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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싸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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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싸움놀이는 성인 남성이 부락 단위로 대항하여 돌을 던지며 승패를 겨루는 한국의 전통 놀이이다. 고구려 시대부터 기록이 있으며, 삼국 시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후원과 군사적 활용으로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 말살 정책으로 금지되었다가 해방 이후 부활했으나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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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싸움놀이
개요
편싸움놀이
편싸움놀이
유형민속놀이, 전투놀이
다른 이름석전 (石戰)
돌싸움
돌팔매질
석기(石器)놀이
즌바이 즌바이 (石合戦 문서의 오키나와 방언)
역사
기원부족 간의 전투 모의, 군사 훈련
유래삼국시대 이전
기록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규칙 및 방법
참가 인원두 편으로 나뉜 다수 (마을, 지역 단위)
장소넓은 공터, 들판, 강변
시기주로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
준비물돌, 짚, 나무 등으로 만든 투구, 방패
진행 방식양편으로 나뉘어 돌을 던지며 싸움
상대편을 맞추거나 진지를 점령하는 방식으로 승패 결정
승리 조건상대편 진지 점령
더 많은 상대편을 쓰러뜨림
정해진 시간 안에 더 많은 점수 획득
지역별 특징
황해도해주 석전이 유명
오키나와즌바이 즌바이 (石合戦) 라는 유사한 놀이 존재
의미 및 가치
사회적 기능마을 공동체 의식 강화
청소년들의 협동심 및 용맹성 함양
문화적 가치전통 민속놀이 보존
역사적 전투 문화 체험
현대적 계승
재현 행사전국 각지에서 석전 재현 행사 개최
스포츠화안전 장비 착용 후 스포츠 형태로 발전
돌 대신 안전한 도구 사용
안전 문제
위험 요소돌에 맞아 부상 위험
안전 대책보호 장비 착용 필수
안전 규칙 준수
진행자의 통제

2. 정의

'''편싸움놀이'''는 성인 남성이 중심이 되어 부락 단위로 대항전을 벌이는 놀이이다. 서로 돌을 던져 승패를 겨루는 상무적(尙武的)인 경기이지만,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매우 위험하다.[15] '석전(石戰)'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며 '편쌈', '변전(邊戰)', '편전(便戰)'이라고도 한다.[15]

3. 역사

최초의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원시 시대 부족들이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돌을 무기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철기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돌은 생활 도구와 무기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는데, 편싸움 놀이는 이에서 발전된 놀이로 판단된다.[15]

=== 삼국시대 ===

편싸움놀이가 문헌상 최초로 기록된 예는 고구려 <<수서>>의 <동이열전>이다.[3] 이곳에는 매년 초에 패수에 모여서 놀 때 왕이 신하들을 좌우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물을 끼얹고 돌을 던져가며 소리 지르고 달리고 쫓는 놀이를 두세 번하고 그친다고 기록되어있다.[3] 고구려 왕도 이러한 경기에 참석하여 참가자들은 돌을 던지고 상대 팀을 대동강으로 몰아넣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2]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에는 '석투당'이라는 돌팔매 군대가 조직되어 있어 돌싸움이 군사적인 용도로도 활용되었음을 증명한다.

삼국시대의 편싸움놀이는 주로 정초에 실시하였다.

=== 고려시대 ===

고려에는 '석투반(척석군)'이라는 돌팔매질 부대가 있었다.[4] 공민왕 연간에 격구와 석전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민간에서도 돌싸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신우전>을 보면 단오에 각기 편을 지어 깨진 기와 조각이나 짧은 막대기로 서로 던지거나 치면서 싸우는 것을 돌싸움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2] 우왕은 거의 매년 직접 편싸움놀이를 구경했는데 구경한 후에 편싸움에 능한 사람 몇 명을 불러 술과 몽둥이를 상으로 주어 기예를 발휘하게 하였을 정도로 편싸움놀이를 즐겼다. 고려시대의 편싸움은 주로 단오에 실시되었다.

선수들은 두 줄로 나란히 서서 가벼운 몽둥이나 기와 조각으로 서로를 때렸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석전 경기는 군대와 강한 연관성을 유지했다.[2]

=== 조선시대 ===

태종 이방원은 편싸움에 관심이 많았고, 세종은 재위 11년에 편싸움을 금했으나 예종 1년에 공식적으로 다시 시행되었다.[2] 성종 4년에 동대문 밖에서 편싸움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특정 지역을 거론했으므로 모든 지역에서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 명종 10년에는 '석전군'으로 김해 사람 1백 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어, 전투 부대로서 석전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행주대첩에서 돌싸움이 전술로 활용되었고, 세종대왕은 군 부대 간의 석전 경기를 후원하여 자원자에게 특혜를 주고 평민도 관직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2] 조선 북쪽 야만족 침입에 석전 팀을 배치하기도 했다.[2]

왕실 후원과 군대 활용으로 석전 경기는 서울에서 인기를 얻었고, 단오 축제 기간 동안 흔한 오락이었다.[2] 부상률이 높아 형조에서 금지했지만, 도시 밖 농촌 지역에서는 계속되었다. 1438년 왕자들의 불법 석전 경기로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하자 세종은 석전 금지를 강화했다.[2] 1469년 금지가 해제되어 민간 경기가 되었고, 인접 마을 간 경기가 벌어졌다.[5]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관람했고, 경기 결과로 수확을 점치기도 했다.[6][7] 김해, 서울, 평양에서 대규모 석전 경기가 열렸고, ''다모'' 축제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2] 평양의 ''석전'' 선수들은 양반을 목표로 삼아 집과 재산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2] 삼포왜란 진압에 숙련된 석전 선수들이 활약했다는 보고도 있다.[2]

조선 후기에 총기가 발달하면서 척석군은 실전에서 효용가치를 잃어갔다. 영조 47년에 다시 편싸움을 금지했으나, 민간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보름날 서울 3대문 밖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 만리현에서 싸우는 변전(邊戰:편싸움)에 대한 기록이 있다. 3문밖 사람이 이기면 경기도 지방에, 애오개편이 이기면 그 밖의 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 용산이나 마포 불량 청소년들이 애오개편을 들었고, 고함소리와 함께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지는 싸움이 벌어졌으며, 사상자가 발생해도 보상이 없었다. 감독관청의 금지령에도 고쳐지지 않았고, 성안 소년들도 종로 네거리나 비파정 근처에서 편싸움을 했다. 성 밖에서는 우수현에서도 벌어졌다. 크리스토퍼 토마스 가드너는 한국의 남자다운 스포츠에 대한 애호에 감명받아 ''석전''을 전했는데, 겨울에 사람들이 할 일이 없을 때 모든 마을의 강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싸우며, 서로 죽여도 상관없다는 내용이었다.[8] 일제는 20세기 초 사회 불안을 이유로 이 경기를 탄압하여 현대 한국에서는 대부분 사라졌다.[2]

===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

일제는 민족혼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대한민국민속놀이를 금지하였는데, 편싸움도 이에 해당되어 중지되었다.[2] 해방 이후 편싸움은 다시 부활하여 1970년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왔으나, 점차 사라졌다.

3. 1. 삼국시대

편싸움놀이가 문헌상 최초로 기록된 예는 고구려 <<수서>>의 <동이열전>이다.[3] 이곳에는 매년 초에 패수에 모여서 놀 때 왕이 신하들을 좌우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물을 끼얹고 돌을 던져가며 소리 지르고 달리고 쫓는 놀이를 두세 번하고 그친다고 기록되어있다.[3] 고구려 왕도 이러한 경기에 참석하여 참가자들은 돌을 던지고 상대 팀을 대동강으로 몰아넣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2]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에는 '석투당'이라는 돌팔매 군대가 조직되어 있어 돌싸움이 군사적인 용도로도 활용되었음을 증명한다.

삼국시대의 편싸움놀이는 주로 정 초에 실시하였다.

3. 2. 고려시대

고려에는 '석투반(척석군)'이라는 돌팔매질 부대가 있었다.[4] 공민왕 연간에 격구와 석전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민간에서도 돌싸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신우전>을 보면 단오에 각기 편을 지어 깨진 기와 조각이나 짧은 막대기로 서로 던지거나 치면서 싸우는 것을 돌싸움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2] 우왕은 거의 매년 직접 편싸움놀이를 구경했는데 구경한 후에 편싸움에 능한 사람 몇 명을 불러 술과 몽둥이를 상으로 주어 기예를 발휘하게 하였을 정도로 편싸움놀이를 즐겼다. 고려시대의 편싸움은 주로 단오에 실시되었다.

선수들은 두 줄로 나란히 서서 가벼운 몽둥이나 기와 조각으로 서로를 때렸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석전 경기는 군대와 강한 연관성을 유지했다.[2]

3. 3.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은 편싸움에 관심이 많았고, 세종은 재위 11년에 편싸움을 금했으나 예종 1년에 공식적으로 다시 시행되었다.[2] 성종 4년에 동대문 밖에서 편싸움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특정 지역을 거론했으므로 모든 지역에서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 명종 10년에는 '석전군'으로 김해 사람 1백 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어, 전투 부대로서 석전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행주대첩에서 돌싸움이 전술로 활용되었고, 세종대왕은 군 부대 간의 석전 경기를 후원하여 자원자에게 특혜를 주고 평민도 관직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2] 조선 북쪽 야만족 침입에 석전 팀을 배치하기도 했다.[2]

왕실 후원과 군대 활용으로 석전 경기는 서울에서 인기를 얻었고, 단오 축제 기간 동안 흔한 오락이었다.[2] 부상률이 높아 형조에서 금지했지만, 도시 밖 농촌 지역에서는 계속되었다. 1438년 왕자들의 불법 석전 경기로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하자 세종은 석전 금지를 강화했다.[2] 1469년 금지가 해제되어 민간 경기가 되었고, 인접 마을 간 경기가 벌어졌다.[5]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관람했고, 경기 결과로 수확을 점치기도 했다.[6][7] 김해, 서울, 평양에서 대규모 석전 경기가 열렸고, ''다모'' 축제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2] 평양의 ''석전'' 선수들은 양반을 목표로 삼아 집과 재산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2] 삼포왜란 진압에 숙련된 석전 선수들이 활약했다는 보고도 있다.[2]

조선 후기에 총기가 발달하면서 척석군은 실전에서 효용가치를 잃어갔다. 영조 47년에 다시 편싸움을 금지했으나, 민간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보름날 서울 3대문 밖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 만리현에서 싸우는 변전(邊戰:편싸움)에 대한 기록이 있다. 3문밖 사람이 이기면 경기도 지방에, 애오개편이 이기면 그 밖의 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 용산이나 마포 불량 청소년들이 애오개편을 들었고, 고함소리와 함께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지는 싸움이 벌어졌으며, 사상자가 발생해도 보상이 없었다. 감독관청의 금지령에도 고쳐지지 않았고, 성안 소년들도 종로 네거리나 비파정 근처에서 편싸움을 했다. 성 밖에서는 우수현에서도 벌어졌다. 크리스토퍼 토마스 가드너는 한국의 남자다운 스포츠에 대한 애호에 감명받아 ''석전''을 전했는데, 겨울에 사람들이 할 일이 없을 때 모든 마을의 강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싸우며, 서로 죽여도 상관없다는 내용이었다.[8] 일제는 20세기 초 사회 불안을 이유로 이 경기를 탄압하여 현대 한국에서는 대부분 사라졌다.[2]

3. 4.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일제는 민족혼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대한민국민속놀이를 금지하였는데, 편싸움도 이에 해당되어 중지되었다.[2] 해방 이후 편싸움은 다시 부활하여 1970년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왔으나, 점차 사라졌다.

4. 방법

별다른 방법은 없고 두 편의 사람들이 돌멩이를 마주 던지며 싸우다가 누가 먼저 쫓겨 달아나느냐의 여부에 따라 승부를 가린다. 놀이가 격렬해지면 백병전을 펼치기도 한다.[16]

5. 지역별 특징

평양의 편싸움은 그 규모와 치열함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영조는 편싸움을 금지할 때 평양의 편싸움을 예로 들었고, 최남선은 <<조선상식>>에서 평양을 '석전향(石戰鄕)'으로 꼽을 정도였다.[17] 평양에서는 편싸움이 3일 정도 계속되었으며, 사상자가 발생하거나 다치는 일에 대해 주민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17]

6. 의의

편싸움은 기개와 용맹이 돋보이는 전통 민속놀이로 백성들의 단합과 용맹성을 기르는 데에 그 의의가 있었다.

7. 일본의 돌싸움

에치추국후나쿠라산의 신 아네쿠라히메는 노토국이즈루기산・이스루기(이스루기)히코의 부인이었지만, 후에 소마키산의 신 노토히메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두 산 사이에 질투로 인한 다툼이 일어났다.[14] 누노쿠라야마의 누노쿠라히메는 아네쿠라히메를 돕고, 코야마의 카부토(카부토)히코는 노토히메를 도와 큰 신전이 벌어져, 나라 안의 신들이 모여 중재했다.[14] 일설에 따르면, 매년 10월 12일 축제 날에는 후나쿠라산과 이즈루기산의 돌싸움이 벌어져, 후나쿠라의 곤겐이 쇠붙이를 던지기 때문에 이 산 기슭의 들에는 작은 돌이 없다고 하며, 반대로 이와쿠라에 돌이 많은 것은 그들이 던진 돌이 떨어진 탓이라고 한다.[14]

이 에치국 신화는 토야마번의 무사가 분카 12년 (1815년)에 기술한 『긍구천달록(코코센타츠로쿠)』에 수록되어 있다.[14] 에도 시대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후처 쫓아내기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노토히메가 카부토의 도움을 받았을 때 파도를 높여 투석을 막았다고 기술되어 있다.[14] 고고학자 모리 코이치는 에치국의 여성 세력의 강함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본다.[14] 참고 자료는 야나기타 구니오의 『일본의 전설』카도카와 문고 개정 15판 1977년 (1판 53년) pp.125 - 12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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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치국 신화는 토야마번의 무사가 분카 12년 (1815년)에 기술한 『긍구천달록(코코센타츠로쿠)』에 수록되어 있다.[14] 에도 시대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후처 쫓아내기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노토히메가 카부토의 도움을 받았을 때 파도를 높여 투석을 막았다고 기술되어 있다.[14] 고고학자 모리 코이치는 에치국의 여성 세력의 강함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본다.[14] 참고 자료는 야나기타 구니오의 『일본의 전설』카도카와 문고 개정 15판 1977년 (1판 53년) pp.125 - 126이다.

참조

[1] 웹사이트 석전(石戰) https://encykorea.ak[...]
[2] 서적 Korea's Pastimes and Customs: A Social History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2013-03-21
[3] 서적 Korea's Pastimes and Customs: A Social History Homa & Sekey Books 2006
[4] 웹사이트 석전(石戰) https://encykorea.ak[...]
[5] 서적 Korean Traditional Culture https://books.google[...] 지문당 2013-03-21
[6] 뉴스 Stone battles from the past, a Joseon New Year event http://www.jejuweekl[...] 2012-01-20
[7] 웹사이트 Seokjeon http://folkency.nfm.[...] 2013-03-21
[8] 웹사이트 Lunar New Year: A time for 'manly sport' https://www.koreatim[...]
[9] PDF 唐古・鍵考古学ミュージアムコレクション40 https://www.town.taw[...]
[10] 기타 吾妻鏡 文永3年(1266年)4月21日条에, 飛礫는 쟁쟁이나 狼藉에 연결된다고 금지된다는 기술이 있어, 관동에 있어서는 武家法에 의해 件数가 줄었지만, 교토 쪽에서는 아직 행해지고 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11] 뉴스 【深掘り「どうする家康」】少年期の松平元康は戦略眼に優れ、決して臆病ではなかった https://news.yahoo.c[...] 2024-09-02
[12] 문서 虚偽の死亡届であり、実際は生存していたとされる。真田守信の項目参照。
[13] 서적 民俗の事典 岩崎美術社 1972
[14] 서적 『エコール・ド・ロイヤル 古代日本を考える9 古代日本の豪族』 学生社 1987
[15] 서적 민속놀이와 명절 上 대산출판사 2000
[16] 서적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 무예 풍속사 푸른역사 2005
[17] 서적 서양인의 조선살이, 1882~1910 푸른역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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