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그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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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러스 그릴리는 1811년 뉴햄프셔에서 태어난 미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였고, 1826년 버몬트의 신문사에서 견습공으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1841년에는 휘그당의 지원을 받아 뉴욕 트리뷴을 창간하여 평생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노예제 폐지, 서부 개척 장려, 노동자 권익 보호 등 다양한 개혁 운동을 펼쳤다. 남북 전쟁 시기에는 링컨 대통령의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으며, 1872년에는 자유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그는 1872년 사망했으며, 그의 언론 활동과 개혁적 사상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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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그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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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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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11년 2월 3일 |
출생지 | 뉴햄프셔주 애머스트, 미국 |
사망일 | 1872년 11월 29일 |
사망지 | 뉴욕주 플레전트빌, 미국 |
배우자 | 메리 체니 (1836년 결혼, 1872년 사망) |
안장지 | 그린-우드 공동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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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휘그당 (1854년 이전) 공화당 (1854년–1872년) 자유공화당 (1872년) |
미국 하원 의원 | 뉴욕주 제6선거구 |
임기 시작 | 1848년 12월 4일 |
임기 종료 | 1849년 3월 3일 |
이전 | 데이비드 S. 잭슨 |
이후 | 제임스 브룩스 |
2. 어린 시절
1811년 2월 3일, 그릴리는 뉴햄프셔주애머스트에서 가난한 농부 자카이어스 그릴리와 메리 그릴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잉글랜드계 미국인 후손이었고, 그의 조상에는 매사추세츠주와 뉴햄프셔주의 초기 정착민이 포함되었다. 그의 어머니의 가족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미국인 이민자들의 후손으로, 뉴햄프셔주 런던데리에 정착했다. 그릴리의 어머니 쪽 조상 중 일부는 1689년 아일랜드의 윌리엄 전쟁 당시 데리 포위전에 참여했다.[1]
소년의 지능을 알아본 이웃들은 필립스 엑세터 아카데미 학비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릴리 가족은 자선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1820년, 자카이어스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그는 빚 때문에 감옥에 갈까 두려워 가족과 함께 뉴햄프셔를 떠나 버몬트에 정착했다. 호러스 그릴리는 모든 것을 읽었고, 그릴리 가족에게는 호러스가 자신의 도서관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이웃이 있었다. 1822년, 호러스는 인쇄소 견습공이 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갔지만 너무 어리다는 말을 들었다.[1]
1826년, 15세의 그릴리는 버몬트주 이스트 푸트니의 신문 ''노던 스펙테이터''의 편집자인 아모스 블리스의 인쇄소 견습공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쇄공의 기술을 배웠고,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마을의 백과사전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1830년 신문이 폐간되자, 젊은 그릴리는 가족이 있는 서부로 가서 펜실베이니아주 이리 근처에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신문사 취업을 위해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고, ''이리 가제트''에 고용되었다. 더 큰 꿈을 꾸면서도 그는 1831년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아버지를 도왔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유니버설리즘으로 개종하여 회중 교회에서 벗어났다.[1]
1831년 말, 그릴리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뉴욕으로 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도시로 온 젊은 인쇄업자들이 많았고, 그는 단기 일자리 밖에 찾을 수 없었다. 1832년, 그릴리는 ''Spirit of the Times''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는 자원을 모아 그 해에 인쇄소를 차렸다. 1833년, 그는 호레이쇼 D. 셰퍼드와 함께 일간 신문인 ''New York Morning Post''를 편집하는 데 손을 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실패와 그에 따른 재정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릴리는 복권 결과를 주로 게재하는 주 3회 발행하는 ''Constitutionalist''를 발행했다.[1]
1834년 3월 22일, 그는 조나스 윈체스터와 파트너십을 맺고 ''The New-Yorker''의 첫 번째 호를 발행했다. 그것은 당시 다른 문학 잡지보다 저렴했고, 현대의 노래와 정치 평론을 모두 게재했다. 발행 부수는 9,000부에 달했는데, 당시에는 상당한 수치였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1837년 공황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또한 1834년 선거를 위해 뉴욕의 새로운 휘그당의 선거 뉴스레터를 발행했으며, 국가 발전에 정부 지원을 통한 자유 시장을 포함한 그 입장을 믿게 되었다.[1]
2. 1. 유년기 및 교육
1811년 2월 3일[28], 뉴햄프셔주애머스트에서 가난한 농부 자카이어스 그릴리와 메리 그릴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필립스 엑세터 아카데미(기숙 학교)의 장학금을 거절하고 14세에 학교를 떠났다. 버몬트주 이스트 포트니의 《더 노던 스펙테이터》에서 인쇄공 견습을 했고, 1831년 뉴욕 시로 이주했다. 1834년에는 다른 잡지에서 발췌한 내용을 주로 담은 주간지 《뉴요커》를 창간했다.1836년, 그릴리는 간헐적인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메리 체이니 그릴리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최소화했으며, 뉴욕 시에 있을 때는 아내와 함께 있기보다는 숙소에서 잠을 자는 것을 선택했다. 부부의 7명의 자녀 중 단 2명만이 성인이 되었다.
2. 2. 결혼과 가족
1836년 7월 5일, 그릴리는 노스캐롤라이나 워렌턴에서 여성참정권론자였던 메리 체니 그릴리와 결혼했다.[28] 그는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최소화했으며, 뉴욕 시에 있을 때는 아내와 함께 있기보다는 숙소에서 잠을 자는 것을 선택했다. 부부 사이에 태어난 7명의 자녀 중 단 2명만이 성인이 되었다.3. 뉴욕 트리뷴
1841년 그릴리는 자신의 신문을 《뉴욕 트리뷴》과 합병하여 '위대한 도덕 기관'(Great Moral Organ)으로 알려지게 했다. 이 신문은 곧 대도시에서 선도적인 휘그당 신문으로 성공했으며, 주간지는 전국적으로 수만 부의 구독자를 확보했다. 그릴리는 평생 ‘트리뷴’의 편집자로 재직하며, 자신의 모든 주장을 펼치는 발판으로 활용했다.
역사가 앨런 네빈스는 트리뷴이 뉴스의 활력에 양식, 높은 도덕 수준 및 지적 흥미를 결합함으로써 미국의 저널리즘에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경찰의 조서, 스캔들, 수상한 의료 광고 및 경박한 사람들은 지면에서 제외되었고, 논설은 활발했지만 일반적으로 절제되어 있었다. 정치 뉴스는 도시에서 가장 정확했으며, 서평과 책 발췌가 많았다. 또한 만성적인 강사였던 그릴리가 강연에 많은 공간을 할애하여 이 신문은 상당수의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 호소했다.[29]
1840년대 말, 그릴리의 ''트리뷴''(Tribune)은 뉴욕에서 일간 신문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시골 지역과 소도시에서 배포되는 주간판을 통해 전국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론인 베이아드 테일러는 그 영향력을 중서부에서 성경 다음으로 평가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트리뷴''은 그릴리의 사설을 통해 대통령보다 더 효과적으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릴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기술을 연마하여, 1870년대에 ''트리뷴''에서 일했던 미래 국무장관 존 헤이가 "성 호러스에 따른 복음"이라고 칭한 것을 정립했다.
1854년에 공화당이 새롭게 결성되었을 때, 그릴리는 ‘트리뷴’을 비공식 전국 기관으로 삼아 노예제도 확대와 노예 권력에 맞서 싸웠다.
3. 1. 휘그당 활동
1838년, 휘그당의 지도적 정치인들은 그릴리를 선택하여 대규모 전국 운동용 신문 "제퍼소니언"을 편집하게 하였고, 그 발행 부수는 15,000부에 달했다. 휘그당의 지도자 윌리엄 슈워드는 그릴리를 "그의 정치적 견해와 이론에서, 사회적 관습에 비교적 무관심하며, 매우 명석하고, 독창적이며, 또한 결연하다"고 평가했다. 1840년, 그릴리는 대규모 전국 운동용 신문 "로그 캐빈"을 편집하여 그 발행 부수는 전국에서 90,000부가 되었고, 휘그당 공인으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기여했다. 1841년, 그릴리는 그 신문을 "뉴욕 트리뷴"에 합류시켰다. 이는 대도시에서 휘그당의 신문으로 성공했다. 그 주간판은 전국에서 수만 부가 구독되었다. 그릴리는 평생 "트리뷴"의 편집자였으며, 그것을 자신의 모든 생각을 주장하는 발판으로 사용했다.그릴리는 모든 종류의 사회 문제에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제안을 따르는 독자는 적었다. 유토피아가 그를 매료시켰다. 앨버트 브리스번에 영향을 받아, 샤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1850년대 초에는 잡지의 유럽 특파원으로 카를 마르크스(및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채용했다.[30] 그릴리는 홈스테드법을 포함한 농업 개혁을 주창했다. 1848년에는 데이비드 S. 잭슨 의원의 사임에 따른 공석을 채우기 위해 휘그당원으로 제30대 미국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1848년12월 4일부터 1849년3월 3일까지 재임했다.
그릴리는 개척자들에 대해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했다. 1865년7월 13일의 논설에서, "'''서부로 가라 젊은이여''', 서부로 가서 이 나라와 함께 성장하라"는 유명한 호소를 했다. 이 문구는 원래 존 설레가 1851년에 "테레호트 익스프레스"에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31], 그릴리의 것이라고 하는 쪽이 더 많다. 역사학자 월터 A. 맥두걸은 아이오와주의 그리넬 칼리지 설립자 조시아 그리넬의 말, "내가 그릴리의 말을 처음 들은 젊은이였고, 나는 갔다"를 인용했다. 이는 1925년 영화 "고 웨스트"에서도 다루어졌다.
그릴리는 노동자의 옹호자로서 모든 종류의 독점 기업을 공격하고 철도 회사에 대한 토지 특허를 부정했다. 산업은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높은 관세를 권장했다. 채식주의자를 지지하고, 음주에 반대하며, 누군가가 주장하는 어떤 "주의"에도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트리뷴"이 이렇게 성공한 것은 훌륭한 기자에 의해 매우 훌륭하게 작성된 광범위한 뉴스 해설과 함께, 세련된 저자에 의한 특집 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릴리는 뉴스의 가치와 보고의 질에 대해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휘그당의 정책과 후보를 설명하는 그릴리의 논설과 뉴스 보고는 재인쇄되어 전국에서 논의되었다. 많은 작은 신문은 "트리뷴"의 보고와 논설에 크게 의존했다. 그릴리는 하원 의원 3개월을 역임했지만, 선거로 선출되는 다른 직무에서는 많이 낙선했다.
3. 2. 공화당 활동
1854년 공화당이 새롭게 결성되자, 그릴리는 ‘트리뷴’을 비공식 전국 기관으로 삼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노예제도 확대와 노예 권력에 맞서 싸웠다. 남북 전쟁 직전 전국의 구독자 수는 30만 부에 달했다.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경쟁에서는 미주리주 출신의 전직 휘그당원 에드워드 베이츠를 지지했고, 이로 인해 오랜 동맹이자 또 다른 후보였던 수어드와의 관계가 약화되었다.[32]그릴리는 "트리뷴"을 노예 권력, 즉 노예 소유주들에 의한 연방 정부의 지배를 자유 추구를 저해하는 음모로 간주하여 반대하는 선도적인 신문으로 만들었다. 1861년 분리 위기 때 남부 연합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했다. 이론적으로는 남부가 독립을 선언할 수 있다고 동의했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음모를 품은 폭력적이고, 뻔뻔한 자포자기의 소수자’가 있으며, 분리는 연방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불법적인 음모라고 말했다. 그릴리는 전쟁 도중 공화당 급진파의 입장에 서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중용 노선에 반대했다. 1862년 여름, ‘2천만 명의 기도’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남군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공격과 발 빠른 노예 해방을 요구했다. 1개월 후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자 환호로 답했다.
1860년 이후 그릴리는 점차 ‘트리뷴’ 운영의 지배력을 잃고, 논설을 쓰는 횟수도 줄어들고 있었지만, 1864년에 링컨의 재선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고, 그 논설이 재판되었을 때 전국적인 반향이 일어났다. 1863년부터 1864년에는 휴전 정책도 지지했으며, 카퍼헤즈 (북부 휴전주의자)와 논쟁에 휘말려 미합중국 연합군과의 타협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링컨은 아연실색했지만, 남군이 거부할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릴리를 휴전 중재 위원으로 지명해 그릴리의 허를 찔렀다.
3. 3. 언론 활동과 영향력
1838년, 휘그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그릴리를 전국적 운동 신문인 "제퍼소니언"의 편집자로 선택했고, 이 신문의 발행 부수는 15,000부에 달했다. 휘그당 지도자 윌리엄 슈워드는 그릴리를 "정치적 견해와 이론에서 사회적 관습에 비교적 무관심하며, 매우 명석하고, 독창적이며, 또한 결연하다"고 평가했다. 1840년, 그릴리는 전국적 운동 신문 "로그 캐빈"을 편집하여 발행 부수가 전국적으로 90,000부에 달했고, 휘그당 후보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기여했다. 1841년, 그릴리는 이 신문을 "뉴욕 트리뷴"에 합병시켰다. "뉴욕 트리뷴"은 대도시에서 휘그당의 신문으로 성공했다. 주간판은 전국적으로 수만 부가 구독되었다. 그릴리는 평생 "뉴욕 트리뷴"의 편집자였으며, 이를 자신의 모든 생각을 주장하는 발판으로 사용했다. 역사학자 앨런 네빈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그릴리는 모든 종류의 사회 문제에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제안을 따르는 독자는 적었다. 유토피아가 그를 매료시켰다. 앨버트 브리스번에 영향을 받아, 샤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1850년대 초에는 잡지의 유럽 특파원으로 카를 마르크스(및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채용했다.[30] 그릴리는 홈스테드법을 포함한 농업 개혁을 주창했다.
그릴리는 개척자들에 대해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했다. 1865년 7월 13일의 논설에서, "'''서부로 가라 젊은이여''', 서부로 가서 이 나라와 함께 성장하라"는 유명한 호소를 했다. 이 문구는 원래 존 설레가 1851년에 "테레호트 익스프레스"에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31] 그릴리의 것이라고 하는 쪽이 더 많다. 역사학자 월터 A. 맥두걸은 아이오와주의 그리넬 칼리지 설립자 조시아 그리넬의 말, "내가 그릴리의 말을 처음 들은 젊은이였고, 나는 갔다"를 인용했다. 이는 1925년 영화 "고 웨스트"에서도 다루어졌다.
그릴리는 노동자의 옹호자로서 모든 종류의 독점 기업을 공격하고 철도 회사에 대한 토지 특허를 부정했다. 산업은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높은 관세를 권장했다. 채식주의자를 지지하고, 음주에 반대하며, 누군가가 주장하는 어떤 "주의"에도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뉴욕 트리뷴"이 이렇게 성공한 것은 훌륭한 기자에 의해 매우 훌륭하게 작성된 광범위한 뉴스 해설과 함께, 세련된 저자에 의한 특집 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릴리는 뉴스의 가치와 보고의 질에 대해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휘그당의 정책과 후보를 설명하는 그릴리의 논설과 뉴스 보고는 재인쇄되어 전국에서 논의되었다. 많은 작은 신문은 "뉴욕 트리뷴"의 보고와 논설에 크게 의존했다.

1854년에 공화당이 새롭게 결성되었을 때, 그리리는 "뉴욕 트리뷴"을 비공식 전국 기관으로 삼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노예제의 확대와 노예 권력에 맞서 싸웠다. 미국 남북 전쟁 전야에는 전국 구독자 수가 30만 부에 달했다.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경쟁에서 미주리주의 전직 휘그당원 에드워드 베이츠를 지지했고, 이로 인해 오랜 지지자이자 또 다른 후보였던 슈워드와의 관계가 약화되었다.[32]
그릴리는 "뉴욕 트리뷴"을 노예 권력, 즉 노예 소유주들이 연방 정부를 지배하고 자유의 진전을 방해하는 음모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대하는 지도적인 신문으로 만들었다. 1861년의 탈퇴 위기 때, 미국 남부 연합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했다. 이론적으로는 미국 남부가 독립을 선언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가진 폭력적이고, 뻔뻔하고, 자포자기한 소수자"가 있으며, 탈퇴는 연방의 권력으로 진압해야 하는 불법적인 음모라고 말했다. 그릴리는 전쟁 기간 동안 급진 공화당의 입장을 취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의 중용에 반대했다. 1862년 여름, "2천만 명의 기도"라는 제목의 논설을 써서 남부군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공격과 신속한 노예 해방을 요구했다. 한 달 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에는 환호로 답했다.
1860년 이후, 그릴리는 점차 "뉴욕 트리뷴" 운영에서의 지배력을 잃고, 논설을 쓰는 횟수도 줄었지만, 1864년에 링컨의 재선 가능성에 대해 패배주의를 표명했고, 그 논설이 증쇄되었을 때는 전국에 반향이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1863년부터 1864년까지 휴전 정책도 추구하고 있어, 코퍼헤드(북부의 휴전론자)와의 논쟁에 휘말렸고, 미국 남부 연합과의 타협 가능성을 열었다. 링컨은 당황했지만, 남부군이 거부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릴리를 휴전 조정 위원으로 지명하여 따돌렸다.
4. 주요 사상과 개혁 운동
1838년, 휘그당의 지도적 정치인들은 그릴리를 전국 운동용 신문 "제퍼소니언"의 편집자로 선택했고, 이 신문은 15,000부의 발행 부수를 기록했다. 휘그당 지도자 윌리엄 슈워드는 그릴리를 "매우 명석하고, 독창적이며, 결연하다"고 평가했다. 1840년에는 "로그 캐빈"을 편집하여 90,000부의 발행 부수를 기록,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1841년에 창간한 "뉴욕 트리뷴"은 대도시에서 휘그당의 신문으로 성공했으며, 주간판은 전국적으로 수만 부가 구독되었다. 그릴리는 평생 "트리뷴"의 편집자로 활동하며 자신의 사상을 펼치는 기반으로 삼았다.
역사학자 앨런 네빈스는 "트리뷴"이 "뉴스의 활력, 높은 도덕 수준, 지적 흥미를 결합하여 미국 저널리즘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9] "트리뷴"은 경찰 조서, 스캔들, 경박한 내용은 배제하고, 활발하면서도 절제된 논설, 정확한 정치 뉴스와 함께 서평, 책 발췌, 강연 내용을 많이 실어 사려 깊은 독자들에게 호소했다.[29]
그릴리는 사회 문제에 대해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다. 유토피아 사상에 매료되어 앨버트 브리스번의 영향을 받아 샤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1850년대 초에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유럽 특파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30] 1848년에는 휘그당원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1848년 12월 4일부터 1849년 3월 3일까지 재임했다.
그는 홈스테드법을 포함한 농업 개혁을 지지했으며,[30] 개척자들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을 옹호했다. 1865년 7월 13일 논설에서 "'''서부로 가라 젊은이여''', 서부로 가서 이 나라와 함께 성장하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31] (이 문구는 존 설레가 먼저 썼다는 주장도 있다.[31]) 그는 노동자 옹호, 독점 반대, 고율 관세 지지, 채식주의 옹호, 금주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4. 1. 노예제 폐지론
1854년 공화당이 새롭게 결성되었을 때, 그릴리는 ‘트리뷴’을 비공식 전국 기관으로 삼아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노예제도의 확대와 노예 권력에 맞서 싸웠다. 남북 전쟁 직전 전국의 구독자 수는 30만 부에 달했다.[36]그릴리는 "트리뷴"을 통해 노예 소유자들에 의한 연방 정부 지배, 즉 노예 권력을 자유 추구를 저해하는 음모로 간주하고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1861년 분리 위기 때 미국 연합국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했다. 이론적으로는 남부가 독립을 선언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품은 폭력적이고, 뻔뻔하며, 자포자기한 소수자’가 있으며, 분리는 연방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불법적인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릴리는 전쟁 기간 동안 공화당 급진파의 입장에 서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중용 노선에 반대했다. 1862년 여름, ‘2천만 명의 기도’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남군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공격과 빠른 노예 해방을 요구했으며, 한 달 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에 환호했다.
4. 2. 서부 개척 장려
"'''서부로 가라 젊은이여''', 서부로 가서 이 나라와 함께 성장하라"는 1865년 7월 13일자 뉴욕 트리뷴의 사설에서 나온 유명한 문구이다.[31] 이 말은 1851년 존 설레가 "테레호트 익스프레스"에 썼다는 주장도 있지만,[31] 호러스 그릴리가 한 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 월터 A. 맥두걸은 아이오와주 그리넬 칼리지 설립자인 조시아 그리넬의 "내가 그릴리의 말을 처음 들은 젊은이였고, 나는 갔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이 문구는 1925년 영화 "고 웨스트"에서도 다루어졌다.그릴리는 홈스테드법을 포함한 농업 개혁과 개척자들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했다.[30] 그는 노동자의 옹호자로서 모든 종류의 독점 기업을 공격하고 철도 회사에 대한 토지 특허를 부정했다. 그는 산업이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으며, 높은 관세를 권장했다. 또한 채식주의를 지지하고 음주에 반대하는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30]
4. 3. 노동자 권익 보호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영어)는 노동자 권익 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독점 기업을 공격하고 철도 회사에 대한 토지 특허를 부정했으며, 산업이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며 높은 관세를 권장했다. 또한, 홈스테드법을 포함한 농업 개혁을 지지했다.[4]그는 평화주의, 여성주의, 특히 근면한 자유 노동자의 이상을 포함한 수많은 개혁을 후원했다. 그는 모든 시민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들 개혁을 요구했으며, 부패를 근절할 덕망 있는 시민들을 구상했다. 그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조화를 요구하면서 진보, 개선,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4]
1840년대에 그릴리는 샤를 푸리에의 푸리에주의를 홍보하고, 팔랑주라고 불리는 정착촌 설립을 지지했다. 그는 이러한 정착촌 두 곳과 관련이 있었는데, 둘 다 결국 실패했지만, 펜실베이니아의 한 곳 부지에 건설된 마을은 그의 사후에 그릴리 (펜실베이니아)(Greeley)로 개명되었다.
4. 4. 기타 개혁 운동
그릴리는 평화주의, 여성주의, 특히 근면한 자유 노동자의 이상을 포함한 수많은 개혁을 후원했다. 그는 모든 시민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들 개혁을 요구했다. 부패를 근절할 덕망 있는 시민들을 구상했으며, 노동과 자본 사이의 조화를 요구하면서 진보, 개선,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4] 그의 사설은 사회 민주주의 개혁을 장려했고 널리 재인쇄되었다. 이 사설들은 휘그당과 공화당의 급진적 분파의 자유 노동 이념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자유 노동 이념을 장려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848년 이전에 그는 푸리에주의 사회주의 개혁의 미국 버전을 후원했지만, 1848년 유럽 혁명의 실패 이후 물러섰다.[5] 여러 개혁을 장려하기 위해 마거릿 풀러(Margaret Fuller),[6] 찰스 A. 데이나, 조지 윌리엄 커티스(George William Curtis), 윌리엄 헨리 프라이(William Henry Fry), 베이아드 테일러(Bayard Taylor), 줄리어스 챔버스(Julius Chambers), 그리고 나중에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를 공동 창립한 헨리 자비스 레이먼드(Henry Jarvis Raymond)를 포함하여 나중에 그들 스스로 유명해진 작가들을 고용했다.[7] 수년 동안 조지 립리(George Ripley (transcendentalist))는 직원이자 문학 평론가였다.[8] 제인 스위스헬름(Jane Swisshelm)은 주요 신문이 고용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9]그릴리는 미국 연합 협회주의자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다. 1869년부터 네이선 미커가 이끄는 계획으로 초원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시도인 콜로라도 연합 식민지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콜로라도 준주의 새로운 마을인 그릴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재무를 맡았고,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미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1871년, 어린 시절의 경험과 채퍼쿼의 시골집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 ''내가 농업에 대해 아는 것''을 출판했다.
5. 남북 전쟁과 재건 시대
1865년 4월, 남북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릴리와 《트리뷴》은 패배한 남부 연합에 대한 관대함을 촉구하며, 남부 연합 지도자들을 순교자로 만들면 미래의 반란자들에게 영감을 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온건론은 링컨 대통령이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당하면서 중단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링컨이 마지막 반란 음모의 결과로 사망했다고 결론지었고, 새로운 대통령인 앤드루 존슨은 도망간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체포하는 데 100000USD를 제시했다. 반란 지도자가 체포된 후, 그릴리는 처음에는 "정당한 평결에 따라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1]
1866년 내내 그릴리는 요새 먼로에 갇혀 있는 데이비스를 석방하거나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사설을 썼다. 데이비스의 아내 바리나는 그릴리에게 남편의 석방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촉구했다. 1867년 5월, 리치먼드의 한 판사는 전 남부 연합 대통령의 보석금을 100000USD로 정했다. 그릴리는 보석 증서에 서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두 사람은 법원에서 짧게 만났다. 이 행동은 북부에서 그릴리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866년에 출판된 그의 역사 책 2권의 판매량이 급격히 감소했다.[11] 《트리뷴》(특히 《주간 트리뷴》) 구독도 감소했지만, 1868년 선거에서 회복되었다.[11]
초기에 앤드루 존슨의 관대한 재건 정책을 지지했던 그릴리는 존슨 대통령의 계획이 자유민에게 선거권을 보장하지 않고 주 정부를 신속하게 구성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곧 실망하게 되었다. 1865년 12월에 의회가 소집되어 점차 재건을 통제하게 되자, 그는 일반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는 급진 공화당원들이 자유민의 보편적인 남성 선거권과 시민권을 강력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릴리는 1866년에 의회에 출마했지만 크게 패했다. 그는 1867년 초에 열린 입법 선거에서 상원에 출마했지만 로스코 콩클링에게 패했다.[11]
대통령과 의회가 격돌하면서 그릴리는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을 유지했고, 존슨이 1868년 3월 탄핵되었을 때, 그릴리와 《트리뷴》은 그의 축출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존슨을 "국민의 턱에 있는 아픈 이, 붐비는 강의실의 소리 지르는 아기"라고 공격하고, "그가 나가기 전에는 평화나 위안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상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는 그릴리의 실망을 자아냈다. 또한 1868년에 그릴리는 공화당 주지사 후보 지명을 받으려고 했지만 콩클링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릴리는 1868년 선거에서 성공적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을 지지했다.[11]
5. 1. 남북 전쟁 (1861-1865)
1854년 공화당이 새롭게 결성되었을 때, 그릴리는 ‘트리뷴’을 비공식적 전국 기관으로 삼아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노예제도의 확대와 노예 권력에 맞서 싸웠다. 남북 전쟁 직전 전국의 구독자 수는 30만 부에 달했다.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미주리주 출신 전 휘그당원 에드워드 베이츠를 지지했고, 이로 인해 오랜 동맹 관계였던 상대 후보자 윌리엄 수어드와의 관계가 약화되었다.[36]그릴리는 "트리뷴"을 노예 권력, 즉 노예 소유주들에 의한 연방 정부 지배를 자유 추구를 저해하는 음모로 간주하여 반대하는 선도적인 신문으로 만들었다. 1861년 분리 위기 때 미국 연합국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했다. 이론적으로는 남부가 독립을 선언할 수 있다고 동의했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품은 폭력적이고, 뻔뻔한 자포자기의 소수자’가 있으며, 분리는 연방의 힘을 반토막 내려는 불법적인 음모라고 말했다. 그릴리는 전쟁 도중 공화당 급진파의 입장에 서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중용 노선에 반대했다. 1862년 여름, ‘2천만 명의 기도’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남군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공격과 발 빠른 노예 해방을 요구했다. 한 달 후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자 환호로 답했다.
1860년 이후 그릴리는 점차 ‘트리뷴’ 운영의 지배력을 잃고 논설을 쓰는 횟수도 줄었지만, 1864년에 링컨의 재선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고, 그 논설이 재판되었을 때 전국적인 반향이 일어났다. 1863년부터 1864년까지 휴전 정책도 지지했으며, 카퍼헤즈(북부 휴전주의자)와 논쟁에 휘말려 미합중국 연합군과의 타협 가능성을 주장했다. 링컨은 아연실색했지만, 남군이 거부할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릴리를 휴전 중재 위원으로 지명해 그릴리의 허를 찔렀다.[32]
링컨의 취임을 앞두고 《트리뷴》은 매일 사설란의 머리글을 다음과 같이 큰 대문자로 적었다. "타협 불가!/반역자에게 양보 불가!/헌법은 그대로!" 그릴리는 링컨의 대통령 취임을 환영하며 스티븐 더글러스 상원의원과 가까이 앉아 취임식에 참석했다. 남부군이 섬터 요새를 공격했을 때, 《트리뷴》은 요새의 손실을 안타까워했지만, 미국 남부 연합을 형성한 반군을 진압하기 위한 전쟁이 이제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환호했다. 신문은 링컨이 신속하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1861년 봄과 초여름 동안 그릴리와 《트리뷴》은 연합군의 공격을 촉구했다. 《트리뷴》의 통신원이 만들어낸 "리치먼드로 가자"라는 구호는 그릴리가 남부 연합 의회가 7월 20일에 소집되기 전에 반군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할 것을 촉구하면서 신문의 좌우명이 되었다. 부분적으로 여론의 압력으로 인해, 7월 중순 링컨은 훈련이 덜 된 연방군을 제1차 불런 전투에 투입했고, 그곳에서 연방군은 처참하게 패했다. 이 패배는 그릴리를 절망에 빠뜨렸고, 그는 신경 쇠약을 겪었을 수도 있다.
차파콰에 구매한 농장에서 2주 동안 요양한 후 건강을 회복한 그릴리는 《트리뷴》으로 돌아와 링컨 행정부를 전반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고, 오랜 숙적인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 그는 전쟁 첫 해의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링컨을 지지했다. 1861년 말, 그는 링컨에게 중개인을 통해 대통령이 《트리뷴》의 우호적인 보도를 대가로 정책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제안했다. 링컨은 "그가 나를 확고히 지지하는 것은 10만 명의 군대만큼이나 도움이 될 것이다"라며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862년 초, 그릴리는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에 좌절하고, 연방이 패배한 후 노예 해방에 대한 대통령의 느린 태도에 불만을 품으며 다시 행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트리뷴》은 사설을 통해 이를 촉구했다. 이는 그릴리의 생각의 변화였는데, 이는 제1차 매너서스 전투 이후 시작되었으며, 전쟁의 주된 목적이 연방의 보존에서 노예 제도의 종식으로 바뀌었다. 3월까지 링컨이 지지한 노예 제도에 대한 유일한 조치는 연방에 충성을 유지한 국경 주에서 보상된 해방을 위한 제안이었지만, 그는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링컨은 《트리뷴》 특파원에게 "호러스 아저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왜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조금 더 기다릴 수 없는 걸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릴리는 링컨을 몰아붙이는 행동은 1862년 8월 19일 그에게 보낸 편지로 절정에 달했고, 다음 날 《트리뷴》에 "2천만 명의 기도"로 재인쇄되었다. 이 무렵, 링컨은 이미 내각에 초안을 작성한 예비 노예 해방 선언을 알렸고, 그릴리는 이 기도가 인쇄된 날에 그것을 통보받았다. 그의 편지에서 그릴리는 해방 조치와 몰수법의 엄격한 시행을 요구했다. 링컨은 "양의 장치로 늑대와 싸우지" 말고 "자유로 노예 제도와 싸워야" 했다.
링컨의 답장은 그 기도를 촉발한 기도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다.[10] "이 투쟁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연방을 구하는 것이며, 노예 제도를 구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노예도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함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는 해방하고 일부는 그대로 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노예 제도와 유색 인종에 대해 하는 일은 연방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내가 참는 것은 연방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링컨의 발언은 폐지론자들을 분노하게 했고, 윌리엄 수어드의 아내 프랜시스는 남편에게 링컨이 "단지 여러 주를 함께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불평했다. 그릴리는 링컨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답하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그가 선언을 발표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것"이라고 말했다. 링컨이 9월 22일에 그렇게 하자 그릴리는 노예 해방 선언을 "자유의 큰 혜택"으로 환영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연방을 위한 링컨의 전쟁은 이제 해방을 위한 그릴리의 전쟁이기도 했다."
1863년 7월 초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연합군의 승리 이후, ''트리뷴''은 반란이 신속하게 "진압될 것"이라고 썼다. 전투 일주일 후 뉴욕 징병 거부 폭동이 발생했다. 그릴리와 ''트리뷴''은 부유층이 대리인을 고용하여 징병을 회피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일반적으로 징병을 지지했다. 징병에 대한 지지는 그들을 폭도들의 표적으로 만들었고, ''트리뷴'' 빌딩은 포위되었으며 적어도 한 번 침입을 받았다. 그릴리는 브루클린 해군 기지에서 무기를 확보했고, 150명의 군인이 건물을 지켰다. 메리 그릴리와 그녀의 아이들은 채퍼쿼의 농장에 있었는데, 폭도들이 그들을 위협했지만 해를 입히지 않고 흩어졌다.
1863년 8월, 그릴리는 하트퍼드의 한 출판사에서 전쟁 역사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릴리는 동의했고, 그 후 8개월 동안 600페이지 분량의 책 두 권 중 첫 번째 책인 ''미국 갈등''을 집필했다. 이 책들은 매우 성공하여 1870년까지 총 225,000부가 판매되었는데, 당시로서는 대량 판매였다.
전쟁 기간 동안 그릴리는 전쟁을 해결할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1862년 그릴리는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인 앙리 메르시에에게 중재를 통한 해결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수어드는 그러한 대화를 거부했고, 1862년 9월 앤티텀 전투에서 유혈 사태를 동반한 연합군의 승리 이후 유럽의 개입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1864년 7월, 그릴리는 캐나다에 평화를 제안할 권한을 가진 남부 동맹 위원들이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사실 그들은 평화 민주당을 돕고 기타 연합군의 전쟁 노력을 훼손하기 위해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있었지만, 그릴리가 링컨의 요청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의 계획에 동참했다. 대통령은 재통일과 해방을 포함하는 모든 거래를 고려할 의향이 있었다. 남부 동맹은 자격 증명이 없었고 안전한 통행증을 받고 그릴리와 함께 워싱턴으로 갈 의향이 없었다. 그릴리는 뉴욕으로 돌아왔고, 이 사건이 공개되자 행정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링컨은 그릴리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그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고 표시했다.
그릴리는 처음에 1864년 링컨의 지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고, 다른 후보들을 찾고 있었다. 2월에 그는 ''트리뷴''에 링컨이 두 번째 임기에 선출될 수 없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에게 심각한 도전장을 내민 후보는 없었고, 링컨은 6월에 지명되었는데, ''트리뷴''은 이에 대해 약간의 환호를 보냈다. 8월에는 민주당의 승리와 남부 동맹의 수용을 두려워하여 링컨이 사퇴하고 새로운 전당대회를 열어 다른 후보를 지명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 음모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9월 3일 연합군이 애틀랜타를 점령하자 그릴리는 링컨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릴리는 링컨의 재선과 연합군의 지속적인 승리에 모두 만족했다.
5. 2. 재건 시대 (1865-1877)
1865년 4월, 남북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릴리와 《트리뷴》은 패배한 남부 연합에 대한 관대함을 촉구하며, 남부 연합 지도자들을 순교자로 만들면 미래의 반란자들에게 영감을 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온건론은 링컨 대통령이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당하면서 중단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링컨이 마지막 반란 음모의 결과로 사망했다고 결론지었고, 새로운 대통령인 앤드루 존슨은 도망간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체포하는 데 100000USD를 제시했다. 반란 지도자가 체포된 후, 그릴리는 처음에는 "정당한 평결에 따라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1]1866년 내내 그릴리는 요새 먼로에 갇혀 있는 데이비스를 석방하거나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사설을 썼다. 데이비스의 아내 바리나는 그릴리에게 남편의 석방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촉구했다. 1867년 5월, 리치먼드의 한 판사는 전 남부 연합 대통령의 보석금을 100000USD로 정했다. 그릴리는 보석 증서에 서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두 사람은 법원에서 짧게 만났다. 이 행동은 북부에서 그릴리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866년에 출판된 그의 역사 책 2권의 판매량이 급격히 감소했다.[11] 《트리뷴》(특히 《주간 트리뷴》) 구독도 감소했지만, 1868년 선거에서 회복되었다.[11]
초기에 앤드루 존슨의 관대한 재건 정책을 지지했던 그릴리는 존슨 대통령의 계획이 자유민에게 선거권을 보장하지 않고 주 정부를 신속하게 구성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곧 실망하게 되었다. 1865년 12월에 의회가 소집되어 점차 재건을 통제하게 되자, 그는 일반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는 급진 공화당원들이 자유민의 보편적인 남성 선거권과 시민권을 강력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릴리는 1866년에 의회에 출마했지만 크게 패했다. 그는 1867년 초에 열린 입법 선거에서 상원에 출마했지만 로스코 콩클링에게 패했다.[11]
대통령과 의회가 격돌하면서 그릴리는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을 유지했고, 존슨이 1868년 3월 탄핵되었을 때, 그릴리와 《트리뷴》은 그의 축출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존슨을 "국민의 턱에 있는 아픈 이, 붐비는 강의실의 소리 지르는 아기"라고 공격하고, "그가 나가기 전에는 평화나 위안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상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는 그릴리의 실망을 자아냈다. 또한 1868년에 그릴리는 공화당 주지사 후보 지명을 받으려고 했지만 콩클링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릴리는 1868년 선거에서 성공적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을 지지했다.[11]
6. 1872년 대통령 선거
1872년 대통령 선거에서 호러스 그릴리는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맞서기 위해 자유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명을 모두 받았다. 186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랜트를 지지했지만, 이후 그랜트 및 급진 공화당과 결별하고 1872년에는 자유 공화당에 참여하여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민주당 또한 그를 지지했다.
그릴리는 선거 운동을 위해 ''트리뷴'' 편집장직에서 사임하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유세 여행을 시작했다. 주요 공직 후보가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그는 공직을 탐하는 사람으로 공격받았다. 그릴리는 분파 간 화해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전쟁과 노예제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남부의 군사 점령을 끝낼 때라고 주장했다.
토머스 내스트는 그릴리를 비판하는 만평을 그렸는데, 그랜트는 자신의 재선에 내스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이 터졌지만, 그릴리는 이 스캔들과 그랜트 행정부의 연관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선거 직전, 그릴리의 아내 메리가 사망하면서 그는 큰 슬픔에 빠졌다. 결국 그릴리는 283만 4125표를 얻어 359만 7132표를 얻은 그랜트에게 패배했다. 그는 조지아, 켄터키, 메릴랜드, 미주리, 테네시, 텍사스 등 6개 주에서만 승리했다.
6. 1. 자유 공화당 후보 지명
19세기 대부분의 경우처럼, 남북 전쟁 이후에도 정당들은 계속 생겨나고 사라졌다. 1871년 9월, 미주리주 상원의원 칼 슈르츠는 자유 공화당을 결성했는데, 이 당은 그랜트 대통령에 대한 반대, 부패에 대한 반대, 공무원 개혁, 세금 인하, 토지 개혁을 지지하며 설립되었다. 자유 공화당은 그랜트 행정부가 점점 더 부패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반대라는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 다양한 지지자들을 모았다. 당에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가 필요했다. 그릴리는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인 중 한 명이었으며, 또한 끊임없이 공직에 출마하는 후보이기도 했다.[12] 그는 공화당 후보 지명을 고려하는 데 더 마음이 기울었는데, 당에서 이탈할 경우 ''트리뷴''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능한 한 공화당, 그렇지 않다면 자유 공화당으로서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자유 공화당 전국 대회는 1872년 5월 신시내티에서 열렸다. 그릴리 외에도 미주리 주지사 벤자민 그라츠 브라운도 후보로 거론되었다. 슈르츠는 외국 태생이라 자격이 없었다. 첫 투표에서는 전 영국 주재 대사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가 선두를 달렸지만, 개정된 두 번째 투표에서 그릴리가 근소한 차이로 선두를 차지했다. 애덤스가 다시 선두를 차지했지만, 리드가 주최한 "즉흥적인" 시위 이후 여섯 번째 투표에서 그릴리가 부통령 후보로 브라운을 지명하며 후보 지명을 받았다.
7월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은 그릴리를 지명할 것인가, 아니면 그랜트 반대 표를 분산시켜 확실한 패배를 맞을 것인가라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그들은 전자를 선택했고, 심지어 흑인 미국인의 평등권을 요구하는 자유 공화당의 강령을 채택했다.
6. 2. 선거 운동과 패배
1871년 9월, 미주리주 상원의원 칼 슈르츠는 자유 공화당을 결성했는데, 이 당은 그랜트 대통령에 대한 반대, 부패에 대한 반대, 공무원 개혁, 세금 인하, 토지 개혁을 지지하며 설립되었다. 그랜트 행정부가 점점 더 부패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반대라는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 다양한 지지자들을 모았다. 자유 공화당에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가 필요했다. 그릴리는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인 중 한 명이었으며, 또한 끊임없이 공직에 출마하는 후보이기도 했다.[12] 그는 공화당 후보 지명을 고려하는 데 더 마음이 기울었는데, 당에서 이탈할 경우 ''트리뷴''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능한 한 공화당, 그렇지 않다면 자유 공화당으로서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1872년 5월 신시내티에서 열린 자유 공화당 전국 대회에서는 그릴리 외에도 미주리 주지사 벤자민 그라츠 브라운이 후보로 거론되었다. 슈르츠는 외국 태생이라 자격이 없었다. 첫 투표에서는 전 영국 주재 대사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가 선두를 달렸지만, 개정된 두 번째 투표에서 그릴리가 근소한 차이로 선두를 차지했다. 애덤스가 다시 선두를 차지했지만, 리드가 주최한 "즉흥적인" 시위 이후 여섯 번째 투표에서 그릴리가 부통령 후보로 브라운을 지명하며 후보 지명을 받았다.
로널드 화이트는 "그랜트보다 그릴리의 강점과 약점을 더 잘 요약한 사람은 없었다. 그랜트는 친구에게 '그는 상식 없는 천재다'라고 썼다"라고 적고 있다.
1872년 7월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은 그릴리를 지명할 것인가, 아니면 그랜트 반대 표를 분산시켜 확실한 패배를 맞을 것인가라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그들은 전자를 선택했고, 심지어 흑인 미국인의 평등권을 요구하는 자유 공화당의 강령을 채택했다.
그릴리는 선거 운동을 위해 ''트리뷴'' 편집장직에서 사임했고,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유세 여행을 시작했다. 주요 공직 후보가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이 관례가 아니었기에 그는 공직을 탐하는 사람으로 공격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말, 그릴리(그리고 전 오하이오 주지사 러더퍼드 B. 헤이스)는 그가 당선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그릴리는 분파 간 화해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전쟁이 끝났으며 노예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고 남부의 지속적인 군사 점령을 끝낼 때라고 주장했다.
공화당의 반격은 자금 지원이 잘 이루어졌으며, 그릴리를 반역에서 쿠 클럭스 클랜 지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지지한다고 비난했다. 그릴리 반대 운동은 토머스 내스트의 만화에 의해 유명하고 효과적으로 요약되었으며, 그랜트는 나중에 자신의 재선에 그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내스트의 만화는 그릴리가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보석금을 지불하고, 그랜트에게 오물을 던지고, 링컨의 무덤을 넘어 존 윌크스 부스와 악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유니언 퍼시픽 철도 자금 조달의 부패—이 9월에 터졌지만, 그릴리는 철도 주식을 가지고 있었고, 유리한 보도를 대가로 그에게 주어졌다는 주장이 있었기에 그랜트 행정부와 스캔들의 연관성을 활용할 수 없었다.
그릴리의 아내 메리는 6월 말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병이 났다. 그녀의 상태는 10월에 악화되었고, 그는 10월 12일 이후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선거 운동을 중단했다. 그녀는 10월 30일에 사망했고, 그는 선거 일주일 전에 절망에 빠졌다. 9월과 10월에 다른 공직 선거가 치러진 주에서 민주당의 저조한 결과는 그릴리의 패배를 예고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는 2,834,125표를 얻었고, 그랜트는 3,597,132표를 얻었으며, 그랜트는 286명의 선거인을 확보했고 그릴리는 66명을 확보했다. 편집자 출신 후보는 조지아, 켄터키, 메릴랜드, 미주리, 테네시, 텍사스 등 6개 주(총 37개 주)에서만 승리했다.
186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율리시스 S. 그랜트를 지지했지만, 이후 그랜트 및 급진 공화당과 결별했다. 그랜트의 재선에 반대하여 1872년에는 자유 공화당에 참여했다.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이 새로운 정당이 그릴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것이었고, 더욱 놀랍게도 그릴리가 수십 년 동안 비난해 온 민주당에서도 공인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다.
후보자로서의 그릴리는 전쟁은 끝났고, 남군은 파괴되었으며, 노예제는 죽었다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 재건은 성공했으며, 연방군을 남부에서 철수시켜 남부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그릴리의 선거 운동은 약했고, 공화당원들로부터 어리석은 자, 과격주의자, 변절자, 믿을 수 없는 광인으로 가혹하게 조롱받았다. 가장 악의적인 공격은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토마스 내스트의 풍자화였다. 그릴리는 결국 그랜트에 뒤져 일반 투표에서 득표율 43%에 그쳤다.
이 참패는 1872년에 그릴리가 겪은 불운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릴리는 필립 아놀드에 의한 유명한 다이아몬드 및 보석 사기에 속은 유명한 몇몇 투자자 중 한 명이었다. 한편, 그릴리가 정치 경력을 추구하는 동안 "뉴욕 헤럴드"의 소유주인 화이트로 리드가 "트리뷴"을 빼앗았다.
7. 사망과 유산
Horace Greeley영어는 대통령 선거 패배 직후 사망했다. 대선 기간 동안 그에게 쏟아진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는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이후, 호러스 그릴리의 죽음만큼 진심으로 슬퍼하는 미국인은 없었다"라고 평했다.[13]
그는 자유주의적인 서부 정책을 지지했으며, "젊은이여, 서부로 가라"라는 유명한 조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칼 마르크스를 고용할 정도로 노동 계급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17] 철도에 대한 토지 보조금을 거부하는 등 모든 종류의 독점에 반대했다.[15] 높은 관세를 옹호하며 산업 발전이 모두를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16] 채식주의와 금주를 지지했고, 새로운 사상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였다.[17]
역사학자 아이버 번스타인은 그릴리를 "개혁"이라는 국제적 대의를 위한 단독 스위치보드였다고 평가하며,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장인 사회주의, 토지 개혁, 성 개혁, 식단 개혁, 노예제 폐지 등 다양한 개혁 운동에 헌신했다고 설명했다.[18]
그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9] 전기 작가 에릭 S. 룬데는 그를 가난한 백인 남성, 노예, 자유 흑인, 백인 여성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는 헌신적인 사회 개혁가였지만, 자조와 자유 기업의 미덕을 옹호했다고 평가했다.[20]
하지만 그의 개혁가로서의 능력은 특이한 성격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그는 "마치 유령처럼 보였을 것이다. 오래된 린넨 코트를 입고 마치 물건을 사러 마을에 온 농부처럼 보였다"라고 한다.[21]
그가 사망한 후, ''트리뷴''은 1924년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다가 뉴욕 ''헤럴드''와 합병하여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되었으며, 1966년까지 발행되었다.[27] 이 이름은 2013년까지 유지되었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nternational Herald-Tribune)''은 ''인터내셔널 뉴욕 타임스(International New York Times)''가 되었다.[28]
'''그를 기리는 기념물'''
장소 | 설명 |
---|---|
콜로라도주 그릴리 시 |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22] |
뉴욕 시청 공원 | 트리뷴 협회 기증 동상 (1890년 주조, 1916년 헌정)[23] |
그릴리 광장 미드타운 맨해튼 | 그릴리 동상 (뉴욕시 시의회 투표로 명명)[24][25] |
뉴욕주 채퍼쿼 그릴리 집 | 현재 뉴캐슬 역사 협회 본부 |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호러스 그릴리 고등학교 |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짐 |
뉴햄프셔주 내슈아 그릴리 공원 |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짐 |
스태튼아일랜드 그랜트 시티 그릴리 애비뉴 |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짐 |
호러스 그릴리 산 | 미시간주 키위노 반도 최고봉 중 하나 |
「뉴욕 트리뷴」 빌딩 | 페이스 대학교 첫 본부. 현재 페이스 대학교 뉴욕 시 캠퍼스 원 페이스 플라자 복합 빌딩 |
초트 의사 주거 및 사설 병원 | 플레전트빌 페이스 대학교 캠퍼스 일부 |
컬럼비아 저널리즘 스쿨 로비 | 그릴리 부조 장식 |
맨해튼 헤럴드 스퀘어 | 호러스 그릴리 광장, 그릴리 좌상 (원래 「뉴욕 헤럴드」 빌딩 위치) |
반 데우젠은 "그의 모든 결점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릴리는 종종 근시안적이고 오해를 받았지만, 농장과 용광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에 질식되지 않은 미국을 상징했다"라고 평가했다.[33]
7. 1. 사망
그릴리는 ''트리뷴''의 편집장 자리에 복귀했지만 곧 자신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선거 일주일 뒤인 11월 13일 마지막으로 ''트리뷴''을 방문한 후, 의료 치료를 받았다. 가족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그릴리는 뉴욕 플레전트빌에 있는 조지 초트 박사의 정신 병원인 초트 하우스로 보내졌다.[1] 그곳에서 그는 계속 악화되었고, 두 딸과 화이트로 리드와 함께 11월 29일에 사망했다.[2]그의 죽음은 선거인단 투표 전에 일어났다. 그의 66명의 선거인단 표는 네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분산되었는데, 주로 인디애나 주지사 당선자 토머스 A. 헨드릭스와 그릴리의 부통령 후보인 벤자민 그라츠 브라운이었다.[3]
일반 선거가 끝나자마자 그리리의 아내가 사망했다. 그리리도 광기에 휩싸였고, 선거인단 투표가 진행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의 임종 시에, 리드를 가리키며 "이런, 젠장, 네가 내 신문을 훔쳤어!"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그리리는 1872년 11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50분에 뉴욕주 플레전트빌의 조지 C. S. 초트 박사의 개인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리리는 선거인단 표를 얻지 못했고, 그리리에게 투표할 예정이었던 표는 다른 사람들에게 분산되었다. 하지만, 조지아주의 선거인단 표는 그리리에 대한 존경을 표하여 백지표였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그리리는 사후 3표를 받았지만, 그것들은 연방 의회에 의해 무효 처리되었다).
그릴리는 소박한 장례식을 원했지만, 그의 딸들은 그의 뜻을 무시하고 그가 회원이었던 디바인 파터니티 교회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는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묘지에 묻혔다. 조문객 중에는 리드와 헤이를 포함한 오랜 친구, ''트리뷴'' 직원, 그의 언론 경쟁자, 그리고 그랜트 대통령을 비롯한 다양한 정치인들이 있었다.[4]
7. 2. 유산
대선에서 그에게 쏟아진 혹평에도 불구하고, 그릴리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는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이후, 호러스 그릴리의 죽음만큼 진심으로 슬퍼하는 미국인은 없었다"라고 평했다.[13]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는 ''크리스천 유니온(The Outlook (New York))''에 "호러스 그릴리가 죽었을 때, 그에 대한 부당하고 가혹한 판단도 함께 사라졌다"라고 썼다.[14]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는 그의 특이한 옷차림을 언급하며 "저 불쌍한 흰 모자여! 아, 그 모자가 많은 약점을 가렸지만, 많은 강점, 많은 진정한 친절과 자비, 그리고 세상이 더 나아질 많은 것을 덮고 있었다"라고 말했다.[15]그릴리는 서부 개척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지지했으며, "젊은이여, 서부로 가라"라는 유명한 조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그는 칼 마르크스를 고용할 정도로 노동 계급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17] 철도에 대한 토지 보조금을 거부하는 등 모든 종류의 독점에 반대했다.[18] 그는 높은 관세를 옹호하며 산업 발전이 모두를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19] 또한 채식주의와 금주를 지지했고, 새로운 사상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였다.[20]
역사학자 아이버 번스타인은 그릴리를 "절충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은 사상가"이자 "개혁을 위한 국제적 대의를 위한 단독 스위치보드"였다고 평가한다. 그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장인 사회주의, 토지 개혁, 성 개혁, 식단 개혁, 노예제 폐지 등 다양한 개혁 운동에 동시에 헌신했다.[21]
그릴리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22] 그의 전기 작가 에릭 S. 룬데는 "가난한 백인 남성, 노예, 자유 흑인, 그리고 백인 여성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는 헌신적인 사회 개혁가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조와 자유 기업의 미덕을 옹호했다"라고 평가했다.[23] 반 데우젠은 "그의 진정한 인간적 공감, 그의 도덕적 열정, 심지어 그의 일부를 구성하는 과시성조차도 그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도적인 열정으로 그렇게 했다"라고 말했다.[24]
하지만 그릴리의 개혁가로서의 능력은 그의 특이한 성격 때문에 제약을 받기도 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그는 "마치 유령처럼 보였을 것이다. 오래된 린넨 코트를 입고 마치 물건을 사러 마을에 온 농부처럼 보였다"라고 한다.[25] 반 데우젠은 "그릴리의 투사로서의 효능은 그의 몇 가지 특징과 특성에 의해 제한되었다. 문화적으로 결핍된 그는 자신의 한계를 끝까지 몰랐고, 이러한 무지는 큰 장애였다"라고 평가했다.[26]
''트리뷴''은 1924년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다가 뉴욕 ''헤럴드''와 합병하여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되었으며, 1966년까지 발행되었다.[27] 이 이름은 2013년까지 남아있었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nternational Herald-Tribune)''은 ''인터내셔널 뉴욕 타임스(International New York Times)''가 되었다.[28]
그를 기리는 기념물
- 콜로라도주 그릴리 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9]
- 뉴욕 시청 공원에는 트리뷴 협회가 기증한 그릴리 동상이 있다. 1890년에 주조되었지만, 1916년에야 헌정되었다.[30]
- 그릴리 광장 미드타운 맨해튼에 그릴리의 두 번째 동상이 있다.[31] 브로드웨이와 33번가에 위치한 그릴리 광장은 그릴리의 사망 후 뉴욕시 시의회 투표를 통해 명명되었다.[32]
- 뉴욕주 채퍼쿼에 있는 그릴리의 집은 현재 뉴캐슬 역사 협회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 지역 고등학교는 그릴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이 고등학교의 신문 중 하나는 그릴리가 소유했던 19세기의 신문에 경의를 표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
- 「뉴욕 트리뷴」 빌딩은 페이스 대학교의 첫 번째 본부였다. 오늘날, 그 빌딩이 있던 곳은 페이스 대학교 뉴욕 시 캠퍼스의 원 페이스 플라자 복합 빌딩이 되었다.
- 호러스 그릴리가 사망한 초트 의사의 주거와 사설 병원은 플레전트빌에 있는 페이스 대학교의 캠퍼스 일부가 되었다.
- 뉴욕 시에 있는 컬럼비아 저널리즘 스쿨의 로비에는 그릴리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 나치의 경제학자 얄마르 샤흐트의 풀네임은 얄마르 호러스 그릴리 샤흐트이다. 샤흐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재정의 마술사"로,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 시대의 독일 국립 은행 총재였으며, 후에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의 피고(무죄)가 되었다.
- 맨해튼의 헤럴드 스퀘어에는 호러스 그릴리 광장이라는 작은 공원이 있으며, 그릴리의 좌상이 놓여 있다. 이 공원은 원래 「뉴욕 헤럴드」 빌딩이 있던 장소에 인접해 있다.
- 시청 공원에도 그릴리의 좌상이 놓여 있다.
- 뉴욕주 웨스트체스터의 호러스 그릴리 고등학교는 그릴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뉴햄프셔주 내슈아의 그릴리 공원은 그릴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스태튼아일랜드의 그랜트 시티에 있는 그릴리 애비뉴는 그릴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호러스 그릴리 산은 미시간주 키위노 반도에 있는 최고봉 중 하나이다.
반 데우젠은 그릴리의 전기를 통해 "그릴리가 그의 조국과 동포에 대한 믿음, 무한한 미국의 진보에 대한 그의 믿음의 결과로 수행한 봉사"를 강조하며, "그의 모든 결점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릴리는 ... 농장과 용광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에 질식되지 않은 미국을 상징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미국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표현된 미국의 미래에 대한 그의 믿음을 통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그들이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였다.[33]
8. 저서
- 《미국의 갈등: 1860-64년 미국의 대반란사》 (1864년) 1권과 2권[26]
- 《바쁜 삶의 회고》 (1868년)[26]
- 《노동의 진정한 고양을 위한 국가 협력 시스템으로서 국내 산업 보호 정책을 설명하고 옹호하는 데 기여하는 정치 경제 과학을 설명하기 위한 에세이》 (1870년)[26]
- 《사업 성공에 관한 연설》(1867)[26]
- 《1859년 여름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여정》 (1860)[26]
- "앨리스와 피비 캐리", 《당대 저명한 여성들; 현 세대의 가장 뛰어난 여성들의 삶과 업적에 대한 이야기》 (1868), 164–172쪽.[26]
- 《호러스 그릴리의 버지니아에 대한 견해: 그리고 그가 남부에 대해 아는 것, 노예 사육, 혼성 학교, 이종 혼합, 분열 전쟁 만들기, 캔자스와 남부, 분리주의 옹호, "잘못된 자매들"을 가게 두기, 몰수, 약탈 및 황폐화, 노예 반란, 버틀러 장군의 뉴올리언스 명령 지원, 쿠 클럭스 재판》. (187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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