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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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문예술론은 장 자크 루소가 1750년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 논문 공모에 응모하여 1등 상을 받은 에세이이다. 이 글에서 루소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 도덕의 부패를 수반하며, 문명 이전의 자연 상태가 더 도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학문과 예술이 인간의 덕과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논증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교하며 소크라테스와 카토의 비판을 인용했다. 그는 학문과 예술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인쇄술의 부정적인 영향과 예술의 타락, 사치와 부유함이 국가를 부패시킨다는 점을 강조했다. 학문예술론은 출판 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루소는 이에 대한 반론에 답하며 자신의 주장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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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장 자크 루소가 1755년에 출판한 저서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며 사회 발전과 함께 발생하는 사유 재산과 불평등을 비판하고 불평등 시정을 촉구한다.
| 학문예술론 - [서적]에 관한 문서 | |
|---|---|
| 학문과 예술에 대한 담론 | |
| 원제 |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
| 저자 | 장자크 루소 |
| 국가 | 프랑스 |
| 언어 | 프랑스어 |
| 출판사 | Geneva, Barillot & fils [i. e. Paris, Noël-Jacques Pissot] |
| 출판일 | 1750년 |
| 영어 출판일 | 런던, W. Owen, 1751년 |
2. 집필 배경 및 과정
루소는 1750년 디종 학술원, 예술 및 문학원(Académie des Sciences, Arts et Belles-Lettres de Dijon)이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에 낸 광고를 보고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풍속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현상 논문 주제에 대한 답을 준비하면서 '학문예술론'을 집필했다. 그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에서 영감을 얻었으며,[1] 호라티우스의 ''시의 기술'' 속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2. 1. 계기
1749년 10월, 디종 학술원, 예술 및 문학원(Académie des Sciences, Arts et Belles-Lettres de Dijon)은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풍속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로 현상 논문을 공모했다. 루소는 1750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에 실린 이 공모 광고를 보고 담론 집필을 시작했다.[3]루소는 ''고백''에서 이 광고를 읽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았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고 회상하며, 문명이 인간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그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며,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제도들뿐이다"라는 강렬한 영감을 받았다.[3]
루소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에서 영감을 얻어 ''담론''을 썼다.[1] 그는 예술과 과학이 도덕의 부패를 동반하며, 문명 이전의 인간은 "소박하지만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테네, 스파르타, 로마의 예를 들며, 예술과 과학이 인간의 덕과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다.[1]
루소는 이 논문으로 1등 상을 받아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과학적 진보에 대한 정치적 헌신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대가를 검토한 최초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디드로와 상담하며 1750년 1월경 논문을 완성하여 제출한 루소는 같은 해 7월 당선 소식을 들었다.[7] 이후 『학문예술론』은 11월에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751년부터 1753년까지 3년간 찬반 논설이 67건이나 발표되었다.[8]
루소는 폴란드 왕, 리옹의 보르드 씨 등과 수년간 논쟁을 벌이며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확고히 했다.[9]
2. 2. 집필 과정
루소는 1750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에 실린 광고를 보고 디종 학술원, 예술 및 문학원(Académie des Sciences, Arts et Belles-Lettres de Dijon)이 "학문과 예술의 부활이 도덕의 정화에 기여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에세이로 상을 내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여, 드니 디드로와 상의하며 1750년 1월경 논문을 완성하여 제출했다.[7] 루소는 ''고백''에서 "[광고]를 읽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았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고 회고했다.2. 3. 사상적 기반
루소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며,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제도들뿐이다"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했다.[3] 이러한 생각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1] 루소는 호라티우스의 ''시의 기술'' (25행)의 "우리는 겉보기에 속아 넘어간다"라는 라틴어 인용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루소는 예술과 과학에 도덕의 부패가 수반된다고 보았다.[1] 문명 이전의 인간은 "소박하지만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문명화되면서 "예절의 불신의 베일"과 패션의 "모든 사악한 장식"에 오염되었다고 주장했다.[1] 아테네, 스파르타, 로마의 예를 들어, 예술과 과학이 인간의 덕과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썼다.[1]
루소는 저서 ''장 자크의 심판관, 루소''에서 허구의 프랑스인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이 등장인물은 루소가 "자연은 인간을 행복하고 선하게 만들었지만, 사회가 그를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3] 또한 ''예술과 과학에 관한 담론''을 "우리의 불행의 도구에 대해 어리석은 숭배를 하게 만드는 마법의 환상을 파괴하려는 노력"으로 묘사한다.[3]
루소는 유물론이나 에피쿠로스 학파와 같은 "형이상학적 정교함"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학자 빅토르 구레비치는 루소가 ''볼테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소는 평생 동안 유물론의 문제로 되돌아가지만, 결코 자세하게 논의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2]
루소는 과학적 진보에 대한 정치적 헌신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러한 정책의 대가를 검토한 최초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3. 주요 내용
루소는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프랑스어에서 학문과 예술이 인간의 도덕성을 타락시키고 사회를 부패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문명이 발전하기 이전의 자연 상태가 더 도덕적이었다고 보았다.
'''제1부'''에서는 학문과 예술이 사회의 습속에 부패를 초래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한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그리스 문물이 이탈리아로 전해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프랑스로 퍼져 문학과 학문이 융성했지만, 이는 인간의 정신을 허식으로 옭아매고 예속 상태를 강요하여 퇴폐와 부패를 초래했다.
'''제2부'''에서는 학문과 예술 자체의 문제점을 다룬다. 학문은 천문학은 미신, 웅변술은 야심, 증오, 아첨, 허위, 기하학은 탐욕, 물리학은 무익한 호기심, 도덕은 인간의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등 그 기원부터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진리를 찾는 과정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으며, 추상적인 진리에 도달해도 인간의 도덕,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는 쓸모없어 시간 낭비만 초래한다.
학문, 문학, 예술은 항상 '사치(낭비)'와 함께하며, 사치와 부유함은 국가와 습속을 부패시킨다. 부와 칭찬이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예술가들이 세태에 아첨하는 작품을 만들고, 사회에 유익한 덕은 경시된다.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은 천부적 재능으로 자연에서 배웠으며, 인간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학문 예술 연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3. 1. 1부: 역사적 사례를 통한 부패 논증
루소는 학문과 예술이 번성했던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이 결국 쇠퇴하고 멸망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 오히려 사회를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그리스 문물이 이탈리아로 전해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프랑스로 확산되면서 문학과 학문이 융성했지만, 이는 인간의 정신을 허영심으로 옭아매고 예속 상태를 강요하여 퇴폐와 부패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루소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중국 등의 역사적 사례를 들어 학문과 예술이 국가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음을 주장하고, 반면 페르시아인, 스키타이인, 게르만인, 초기 로마인 등은 학문과 예술의 허식, 공허함, 부패에서 벗어나 소박한 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3. 1. 1. 아테네와 스파르타 비교
루소는 문예가 번성했던 아테네보다 소박하고 검소한 스파르타를 더 이상적인 사회로 제시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이 사회의 도덕성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3. 1. 2. 소크라테스와 카토의 비판
루소는 소크라테스와 대 카토처럼 부패에 저항한 현자들이 있었다고 언급한다.3. 2. 2부: 학문과 예술 자체의 문제점
학문은 그 기원에서부터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천문학은 미신에서, 웅변술은 야심, 증오, 아첨, 허위에서 비롯되었고, 기하학은 탐욕에서, 물리학은 무익한 호기심에서, 도덕은 인간의 오만함에서 비롯되었다.[1] 또한 진리를 찾는 과정에는 수많은 오류의 위험이 있으며, 어렵게 추상적인 진리에 도달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인간의 도덕,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쓸모가 없어 시간 낭비만 초래한다.[1] 작가나 문인들은 해로운 역설을 퍼뜨려 사회 습속을 파괴하기도 한다.학문과 예술은 항상 "사치(낭비)"와 함께하며, 이는 국가와 사회를 부패시킨다. 부와 칭찬이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예술가들이 세태에 아첨하는 작품을 만들고, 사회에 유익한 덕목은 경시된다.[2]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과 같은 사람들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독자적으로 자연에서 배웠으며, 인간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재능을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학문 예술 연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3. 2. 1. 학문의 기원과 문제점
르네상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의 영향으로 그리스 문물이 이탈리아에 전해지면서 시작되었고, 프랑스로 파급되어 문학·학문이 융성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정신을 허식으로 옭아매고 예속 상태를 강요하여 퇴폐·부패를 초래하고 있다고 보았다.학문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지만, 예를 들어 천문학은 미신, 웅변술은 야심·증오·아첨·허위, 기하학은 탐욕, 물리학은 무익한 호기심, 도덕은 인간의 오만함에서 비롯되었다.[1] 진리의 길에는 많은 오류가 있으며, 추상적인 진리에 도달하더라도 대부분 인간의 도덕·정치·사회 문제 해결에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 시간 낭비만 초래한다고 보았다.[1]
3. 2. 2. 예술의 타락과 사회적 폐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그리스 문물이 이탈리아로 전해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프랑스에까지 영향을 미쳐 문학과 학문이 발전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는 사람들의 정신을 허황된 것으로 옭아매고 예속 상태를 강요하여 퇴폐와 부패를 불러왔다.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계속되었으며, 학문과 예술의 기원인 이집트는 주변 민족에게 지배당했고, 그리스도 강인함을 잃고 마케도니아에 지배당했으며, 로마 역시 야만족에게 유린당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제도가 있는 중국의 경우에도 학문과 예술은 국가 보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1]이와 대조적으로, 페르시아인, 스키타이인, 게르만인, 초기 로마인 등은 학문과 예술에 의한 허식, 공허함, 부패를 피하고 소박한 덕성을 유지했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에 대한 스파르타가 그러했다.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로마의 대 카토와 같은 현자들은 부패에 맞섰다. 초기 로마의 파브리키우스는 후대 로마를 보면 탄식했을 것이며, 이는 오늘날 프랑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1]
학문과 문학, 예술은 항상 "사치(낭비)"와 함께 존재하며, 사치와 부유함은 국가와 습속을 부패시킨다. 페르시아가 마케도니아에 패한 것이나, 스키타이인의 강인함, 로마 제국이 게르만인에게 유린당한 것, 프랑크인의 갈리아 정복, 색슨인의 영국 정복, 스위스인의 부르고뉴 가문에 대한 승리, 네덜란드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승리 등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부와 칭찬이 존중되는 사회에서는 예술가들이 세속적인 취향에 영합하는 작품을 만들게 되고, 사회에 유익한 덕은 경시된다.[2]
3. 2. 3. 인쇄술의 부정적 영향
인쇄술의 발달로 검증되지 않은 지식과 사상이 무분별하게 확산되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그릇된 길로 이끈다는 비판이 있었다. 수상한 설을 퍼뜨리는 돌팔이 철학자들과 입문서 류의 저작이 인쇄술을 통해 확산되면서, 사람들을 끌어들여 인생을 망쳐버린다는 것이다.4. 당대의 반응과 논쟁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프랑스어(''학문예술론'')은 출판 직후 유럽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749년 10월, 디종 아카데미는 1750년도 현상 논문 과제인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풍속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를 발표했고, 루소는 디드로와 상담하면서 1750년 1월경 논문을 완성하여 제출, 7월에 당선이 발표되었다[7]。
이후 『학문예술론』은 디드로의 도움으로 11월에 출판되었고, 이듬해 1751년부터 1753년까지 3년간 찬반 논설이 67건에 달했다[8]。 평론가 쥘 르메트르(1853-1914)는 루소를 즉시 신격화하는 것을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라고 불렀다.[1]
4. 1. 찬반 논쟁
루소의 주장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1751년부터 1753년까지 3년간 찬반 논설이 67건에 달했다.[8]몇몇 비평가들은 고대 황금 시대의 개념이 신화라고 주장하며, 루소가 인간의 도덕적 타락이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는지 명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1] 루소는 상을 받은 후 2년 정도 동안 자신의 비평가 5명에게 직접 답변했다. 이 5개의 답변 중에는 전 폴란드 왕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아베 레이날, 철학자 샤를 보르데에게 보낸 "최후의 답변"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답변들은 루소의 ''학문예술론''의 주장에 대한 해명을 제공하며, 그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더 발전시키는 주제, 즉 예술과 과학의 오용이 본성적으로 선한 인간이 문명에 의해 타락한다는 더 큰 주제의 한 사례라는 점을 보여준다. 불평등, 사치, 정치 생활이 특히 해로운 것으로 지적되었다.[1] 비평가들은 또한 루소가 인간 도덕의 타락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루소는 이를 인정하며, 단지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언급했다.[1]
루소는 자신의 에세이가 "그에 대한 보편적인 항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몇몇 분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반응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여론에 얽매이도록 태어난 사람들"의 우려를 일축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재치 있는 사람들"과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고방식을 반사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단지 "자유 사상가와 철학자를 연기"할 뿐이며, 만약 그들이 프랑스 종교 전쟁 시대에 살았다면, 이들은 가톨릭 동맹에 가담하여 "단지 폭력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는 것을 옹호하는 광신자"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
일어난 논쟁 속에서 루소 자신은 제기된 비판에 응전하여, 폴란드 왕과, 옛 친구였던 리옹의 보르드 씨를 포함한 사람들과 수년에 걸쳐 논전을 벌이면서, 이후 저작에 나타나는 사상적 입장을 굳혀갔다.[9]
4. 2. 루소의 반론
루소는 자신의 주장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몇몇 분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판적인 반응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여론에 얽매이도록 태어난 사람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여기에는 "재치 있는 사람들"과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이 포함된다고 말했다.[4] 그는 당대의 사고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유 사상가와 철학자를 연기"할 뿐이며, 만약 그들이 프랑스 종교 전쟁 시대에 살았다면 가톨릭 동맹에 가담하여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는 광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4]루소의 주장은 실제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쥘 르메트르(1853-1914)는 루소를 즉시 신격화하는 것을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몇몇 비평가들은 고대 황금 시대 개념이 신화라고 주장하며, 루소가 인간의 도덕적 타락이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는지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1]
루소는 수상을 한 후 2년 정도 동안 자신의 비평가 5명에게 직접 답변했다. 여기에는 전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아베 레이날, 철학자 샤를 보르데에게 보낸 "최후의 답변"이 포함되었다. 이 답변들을 통해 루소는 ''학문예술론''의 주장을 명확히 하고, 예술과 과학의 오용이 본래 선한 인간을 타락시키는 더 큰 주제의 한 사례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불평등, 사치, 정치 생활이 특히 해롭다고 지적했다. 비평가들은 루소가 인간 도덕의 타락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지만, 루소는 자신은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라고 답했다.[1]
루소는 인류의 행복 증진을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대부분의 인류를 자신의 적대자로 설정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학자 제프 J. S. 블랙은 루소가 자신의 작품이 자신보다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루소는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글을 쓴다면 자신의 작품도 유행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시대를 넘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지속적인 원칙과 덜 생각 없는 독자들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믿었다.[3]
루소는 자신의 ''학문예술론''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한 편지에서는 이 작품을 자신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이자 자신의 철학 체계가 발전된 세 작품(나머지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에밀'') 중 하나라고 묘사했지만, 다른 경우에는 "기껏해야 평범하다"고 평가했다.[5]
『학문예술론』은 출판된 후 큰 반향을 일으켰고, 1751년부터 1753년까지 3년간 찬반 논쟁을 포함하여 67건의 논설이 발표되었다.[8] 이러한 논쟁 속에서 루소는 제기된 비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폴란드 왕과 리옹의 보르드 씨 등과 수년간 논쟁을 벌였다. 이를 통해 이후 저작에 나타나는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더욱 발전시키고 굳혀나갔다.[9]
5. 현대적 의의 및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루소의 학문예술론은 학문과 예술, 기술 발전이 반드시 사회의 발전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성찰하게 한다.
참조
[1]
서적
Rousseau: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 Press
2001
[2]
서적
Literary Imagination, Ancient and Modern: Essays in Honor of David Gren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9
[3]
서적
Rousseau's Critique of Science: A Commentary on the Discourse on the Sciences and the Arts
Lexington Books
2009-01-16
[4]
서적
The Social Contract and Discourses
Everyman's Library
1973
[5]
문서
1975
[6]
웹사이트
学問芸術論
https://kotobank.jp/[...]
[7]
문서
岩波
[8]
문서
岩波
[9]
문서
岩波
[10]
웹인용
루소의 (1750년), 최초의 문명 비판서
https://blog.naver.c[...]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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