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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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113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제국을 공격한 일련의 군사 작전이다. 아르메니아 왕위에 로마가 인정하지 않는 왕을 앉힌 것을 구실로 시작되었으며, 경제적 동기, 영토 확장,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을 모방하려는 야망 등 다양한 배경이 존재했다. 원정은 아르메니아 병합, 메소포타미아 침공, 파르티아 수도 크테시폰 함락 등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유대인의 반란과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인해 로마는 점령지를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이 전쟁은 트라야누스의 팽창주의 정책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며, 동방 무역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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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 |
---|---|
개요 | |
분쟁 명칭 |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
분쟁 시기 | 115년 – 117년 |
관련 전쟁 | 로마-파르티아 전쟁 |
장소 | 레반트,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
결과 | 로마의 승리 로마는 메소포타미아를 일시적으로 합병했으나, 트라야누스 사후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지 못함. 로마가 아디아베네를 정복했으나,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파르티아에 반환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제국 |
교전국 2 | 파르티아 제국 |
지휘관 | |
로마 제국 | 트라야누스 루시우스 퀴에투스 파르타마스파테스 |
파르티아 제국 | 오스로에스 1세 파르타마시리스 |
규모 | |
로마 제국 | 알 수 없음 |
파르티아 제국 | 알 수 없음 |
사상자 및 피해 | |
로마 제국 | 알 수 없음 |
파르티아 제국 | 알 수 없음 |
2. 배경
113년,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제국이 아르메니아 왕위에 로마가 받아들일 수 없는 왕을 앉히기로 결정한 것에 자극받아 마지막 원정을 시작했다.[19] 아르메니아는 네로 시대부터 약 50년 동안 로마와 파르티아가 헤게모니를 공유하던 지역이었다.[19]
현대 역사가들은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 결정에 경제적인 동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트라야누스는 아라비아 합병 후 보스라에서 홍해의 아일라까지 이어지는 트라이아나 노바 가도를 건설했다.[63] 페르시아만의 카락스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제 밖에 있는 유일한 인도 무역로의 서쪽 종착지였으며,[63] 이 지역의 통제는 수입품 가격을 낮추고 극동 지역과 로마의 교역 적자로 인한 귀금속 유출을 제한하는 데 중요했다.[63]
당시 팔미라 상인들과 카락스 간의 교역은 금석학 자료에 잘 기록되어 있다.[64] 카락스 통치자들의 영토는 바레인 섬들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으며,[65] 이는 페르시아만 지역으로 로마의 헤게모니를 확장할 가능성을 제시했다.[66] 트라야누스 원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는 파르티아 통제하의 셈족(아랍) 도시들을 통한 극동 무역 체제를 무너뜨리고, 로마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었을 수 있다.[67]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정복 당시 시리아 보조 군단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들은 이후 다키아 식민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68] 그는 낙타병을 포함한 팔미라 군인들을 자신의 병력으로 보충하여,[68] 카락스 합병이라는 목표에 팔미라의 지원을 확보했다.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가 페르시아만의 교역 흐름을 방해하거나 다뉴브 지역의 로마 국경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합병하려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69]
그러나 파르티아의 육로 무역 "통제"는 불확실하며, 중국 사료의 선택적 읽기에 근거한다는 반론도 있다. 파르티아를 통한 육로 무역은 파르티아 당국의 방해를 받지 않았고, 민간 경영에 맡겨졌다.[69] 2세기 메소포타미아의 상업 활동은 로마 제국 안팎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현상이었으며, 일관된 로마 제국의 정책은 없었다.[69] 모제스 핀리와 폴 벤 같은 학자들은 트라야누스 전쟁 배후의 외국 교역 "정책" 개념은 시대착오적이며, 로마의 극동 사치품 교역에 대한 관심은 경제 정책이 아닌 도덕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69] 로마와 인도 간의 교역은 균형을 이루었고, 대 플리니우스는 갠지스 평원을 로마 제국의 황금 근원 중 하나로 묘사했다.[69] 핀리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공격을 "상업적 전쟁"의 예시로 보았다.[69]
카시우스 디오는 이 전쟁이 영토 합병과 명성이라는 미끼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보았다.[69] 영토 정복은 세금 징수, 특히 로마 제국으로 들어오는 상품에 부과되는 25%의 세금인 ''테타르테''(tetarte)와 연관되어 있었다.[7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정복을 모방하는 선전적 가치도 있었다.[72] 쿠샨 제국 대사들의 다키아 정복 기념행사 참석은 플루타르코스 같은 이들에게 마케도니아 동방 정복 재현의 꿈을 부추겼을 수 있다.[73]
트라야누스의 확장주의 정책은 히스파니아 출신 보수주의 원로원의원들의 지원을 받아 가능했다.[71] 로마 제국은 한계가 없었고, 트라야누스는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킬 기회를 이용했다.[74]
일부 현대 사학자들은 트라야누스의 본래 목표가 로마령 아르메니아 보호를 위해 하부르강(카부르강)을 따라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지르는, 더 방어 가능한 동방 국경 지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75] 이후 로마의 대 파르티아 전쟁들의 목표는 파르티아에 로마 주둔군을 세우는 것이었다.[75]
2. 1. 로마-파르티아 관계
네로 시대부터 로마와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19] 두 제국은 아르메니아에 대한 헤게모니를 공유해 왔으나,[19] 파르티아가 로마가 받아들일 수 없는 왕을 옹립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19]2. 2. 경제적 동기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는 경제적 동기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네로 시대 이후 약 50년간 로마와 파르티아 제국이 패권을 다투던 아르메니아 문제와 더불어, 경제적 요인도 작용했다는 것이다.아라비아 합병 후, 트라야누스는 보스라에서 홍해의 아일라를 잇는 트라이아나 노바 가도를 건설했다.[63] 이는 페르시아 만의 카락스가 로마의 직접 통제 밖에 있는 유일한 인도 무역로의 서쪽 종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63] 로마는 카락스를 통제하여 수입품 가격을 낮추고, 극동과의 교역 적자로 인한 귀금속 유출을 막고자 했다.[63]
팔미라 대상들과 카락스 간의 교역은 금석학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64] 카락스 통치자들의 영토는 바레인 섬들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으며,[65] 이는 로마의 페르시아 만 헤게모니 확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66]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의 통제하에 있던 셈족(아랍) 도시들을 통한 극동 무역 체계를 무너뜨리고, 로마의 통제하에 두려 했다.[67]
다키아 정복 당시, 트라야누스는 시리아 보조 군단의 도움을 받았고, 이들은 다키아 식민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68] 그는 낙타병을 포함한 팔미라군을 자신의 병력으로 보충하여,[68] 카락스 합병이라는 목표에 팔미라의 지원을 확보했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가 페르시아 만 교역 흐름을 방해하거나 다뉴브 지역 로마 국경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합병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69]
그러나 파르티아의 육로 무역 통제는 확실하지 않으며, 민간 경영에 맡겨졌다는 반론도 존재한다.[69] 2세기 메소포타미아의 상업 활동은 로마 제국 안팎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현상이었고, 일관된 로마 제국의 정책은 없었다.[69] 모제스 핀리와 폴 벤 같은 학자들은 트라야누스 전쟁의 외국 교역 "정책"은 시대착오적이며, 로마의 극동 사치품 교역에 대한 관심은 경제 정책이 아닌 도덕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69] 로마와 인도 간의 교역은 균형 잡혀 있었고, 대 플리니우스는 갠지스 평원을 로마 제국의 황금 근원 중 하나로 묘사했다.[69] 핀리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공격을 "상업적 전쟁"의 예시로 보았다.[69]
다른 관점은 이 전쟁을 영토 합병과 명성이라는 미끼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본다.[69] 영토 정복은 세금 징수와 관련이 있으며,[71] 특히 로마 제국으로 들어오는 상품에 부과되는 25%의 세금인 ''테타르테''(tetarte)와 연관되어 있었다.[71]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정복을 모방하는 선전적 가치도 있었다.[72] 쿠샨 제국 대사들의 다키아 정복 기념 행사 참석은 플루타르코스 같은 이들에게 마케도니아 동방 정복 재현의 꿈을 부추겼을 수 있다.[73]
트라야누스의 확장주의 정책은 히스파니아 출신 보수주의 원로원의원들의 지원을 받아 가능했다.[73] 로마 제국은 한계가 없었고, 트라야누스는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킬 기회를 이용했다.[74]
트라야누스의 본래 목표가 로마령 아르메니아 보호를 위해 하부르강을 따라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지르는, 더 방어 가능한 동방 국경 지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는 견해도 있다.[75] 이후 로마의 대 파르티아 전쟁들의 목표는 파르티아에 로마 주둔군을 세우는 것이었다.[75]
2. 3. 트라야누스의 야망
트라야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을 재현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야망을 품고 있었다.[72] 쿠샨 제국의 사절들이 다키아 정복 기념 행사에 참석한 것은,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일부 그리스-로마 지식인들과 함께 트라야누스의 측근들이 마케도니아의 동방 정복을 재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전리품에 대해 몽상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73]히스파니아 출신의 강력한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은 제국의 확장을 옹호했으며, 특히 리키니우스 수라가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71] 이들의 지원은 트라야누스의 영토 확장 정책 추진에 힘을 실어주었다.[74] 로마인들에게 그들의 제국은 원칙적으로 한계가 없었고, 트라야누스는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킬 기회를 잡았을 뿐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트라야누스의 목표가 단순히 로마의 동방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75] 이들은 트라야누스의 본래 목표가 로마령 아르메니아를 보호하기 위해 하부르강(카부르강)을 따라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지르는, 로마 제국의 동방 국경 지대를 좀 더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3. 전쟁 과정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10개 군단을 동원하여 사전에 신중하게 기획되었다.[76] 111년부터 플리니우스의 서신에 따르면, 비티니아 속주 당국은 통과하는 병력의 보급을 담당해야 했고, 지역 도시 의회와 의원들은 병력 보급으로 인해 증가한 비용의 일부를 부담해야 했다.[20] 따라서 이 원정은 시작부터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21]
원정은 크게 아르메니아 정복(114년)과 메소포타미아 원정(115-116년)으로 나뉜다.
3. 1. 아르메니아 정복 (114년)
트라야누스는 먼저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파르티아가 임명한 왕인 파르타마시리스를 폐위시켰다. 파르타마시리스는 이후 로마군에 구금된 상태에서 의문의 사고로 살해당했는데, 나중에 프론토는 그가 로마의 선의를 저버렸다고 묘사했다.[78] 트라야누스는 캅카스와 흑해의 동부 해안의 여러 민족들에게 로마의 패권을 인정받으며 아르메니아를 로마 제국의 속주로 병합했고, 이 과정은 114년 말까지 계속되었다.동시에, 다키아 전쟁 기간 자신의 고향인 마우레타니아[79]지역의 부대를 지휘하며 뛰어난 기병 지휘관[80]임을 보여준 루시우스 퀴에투스 군단장 지휘하의 로마군이 아르메니아의 아락세스강을 건너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와 마르디인들의 땅 (오늘날 길란주)으로 향했다.[81]
퀴에투스의 군사행동은 동쪽 방향으로 카스피해에, 북쪽 방향으로는 캅카스 구릉지대로 향하는 새롭고, 좀 더 방어할 수 있는 로마 국경의 확장을 목표로 한 것으로 보인다.[81]
3. 2. 메소포타미아 원정 (115-116년)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합병하기 위해 타우루스 산맥 아래로 진군했다. 그는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길을 따라 영구적인 주둔지를 배치했다.[82] 트라야누스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카스피해에서 서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이동했는데, 두 군대는 성공적인 핀서 기동을 수행하여 트라야누스가 북부 메소포타미아 도시인 니시비스, 바트네를 점령하고 오스로에네 왕국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조직함으로써 파르티아 제국에 로마의 존재를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왕 압가르 7세는 트라야누스에게 공개적으로 복종했으며,[83] 로마 보호령으로 간주되었다. 이 과정은 116년까지 완료된 것으로 보이며,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가 로마 인민의 권위 아래 놓였다는 것을 알리는 동전이 발행되었다.[84] 하부르 강과 싱가라 주변 산맥 사이의 지역이 새로운 국경으로 간주되어 요새로 둘러싸인 도로가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115/116년 겨울을 안티오크에서 보낸 후, 한 명의 집정관, 마르쿠스 페도 베르길리아누스의 목숨을 앗아간 격렬한 지진에서 간신히 탈출한 트라야누스는[85] 116년에 다시 전장에 나섰으며,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정복하려는 과도한 목표는 결국 그의 전체 원정의 결과에 역효과를 냈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116년 원정의 목표는 파르티아 정복이 아니라 동부 무역로에 대한 로마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전 예방적 시위"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군사 시설의 전반적인 인력 부족은 원정이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음을 의미했다.[86] 파르티아 원정 전에 트라야누스가 새로운 군단을 모집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데, 이는 새로운 시민 징집의 원천이 이미 과도하게 이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료가 허용하는 한 원정을 묘사하면, 한 로마 부대는 티그리스 강을 건너 아디아베네로 진입하여 남쪽으로 휩쓸고 아데네스트레를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부대는 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바빌론을 점령했다. 트라야누스 자신은 두라-유로포스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항해했는데, 그곳에는 그의 영예를 기리는 개선문이 세워졌고, 같은 지역에서 율리아누스 황제의 원정 동안에도 볼 수 있었던 "법정"을 세운 오조가르다나를 통과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좁은 땅에 도착한 트라야누스는 육로로 함대를 티그리스 강으로 끌어들여 셀레우키아를 점령했고, 마지막으로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그는 남쪽으로 페르시아 만으로 계속 진격했고, 함대가 티그리스 강에서 조수 쇄파를 피한 후,[87] 그는 카락스의 통치자인 아탐벨루스의 항복을 받았다. 그는 바빌론을 제국의 새로운 속주로 선포하고 페르시아 만 기슭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으며,[88] 원로원에게 월계관을 쓴 편지를 보내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하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을 반복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한탄했다.
카락스는 팔미라와의 관계가 위에서 설명된 사실상 독립적인 왕국이었기 때문에 트라야누스의 페르시아 만 진출은 이 지역의 팔미라의 이해관계와 일치했을 수 있다. 또 다른 가설은 카락스의 통치자들이 파르티아 바빌론에 대한 팽창적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들에게 트라야누스와의 동맹을 위한 합리성을 제공했다는 것이다.[89] 파르티아 도시인 수사도 로마인에게 점령된 것으로 보인다.[90]
화폐학적 또는 비문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후기 문헌에 따르면, 아시리아 속주가 선포되었으며,[91] 아디아베네 영토를 덮는 것으로 보인다.[92] 인도 무역의 재정 행정 또는 단순히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에서 거래되는 상품에 대한 관세(''portoria'') 지불에 관한 일부 조치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세금 징수, 징발 및 지역 유력자들의 특권 처리에 있어 로마 속주 행정의 표준 패턴에 따라 새로 정복한 토지의 행정을 "합리화"한 것이 트라야누스에 대한 이후의 저항을 촉발했을 것이다.[93]
일부 현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페르시아 만에 머무는 동안 자그로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고개를 지키는 산악 부족에 대한 로마의 종주권을 동쪽으로 이란 고원까지 확대하기 위한 습격을 명령하고 로마와 쿠샨 제국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을 확립함으로써 바빴을 수 있다. 로마 군대가 기병대에서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였을 이란 고원 자체로 확장하려는 시도는 없었다.[95]

3. 3. 파르티아의 반격과 유대인의 봉기 (116-117년)
얼마 안 있어, 로마 제국 동부, 그 중에서도 이집트, 키프로스, 키레나이카(아마 이 사태의 원인 지역이었던 걸로 추정)에 있던 유대인들이 토착 지역의 신앙자들을 상대로 종교적 반란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차후에 키토스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대적인 반란이다.[101] 또 다른 반란은 아마도 로마의 점령에 반대하는 일반적인 반응의 일환으로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 지역사회들로 퍼져나갔다.[102]트라야누스는 이 반란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병력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철수를 단순한 일시적 후퇴로 보았으나, 그는 결코 다시는 야전에서 군대를 지휘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당시에 (117년 초) 유대 속주 총독이었고 속주 내에 유대인들의 동요를 일찍이 처리해야만 했던 루시우스 퀴에투스에게 자신의 동방 병력들을 넘겨주었다.[103] 퀴에투스는 자신의 임무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서 이 전쟁은 차후에 '퀴에투스'의 오탈자인 '키투스'가 되며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104]
퀴에투스는 그의 승리들로 다음 해 (118년)에 집정관직[105]을 약속받았으나, 이 약속이 일어나기 전인, 하드리아누스 집권기에 시작된 피비린내 나는 숙청 기간에 살해당했으며, 숙청 기간에 퀴에투스와 다른 세 명의 전직 집정관들은 황궁의 친위대 사령관 아티아누스에 의해 음모에 대한 불분명한 책임으로 재판을 받은 후에 사형에 처해졌다.[106] 퀴에투스와 동료들이 지닌 군대 내 인기 및 트라야누스와 긴밀한 사이인 점을 우려하여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직권으로 이들을 처형했다는 이론도 있다.[107]
대조적으로, 유대 반란에 대한 진압을 맡은 차기 저명한 로마 인물은 키레나이카의 반군 지도자 루쿠아스를 처리한 기사 계급의 퀸투스 마르키우스 투르보[108]이며, 하드리아누스의 신뢰를 지켜내며, 마침내 그의 친위대 사령관이 되었다. 모든 네 명의 집정관들이 최고 자리에 있는 원로원의원들이었고 이런 지위들이 황제의 권력 (''capaces imperii'')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하드리아누스는 잠정적 경쟁 상대들에게 사전 공격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109]
4. 결과 및 영향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로마 제국의 영토를 일시적으로 확장시켰으나, 곧이어 발생한 반란과 트라야누스의 죽음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확장 정책을 포기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국경으로 하는 방어 정책으로 전환했다. 파르티아 원정은 로마 제국의 국력 소모를 가속화시키고, 이후 로마-파르티아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10] 이 전쟁은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5. 평가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파르티아 원정이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트라야누스는 보스라에서 아일라를 잇는 트라이아나 노바 가도 건설을 통해 인도 무역로의 서쪽 종점인 카락스를 로마의 직접 통제 하에 두려 했다.[63] 이는 수입품 가격을 낮추고 극동과의 교역 적자로 인한 귀금속 유출을 막는 데 중요했다.[63] 팔미라 대상들과 카락스 간의 교역이 활발했고, 카락스 통치자들의 영토가 바레인 섬들까지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어, 로마의 페르시아만 헤게모니 확장을 시사한다.[66]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통제 하의 셈족 도시들을 통한 극동 무역 체계를 무너뜨리고 로마의 통제 하에 두려 했을 수 있다.[67] 다키아 정복 당시 시리아 보조 군단의 베테랑 병사들과 시리아 상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트라야누스는 낙타병을 포함한 팔미라군들을 보충하여 카락스 합병을 위한 지원을 확보하려 했다.[68]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파르티아의 극동 교역로 "통제권"이 불확실하며, 육로 교역은 파르티아 당국의 개입 없이 민간 부문에 맡겨졌다고 본다.[69] 2세기 메소포타미아의 상업 활동은 로마 제국 내외 사람들이 공유하는 현상이었고, 일관된 로마 제국 정책의 표시는 없었다.[70] 모제스 핀리와 폴 벤 같은 학자들은 트라야누스 전쟁 뒤의 외국 교역 "정책"에 대한 생각을 구시대적이라고 여기며, 로마의 극동 사치품 교역에 대한 관심은 경제 정책이 아닌 도덕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71] 로마와 인도 간의 교역은 귀금속 교환 면에서 균형을 이루었고, 대 플리니우스는 갠지스 평원을 로마 제국의 황금 공급원 중 하나로 묘사했다.[72] 핀리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에 대한 심각히 오판하고 값비싼 공격"이 현대 역사가들의 저서에만 존재하는 로마의 "상업적 전쟁"의 예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73]
카시우스 디오는 이 전쟁이 영토 합병과 명성이라는 미끼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보았다.[74] 영토 정복은 세금 징수, 특히 ''테타르테''(tetarte, 수입품에 부과되는 25% 세금)와 관련이 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정복을 모방하는 선전적 가치도 있었다.[75] 쿠샨 제국 대사들의 다키아 정복 기념 행사 참석은 플루타르코스 같은 일부 그리스-로마 지식인들과 트라야누스의 측근들에게 마케도니아의 동방 정복 재현에 대한 꿈을 부추겼을 수 있다.[76]
또한, 트라야누스의 확장주의적 정책은 히스파니아 출신 보수주의 원로원의원들의 지원으로 가능했으며, 로마 제국은 원칙적으로 한계가 없었고 트라야누스는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킬 기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77]
일부 현대 사학자들은 트라야누스의 본래 목표가 로마령 아르메니아 보호를 위해 하부르강(카부르강)을 따라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지르는, 로마 제국의 동방 국경 지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78] 이후 로마의 대 파르티아 전쟁들의 목표가 파르티아에 로마 주둔군을 세우는 데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79]
5. 1. 긍정적 평가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그의 군사적 재능과 지도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 원정을 통해 로마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동방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다.[110]5. 2. 부정적 평가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에 관한 현존하는 문헌 자료들은 파편적이고 흩어져 있어서, 이 전쟁의 정확한 사건과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1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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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작가들은 아시리아 속주 존재 여부와 그 위치를 논쟁하고 있다: André Maricq (La province d'Assyrie créée par Trajan. A propos de la guerre parthique de Trajan. In: Maricq: Classica et orientalia, Paris 1965, pages 103/111)는 아시리아 속주를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보았고; Chris S. Lightfood ("Trajan's Parthian War and the Fourth-Century Perspective", Journal of Roman Studies 80, 1990, pages 115–126)는 아시리아 속주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며; Maria G. Angeli Bertinelli ("I Romani oltre l'Eufrate nel II secolo d. C. - le provincie di Assiria, di Mesopotamia e di Osroene", In Aufstieg und Niedergang der römischen Welt, Bd. 9.1, Berlin 1976, pages 3/45)는 아시리아 속주를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 사이로 두었고; Lepper (1948, page 146)는 아시리아 속주와 아디아베네가 같은 속주가 되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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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117년의 집정관 (suffecti)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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