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보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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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보르파는 15세기 초 보헤미아에서 얀 후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후스파의 급진 분파이다. 1420년, 페트르 호로마드카가 이끄는 후스파가 타보르 산에 새로운 도시 타보르를 건설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공동체 생활을 했다. 얀 지슈카와 프로코프 홀리가 이끄는 타보르파 군대는 후스 전쟁에서 십자군을 격퇴했으나, 리파니 전투에서 패배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타보르파의 사상은 보헤미아 형제단과 모라비아 형제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타보르파를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원형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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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보르파 | |
---|---|
개요 | |
유형 | 후스파의 급진 분파 |
활동 기간 | 1420년 ~ 1434년 |
중심지 | 타보르 |
주요 인물 | 얀 지슈카 프로코프 홀리 프로코프 말리 |
역사 | |
기원 | 1420년 후스 전쟁 초기 |
창립 | 프라하의 급진 후스파 |
구성 | 농민 하층 계급 일부 성직자 |
이상 | 사회적 평등, 재산 공유, 성서 중심의 신앙 |
특징 | 성체성사 시 양형 영성체 주장 |
군사적 성공 | 얀 지슈카의 지도 하에 혁혁한 공을 세움 |
분열 | 온건파 칼리크스타와의 갈등 심화 |
종말 |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패배하며 종식 |
영향 | 후스파 운동의 급진적 경향 대변, 체코 종교개혁에 영향 |
신학 및 사상 | |
성서 중심주의 | 성서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신뢰, 교회의 전통과 권위 부정 |
양형 영성체 | 평신도에게도 빵과 포도주 모두를 나누어 줌 |
사회적 평등 | 계급과 재산의 차이 없는 평등 사회 추구 |
재산 공유 | 사유 재산 부정, 공동체 생활 강조 |
종말론적 신앙 |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믿음 |
조직 및 군사 | |
지도자 | 얀 지슈카를 중심으로 한 군사 지도자 |
군대 | 농민과 하층민으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 |
전술 | 역습 전술 보병 중심의 전투 바겐부르크 활용 |
무기 | 메이스 낫 도리깨 등 농기구를 개조한 무기 사용 |
주요 전투 | |
비트코프산 전투 | 1420년, 지기스문트 황제의 군대 격파 |
우스티나트라바우 전투 | 1422년, 헝가리 군대 격파 |
리파니 전투 | 1434년, 칼리크스타와의 연합군에 패배 |
유산 | |
후스파 운동 | 급진적인 분파로서 후스파 운동의 다양성 보여줌 |
체코 역사 | 체코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 |
종교개혁 | 사회적 평등 사상은 종교개혁에 영향 |
2. 역사적 배경
타보르파는 15세기 초 보헤미아에서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등장했다. 후스 전쟁 당시 보헤미아의 도시 타보르를 중심으로 활동한 종교 개혁 운동 세력이었다. 타보르의 금광은 타보르파의 재정적 기반이었으며, 이 운동에 가담한 시민들과 주변 농민들은 공동체 사회를 형성했다. 타보르파는 그리스도의 새천년이 도래하여 종도 주인도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선언했다.[2]
타보르파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분파들 중 가장 급진적인 종파로, 교회의 부패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거부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타보르파 신학자들은 스콜라 철학에 정통했지만, 스콜라 철학의 오래된 관념을 깨부순 최초의 중세 지식인들이었다.
후스 전쟁 당시 얀 지슈카와 프로코프 홀리는 타보르파 군대를 이끌며 지기스문트 황제의 십자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후스파는 내분에 휩싸였고,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타보르파와 고아파 연합군은 양형영성체파와 로마 가톨릭교회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타보르파 잔당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일부는 저항을 계속했고, 1452년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최종 진압되었다.
타보르파는 정치 세력으로는 쇠퇴했지만, 그 신학 사상은 1457년 보헤미아 형제단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오늘날 모라비아 형제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2. 1. 후스파의 분열
얀 후스의 화형 이후, 그의 추종자들인 후스파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타보르파 외에도 아다미파, 오레비파, 시로트치파(고아파), 양형영성체파(우트라크비스트), 프라하파 등이 있었다. 얀 후스의 화형은 이들 운동의 공통된 동력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후스파라고 부른다.2. 2. 타보르파의 형성
1420년 봄, 페트르 호로마드카가 이끄는 후스파 집단이 남보헤미아의 세지모보 우스티 마을과 인근의 흐라디슈테 성을 점령했다. 그들은 갈릴리의 타보르 산을 본떠 타보르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2]타보르에서는 사회적·경제적 평등이 장려되었고, 타보르파는 서로를 형제자매로 불렀다. 보헤미아 전역에서 후스파들이 타보르로 몰려들었다. 타보르가 지역 금광을 장악하여 경제적으로 지원받은 시민들은 지역 농민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다. 타보르파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선포하고, 더 이상 종과 주인이 없을 것이며, 모든 재산은 공동으로 소유될 것이며, 더 이상 세금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 그들은 사람들이 순수한 순결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현대의 민족주의 혁명 운동과의 유사점을 발견했다.[3] 머레이 부크친은 타보르가 초기 무정부공산주의의 예라고 주장했다.[4]
플젠 출신의 후스파들은 브제녠크 슈비호프스키와 얀 지슈카의 지도 아래 타보르로 왔다. 이들은 1420년 3월 25일 수도메르 전투에서 가톨릭 기사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기사들을 격퇴하고 타보르에 도착했다. 타보르파는 얀 지슈카, 후스의 미쿨라시, 마호비체의 크발 제피츠키, 부호프의 즈비네크를 군사 지휘관으로 선출했다.
3. 주요 특징
타보르파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허례허식을 비판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분파들 중 가장 급진적인 종파이다. 타보르파 신학자들은 스콜라 철학에 정통했으나, 스콜라 철학의 낡은 관념을 깨부순 최초의 중세 지식인들이었다.
타보르파는 예수의 천년왕국(Millennium)을 선포하고, 종과 주인이 없는 세상, 모든 재산이 공유되고 세금이 없는 세상을 약속했다.[2]
3. 1. 신학적 특징
타보르파의 신학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달리 성경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타보르파 신학자들은 스콜라 철학에 정통했지만, 스콜라 철학의 권위주의적 방법론은 거부했다.[8] 타보르파는 예수의 밀레니엄을 선포하고, 주인도 노예도 없으며 모든 자산을 공유하고 세금이 없는 사회를 목표로 했다. 이들의 이론은 중세 가톨릭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급진적인 것 중 하나였다.[9]타보르파의 주요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 펠흘지모프의 미쿨라시[8]
- 프로코프 홀리: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페테르 카니시: 후스파의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군사 지도자 얀 지슈카에 의해 화형당했다.
- 마르틴 후스카[10][11][12]
3. 2. 사회, 경제적 특징
타보르의 금광은 타보르파의 경제적 기반이었으며, 이에 참여한 시민들과 주변 농민들은 공동체 사회를 형성했다. 타보르파는 예수의 천년왕국이 도래하여 종과 주인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선언했다.[2]타보르파는 모든 재산을 공유하고,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공동체 생활을 장려했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불렀으며, 이는 평등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보헤미아 전역에서 후스파들이 타보르로 몰려들었다.[2]
타보르파는 예수의 천년왕국을 선포하고, 더 이상 종과 주인이 없을 것이며, 모든 재산은 공동으로 소유될 것이고, 더 이상 세금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 그들은 사람들이 순수한 순결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현대의 민족주의 혁명 운동과의 유사점을 발견했다.[3] 예를 들어, 머레이 부크친은 타보르가 초기 무정부공산주의의 예라고 주장했다.[4]
4. 얀 지슈카와 후스 전쟁
얀 지슈카는 후스 전쟁에서 타보르파의 군사 지도자로 활약했다.[2] 플젠(Plzeň) 출신 후스파들은 브제녠크 슈비호프스키와 트로크노프 출신의 얀 지슈카의 지도 아래 타보르로 왔다.
얀 지슈카는 지기스문트 황제 휘하의 십자군 제국군에 맞서 보헤미아(Bohemia)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모든 포로를 죽여야 한다고 믿지 않았고, 패배한 자들에게 자주 관용을 보였다. 한 전투 후, 그의 군대가 명령을 어기고 많은 포로를 죽이자, 지슈카는 군대에게 용서를 빌라고 명령했다. 이 경험은 그가 군사 행동 강령 "italic=no|Žižkův vojenský řádcs"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는데, 이 문서는 신명기(Deuteronomy)의 구절을 참고했다.[7] 지슈카는 공동체가 자신의 신념에 비해 너무 과격해졌기 때문에 타보르를 떠나 흐라데츠 크랄로베(Hradec Králové)의 오레비트(Orebites) 지도자가 되었다. 보헤미아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타보르파와 오레비트는 종종 종교적 차이를 넘어 군사적으로 협력했다.
1421년과 1422년 사이 쿠트나 호라 전투에서 실명한 지슈카는 지기스문트 왕을 제압했다. 1424년 10월 11일 얀 지슈카가 사망한 후, 비체밀리체의 얀 프베즈다와 슈밤베르크의 보후슬라프가 타보르파의 지휘를 맡았다.
후스파의 승리로 외부 위협이 제거되자, 다양한 후스파 파벌들이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421년 초, 성찬(Eucharist)을 완전히 거부한 아다미스트(Adamites)들은 타보르에서 추방되었다.[5] 페트르 카니시(Petr Kániš)와 마르틴 후스카(Martin Húska) 사제들의 지도 아래, 그들은 프리베니체 성(Příběnice Castle)에 정착했는데, 거기서 아다미스트들은 몰락했다.[6] 지슈카는 그들의 운동을 진압했고, 두 지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이단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화형되었다.[7]
1434년 5월 30일, 타보르파는 리파니 전투에서 대패하여 1만 8천 명의 병력 중 1만 3천 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타보르파와 시로치 연합군은 양형영성체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타보르파의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일부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마지막 타보르파는 1452년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토벌당했다.
4. 1. 얀 지슈카의 군사적 업적
얀 지슈카는 가난한 보헤미아 출신으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타보르파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수도메르 전투, 비트코프 언덕 전투 등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십자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2]얀 지슈카는 모든 포로를 죽여야 한다고 믿지는 않았으며, 패배한 이들에게 종종 관용을 베풀었다. 한번은 그의 군대가 명령을 어기고 많은 포로를 죽이자, 지슈카는 군대에게 용서를 빌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신명기에서 영감을 받아 군사 규율인 "italic=no|Žižkův vojenský řádcs" (지슈카 군법)을 제정했다.[7]
이후 지슈카는 공동체가 자신의 신념에 비해 너무 과격해졌다고 판단하여 타보르를 떠나 흐라데츠크랄로베에서 보다 온건한 오레비트(Orebites)의 지도자가 되었다. 보헤미아에 대한 외부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타보르파와 오레비트는 종종 종교적 차이를 넘어 군사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7]
4. 2. 타보르파의 군사적 활동

플젠(Plzeň) 출신 후스파들은 브제녠크 슈비호프스키와 트로크노프 출신의 얀 지슈카의 지도 아래 타보르로 왔다. 타보르파는 얀 지슈카, 후스의 미쿨라시, 마호비체의 크발 제피츠키, 부호프의 즈비네크의 4명의 헤트만(군사 지휘관)을 선출했다. 그들의 지휘 아래 타보르파는 남보헤미아(Bohemia)에서 여러 차례 출격했고, 제1차 반후스파 원정 중 가톨릭 군대에 위협받던 프라하(Prague)를 지원했다. 6월, 타보르는 남보헤미아 귀족 올드리히 2세 폰 로젠베르크(Oldřich II of Rosenberg)의 군대에 의해 포위 공격을 받았으나 실패했다. 7월 14일 프라하 근처에서 벌어진 비트코프 언덕 전투(Battle of Vítkov Hill)에서 얀 지슈카는 헝가리(Hungary)와 지기스문트 황제(Sigismund, Holy Roman Emperor)가 수도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좌절시켰다.

8월 말, 얀 지슈카는 올드리히 폰 로젠베르크의 영지를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1420년 9월, 펠흘지모프의 미쿨라시(Mikuláš of Pelhřimov)가 타보르의 주교(bishop)로 선출되었고, 12월, 헤트만 후스의 미쿨라시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얀 지슈카가 타보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얀 지슈카는 지기스문트 황제 휘하의 십자군 제국군에 맞서 보헤미아(Bohemia) 군대를 지휘했다. 얀 지슈카는 패배한 자들에게 자주 관용을 보였으며, 그의 군대가 그의 명령을 어기고 많은 포로를 죽이자, 군대에게 용서를 빌라고 명령했다. 그 경험은 그가 군사 행동 강령 Žižkův vojenský řád|지슈카 군법cs을 쓰도록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는데, 이 문서는 신명기(Deuteronomy)의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7] 얀 지슈카는 결국 그 공동체가 그의 신념에 너무 과격해졌기 때문에 타보르를 떠나 흐라데츠 크랄로베(Hradec Králové)의 더 온건한 오레비트(Orebites)의 지도자직을 맡았다.
1421년과 1422년의 전환기에 쿠트나 호라 전투가 있었는데, 실명한 지도자는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왕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1434년 5월 30일 리파니 전투(Battle of Lipany)에서 타보르파의 세력이 꺾였는데, 프로코프 홀리(Prokop Holý)가 이끄는 1만 8천 명의 타보르파와 시로트치 연합군 중 1만 3천 명이 통합된 가톨릭군에 의해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이 패배의 무게 아래, 시로트치 연합은 완전히 사라졌다. 주요 사제 프로코프 홀리(Prokop Holý)를 포함한 많은 주요 타보르파 지휘관들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리파니 전투(Battle of Lipany) 이후, 지기스문트 왕에 대한 반대와 공의회와의 합의는 두바의 얀 로하치(Jan Roháč of Dubá)가 이끌었다. 그러나 타보르파가 여러 성을 잃고 1435년 8월 19일 크레치 전투(Battle of Křeč)에서 로젠베르크의 올드리히에게 패배한 후, 스트라즈니체의 베드리히가 이끄는 온건파가 타보르파를 장악했다. 1452년 9월 1일, 타보르 마을은 갑자기 토지 관리자 포데브라디의 게오르크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고, 따라서 타보르 연합의 독립적인 정치적 권력은 종식되었다.
4. 3. 후스파 연합과 십자군 격퇴
후스 전쟁 당시 얀 지슈카와 프로코프 홀리는 타보르파 군대를 이끌고 지기스문트 황제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 십자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2] 타보르파는 오레비파, 프라하파 등 다른 후스파 분파들과 연합하여 십자군에 맞섰으며, 우스티 전투, 빛의 전투, 타호프 전투, 도마즐리체 전투 등에서 승리했다.[2]얀 지슈카는 지기스문트 황제 휘하의 십자군에 맞서 보헤미아(Bohemia)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모든 포로를 죽여야 한다고 믿지 않았고, 패배한 자들에게 자주 관용을 보였다. 한 전투 후, 그의 군대가 명령을 어기고 많은 포로를 죽이자, 지슈카는 군대에게 용서를 빌라고 명령했다. 이 경험은 그가 신명기(Deuteronomy)의 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군사 행동 강령 "italic=no|Žižkův vojenský řádcs"을 쓰는 데 영향을 주었다.
1424년 10월 11일 얀 지슈카가 사망한 후, 얀 프베즈다(Jan Hvězda)와 보후슬라프(Bohuslav)가 타보르파의 지휘를 맡았다. 타보르파, 시로트치(Sirotci), 프라하파 연합군은 1426년 6월 16일 우스티 전투에서 작센(Saxony), 튀링겐(Thuringia), 루사티아(Lusatia), 마이센(Meissen) 출신 용병들을 격파했다. 프로코프 홀리(Prokop Holý)의 지휘 아래, 타보르파와 시로트치 연합군은 빛의 전투에서 알브레히트 2세(Albrecht II)에게 승리했다. 타보르파는 시로트치, 프라하 연합과 함께 후스파에 대한 제3차 및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타호프 전투와 도마즐리체 전투에서 승리했다. 또한 프로코프 홀리의 지휘 아래,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지역, 오스트리아, 상하 루사티아, 실레시아, 상헝가리 등지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2]
5. 내분과 쇠퇴
후스 전쟁 당시 얀 지슈카와 프로코프 홀리가 이끄는 타보르파 군대는 지기스문트 황제의 십자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후스파는 내분에 빠졌고, 1434년 5월 30일 리파니 전투에서 타보르파는 양형영성체파와 로마 가톨릭교회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타보르파는 정치적 주체로서 그 힘을 잃었으나, 그 신학적 사상은 1457년 보헤미아 형제단이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들은 오늘날의 모라비아 형제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5. 1. 아다미파와의 갈등
1421년, 성찬을 완전히 거부하는 급진적인 분파인 아다미파가 타보르에서 추방되었다. 후스 전쟁 당시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던 얀 지슈카는 아다미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지도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등 강경하게 진압했다.5. 2. 얀 지슈카의 이탈
얀 지슈카는 가난한 보헤미아 출신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지슈카는 포로를 모두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종종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의 군대가 지슈카에게 반항하여 많은 포로를 살해했을 때, 그는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도록 명령했다. 지슈카는 신명기를 일부 참고하여 병법서인 「Žižkův vojenský řád」를 저술했다. 후에 타보르파가 과격해지자 지슈카는 손을 떼고, 흐라데츠 크랄로베에서 보다 온건한 우트레흐트파를 이끌었다.[1] 그러나 외부의 끊임없는 공격에 맞서 타보르파와 우트레흐트파는 종파의 차이를 넘어 공동전선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후스파가 승리하고 외부의 적이 제거되자, 후스파 내부에서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1]5. 3. 리파니 전투와 몰락
1434년 5월 30일, 타보르파는 리파니 전투에서 1만 8천 명의 병력 중 1만 3천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1] 이 전투에서 타보르파 군대를 이끌던 프로코프 홀리가 전사했다. 오랜 전쟁으로 후스파는 내분에 빠졌고, 타보르파는 양형영성체파와 로마 가톨릭교회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1437년, 타보르파는 지기스문트 황제와 강화를 맺었다.[1]
1452년, 타보르는 지배권과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1] 타보르파의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일부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마지막 타보르파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토벌당했다.
5. 4. 정치적 영향력 상실
리파니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타보르파는 두바의 얀 로하치를 중심으로 저항을 이어갔다.[1] 그러나 1437년, 지기스문트 황제와 화해하고 왕립 도시로 인정받았다.[1] 1452년, 포데브라디의 이르지가 타보르를 점령하면서 타보르파의 독립적인 정치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1]6. 사상적 유산
타보르파는 금광을 통해 재정을 확보했으며, 가담한 시민들과 주변 농민들은 공동체 사회를 형성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새천년이 도래하여 종도 주인도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후스 전쟁 당시 얀 지슈카와 프로코프 홀리와 같은 뛰어난 군사 지도자들이 타보르파 군대를 이끌며 지기스문트 황제의 십자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후스파는 내분에 빠졌고, 1434년 5월 30일 리파니 전투에서 타보르파와 고아파 연합군은 양형영성체파와 로마 가톨릭교회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타보르파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일부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마지막 타보르파는 1452년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토벌당했다.
6. 1. 보헤미아 형제단
타보르파의 신학적 사상은 1457년 보헤미아 형제단이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은 오늘날의 모라비아 형제회까지 이어지고 있다.[1]6. 2. 모라비아 형제회
타보르파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분파들 중 가장 급진적인 종파로 손꼽힌다. 이들은 소위 교회의 부패와 허례라고 판단되는 것들을 거부하였으며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규범을 고수했다. 타보르파 신학자들은 스콜라 철학에 정통했으나, 이들은 중세 지식인들 중 스콜라 철학의 오래된 관념을 처음 깨부순 사람들이었다.이후 타보르파는 정치적 주체로서는 그 힘을 잃었으나, 그 신학적 사상은 1457년 보헤미아 형제단이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들은 오늘날의 모라비아 형제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7.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장
칼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주의 이론을 창시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후스 전쟁 당시 급진파였던 타보르파를 공산주의의 원형으로 평가했다.[13] 엥겔스는 저서 《원시기독교 역사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반란은 중세의 모든 대중운동이 그렇듯 필연적으로 종교의 가면을 쓰고서 원시기독교를 심각한 타락으로부터 바로잡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보통 종교적 열광의 그늘에는 강고한 세속적 이해가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얀 지슈카를 빛나는 선구자로 삼은 보헤미아의 타보르당의 조직에서 가장 큰 규모로 나타났다. 이 경향은 중세 내내 지속되었으나 독일 농민전쟁 이후에 서서히 쇠퇴했다가 1830년 이후 노동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다시 부활하기에 이른다."[13]
타보르파는 터보르의 금광을 자금원으로 삼아, 예수의 밀레니엄을 선포했다. 이들은 주인도 노예도 없고, 모든 자산을 공유하며, 세금 없는 사회를 목표로 했다.[8]
8. 한국의 관점
타보르파는 금광을 통해 자금을 마련했으며, 시민들과 주변 농민들이 참여하여 공동체 사회를 형성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새천년이 도래하여 종도 주인도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타보르파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 중 가장 급진적인 종파였다. 이들은 교회의 부패와 허례허식을 거부하고 성경의 권위를 따랐다. 타보르파 신학자들은 스콜라 철학에 정통했지만, 중세 지식인들 중 스콜라 철학의 낡은 관념을 처음으로 깨부순 사람들이기도 하다.[1]
후스 전쟁 당시 얀 지슈카와 프로코프 홀리는 타보르파 군대를 이끌며 지기스문트 황제의 십자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후스파는 내분에 휩싸였고, 1434년 5월 30일 리파니 전투에서 타보르파와 고아파 연합군은 양형영성체파와 로마 가톨릭교회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살아남은 타보르파 사람들은 흩어졌지만 일부는 저항을 계속했고, 1452년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 의해 마지막 타보르파가 진압되었다.[2]
타보르파는 정치 세력으로는 몰락했지만, 이들의 신학 사상은 1457년 보헤미아 형제단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오늘날 모라비아 형제회까지 이어지고 있다.[3]
참조
[1]
서적
A Text-book of Church History
Harper & brothers
[2]
서적
Encyclopedia of Community: From the Village to the Virtual World Vol 2
https://books.google[...]
Sage
2016-11-13
[3]
서적
The Irish Terrorism Experience
1991
[4]
서적
The Ecology of Freedom: The Emergence and Dissolution of Hierarchy
[5]
서적
A History of the Hussite Revolution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6]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Radical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7]
서적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8]
서적
Encyclopedia of Community: From the Village to the Virtual World Vol 2
https://books.google[...]
Sage
2016-11-13
[9]
서적
The Ecology of Freedom: The Emergence and Dissolution of Hierarchy
[10]
서적
A History of the Hussite Revolution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1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Radical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12]
서적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13]
서적
종교개혁 이야기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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