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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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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스파는 15세기 보헤미아 왕국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 운동으로,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랐다. 얀 후스는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평신도에게 빵과 포도주를 모두 주는 성찬을 주장했으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처형당했다. 후스의 죽음은 보헤미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후스파는 온건파(우트라키스트)와 급진파(타보르파)로 나뉘어 후스 전쟁을 벌였다. 후스파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 체코 민족 의식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모라비아 교회, 형제 연합,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 등에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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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파
개요
명칭후스파
다른 이름보헤미아 형제단
모라비아 형제단
칼리크스틴
타보르파
배경
발발 시기1402년 ~ 1431년
발발 장소보헤미아 왕국 (현재의 체코)
원인교회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
얀 후스의 종교 개혁 운동과 그의 화형
민족주의적 감정
주요 인물
종교 지도자얀 후스
야코베크 스르지브니
얀 젤리프스키
얀 지슈카
프로코프 홀리
프로코프 말리
정치 지도자바츨라프 4세
지기스문트
이념 및 신학
주요 사상성서의 권위 강조
성찬례 시 평신도에게도 빵과 포도주 모두 허용 (양형영성체)
교회의 세속 권력 및 재산 포기 주장
설교의 자유 강조
성직자의 도덕적 갱신 요구
주요 사건
후스 전쟁1419년 ~ 1434년
콘스탄츠 공의회1414년 ~ 1418년 (얀 후스 화형)
쿠트나호라 칙령1409년
바젤 공의회1431년 ~ 1449년 (후스파와의 협상 시도)
리파니 전투1434년 (후스파 내부 분열 및 온건파 승리)
주요 분파
칼리크스틴파 (온건파)양형영성체 허용, 교회 개혁 추구
타보르파 (급진파)사회적 평등, 재산 공유, 종말론적 신앙 강조
오레비테스파타보르파와 유사한 급진적 성향
보헤미아 형제단엄격한 도덕률, 평화주의 추구
결과 및 영향
결과얀 후스의 사상 확산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
보헤미아 왕국의 종교적 자유 획득 (일부)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
영향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에게 영감 제공
유럽 종교 전쟁의 배경
체코 민족주의 발전에 기여
기타
관련 용어후스 전쟁
콘스탄츠 공의회
양형영성체
타보르파
보헤미아 형제단

2. 역사적 배경

얀 후스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당한 후, 보헤미아 왕국을 중심으로 후스파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보헤미아 왕관령 전역( 모라비아, 실레시아)으로 확산되었고, 헝가리 왕국(현재 슬로바키아) 북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후스파 병사들의 약탈 행위로 악명을 얻었다.[3][4][5][6]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트란실바니아에는 작은 임시 공동체가 있었지만, 곧 보헤미아로 이동했다.

후스파는 양립파를 중심으로 타보르파, 아다미파, 오레비파, 고아파 등 다양한 분파로 구성되었다. 주요 신학자로는 페트르 첼치츠키, 프라하의 예롬이 있으며, 얀 지슈카교황청이 선포한 5차례의 십자군에 맞서 싸운 체코의 국가 영웅이다. 후스파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선구자 중 하나로 여겨지며, 사회 문제 해결과 체코 민족 의식 강화에 기여했다.

2. 1. 후스파 운동의 기원

얀 후스의 화형(1415). 이 사건은 보헤미아 왕국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얀 후스성찬에서 빵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평민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체코어 예배를 옹호했으며,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다. 당시 보헤미아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으며 독일어 사용이 강요되었기 때문에, 후스의 주장은 체코인들의 민족 운동적 성격을 띠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5년 7월 6일, 얀 후스를 안전 보장 서한으로 유인한 후 이단으로 재판하여 화형에 처했다.[1]

1414년 후스의 체포는 체코 지방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지기스문트 황제에게 얀 후스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후스가 사망하자 폭동이 일어났다. 후스에 대한 처우는 전국적인 수치이자 범죄 행위로 여겨졌다. 바츨라프 4세 국왕은 지기스문트에 대한 원한으로 분노했고, 왕비는 후스의 친구들을 지지했으며, 후스파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일부 영주들은 연맹을 결성하여 복음의 자유로운 전파를 보호하고,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주교의 권력에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 대학이 분쟁을 중재하고, 후스파 귀족 전체가 연맹에 가입했다. 1417년, 귀족들은 1415년 항의 서한에 서명한 사람으로서 가톨릭 사제들을 추방하고 성찬을 베풀 의향이 있는 사제들로 대체했다. 포도주 성배는 후스파 운동의 중심 상징이 되었다.[7] 국왕이 연맹에 합류했다면 법적 승인을 받았겠지만, 국왕은 거부하고 로마 가톨릭 영주 연맹에 접근하여 내전 가능성이 나타났다.

마르틴 5세 교황은 후스를 공격하며 콘스탄츠 공의회 이후 후스의 가르침에 대한 투쟁을 재개했다. 그는 후스의 교리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바츨라프 국왕의 협력을 얻고자 했다. 1418년, 지기스문트는 종교 전쟁의 불가피성을 지적하며 바츨라프 4세를 공의회 입장으로 끌어들였다. 후스파 정치인과 군 지휘관들은 추방되었고,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복귀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1419년 바츨라프 국왕의 죽음을 앞당겼고, 지기스문트가 왕위를 계승했다.

한편, 폴란드 왕국에도 많은 폴란드인 후스파 신자가 있었다. 폴란드는 13세기부터 종교적 관용이 제도적으로 실현되어 후스파가 종교적인 이유로 박해받지 않았다. 후스 전쟁 기간 동안 체코와 폴란드 후스파는 서로 연대하여 싸웠다.

2. 2. 후스 전쟁 (1419-1434)

한스 폰 폴렌츠가 이끄는 가톨릭 세력과 후스파 사이의 크라츠아우 전투


후스파의 바겐부르크(Wagenburg)


프라하 국립 박물관에 있는 원본을 바탕으로 재현한 후스파의 파비즈


1419년 바츨라프 왕의 죽음 소식은 프라하 시민들에게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혁명이 전국을 휩쓸었고,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되었으며, 교회 재산은 후스파 귀족들에 의해 몰수되었다.[3] 보헤미아가 세습 왕국인지 선거 왕국인지에 대한 논쟁은 그때부터 훨씬 후까지도 이어졌다. 특히 지기스문트가 왕위를 주장한 계보가 보헤미아 왕국이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는 선거 왕국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왕국의 섭정(바르텐베르크의 체네크(Čeněk of Wartenberg)) 역시 지기스문트가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지기스문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기스문트는 무력으로만 "자신의" 왕국을 얻을 수 있었다. 마르티노 5세 교황은 서방 가톨릭교도들에게 후스파에 맞서 무기를 들 것을 촉구하며 십자군을 선포했고, 12년간의 전쟁이 이어졌다.

후스파는 처음에는 방어적으로 전투를 벌였지만, 1427년 이후에는 공세로 전환했다. 그들은 종교적 목표 외에도 체코인의 민족적 이익을 위해 싸웠다. 온건파와 급진파가 연합하여 십자군의 공격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로 국경을 넘어 침략하기도 했다. 1430년 3월 23일, 잔 다르크는 후스파가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십자군을 이끌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했다.[8] 그러나 두 달 후 영국과 부르고뉴 군대에 사로잡히면서 이 위협을 실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기스문트 황제가 보헤미아를 상속하게 되자, 보헤미아의 후스파는 더욱 반항적으로 되었고, 황제는 보헤미아 정복을 위해 십자군을 조직하여 후스 전쟁이 일어났다. 후스파는 얀 지슈카가 이끄는 급진적인 타보르파를 중심으로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을 격퇴하고, 국왕의 폐위를 선언하여 후스파의 보헤미아 국가를 사실상 실현시켰다.

얀 지슈카 사후, 독일 원정(침략)도 감행했기 때문에 독일 민중에게는 재앙처럼 두려워졌다. 또한, 일부 후스파는 강도단과 같은 악화를 보여, 후스파의 편인 폴란드에서조차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폭력을 행사하여 폴란드 민중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보헤미아에서도 지도층의 부패, 전비 조달을 위한 중과세로 인한 농촌의 피폐가 문제가 되었다.

이윽고 후스파의 온건파가 급진파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황제와 화해하여 황제를 국왕으로 인정하고, 바젤 공의회에서 보헤미아에서는 교리가 인정되어 가톨릭교회로 복귀했다. 그 후, 폴란드에서도 단속에 나선 폴란드 왕국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후, 온건파는 보헤미아에서 가톨릭과 공존했지만 종교 개혁이 시작되자 프로테스탄트에 접근한다.

2. 3. 바젤 공의회와 프라하 협정 (1431-1436)

결국, 후스파의 반대자들은 우호적인 합의를 고려해야만 했다. 후스파는 1431년 10월 15일 바젤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청받았다.[9] 논의는 1432년 1월 10일에 시작되어 주로 프라하의 네 가지 조항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젤 공의회와 보헤미아 사이의 반복된 협상 끝에, 프라하의 보헤미아-모라비아 주 의회는 1433년 11월 30일 프라하의 ''"콤팍타타"''를 수락했다. 이 합의는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두 가지 형태의 성찬을 허용했지만, 그리스도가 각 형태에 온전히 현존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조건 하에, 후스파 개혁의 나머지 부분은 더 이상 강조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이었다.[9] 자유 설교는 조건부로 허용되었다. 교회 위계질서가 사제를 승인하고 임명해야 했고, 주교의 권한을 고려해야 했다. 성직자의 세속적 권력을 금지하는 조항은 거의 뒤집혔다.

타보르파는 따르기를 거부했다. 칼릭스파는 로마 가톨릭과 연합하여 1434년 5월 30일 리파니 전투에서 타보르파를 격파했다.[10] 그때부터 타보르파는 중요성을 잃었지만, 후스파 운동은 폴란드에서 5년 더 계속되어 폴란드 왕당파가 그로트니키 전투에서 폴란드 후스파를 물리칠 때까지 지속되었다. 1436년 이흘라바 주 의회는 ''"콤팍타타"''를 확인하고 법적 효력을 부여했다. 이로써 보헤미아와 로마, 서방 교회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관을 차지했다.[10] 그의 반동적인 조치는 전국에 발효를 일으켰지만, 그는 1437년에 사망했다. 프라하 주 의회는 1444년에 후스파에게 불쾌감을 준 위클리프의 성만찬 교리를 이단으로 배척했다. 대부분의 타보르파는 이제 후스파의 일파인 양종파에 가담했다. 나머지는 "그리스도의 법의 형제들"(Unitas Fratrum|우니타스 프라트룸la) (모라비아 교회의 역사 참조)에 합류했다.

2. 4. 후스파의 유산 (1436-현재)

1462년, 비오 2세는 "콤팍타(Compacta)"를 무효로 선언하고 양종의 성찬을 금지했으며, 포데브라디의 게오르크 왕을 로마 교회와의 무조건적인 화합을 약속한다는 조건으로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여 보헤미아-헝가리 전쟁 (1468년-1478년)으로 이어졌다.[11] 그의 후계자인 블라디슬라우스 2세는 로마 가톨릭교도를 지지했고 칼릭스틴파의 열렬한 성직자들에 대해 조치를 취했다. 우트라키스트파의 어려움은 해마다 증가했다.[11] 1485년, 쿠트나호라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교도와 우트라키스트파 사이에 31년 동안 지속된 합의가 이루어졌다. 1512년 의회에서야 양쪽 종교의 동등한 권리가 영구적으로 확립되었다.[11] 마르틴 루터의 등장은 우트라키스트파 성직자들에 의해 환영받았고, 루터 자신도 후스의 교리와 자신의 교리 사이에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랐다.[11] 그러나 모든 우트라키스트파가 독일의 종교 개혁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로마 교리로 돌아갔고, 다른 세력들은 이미 1457년에 "보헤미아 형제단"을 조직했다.[11]

막시밀리안 2세 황제 치하에서 보헤미아 주 의회는 보헤미아 신앙고백서를 수립했고, 이에 루터파, 개혁파, 그리고 보헤미아 형제들이 동의했다. 그때부터 후스파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1620년 11월 8일 흰산 전투 이후 로마 가톨릭이 다시 강력하게 확립되어 체코 지역의 종교적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11]

모라비아 형제단의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모라비아 및 독일과 그 여러 주들)의 다양한 남동부 여러 공국들을 떠나거나, 혹은 믿음을 비밀리에 실천할 것을 강요받았다.[11] 그 결과, 구성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북서부 유럽으로 흩어졌다. 형제단의 가장 큰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체코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던 폴란드의 리사(레슈노)에 있었고, 모라비아에는 작고 고립된 집단들이 있었다.[11] 얀 아모스 코메니우스를 포함한 일부는 서유럽, 주로 저지대 국가로 도망쳤다. 1722년 작센(현재 독일)의 헤른후트에 정착한 후스파들은 모라비아 교회의 출현을 가져왔다.[11]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체코 지역은 합스부르크 군주제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되찾아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다 (마사리크와 후스파 전통을 계승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덕분에, 군대의 이름으로).[11]

오늘날 후스파 전통은 모라비아 교회, 형제 연합 (텍사스),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에서 계승되고 있다.[2][12]

15세기 전반, 보헤미아(체코)에서 후스파 급진파가 소멸한 후, 많은 체코 후스파 신자들은 폴란드 남부로 대거 망명했다. 18세기 후반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 왕국이 멸망하자, 후스파 계통의 사람들은 외세의 엄혹한 통치가 시작된 폴란드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고, 현재도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라비아 형제단 등이 남아 있다.[11] 그들은 왈도파 등 여러 종파를 합류시켰다. 존 웨슬리 등 기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중에도 후스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11]

30년 전쟁은 후스 전쟁을 모방하는 형태로 발발했다. 보헤미아의 후스파 자체는 30년 전쟁 초기에 1620년 흰산 전투에서 프로테스탄트 계열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패배하면서 완전히 궤멸했다. 이때도 많은 체코 귀족들이 폴란드로 망명했다.[11]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보헤미아 지역의 가톨릭 개혁 운동은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에 따른 민족 의식의 고양으로 후스파 교리로의 복귀와 가톨릭으로부터의 이탈 운동으로 변화하여,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1920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교회가 설립되었다. 동 교회는 후스파의 계승자를 자칭하며, 1971년에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로 개칭했지만 큰 세력은 아니다.[11]

3. 주요 분파

후스파 운동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시작되어 보헤미아 왕관령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헝가리 왕국(현재 슬로바키아) 북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3][4][5][6] 이는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한 지역 운동이었으며, 주요 양립파 운동으로 타보르파, 아다미파, 오레비파, 고아파를 포함한 더 작은 지역 세력이 있었다.

후스파는 1415년부터 1419년까지 조직되었으며, 단일 운동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양한 파벌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후스 전쟁에서 서로 대립하기도 했다. 평화주의자 페트르 첼치츠키는 양 파벌에서 이탈했는데, 그의 가르침은 보헤미아 형제단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후스파의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구분명칭특징비고
온건파프라하 후스파, 보헤미아 후스파 귀족, 자테츠와 루니의 후스파, 기타 양쪽 성찬파/칼릭스틴파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가톨릭 교회와의 타협을 모색. 교회의 전반적인 계층 질서와 예배 형식을 유지하면서 개혁 추구.프라하 4개조를 통해 양쪽 성체 영성체 등을 주장
급진파타보르파, 오레비트파, 아다미파, 고아파, 기타 급진 후스파성경 중심의 철저한 개혁과 사회 변혁 추구. 존 위클리프의 교리를 따르며 수도원 성직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사도 시대 교회의 회복 열망.화체설 부정, 성상 숭배, 금식, 면죄부 등 거부



이들 분파는 후스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주요 후스파 신학자로는 페트르 첼치츠키, 프라하의 예롬이 있으며, 후스파 출신의 체코 국가 영웅으로는 얀 지슈카가 있다. 후스파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 운동은 사회 문제에 의해 추진되었고 체코 민족 의식을 강화했다.

3. 1. 온건파 (우트라키스트)

후스파 온건파는 우트라키스트라고도 불리며,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가톨릭 교회와의 타협을 모색했다. 이들은 교회의 전반적인 계층 질서와 예배 형식을 유지하면서 개혁을 추구했다.[13]

이들의 핵심 주장은 1420년에 발표된 프라하 4개조에 담겨 있다.[14]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4]

  •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파
  • 양쪽 성체 영성체(빵과 포도주를 사제와 평신도 모두에게 제공)
  • 성직자의 청빈과 교회 재산 몰수
  • 신분에 관계없이 대죄에 대한 처벌


온건파는 프라하 대학교와 시민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프라하파'라고도 불렸다. 특히 두 번째 조항을 강조하여 '양쪽 성찬파'(라틴어 ''utraque'') 또는 '칼릭스틴파'(라틴어 ''calix'' 잔)라고도 불렸으며, 잔은 이들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후스파는 1431년 바젤 공의회에 초청받아[9] 1433년 콤팍타타를 수락했다.[9] 이 합의는 두 가지 형태의 성찬을 허용했지만, 그리스도가 각 형태에 온전히 현존한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졌다.[9]

3. 2. 급진파 (타보르파)

얀 지슈카를 중심으로 한 타보르파성경 중심의 철저한 개혁과 사회 변혁을 추구했다. 이들은 존 위클리프의 교리를 따르며 수도원 성직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사도 시대 교회의 회복을 열망했다. 이는 기존의 계층 질서를 부정하고 교회 재산을 세속화하는 것을 의미했다.[15]

타보르파는 화체설을 부정하고, 성경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성상 숭배, 금식, 불필요한 휴일, 면죄부 등을 거부했다.[15] 보헤미아 왕국 남쪽의 타보르를 거점으로 삼고, 하나님의 법의 적들을 파괴하고 그의 왕국을 칼로 수호하고자 했다.[16]

타보르파는 후스 전쟁에서 얀 지슈카의 지휘 아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얀 지슈카 사후에도 독일 원정을 감행하여 독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는 강도와 같은 행태를 보여 폴란드 민중에게 미움을 샀고, 보헤미아 내에서도 부패와 중과세로 농촌이 피폐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후스파 온건파는 급진파를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황제와 화해했다. 바젤 공의회에서 보헤미아의 교리가 인정되면서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다.

3. 3. 기타 분파

후스파는 1415년부터 1419년까지 조직되었으며, 단일 운동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후스 전쟁에서 서로 대립했던 다양한 파벌로 구성된 운동이었다. 초기에는 두 당파가 형성되었고, 소수의 사람들은 평화주의자 페트르 첼치츠키 주변에서 두 당파 모두에서 이탈했는데, 그의 가르침은 보헤미아 형제단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후스파는 크게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눌 수 있다.

  • 온건파:
  • 프라하 후스파
  • 보헤미아 후스파 귀족
  • 자테츠와 루니의 후스파
  • 기타 양쪽 성찬파/칼릭스틴파
  • 급진파:
  • 타보르파
  • 오레비트파
  • 아다미파
  • 고아파
  • 기타 급진 후스파


온건파(우트라키스트)는 가톨릭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귀족과 부유층이 중심이었다. 반면, 급진파(타보르파)는 도시의 빈민과 농민이 중심이었으며, 교리뿐만 아니라 철저한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이들은 리파니 전투에서 온건파에 의해 궤멸되었다.

얀 지슈카파(오레브파)는 1423년에 타보르파와 거리를 둔 얀 지슈카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사상적으로는 온건파와 급진파의 중간에 위치했다. 얀 지슈카 사후에는 고아파라고 불렸다.

아담파는 성서 원리주의의 과격파로, 타보르파의 분파였지만 이단으로 선고되어 궤멸되었다.

급진파인 타보르파, 오레비테파, 그리고 시로트치파(고아파)는 존 위클리프의 교리와 더욱 과감하게 동일시하며, 수도원 성직자들에 대한 그의 강렬한 증오와 사도 시대의 교회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려는 그의 열망을 공유했다. 이는 기존의 계층 제도를 제거하고 교회 재산을 속세화하는 것을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위클리프의 성찬 교리에 매달렸고, 화체설을 부정했으며,[15] 이것이 그들을 온건파와 구별하는 주요 지점이다.

급진파는 "''sufficientia legis Christi''" 즉, 신의 법(성경)이 교회뿐 아니라 정치적, 시민적 문제에서도 인간 사회의 유일한 규칙과 기준이라고 설파했다. 따라서 그들은 1416년 초부터 성인과 성상의 숭배, 금식, 불필요한 휴일, 맹세,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 귀에 속삭이는 고해성사, 면죄부, 견진성사병자성사와 같은 성례전 등 성경에 근거가 없다고 믿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제를 선택했다.

급진파는 전국에 집회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첫 번째 무장 공격은 프라하 남쪽 루즈니체 강가의 우스티(오늘날의 세지모보 우스티)라는 작은 마을에 가해졌다. 그러나 그곳이 방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있던 옛 마을의 잔해에 정착하여 새로운 마을을 세웠는데, 그들은 그곳을 타보르라고 명명했다("타보르"는 체코어로 "캠프" 또는 "진영"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16]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으로 예상되는 산의 전통적인 이름이기도 하다; 마가복음 13장 참조). 따라서 그들은 타보르파라고 불렸다. 그들은 급진적인 후스파의 핵심 세력을 구성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의 법의 적들을 파괴하고 (곧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그의 왕국을 칼로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종말론적 비전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의 정착지를 보존하고 그들의 이념을 확산하기 위해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고, 초기에 그들은 엄격한 체제를 준수하여 살인과 간음, 위증, 고리대금과 같은 가벼운 죄에 대해 동일하게 가장 가혹한 처벌을 내렸으며, 당시 사회 질서에 엄격한 성경적 기준을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타보르파는 일반적으로 오레비테파(후에 고아파라고 불림)의 지지를 받았는데, 오레비테파는 흐라데츠 크랄로베를 중심으로 한 후스파의 보헤미아 동부 종파였다.

후스파 내부에는 다양한 그룹이 혼재하여 끔찍한 내부 항쟁이 벌어졌다.

4. 주요 인물

후스파 운동은 얀 후스의 종교 개혁 사상에서 비롯되었으며, 페트르 첼치츠키, 프라하의 예롬과 같은 신학자들과 얀 지슈카와 같은 군사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특히 얀 지슈카는 교황청이 보헤미아에 선포한 5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맞서 싸운 체코의 국가적 영웅으로 꼽힌다.[3][4][5][6]


  • 얀 후스: 후스파 운동의 선구자로, 성체에 평민도 참여해야 하며 체코어예배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결받고 화형당했다.
  • 얀 지슈카: 후스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로, 타보르파를 이끌고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을 격퇴했다.
  • 페트르 첼치츠키: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후스파 운동에 참여했으며, 그의 가르침은 보헤미아 형제단의 기초가 되었다.
  • 프라하의 예롬: 후스파의 주요 신학자이다.
  • 이지: 보헤미아의 왕으로, 바젤 공의회와의 협상을 통해 ''"콤팍타타"''를 체결하고 보헤미아와 로마 교회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4. 1. 얀 후스



얀 후스는 후스파 운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의 종교 개혁 사상은 체코인들의 민족의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후스는 빵과 포도주 두 가지 성체에 평민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체코어예배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독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결국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이단으로 판결받고 화형당했다.[1]

당시 보헤미아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으며 독일어 사용이 강요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후스의 주장은 체코인들의 민족 운동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가졌다.

1414년 후스가 체포되자 체코 지방에서는 큰 반발이 일어났다. 지기스문트 황제에게 얀 후스의 석방을 বারবার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후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직자와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났다. 대주교조차도 이러한 분노를 피하기 어려웠다. 후스에 대한 처우는 전국적인 수치로 여겨졌고, 그의 죽음은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다. 바츨라프 4세 국왕은 지기스문트에 대한 원한 때문에 콘스탄츠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분노를 표현했다. 그의 왕비는 공개적으로 후스의 친구들을 지지했고, 후스파들이 정부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일부 영주들은 연맹을 결성하여 성경의 명령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주교의 권력에 복종하고, 자신들의 소유지에서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되는 것을 보호하겠다고 서약했다. 분쟁이 있는 경우에는 대학이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후스파 귀족 전체가 이 연맹에 가입했다. 1417년까지 귀족들은 공의회의 후스 처우에 대해 항의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몇몇 하급 귀족과 남작들은 1415년 항의 서한에 서명한 후, 가톨릭 사제들을 교구에서 내쫓고 빵과 포도주 모두로 성찬을 베풀 의향이 있는 사제들로 대체했다. 포도주 성배는 후스파 운동의 중심적인 상징이 되었다.[7] 만약 국왕이 이 연맹에 합류했다면, 이들의 결의는 법적으로 승인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왕은 이를 거부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공의회를 지지하는 새로운 로마 가톨릭 영주 연맹에 가담했다. 이로 인해 내전의 가능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마르틴 5세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후스의 가르침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재개했다. 그는 후스의 교리를 완전히 뿌리뽑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바츨라프 국왕의 협력을 얻고자 했다. 1418년,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의 기독교 이단들이 더 이상 보호를 받으면 종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형제를 공의회의 입장으로 끌어들였다. 후스파 정치인들과 군 지휘관들은 나라를 떠나야 했고,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다시 돌아왔다. 이러한 조치들은 1419년 바츨라프 국왕의 죽음을 앞당긴 전반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그의 상속자는 지기스문트였다.

4. 2. 얀 지슈카



후스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한 얀 지슈카타보르파를 중심으로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을 격퇴하고, 국왕의 폐위를 선언하여 후스파의 보헤미아 국가를 사실상 실현시켰다.[10]

얀 지슈카 사후, 후스파는 독일 원정(침략)도 감행했기 때문에 독일 민중에게는 재앙과 같은 존재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10] 일부 후스파는 강도단과 같은 악행을 저질러, 후스파를 지지하던 폴란드에서조차 마을을 돌아다니며 폭력을 행사하여 폴란드 민중에게 미움을 받았다. 보헤미아에서도 지도층의 부패, 전비 조달을 위한 중과세로 농촌이 피폐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10]

4. 3. 페트르 첼치츠키

페트르 첼치츠키는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후스파 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그의 가르침은 보헤미아 형제단의 기초가 되었다.

분류:후스 전쟁

분류:보헤미아의 종교 개혁

분류:기독교 평화주의

4. 4. 이지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 국왕은 지기스문트에 대한 원한 때문에 처음에는 콘스탄츠에서 일어난 얀 후스의 화형 사건에 대해 분노했다. 그의 왕비는 공개적으로 후스의 친구들을 지지했고, 후스파들이 정부의 수장에 섰다.[1]

특정 영주들은 연맹을 결성하여, 그들의 모든 소유지에서 복음의 자유로운 전파를 보호하고, 그 명령이 성경의 명령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주교의 권력에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 대학은 분쟁이 있는 사항을 중재했으며, 후스파 귀족 전체가 이 연맹에 가입했다. 만약 국왕이 합류했다면, 그 결의안은 법적 승인을 받았을 것이나, 그는 거부하고 국왕,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고 공의회를 지지할 것을 서약한 새로 결성된 로마 가톨릭 영주 연맹에 접근했다. 이로 인해 내전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418년,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의 기독교 이단들이 더 이상 보호를 받으면 종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의 형제를 공의회의 입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후스파 정치인들과 군 지휘관들은 나라를 떠나야 했고,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복귀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1419년 마비성 발작으로 바츨라프 국왕의 죽음을 앞당긴 전반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그의 상속자는 지기스문트였다.

바젤 공의회와 보헤미아 사이의 반복된 협상 끝에, 프라하의 보헤미아-모라비아 주 의회는 1433년 11월 30일 프라하의 ''"콤팍타타"''를 수락했다. 1436년 이흘라바 주 의회는 ''"콤팍타타"''를 확인하고 법적 효력을 부여했다. 이로써 보헤미아와 로마, 서방 교회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관을 차지했다.[10]

5. 국제 관계

후스파 운동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시작되어 보헤미아 왕관령 전역( 모라비아, 실레시아)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헝가리 왕국(현재 슬로바키아) 북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헝가리인들은 후스파를 거부했고 후스파 병사들의 약탈 행위는 악명을 떨쳤다.[3][4][5][6]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트란실바니아에는 종교적 불관용에 직면한 아주 작은 후스파 임시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보헤미아로 이동했다.

1430년 3월 23일, 잔 다르크는 후스파에게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십자군을 이끌겠다는 편지를 썼지만,[8] 두 달 후 영국과 부르고뉴 군대에 사로잡혀 실행하지 못했다.

얀 지슈카 사후, 후스파는 독일 원정(침략)을 감행하여 독일 민중에게 재앙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 후스파는 강도단과 같은 악행을 저질러, 후스파를 지지하던 폴란드에서조차 민중의 미움을 샀다.

5. 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의 관계

폴란드 왕국에는 보헤미아에 필적하는 규모의 폴란드인 후스파 신자가 있었다. 보헤미아와 달리 폴란드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아래 13세기부터 제도적으로 종교적 관용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후스파가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는 일은 없었다. 후스 전쟁 기간에는 수천 명의 체코 후스파가 의용병으로서 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 편을 들거나, 수천 명의 폴란드인 후스파가 보헤미아에 원정을 가서 체코 후스파를 돕는 등 서로 연대하여 적과 싸웠다.

일부 후스파는 강도단과 같은 악행을 저질러, 후스파의 편인 폴란드에서조차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폭력을 행사하여 폴란드 민중에게서 미움을 받기도 했다.

5. 2. 기타 국가들과의 관계

헝가리 왕국(현재 슬로바키아) 북부 지역에도 후스파가 영향을 미쳤지만, 헝가리인들은 후스파를 거부했고 후스파 병사들의 약탈 행위는 악명을 떨쳤다.[3][4][5][6]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트란실바니아에는 종교적 불관용에 직면한 아주 작은 후스파 임시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보헤미아로 이동했다.

1419년 바츨라프 왕의 죽음 이후, 마르티누스 5세 교황은 서방 가톨릭교도들에게 후스파에 맞서 무기를 들 것을 촉구하며 십자군을 선포했고, 12년간의 전쟁이 이어졌다. 후스파는 종교적 목표 외에도 체코인의 민족적 이익을 위해 싸웠으며, 온건파와 급진파가 연합하여 십자군의 공격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로 국경을 넘어 침략하기도 했다.

6. 현대적 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 치하에서 보헤미아 주 의회는 보헤미아 신앙고백서를 수립했고, 이에 루터파, 개혁파, 보헤미아 형제들이 동의했다. 그러나 1620년 11월 8일 흰산 전투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시 강력하게 확립되면서 체코 지역의 종교적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11]

모라비아 형제단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을 떠나거나, 믿음을 비밀리에 실천해야 했다. 그 결과, 구성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북서부 유럽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서유럽, 주로 저지대 국가로 도망쳤고, 1722년 작센(현재 독일)의 헤른후트에 정착한 후스파들은 모라비아 교회의 출현을 가져왔다.[12]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체코 지역은 독립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다. 오늘날 후스파 전통은 모라비아 교회, 형제 연합,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에서 계승되고 있다.[2][12]

6. 1. 종교 개혁의 선구자

후스는 빵과 포도주 양쪽의 성찬에 평민도 참여하는 양종 성체를 주장하고, 체코어 예배를 행하며,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지배층인 독일로부터 반감을 샀고,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다. 당시 보헤미아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독일어 사용이 강요되는 상황이었기에, 후스파 운동은 체코인들의 민족 운동적 성격도 강하게 띠었다.[1]

후스파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중요한 선구자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종교 운동은 사회 문제와 맞물려 체코 민족 의식을 강화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3][4][5][6] 얀 지슈카는 후스파 출신의 체코 국가 영웅으로, 교황청이 후스파 보헤미아에 선포한 5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한 인물이다. 주요 후스파 신학자로는 페트르 첼치츠키, 프라하의 예롬 등이 있다.

기독교 여러 교파의 성립 개요를 나타내는 계통도.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등의 운동이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표현되어 있다.


폴란드 왕국에도 보헤미아 못지않은 수의 폴란드인 후스파 신자가 있었다. 보헤미아와 달리 폴란드는 13세기부터 제도적으로 종교적 관용을 실현했기에 후스파가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는 일은 없었다. 후스 전쟁 기간 동안 수천 명의 체코 후스파가 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 편을 들거나, 수천 명의 폴란드인 후스파가 보헤미아에 원정을 가 체코 후스파를 돕는 등 서로 연대하여 싸웠다.

15세기 전반, 보헤미아에서 후스파 급진파가 소멸한 후 많은 체코 후스파 신자들은 폴란드 남부로 망명했다. 18세기 후반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 왕국이 멸망하자, 후스파 계통의 사람들은 폴란드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모라비아 형제단 등이 그 예시이다. 존 웨슬리 등 기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중에도 후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30년 전쟁은 후스 전쟁을 모방하는 형태로 발발했다. 보헤미아의 후스파는 30년 전쟁 초기 1620년 흰산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패배하면서 궤멸했다. 이때 많은 체코 귀족들이 폴란드로 망명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보헤미아 지역의 가톨릭 개혁 운동은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에 따른 민족 의식 고양으로 후스파 교리로의 복귀와 가톨릭으로부터의 이탈 운동으로 변화했다. 1920년에는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는 후스파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1971년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로 개칭했지만 큰 세력은 아니다.

6. 2. 체코 민족 정체성 형성

후스는 빵과 포도주 성찬에 평민이 참여하는 두 가지 성체를 주장하고, 체코어 예배를 행하며, 당시 지배자인 독일로부터 비판을 받고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기 때문에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이단으로 단정된 후 화형에 처해졌다.[1] 당시 보헤미아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고 독일어가 강요되는 상황이었기에, 체코인의 민족 운동으로서의 측면이 강했다.

후스파 운동은 주로 종교적인 운동이었지만, 사회 문제에 의해 추진되었고 체코 민족 의식을 강화했다.[3][4][5][6]

6. 3. 종교적 자유와 저항 정신

얀 후스의 화형(1415)은 보헤미아 왕국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후스파 운동으로 이어졌다.[1] 후스파 운동은 종교적 자유와 억압에 대한 저항 정신을 상징한다. 이 운동은 체코인들의 민족 의식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중요한 선구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4][5][6]

콘스탄츠 공의회는 얀 후스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화형에 처했지만,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 주민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1] 이들은 후스를 순교자로 여기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후스파 운동을 전개했다. 후스파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권리를 주장했으며, 특히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양형 성찬을 강조했다.[7]

후스파 운동은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체코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억압에 맞서는 저항 정신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종교계가 보여준 역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종교계는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후스파는 교황청이 선포한 다섯 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맞서 싸웠으며,[3] 이 과정에서 얀 지슈카와 같은 영웅적인 인물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저항은 종교적 신념과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참조

[1] 서적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2] 서적 The Czechoslovak heresy and schism: the emergence of a national Czechoslovak church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75
[3] 문서 Spiesz et al. 2006
[4] 문서 Bartl 2002
[5] 문서 Kirschbaum 2005
[6] 문서 Spiesz et al. 2006
[7] 간행물 The Nobility and the Making of the Hussite Revolu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8
[8] 웹사이트 Joan of Arc's Letter to the Hussites (March 23, 1430) http://archive.joan-[...]
[9] 웹사이트 The magnificent ride: the first reformation in Hussite Bohemia http://archive.org/d[...] Aldershot, Hants ; Brookfield, Vt. : Ashgate 1998
[10] 웹사이트 Medieval heresy http://archive.org/d[...] B. Blackwell 1992
[11] 서적 Masaryk a legie (Masaryk and legions) Paris Karviná 2019
[12] 서적 Nebraska History, Volume 74 Nebraska State Historical Society 1993
[13] 간행물 The Trope Gregorius presul meritis in Bohemian Tradition: Its Origins, Development, Liturgical Function and Illustration http://www.brrp.org/[...] 2023-11-18
[14] 웹사이트 Four Articles of Prague http://global.britan[...]
[15] 간행물 John Wyclif and Hussite Theology 1415–1436 https://www.jstor.or[...] 1973
[16] 서적 Místní jména v Čechách: Jejich vznik, původní význam a změny; part 4, S–Ž Czechoslovak Academy of Sciences 1957
[17] 뉴스 화형대 오른 ‘거위’ 얀 후스, 100년 뒤 ‘백조’ 루터를 예견하다 https://www.joongang[...] 2023-01-15
[18] 서적 The Czechoslovak heresy and schism: the emergence of a national Czechoslovak church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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