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제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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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제는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군으로, 젊은 시절 군리에서 시작하여 회계군에서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그는 산월의 반란을 진압하고, 손책의 지시로 여러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며 공을 세웠다. 위무중랑장, 안동장군 등을 거쳐 서주목에 임명되었으며, 227년에 사망했다. 하제는 화려한 군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의 아들 하달은 공손연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처형되었으며, 손자 하소는 진나라 시대에 유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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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제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허기 |
| 원어 이름 | 賀齊 |
| 로마자 표기 | He Qi |
| 자 | 공묘(公苗) |
| 출생지 | |
| 출생지 | 저장성샤오싱 |
| 사망 정보 | |
| 사망일 | 227년 |
| 사인 | 병사 |
| 관직 정보 | |
| 최종 관직 | 후장군(後將軍) |
| 최종 봉작 | 산음후(山陰侯) |
| 역임 관직 | 남부도위(南部都尉) 평동교위(平東校尉) 위무중랑장(威武中郎將) 신도태수(新都太守) 편장군(偏將軍) 분무장군(奮武將軍) 안동장군(安東將軍) 서주목(徐州牧) (명목상)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허보(賀輔) |
| 자녀 | 허다(賀達) 허경(賀景) |
| 소속 | |
| 소속 세력 | 손책, 손권 |
| 주요 활동 | 산월 토벌 |
| 기타 | |
| 생애 | 손책과 손권을 섬긴 오나라의 장군 |
2. 생애
하제는 젊어서 군리가 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간사한 현리 사종(斯從)은 현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산월에 복종하고 있었으나, 하제는 그를 처단했다. 사종의 무리 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현을 공격하자 성문을 열고 돌격해 무찌르고 산월에까지 위세를 떨쳤다.[19]
196년(건안 원년), 손책이 회계태수 왕랑을 쫓아내고 회계군을 평정할 때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이후 왕랑의 잔당인 후관장 상승이 손책에게 불복하자, 손책은 영녕현장 한안을 임시 남부도위(都尉)로 삼아[20] 공격하게 하는 한편 한안을 대신하여 하제를 영녕현장으로 삼았다. 한안이 패배하자, 손책은 하제를 임시 남부도위에 임명했다. 하제는 상승을 설득하여 항복시켰고, 상승의 항복에 불응하여 반기를 든 장아와 첨강의 잔여 세력을 격파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9]
203년, 건안, 한흥, 남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불복종자들을 진압했고, 평동교위(校尉)로 임명되었다. 205년, 손권은 하제에게 회계 남부 상요를 토벌하게 하였고, 상요를 나누어 건평현(建平縣)을 신설하였다.[19]
208년, 위무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하였고, 단양, 이, 흡을 평정하였다. 이후 이와 흡의 불복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격파한 뒤 흡현을 나누어 신도군(新都郡)을 신설하였고, 손권은 하제를 태수(太守)로 임명하면서 편장군(偏將軍)을 더했다. 211년, 오군(吳郡) 여항에서 평민 낭치가 모반을 일으키자, 군을 이끌고 이를 습격하여 무찔렀고, 여항을 나누어 임수현을 신설하였다.[19]
213년, 예장 동부 평민 1만여 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고, 정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이에 버금가는 사람은 현의 호구에 편입시켰다. 분무장군으로 승진했다. 216년, 파양 불복종자들이 조조(曹操)의 인수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자, 능양, 시안, 경현이 협력하였다. 육손(陸遜)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단양 세 현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안동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산음후로 봉해졌다.[19]
222년, 위나라가 오나라를 세 방면에서 침공하자, 조휴 등을 여범, 서성 등이 동구에서 막으려 하였으나, 여범 군대는 큰 폭풍우를 만나 병사 수천 명이 익사했고, 위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격파당했다. 하지만 하제는 장강을 건너지 않은 채 신시(新市) 수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제는 항상 자신의 군대를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무장시켜 전투에 임했으며, 조휴 등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이 싸움 후 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가절(假節)을 받아 서주목에 임명을 받았다.[19]
223년, 오나라 희구(戱口) 수비 장수 진종이 위나라에 투항하여 기춘태수가 된 이후 자주 오나라 변경을 습격하자, 조휴 등이 위나라로 회군한 뒤 손권의 명을 받고 미방과 선우단을 이끌고 진종을 공격하여 사로잡았다.[19]
227년 세상을 떠났다.[19]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젊어서 군리가 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간사한 현리 사종(斯從)은 현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산월의 복종을 받고 있었으나, 하제는 그를 처단했다. 사종의 무리 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현을 공격하자 성문을 열고 돌격해 무찌르고 산월에까지 위세를 떨쳤다.[19]건안 원년(196년), 손책(孫策)이 회계태수 왕랑(王朗)을 쫓아내고 회계군을 평정할 때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이후 왕랑의 잔당인 후관장 상승(商升)이 손책에게 불복하자, 손책은 영녕현장 한안을 임시 남부도위(都尉)로 삼아[20] 공격하게 하는 한편 한안을 대신하여 하제를 영녕현장으로 삼았다. 상승을 공격하게 한 한안이 패배하자, 손책은 대신 하제를 임시 남부도위에 임명했다. 하제는 상승을 설득하여 항복시켰고, 상승의 항복에 불응하여 상승을 죽이고 다시 반기를 든 장아(張雅)와 첨강(詹強)의 잔여 세력을 격파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9]
그 뒤 건안, 한흥, 남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203년 하제는 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불복종자들을 진압하였고, 그 공로로 평동교위(校尉)로 임명되었다. 205년, 손권(孫權)은 하제에게 회계 남부 상요를 토벌하게 하였고, 하제는 상요를 나누어 건평현(建平縣)을 신설하였다.[19]
208년, 하제는 위무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하였고, 단양, 이, 흡을 평정하였다. 이후 이와 흡의 불복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격파한 뒤 흡현을 나누어 신도군(新都郡)을 신설하였고, 손권은 하제를 태수(太守)로 임명하면서 편장군(偏將軍)을 더했다. 211년, 오군(吳郡) 여항에서 평민 낭치가 모반을 일으키자, 하제는 군을 이끌고 이를 습격하여 무찔렀고, 여항을 나누어 임수현을 신설하였다.[19]
213년, 예장 동부 평민 1만여 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고, 정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이에 버금가는 사람은 현의 호구에 편입시켰다. 그 공로로 분무장군으로 승진했다. 216년, 파양 불복종자들이 조조(曹操)의 인수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자, 능양, 시안, 경현이 협력하였다. 하제는 육손(陸遜)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단양 세 현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그 공로로 안동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산음후로 봉해졌다.[19]
2. 2. 산월 및 반란 진압
젊어서 군리가 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한 하제는 간사한 현리 사종(斯從)을 처단했다. 사종은 현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산월의 복종을 받는 인물이었으나, 하제가 그를 처단하자 사종의 무리 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현을 공격했다. 하지만 하제는 성문을 열고 돌격해 이들을 무찌르고 산월에까지 위세를 떨쳤다.[19]196년(건안 원년), 손책이 회계태수 왕랑을 쫓아내고 회계군을 평정할 때 하제는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이후 왕랑의 잔당인 후관장 상승이 손책에게 불복하자, 손책은 영녕현의 장인 한안을 임시 남부도위로 삼아[20] 공격하게 하고, 한안 대신 하제를 영녕현의 장으로 삼았다. 한안이 상승에게 패배하자, 손책은 하제를 임시 남부도위에 임명했다. 하제는 상승을 설득하여 항복시켰고, 상승의 항복에 불응하여 상승을 죽이고 다시 반기를 든 장아와 첨강의 잔여 세력을 격파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9]
203년, 건안, 한흥, 남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하제는 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불복종자들을 진압하였고, 평동교위로 임명되었다. 205년, 손권은 하제에게 회계 남부의 상요를 토벌하게 하였고, 하제는 상요를 나누어 건평현을 신설하였다.[19]
208년, 하제는 위무중랑장으로 승진하였고, 단양, 이, 흡을 평정하였다. 이후 이와 흡의 불복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격파한 뒤 흡현을 나누어 신도군을 신설하였고, 손권은 하제를 태수로 임명하면서 편장군을 더했다. 211년, 오군 여항에서 평민 낭치가 모반을 일으키자, 하제는 군을 이끌고 이를 습격하여 무찔렀고, 여항을 나누어 임수현을 신설하였다.[19]
213년, 예장 동부의 평민 1만여 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고, 정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이에 버금가는 사람은 현의 호구에 편입시켰다. 그 공로로 분무장군으로 승진했다. 216년, 파양의 불복종자들이 조조의 인수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자, 능양, 시안, 경현이 협력하였다. 하제는 육손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단양의 세 현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안동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산음후로 봉해졌다.[19]
2. 3. 동구 전투와 이후
196년(건안 원년), 손책이 회계태수 왕랑을 쫓아내고 회계군을 평정하자 하제는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왕랑의 잔당인 상승이 손책에게 불복하자, 손책은 영녕현의 장인 한안을 임시 남부도위로 삼아[20] 공격하게 하고, 하제를 한안 대신 영녕현의 장으로 삼았다. 한안이 패배하자, 손책은 하제를 임시 남부도위에 임명했다. 하제는 상승을 설득하여 항복시켰고, 상승의 항복에 불응하여 반기를 든 장아와 첨강의 잔여 세력을 격파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9]이후, 건안, 한흥, 남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203년 하제는 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불복종자들을 진압하였고, 평동교위로 임명되었다. 205년, 손권은 하제에게 회계 남부의 상요를 토벌하게 하였고, 하제는 상요를 나누어 건평현을 신설하였다.[19]
208년, 하제는 위무중랑장으로 승진하였고, 단양, 이, 흡을 평정하였다. 이후 이와 흡의 불복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격파한 뒤 흡현을 나누어 신도군을 신설하였고, 손권은 하제를 태수로 임명하면서 편장군을 더했다. 211년, 오군 여항에서 평민 낭치가 모반을 일으키자, 하제는 군을 이끌고 이를 습격하여 무찔렀고, 여항을 나누어 임수현을 신설하였다.[19]
213년, 예장 동부의 평민 1만여 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고, 정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이에 버금가는 사람은 현의 호구에 편입시켰다. 분무장군으로 승진했다. 216년, 파양의 불복종자들이 조조의 인수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자, 능양, 시안, 경현이 협력하였다. 하제는 육손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단양의 세 현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안동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산음후로 봉해졌다.[19]
222년, 위나라가 오나라를 세 방면에서 침공하자, 양주 방면으로 진격한 조휴 등을 여범, 서성 등이 동구에서 막으려 하였으나, 여범이 이끄는 군대는 큰 폭풍우를 만나 병사 수천 명이 익사했고, 위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격파당했다. 하지만 하제는 장강을 건너지 않은 채 신시의 수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제는 항상 자신의 군대를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무장시켜 전투에 임했으며, 조휴 등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이 싸움 후 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가절을 받아 서주목에 임명을 받았다.[19]
오나라 희구의 수비 장수 진종이 위나라에 투항하여 기춘태수가 된 이후 자주 오나라 변경을 습격하자, 223년 조휴 등이 위나라로 회군한 뒤 손권의 명을 받고 미방과 선우단을 이끌고 진종을 공격하여 사로잡았다.[19]
이후 하제는 4년 뒤인 227년 세상을 떠났다.[19]
3. 하제의 전술과 전략
하제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고, 동오의 국경을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08년, 손권은 하제를 위무중랑장(威武中郎將)으로 임명하여 단양군(丹陽郡)의 산월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하제는 병사들에게 몽둥이를 사용하게 하여 산월족의 마법을 무력화시키고 승리했다.[8] 이후 손권에게 단양군의 행정 구역 개편을 제안하여 신도군(新都郡)을 설치하고, 자신은 신도군 태수(太守) 겸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9]
211년, 여항현(餘杭縣)에서 낭지(郎稚)가 반란을 일으키자, 하제는 이를 진압하고 여항현을 두 개의 현으로 분할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되었다. 213년에는 예장군(豫章郡)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항복한 반란자들을 백성으로 등록시키는 등 유화책을 펼쳤다. 이러한 공으로 손권은 하제를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승진시켰다.[10]
215년, 소요진 전투에서 손권군이 장료에게 패배했을 때, 하제는 서성의 창을 찾아 돌려주는 일화를 남겼다.[11]
216년, 조조가 파양군(鄱陽郡)의 유토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하제는 육손과 함께 이를 진압하고 양쯔강을 따라 국경을 방어했다.[12]
222년에서 223년 사이, 동구 전투에서 조휴가 이끄는 조위 군대에 맞서, 하제는 화려하게 장식된 함대와 정예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 적을 물리쳤다. 이 공로로 손권은 하제를 후장군(後將軍)으로 승진시켰다.[13]
223년, 오나라 장수 진종(진종)이 조위에 투항하여 기춘현(蕲春縣)을 점령하자, 하제는 호종, 미방 등과 함께 이를 공격하여 진종을 생포하고 기춘현을 되찾았다.[14]
하제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항상 최고급 무구와 군장으로 자신과 부하들을 꾸몄다. 동구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정교하고 훌륭한 무기, 갑옷, 군용 기구를 갖추고, 배에는 조각과 채색을 더했으며, 푸른 우산과 붉은 장막을 드리우고, 방패와 창에는 꽃 문양을 그려 넣어 멀리서 보면 산과 같았다고 한다. 이러한 위용은 적군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4. 일화
208년, 손권은 하제를 위무중랑장(威武中郎將)으로 임명하고 단양군의 산월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하제와 그의 군대가 이현(黟縣)과 사현(歙縣)으로 진격하자, 도중에 있는 네 개의 마을이 그에게 항복했다. 갈홍의 ''포박자''에는 산월이 마법을 사용하여 하제를 막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그들의 마법은 금속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화살을 쏜 궁수에게 되돌릴 수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하제는 "날카로운 금속 칼을 막는 방법과 뱀 독에 대한 해독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속 칼과 뱀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대처법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병사들에게 몽둥이로 무장하여 적과 싸우게 했고 그들을 물리쳤다.[8]
『포박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제가 산월의 반도들을 토벌했을 때, 반도들 중에는 금의 술(술법의 발동을 봉하는 주술)을 잘 쓰는 자가 있었다. 싸움을 벌이려 할 때마다 주술의 힘으로 관군은 칼을 뽑을 수 없었고, 활을 쏘아도 모두 이쪽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싸움은 항상 불리했다. 하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튼튼한 목재로 곤봉을 다수 만들게 하고, 정예 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돌격대로 삼아, 그들 모두에게 곤봉을 쥐여주었다. 적의 산월들은 금의 술에 능한 자가 있다고 믿었기에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군이 곤봉으로 공격을 가하자, 금의 술사는 힘을 쓰지 못하고, 쳐 죽은 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하제가 명령을 받아 손권에게 알현한 후, 임지인 군으로 돌아가게 되자, 손권은 수도 교외까지 나와 송별 의식과 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검무를 추었다. 하제에게 마차와 준마를 하사하고, 송별 연회가 끝나고 손권이 수레에 오르자, 하제에게도 마차를 타라고 명했다. 하제가 주군 앞에서 마차를 타는 것은 황공하다고 사양하자, 손권은 측근에게 명하여 하제를 억지로 마차에 태우고, 군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엄을 갖춰 행렬을 만들어 출발하게 했다. 손권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며, "사람은 노력해야 한다. 훌륭한 행위를 쌓고 충성을 다해야 이런 영예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 『강표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여범과 하제는 사치스러워, 복식은 제왕을 참칭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손권은 "옛날, 관중의 예를 넘는 것을 환공은 우대하고 이를 용인했지만, 패업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지금, 자형(子衡)·공묘(公苗)의 몸에는 이오(夷吾)의 과실은 없고, 단지 그 기계의 정교함을 좋아하고, 수레를 엄정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이든 군의 위용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건가"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다시 말하려 하지 않았다.
5. 가계
'''하제'''는 적어도 두 아들, 하달과 하경을 두었다.[4]
233년, 손권이 요동 군벌 공손연과 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려 했을 때, 하달을 공손연을 만나도록 사신으로 보냈다.[4] 그러나 공손연은 그를 배신하고 하달을 처형했다.[4] 하달의 아들 하질은 오나라에서 호아장군(虎牙將軍)을 지냈다.[4]
하경은 오나라에서 멸적교위(滅賊校尉)를 지냈다.[4] 그는 두 아들, 하소와 하혜를 두었다.[4] 하소는 280년 진나라에 의해 정복되기 전 오나라 말기에 두각을 나타냈다.[4] 하소의 아들 하순은 진나라 시대에 유명한 유학자가 되었다.[4] 하혜는 오나라 완릉현(宛陵縣)의 현령(令)을 지냈다.[4]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Yu Yu’s Jinshu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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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晋書
虞預
[16]
서적
晋書
[17]
서적
晋書
[18]
서적
江表伝
[19]
위키문헌
삼국지 권60 하전여주종리전
[20]
문서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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