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망명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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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에 점령당한 후, 폴란드 대통령 이그나치 모시치츠키에 의해 파리에서 수립되었다.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츠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를 총리로 임명하여, 폴란드 해군과 망명에 성공한 군인들을 지휘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런던으로 이전하여 연합국들의 승인을 받았으며, 폴란드 농민당, 폴란드 사회당, 노동당, 국민당 등 연립 정부 형태로 운영되었다. 망명 정부는 소련과의 관계 단절,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 유대인 학살에 대한 보고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나, 카틴 학살 사건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5년, 서방 연합국의 승인 철회와 공산주의 정권 수립으로 인해 런던에 남은 정부는 점차 쇠퇴하였고, 1990년 폴란드 민주화 이후 레흐 바웬사 정권에 권한을 이양하며 해산되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받은 독일과 소련은 1939년 9월 17일, 폴란드 대통령 이그나치 모시치츠키는 헌법 규정에 따라 상원 의장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9월 30일, 모시치츠키의 사임을 받아들인 라치키에비치는 망명지인 파리의 폴란드 대사관에서 대통령 취임을 선서하고, 수상으로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를 임명하여 폴란드 망명 정부가 발족했다. 폴란드 해군의 대부분과 탈출에 성공한 일부 육군 장병은 망명 정부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망명 정부는 앙제(Angers)로 이전했다. 그리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항복하고 비시 프랑스가 출범하자 런던으로 옮겨졌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대통령이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를 후임으로 지명하고, 라치키에비치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를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34] 망명 정부는 폴란드 농민당, 폴란드 사회당, 노동당, 국민당 등 여러 정당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시코르스키는 중·동유럽 연합 구상을 추진하기도 했다.[36]
2. 역사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으로 망명 정부는 소련과의 외교를 단절했다.
대부분의 폴란드 해군은 영국으로 도피했다.[34] 수만 명의 폴란드 군인들은 헝가리나 루마니아를 넘어 도망쳐 프랑스에서 계속 싸웠다. 많은 이들이 동맹국인 노르웨이군의 전투에 참전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대서양 해전, 아프리카에서는 토브룩 공방전, 이탈리아의 안코나나 몬테카시노 전투 등 다른 동맹국과 함께 싸웠다. 이후 폴란드와 소련은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통해 소련 관리하에 놓인 폴란드 시민의 해방과 나치 독일에 항전하는 동맹군의 군대를 조직한다.
망명 정부는 정치적으로 폴란드 농민당, 폴란드 사회당(PPS), 노동당, 국민당의 연립이었다.
1940년 11월, 시코르스키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와의 동맹에 조인했다.[35] 시코르스키의 정치적 목표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연합에서 시작하는 중·동유럽 연합 (Central and Eastern European federation, Międzymorze)이었다.[36] Międzymorze의 중·동유럽 연합에 참여 초청된 국가는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이다.[37]
1941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면서(독소 전쟁) 망명 정부는 소련과 외교 관계를 구축했다.[38][39]
1941년 12월 11일, 폴란드 망명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했다.[40]
폴란드 군인들은 독소 양국의 포로가 되었지만, 독소 개전 시 소련 측 포로는 연합국 측의 전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의 비밀 의정서에 의해 본토를 유린한 소련의 지휘하에서 싸우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영소의 세력이 인접해 있던 이란에서 영국에 인도되었다. 그들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휘하에 들어가 에르빈 롬멜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항전(북아프리카 전선, 가잘라 전투)에서 영국을 위해 싸웠다. 이 군대는 나중에 제2 폴란드군단이 되어 연합국과 함께 싸웠다.
전쟁 중, 특히 1942년에 유대인의 홀로코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폴란드 망명정부는 연합국에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41][42]
1943년, 독일은 카틴 숲에서 소련에 학살된 다수의 폴란드군 포로 시체를 발견했다고 공표했다.[43] 소련은 독일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망명 정부에 동조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망명 정부와 단교했다. 1943년, 망명 정부와 폴란드 군의 리더였던 시코르스키를 포함한 정부·군 관계자 13명이 비행기 사고(en)로 사망했다.[44]
1942년 - 1945년,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 내에 유대인 구제 위원회인 "제고타"가 조직되었다. 이 멤버에는 후일 외무 장관(1999-2001년) 브와디스와프 바르토셰프스키가 포함된다.
1943년 - 1944년, 동맹국 윈스턴 처칠은 소련과 망명 정부의 회담 재개를 시도했지만, 몇 가지 문제(카틴 숲 학살, 영토 문제 등)로 인해 포기되었다.[45] 망명 정부의 당수 미코와이치크는 영토 문제에 대해 거부했다.
1944년 8월에는 동쪽에서 나치 독일을 공격하는 소련의 호응에 망명 정부의 국내군 주도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났지만, 소련의 바르샤바 진격이 없었기 때문에 국내군과 다수의 바르샤바 시민이 희생되었다. 11월 미코와이치크는 소련에 불신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임[46], 폴란드로 돌아가 소련 점령 하의 신정부의 전국 연합 임시 정부에서 부수상으로, 수상은 사회당의 모라프스키, 또 다른 부수상은 공산주의 지도자인 고무우카가 되었다.
1945년 6월, 망명 정부와 공산주의 계열의 루블린 정권이 합동하여 전국 연합 임시 정부 (RTRP)가 성립했다. 루블린 정권 발족 초에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소련의 NKVD 에이전트)가 국가 평의회 의장에 취임하고, 노동자당 서기장을 고무우카가 맡았다.
1945년 7-8월 포츠담 회담까지 폴란드는 소련의 세력권이 되었고, 망명 정부의 포기는 서유럽의 배신 행위(:en:ProvisionalWestern betrayal)로 비난받았다.[47]
1945년, 국내군은 해체되고, 소련의 괴뢰 정권이었던 공산 정권에 의한 망명계의 대신 및 정치인의 체포와 국외 추방 등으로 안전한 귀국을 할 수 없었고, 더욱이 7월, 영국과 미국은 망명 정부에 대한 정통 정부로서의 승인을 철회했다. 런던의 폴란드인은 폴란드 대사관에서 철수해야 했다. 망명 정부계 폴란드인의 대부분은 미국 등으로 이주했다.
동유럽 혁명의 흐름 속에서 1990년에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 레흐 바웬사 (레흐 바르테사) 정권 (폴란드 제3공화국)이 성립했다. 이에 따라 망명 정부 대통령인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는 그때까지 유지했던 정권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레갈리아 (1918년 폴란드 헌법 〈폴란드 제2공화국 헌법〉 정본, 폴란드 국기 정기 등)를 제3공화국으로 승계하고, 그 역할을 마치고 소멸했다. 바웬사 정권은 성립 기념식에 폴란드 망명 정부를 초청하여 자신을 제2공화국의 정통 후계자로 위치시켰지만, 전 공산주의 정권의 보이체흐 야루젤스키 전 대통령의 식전 초대는 없었다.
2. 1. 수립
1939년 9월 17일, 폴란드 제2공화국의 대통령 이그나치 모시치츠키는 폴란드 남부 국경 부근에 위치한 쿠치[48]에서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폴란드 상원의 의장인 브와디스와프 라츠키예비츠를 후임자로 임명했다.[49][50] 이는 1935년 4월 채택된 폴란드 헌법 제24조에 따른 것이었다.
모시치츠키는 1939년 9월 29일[52] 또는 9월 30일[51][50][53]에 사임했다. 당시 파리에 있던 라츠키예비츠는 폴란드 대사관에서 헌법 선서를 하고 폴란드의 대통령이 되었다. 라츠키예비츠는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를 총리로 임명했으며,[53][54]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가 물러나면서 시코르스키를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도 임명했다.[54][55]
폴란드 해군 대부분은 영국으로 탈출했으며,[56] 수많은 폴란드 육군 및 공군 병사들은 헝가리와 루마니아 또는 발트해를 거쳐 도주했고, 프랑스에서 계속 전투를 이어갔다.[57]
2. 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활동
1939년 폴란드 침공을 받은 독일과 소련은 1939년 9월 17일, 폴란드 대통령 이그나치 모시치츠키는 헌법 규정에 따라 상원 의장인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9월 30일, 모시치츠키의 사임을 받아들인 라치키에비치는 망명지인 파리의 폴란드 대사관에서 대통령 취임을 선서하고, 수상으로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를 임명했다. 이로써 폴란드 망명 정부가 발족했다. 폴란드 해군의 대부분은 탈출했기 때문에 이를 지휘하에 두고, 게다가 탈출에 성공한 일부 육군 장병도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망명 정부는 앙제(Angers)로 이전했다. 그리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항복하고 비시 프랑스가 출범하자 런던으로 옮겨졌다.[13][14]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으로 망명 정부는 소련과의 외교를 단절했다.
대부분의 폴란드 해군은 영국으로 도피했다.[34] 수만 명의 폴란드 군인들은 헝가리나 루마니아를 넘어 도망쳐 프랑스에서 계속 싸웠다. 많은 이들이 동맹국인 노르웨이군의 전투에 참전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대서양 해전, 아프리카에서는 토브룩 공방전, 이탈리아의 안코나나 몬테카시노 전투 등 다른 동맹국과 함께 싸웠다. 이후 폴란드와 소련은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통해 소련 관리하에 놓인 폴란드 시민의 해방과 나치 독일에 항전하는 동맹군의 군대를 조직한다.
망명 정부는 정치적으로 폴란드 농민당, 폴란드 사회당(PPS), 노동당, 국민당의 연립이었다.[5]
1940년 11월, 시코르스키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와의 동맹에 조인했다.[35] 시코르스키의 정치적 목표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연합에서 시작하는 중·동유럽 연합 (Central and Eastern European federation, Międzymorze)이었다.[36] Międzymorze의 중·동유럽 연합에 참여 초청된 국가는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이다.[37]
1941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면서(Barbarossade, 독소 전쟁) 망명 정부는 소련과 외교 관계를 구축했다.[15][16][38][39]
1941년 12월 11일, 폴란드 망명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했다.[40]
폴란드 군인들은 독소 양국의 포로가 되었지만, 독소 개전 시 소련 측 포로는 연합국 측의 전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의 비밀 의정서에 의해 본토를 유린한 소련의 지휘하에서 싸우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영소의 세력이 인접해 있던 이란에서 영국에 인도되었다. 그들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휘하에 들어가 에르빈 롬멜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항전(북아프리카 전선, 가잘라 전투)에서 영국을 위해 싸웠다. 이 군대는 나중에 제2 폴란드군단이 되어 연합국과 함께 싸웠다.[18]
전쟁 중, 특히 1942년에 유대인의 홀로코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폴란드 망명정부는 연합국에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19][20][41][42]
1943년, 독일은 카틴 숲에서 소련에 학살된 다수의 폴란드군 포로 시체를 발견했다고 공표했다.[23][24] 소련은 독일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망명 정부에 동조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망명 정부와 단교했다. 1943년, 망명 정부와 폴란드 군의 리더였던 시코르스키를 포함한 정부·군 관계자 13명이 비행기 사고(en)로 사망했다.[26]
1942년 - 1945년,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 내에 유대인 구제 위원회인 "제고타"가 조직되었다. 이 멤버에는 후일 외무 장관(1999-2001년) 브와디스와프 바르토셰프스키가 포함된다.
1943년 - 1944년, 동맹국 윈스턴 처칠은 소련과 망명 정부의 회담 재개를 시도했지만, 몇 가지 문제(카틴 숲 학살, 영토 문제 등)로 인해 포기되었다.[45] 망명 정부의 당수 미코와이치크는 영토 문제에 대해 거부했다.
1944년 8월에는 동쪽에서 나치 독일을 공격하는 소련의 호응에 망명 정부의 국내군 주도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났지만, 소련의 바르샤바 진격이 없었기 때문에 국내군과 다수의 바르샤바 시민이 희생되었다. 11월 미코와이치크는 소련에 불신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임[46], 폴란드로 돌아가 소련 점령 하의 신정부의 전국 연합 임시 정부에서 부수상으로, 수상은 사회당의 모라프스키, 또 다른 부수상은 공산주의 지도자인 고무우카가 되었다.
2. 3. 전후 활동과 냉전
1945년 6월 28일, 미코와이치크는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하에 설립된 국민통일 임시 정부에서 직무를 시작했는데, 이는 서방 연합국이 폴란드가 소련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는 ''기정사실''을 묵인하고 망명 정부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면서 바르샤바 정부를 합법화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프랑스는 1945년 6월 29일에 이를 따랐고,[5] 미국과 영국은 1945년 7월 5일에 따랐다. 망명 중인 폴란드군은 1945년에 해산되었고, 대부분의 구성원은 공산주의 폴란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없어 다른 국가에 정착했다.[5][30]
많은 폴란드 망명자들은 이 조치에 반대했는데, 이 정부가 폴란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겉치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1947년 1947년 폴란드 입법 선거에서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민주 블록이 조작된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공산주의 지배 블록은 8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대규모 부정 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결과였다. 야당은 선거가 진실했다면 압도적인 승리(일부 추산에 따르면 80%)를 거두었을 것이며, 미코와이치크가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1월, 실레지아 협회와의 회의에서 미코와이치크는 고문 파베우 잘레스키와 함께 체포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체포 영장이 이미 서명된 상태였다. 그들은 즉시 탈출을 시도했다. 미코와이치크는 북쪽으로 향했고, 잘레스키는 남쪽 통로를 통해 탈출했다. 위험 지역에서 잘레스키는 짚 수레에 실려 옮겨졌다. 그의 형제 얀 잘레스키는 탈출을 도왔다. 파베우는 미코와이치크와 그의 장인인 코르판투프 근처의 아리에스와 함께 며칠을 기다린 후, 이송이 준비되었다. 그 후 체코를 거쳐 잘레스키는 서쪽으로 갔고, 미코와이치크는 슈체친에서 배를 타고 갔다. 이것이 그들의 폴란드에서의 마지막 체류였다.
한편, 폴란드 망명 정부는 그 존재를 유지했다. 런던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포틀랜드 플레이스에 있는 폴란드 대사관을 비워야 했고, 대통령의 개인 거처인 이튼 플레이스 43번지만 남게 되었다. 망명 정부는 폴란드에 대한 외세 점령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며, 전쟁 전 폴란드의 중요한 기록 보관소를 유지했다.[5][30][31]
1954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망명 정부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전쟁 이후 망명한 50만 명의 반공주의 폴란드인 중 80%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한 그룹은 아우구스트 잘레스키 대통령의 7년 임기가 만료된 후 그의 연임을 반대했다. 그들은 1954년 7월 국민 통합 위원회를 결성하고, 토마시 아르치셰프스키, 블라디슬라프 안데르스 장군, 그리고 에드바르트 베르나르트 라친스키로 구성된 3인 위원회를 설립하여 국가 원수의 기능을 수행했다. 잘레스키가 1972년에 사망한 후에야 두 파벌이 재결합했다. 휴곤 한케 총리는 1955년에, 그의 전임자인 스타니스와프 마츠키에비치는 1956년에 망명 정부의 지지자 중 일부는 결국 폴란드로 돌아갔다. 바르샤바에 설치된 소련 정부는 망명자들의 귀환을 위해 공산주의 폴란드 행정부에서 품위 있는 고용과 과거의 과오에 대한 용서를 약속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아일랜드 공화국, 프랑코주의 스페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1972년 10월 19일 성좌(바티칸 시국)가 망명 정부에 대한 승인을 철회한 마지막 국가였지만, 외교 특권은 이미 1959년에 바티칸 국무장관 도메니코 타르디니에 의해 철회되었다.[31]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망명 정부는 계속 존속했다. 1989년 폴란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끝나자, 런던에서 2주마다 회의를 열고 영국에 거주하는 약 15만 명의 폴란드 참전 용사와 그 후손들(런던에만 3만 5천 명 포함)의 충성을 받는 대통령과 8명의 내각이 여전히 존재했다.
2. 4. 폴란드 민주화와 해산
1945년 6월 28일, 미코와이치크는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하에 설립된 국민통일 임시 정부에서 직무를 시작했다. 이는 서방 연합국이 폴란드가 소련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는 ''기정사실''을 묵인하고, 망명 정부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면서 바르샤바 정부를 합법화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프랑스는 1945년 6월 29일에 이를 따랐고,[5] 미국과 영국은 1945년 7월 5일에 따랐다. 망명 중인 폴란드군은 1945년에 해산되었고, 대부분의 구성원은 공산주의 폴란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없어 다른 국가에 정착했다.[5][30]
많은 폴란드 망명자들은 이 조치에 반대했는데, 이 정부가 폴란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겉치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민주 블록이 1947년 폴란드 입법 선거에서 조작된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1947년에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블록은 8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대규모 부정 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결과였다. 야당은 선거가 진실했다면 압도적인 승리(일부 추산에 따르면 80%)를 거두었을 것이며, 미코와이치크가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1월, 실레지아 협회와의 회의에서 미코와이치크는 고문 파베우 잘레스키와 함께 체포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체포 영장이 이미 서명된 상태였다. 그들은 즉시 탈출을 시도했다. 미코와이치크는 북쪽으로 향했고, 잘레스키는 남쪽 통로를 통해 탈출했다. 위험 지역에서 잘레스키는 짚 수레에 실려 옮겨졌다. 그의 형제 얀 잘레스키는 탈출을 도왔다. 파베우는 미코와이치크와 그의 장인인 코르판투프 근처의 아리에스와 함께 며칠을 기다린 후, 이송이 준비되었다. 그 후 체코를 거쳐 잘레스키는 서쪽으로 갔고, 미코와이치크는 슈체친에서 배를 타고 갔다. 이것이 그들의 폴란드에서의 마지막 체류였다.
한편, 폴란드 망명 정부는 그 존재를 유지했다. 런던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포틀랜드 플레이스에 있는 폴란드 대사관을 비워야 했고, 대통령의 개인 거처인 이튼 플레이스 43번지만 남게 되었다. 망명 정부는 폴란드에 대한 외세 점령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며, 전쟁 전 폴란드의 중요한 기록 보관소를 유지했다.[5][30][31]
1954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망명 정부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전쟁 이후 망명한 50만 명의 반공주의 폴란드인 중 80%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한 그룹은 아우구스트 잘레스키 대통령의 7년 임기가 만료된 후 그의 연임을 반대했다. 그들은 1954년 7월 국민 통합 위원회를 결성하고, 토마시 아르치셰프스키, 블라디슬라프 안데르스 장군, 그리고 에드바르트 베르나르트 라친스키로 구성된 3인 위원회를 설립하여 국가 원수의 기능을 수행했다. 잘레스키가 1972년에 사망한 후에야 두 파벌이 재결합했다. 휴곤 한케 총리는 1955년에, 그의 전임자인 스타니스와프 마츠키에비치는 1956년에 망명 정부의 지지자 중 일부는 결국 폴란드로 돌아갔다. 바르샤바에 설치된 소련 정부는 망명자들의 귀환을 위해 공산주의 폴란드 행정부에서 품위 있는 고용과 과거의 과오에 대한 용서를 약속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아일랜드 공화국, 프랑코주의 스페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1972년 10월 19일) 성좌 (바티칸 시국)가 망명 정부에 대한 승인을 철회한 마지막 국가였지만, 외교 특권은 이미 1959년에 바티칸 국무장관 도메니코 타르디니에 의해 철회되었다.[31]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망명 정부는 계속 존속했다. 1989년 폴란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끝나자, 런던에서 2주마다 회의를 열고 영국에 거주하는 약 15만 명의 폴란드 참전 용사와 그 후손들, 런던에만 3만 5천 명을 포함한 이들의 충성을 받는 대통령과 8명의 내각이 여전히 존재했다.
1990년 12월 22일, 바르샤바 왕궁에서 열린 특별 행사에서 폴란드 공산주의 통치가 종식된 이후 망명 정부는 공식적으로 책무와 표식을 제3 폴란드 공화국 정부에 넘겼다. 전쟁 이후 폴란드의 첫 비공산주의 대통령인 레흐 바웬사는 망명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인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로부터 폴란드 공화국의 상징(대통령 기, 대통령 및 국가 인장, 대통령 띠, 1935년 헌법 원본)을 넘겨받았다.[32] 런던에 기반을 둔 정부 기구의 해산은 1991년 12월 31일에 완료되었다고 선언되었다. 1992년, 망명 정부가 수여한 군사 훈장 및 기타 훈장은 폴란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996년에 채택된 전직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의 봉급에 관한 법률은 전직 대통령의 권리, 특권, 보수 및 기타 혜택을 규정하며, 마지막 망명 대통령에게도 이를 명시적으로 부여했다.
3. 주요 인물
1943년 시코르스키 사후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가 뒤를 이었으나, 카틴 숲 학살 등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며 사임했다.[44] 이후 전국 연합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망명 정부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1990년 폴란드에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마지막 망명 정부 대통령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는 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물품들을 새 정부에 넘기고 해산했다.
3. 1. 역대 대통령
순서 | 사진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재임 기간 | 정당 |
---|---|---|---|---|---|---|
1 | -- |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 | 1939년 9월 30일 | 1947년 6월 6일 | 7년 219일 | 무소속 |
2 | -- | 아우구스트 잘레스키 | 1947년 6월 9일 | 1972년 4월 8일 | 24년 304일 | 무소속 |
3 | -- | 스타니스와프 오스트로프스키 | 1972년 4월 9일 | 1979년 3월 24일 | 6년 349일 | 폴란드 사회당 |
4 | -- | 에드바르트 베르나르트 라친스키 | 1979년 4월 8일 | 1986년 4월 8일 | 7년 0일 | 무소속 |
5 | -- | 카지미에시 사바트 | 1986년 4월 8일 | 1989년 7월 19일 | 3년 102일 | 무소속 |
6 | -- |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 | 1989년 7월 19일 | 1990년 12월 22일 | 1년 156일 | 무소속 |
1990년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하고 레흐 바웬사 정권 (폴란드 제3공화국)이 성립하자, 망명 정부 대통령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는 정권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을 제3공화국에 승계하고 그 역할을 마쳤다.[5]
3. 2. 역대 총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