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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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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은 101년부터 106년까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를 상대로 벌인 일련의 전쟁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초기 충돌,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전쟁, 트라야누스의 두 차례의 원정으로 나뉘며,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결과 다키아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고, 로마의 문화와 제도가 이식되었다. 다키아의 풍부한 자원은 로마 경제에 기여했으며, 로마는 다키아를 통해 군사적, 경제적 이점을 얻었다. 이 전쟁은 트라야누스 시대의 팽창주의 정책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며, 로마의 건축 사업과 내부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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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
개요
분쟁다키아 전쟁의 일부
시기101년–102년 및 105년–106년
장소고대 다키아
원인알 수 없음
영토 변화시레트강 서쪽의 다키아 지역이 로마 제국에 합병됨.
바나트와 올테니아에 이아지게스족의 괴뢰 왕국이 세워짐.
결과로마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Dacian Draco.svg|40px]] 다키아
록솔라니소 플리니우스, Epistulae, X, 74.
부리족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Book LXVIII.8
바스타르나에필리포 코아렐리, Trajan's column, Roma, 1999, tavv. 164-165 (CI-CII/CXXXVII-CXL) pp. 208-209.
교전국 2로마 제국
이아지게스족
지휘관 및 지도자
다키아 측 지휘관데케발루스
로마 측 지휘관트라야누스
병력 규모
다키아 측200,000명 (다키아인)
게르만족 및 사르마티아족 동맹군
로마 측16개 군단 (보병 150,000명 ~ 175,000명 + 보조병력)
피해 규모
다키아 측심각한 피해
500,000명 포로카시우스 디오, LXVIII, 14, 4-5.
필리포 코아렐리, Trajan's column, Roma, 1999, tavv. 164-165 (CI-CII/CXXXVII-CXL) pp. 208-209.
소 플리니우스, Epistulae, VIII, 4, 2.
로마 측알 수 없음
참여 부대
로마군 참여 부대














주요 전투
관련 전투 목록


2. 초기 충돌

기원전 82-44년 사이에 군림했으며, 가장 위대한 다키아의 왕이라 여겨지는 부레비스타 이래로, 다키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위협으로 떠올랐다.[24] 카이사르는 다키아인들에 대한 원정 착수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부레비스타가 사망한 기원전 44년 이후 다키아의 상속 문제가 다키아를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4개 (기록에 따라서는 5개)의 부족 국가라는 분열로 이끌면서, 이 위협은 줄어들었다.[28]

이후에 아우구스투스는 다키아가 '요구 사항들'을 대가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맞서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사절단을 보낸 뒤에, 다키아와 분쟁으로 이어졌으며, 이 요구 사항들에 대해선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제안을 거부하였고 다키아인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지원을 해주었다. 기원전 29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다키아에 그 이전 해의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가 지휘하는 몇 차례 보복성 원정을 실시하여,[24] 막대한 피해를 일으키고 다키아의 다섯 왕 중에 세 명을 사살시켜 냈다.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에 대한 다키아의 약탈은 수 년간 계속되었지만, 다키아의 위협은 사실상 종료되었다.[28]

그 뒤, 로마 국경 지대를 따라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기간이 지나고, 서기 85년에서 86년 사이의 겨울에 디우르파네우스 (Diurpaneus) 장군이 이끄는 두라스의 군대가 모이시아 속주를 공격하여, 속주의 총독이었던 전직 집정관 오피우스 사비누스를 살해했다.

3. 도미티아누스의 다키아 전쟁 (86-89년)

기원전 82-44년 부레비스타 왕이 통치하던 시기, 다키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위협적인 존재였다.[24] 카이사르는 다키아 원정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부레비스타 사후 다키아는 4개(혹은 5개)의 부족 국가로 분열되며 위협이 감소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다키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지원을 제안하자,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를 보내 다키아를 공격, 큰 피해를 입히고 세 명의 왕을 사살했다.[24] 그러나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에 대한 다키아의 약탈은 계속되었다.[28]

86년, 다키아가 도나우강 유역의 로마 영토, 특히 모에시아 속주를 공격하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를 파견했다. 87년, 데케발루스 왕의 다키아에 대한 로마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제1차 타파에 전투에서 로마군은 패배하고 푸스쿠스는 전사했다. 88년, 테티우스 율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다키아를 재침공하여 승리했지만,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와 다키아는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로마가 다키아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로마에게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3. 1. 1차 전쟁의 원인

1세기 로마의 정책은 주변 국가와 속주의 위협을 즉시 억제하는 것이었다. 데케발루스 왕이 통치하던 다키아는 풍부한 자원(금, 은, 철, 구리)과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다. 특히 다키아인들은 금속 세공에 능숙하여 많은 전사들이 검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로마군의 군사적 이점을 감소시켰다.[28]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체결된 강화 조약은 로마에 불리한 내용이었다. 데케발루스는 로마로부터 재정 지원과 기술 지원을 받았지만, 이를 다키아의 방어 시설 강화에 사용했다.[27] 또한 데케발루스는 로마에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강화 조약을 위반했다.[27]

네로 황제의 화폐 개혁으로 인한 경제난과 다키아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소문도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다. 다키아는 25만 명의 잠재적 전투병을 동원할 수 있었고, 이웃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로마에 대항했다.[28]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적 경험이 풍부한 새 황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28]

4.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 (101-106년)

1세기 내내 로마는 이웃 국가와 속주에서 발생하는 위협을 즉시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제1차 타파에 전투 이후 체결된 강화 조약은 로마 제국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89년 강화 조약으로 데케발루스는 왕(rex amicus)으로 인정받아 로마의 위성국 왕이 되었지만, 로마로부터 받은 재정적 지원, 장인, 공성 무기 등은 다키아의 방어 시설 강화에 사용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조약이 부적절했으며, 96년 9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로 이어졌다고 본다.[27] 데케발루스는 로마에 계속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27]

당시 로마는 군사적 침략과 네로 황제가 발행한 저품질 금화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다키아의 황금과 값비싼 교역 상품에 대한 소문, 그리고 다키아인들의 반항적인 태도는 로마와의 분쟁을 부추겼다.

그러나 다른 긴급한 요인들도 로마의 군사 행동을 촉발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일반 귀족 출신 야만인 전사들의 10% 정도만이 검을 소유할 수 있었던 반면, 다키아는 철과 구리 자원이 풍부하고 숙련된 금속 세공업자들이 있어 많은 다키아인들이 검을 소유하여 로마의 군사적 이점을 감소시켰다.[28] 다키아는 250,000명의 잠재적 전투원을 동원할 수 있었고, 이웃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로마의 적대 세력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로마는 구체적인 방어 정책이 없었고 방어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에 군인 및 전술가로서 경험이 풍부한 신임 황제 트라야누스는 전쟁을 준비했다. 다키아가 상당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트라야누스는 다른 국경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이는 군대 인원 부족을 야기했다.[28]

트라야누스


101-102년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침공 경로


105-106년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침공 경로


기원전 70년, 부레비스타 왕은 다키아 전체를 통일하여 로마 공화정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부레비스타 사후 다키아는 4~5개의 부족 집단으로 분열되어 약화되었다. 개별 다키아 부족들이 로마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지만, 로마는 국내 내전이나 유대 속주, 브리타니아 등에서의 반란 진압에 집중하여 다키아와의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다키아가 다시 통일되고, 86년에 속주 모에시아를 포함한 도나우강 유역의 로마 제국 영토에 대한 본격적인 침입이 이어지자,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친위대장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를 군대(2개 군단)와 함께 모에시아로 파견했다. 87년, 데케발루스를 왕으로 하는 다키아에 대해 도미티아누스는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로마군은 다키아군과 타파이 부근에서 격돌했지만, 다키아군이 완승하여 푸스쿠스는 전사했다. 88년, 로마는 티투스 율리아누스(Tettius Iulianus)를 지휘관으로 다시 다키아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로마군이 승리했지만,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와 다키아는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로마가 다키아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로마에게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4. 1. 제1차 다키아 전쟁 (101-102년)

로마 원로원의 전쟁 승인을 받은 후, 101년경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침공을 준비했다. 이 전쟁은 로마의 군사력과 공학 기술이 돋보이는 전쟁이었다. 로마군은 두 개의 군단을 앞세워 다키아 중심부로 진격하며 도시와 마을을 불태웠다. 트라야누스는 제2차 타파에 전투에서 다키아군을 격파했다.[12]

101년에서 10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다키아와 동맹을 맺은 사르마티아족계 부족인 록솔라니족의 공격에 대비하며 다뉴브강 북쪽의 이아투루스강과 로시트사강이 만나는 지점(오늘날의 니코폴리스 아드 이스트룸) 근처에 모였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승리하면서 도시 이름이 붙여졌다.[13][14]

102년, 데케발루스는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로 진격하는 로마군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추가적인 소규모 교전 후 강화 조약을 맺기로 결정한다.[15] 이 전쟁은 로마의 중요한 승리로 끝났고,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에는 로마군 주둔지와 총독이 배치되었다.[15] 이후 트라야누스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가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다뉴브강 위에 건설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설계한 이 다리는 당시와 이후 몇 세기 동안 가장 큰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전쟁에서 로마군의 신속한 이동을 돕기 위한 목적이었다. 강화 조약에 따라 데케발루스는 북쪽과 동쪽에서 이주해오는 호전적인 부족들의 위협에 대비하여 튼튼한 동맹 지역을 만들기 위해 로마로부터 기술 및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지원은 다키아의 요새를 재건하고 군대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케발루스는 다시 로마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4. 2. 휴전기 (102-105년)

102년에 데케발루스는 추가적인 소규모 교전 이후에 강화 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이 전쟁은 로마의 중요한 승리로 끝났다.[29][30] 트라야누스 다리라고 알려진 다리가 로마 군단병의 이동을 돕도록 드로베타다뉴브강 너머로 건설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설계한 이 다리는 당시와 앞으로 몇 세기간 가장 큰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미래에 있을 전쟁에 로마군의 이동을 더 빠르게 하도록 하는 것을 의도했다.

강화 조건에 따라, 데케발루스는 북쪽과 동쪽 방향의 호전적인 이주민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튼튼한 동맹 구역을 형성하고자 로마에서 기술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지원 자원들은 다키아의 요새를 재건하고 군대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이후에 곧 데케발루스는 다시 한번 로마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4. 3. 제2차 다키아 전쟁 (105-106년)

1차 전쟁 이후, 데케발루스는 한동안 로마에 순응했지만, 곧 로마를 적대하는 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다뉴브강 너머의 로마 식민지들을 약탈했다.[12] 대담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트라야누스는 105년에 2차 전쟁을 위한 병력을 모았다.

트라야누스 다리의 잔해


첫 번째 분쟁 때처럼, 제2차 전쟁에는 로마군에 값비싼 비용을 치르게 한 몇 차례 유격전이 있었다. 많은 수의 동맹 부족군을 맞이한 로마 군단은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두 번째 잠정적인 강화 조약을 야기하였다. 결국, 데케발루스의 행동과 그의 반복된 강화 조약 위반에 자극받은 로마는 다시 병력을 동원하고 105년에 공격을 가하였다. 다음 해에 로마군은 조금씩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둘러싼 산악 요새들을 정복했다.[12] 아이두릭스 제2군단과 플라비아 펠릭스 제4군단, 페라타 제6군단의 분견대 (벡실라티오)가 참여한 가운데, 106년 여름 사르미제게투사 성벽 인근에서 최종적인 결정적 승리가 벌어졌다.

다키아군은 첫 번째 공격을 격퇴했지만, 토착민 귀족의 배반으로 로마군은 다키아 수도의 수로관을 찾아내 파괴하였다. 물과 식량이 떨어져가자, 수도는 결국 함락되어 파괴되었다. 데케발루스는 달아났지만, 로마군 기병대의 추격을 받다가 항복하기보다는 자결을 택하였다. 그럼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다키아 왕의 신뢰를 받던 비킬리스 (Bicilis)의 배신 덕에 로마군은 사르게시아/사르게티아강에서 데케발루스의 보물을 발견했는데, 카르코피노는 그 규모를 금 165,500 kg과 은 331,000 kg으로 평가했다. 마지막 전투는 포롤리숨 (Moigrad)에서 벌어졌다.

5. 전쟁의 결과 및 영향

트라야누스는 제국 전역에서 123일간의 승전 행사를 명했다. 다키아의 풍부한 금광은 로마 경제에 연간 를 기여했고, 로마의 향후 군사 활동 자금을 제공했으며, 유럽 곳곳의 로마 도시들의 급속한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된다.[28] 광산 활동 흔적은 여전히 확인 가능하며, 특히 로시아몬타너에서 두드러진다. 10만 명의 남성 노예들이 로마로 보내졌는데, 이는 향후 반란을 막기 위함이었고, 게미나 제13군단마케도니카 제5군단 등이 다키아에 영구 배치되었다. 다키아의 정복된 절반(남쪽)은 합병되어 속주(다키아 속주)가 된 한편, 북쪽 지역은 어떠한 국가도 형성하지 못했다.

이 두 번의 전쟁은 로마의 광범위한 확장주의적 군사 활동에서 주목할 만한 승리였다. 다키아 전쟁 종전은 로마에 지속적인 성장과 상대적 평화 시기의 시작을 나타냈다. 트라야누스는 광범위한 건축 사업을 시작했고 신용을 얻는 원인이 되어 그에게 ''담쟁이 덩굴''이라는 별칭이 붙었다.[28] 트라야누스는 로마의 공공 시설을 개선하며, 영예로운 시민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에 따라 내부 성장과 보편 제국으로서 강화라는 초석을 닦았다.

다키아 전쟁은 로마의 완승으로 끝났고, 이후 트라야누스는 로마 시내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또한, 다키아에서 산출되는 광물 자원(금, 은)은 트라야누스의 이후 원정 자금원이 됨과 동시에, 수도 로마를 비롯한 로마 통치하의 각 도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다키아인 남성 포로 10만 명은 노예가 되어 다키아에서 쫓겨났고, 대신 로마인이 이주하면서 다키아의 로마화가 진행되었다.

다키아에는 속주가 설치되었고, 사르미제게투사는 속주 주도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가 되었다. 다키아 속주는 황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포기될 때까지 약 160년 동안 로마 제국에 속했다.

덧붙여, 트라야누스는 『갈리아 전기』를 저술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본받아, 스스로 다키아 전쟁의 경과를 기록한 『다키아 전기』를 집필했지만, 이미 산실되었다. 다키아 전쟁의 일련의 경위는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는 트라야누스 기념주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6. 다키아 전쟁 관련 인물

기원전 1세기 부레비스타 왕은 다키아를 통일하여 로마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7] 그러나 부레비스타 사후 다키아는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약화되었다. 이후 데케발루스 왕 시기에 다키아가 다시 통일되었고, 86년 도나우강 유역의 로마 제국 영토를 침입하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를 보내 반격했다. 87년 타파이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키아군이 승리하고 푸스쿠스는 전사했다.[9] 88년 로마는 테티우스 율리아누스를 지휘관으로 다시 다키아를 침공하여 승리했지만,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와 다키아는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8] 도미티아누스와 외교적인 협력도 있었지만, 데케발루스는 로마에 계속 반대했다.[10] 트라야누스는 숙련된 군인이자 전술가였으며, 다키아가 상당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다른 국경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11]

7. 다키아 전쟁 관련 전투

제1차 타파에 전투는 87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다키아군에게 패배한 전투이다. 타파이 부근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다키아군이 완승을 거두었고, 푸스쿠스는 전사하였다.[12]

102년 타파에 전투에서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다키아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106년, 사르미제게투사 전투는 제2차 다키아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였다. 제2군단 "아디우트릭스", 제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 제6군단 "페라타"의 분견대가 참전한 로마군은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함락시켰다. 다키아인들은 첫 공격을 막아냈지만, 로마군은 현지 귀족의 배신으로 수도의 급수관을 파괴하여 도시를 함락시켰다.[12]

8. 다키아의 문화와 유산

다키아 전쟁은 로마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트라야누스는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다키아에서 생산되는 금, 은 등의 광물 자원은 트라야누스의 이후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였고, 로마를 포함한 로마 통치하의 여러 도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 다키아인 남성 포로 10만 명은 노예가 되어 다키아에서 추방되었고, 그 대신 로마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다키아의 로마화가 이루어졌다.[1]

다키아에는 다키아 속주가 설치되었고, 사르미제게투사는 속주 주도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Sarmizegetusa Regia)가 되었다.[1] 다키아 속주는 황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포기할 때까지 약 160년 동안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1]

트라야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를 본받아 다키아 전쟁의 경과를 기록한 『다키아 전기』를 직접 썼지만,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1] 다키아 전쟁의 과정은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는 트라야누스 기념주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1]

9. 다키아 전쟁에 대한 현대적 해석

다키아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트라야누스는 로마 시내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1] 다키아에서 나는 금, 은 등의 광물 자원은 트라야누스의 이후 원정에 쓰일 자금이 되었고, 로마를 비롯한 로마 통치하의 여러 도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 다키아인 남성 포로 10만 명은 노예가 되어 다키아에서 쫓겨났으며, 대신 로마인이 이주하면서 다키아의 로마화가 진행되었다.[1]

다키아에는 속주(다키아 속주)가 설치되었고, 사르미제게투사는 속주 주도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Sarmizegetusa Regia)가 되었다.[1] 다키아 속주는 황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포기할 때까지 약 160년 동안 로마 제국에 속했다.[1]

트라야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를 본받아 다키아 전쟁의 경과를 기록한 『다키아 전기』를 직접 썼지만,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1] 다키아 전쟁의 경위는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는 트라야누스 기념주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1]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볼 때, 다키아 전쟁은 강대국 로마 제국의 팽창주의 정책과 그로 인해 약소국 다키아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키아의 고유 문화와 정체성은 로마에 의해 훼손되었으며, 다키아인들은 노예로 전락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는 한국의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의 부정적인 측면과 강대국의 힘의 논리가 약소국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참조

[1] 문서 Epistulae
[2] 서적 History of Rome
[3] 서적 La colonna Traiana https://www.unilibro[...] Colombo 1999
[4] 문서
[5] 문서 Epistulae
[6] 서적 In The Name of Rome Orion 2004
[7] 서적 The Enemies of Rome: From Hannibal to Attila the Hun Thames & Hudson 2004
[8] 문서 1992
[9] 간행물 Trajan's Conquest of Dac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0] 백과사전 De Imperatoribus Romanis http://www.roman-emp[...] 2007-11-08
[11] 서적 The Dacian threat, 101-106 AD Caeros Publishing 2005
[12] 간행물 GIS Analysis and Spatial Networking Patterns in Upland Ancient Warfare: The Roman Conquest of Dacia 2021-01
[13] 문서 About the Roman frontier on the Lower Danube under Trajan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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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The Population: Dacians and Settlers https://mek.oszk.hu/[...] 20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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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In The Name of Rome https://archive.org/[...] Orion 2004
[21] 서적 The Enemies of Rome: From Hannibal to Attila the Hun Thames & Hudson 2004
[22] 서적 The Grand Strategy of the Roman Empire: From the First Century A.D. to the Third https://archive.org/[...] Johns Hopkins U.P. 1976
[23] 문서 카시우스 디오에 의하면
[24] 문서 다시 말하여,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라고도 알려진, 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초대 삼두정 인물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손자이다
[25] 서적 De Imperatoribus Romanis
[26] 서적 De Imperatoribus Romanis
[27] 백과사전 De Imperatoribus Romanis http://www.roman-emp[...]
[28] 서적 The Dacian threat, 101-106 AD Caeros Publishing 2005
[29] 문서 About the Roman frontier on the Lower Danube under Trajan
[3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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