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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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로, 1794년에 태어났다. 그는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5월 2일 봉기를 겪었으며, 이후 망명 생활을 했다. 1819년 루이사 카를로타와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정치적 투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예술 활동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865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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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는 스페인의 인판테이자 이사벨 2세 여왕의 배우자로, 카를로스 4세의 손자이며 이사벨 2세와는 이종사촌 관계이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 |
---|---|
기본 정보 | |
이름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안토니오 데 보르본 이 보르본-파르마 |
출생 | 1794년 3월 10일 |
출생지 | 아란후에스, 스페인 |
사망 | 1865년 8월 13일 (향년 71세) |
사망지 | 마드리드, 스페인 |
안장지 | 엘 에스코리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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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
왕가 | 부르봉-앙주 가 |
아버지 | 카를로스 4세 |
어머니 |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루이사 카를로타 데 보르본-도스 시실리아스 (1819년 6월 12일 결혼, 1844년 1월 29일 사별) 테레사 아레돈도 이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 (1852년 12월 19일 결혼, 1863년 12월 29일 사별) |
자녀 | 이사벨 페르난다, 이그나츠 구로프스카 백작부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스페인 국왕 엔리케 데 보르본, 세비야 공작 루이사 테레사 데 에스파냐, 세사 여공작 호세파 페르난다 데 에스파냐, 구엘 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바스티앙 왕자비 아말리아, 바이에른의 아달베르트 공자비 |
2. 유년 시절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사이에서 태어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14번째이자 막내 아들이었다. 그의 정식 이름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안토니오 마리아였다. 그의 부모는 마누엘 고도이에게 국정을 맡겼고, 궁정에서는 고도이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친부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역사학자들은 근거가 없다고 본다.[4]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형들인 페르디난드 7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와 달리 요한 하인리히 페스타로치의 교육 이론에 따라 교육받았다.[6] 마누엘 고도이는 이 교육 체계를 스페인 전역에 시행하고자 했고, 왕실 부부를 설득하여 막내아들에게 적용하게 했다.[6] 그의 부모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가 스페인 해군에서 경력을 쌓기를 원했지만, 나폴레옹의 스페인 개입으로 인판테의 교육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6]
1808년,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아랑후에스 폭동 이후 정부를 장악한 그의 장남 페르디난드 7세 사이의 불화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바욘(프랑스) 회의에 초청하여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그에게 넘겨주도록 압박했다.[7] 나폴레옹은 목표를 달성한 후 스페인을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주고 스페인 왕실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8][9]
나폴레옹과 바욘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그의 부모와 형들과 달리, 당시 열네 살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그의 누이이자 폐위된 에트루리아 여왕(루카 공작부인 마리아 루이사)과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마드리드 왕궁에 남겨졌다. 1808년 5월 2일 봉기 당시, 스페인 땅에 남은 마지막 왕족 남성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가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군중이 왕궁 앞에 모였다. 창백하고 감정에 휩싸인 그의 모습은 군중을 감동시켰고, 무장이 부족했던 주민들은 프랑스군과 맞섰다. 프랑스 침략자에 대한 자발적인 민중봉기는 마드리드 전역으로 확산되었지만, 프랑스 장군 뮈라(Murat)는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10]
2. 1. 출생과 가족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인판테)는 1794년 3월 10일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1748~1819)와 그의 부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1751~1819) 사이에서 태어난 열네 번째 자녀였다. 그의 정식 이름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안토니오 마리아였다.
부모는 29년 전에 결혼했고,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그들의 마지막 자녀였다. 대가족의 막내였던 그는 어머니의 총애를 받았다.[2] 아버지 카를로스 4세는 사냥과 시계 수집에 열정적이었지만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3] 그는 왕국 통치에 수동적인 역할을 맡았고, 정부를 아내와 수상인 마누엘 고도이에게 맡겼다.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국왕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권력을 유지할 정치적 수완이 부족하여 자신의 신뢰와 정부 통치를 고도이에게 맡겼다. 고도이는 왕비에 의해 고위직에 올랐다. 궁정 소문에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와 그의 누이 마리아 이사벨의 친부가 국왕이 아니라 고도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최근 전기 작가들과 역사가들은 이러한 주장이 증명되지 않았고 개연성이 없다고 밝혔다.[4]
어린 시절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금발에 갈색 눈, 부드러운 표정을 가졌다.[5] 1800년 봄, 여섯 살 때 그는 가족과 함께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초상화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에 등장한다.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의 막내로 아랑후에스에서 태어났으며, 친아버지는 왕의 총신이자 왕비의 애인이었던 마누엘 데 고도이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형으로는 페르난도 7세, 스페인 왕위 계승자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성인 파올라의 프란체스코를 의미한다.
1819년, 양시칠리아 왕녀 루이사 카를로타(프란체스코 1세의 왕녀)와 결혼했다. 루이사 카를로타의 어머니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누이 이사벨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숙부·조카 관계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11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 1820년 - 1821년 | |
이사벨 페르난다 | 1821년 - 1897년 |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 1822년 - 1902년 | 이사벨 2세의 왕배 |
엔리케 마리아 | 1823년 - 1870년 | 세비야 공작 |
루이사 테레사 | 1824년 - 1900년 | 제16대 세사 공작 호세 마리아 오소리오 데 모스코소와 결혼 |
두아르테 펠리페 | 1826년 - 1830년 | |
호세피나 페르난다 | 1827년 - 1920년 | |
마리아 테레사 | 1828년 - 1829년 | |
페르난도 마리아 | 1832년 - 1854년 | |
마리아 크리스티나 | 1833년 - 1902년 | 스페인 왕자·포르투갈 왕자 세바스티앙 가브리엘 왕비 |
아말리아 델 피라르 | 1834년 - 1905년 | 바이에른 왕자 아르달베르트 왕비 |
2. 2. 교육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교육은 그의 두 형인 페르디난드 7세와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받은 교육과는 달랐다.[6] 그에게 주어진 교육 계획은 요한 하인리히 페스타로치의 교육 이론에서 영감을 받았다.[6] 마누엘 고도이는 이 교육 체계를 스페인 전역에 시행하고자 했고, 왕실 부부를 설득하여 막내아들에게 적용하게 했다.[6] 그의 부모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가 스페인 해군에서 경력을 쌓기를 원했지만, 나폴레옹의 스페인 개입으로 인해 인판테의 교육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6]2. 3. 나폴레옹 침공과 5월 2일 봉기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아랑후에스 폭동(아랑후에스 폭동) 이후 정부를 장악한 그의 장남 페르디난드 7세 사이의 불화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바욘(바욘)(프랑스(프랑스))으로 회의에 초청하여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그에게 넘겨주도록 압박했다.[7] 나폴레옹은 목표를 달성한 후 스페인을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주고 스페인 왕실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8][9]나폴레옹과 바욘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그의 부모와 형들과 달리, 당시 열네 살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그의 누이이자 폐위된 에트루리아 여왕(루카 공작부인 마리아 루이사)과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마드리드 왕궁에 남겨졌다. 1808년 5월 2일(5월 2일 봉기) 인판테, 즉 스페인 땅에 남은 마지막 왕족 남성이 떠나자, 그의 이동을 막으려는 군중이 왕궁 앞에 모였다. 창백하고 감정에 휩싸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모습은 군중을 감동시켰다. 무장이 부족했던 주민들은 프랑스군과 맞섰다. 프랑스 침략자에 대한 자발적인 민중봉기는 마드리드 전역으로 확산되었지만, 프랑스 장군 뮈라(Murat)는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10]
3. 망명 생활
스페인 왕실 가족은 6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페르난도 7세를 비롯한 왕족들은 발랑세이 성에 감금되었고,[11]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부모님과 함께 망명 생활을 한 유일한 자녀였다.[6][12]
카를로스 4세 국왕과 왕비, 그리고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고도이와 함께 콩피에뉴 성에서 지내다 마르세유를 거쳐 로마로 이주했다.[13] 백일천하 동안에는 베로나로 피신했다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14]
망명 생활 동안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고도이에게서 몇몇 수업을 받았다. 부모는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으나, 그는 성직에 뜻이 없었다.[6] 그는 고도이의 딸 카를로타와 가까워져 결혼 이야기가 나왔지만, 고도이의 영향력을 꺼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형에게 편지를 보내 군인의 길을 걷게 해달라고 요청했다.[15] 페르난도 7세는 이를 허락하고 동생을 스페인으로 불렀다.
1816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로마를 떠나 스페인으로 향하던 중 리옹에서 스캔들에 휘말렸다. 페르난도 7세는 동생을 용서했지만, 마드리드로 바로 돌아오는 대신 유럽 여행을 하도록 명령했다.[17] 이후 17개월 동안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바이마르,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프라하, 빈을 방문했고, 작센 공주나 바이에른 국왕의 딸과의 결혼이 추진되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18] 그는 조카딸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 공주와의 결혼을 원했지만, 조카딸의 어머니가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1818년, 페르난도 7세는 아내의 압력으로 동생에게 귀국을 명했다.
3. 1. 프랑스와 이탈리아 망명
이후 6년 동안 스페인 왕실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망명 생활을 했다. 페르난도 7세, 그의 동생인 돈 카를로스 왕자(Infante Don Carlos), 그리고 그들의 숙부인 늙은 안토니오 왕자(Infante Don 안토니오)는 발랑세이 성에 엄중한 감시하에 감금되었다.[11] 십 대였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부모를 따라 프랑스 망명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녀였다.[6][12]카를로스 4세, 왕비, 그리고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고도이를 항상 대동하고 파리 북동쪽에 위치한 콩피에뉴 성(Château de Compiègne)에 거처를 마련했다. 더 따뜻한 기후를 찾아 1808년 10월 마르세이유로 이주했다.[13] 그들은 다음 4년 동안 점점 더 힘든 상황 속에서 그곳에서 지냈다. 왕자의 누이이자 전 에트루리아 왕비였던 인물은 나폴레옹에 의해 로마의 수녀원에 투옥되었다. 누이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리고 나폴리와 파르마에서 보낸 초기 시절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부모는 1812년 7월 그와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그들은 보르게세 궁전에 정착했다. 백일 천하 기간 동안,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1808년부터 나폴리 왕이었던 뮈라가 황제의 이름으로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왕족 가족은 베로나로 피신했다. 나폴레옹의 최종 패배 후, 스페인 왕족 일행은 로마로 돌아와 바르베리니 궁전으로 이주했다.[14]
망명 생활 동안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교육은 소홀히 되었다. 폐위된 왕족 가족과 같은 집에 살았던 고도이는 그에게 몇몇 수업을 가르쳤다. 로마에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부모는 그를 성직자의 길로 인도하려 했다. 그는 사소한 성품을 받았고 매일 종교 의복을 입었으며 교황은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성직 생활에 대한 진정한 마음이 없었다.[6] 비슷한 또래의 형제가 없었기에 프란시스코의 끊임없는 동반자는 고도이의 딸인 카를로타 데 고도이 보르본(Carlota de Godoy Borbon), 수에카 공작 부인이었다. 1814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20세였고 카를로타는 14세였다. 그들이 서로 좋아했기 때문에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그들이 결혼하기를 원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주저했다. 고도이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그 주변의 부패에 불만을 품은 왕자는 왕인 그의 형에게 편지를 써서 성직 서품을 포기하고 대신 스페인 군대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15] 나폴레옹의 몰락 후 스페인 왕위에 복위된 페르난도 7세는 고도이의 딸과의 결혼 가능성을 좌절시키기 위해 그의 동생을 스페인으로 불러들였다. 1816년 8월까지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로마에서의 그의 행동이 우려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막내아들이 떠나도록 허락했다.[16]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1816년 11월 22일 로마를 떠났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리옹에 있었을 때, 그는 여행을 망칠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가 그의 하인 중 한 명의 정부를 연인으로 삼았고, 그 정부가 그 상황을 이용하여 재정적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왕자는 용서를 구했다. 페르난도 7세는 그의 동생을 용서했지만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것을 연기하고 유럽 여러 법원을 여행하도록 명령했다.[17] 그 후 17개월 동안 왕자는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바이마르,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프라하, 그리고 빈을 방문했다. 그를 작센 공주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다. 1817년 12월 카를로스 4세는 프란시스코를 바이에른 국왕의 쌍둥이 딸 중 한 명과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18] 그러나 이 두 가지 계획 모두 결실을 보지 못했다. 왕자는 당시 14세였던 그의 조카딸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 공주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공주의 어머니인 마리아 루이사(전 에트루리아 왕비)는 22세의 그녀의 오빠가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하여 이 결합에 반대했다. 1818년 3월 페르난도 7세는 그의 아내인 브라간사의 이사벨의 압력을 받아 마침내 그의 동생에게 스페인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3. 2. 유럽 여행과 결혼 시도
이후 6년 동안 스페인 왕실 가족은 망명 생활을 했다. 페르디난드 7세, 그의 동생 돈 카를로스 왕자, 숙부 안토니오 왕자는 발랑세이 성에 감금되었고,[11] 십 대였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부모를 따라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녀였다.[6][12]카를로스 4세 국왕, 왕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고도이와 함께 콩피에뉴 성에 거처를 마련했고, 1808년 10월에는 마르세유로 이주했다.[13] 1812년 7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부모는 그와 함께 로마로 이주하여 보르게세 궁전에 정착했다. 백일천하 기간 동안 가족은 베로나로 피신했다가 나폴레옹의 패배 후 로마로 돌아와 바르베리니 궁전으로 이주했다.[14]
망명 생활 동안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교육은 소홀히 되었지만, 고도이가 그에게 몇몇 수업을 가르쳤다. 로마에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부모는 그를 성직자로 만들려 했으나, 그는 성직에 뜻이 없었다.[6] 1814년, 20세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14세의 카를로타 데 고도이 보르본과 가까워졌고,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그들의 결혼을 원했다. 하지만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고도이의 영향력과 부패에 불만을 품고 형에게 편지를 써서 성직 서품을 포기하고 군 경력을 쌓게 해달라고 요청했다.[15] 페르디난드 7세는 고도이의 딸과의 결혼을 막기 위해 동생을 스페인으로 불렀다. 1816년 8월,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로마에서의 그의 행동을 우려하여 아들의 스페인행을 허락했다.[16]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1816년 11월 22일 로마를 떠났다. 리옹에서 그는 스캔들에 휘말렸는데, 하인의 정부를 연인으로 삼아 재정적 이익을 취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페르디난드 7세는 동생을 용서했지만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것을 연기하고 유럽 여행을 명령했다.[17] 이후 17개월 동안 왕자는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바이마르,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프라하, 빈을 방문했다. 작센 공주와의 결혼 계획과 바이에른 국왕의 쌍둥이 딸 중 한 명과의 결혼 계획이 있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18] 그는 조카딸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 공주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공주의 어머니는 그의 무모함을 이유로 반대했다. 1818년 3월, 페르디난드 7세는 아내의 압력을 받아 동생에게 스페인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4. 스페인 귀환과 결혼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1818년 4월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왕궁에 정착한 후, 아버지 카를로스 4세는 사망 직전에 프란시스코와 부르봉 양시칠리아 왕가의 루이사 칼로타 공주의 결혼을 협상했다.[19] 이 결혼은 페르난도 7세의 동의하에 이루어졌다.
이후의 자세한 행적은 하위 섹션을 참고.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와 그의 아내는 궁정에서 보잘것없는 지위였다. 왕자는 그의 형제인 돈 카를로스와 돈 카를로스의 세 아들 다음으로 왕위 계승 순위 5위였다. 페르난도 7세는 후손을 갖기를 바랐지만, 첫 두 아내에게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프란시스코의 결혼 4개월 후 세 번째 결혼을 했다.
1820년대 스페인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전쟁과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 상실로 인해 경제가 황폐화되었다. 1820년 혁명으로 페르난도 7세는 1812년 자유주의 헌법을 부과받았으나, 1823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승인을 받은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공하여 국왕의 절대 권력을 복원했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정치적 긴장은 계속되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형 페르난도 7세에게 감사하고 충성하며 그의 보수적인 정책을 지지했다.[23] 그러나 왕자의 온건한 정치적 견해 때문에 궁정의 극우파는 그를 자유주의자로 여겼다.[24][25]
온화한 성격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정치보다 예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그는 예레미야 성인의 유화를 포함한 작품을 남겼다. 또한 음악에 대한 열정이 컸으며, 베이스 음성을 가진 능숙한 가수였다. 왕궁에 있는 그의 방은 음악가와 가수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그는 그들과 함께 노래하곤 했다.[27] 왕자는 전문 가수들과 함께 왕궁 음악회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젊은 시절부터 생애 말년까지 거의 700곡에 달하는 방대한 악보를 수집했다.[28] 이 컬렉션은 스페인 국립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29] 페르난도 7세가 1830년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을 설립했을 때, 왕자는 명예 회원이 되었다.
4. 1. 영예와 특권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1818년 4월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페르난도 7세는 프란시스코가 원했던 스페인 군대 지휘관직을 주지는 않았지만, 많은 영예와 특권을 주었다. 왕자는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알칸타라, 몬테사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고, 이 기사단들이 스페인에 소유한 대규모 부동산 일부의 관리권과 수입을 얻었다. 또한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의 고위 기사가 되어 비슷한 혜택을 받았다. 프랑스의 성령 기사단 훈장도 받았으며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4. 2. 루이사 카를로타와의 결혼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아버지 카를로스 4세가 사망하기 직전, 부르봉 양시칠리아 왕가의 루이사 칼로타 공주와의 결혼을 협상했고, 페르난도 7세의 동의를 얻었다.[19] 루이사 칼로타는 양시칠리아의 프란체스코 1세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누이인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의 장녀로,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 사이였다.[20]
두 사람은 1819년 4월 15일 대리 결혼식을 올렸고, 같은 해 5월 14일 루이사 칼로타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으며, 6월 9일 마드리드 왕궁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25세, 루이사 칼로타는 15세였다. 루이사 칼로타는 활기차고, 재치 있고, 의지가 강했으며, 성격이 급하고 야심이 컸다. 그녀는 남편을 제압하고 국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스페인 왕자 지위와 계급을 받은 자녀들을 낳았다.[21] 1820년에서 1834년 사이에 두 사람은 11명의 자녀를 두었다.[22]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 1820년 - 1821년 | |
이사벨 페르난다 | 1821년 - 1897년 |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 1822년 - 1902년 | 이사벨 2세의 왕배 |
엔리케 마리아 | 1823년 - 1870년 | 세비야 공작 |
루이사 테레사 | 1824년 - 1900년 | 제16대 세사 공작 호세 마리아 오소리오 데 모스코소와 결혼 |
두아르테 펠리페 | 1826년 - 1830년 | |
호세피나 페르난다 | 1827년 - 1920년 | |
마리아 테레사 | 1828년 - 1829년 | |
페르난도 마리아 | 1832년 - 1854년 | |
마리아 크리스티나 | 1833년 - 1902년 | 스페인 왕자·포르투갈 왕자 세바스티앙 가브리엘 왕비 |
아말리아 델 피라르 | 1834년 - 1905년 | 바이에른 왕자 아르달베르트 왕비 |
5. 정치적 투쟁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비록 온건한 자유주의적 정치 견해를 가졌지만, 형제들의 절대주의적 정치 견해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적인 아내 루이사 카를로타는 그를 끊임없는 정치적 투쟁에 끌어들였다. 루이사 카를로타는 정치에 깊이 간섭했으며,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마리아 테레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30][31]
5. 1. 페르난도 7세 치세
1820년대 페르난도 7세 국왕은 자녀가 없었다. 세 번째 왕비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아말리아(Maria Josepha Amalia of Saxony)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페르난도 7세의 동생인 칼로스 왕자가 왕위를 이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칼로스 왕자는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로, 포르투갈의 브라간사의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고 있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더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의 절대주의적 정치 견해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적인 아내 루이사 카를로타는 그를 끊임없는 정치적 투쟁에 끌어들였다. 루이사 카를로타는 계속 임신 중이었지만,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간섭하는 성격이었다.[30] 그녀는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여동생인 베이라 공녀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 Princess of Beira)(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사촌인 페드로 칼로스 왕자의 미망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페르난도 7세 사후 돈 칼로스가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31]1829년 5월, 마리아 요제파 왕비가 사망하면서 기회가 찾아왔다.[32] 시아버지 페르난도 7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루이사 카를로타는 국왕을 설득하여 자신의 여동생인 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 of the Two Sicilies)와 결혼하게 했다. 그들의 결혼식은 같은 해 12월에 거행되었다. 페르난도 7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 중 장녀인 이사벨은 루이사 카를로타의 개입 덕분에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돈 칼로스와 그의 가족은 왕위 계승 변경에 반대하여 나라를 떠나야 했다. 페르난도 7세는 얼마 지나지 않은 1833년 9월 29일에 사망했다.
3살 된 스페인의 이사벨 2세(Isabella II of Spain)가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의 섭정 아래 스페인 왕위에 오르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새 정부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고 3개월 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왕실 근위대의 하사관과 비밀리에 모르가나틱 결혼(morganatic marriage)을 했다. 루이사 카를로타는 이 결혼을 두고 여동생과 다투었다.[33] 몇 달 안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와 그의 아내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섭정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돈 칼로스와 그의 극우파 추종자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하면서 스페인은 혼란에 빠졌고, 내전(1833-1839)이 발발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온건파의 도움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녀는 야심찬 여동생을 불신했고, 1837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가 상원 의원직을 요구하자 그의 임명을 거부했다. 이는 왕자의 임명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루이사 카를로타와 섭정 여왕인 여동생 사이의 적대감을 확고하게 만들었다.[34] 그들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 후 5년 동안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와 그의 아내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에 맞서 음모를 꾸미며 그녀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음모로 인해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와 그의 가족에게 해외로 이주할 것을 명령했다.
5. 2. 이사벨 2세 치세와 망명
1820년대 페르난도 7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그의 동생 칼로스 왕자가 왕위를 이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자유주의적 성향이었지만, 형의 절대주의적 정치 견해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루이사 카를로타는 그를 정치 투쟁에 끌어들였다.[30] 그녀는 페르난도 7세 사후 칼로스가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31] 1829년 5월 왕비가 사망하자,[32] 루이사 카를로타는 페르난도 7세를 설득해 자신의 여동생인 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 of the Two Sicilies)와 결혼하게 했다. 이사벨은 루이사 카를로타의 개입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칼로스와 그의 가족은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페르난도 7세는 1833년 9월 29일에 사망했다.이사벨 2세가 3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을 하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새 정부에 포함되지 않아 실망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페르난도 7세 사후 3개월 만에 비밀리에 모르가나틱 결혼(morganatic marriage)을 했다. 루이사 카를로타는 이 일로 여동생과 다퉜다.[33]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부부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지 아래 섭정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 내전(1833-1839)이 발발했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온건파의 도움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1837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가 상원 의원직을 요구하자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거부했다.[34] 이후 5년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부부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결국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이들 가족을 해외로 추방했다.

1838년 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가족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의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 왕비가 루이사 카를로타의 이모였기에, 이들은 프랑스 궁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디노 공작 부인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가족을 "빨간 머리에 못생겼고, ... 작은 왕자들의 무리는 완전히 혐오스럽다"고 묘사했다. 한편, 1839년 에스파르테로 장군이 스페인 총리가 되었다. 그는 1840년 10월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퇴위시키고 프랑스로 망명 보냈다. 이로 인해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스페인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었다.[35]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부부는 부르고스에 정착했다. 에스파르테로는 이들이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왕궁에는 살 수 없었다. 이들은 이사벨 2세를 아들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와 엔리케 왕자와 결혼시키려 했다. 에스파르테로에게 압력을 가하자, 그는 1842년 8월 이들을 사라고사로 추방했다.[36]
1842년 10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부부는 에스파르테로 정부 반대의 중심에 섰다. 11월, 이들의 지지자들은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에스파르테로는 이들을 다시 추방했다. 1843년 7월, 군사 반란으로 에스파르테로는 실각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37]
프란시스코 왕자는 가족과 함께 마드리드로 돌아와 산 후안 궁전과 루나 거리 40번지에 있는 집에 살았다.[38] 1844년 1월 29일, 루이사 카를로타는 홍역으로 사망했다.[39]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부르봉-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에게 청혼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40] 그는 조카들을 아들들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이사벨 2세와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의 결혼을 허락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의 아들 몽팽시에 공작 앙투안이 루이사 페르난다 공주의 남편으로 선택되었다. 엔리케 왕자는 음모에 연루되어 망명했다.
6. 말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두 번째 결혼 생활을 12년 동안 행복하게 유지했다. 그는 아내 테레사 데 아레돈도 이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의 헌신을 칭찬하는 편지와 문서를 남겼다. 그들은 산 후안 궁전에서 조용히 살았으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궁정 행사에 자주 참석했지만 항상 아내 없이 나타났다.
1863년 12월 29일, 테레사 도냐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11세였던 아들 리카르도 마리아는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유언을 통해 막내아들의 상속권을 보호하고 이사벨라 2세 여왕의 보호 아래 두려 했다. 두 번째 아내를 잃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865년 8월 13일,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산 프란시스코 교회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그의 신분에 맞게 에스코리알에 안장되었다.
6. 1. 가족의 죽음과 재혼
아들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가 1846년 10월 10일 왕세자(왕배우자)가 되면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궁정 내 입지가 높아졌다. 그는 이사벨라 2세의 총애를 받았고, 그의 딸 중 한 명인 호세파 공주는 여왕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과 조카 사이의 결혼은 불행했다. 1849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부부의 화해를 위해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여왕 편을 들었지만, 동시에 진보당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에 온건파 정부는 그를 스페인에서 추방했다. 1850년, 그는 귀국을 허락받았다.[41]스페인으로 돌아온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스캔들에 휘말렸다.[42] 그는 눈가리개를 한 채 두 여성과 성적인 놀이를 하는 것이 발각되었다.[43] 그 여성들은 경찰에 의해 쫓겨났다. 결국 58세의 나이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1852년 12월 19일 비동등 결혼을 했다.[44] 그의 두 번째 아내 테레사 데 아레돈도 이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에 대해서는 무르시아 출신이며 춤을 잘 추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녀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남편보다 훨씬 어렸다. 그녀는 상당한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852년 12월 26일, 결혼식 일주일 후에 아들 리카르도 마리아 데 아레돈도가 태어났다.[45] 아이는 부르봉가의 성을 사용할 수 없었고, 대신 1864년 이사벨라 2세에 의해 산 리카르도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의 두 번째 결혼 생활은 12년 동안 지속되었고 행복했다. 편지와 문서에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아내의 헌신에 대해 칭찬했다. 그들은 산 후안 궁전에서 조용한 생활을 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돈은 궁정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지만 항상 아내 없이 나타났다. 테레사 도냐는 젊은 나이에 1863년 12월 29일에 사망했다.[46] 11세 된 아들 리카르도 마리아는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유언에서 그의 막내아들의 상속을 보호하려고 시도했고 그를 이사벨라 2세 여왕의 보호 아래 두었다. 두 번째 과부가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1865년 8월 13일 대장암(결장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산 프란시스코 교회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그의 계급에 걸맞게 에스코리알에 묻혔다.
6. 2. 죽음
아들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가 1846년 10월 10일 왕세자(왕배우자)가 되면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궁정 내 입지가 높아졌다. 그는 이사벨라 2세의 총애를 받았고, 그의 딸 중 한 명인 호세파 공주는 여왕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과 조카 사이의 결혼은 불행했다. 1849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부부의 화해를 위해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여왕 편을 들었지만, 동시에 진보당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에 온건파 정부는 그를 스페인에서 추방했다. 1850년, 그는 귀국을 허락받았다.[41]스페인으로 돌아온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스캔들에 휘말렸다.[42] 그는 눈가리개를 한 채 두 여성과 성적인 놀이를 하는 것이 발각되었다.[43] 그 여성들은 경찰에 의해 쫓겨났다. 결국 58세의 나이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1852년 12월 19일 비동등 결혼을 했다.[44] 그의 두 번째 아내 테레사 데 아레돈도 이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에 대해서는 무르시아 출신이며 춤을 잘 추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녀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남편보다 훨씬 어렸다. 그녀는 상당한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852년 12월 26일, 결혼식 일주일 후에 아들 리카르도 마리아 데 아레돈도가 태어났다.[45] 이 아이는 부르봉가(House of Bourbon)의 성을 사용할 수 없었고, 대신 1864년 이사벨라 2세에 의해 산 리카르도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의 두 번째 결혼 생활은 12년 동안 지속되었고 행복했다. 편지와 문서에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아내의 헌신에 대해 칭찬했다. 그들은 산 후안 궁전에서 조용한 생활을 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돈은 궁정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지만 항상 아내 없이 나타났다. 테레사 도냐는 젊은 나이에 1863년 12월 29일에 사망했다.[46] 11세 된 아들 리카르도 마리아는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유언에서 그의 막내아들의 상속을 보호하려고 시도했고 그를 이사벨라 2세 여왕의 보호 아래 두었다. 두 번째 과부가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는 1865년 8월 13일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산 프란시스코 교회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그의 계급에 걸맞게 에스코리알에 묻혔다.
7. 자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루이사 카를로타였는데, 프란체스코 1세와 마리아 이사벨의 딸이었다. 이들은 1819년 6월 12일 마드리드에서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 1820년 5월 6일 | 1821년 11월 15일 | 유아기에 사망 |
이사벨 데 보르본 | 1821년 | 1897년 | 이그나츠 구로프스키 백작과 사실혼 관계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 1822년 5월 13일 | 1902년 4월 16일 | 이사벨 2세 여왕의 남편 |
엔리케 데 보르본 | 1823년 4월 17일 | 1870년 | 엘레나 데 카스텔비 이 셸리-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와 사실혼 관계 |
루이사 데 보르본 | 1824년 6월 11일 | 1900년 12월 27일 | 호세 마리아 오소리오 데 모스코소 이 카르바할과 사실혼 관계 |
두아르테 펠리페 데 보르본 | 1826년 4월 4일 | 1830년 10월 22일 | 유년기에 사망 |
호세피나 데 보르본 | 1827년 | 1910년 | 호세 구엘 이 렌테와 사실혼 관계 |
테레사 데 보르본 | 1828년 11월 16일 | 1829년 11월 13일 | 유아기에 사망 |
페르난도 데 보르본 | 1832년 4월 15일 | 1854년 7월 17일 | 22세에 사망, 미혼, 자녀 없음 |
마리아 크리스티나 데 보르본 | 1833년 | 1902년 | 세바스티앙과 결혼 |
아멜리아 데 보르본 | 1834년 10월 12일 | 1905년 8월 27일 | 아달베르트 왕자와 결혼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는 1852년 12월 19일 테레사 데 아레돈도 이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리카르도 마리아 데 아레돈도 | 1852년 12월 26일 | 1872년 1월 28일 | 산 리카르도 공작, 젊은 나이에 사망, 미혼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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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os desconocidos infantes de Españ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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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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