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위안시설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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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특수위안시설협회(RAA)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연합군 점령군의 성폭력 발생을 줄이기 위해 일본 정부가 설립한 기관이다. 내무성의 주도로 설립되어, 위안소 설치를 통해 여성들을 고용했다. RAA는 성병 예방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키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미군은 RAA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일부 군 관계자들은 운영에 협력했다. 그러나 성병 확산과 미군 내 비판 여론으로 인해 1946년 3월 RAA는 폐쇄되었고, 이후 '판판'으로 불리는 거리 매춘이 증가했다. RAA는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며,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일본인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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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위안시설협회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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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레크리에이션 및 오락 협회 |
원어 이름 | 特殊慰安施設協会 (도쿠슈 이안 시세쓰 쿄카이) |
로마자 표기 | Teuksu Wian Siseol Hyeophoe |
창립일 | 1945년 8월 23일 |
해산일 | 1946년 3월 25일 |
설립 장소 | 도쿄, 일본 |
서비스 제공 지역 | 일본 |
산업 | 매춘 |
총 고용인 수 | 55,000명 |
매춘부 수 | 2,000명 |
해산 | |
해산 사유 | 1946년 3월 25일에 시설이 폐쇄되고 곧 문을 닫음. |
2. 역사적 배경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일본은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특히 옥음방송 이후 "적군이 상륙하면 여자들을 모조리 능욕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44] 여성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특수위안시설협회(RAA) 설립을 추진했다. RAA 설립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 유럽 전선에서 미군 장병에 의한 강간 피해 사례 (독일 여성 11,040명 포함 총 14,000명)[42]
- 오키나와 전투에서 연합군 상륙 후 발생한 잦은 강간 사건 (미군에 의한 피해자만 10,000명으로 추정)[43]
- 연합군 진주 초기 가나가와현에서 10일 동안 1,336건의 강간 사건 발생[40]
이에 더해 일본 경찰 내부 보고서에는 "약탈, 강간 등 인심을 불안하게 하는 언동을 하는 자는 전지에서 귀환한 자가 많은 것 같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45] 이러한 상황은 일본 정부가 RAA 설립을 서두르게 된 배경이 되었다.
2. 1. 일본의 패전과 연합군 점령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과 함께 연합군(주로 미국군)이 일본을 점령하게 되었다.[31]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등 영국 연방군도 점령 임무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연합군은 공창제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일본 정부는 연합군 병사들이 일본 여성들을 강간할 것을 우려했다.[31]이에 일본 정부는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희생"으로 애국심 있는 여성들을 모집하여 연합군을 위한 위안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31] 53,000명 또는 55,000명[31]의 여성들이 모였다고 한다.
경시청은 패전 직후인 8월 15일부터 연합군의 성 문제 대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32] 8월 22일에는 연합군 신문 기자로부터 "일본에 그런 시설이 있기를 바라며 크게 기대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고,[32] 좌관급 병사가 도쿄 마루노우치 경찰서에 찾아와 "여자를 돌봐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33]
8월 17일, 고노에 후미마로 국무대신은 사카 노부야 경시청 총감에게 "일본의 딸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했고,[33] 사카 노부야는 일반 부녀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로서 연합군 병사 전용 위안소 설치를 기획했다. 8월 18일, 하시모토 마사자네 내무성 경보국장은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 시설에 관하여"라는 통달을 내렸다.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는 1937년 난징 전투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것과 같은 일을 미군이 일으킬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34][35]
처음에는 오모리에, 다음은 무코지마에 위안소가 설치되었다.[34][35] 하야카와 키요에 따르면, 당시 위안소는 도쿄, 히로시마, 시즈오카, 효고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요코하마, 아이치현, 오사카, 이와테현 등에 설치되었다.[36] 또한, 우익 단체인 국수동맹(총재 사사카와 료이치)이 연합군 위안소인 아메리칸 클럽을 9월 18일에 개업했다.[37]
이러한 상황에서 도쿄에 "관동 지구 주둔군 장교 및 일반 병사의 위안"을 목적으로 "특수위안시설협회"(영어 명칭: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RAA)가 개업했다.[38]
모모세 타카시에 따르면, RAA와는 별도로 연합군 여성 병사용 "위안부"도 존재했다. 1946년에 나고야에 진주한 여성 병사를 위해 채용된 남성들은 내장, 눈, 피부, 혈액, 뇨 검사를 받았고, 마츠자카야 근처의 목조 아파트에서 6개월 동안 특정 여성 상사의 전속이 되었다. 근무는 하루 걸러 하루였으며, 식량은 넉넉했지만 체력적으로 매우 고된 일이었다.[39]
연합국 군정하의 일본에서 매춘부의 요금은 8cent였고, 하루에 47명의 미국인을 상대한 여성의 수입은 2USD였다(뉴욕 타임스).[64]
특수위안시설협회 설립 배경은 다음과 같다.[40][41]
- 유럽 전장에서 미군 장병에 의한 강간 피해자가 14,000명(독일 여성 11,040명)이었다는 사실.[42]
- 오키나와 전투에서 연합군 상륙 후 강간이 다발했다는 사실. 미군 병사에 의해서만 강간당한 여성 수를 10,000명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43]
- 연합군이 일본에 진주했을 때, 처음 10일 동안 가나가와현에서 1,336건의 강간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40] 후지메 유키에 따르면, 상륙 후 한 달 동안 최소 3,500명 이상의 여성이 연합군 병사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옥음방송 이후 일본 국내에서는 "적은 상륙하면 여자를 모조리 능욕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졌고,[44] 경찰 내부 보고서는 "약탈 강간 등 인심 불안의 언동을 하는 사람은 전지에서 귀환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45]
2. 2. RAA 설립의 명분과 실제 목적
1945년 8월 21일, 일본 당국은 연합군 점령군을 위해 특수위안시설(RAA)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내무성은 8월 18일, 연합군 주둔 지역에 "위안 시설"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이미 내린 상태였다.[3] 이 시설에는 사창가 외에 댄스홀, 식당, 술집 등이 포함되었으며, "물장사"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고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물장사" 여성 수가 부족했고, 식량 부족에 직면한 여성이 많았기 때문에, 음식, 의류, 숙소를 약속하고 업무의 성격을 모호하게 하는 신문 광고를 통해 모집을 확대했다.[3] [6][7]일본 당국은 연합군 점령군의 성폭력 발생을 줄이기 위해 사창가를 설립했다.[4][5][8][9][10][11] RAA는 성병 확산을 막기 위해 1946년 3월 운영 7개월 만에 폐쇄되었다.[2]
RAA 설립의 공식적인 명분은 연합군 병사에 의한 성폭력 방지와 성병 확산 방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키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RAA는 창립식에서 낭독된 "맹세"에서 다음과 같이 그 목적을 드러냈다.
여기서 "오키치"는 1856년부터 1861년까지 일본 주재 미국 최초의 영사였던 타운젠드 해리스의 전설적인 하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배우자가 되도록 압력을 받았다.[23]
RAA는 운영에 있어서 전쟁 시기의 애국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직원들의 "이타적인" 성격을 강조했다.[3] [20] [21] 정부 관계자들은 위안 시설 시스템을 묘사할 때 애국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일본 여성과 소녀에 대한 성폭력을 막는 "애국적인 방파제"가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들을 칭찬했다.[3] [6][7]
후지메 유키에 따르면, RAA에서는 최성기에 7만 명, 폐쇄 당시에는 5만 5천 명의 여성이 일했다.[30] 니컬러스 크리스토프에 따르면 53,000명 혹은 55,000명[31]에 달하는 인원이 모였다고 한다.
모모세 타카시에 따르면, RAA와는 별도로 연합군 여성 병사용 "위안부"도 존재했다. 1946년에 나고야에 진주한 여성 병사를 위해 채용된 남성들은 엄격한 신체검사를 받았고, 6개월 동안 특정 여성 상사의 전속이 되었다. 근무는 하루 걸러 하루였으며, 식량은 넉넉하게 제공되었지만, 체력적으로 매우 고된 일이었다.[39]
연합국 군정하의 일본에서, 매춘부의 요금은 8센트 (0.08달러)였고, 하루에 47명의 미국인을 상대한 여성의 수입은 2달러였다(뉴욕 타임스).[64]
RAA 설립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있었다.
- 유럽 전장에서 미군 장병에 의한 강간 피해자가 14,000명(독일 여성 11,040명) 있었다.[42]
- 오키나와 전투에서 연합군 상륙 후 강간이 다발했다. 미군 병사에 의해서만 강간당한 여성 수를 10,000명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43]
- 연합군이 일본에 진주했을 때, 처음 10일 동안 가나가와현에서 1,336건의 강간 사건이 발생했다.[40]
- 옥음방송 이후 일본 국내에서 "적은 상륙하면 여자를 모조리 능욕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졌다.[44]
점령군의 성(性) 대책에 대해서는 내무성 경보국이 1945년 8월 15일 패전 직후부터 검토했다.
8월 17일에 성립된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실질적인 부수상 격인 국무대신 고노에 후미마로는 경시총감 사카 노부야에게 "일본 여성을 지켜주시오"라고 의뢰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지 않고 사카 자신이 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에, 사카 노부야는 일반 부녀자를 지키기 위한 "방파제"로서 연합군 병사 전용 위안소 설치를 기획했다.[46]
8월 18일, 내무성은 경보국장 하시모토 마사미츠에 의해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 시설에 대해"(「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 시설 설치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49]), 및 "외국 주둔군 위안 설비에 관한 정비 요항"을 각 부현 장관에게 비밀리에 무선으로 통지했다.[57][50]
결국, 연합국군 대책의 일환으로 8월 26일에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 시설이 설립되었다.[49]
3. RAA의 설립과 운영
1945년 8월 23일, 여러 접객업 관련 조합 간부들이 모여 "특수위안시설협회"를 결성했다 (이후 레크리에이션 및 유흥 협회(RAA)로 개명).[3] [20] [21] RAA는 운영에 있어서 전쟁 시기의 애국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직원들의 "이타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RAA 창립식에는 관료와 경찰 관계자들이 참석했으며, 다음과 같은 "맹세"가 낭독되었다.
여기서 언급된 "오키치"는 타운젠드 해리스의 전설적인 하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배우자가 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23]
RAA는 이케다 하야토의 주선으로 日本勧業銀行|Nippon Kangyō Ginkō|일본권업은행일본어에서 제공된 무담보 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받았다.[2][3] [23] RAA는 3,300만 엔을 대출받아 회원들에게 분배했다. 8월 28일에는 오모리에 첫 번째 사창가인 코마치엔을 설립했다. 1945년 12월까지 RAA는 34개의 시설을 소유했으며, 그 중 16개는 "위안소"였다. RAA에 고용된 여성의 수는 최고 55,000명에 달했다.[2][3] [23]
RAA는 도쿄도교바시구 긴자 7번지(현재의 주오구 긴자 남부)의 도쿄 가부키자에 본부 사무소를 설치했다.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일본 야구 연맹 사무실을 빌려 사용했으며, RAA는 임대료 전액을 부담했다.
RAA는 초기에는 유흥업 종사자를 고용할 예정이었지만, 인원이 부족하여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모집했다. 긴자 등에 "신일본 여성 구함, 숙소, 의복, 식료품 모두 지급" 등의 광고판을 설치하고, 신문 광고를 통해 일반 여성을 모집했다. RAA는 '마이니치 신문'에 "의식주 고액 지급 전차금에도 응함"이라는 모집 광고를 냈고, 다른 신문에도 "국제 친선", "국민 외교", "특별 여자 외교관" 등으로 표현하며 위안부를 모집했다.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 신문 1945년 9월 4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이러한 광고들은 당시 연일 게재되었다.
RAA는 도쿄 외에도 아타미, 하코네 등 휴양지에도 시설을 만들었다. 구세군은 1947년 4월 도쿄도의 위탁으로 다치카와에 "특수 부인 보호 시설 신생 료"를, 6월에는 오사카부의 위탁으로 오사카시 니시나리구에 "니시나리 조코 료"를 개설했다.
RAA 위안소에서는 여성들이 하루에 30명에서 50명의 손님을 받았다. 오모리 해안의 코마치엔 위안소에서는 월 수입이 5만 엔에 달하는 매춘부도 있었는데, 당시 은행원 초임은 80엔이었다. 다만, 전후 인플레이션의 혼란기였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RAA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았지만, 실제 운영은 전전의 적선(赤線) 경영자가 관리를 맡았고, 그 방식 그대로 실제로는 야쿠자가 감시했으며, 착취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3. 1. 특수위안시설협회(RAA) 설립
1945년 8월 18일, 내무성은 경보국장 하시모토 마사미츠의 명의로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 시설에 대해"라는 비밀 무선 통지를 각 부현 장관에게 보냈다.[57][50] 이 통지는 외국군 주둔지에 위안 시설을 설치하라는 지시였다. 도쿄 경시청에서는 사카 노부야 경시총감이 경제경찰부에 담당하게 했고, 경제경찰부는 보안과가 담당하게 되었다.[51] 경시청 경제경찰부장은 보안과장과 계장을 불러 위안 시설 설치를 명령하면서 "모두 구두 명령으로 할 것", "서면을 남기지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51]8월 21일, 여러 접객업 관련 조합 간부 15명이 경시청에 소집되어 공식적인 요청을 받았다.[51] 최종적으로 요리 음식 조합, 게이샤 업자 동맹, 대기 업자 조합 연합회 등 7개 단체가 운영을 맡게 되었다.
8월 23일, 이들은 "특수위안시설협회"를 결성했다 (이후 레크리에이션 및 유흥 협회(RAA)로 개명).[3] [20] [21] RAA는 창립식에서 다음과 같은 "맹세"를 낭독하며, 전시의 애국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직원들의 "이타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여기서 언급된 "오키치"는 1856년부터 1861년까지 일본 주재 미국 최초의 영사였던 타운젠드 해리스의 전설적인 하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배우자가 되도록 압력을 받았다.[23]
RAA는 재무부 세무국장 이케다 하야토의 주선으로 日本勧業銀行|Nippon Kangyō Ginkō|일본권업은행일본어에서 제공된 무담보 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2][3] [23] RAA에 3,300만 엔이 대출되었고, RAA는 이를 회원들에게 분배했다. 8월 28일, RAA는 첫 번째 사창가인 오모리의 코마치엔을 설립했다. 1945년 12월까지 RAA는 34개의 시설을 소유했으며, 그 중 16개는 "위안소"였다. RAA에 고용된 여성의 총 수는 최고 55,000명에 달했다.[2][3] [23]
RAA의 본부 사무소는 도쿄도교바시구 긴자 7번지(현재의 주오구 긴자 남부)의 도쿄 가부키자에 설치되었다.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일본 야구 연맹에 사무실을 빌려 사용했으며, RAA는 임대료 전액을 부담했다.
3. 2. 위안부 모집과 강제성 논란
RAA는 초기에는 '물장사' 여성들을 고용하려 했으나, 인원이 부족하여 일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모집했다.[3] [6][7] 당시 연합군의 전략적 중심지 및 주거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시골로 피난을 가거나, 전쟁 말기에 정부가 매춘을 단속했기 때문에 매춘부의 수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3] [21]모집 과정에서 '숙식 제공', '고수익 보장' 등의 허위 광고가 사용되었고,[23] 기만적인 방식으로 여성들을 유인했다는 증언이 많다.[66] RAA는 9월 3일 '마이니치 신문'에 "의식주 고액 지급 전차금에도 응함"이라는 모집 광고를 냈고, 다른 신문에도 "국제 친선", "국민 외교", "특별 여자 외교관" 등으로 표현하며 위안부를 모집했다.[65] 하루에 약 300명이 응모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유흥업 경험이 없는 여성이었고, 대다수는 일의 내용을 듣고 떠났다고 한다.
마이니치 신문 1945년 9월 4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도쿄 신문 1945년 9월 4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이러한 광고들은 당시 연일 게재되었다.
일부 여성들은 강제로 위안소에 보내지거나, 빚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3] [20] 당시 빈곤 가정의 자녀들이 흡수되었다고 보는 보고도 있으며,[70] 빚을 지고 있던 사람도 많았고, 수당을 받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졸부의 첩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 당사자의 증언도 있다.[67]
3. 3. RAA 위안소의 운영 실태
RAA 위안소에서 여성들은 하루에 15명에서 6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3][23][2] 한 일본인 여성은 첫날에 47명의 미국인 고객을 상대하고 약 2USD를 받았다.[2]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성병 감염 위험에 노출되었고,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성병에 걸리거나, 허리를 다치거나,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한 19세 여성도 있었다.[58]RAA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성폭력과 매춘 여성에 대한 폭력에 직면했다. 특히 댄서로 일하는 여성들은 강간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또한 군사 경찰과 GI들은 종종 무료 서비스나 환불을 요구했다. 일본 경찰과 연합군 군인 간의 권력 불균형으로 인해 여성들은 불만을 제기하기 어려웠다.[3]
RAA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았지만, 실제 운영은 전전의 적선(赤線) 경영자가 관리를 맡았고, 그 방식 그대로 실제로는 야쿠자가 감시했으며, 착취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여성들은 "기업형 상점" 전술과 前借|마에가리일본어를 사용하여 빚에 묶여 떠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GHQ 관계자가 "노예화"에 비유할 정도였다.[3] [20]
RAA 위안소를 이용할 때, GI는 입장료 100JPY(당시 비공식 환율로 약 8USD[3][23])을 지불하고 티켓을 받았다. 이 티켓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에게 전달되었다. 보통 하루에 15명에서 60명의 고객을 상대하는 여성들은 매일 아침 티켓을 역무소 회계실에 제출하고 티켓 1장당 50JPY을 받았다. 이 50%의 수수료는 전쟁 전 허가받은 매춘부들이 받는 수수료, 즉 가격의 25%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다.[3][23][2]
4. 연합군과 RAA
당시 전쟁 미망인과 자녀가 많아 생계 수단이 없는 여성이 많았던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도쿄도 내에서만 약 1,600명, 전국적으로 4,000명, RAA 전체에서는 53,000명의 여성이 위안부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들은 하루에 30명에서 50명의 손님을 받았다. 오모리 해안의 코마치엔 위안소에서 일했던 한 위안부는 당시 금액으로 월 수입이 5만 엔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은행원 초임(80엔)과 비교하면 상당한 고수입이었다.[22] 다만, 전후 인플레이션이 심했던 혼란기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전전의 적선(赤線) 경영자가 관리를 맡았고, 야쿠자가 감시하며 착취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1945년 12월 당시 재일 연합군은 43만 287명이 주둔해 있었다.[45]
4. 1. 미군의 RAA 이용과 협력
RAA는 미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일부 미군 관계자들은 RAA 운영에 협력했다. 1945년 9월, 미국 사령관들은 지바현과 가나가와현 지사에게 연락하여 병력을 위한 매춘 시설 설립을 요청하면서, 필요할 경우 미군 헌병의 지원을 약속했다.[3] [20] 미군 의무대는 RAA 위안소에 성병 예방 진료소를 설치하고, 매주 수만 개의 콘돔을 배포했다.[3] [20]이러한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성병(주로 임질과 매독)은 심각한 공중 보건 문제로 대두되었다. 1946년 초, 미군 점령군의 거의 4분의 1이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일부 부대는 거의 절반이 감염되었다. 호주 제34보병여단의 감염률은 55%에 달했다.[3]
4. 2. 성병 문제와 미군의 정책 변화
RAA 위안소에서 성병 확산은 심각한 문제였으며, 미군 병사들의 감염률도 높았다. 1946년 초, 미군 점령군의 약 1/4이 성병에 감염되었고, 일부 부대는 거의 절반이 감염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호주 제34보병여단의 감염률은 55%에 달했다.[3]미군 내에서는 RAA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일부 부대 지휘관들은 매춘을 "자신들의 군대를 괴롭히는 고질적인 문제"로 여겼다.[3] [20] 특히 군목(Chaplain)들을 중심으로 RAA 폐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육군성의 정책 위반과 미군의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며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협력을 비난했다.[3] [20]
이러한 상황은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당황하게 했다. 1946년 1월 21일, SCAP은 허가된 사창가가 "민주주의 이상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운영 중단을 명령했다(SCAPIN 642).[3][20] 결국, GHQ는 1946년 3월 25일 모든 사창가 및 매춘을 제공하는 기타 시설을 연합군 병력 출입 금지 구역(오프 리미츠)으로 지정했다.[3]
미 육군성은 1946년 4월 5일, 참모총장 아이젠하워를 통해 전군에 매춘 공인 정책을 강하게 부정하는 통달을 내렸다. 이 통달은 매춘의 조직화가 성병 예방에 비효과적이며, 오히려 성병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회적 비판과 도덕 파괴를 이유로 모든 매춘 숙소를 오프 리미츠로 하고 매춘 금지 정책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51]
5. RAA의 해체와 그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는 1946년 3월 26일 RAA를 공식 해체했다.[51] 그러나 이 명령은 개인의 "자발적 매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 비 RAA 사창가 업주들은 매춘부들에게 공간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법망을 피했다.[3]
RAA 해체 후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판판"이라 불리는 거리 매춘부가 되었다.[3] 일본 정부는 1946년 11월 특정 지정 구역에서 매춘을 허용하는 적선(赤線) 시스템을 도입했다.[7] 한국 전쟁 당시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여성도 위안부로 동원되었다는 증언이 있다.[83]
5. 1. RAA의 공식 해체
1946년 1월 21일,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는 허가된 사창가가 "민주주의 이상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운영 중단을 명령했다(SCAPIN 642).[3][20] 그러나 이 명령은 개인의 "자발적 매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 비 RAA 사창가 업주들은 이전 사창가에 "자발적" 매춘부들에게 공간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명령을 회피했다.[3]결국, GHQ는 1946년 3월 25일 모든 사창가 및 매춘을 제공하는 기타 시설을 연합군 병력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했다.[3] 1946년 3월 26일, 연합군 도쿄 헌병 사령관 관방은 "진주군의 음란굴 출입 금지에 관한 건"(오프 리미츠령)을 통달하여 RAA 시설을 폐쇄했다.[51]
이러한 조치는 엘레노어 루스벨트 여사 등 RAA의 존재에 대한 반대와 미 육군성의 매춘 금압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1946년 3월 4일, 육군성은 태평양 육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매춘 금압 정책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통달했고, 육군 차관이 방일하여 맥아더와 회담 후 이 정책을 따를 것을 약속받았다.[51]
RAA 폐쇄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으며, 이들 중 다수는 "판판" 거리 매춘부가 되었다.[3]
5. 2. '판판'과 적선(赤線) 시스템
RAA 해체 이후, 많은 여성들이 '판판'이라 불리는 거리 매춘부가 되었다.[3] [7] 매춘의 분산으로 인해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성병 통제에 어려움을 겪었고, 성폭력 발생 건수가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었으나, 이 수치는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3] [7]이에 일본 정부는 1946년 11월, 특정 지정 구역에서 매춘을 허용하는 적선(赤線) 시스템을 도입했다.[7]
5. 3. 한국 전쟁과 일본인 위안부
한국 전쟁 당시 한국인 여성이 위안부로 동원되었으며, 일본인 위안부도 재일 미군 기지 주변과 한반도로 끌려갔다는 증언이 있다.[83]6. RAA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의미
RAA는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으며, 그 역사적 의미는 복합적이다.
RAA는 여성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강제적이거나 기만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3] [21] 일본 정부가 주도하여 조직적인 성 착취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은 비판의 강도를 더한다.
RAA는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의 연장선이라는 비판도 받는다.[3] [25] 두 시스템 모두 국가가 주도하여 여성을 성적 도구로 이용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스템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존재한다. 마이클 몰라스키와 다나카 유키는 두 시스템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며 RAA를 "체계적인 착취"라고 비판하는 반면,[3] [25] 정세라는 RAA의 여성들이 전쟁 당시 위안부보다 나은 생활 조건을 제공받았다고 지적한다.[26] 사라 코브너는 RAA 구성원들이 강제로 매춘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차이점으로 언급한다.[20] 하타 이쿠히코는 모집 방법과 운영 방식에서 두 시스템이 유사하다고 평가한다.[28]
RAA가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현실은 달랐다. 경시총감은 RAA 덕분에 점령군 병사에 의한 강간 사건이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미군의 극비 자료는 오히려 미군에 의한 폭행 사건이 빈번했음을 보여준다.[75] 요코스카나 요코하마 등지에서 미군이 민가에 침입하여 일본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76] 위안소에서도 미군 병사들이 위안부들을 난폭하게 대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정신 질환을 앓거나 자살하는 위안부도 있었다.[77] GHQ가 프레스 코드를 발령한 이후에는 연합군을 비판하는 기사가 신문에 게재되지 않아 이러한 실태는 은폐되었다.
일본공산당은 미군의 불법 행위를 추궁했지만,[80] 특별고등경찰이 작성한 관련 문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성병 대책으로 매춘 여성 검거가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체포와 인권 침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타바시 사건''')[81]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RAA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일본의 과거사 청산 문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6. 1. 인권 침해와 강제성 문제
RAA는 여성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으며, 강제 또는 기만적인 방식으로 여성들을 동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RAA는 일본 정부가 주도한 조직적인 성 착취 시스템이었다는 점에서 비판의 강도가 높다.[3] [21]RAA는 "물장사"(일본 야간 유흥업의 완곡한 표현) 종사 여성 외에도, 일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모집했다. 이들은 사무실 앞과 신문에 게시된 광고를 통해 모집되었는데, 광고는 업무의 성격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관대한 근무 조건(무료 숙소, 식사, 의복)을 강조했다. 당시 만연한 빈곤과 식량 부족, 그리고 많은 수의 고아와 미망인 젊은 여성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일자리 제안은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다.[23]
RAA는 "댄서"들을 모집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댄서"와 "매춘부"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졌다.[3] 독립 브로커들은 여성들을 모집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야쿠자와 연계되어 덜 윤리적인 모집 기술을 사용했다.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를 통해 동원된 여성들이 속아서 사창가로 보내지기도 했다.[3]
가난한 가족에게 팔렸거나 사창가에 빚을 진 여성들은 사창가를 떠날 수 없었다. 일부 위안소는 "기업형 상점" 전술과 선대금|마에가리일본어을 사용하여 여성들을 빚에 묶어두고 떠나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GHQ 관계자가 "노예화"에 비유할 정도였다.[3] [20]
RAA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성폭력과 매춘 여성에 대한 폭력에 직면했다. 댄서로 일하는 여성들은 특히 강간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군사 경찰과 GI들은 종종 무료 서비스나 환불을 요구했으며, 일본 경찰과 연합군 군인 간의 권력 불균형으로 인해 여성들은 불만을 제기하기 어려웠다.[3]
RAA가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요코스카나 요코하마를 비롯해 진주군이 민가에 침입하여 일본인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이 다발했다.[76] 위안소에서도 미군 병사들이 위안부들을 난폭하게 성행위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77] 1945년 9월 1일 노게야마 공원에서 일본 여성 27명이 미군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무사시노시에서는 초등학생이 집단 강간을 당했고, 오모리에서는 병원에 200~300명의 미군이 침입하여 임산부와 간호사 등이 강간을 당했다.[76]
6. 2.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의 연관성
RAA는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두 시스템 모두 국가가 주도하여 여성을 성적 도구로 이용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3] [25] RAA(특수위안시설협회)는 일본의 전쟁 당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구조와 용어는 기존의 전쟁 당시 위안부 시스템을 기반으로 했다. 사창가는 "위안소", "위안시설"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불렸고, 매춘부들은 "위안부"로 불렸다.하지만 두 시스템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존재한다. 마이클 몰라스키와 다나카 유키는 두 시스템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며 RAA를 "체계적인 착취"라고 비판한다.[3] [25] 반면, 정세라는 RAA의 여성들이 전쟁 당시 위안부보다 나은 생활 조건을 제공받았다고 지적한다.[26] 사라 코브너는 RAA 구성원들이 강제로 매춘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차이점으로 언급한다.[20] 하타 이쿠히코는 모집 방법과 운영 방식에서 두 시스템이 유사하다고 평가한다.[28]
RAA는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현실은 달랐다. 경시총감은 RAA 덕분에 점령군 병사에 의한 강간 사건이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미군의 극비 자료는 오히려 미군에 의한 폭행 사건이 빈번했음을 보여준다.[75] 요코스카나 요코하마 등지에서 미군이 민가에 침입하여 일본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76] 위안소에서도 미군 병사들이 위안부들을 난폭하게 대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정신 질환을 앓거나 자살하는 위안부도 있었다.[77] GHQ가 프레스 코드를 발령한 이후에는 연합군을 비판하는 기사가 신문에 게재되지 않아 이러한 실태는 은폐되었다.
일본공산당은 미군의 불법 행위를 추궁했지만,[80] 특별고등경찰이 작성한 관련 문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성병 대책으로 매춘 여성 검거가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체포와 인권 침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타바시 사건''')[81]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RAA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일본의 과거사 청산 문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7.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추가 분석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특수위안시설협회(RAA)와 관련된 추가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과 사카 노부야 경시총감 등 일본 정부 고위 관료들이 RAA 설립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것은 RAA가 단순한 민간 주도의 시설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케다 하야토 재무성 세무국장이 일본권업은행을 통해 무담보 대출을 주선하여 RAA 운영에 정부 자금이 투입되었다.[2][3] [23]
사사카와 료이치가 이끌던 우익 단체 국수동맹이 오사카에 연합군 위안소 '아메리칸 클럽'을 개업한 것은 RAA가 일본 우익 세력의 이익과도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RAA가 단순한 성매매 시설을 넘어, 일본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82]
한국 전쟁 당시 한국인 여성뿐만 아니라 일본인 여성도 위안부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RAA와 관련된 문제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비극적인 역사임을 강조한다.[83] 이는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반성하고 책임져야 함을 시사한다.
7. 1. 고노에 후미마로와 사카 노부야의 역할
경시청의 경시총감 사카 노부야는 도쿄 요리음식업조합|東京料理飲食業組合|Tōkyō Ryōri Inshokugyō Kumiai일본어의 대표인 미야자와 하마지로와 노모토 겐지로에게 곧 도착할 군대를 위한 준비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미야자와와 노모토는 그들의 인맥을 이용하여 나이트클럽, 바, 사창가 업계의 대표자들을 소집했고, 이들은 경찰과 만나 "위안 시설"을 설립해달라는 공식적인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최대한 숨겨졌다.[3] [20] [21]RAA는 운영에 있어 전쟁 시기의 애국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직원들의 "이타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RAA 창립식에서는 "수천 명의 '이 시대의 오키치'의 희생을 통해 격렬한 파도를 막아내고 우리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고 육성하는 방파제를 건설"하고, "국체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다는 맹세가 낭독되었다.[20] [23] [22] 여기서 "오키치"는 타운젠드 해리스의 전설적인 하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배우자가 되도록 압력을 받았던 인물이다.[23]
이 조직은 재무부 세무국장 이케다 하야토의 주선으로 일본권업은행|日本勧業銀行|Nippon Kangyō Ginkō일본어에서 제공된 무담보 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RAA에 3300만엔이 대출되었고, RAA는 이를 회원들에게 분배했다. RAA는 8월 28일에 첫 번째 사창가인 오모리의 코마치엔을 설립했다. 1945년 12월까지 RAA는 34개의 시설을 소유했으며, 그중 16개는 "위안소"였다. RAA에 고용된 여성의 총 수는 최고 55,000명에 달했다.[2][3] [23]
7. 2. 일본 우익 단체의 개입
사사카와 료이치가 총재를 맡았던 우익 단체 국수동맹은 1945년 9월 18일 오사카에 연합군 위안소 아메리칸 클럽을 개업했다. 국수대중당을 뿌리로 하는 이 단체가 RAA 운영에 개입한 것은, RAA가 단순한 매춘 시설이 아니라 일본 우익 세력의 이익과도 연결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82] 나고야에는 국제 고급 향락 나고야 클럽이 개설되었고, 여성 680명이 모집에 몰려들었다.恵泉女学園大学|케이센여자학원대학일본어7. 3. 한국 전쟁과 일본인 위안부 문제의 재조명
한국 전쟁에서는 한국인 여성이 위안부로 동원되었으며(대한민국 국군 위안부, 「특수위안대」설치 참조), 일본인 위안부도 재일 미군 기지 주변과 한반도로 끌려갔다.[8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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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戦わずか2週間後「東京の慰安婦」は米軍のいけにえにされた(貴志 謙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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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日30人を相手にしてボロボロに…教科書には載っていない「進駐軍向け特殊慰安所」の実態 米兵を恐れて、柱にしがみついたり逃げ惑ったりした女性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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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만들었다 ‘반쪽짜리’ 일본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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