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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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메니온은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 시대에 활약한 마케도니아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역량으로 마케도니아 군 육성에 기여했다. 필리포스 2세의 페르시아 원정 준비에 참여했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에서 부사령관으로서 주요 전투에서 좌익을 지휘하며 활약했다. 그러나 아들 필로타스가 반역 혐의로 처형된 후, 알렉산드로스 3세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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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파르메니온 |
원어 이름 | Παρμενίων |
로마자 표기 | Parmenion |
출생 | 기원전 400년경 |
사망 | 기원전 330년 (69–70세) |
사망 장소 | 엑바타나, 메디아, 마케도니아 |
군사 정보 | |
소속 | 마케도니아 |
복무 기간 |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30년 |
계급 | 장군 (strategos) |
지휘 | 페제타이로이 |
주요 전투 | 필리포스 2세 시대 마케도니아의 확장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
가족 관계 | |
자녀 | 필로타스, 니카노르 |
친척 | 아산드로스 (형제), 아가톤 (형제), 아탈로스 |
2. 필리포스 2세 시대
필리포스 2세의 치세 동안 파르메니온은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356년에는 일리리아인들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7] 10년 후에는 테살리아 남부의 도시 할로스를 파괴했다. 기원전 346년에는 아테네와의 평화 협정을 맺는 마케도니아 대표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 기원전 342년에는 에우보이아에서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감독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파견되기도 했다.[1]
2. 1. 마케도니아 군 육성
파르메니온은 필리포스 2세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이었으며, 마케도니아 군의 육성에 힘썼다. 필리포스 2세의 기본 전술은 사리사로 무장한 비교적 경장의 징집병 팔랑크스와 테살리아 기병 등의 방계 기병이 적의 보병과 기병의 공세를 지원하는 동안 근위보병과 정예기병이 돌아 들어가 포위공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파르메니온은 필리포스 2세의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공세를 막아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기원전 338년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 테베 연합군을 물리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전투에서 파르메니온은 당시 왕자였던 알렉산더와 함께 좌익의 기병 부대를 이끌고 보이오티아 군을 괴멸시켰다.[7]
그 후,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했고, 그 전 단계로 파르메니온을 아탈로스, 카라스와 함께 선발대로 소아시아에 보냈다. 그러나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원정은 알렉산더에게 넘어가게 되었다.[1]
필리포스 2세의 치세 동안 파르메니온은 기원전 356년에 일리리아인들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0년 후, 파르메니온은 테살리아 남부의 도시 할로스를 파괴했다. 그는 기원전 346년에 아테네와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임명된 마케도니아 대표 중 한 명이었으며, 기원전 342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에우보이아에서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는 파르메니온, 아민타스, 안드로메네스, 그리고 아탈로스와 1만 명의 군대를 아나톨리아로 보내 서부 해안과 섬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필리포스가 암살당하고 그의 어린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뒤를 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마케도니아군은 필리포스의 죽음에 사기가 저하되었고, 결국 용병 로도스의 멤논의 지휘를 받는 페르시아군에게 마그네시아 근처에서 패배했다.
2. 2. 군사적 업적
파르메니온은 필리포스 2세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이었으며, 마케도니아 군의 육성에 힘썼다. 필리포스 2세의 기본 전술은 사리사로 무장한 비교적 경무장 징집병 팔랑크스와 테살리아 기병 등의 외부 기병이 적의 보병과 기병의 공세를 막아내는 동안 근위 보병과 정예 기병이 우회하여 포위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파르메니온은 필리포스 2세의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공세를 막아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기원전 338년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 테베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전투에서 파르메니온은 당시 왕자였던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좌익 기병 부대를 이끌고 보이오티아 군을 괴멸시켰다.
그 후,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했고, 그 전 단계로 파르메니온을 아탈로스, 카라스와 함께 선발대로 소아시아에 보냈다. 그러나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원정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필리포스 2세의 치세 동안 파르메니온은 기원전 356년에 일리리아인들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7] 10년 후, 파르메니온은 테살리아 남부의 도시 할로스를 파괴했다. 그는 기원전 346년에 아테네와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임명된 마케도니아 대표 중 한 명이었으며, 기원전 342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에우보이아에서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1]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는 파르메니온, 아민타스, 안드로메네스, 그리고 아탈로스와 1만 명의 군대를 아나톨리아로 보내 서부 해안과 섬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필리포스가 암살당하고 그의 어린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뒤를 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마케도니아군은 필리포스의 죽음에 사기가 저하되었고, 결국 용병 로도스의 멤논의 지휘를 받는 페르시아군에게 마그네시아 근처에서 패배했다.
2. 3. 페르시아 원정 준비
파르메니온은 필리포스 2세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으로, 마케도니아 군 육성에 힘썼다. 필리포스 2세의 기본 전술은 사리사로 무장한 팔랑크스와 테살리아 기병 등이 적의 공격을 막는 동안, 정예 부대가 우회하여 포위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파르메니온은 이러한 전술에서 적의 공세를 막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7]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좌익 기병 부대를 이끌고 보이오티아 군을 격파,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기여했다.
이후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고, 기원전 336년 파르메니온, 아탈로스, 카라스 등을 선발대로 소아시아에 파견했다. 이들은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필리포스 2세의 암살 소식과 함께 상황이 바뀌었다. 마케도니아군은 사기가 저하되었고, 결국 로도스의 멤논이 지휘하는 페르시아군에게 패배했다.[1]
3. 알렉산드로스 3세 시대
알렉산드로스 3세 즉위 후, 파르메니온은 마케도니아 군 부사령관으로서 망치와 모루 전술의 핵심인 좌익 부대를 지휘했다. 그라니코스 강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우익의 공격을 지원하여 마케도니아 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3. 1. 알렉산드로스 3세의 신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즉위하자 파르메니온은 마케도니아 군 부총사령관에 취임하여 계속 모루 전술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에서 좌익 세력의 총지휘를 맡아, 우세한 적의 공세를 지원하고 대왕이 이끄는 우세한 우익에 의한 공세를 준비했다.[8]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6년 10월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즉위에 파르메니온의 군대 장군인 아탈루스가 반대했다. 이에 파르메니온은 아탈루스가 자신의 장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형했다.[8] 그러나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의 즉위가 순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에게 빚을 지게 되었는데, 특히 파르메니온이 가장 경험이 풍부한 장군이었고 대규모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이다.[9]
그 결과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의 친척들을 마케도니아 군대의 요직에 임명했다.[3] 그의 막내아들 니카노르는 방패병으로 알려진 보병 연대 지휘관이 되었고, 사위 코이노스는 팔랑크스 대대 지휘관이 되었으며, 니카노르라는 또 다른 친척은 마케도니아의 동맹 그리스 동맹군으로 구성된 해군의 제독이 되었다.[10] 파르메니온의 친구 아민타스와 그의 형제 아산드로스도 요직에 임명되었다. 파르메니온의 맏아들 필로타스는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던 1,800명의 기병 부대인 동료 기병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파르메니온은 필리포스 2세 때 맡았던 직책과 동일하게 알렉산드로스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3. 2. 페르시아 원정 참여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즉위하자 파르메니온은 마케도니아 군 부총사령관에 취임하여 계속 모루 전술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에서는 좌익 세력의 총지휘를 맡아, 우세한 적의 공세를 버티고 대왕이 이끄는 우익의 공세를 준비했다.[2][9][11]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증원군과 함께 파르메니온을 아나톨리아에서 만나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이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파르메니온은 좌익을 지휘했고,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우익을 지휘했다.[2][9][11]
한편, 킬리키아, 리디아, 헬레스폰트 프리지아 및 기타 지역의 페르시아 총독들은 다스킬리움 근처의 젤레아에 집결했다. 두 군대는 그라니코스 강 근처에서 만났다. 대부분의 고대 자료는 파르메니온이 알렉산드로스에게 공격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고, 즉시 공격하려는 것은 알렉산드로스 자신의 생각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파르메니온은 그의 지휘관의 혁신적인 전략에 대한 대항마 역할을 하며 정통적인 전략을 전문적으로 수립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에 따르면, 그라니쿠스 전투에서 파르메니온은 군대가 이미 하루 종일 행군했으므로 공격 전에 지연을 제안했는데, 항상 신중한 길을 제시했고, 종종 왕에게 무시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 공격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었다.[12] 그러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고 명확히 진술함으로써 아리아노스와 모순된다. 그리스인들이 처음에는 격퇴되었고, 그 후 페르시아인들을 기습하여 밤에 강을 건넜다는 설이 있다. 이로 인해 다음 날 아침 페르시아 기병대가 먼저 그리스인들을 상대로 전개되어, 당시의 기록에서 보고된 바와 같이 세부적인 패배를 겪게 되었다. 어쨌든, 마케도니아인들이 전반적인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중 알렉산드로스의 거의 패배할 뻔한 상황은 알렉산드로스의 젊은 기민함을 누그러뜨렸을 수 있는데, 그는 그 후 약 6개월 동안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그의 공격성을 억제한 것은 거의 패배할 뻔한 상황과 더 일치한다.
전투 후, 파르메니온은 헬레스폰트 프리지아의 수도인 페르시아 요새 다스킬리움을 점령했다. 이후, 그는 마그네시아와 트랄레스를 점령했다. 그의 형제 아산데르는 리디아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사르디스, 에페소스, 밀레투스 및 할리카르나소스를 포함한 아나톨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기원전 334-333년 겨울 동안, 왕은 리키아를 거쳐 이동했다. 동시에, 파르메니온은 서쪽에서 중앙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남은 페르시아 군대를 몰아내고 그 지역을 점령했다.[13] 두 군대는 기원전 333년 4월 프리지아의 수도인 고르디움에서 만났다. 통합된 군대는 그 후 킬리키아로 이동했고, 파르메니온은 타르수스 도시를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소치의 평원에서 다리우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은 그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마누스 산맥을 건너 이소스를 점령한 후 마케도니아군의 유일한 보급선을 차단했다. 두 군대 간의 전투는 기원전 333년 11월 이소스 남쪽에서 벌어졌다. 페르시아 군대가 훨씬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은 승리했는데, 이는 주로 파르메니온이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로스는 반격을 가할 기회를 얻었다.

파르메니온은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의 우세한 군대가 집결했을 때 야간 공격을 권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다리우스가 밤새도록 병력을 대기시키고, 마케도니아인들이 낮에 전투를 위해 휴식을 취한다면 유리한 점을 제공할 것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투 중,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의 빠른 진격으로 생긴 틈에 의해 피해를 입은 좌익의 페제타이로이를 이끌었다.[9]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서는 다리우스의 탈출이 파르메니온의 "둔하고 무능한"[14] 리더십, 또는 심지어 알렉산드로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 더욱 시사한다.
파르메니온은 바빌론 정복까지 중요한 영향력과 지휘관 역할을 계속 수행했을 것이다. 좌익을 지휘하는 굳건함은 마케도니아 전술과 전투 철학에서 핵심적이었고, 왕이 결정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게 했다.[9]
4. 몰락과 죽음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파르메니온의 아들 니카노르가 병사하자, 또 다른 아들 필로타스에게 암살 음모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이 군대를 이끌고 보급로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신뢰하는 부하 셋을 메디아로 보내 살해했다.[2][3][15] 파르메니온은 변호할 기회조차 없이 죽음을 맞았다.[1]
이후 파르메니온의 형제 아산드로스는 잠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에서 다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6]
4. 1. 필로타스의 반역 혐의
기원전 330년, 드란기아나 정복 후 알렉산드로스 3세는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가 자신의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정보를 받았다. 필로타스는 군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12]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파르메니온을 살려두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메디아에 파르메니온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3][15]파르메니온이 음모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1] 알렉산드로스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불만을 품은 파르메니온이 특히 그가 알렉산드로스 다음가는 명성을 지닌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알렉산드로스의 재무부 근처와 보급선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16] 또한, 필로타스의 가문의 수장으로서, 파르메니온은 그를 연결하는 증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는 신속하게 행동하여 클레안드로스와 시탈케스를 낙타를 타고 가장 빠른 경로로 사막을 횡단하게 하여 파르메니온을 암살하도록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이 파르메니온에게 전달되기 전에 두 장교가 도착하여 파르메니온을 찔러 죽였다.
4. 2. 파르메니온의 숙청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파르메니온의 아들 니카노르가 병사한 직후, 노선 대립으로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에게 대왕 암살 음모에 관여했다는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파르메니온이 군대를 이끌고 원정군의 보급로 상에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친구 3명을 메디아로 보내 기원전 330년에 그를 살해했다.[2][3][15]드란기아나 정복 후, 알렉산드로스는 필로타스가 자신의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정보를 받았다. 필로타스는 군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12]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파르메니온을 살려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메디아에 파르메니온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파르메니온이 음모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1]
알렉산드로스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불만을 품은 파르메니온이 특히 그가 알렉산드로스 다음가는 명성을 지닌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알렉산드로스의 재무부 근처와 보급선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16] 또한, 필로타스의 가문의 수장으로서, 파르메니온은 그를 연결하는 증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는 신속하게 행동하여 클레안드로스와 시탈케스를 낙타를 타고 가장 빠른 경로로 사막을 횡단하게 하여 파르메니온을 암살하도록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이 파르메니온에게 전달되기 전에 두 장교가 도착하여 파르메니온을 찔러 죽였다.
그의 형제 아산드로스는 이 사건 이후 잠시 동안 궁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제국에서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6]
5. 평가
파르메니온은 데이비드 젬멜의 소설 ''마케도니아의 사자''와 ''암흑의 왕자''의 주요 등장인물이다.[17]
1956년 영화 ''알렉산더 대왕''에서 파르메니온 역은 로버트 로슨 감독에 의해 아일랜드 배우 니얼 맥긴스가 연기했다.[18]
1961년 테렌스 래티건의 연극 ''어드벤처 스토리''의 텔레비전 버전에서 파르메니온은 윌리엄 데블린이 연기했다.[19]
1999년 영화 ''G2''에서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더 대왕의 검객의 몽골 경쟁자로 묘사되며, 2003년에 후자와 함께 환생하여 수천 년에 걸친 갈등을 해결한다.[20]
2004년 영화 ''알렉산더''에서 파르메니온 역은 올리버 스톤 감독의 작품으로, 존 카바나가 맡았으며 신뢰받지만 보수적인 지휘관으로 묘사되어 약간 주변화되었다. 이 영화는 그가 아들의 처형 소식을 알리는 편지를 읽은 직후 클리투스 멜라스와 안티고노스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과는 달리 (그가 그것을 알기 전에 클레안데르와 시탈케스에 의해) 묘사된다.[21]
참조
[1]
서적
Parmenio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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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Murray
[3]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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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ational[...]
National Geographic
2018-09-27
[4]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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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orbes.c[...]
2011-01-10
[5]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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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6
[6]
서적
The Madness of Alexander the Great: And the Myth of Military Gen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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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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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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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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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00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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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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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8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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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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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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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Plutarch's Lives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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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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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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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lexander the Great: The Unique History of Quintus Curtius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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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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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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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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