에서 전쟁이 끝날 무렵 2,250,000명으로 증강하는 변혁을 가져왔다.[43]
4. 3. 퀘타 참모대학 교관 및 여단장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오친렉은 퀘타 참모대학에서 공부했다.[28] 그는 이 대학의 교육 방식이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보급 및 행정 문제를 소홀히 다룬다고 비판했다.[32] 1921년 오친렉은 제시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제시는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 출신으로, 오친렉보다 16살 어렸지만 인도 생활에 잘 적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33]1927년 제국 국방 대학을 졸업하고, 1929년 1월 21일 정식 중령으로 진급한 후,[34] 자신의 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28] 1930년 2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930년 2월부터 1933년 4월까지 퀘타 참모대학의 교관으로 재직했다.[36][37]
1933년 7월 1일 임시 준장으로 진급한 오친렉은[38] 페샤와르 여단을 지휘하며, 모흐만 및 바자우르 작전에 참여하여 보고서에 언급되었다.[8] 1935년 제2차 모흐만 작전을 이끌었고, 이 공로로 다시 보고서에 언급되었으며, 1935년 11월 30일 소장으로 진급했다.[39]
4. 4. 인도 육군 현대화 위원회
1938년 오친렉은 영국령 인도 육군의 현대화, 구성 및 재장비를 고려하는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의 권고안은 1939년 언리 채트필드의 채트필드 보고서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보고서는 인도 육군의 변혁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인도 육군은 1939년 183,000명에서 전쟁이 끝날 무렵 2,250,000명으로 증가했다.[43]5. 제2차 세계 대전
오친렉은 1940년 6월 12일 그리녹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스 공방전은 거의 종결 단계였고,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BEF) 대부분은 덩케르크 철수를 통해 덩케르크 항구에서 철수했으며, 프랑스는 며칠 안에 항복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관심은 곧 독일의 침공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영국 방어에 쏠렸다(바다사자 작전 참조).
6월 중순, 오친렉은 제5군단 지휘를 맡았으며, 남부 사령부에서 앨런 브룩 경 중장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몇 주 후 브룩이 아이언사이드 경의 뒤를 이어 본토군 총사령관이 되면서, 오친렉은 남부 사령부 사령관이 되어[47] 예상되는 침공이 있을 남부 잉글랜드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이 제5군단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인도 육군과 장교에 대한 경멸 때문에 오친렉을 몹시 싫어했다. 몽고메리는 오친렉을 거치지 않고 제5군단 관련 문제에 대해 직접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는 등 불복종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동을 했다.[46] 오친렉은 12월에 인도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46][47]
1940년 12월 26일, 오친렉은 정식 대장으로 진급했고,[49] 1941년 1월 인도로 돌아와 인도 총독 행정 위원회에 임명되었고,[50] 국왕의 부관장으로 임명되었다.[51]
1941년 4월, 하바니야 공군기지는 라시드 알리의 친추축 정권의 위협을 받았다. 중동 사령부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개입을 꺼렸지만, 오친렉은 단호하게 행동하여 킹스 오운 로열 연대 (랭커스터) 1대대를 공중으로 하바니야로 보내고 제10인도보병사단을 해상으로 바스라로 수송했다. 영국-이라크 전쟁은 5월 18일 사실상 끝났다.[53]
1941년 7월, 오친렉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을 이어 중동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54] 중동 사령관으로서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중동 지역까지 책임졌다. 1941년 11월 서부 사막에서 십자군 작전을 개시하여 토브루크 수비대를 구출하고 롬멜을 엘 아게일라로 철수시켰다. 오친렉은 적이 패배했다고 믿었지만, 추축군은 재편성 후 영국군을 공격하여 가잘라 지역으로 후퇴시켰다.[57]
1942년 5월 26일 롬멜의 가잘라 전투 공격으로 영국군은 큰 패배를 겪었고, 토브루크는 1942년 6월 21일 추축군에 함락되었다.[61] 6월 24일, 오친렉은 닐 리치의 부대 지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고 제8군을 직접 지휘했다. 머사 마트루 방어 계획을 버리고 엘 알라메인으로 철수하여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이탈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반격은 제대로 구상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2]
오친렉은 부적합한 고위 지휘관 임명과 잦은 지휘 체계 내 개인적 충돌로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군과 자치령 군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비판받았다. 윈스턴 처칠 총리의 끊임없는 정치적 간섭과 공격 요구에 시달렸고, 1942년 8월 해럴드 알렉산더 장군으로 교체되었다.[63][64]
처칠은 오친렉에게 페르시아-이라크 사령부 지휘관직을 제안했지만, 오친렉은 거절하고 인도에 돌아가 1943년 6월 다시 인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거의 1년 동안 "실직 상태"로 지냈다.[67]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이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대일본전 수행 책임은 인도 사령관에서 새로 창설된 동남아시아 사령부로 이관되었다. 마운트배튼 경이 도착한 후, 오친렉은 인도를 기지로 구축하는 책임을 맡았고, 제14군에 대한 보급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69] 윌리엄 슬림 경은 오친렉과 인도 육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제14군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70]
5. 1. 노르웨이 전역 (1940)
오친렉은 인도 제3보병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1940년 1월 영국으로 소환되어 제4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는 인도 육군 장교가 지휘한 유일한 사례였다.[44] 그는 1940년 2월 1일에 중장 대리로 승진했으며,[45] 1940년 3월 16일에는 정식 중장 계급을 받았다.[46] 1940년 5월 오친렉은 노르웨이 전역 동안 영국-프랑스 지상군을 지휘하게 되었지만,[44] 이 군사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46]
5. 2. 영국 본토 방어 (1940)
전쟁 발발과 함께 오친렉은 인도 제3보병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1940년 1월 영국으로 소환되어 제4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는 인도 육군 장교가 지휘한 유일한 사례였다.[44] 1940년 2월 1일에 중장 대리로 승진했으며,[45] 1940년 3월 16일에는 정식 중장 계급을 받았다.[46] 1940년 5월 오친렉은 노르웨이 전역 동안 영국-프랑스 지상군을 지휘하게 되었지만,[44] 이 군사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46]
오친렉은 노르웨이 함락 이후 6월 12일 그리녹에 도착했다. 그 즈음 프랑스 공방전은 거의 종결 단계였으며,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BEF)의 대부분은 덩케르크 철수를 통해 덩케르크 항구에서 철수했고, 프랑스는 며칠 안에 항복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관심은 곧 독일의 침공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영국 방어에 쏠렸다(바다사자 작전 참조). 6월 중순, 그는 최근 창설된 제5군단의 지휘를 맡았으며, 당시 남부 사령부에서 앨런 브룩 경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그리 길지 않았는데, 불과 몇 주 후에 브룩이 아이언사이드 경을 본토군 총사령관으로 승계하면서 오친렉은 브룩의 뒤를 이어 남부 사령부 사령관이 되었고,[47] 예상되는 침공이 있을 남부 잉글랜드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최근 공석이 된 제5군단은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이 맡게 되었는데, 그는 인도 육군과 장교에 대한 경멸 때문에 오친렉을 몹시 싫어했다. 두 미래의 야전 원수 사이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으며, 몽고메리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몽고메리의 이후 몇 주, 몇 달 동안의 많은 행동들은 불복종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히 몽고메리가 오친렉을 거치지 않고 제5군단으로 전출입되는 장교 및 병사 문제에 대해 직접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한 사건이 두드러진다.[46] 오친렉은 12월에 그의 친구 캐슬스 경 장군을 이어 인도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이러한 행동을 더 이상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5. 3. 인도 및 이라크 (1941)
Claude Auchinleck영어은 1940년 12월 26일에 정식 대장으로 진급했고,[49] 1941년 1월에 인도로 돌아와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이 직책에서 그는 인도 총독의 행정 위원회에 임명되었고,[50] 국왕의 부관장으로 임명되었다.[51] 그는 종전 후까지 이 의례적인 직책을 유지했다.[52]1941년 4월, 하바니야 공군기지는 라시드 알리의 친추축 정권의 위협을 받았다. 이 대규모 영국 공군 기지는 이라크의 바그다드 서쪽에 있었고, 중동 사령부 사령관인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서부 사막과 그리스에서의 긴급한 임무 때문에 윈스턴 처칠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입을 꺼렸다. 그러나 오친렉은 단호하게 행동하여 킹스 오운 로열 연대 (랭커스터) 1대대를 공중으로 하바니야로 보내고 제10인도보병사단을 해상으로 바스라로 수송했다. 런던은 웨이벌에게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구원 부대인 ''하브포스''를 보낼 것을 설득했지만, 5월 18일 하바니야에 도착했을 때 영국-이라크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53]
5. 4. 북아프리카 전역 (1941-1942)
1942년 5월 26일, 롬멜의 가잘라 전투 공격은 영국군에게 상당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리치와 그의 군단 지휘관들의 초기 배치와 이후 연합군 부대 운용 및 조정 미숙으로 제8군은 이집트로 후퇴했고, 토브루크는 1942년 6월 21일 추축군에 함락되었다.[61]1942년 6월 24일, 오친렉은 닐 리치의 부대 지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고 제8군을 직접 지휘했다. 그는 머사 마트루 방어 계획을 버리고 엘 알라메인에서 지연전을 펼치며 더 방어하기 쉬운 위치로 철수했다.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오친렉은 지형과 신병을 활용하여 지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병력과 물자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반격은 제대로 구상되지 않고 조정도 미흡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2]
"오크"로 알려진 오친렉은 부적합한 고위 지휘관 임명과 잦은 지휘 체계 내 개인적 충돌로 어려움을 겪었다. 인도군 장교 출신으로 영국군과 자치령 군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비판받았고, 1942년 7월에는 자치령 지휘관들의 신뢰를 잃고 영국 지휘관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웨이벌, 몽고메리와 마찬가지로 오친렉은 처칠 총리의 끊임없는 정치적 간섭과 공격 요구에 시달렸다. 처칠은 횃불 작전 이전 승리를 원하며 압박했고, 1942년 8월 초 카이로에서 오친렉을 만난 처칠과 앨런 브룩은 그에 대한 불신을 확인, 해럴드 알렉산더 장군으로 중동 사령부 사령관을 교체했다.[63][64]
조셉 M. 호로디스키와 모리스 레미는 오친렉을 엘 알라메인 방어 성공과 롬멜의 최종 패배에 기여한 과소평가된 군사 지도자로 평가하며, 처칠의 해임 결정을 비판한다.[65]
5. 4. 1. 중동 전역 사령관 부임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과 추축국의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는 가운데, 오친렉은 1941년 7월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을 이어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54] 웨이벌은 오친렉의 인도군 사령관 자리를 맡아 그와 직책을 교환했다.[55]

중동 사령관으로서 카이로에 주둔한 오친렉은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와 중동 지역까지 책임졌다. 1941년 11월 서부 사막에서 십자군 작전을 개시했다. 전투 중 몇 차례 전술적 후퇴가 있었고, 오친렉은 제8군 사령관 앨런 커닝엄을 닐 리치로 교체했다. 하지만 12월 말까지 토브루크의 포위된 토브루크 수비대는 구출되었고 롬멜은 엘 아게일라로 철수해야 했다. 오친렉은 적이 패배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며, 1942년 1월 12일에 추축군이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썼다.[56]
하지만 추축군은 질서 정연하게 철수하는 데 성공했고, 오친렉의 낙관적인 평가가 있은 지 며칠 후 재편성되고 증원된 후 분산되고 약화된 영국군을 공격하여 토브루크 근처의 가잘라 지역으로 후퇴시켰다.[57] 영국 제국 참모총장(CIGS) 앨런 브룩 장군은 일기에 "오친렉의 서투른 지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했고, 그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DMI] 셰어러가 그에게 말한 모든 것을 믿었다"고 썼다. 브룩은 오친렉이 "가장 훌륭한 지휘관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를 보좌할 사람을 선택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언급했다. 브룩은 그에게 최고의 기갑 사단 사령관 중 한 명인 리처드 맥크리리를 보냈지만, 그의 조언은 오친렉의 논란이 많은 작전 참모인 도먼-스미스 소장의 조언에 밀려 무시되었다.[58]
롬멜의 1942년 5월 26일 가잘라 전투 공격은 영국에게 상당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5월 20일에 오친렉이 리치에게 쓴 상황 평가는 기갑 예비대를 전선의 남쪽을 우회하는 공격이나 정면 돌파 공격(오친렉이 더 선호했던 가능성)에 대처할 수 있는 위치에 집중하라고 제안했다.[59] 결국 리치는 두 기갑 사단을 더 분산된 후방 위치에 배치했고,[60] 정면 공격이 감행되었을 때 그것은 미끼였고 롬멜의 기갑 부대가 주 공격을 남쪽 측면으로 감행했다. 리치와 그의 군단 지휘관들의 초기 배치와 이후의 연합군 부대 운용 및 조정 미숙으로 인해 심각한 패배를 겪었고, 제8군은 이집트로 후퇴했다. 토브루크는 1942년 6월 21일 추축군에 함락되었다.[61]
1942년 6월 24일, 오친렉은 닐 리치가 그의 부대를 통제하고 지휘하는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고 제8군을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다. 오친렉은 머사 마트루에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리치의 계획을 버리고 그곳에서는 지연전만 벌이고, 엘 알라메인의 더 방어하기 쉬운 위치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서 오친렉은 지형과 그가 보유한 신병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여, 지쳐버린 독일군/이탈리아군의 진격을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저지했다. 약한 독일군/이탈리아군에 비해 상당한 수의 병력과 물자를 보유한 오친렉은 일련의 반격을 조직했지만, 제대로 구상되지 않고 조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2]
"오크"로 알려진 그는 부적합한 수많은 고위 지휘관을 임명했고, 지휘 체계는 종종 격렬한 개인적 충돌로 특징지어졌다. 오친렉은 인도군 장교였고, 영국과 자치령 군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나 이해가 거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먼-스미스는 제8군 내 많은 고위 지휘관들로부터 상당한 불신을 받았다. 1942년 7월까지 오친렉은 자치령 지휘관들의 신뢰를 잃었고, 그의 영국 지휘관들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의 적 롬멜(그리고 그의 전임자 웨이벌과 후임자 몽고메리)과 마찬가지로 오친렉은 끊임없는 정치적 간섭을 받았으며, 1941년 말과 1942년 봄과 여름 내내 처칠 총리의 힐책 전보와 지시를 견뎌야 했다. 처칠은 오친렉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요구했고, 이집트와 키레나이카의 군사적 패배에 낙담했다. 처칠은 1942년 11월로 예정된 북아프리카 연합군의 상륙 작전인 횃불 작전 전에 어떤 종류의 영국 승리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제8군이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거의 지쳐버린 직후 오친렉을 다그쳤다. 처칠과 제국 참모총장 앨런 브룩은 1942년 8월 초 카이로로 날아가 오친렉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그는 두 사람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 드러났다.[63] 그는 중동 사령부 사령관직에서 해럴드 알렉산더 장군(후에 튜니스 백작 원수로 승진)으로 교체되었다.[64]
조셉 M. 호로디스키와 모리스 레미는 모두 오친렉을 엘 알라메인의 성공적인 방어, 결과적으로 아프리카에서의 롬멜의 최종 패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과소평가된 군사 지도자로 칭찬한다. 두 역사가 모두 오친렉에게 책임을 돌리고 그를 해임한 처칠의 부당한 결정에 대해 비판한다.[65]
5. 4. 2. 십자군 작전과 초기 성공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과 추축국의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는 가운데, 오친렉은 1941년 7월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을 이어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54] 카이로에 주둔한 중동 사령관으로서 오친렉은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와 중동 지역까지 책임졌다. 1941년 11월, 그는 서부 사막에서 십자군 작전을 개시했다.[56] 전투 중 몇 차례의 전술적 후퇴가 있었고, 그 결과 오친렉은 제8군 사령관 앨런 커닝엄을 닐 리치로 교체했지만, 12월 말까지 토브루크의 포위된 수비대는 구출되었고 롬멜은 엘 아게일라로 철수해야 했다.
5. 4. 3. 가잘라 전투와 패배
1941년 7월,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과 추축국 간의 공방이 반복되는 가운데 오친렉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의 뒤를 이어 중동 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54] 그는 카이로에 주둔하며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와 중동 지역까지 책임졌다. 1941년 11월, 오친렉은 서부 사막에서 십자군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 중 몇 차례 전술적 후퇴가 발생하자, 오친렉은 제8군 사령관 앨런 커닝엄을 닐 리치로 교체했다. 그러나 12월 말, 토브루크의 포위된 수비대는 구출되었고, 롬멜은 엘 아게일라로 철수해야 했다. 오친렉은 적이 패배했다고 판단한 듯, 1942년 1월 12일에 추축군이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기록했다.[56]
그러나 추축군은 질서정연하게 철수에 성공했고, 오친렉의 낙관적인 평가 며칠 후 재편성 및 증원되어 분산되고 약화된 영국군을 공격, 토브루크 근처 가잘라 지역으로 후퇴시켰다.[57] 앨런 브룩 영국 제국 참모총장(CIGS)은 일기에 "오친렉의 서투른 지휘"와 그의 지나친 자신감, 그리고 낙관적인 정보부장 셰어러의 보고에 대한 맹신을 비판했다.[58]
1942년 5월 26일, 롬멜의 가잘라 전투 공격은 영국군에 큰 패배를 안겼다. 5월 20일, 오친렉은 리치에게 기갑 예비대를 전선 남쪽 우회 공격이나 정면 돌파 공격(오친렉이 선호)에 대비할 수 있는 위치에 집중하라고 제안했다.[59] 그러나 리치는 두 기갑 사단을 더 분산된 후방 위치에 배치했고,[60] 정면 공격은 미끼였으며, 롬멜의 기갑 부대는 남쪽 측면으로 주 공격을 감행했다. 리치와 군단 지휘관들의 초기 배치, 연합군 부대 운용 및 조정 미숙으로 인해 제8군은 이집트로 후퇴하는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토브루크는 1942년 6월 21일 추축군에 함락되었다.[61]
1942년 6월 24일, 오친렉은 닐 리치의 부대 통제 및 지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고 제8군을 직접 지휘했다. 그는 머사 마트루에 방어선을 구축하려던 리치의 계획을 포기하고, 엘 알라메인의 더 방어하기 쉬운 위치로 철수하여 지연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오친렉은 이곳에서 지형과 가용 병력을 활용, 방어선을 구축하여 지친 독일군/이탈리아군의 진격을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저지했다. 그는 약화된 독일군/이탈리아군에 비해 상당한 병력과 물자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구상되지 않고 조정도 미흡한 일련의 반격을 조직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2]
5. 4. 4. 엘 알라메인 전투와 해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군과 추축군 간의 공방이 반복되는 가운데, 오친렉은 1941년 7월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을 대신하여 중동 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54] 중동 사령관으로서 오친렉은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와 중동 지역까지 담당했다. 1941년 11월, 그는 서부 사막에서 십자군 작전을 개시하여 초반에는 몇 차례의 전술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12월 말에는 토브루크를 구원하고 롬멜을 엘 아게일라까지 몰아냈다. 오친렉은 추축군이 패배 직전이라고 판단했으나,[56] 실제로는 추축군이 곧바로 재편성 및 증원되어 영국군을 가잘라 지역까지 후퇴시켰다.[57]
1942년 5월 26일, 롬멜의 가잘라 전투 공격은 영국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오친렉은 롬멜의 주 공격이 남쪽 측면으로 올 것을 예상하고 리치에게 기갑 예비대를 적절히 배치할 것을 조언했지만, 리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59] 결국 리치와 그의 군단 지휘관들의 부적절한 초기 배치와 전술 운용으로 인해 제8군은 이집트로 후퇴했고, 토브루크는 1942년 6월 21일 추축군에 함락되었다.[61]
1942년 6월 24일, 오친렉은 닐 리치에 대한 불신으로 제8군을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머사 마트루 방어 계획을 포기하고 엘 알라메인에서 지연전을 펼치며 방어하기 쉬운 지역으로 철수했다.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오친렉은 지형과 신병을 활용하여 지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그는 상당한 병력과 물자를 바탕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미흡한 계획과 조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2]
오친렉은 부적합한 고위 지휘관들을 임명하고, 지휘 체계 내 개인적 충돌이 잦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인도군 장교 출신으로 영국군과 자치령 군대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비판받았으며,[58] 1942년 7월에는 자치령 지휘관들의 신뢰를 잃고 영국 지휘관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오친렉은 제국 참모총장 앨런 브룩과 처칠 총리의 지속적인 간섭과 압박에 시달렸다.[63] 처칠은 횃불 작전 이전에 승리를 원하며 오친렉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요구했다. 1942년 8월 초, 처칠과 브룩은 카이로에서 오친렉을 만나고, 그에 대한 불신을 확인한 후 해럴드 알렉산더 장군으로 중동 사령관을 교체했다.[64]
조셉 M. 호로디스키와 모리스 레미는 오친렉을 엘 알라메인 방어 성공과 롬멜의 최종 패배에 기여한 과소평가된 군사 지도자로 평가하며, 처칠의 해임 결정을 비판한다.[65]
5. 5. 인도 복귀 (1942-1945)
윈스턴 처칠은 오친렉에게 새로 창설된 페르시아-이라크 사령부의 지휘관직을 제안했지만, 오친렉은 이 직책을 거절했다. 그는 이 지역을 중동 사령부에서 분리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 아니며 새로운 배치가 실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2년 8월 14일자 제국 참모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이유를 밝혔다.[66] 대신 그는 인도에 돌아가 1943년 6월 다시 인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거의 1년 동안 "실직 상태"로 지냈다.[67]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이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대일본전 수행 책임은 인도 사령관에서 새로 창설된 동남아시아 사령부로 이관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령부의 최고 사령관인 계급 대리 해군 중장 마운트배튼 경의 임명은 1943년 8월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마운트배튼이 본부를 설치하고 통제권을 인수할 때까지(11월) 오친렉은 연합 참모총장이 쿼드런트 회담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연합군 계획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동안 인도와 버마 작전에 대한 책임을 유지했다.[68]
마운트배튼이 도착한 후, 오친렉은 인도 사령관으로서 인도의 내부 보안, 북서 변경의 방어, 인도 육군 재편성, SEAC로 파견될 병력 훈련, 전방 지역과 중국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통신망 구축을 포함하여 인도를 기지로 구축하는 책임을 맡았다. 오친렉은 아마도 전쟁 중 최악의 통신망을 가진 제14군에 대한 보급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69] 윌리엄 슬림 경은 훗날 "제14군은 탄생에서 최종 승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심 없는 지원과 변함없는 이해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회고했다.[70]
5. 5. 1. 인도 육군 총사령관 재임
윈스턴 처칠은 오친렉에게 새로 창설된 페르시아-이라크 사령부의 지휘관직을 제안했지만, 오친렉은 이 직책을 거절했다. 그는 이 지역을 중동 사령부에서 분리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 아니며 새로운 배치가 실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2년 8월 14일자 제국 참모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이유를 밝혔다.[66] 대신 그는 인도에 돌아가 1943년 6월 다시 인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거의 1년 동안 "실직 상태"로 지냈다.[67]
한편,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에 따라 대일본전 수행 책임은 인도 사령관에서 새로 창설된 동남아시아 사령부로 이관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령부의 최고 사령관인 계급 대리 해군 중장 마운트배튼 경의 임명은 1943년 8월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마운트배튼이 본부를 설치하고 통제권을 인수할 때까지(11월) 오친렉은 연합 참모총장이 쿼드런트 회담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연합군 계획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동안 인도와 버마 작전에 대한 책임을 유지했다. 쿼드런트 회담은 8월에 종료되었다.[68]
마운트배튼이 도착한 후, 인도 사령관으로서 오친렉은 다시 인도의 내부 보안, 북서 변경의 방어, 인도 육군 재편성, SEAC로 파견될 병력 훈련, 전방 지역과 중국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통신망 구축을 포함하여 인도를 기지로 구축하는 책임을 맡았다. 오친렉은 아마도 전쟁 중 최악의 통신망을 가진 제14군에 대한 보급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69] 윌리엄 슬림 경, 제14군 사령관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오친렉]가 우리의 주요 기지, 징병 지역 및 훈련장이었던 인도를 지휘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좋은 날이었다. 제14군은 탄생에서 최종 승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심 없는 지원과 변함없는 이해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와 인도 육군이 우리를 위해 해준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정복은 더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70]
5. 5. 2. 제14군 지원
처칠은 오친렉에게 새로 창설된 페르시아-이라크 사령부의 지휘관직을 제안했지만, 오친렉은 이 직책을 거절했다. 그는 이 지역을 중동 사령부에서 분리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 아니며 새로운 배치가 실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2년 8월 14일자 제국 참모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이유를 밝혔다.[66] 대신 그는 인도에 돌아가 1943년 6월 다시 인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거의 1년 동안 "실직 상태"로 지냈다.[67]한편, 웨이벌 장군은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에 따라 대일본전 수행 책임은 인도 사령관에서 새로 창설된 동남아시아 사령부로 이관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령부의 최고 사령관인 계급 대리 해군 중장 마운트배튼 경의 임명은 1943년 8월까지 발표되지 않았고, 마운트배튼이 본부를 설치하고 통제권을 인수할 때까지(11월) 오친렉은 연합 참모총장이 쿼드런트 회담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연합군 계획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동안 인도와 버마 작전에 대한 책임을 유지했다. 쿼드런트 회담은 8월에 종료되었다.[68]
마운트배튼이 도착한 후, 인도 사령관으로서 오친렉은 다시 인도의 내부 보안, 북서 변경의 방어, 인도 육군 재편성, SEAC로 파견될 병력 훈련, 전방 지역과 중국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통신망 구축을 포함하여 인도를 기지로 구축하는 책임을 맡았다. 오친렉은 아마도 전쟁 중 최악의 통신망을 가진 제14군에 대한 보급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69] 윌리엄 슬림 경, 제14군 사령관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썼다.
It was a good day for us when he [Auchinleck] took command of India, our main base, recruiting area and training ground. The Fourteenth Army, from its birth to its final victory, owed much to his unselfish support and never-failing understanding. Without him and what he and the Army of India did for us we could not have existed, let alone conquered.|그 [오친렉]가 우리의 주요 기지, 징병 지역 및 훈련장이었던 인도를 지휘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좋은 날이었다. 제14군은 탄생에서 최종 승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심 없는 지원과 변함없는 이해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와 인도 육군이 우리를 위해 해준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정복은 더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영어[70]
5. 5. 3. 이혼의 아픔
오친렉은 그의 아내 제시가 친구인 공군 원수 경 리처드 피어스에게 떠나면서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피어스와 오친렉은 임페리얼 국방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지만,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피어스는 당시 동남아시아 연합 공군 사령관이었고 인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1944년 초 마운트배튼에게 알려졌고, 그는 피어스를 소환하기를 바라며 이 정보를 경 찰스 포털 공군 참모총장에게 전달했다. 1944년 9월까지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고, 피어스는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운트배튼은 1944년 11월 28일 피어스와 레이디 오친렉을 영국으로 돌려보냈고,[71] 그들은 브라이튼 호텔에서 함께 살았다. 피어스는 결혼을 해소했고, 오친렉은 1946년에 이혼했다.[72] 오친렉은 이 일로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여동생에 따르면, 그는 관계가 끊어진 후 예전 같지 않았다고 한다.[73] 그는 이혼 후에도 항상 지갑에 제시의 사진을 가지고 다녔다.[73]오친렉이 동성애자였는지에 대한 학문적 논쟁이 있다. 그의 전기 작가 필립 워너는 소문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를 일축했다. 그러나 역사가 로널드 하이엄은 "성적으로 기인한 도덕적 혐오"가 몽고메리가 오친렉과 잘 지내지 못한 이유이며, 더 나아가 오친렉이 인도 소년들과의 관계에 대해 "고위급 경고"를 받았다고 주장했다.[74]
6. 인도 분할과 말년
오친렉은 인도 분할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1947년 11월 최고 사령부가 해산되면서 사실상 군에서 퇴역했다. 12월 1일 인도를 떠난 후, 이탈리아에서 잠시 사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런던으로 돌아와 자선 및 사업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수채화에도 재능을 보였다.[81] 1960년 베클레스에 정착했다가 1967년 마라케시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으며, 1981년 3월 23일 사망했다.[82][83]
6. 1. 인도 분할 과정에서의 역할
오친렉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도 육군 총사령관 자리를 지켰으며,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인도 분할에 따라 미래의 인도 및 파키스탄 육군을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 1945년 11월, 그는 인도 국민들과 영국령 인도 육군 내에서 커져가는 불안과 불만을 느껴 인도 국민군 장교들에게 내려진 더 심각한 판결을 감형해야 했다.[64] 1946년 6월 1일, 그는 원수로 진급했다.[76]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근본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책(즉, 분할)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아 작위 받기를 거부했다.[69]
1947년 9월 28일, 오친렉 원수는 영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나는 현재의 인도 내각이 파키스탄 자치령이 확고하게 설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는 완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또한 "8월 15일 이후 상황은 꾸준히 악화되었으며, 인도 지도자들, 내각 장관, 공무원 등이 군대의 분할 작업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려 했다"라고 평가했다.[77][78]
1947년 8월 분할이 이루어졌을 때, 오친렉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남아있는 모든 영국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79] 1947년 11월 말 최고 사령부가 해산 및 폐쇄될 때까지 이 역할을 맡았다.[80]
6. 2. 은퇴 및 사망
오친렉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도 육군 총사령관직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신념과는 달리 미래의 인도 및 파키스탄 육군이 인도 분할을 준비하도록 도왔다. 1945년 11월, 그는 인도 국민들과 영국령 인도 육군 내부에서 커져가는 불안과 불만을 고려하여, 인도 국민군 장교들에게 내려진 더 심각한 사법적 판결을 감형해야 했다.[64] 1946년 6월 1일, 그는 원수로 진급했지만,[76] 작위 수여는 거부했는데, 자신이 근본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정책(즉, 분할)과 연관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69]1947년 9월 28일, 오친렉 원수는 영국 정부에 보고서를 보내 "나는 현재의 인도 내각이 파키스탄 자치령이 확고하게 설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는 완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평가의 두 번째 부분인 정치적 부분에서 "8월 15일 이후 상황은 꾸준히 악화되었으며, 인도 지도자들, 내각 장관, 공무원 등이 군대의 분할 작업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려 했다"라고 진술했다.[77][78]
1947년 8월 분할이 이루어졌을 때, 오친렉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남아있는 모든 영국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79] 1947년 11월 말 최고 사령부의 해산 및 폐쇄 시까지 이 역할을 유지했다.[80] 이는 그의 사실상 군대 퇴역을 의미했다. 그는 12월 1일에 인도를 떠났다.[80]
이탈리아에서 사업 계획 실패와 관련된 짧은 기간을 보낸 후, 오친렉은 런던으로 은퇴하여 여러 자선 및 사업 관련 활동에 참여했으며, 상당한 실력을 갖춘 수채화 화가가 되었다.[81] 1960년에는 서퍽 주 베클레스에 정착하여 7년 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84세의 나이에 이민을 결정하고 마라케시에 집을 마련하여 1981년 3월 23일에 사망했다.[82][83]
7. 평가 및 유산
클로드 오친렉은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 평가받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부하들은 그를 존경했지만, 상관들은 그를 다루기 어려워했다. 특히 오친렉은 자신의 참모들을 자주 교체했는데, 이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을 낳기도 했다.
오친렉은 인도 육군 복무 시절 인도와 인도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인도 분할에 반대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양국에서 존경을 받았다.
오친렉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7. 1. 기념

오친렉은 카사블랑카 벤 므시크 유럽 묘지 내 영연방 전쟁 묘지 위원회 구역에 묻혔다. 그의 묘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두 번째로 어린 비시민 영연방 희생자인 레이먼드 스티드의 묘 옆에 있다.[84]
세인트 폴 대성당 지하 묘실에는 기념 명판이 세워졌다. 버밍엄 인근 브로드 스트리트 파이브 웨이즈에 있는 오친렉 하우스에서는 오친렉의 청동 동상을 볼 수 있다.[85]
8. 훈장 및 서훈
훈장 및 서훈 |
---|
1945년 1월 1일 바스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5] |
1934년 7월 3일 바스 훈장 동반 기사 (모흐만 작전 1933년 10월 7일)[86] |
1940년 12월 20일 인도 제국 훈장 기사 대사령관[6] |
1936년 5월 8일 인도 별 훈장 동반 기사 (모흐만 작전 1935년 10월 8일)[7] |
1917년 6월 3일 우수 서비스 훈장[28] |
1919년 6월 3일 대영 제국 훈장 장교 (군사 부문) |
공적 언급, 2회 (제1차 세계 대전 및 1934년 7월 3일 - 모흐만 작전)[8][9] |
무공 십자 훈장 (프랑스, 1918년 및 1949년)[15] |
1948년 7월 23일 공로 훈장 최고 사령관 (미국)[10] |
1942년 5월 15일 무공 훈장, 5급 (폴란드)[11] |
네팔 별 훈장 1등 회원[87] |
1944년 전쟁 십자 훈장 (체코슬로바키아)[14] |
1945년 네팔 별 훈장 (네팔) |
1948년 3월 19일 성 올라프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 (노르웨이)[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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