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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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헤이는 1838년 스코틀랜드계로 태어나 링컨 대통령의 비서, 외교관, 작가로 활동한 미국의 인물이다.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링컨의 비서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남북 전쟁에서 북군에 복무했다. 이후 영국 주재 미국 대사 및 국무장관을 역임하며 문호 개방 정책을 주도하고 파나마 운하 건설에 기여했다. 또한 링컨의 전기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1905년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미국 외교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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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헤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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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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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밀턴 헤이 |
출생일 | 1838년 10월 8일 |
출생지 | 미국 인디애나주 세일럼 |
사망일 | 1905년 7월 1일 |
사망지 | 미국 뉴햄프셔주 뉴베리 |
안장지 | 레이크 뷰 공동묘지 클리블랜드, 오하이오주, 미국 |
소속 정당 | 공화당 |
배우자 | 1874년 클라라 스톤과 결혼 |
자녀 | 4명 (헬렌, 아델베르트 포함) |
학력 | 브라운 대학교 (문학사, 인문학 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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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 |
소속 | 미국 육군 (북군) |
계급 | 소령 |
복무 기간 | 1865년 |
참전 | 미국 남북 전쟁 |
공직 | |
직책 | 미국 국무 장관 |
대통령 |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
임기 시작 | 1898년 9월 30일 |
임기 종료 | 1905년 7월 1일 |
이전 | 윌리엄 R. 데이 |
다음 | 엘리후 루트 |
직책 2 | 주 영국 미국 대사 |
대통령 2 | 윌리엄 매킨리 |
임기 시작 2 | 1897년 5월 3일 |
임기 종료 2 | 1898년 9월 12일 |
이전 2 | 토머스 F. 베이어드 |
다음 2 | 조지프 호지스 쇼트 |
직책 3 | 미국 국무부 차관보 |
대통령 3 |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A. 가필드 |
임기 시작 3 | 1879년 11월 1일 |
임기 종료 3 | 1881년 5월 3일 |
이전 3 | 프레더릭 W. 슈어드 |
다음 3 | 로버트 R. 히트 |
2. 생애
스코틀랜드계 혈통으로 인디애나주 세일럼에서 태어난 존 헤이는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일리노이주 워소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한 후, 22세의 젊은 나이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비서로 발탁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링컨의 단순한 보좌관을 넘어 친구이자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합중국의 보존과 노예 해방 선언 등 링컨의 핵심 목표를 지지하며 공화당과의 인연을 맺었다.
남북 전쟁 기간에는 잠시 북군에 복무하기도 했으며, 전쟁 중 남긴 기록들은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는다. 1865년 링컨 대통령 암살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이후 동료 비서 존 G. 니컬레이와 함께 10권 분량의 링컨 전기를 집필했다.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1897년 영국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고, 1898년 윌리엄 매킨리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발탁되어 미국-스페인 전쟁을 마무리 짓는 파리 조약 협상에 참여했다. 매킨리 대통령 암살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에서도 국무장관직을 유지하며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 정책 추진과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외교적 기반 마련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총 50개 이상의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04년 미국 예술원 창립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05년 7월 1일 66세의 나이로 뉴햄프셔주 뉴베리에서 사망하여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레이크뷰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스코틀랜드계 혈통인 존 밀턴 헤이(eng)는 1838년 10월 8일 인디애나주 세일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eng 박사는 켄터키주 렉싱턴 출신으로, 노예제를 혐오하여 1830년대 초 북쪽으로 이주한 의사였다. 어머니 헬렌 레오나드(eng)는 매사추세츠주 애소넷 출신으로, 가족과 함께 서쪽으로 이주하던 중 아버지를 여의고 1830년 세일럼에 정착하여 학교 교사로 일했다. 찰스와 헬렌은 1831년 세일럼에서 결혼했다. 찰스는 세일럼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1841년 헤이가 3살 때 가족과 함께 일리노이주 워소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존은 워소의 지역 학교에 다녔다. 1849년, 그의 삼촌이자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변호사였던 밀턴 헤이(eng)는 존을 일리노이주 피츠필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명문 학교인 존 D. 톰슨 아카데미(eng)에 다닐 것을 제안했다. 밀턴 헤이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친구였으며, 과거 링컨이 속했던 법률 사무소에서 법을 공부한 인연이 있었다. 피츠필드에서 존은 당시 20세의 신문 기자였던 존 G. 니콜레이 (eng)를 처음 만났다. 피츠필드에서의 학업을 마친 후, 13세의 존은 스프링필드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살며 그곳 학교에 다녔다. 이후 그의 부모와 교육비를 지원한 삼촌 밀턴의 결정에 따라, 그는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 있는 브라운 대학교에 진학했다. 이는 그의 외할아버지의 모교이기도 했다.
1855년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한 헤이는 대학 생활을 즐겼지만, 서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처음에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서부식 옷차림과 억양으로 눈에 띄었고, 학업적으로도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으며 건강 문제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는 뛰어난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사라 헬렌 휘트먼과 노라 페리(eng) 등이 속한 프로비던스의 문학 모임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 그는 시를 쓰고 해시시를 경험하기도 했다. 1858년, 헤이는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으며, 그의 할아버지처럼 졸업생 대표 시인으로 선정되었다.
졸업 후 헤이는 일리노이주로 돌아왔다. 마침 삼촌 밀턴 헤이가 스프링필드로 사무실을 옮겼고, 존은 그의 법률 회사에서 서기로 일하며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밀턴 헤이의 회사는 일리노이주에서 손꼽히는 명망 있는 곳이었으며, 바로 옆 건물에는 당시 공화당의 떠오르는 정치인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무실이 있었다. 헤이는 링컨과의 초기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내가 ... 법률을 공부하던 사무실에 ''하퍼스 매거진''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 그 잡지에는 더글러스 상원의원의 국민 주권에 관한 유명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각 주 또는 준주의 주민들이 노예제 허용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 링컨은 자신이 읽은 내용에 매우 흥분한 듯 보였다. 그는 인사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이건 잘못됐어. 그는 이 문제에서 도덕적 요소를 배제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배제될 수 없는 문제야."
헤이는 1860년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에야 그를 본격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연설을 하고 신문 기사를 쓰며 링컨의 대선 운동을 도왔다. 당시 링컨의 비서였던 존 G. 니콜레이가 쏟아지는 서신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워하자, 헤이는 6개월간 링컨을 위해 전적으로 일하며 그를 도왔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의 비서로 계속 일하게 된 니콜레이는 헤이를 백악관에서 자신을 도울 보좌관으로 추천했다. 링컨은 처음에는 "일리노이 사람들을 전부 워싱턴으로 데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지만, 이내 "그래, 헤이를 데려오게"라고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헤이의 전기 작가들은 헤이가 스스로 직책을 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보다는, 당시 스프링필드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헤이가 링컨의 서신 업무를 도운 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다른 전기 작가는 링컨이 경험 많은 인물 대신 젊은 니콜레이와 헤이를 선택한 이유로 그들의 충성심, 능력, 그리고 서로 간의 좋은 관계를 꼽기도 한다. 역사가 조슈아 자이츠(eng)는 삼촌 밀턴 헤이가 조카의 급여를 6개월간 대신 지불하겠다고 제안한 것이 링컨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헤이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링컨의 비서로서 정치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미국 내무부 서기 직함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링컨의 친구이자 조언자, 동반자 역할을 수행했다. 헤이는 링컨의 핵심 목표였던 합중국의 보존과 노예 해방 선언을 확고히 지지했으며, 이는 그가 평생 공화당원으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백악관 2층 북동쪽 구석 침실에서 6살 연상의 동료 비서 존 G. 니콜레이와 함께 생활했다.
2. 2. 링컨과의 인연
존 헤이는 삼촌 밀턴 헤이의 법률 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며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갔다. 밀턴 헤이의 사무소는 일리노이주에서 명망 높은 곳 중 하나였고, 옆 건물에는 당시 공화당의 떠오르는 인물이자 변호사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무실이 있었다. 헤이는 링컨과의 초기 만남 중 하나로, 링컨이 스티븐 더글러스의 국민 주권 관련 글에 대해 "이 문제에서 도덕적 요소를 제외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던 일을 회상했다.헤이는 1860년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에야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연설과 신문 기고를 통해 선거 운동을 도왔다. 당시 링컨의 비서였던 존 니콜레이가 늘어나는 서신 업무에 어려움을 겪자, 헤이는 6개월간 링컨을 위해 전적으로 일하며 그를 도왔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니콜레이는 헤이를 백악관에서 자신을 도울 비서로 추천했다. 링컨은 처음에는 "일리노이 사람들을 모두 워싱턴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고 했지만, 이내 "그래, 헤이를 데려오게"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쿠슈너와 셰릴은 헤이가 스스로 직책을 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보다는, 몇 달간 링컨을 도운 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을 것이며 이것이 1860년대 스프링필드 정치 현실에 더 부합한다고 보았다. 링컨이 경험 많은 인물 대신 젊은 니콜레이와 헤이를 선택한 것은 그들의 충성심, 능력, 그리고 서로 간의 조화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조슈아 자이츠는 헤이의 삼촌 밀턴이 초기 6개월간 조카의 급여를 부담하기로 한 것이 링컨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2세의 나이에 링컨의 비서가 되면서 헤이의 정치 경력이 시작되었다.[1] 그는 단순히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 링컨의 친구이자 신뢰하는 동료 역할을 했다. 당시 링컨 내각의 많은 인물들이 서로 경쟁하며 헤이에게 비우호적이었던 상황에서 그의 역할은 더욱 중요했다.[1] 헤이는 합중국의 회복과 영속, 그리고 노예 해방 선언 등 링컨의 핵심 목표를 확고히 지지했으며, 이는 그가 평생 공화당원으로 남는 계기가 되었다.[1] 그는 백악관 2층 북동쪽 구석 침실에서 자신보다 6살 많은 동료 비서 존 G. 니컬레이와 함께 생활했다.[1]
남북 전쟁 기간 동안 헤이는 몇 달간 데이비드 헌터와 퀸시 애덤스 길모어 장군 아래 북군에서 소령 계급으로 복무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명예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했다.[1] 그가 남긴 일기와 저술들은 당시 상황과 링컨 행정부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초 역사 자료로 평가받는다.[1] 책 《링컨과 남북 전쟁》으로 출판된 그의 기록들은 링컨 대통령을 매우 인간적이고 친밀한 관점에서 묘사하며, 링컨의 유머와 일상적인 모습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는 링컨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1] 일부에서는 남북 전쟁에서 아들들을 잃은 리디아 파커 빅스비 여사에게 링컨 대통령이 보낸 위로 편지의 실제 작성자가 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1]
헤이는 1865년 포드 극장에서 링컨 대통령이 암살될 당시 현장에 있었다.[1] 이후 그는 존 G. 니컬레이와 함께 10권 분량의 방대한 링컨 전기를 집필하고 링컨의 저작들을 모아 편집하는 작업에 참여했다.[1]
2. 3. 남북 전쟁 참전
1861년 2월 4일 일리노이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헤이는 같은 달 11일, 당선자 신분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워싱턴 D.C.로 향했다. 당시 남부 여러 주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링컨의 당선에 반발하여 남부연합을 결성하며 합중국에서 탈퇴한 상태였다. 링컨이 1861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자, 헤이는 존 G 니컬레이와 함께 백악관으로 이사하여 2층 북동쪽 코너의 침실을 함께 사용했다. 대통령 비서는 니컬레이 한 명만 정식으로 임명되었기에, 헤이는 연봉 1600USD의 미국 내무부 서기 직책을 받아 백악관에서 근무하도록 파견되었다. 이들은 휴가 없이 밤늦게까지 일하는 링컨을 24시간 보좌해야 했다.헤이와 니컬레이는 업무를 분담했다. 니컬레이가 링컨의 집무실과 회의를 보좌하는 동안, 헤이는 방대한 양의 서신 업무를 처리했다. 두 사람은 링컨을 만나려는 방문객들로부터 대통령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헤이는 매력적인 성격 덕분에 링컨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을 비교적 피할 수 있었다. 폐지론자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은 헤이를 "좋은 청년이지만, 불행히도 17세처럼 보이고 70세처럼 행동해야 하는 필요성에 짓눌려 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헤이는 신문에 익명으로 글을 기고하며 링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제1차 불런 전투와 같은 군사적 패배를 해명하는 등 '백악관 선전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고된 업무 속에서도 헤이는 윌러드 호텔에서 니컬레이와 식사하고, 링컨 부부와 극장을 찾는 등 나름의 일상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메리 토드 링컨과 백악관 운영 문제로 종종 충돌하기도 했다.
몇 달간 헤이는 데이비드 헌터와 퀸시 애덤스 길모어 장군 휘하에서 북군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그는 소령 계급으로 시작하여 이후 명예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했다. 남북 전쟁 기간 동안 헤이가 남긴 일기와 저작들은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는다. 일부에서는 링컨 대통령이 아들들을 전쟁에서 잃은 리디아 파커 빅스비 여사에게 보낸 위로 편지의 실제 작성자가 헤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헤이는 단순한 비서를 넘어 링컨의 친구이자 동반자 역할을 했다. 그는 링컨의 목표, 특히 합중국의 보존과 노예 해방 선언을 확고히 지지했으며, 이는 평생 공화당원으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1862년 링컨의 아들 윌리 링컨이 사망한 후, 헤이는 링컨에게 더욱 각별한 존재가 되었다. 헤이의 전기 작가 로버트 게일은 헤이가 링컨의 인품에 깊이 감화되었다고 서술했으며, 당시 하원의장 갈루샤 그로는 "링컨은 그를 매우 아꼈다"고 증언했고, 작가 찰스 G. 할파인은 "링컨은 그를 아들처럼 사랑했다"고 기록했다.
1863년 11월, 헤이는 게티즈버그 전투 전사자 묘지 봉헌식에 링컨과 함께 참석했다. 그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대통령은 평소보다 더 우아하게, 단호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그의 몇 마디의 봉헌사를 말했다"고 간결하게 기록했다. 1865년 4월 14일, 링컨 대통령이 포드 극장에서 암살되었을 때 헤이도 현장에 있었다. 이후 헤이는 니컬레이와 함께 10권 분량의 방대한 링컨 전기를 집필하여 1890년에 출판했다. 이 전기는 헤이의 일기와 편지들과 더불어 링컨과 남북 전쟁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2. 4. 링컨 암살
링컨 대통령이 1865년 4월 14일 포드 극장에서 암살당했을 때, 존 헤이는 현장에 있었다. 링컨 사후, 헤이는 동료 비서였던 존 G. 니컬레이와 함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10권 분량의 링컨 전기를 집필하여 1890년에 출판했다. 이 전기는 링컨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또한, 헤이가 남북 전쟁 기간 동안 기록한 일기와 편지들은 《링컨과 남북 전쟁》(Lincoln and the Civil War in the Diaries and Letters of John Hay)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는 링컨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사료로 여겨진다. 헤이의 기록은 링컨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을 보여주며, 때로는 유머러스한 일화를 통해 링컨의 개인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2. 5. 외교관 경력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재임 중인 1897년 영국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양국 간의 오랜 공동 이익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1898년 8월에는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미서 전쟁의 강화 조약인 파리 조약 협상을 도왔다. 매킨리 대통령 암살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행정부에서도 국무장관직을 유지하며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헤이의 주요 외교적 공헌은 다음과 같다.
- 문호 개방 정책 채택: 1900년 1월 2일 공표된 이 정책은 중국에 대한 열강의 동등한 상업적 기회를 보장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 파나마 운하 준비:
- 1901년 영국과 헤이-폰스포트 조약을 체결하여, 기존의 클레이턴-불워 조약을 대체하고 미국이 단독으로 파나마 지협에 운하를 건설, 운영, 보호할 권리를 확보했다.
- 1903년 콜롬비아와 헤이-에란 조약을 체결하여 운하 지대를 100년간 임대하려 했으나, 콜롬비아 의회의 비준 거부로 무산되었다.
- 이에 미국은 1903년 11월 파나마의 콜롬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지원하였고, 독립한 파나마 정부와 헤이-뷔노바릴라 조약을 체결하여 운하 지대에 대한 영구 임대권을 확보했다. 이는 사실상 파나마의 주권을 상당 부분 제약하는 조약이었다.
- 기타 주요 조약:
- 사모아 분쟁 해결을 통해 미국이 투투일라 섬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 1903년 알래스카 경계 조약을 체결했다.
- 아르헨티나, 프랑스, 독일, 쿠바, 영국령 서인도 제도 등과 상호 조약을 협상했다.
- 덴마크와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의 할양을 위한 조약을 협상했다.
헤이는 국무장관 재임 중 총 50개 이상의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 6. 언론인 및 작가 활동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하며 남긴 일기와 기록들은 남북 전쟁 시기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는다. 헤이는 링컨 대통령이 아들들을 전쟁에서 잃은 빅스비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실제 작성자로 여겨지기도 한다.헤이는 동료 비서였던 존 G. 니콜레이(John G. Nicolay)와 함께 링컨에 대한 방대한 전기를 집필하여 총 10권의 《에이브러햄 링컨: 역사》(Abraham Lincoln: A History) 시리즈를 1890년에 출판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외교관으로 근무(1869-1870)하던 시절, 헤이는 당시 스페인의 정치 상황과 문화를 담은 잡지 기고문을 썼다. 이 글들은 훗날 그의 첫 저서 중 하나인 《카스티야의 날들》(Castilian Days)의 기초가 되었다.
헤이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 《파이크군의 발라드와 다른 시들》(Pike County Ballads and Other Poems, 1871년)
- 《카스티야의 날들》(Castilian Days, 1875년)
- 《브레드위너스》(The Bread-Winners)
- 《에이브러햄 링컨 : 역사》(Abraham Lincoln: A History, 총 10권, 1890년) - 존 G. 니컬레이와 공동 저작.
- 《시집》(Poems)
- 《사회학》(Addresses of John Hay) - 연설 모음집으로 추정.
2. 7. 정계 복귀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재임 시기인 1897년, 헤이는 영국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되며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그의 대사 임기는 미국과 영국 양국 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했다. 1898년 8월에는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스페인 전쟁을 마무리 짓는 파리 조약 협상을 도왔다.매킨리 대통령 암살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아래에서도 국무장관직을 유지하며 사망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 시기 헤이는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1900년 1월 2일 공표된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 정책 채택과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외교적 기반 마련이 있다.
헤이는 주영국 대사 경험을 바탕으로 친영국 노선을 취하며, 파나마 운하 건설의 장애물이었던 클레이턴-불워 조약을 대체하기 위해 1901년 11월 영국과 헤이-폰스포트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파나마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고 운영하며 보호할 권리를 확보했다. 1903년에는 워싱턴 주재 콜롬비아 대리 대사와 운하 지대를 100년간 임대하는 헤이-에란 조약을 체결했으나, 콜롬비아 의회는 회계 문제와 주권 양도에 대한 불만으로 이를 비준하지 않았다. 상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파나마 지협을 콜롬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지원했고, 1903년 11월 파나마 독립 전쟁에 함대를 파견했다. 이후 독립한 파나마 정부와 헤이-뷔노바릴라 조약을 체결하여, 파나마가 실질적인 주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운하 지대를 영구 임대받았다.
이 외에도 헤이는 사모아 분쟁을 해결하여 미국이 투투일라 섬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으며, 1903년 알래스카 경계 조약을 확정하고 아르헨티나, 프랑스, 독일, 쿠바, 영국령 서인도 제도와 상호 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덴마크로부터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할양받기 위한 조약을 협상하는 등, 총 50개 이상의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04년에는 미국 예술원 창립 회원 7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헤이는 1905년 7월 1일 66세의 나이로 뉴햄프셔주 뉴베리에서 사망했으며,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레이크뷰 묘지에 안장되었다.
2. 8. 매킨리 행정부
윌리엄 매킨리가 대통령이 되자, 헤이는 1897년 영국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다.[3] 그는 미국과 영국 간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국무장관이 된 후에도 런던과의 긍정적인 관계 구축에 힘썼다. 이는 양국 간 이해 증진에 기여했다.1898년 9월 30일, 헤이는 국무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행정 업무 지원을 위해 오랜 친구인 알비 아디(Alvey Adee) 2차 차관에게 크게 의존했다. 헤이가 취임했을 무렵 미국-스페인 전쟁은 사실상 끝났고, 스페인으로부터 해외 식민지를 획득하는 문제가 결정되었다. 매킨리 대통령은 필리핀 점령을 결정했고, 헤이는 윌리엄 R. 데이(William R. Day)와 다른 평화위원들에게 이를 주장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1899년 2월 상원에서 반제국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비준되었다.
헤이의 주요 공헌 중 하나는 1900년 1월 2일 공표된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 정책 채택이다. 또한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준비에 힘썼는데, 1901년 영국과의 헤이-포언스풋 조약(Hay–Pauncefote Treaty) 체결이 대표적이다.[3] 이 조약은 기존의 클레이턴-불워 조약을 대체하여 미국이 단독으로 중앙아메리카에 운하를 건설하고 운영할 권리를 확보하는 길을 열었다.
1899년 11월 개릿 호바트 부통령이 사망하자, 당시 법률에 따라 헤이는 대통령 유고 시 승계 서열 1위가 되었다. 1900년 선거에서 매킨리는 재선되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새로운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01년 여름은 헤이에게 비극적인 시기였다. 보어 전쟁 중 프레토리아에서 영사로 일하며 매킨리의 개인 비서가 되려던 그의 큰아들 아델버트(Adelbert Stone Hay)가 호텔 창문에서 추락사했다.
1901년 9월 6일, 매킨리 대통령이 뉴욕주 버펄로에서 무정부주의자 레온 초골고스에게 피격당했을 때 헤이는 펠스(Fells, 뉴햄프셔의 여름 별장)에 있었다. 그는 9월 10일 버펄로로 이동했고, 도착 후 대통령의 회복 상황 보고를 듣고 매킨리가 사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매킨리 대통령은 9월 14일 사망했으며, 헤이는 루스벨트 부통령에게 대통령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새로운 대통령으로서 첫 연락을 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매킨리 행정부의 종결을 의미했다.
2. 9. 루스벨트 행정부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던 개릿 호바트가 1899년 11월 사망하면서, 당시 법률에 따라 헤이는 대통령 유고 시 다음 계승자가 되었다.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매킨리는 만장일치로 재지명되었고, 부통령 후보로는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선출되었다. 해나 상원의원은 루스벨트의 지명에 반대했지만, 결국 맥킨리/루스벨트 후보조는 선거에서 승리했다.1901년 여름, 헤이는 매킨리 대통령과 함께 전국 순회 열차 여행에 동행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평양을 보았다. 그러나 그해 여름은 헤이에게 비극적인 시기였다. 그의 큰아들 아델버트가 프레토리아에서 영사로 근무하던 중 호텔 창문에서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6일, 헤이가 뉴햄프셔주 펠스에 머무는 동안 버펄로에서 매킨리 대통령이 무정부주의자 레온 촐고츠에게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루스벨트 부통령과 다른 각료들이 매킨리의 병상으로 달려가는 동안, 헤이는 워싱턴으로 가 외국 정부와의 소통을 관리하려 했으나, 대통령 비서 조지 코르텔유의 요청으로 버펄로로 향했다. 9월 10일 버펄로에 도착한 헤이는 대통령의 상태에 대한 보고를 듣고 매킨리가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매킨리를 잠시 만난 후 언론에 성명을 발표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9월 13일, 매킨리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다음 날 아침 매킨리는 사망했다. 헤이는 대통령직을 승계한 루스벨트에게 매킨리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첫 번째 연락을 취했다.

대통령 계승 서열 1위였던 헤이는 매킨리의 시신이 워싱턴으로 운구되는 동안 수도에 머물렀다. 그는 매킨리를 깊이 존경했으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운명이 얼마나 이상하고 비극적인가—내 가장 친한 세 친구 링컨, 가필드, 그리고 매킨리의 관 옆에 서 있다니, 세 사람 모두 가장 온화한 사람들이었고, 모두 국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모두 암살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적었다.
헤이는 루스벨트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루스벨트는 워싱턴에서 그를 만나 국무장관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즉시 요청했다. 루스벨트에게 헤이는 경험 많은 원로 정치인이자 내각의 핵심 인물로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1901년은 헤이에게 슬픔의 해였다. 아들과 매킨리의 죽음에 이어 9월 26일에는 오랜 동료 존 G. 니컬레이가,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절친한 친구 클래런스 킹이 세상을 떠났다.
헤이는 루스벨트의 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니어를 남북 전쟁 때 만났고, 젊은 시절의 루스벨트와도 알고 지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되기 전 헤이에게 칭찬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덜 우호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헤이는 루스벨트가 너무 충동적이라고 생각하여 1900년 부통령 후보 지명에 비공개적으로 반대했으나, 지명 후에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대통령과 국무장관으로서 두 사람은 겉으로는 공손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루스벨트는 헤이의 링컨 전기를 모두 읽었고, 헤이에게 "당신이 정말 위대한 국무장관임을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헤이 역시 루스벨트를 공개적으로 "젊고, 용감하고, 능력 있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비공개적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서신에서 그들은 덜 관대했다. 헤이는 맥킨리 대통령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였지만 루스벨트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바빠서 "1분간의 대화를 위해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고 불평했다. 루스벨트는 1905년 헤이가 사망한 후 헨리 캐벗 로지 상원의원에게 헤이가 "위대한 국무장관이 아니었고… 나의 지휘 아래 그는 거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나에게 그의 유용성은 거의 전적으로 훌륭한 겉모습의 유용성에 불과했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가 1904년 대선에서 성공적으로 당선되자, 그는 노쇠하고 병든 헤이를 설득하여 자신을 위해 선거 운동을 하도록 했고, 헤이는 행정부의 정책을 링컨의 정책과 연결하는 연설을 했다. "오늘날 공화당이 주장하는 원칙 중 그의(링컨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거나 그의 성격과 모순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쿠슈너와 셰릴은 헤이와 루스벨트의 차이가 이념적 실체라기보다는 스타일의 차이였다고 제안했다.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헤이는 국무장관으로서 중미 정책 등 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주영국 대사 경험을 바탕으로 친영 노선을 취하며 양국 간의 상호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의 주요 공헌으로는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과 파나마 운하 건설 준비가 있다.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 및 운영의 길을 연 헤이-폰스포트 조약 (1901년), 헤이-에란 조약 (1903년), 헤이-뷔노바릴라 조약 (1903년) 협상을 주도했다. 1903년 콜롬비아와의 헤이-에란 조약은 콜롬비아 의회의 비준 거부로 난관에 부딪혔으나, 미국은 파나마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한 파나마 정부와 헤이-뷔노바릴라 조약을 체결하여 운하 지대에 대한 영구 임대권을 확보했다. 이 외에도 사모아 분쟁 해결(미국의 투투일라 섬 확보), 1903년 결정적인 알래스카 경계 조약 체결, 아르헨티나, 프랑스, 독일, 쿠바, 영국령 서인도 제도와의 상호 조약 협상,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할양을 위한 덴마크와의 조약 협상 등 50개 이상의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02년 베네수엘라 위기 당시, 독일이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자 헤이는 상설중재재판소가 개입하도록 조치했다. 이 과정에서 헤이는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테디(루스벨트)가 내일 정오까지 입을 다물면 될 겁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알래스카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한 합동 고위 위원회 구성에서는 루스벨트와 의견 충돌을 빚었다. 위원회는 "공정한 법률가"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루스벨트가 루트 장관과 로지 상원의원 등 정치인들을 임명하자 헤이는 강력히 항의하며 사임까지 고려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루스벨트는 헤이가 영국 문제에 있어 지나치게 친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알래스카 국경 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한 명의 영국 판사가 세 명의 미국인과 합류하여 4대 2로 캐나다에 부과되었다.

1904년 모로코에서 발생한 페르디카리스 사건은 루스벨트에게 정치적 이득을 안겨주었다. 그리스계 미국인 플레이보이 이온 페르디카리스가 술탄 압델아지즈의 반대파인 수장 무라이 아흐메드 에르 라이술리에게 납치되었다. 라이술리는 몸값 외에도 정치범 석방과 탕헤르 통제권을 요구했다. 페르디카리스가 부유한 미국인이라고 생각한 라이술리는 미국의 압력을 기대했다. (실제 페르디카리스는 미국 태생이었으나 남북 전쟁 중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한 상태였다.) 술탄이 사건 처리에 무능함을 보이자, 헤이는 루스벨트의 승인을 얻어 탕헤르 총영사 새뮤얼 구머레에게 "우리는 페르디카리스를 살아있는 상태로, 또는 라이술리를 죽은 상태로 원한다. 우리는 모로코나 다른 강대국과의 최소한의 분쟁을 원한다. 당신은 국무부의 명확한 지시 없이 해병대 상륙이나 세관 장악을 준비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1904년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을 때, 하원의장 조셉 캐넌이 전보의 첫 문장("우리는 페르디카리스를 살아있는 상태로, 또는 라이술리를 죽은 상태로 원한다.")만 전당대회에 읽어주자, 이는 루스벨트의 단호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대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실 그때 이미 술탄은 라이술리의 요구를 받아들여 페르디카리스는 석방된 상태였다. 이 강경한 발언으로 여겨진 사건은 루스벨트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헤이는 아들 아델버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1904년 그의 절친 리지 캐머런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아들의 죽음은 아내와 나를 늙게 만들었고, 그것은 즉시 그리고 우리 남은 생애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게일은 헤이의 말년을 "슬픔에 잠긴, 천천히 죽어가는 노인"으로 묘사했다.
헤이는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지만, 1904년 가을 대부분을 뉴햄프셔의 자택이나 보스턴에서 병석에 있는 그의 남동생 찰스와 함께 보냈다. 선거 후 루스벨트는 헤이에게 4년 더 일해 줄 것을 요청했다. 헤이는 고려할 시간을 요청했지만,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틀 후 언론에 헤이가 자신의 자리에 남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1905년 초 헤이는 좌절을 겪었는데, 그가 협상한 여러 조약들이 상원에서 부결되거나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상원의원 로지가 자신의 어부 유권자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뉴펀들랜드 영국 자치령과 관련된 것이었다. 다른 조약들은 중재를 촉진하는 것이었지만, 상원이 국제 분쟁 해결에서 배제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결되거나 수정되었다.
루스벨트의 취임식(1905년 3월 4일)까지 헤이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아내와 친구인 헨리 아담스 모두 그가 유럽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주치의인 프레슬리 릭시는 헤이가 과로로 고통받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헤이는 편지에서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암시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의사는 헤이의 심장병에 약용 목욕을 처방했고,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처 바트 나우하임으로 여행을 떠났다. 빌헬름 2세는 그에게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한 군주들 중 한 명이었지만, 헤이는 거절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예고 없이 그의 호텔에 나타나 그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아담스는 헤이에게 아직 충분한 생명이 남아 있을 때 은퇴할 것을 제안했고, 루스벨트는 기꺼이 국무장관 직무를 대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헤이는 조각가 어거스터스 세인트-고당에게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노년, 상원, 그리고 한두 가지 다른 치명적인 질병뿐입니다"라고 농담으로 편지를 썼다.
치료 후 헤이는 파리로 가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를 만나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런던에서 에드워드 7세는 작은 응접실에서 헤이를 만나는 전례 없는 행동을 보였고, 헤이는 런던 주재 미국 대사인 화이트로 리드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 방문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의 가족이 그를 뉴햄프셔로 데려가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서 업무를 처리하고 헤이의 말대로 "대통령에게 '아베 카이사르!'라고 말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 그는 루스벨트가 러일 전쟁을 해결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는데, 이 행동으로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될 것이다. 헤이는 1905년 6월 23일 마지막으로 워싱턴을 떠나 다음 날 뉴햄프셔에 도착했다. 그는 심장병과 합병증으로 7월 1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헤이는 루스벨트와 로버트 링컨을 포함한 많은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필드의 묘 근처인 클리블랜드의 레이크뷰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외교 정책
일청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청는 약체화된 모습을 세계에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중국 분할에 나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광대한 영토를 가진 미국은 내부 문제로 인해 열강들의 분할 경쟁에서 뒤처져 있었다. 이에 1899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존 헤이는 중국에 진출해 있던 유럽 열강들을 대상으로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Open Door)·기회균등(Equal Opportunity)·영토보전(Territorial Integrity)'''의 세 가지 원칙(존 헤이의 삼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미국의 무역 활동을 위해 중국 시장에 참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3. 1. 문호개방정책
1890년대에 이르러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 새롭게 부상한 일본의 주요 무역 대상국이 되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전쟁 패배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자, 여러 외국 세력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군사 기지나 무역 거점으로 사용할 연안 도시, 즉 조계를 확보했다. 이들 조계 내에서 점령국들은 자국민에게 무역이나 철도 건설 등에서 우선권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은 직접적으로 중국 영토를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무역량의 상당 부분이 미국 선박으로 운송되고 있었으며, 스페인으로부터 획득한 필리핀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중국과의 근접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1][2]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청나라는 그 약체성이 드러났고, 유럽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중국 분할에 나섰다.존 헤이는 국무장관이 되기 전인 1870년대부터 극동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영국 주재 대사 시절 영국과 공동 정책을 모색했으나, 영국은 홍콩과 같은 영토 확보를 통해 자국 이익을 보호하려 한 반면, 윌리엄 매킨리 행정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1898년 3월, 헤이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영국과 미국을 중국 무역에서 배제하려 한다고 경고했지만, 당시 국무장관 존 셔먼은 이들의 반대 보증을 받아들이며 헤이의 경고를 무시했다.[2]
매킨리 대통령은 중국 내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있어 식민지 획득보다는 기회균등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며, 헤이가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기 때문에 그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한 이유 중 하나였다.[3] 중국 해안 지역이 열강의 세력권으로 분할되는 것을 목격한 많은 미국의 유력 인사들은 매킨리에게 영토 분할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지만, 매킨리는 1898년 12월 연두 교서에서 미국인이 차별받지 않는 한 미국이 "그 현장의 행위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선언했다.[1]
국무장관으로서 헤이는 실현 가능한 중국 정책을 수립해야 했다. 그는 중국 문제에 정통했던 윌리엄 우드빌 록힐의 조언을 받았다.[4] 또한 영국 의원 찰스 베레스퍼드 경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미국 재계 지도자들을 상대로 연설하고 매킨리와 헤이를 만나 "미국과 영국의 이익을 위해 '열린 문호(Open Door)'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4] 모든 국가가 중국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외국 세력들이 영토 획득을 통해 중국을 분할하려는 유인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4]
1899년 중반, 영국의 중국 해상 관세 감독관 알프레드 히피슬리가 미국을 방문하여 친구인 록힐에게 미국과 다른 강대국들이 조계를 포함한 중국 전역의 관세를 통일할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록힐은 이 편지를 헤이에게 전달했고,[4] 헤이는 히피슬리 등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모든 외국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중국 전역에서 우리 무역을 위한 개방된 시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4] 헤이는 이에 동의했지만, 상원과 여론의 반대를 우려하여 상원의 비준이 필요한 조약 형태를 피하고자 했다.[5] 록힐은 중국 내 외국인의 상업적 기회균등을 요구하는 최초의 '문호개방 노트(Open Door Note)' 초안을 작성했다.[4]
헤이는 1899년 9월 6일 공식적으로 문호개방 노트를 발표했다. 이는 조약이 아니었으므로 상원의 승인이 필요 없었다. 대부분의 강대국들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헤이는 1900년 3월 20일 모든 강대국이 원칙적으로 동의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공개적으로 반박하는 국가는 없었다. 전임 국무장관 윌리엄 R. 데이는 헤이에게 축하 편지를 보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움직여 중국에서 '열린 문호'라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이것은 당신 나라에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5] 이 정책의 주된 목적은 광대한 중국 시장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접근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호개방 정책은 중국 측의 입장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추진되었다. 당시 워싱턴 주재 중국 공사였던 우팅팡조차 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될 정도였다.[6] 한편, 중국 내부에서는 서구 세력의 영향력 확대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는데, 그중 하나가 산둥성에서 시작된 의화단 운동이었다. 의화단은 특히 기독교 선교사들과 중국인 개종자들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1900년 6월, 록힐은 의화단의 위협을 과소평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화단은 청나라 황실 군대 일부와 합세하여 베이징과 해안을 잇는 철도를 파괴하고 다수의 외국인과 중국인 기독교도를 살해했으며, 베이징의 외국 공사관들을 포위했다. 헤이는 베이징에 고립된 미국인들을 구출하면서도,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은 선거철에 다른 열강들에게 중국 분할의 빌미를 주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7]
미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중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한편, 헤이는 열강들에게 제2차 문호개방 서한을 보냈다. 1900년 7월 3일에 발표된 이 서한에서 미국은 자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기를 원하지만, 중국의 영토 보전을 지지하며 중국이 분할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는 열강들이 비밀리에 중국 분할을 논의하고 있다는 의혹 속에서 나온 조치였다. 외국 공사관과의 연락이 두절되기도 했으나, 헤이는 우팅팡 공사를 통해 중국 정부와 소통하며 협력을 제안했다. 결국 일본군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2,000명의 미군 포함)이 베이징에 진입하여 공사관들을 구출하고 도시를 약탈했지만, 중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신 영토 할양은 면할 수 있었다.[8][7]
존 헤이가 제시한 문호개방정책은 이후 '''문호개방(Open Door)''', '''기회균등(Equal Opportunity)''', '''영토보전(Territorial Integrity)'''이라는 세 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3. 2. 파나마 운하 건설
헤이의 중앙아메리카 대양 연결 운하 건설 노력 참여는 헤이스 대통령 재임 시절 국무부 차관보로 재직하면서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의 미국 정부 투자 유치 노력을 통역하며 시작되었다. 헤이스 대통령은 미국이 통제하는 운하 건설만을 원했고, 레셉스의 계획은 이에 부합하지 않았다. 헤이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무렵에는 파나마(당시 콜롬비아의 한 주)의 레셉스 계획과 니카라과의 미국 주도 계획 모두 실패한 상태였다.1850년 체결된 클레이턴-불워 조약(미국과 영국 간)은 미국이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중앙아메리카 운하 건설을 금지했고, 헤이는 취임 초부터 이 제약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영국의 외교 정책에 여전히 의존하던 캐나다는 운하 문제를 다른 분쟁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결하는 가장 큰 지렛대로 보고, 영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해결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헤이가 취임하기 직전 미국과 영국은 미해결 문제를 심판할 공동 고위 위원회 설립에 합의했고, 이 위원회는 1898년 말에 소집되었지만, 특히 캐나다-알래스카 국경 문제에서 진전이 더뎠다.
1899년 8월 캐나다가 최종 합의를 기다리는 동안 임시 국경을 수용하면서 알래스카 문제는 덜 논쟁적으로 되었다. 의회가 운하 법안 작업을 시작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클레이턴-불워 제한을 무시할 가능성이 커지자, 헤이와 영국 대사 줄리안 폰세포트(Julian Pauncefote)는 1900년 1월 새로운 조약 체결 작업에 착수했다. 첫 번째 헤이-폰세포트 조약은 다음 달 상원에 제출되었지만, 평화 시와 전시 모두 모든 국가에 개방되어야 하고 미국이 운하를 봉쇄하거나 요새화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 때문에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상원 외교 관계 위원회는 미국이 운하를 요새화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수정안을 추가한 후 1900년 선거 이후까지 추가 검토를 연기했다. 헤이는 사임을 제출했지만 매킨리 대통령은 거절했다. 수정된 조약은 12월 상원에서 비준되었지만, 영국은 변경 사항에 동의하지 않았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운하 건설에 열의를 보였고 조약 유무에 관계없이 추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니카라과 또는 파나마 루트를 선택할지에 대한 논의로 인해 승인 법안이 지연되었다. 미국이 운하를 요새화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개정 조약 협상의 상당 부분은 헤이의 런던 대리인 조셉 H. 초이트(Joseph H. Choate)와 영국 외무장관 랜즈다운 경(Lord Lansdowne)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두 번째 헤이-폰세포트 조약은 1901년 12월 6일 상원에서 큰 표차로 비준되었다.
미국이 니카라과 운하를 건설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파나마 루트에 대한 독점권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던 파산한 프랑스 회사의 소유주들(필립 부노바릴라(Philippe Bunau-Varilla) 포함)은 가격을 낮췄다. 1902년 초부터 루스벨트 대통령은 후자의 루트를 지지했고, 의회는 합리적인 시간 내에 확보할 수 있다면 이 루트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6월, 루스벨트는 헤이에게 콜롬비아와의 협상을 직접 담당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 말, 헤이는 워싱턴에 있는 콜롬비아 대리 대사 토마스 에란(Tomás Herrán)과 회담을 시작했다. 운하 건설 권한에 대해 콜롬비아에 1000만달러와 연간 25만달러를 지급하는 헤이-에란 조약은 1903년 1월 22일에 체결되었고, 두 달 후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었다. 그러나 8월, 이 조약은 콜롬비아 상원에서 거부되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이 파나마 철도와 관련하여 통행권을 부여하는 이전의 콜롬비아와의 조약을 이용하여 어쨌든 운하를 건설하려고 했다. 헤이는 "보고타의 어리석고 부패한 정권에 대한 파나마 지협의 봉기"를 예측했다. 부노바릴라는 두 사람 모두와 회담을 가졌고, 운하에 더 우호적인 파나마 정부와 혁명이 임박했다고 확신시켰다. 10월, 루스벨트는 파나마 근처에 해군 함선을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파나마인들은 1903년 11월 초 미국군의 존재로 인해 콜롬비아의 간섭이 막히면서 예정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미리 합의된 대로 부노바릴라는 워싱턴 주재 파나마 대표로 임명되었고, 미국이 폭 약 16.09km의 지역에 대해 완전한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헤이-부노바릴라 조약을 11월 18일에 신속하게 체결했다. 이것은 조약 체결 직후 워싱턴에 도착한 파나마 외교관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감히 거부하지 못했다. 이 조약은 두 국가에 의해 승인되었고, 1904년 파나마 운하 건설이 시작되었다. 헤이는 엘리후 루트(Elihu Root) 전쟁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대통령이 따랐던 "완벽하게 정상적인 과정"을 지협의 무력 점령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칭찬했다.
4. 저서
- 〈에이브러햄 링컨: 역사〉 (존 G. 니컬레이와 공동 저작, 1890년, 총 10권)
- 〈빵을 얻는 자들〉 (1883년)
- 〈사회학〉
- 〈카스티야의 날들〉 (1871년)
- 〈파이크 카운티 발라드와 다른 시들〉 (1871년)
- 〈시집〉
헤이는 브라운 대학교 재학 시절과 남북 전쟁 중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1865년 파리 체류 초기에 쓴 "콩코르드 광장의 일출"은 나폴레옹 3세가 왕정을 부활시킨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파리 코뮌의 붕괴를 배경으로 한 "질서의 승리"는 혁명 소년의 희생을 다루며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폭력을 암시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시를 통해 미국 혁명의 성공적인 결과를 다른 나라에도 적용하고자 했다. 1871년 시 "로마인의 기도"는 리소르지멘토가 진행 중이던 이탈리아의 상황을 묘사하며 진정한 자유 공화국을 갈망한다. 비엔나 체류 중 쓴 "헝가리의 저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을 예견했다. 1905년 헤이 사후, 윌리엄 딘 하웰스는 그의 유럽 관련 시들이 "(지금은 아마도 구식이 된)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미국의 동정심"을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마드리드 체류 경험을 담은 《카스티야의 날들》은 스페인 역사와 관습에 대한 17편의 에세이 모음집으로, 1871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나 일부는 1870년 《애틀랜틱》에 먼저 실렸다. 헤이는 스페인 사람들이 "왕관, 십자가, 군도의 삼중 저주"에 시달린다고 묘사하며 스페인의 공화주의 운동에 희망을 걸었다. 게일은 이 책을 "스페인 문명에 대한 편향된, 그러나 놀라운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평가했다.
1871년 다른 시들과 함께 출판된 《파이크 카운티 발라드》는 여섯 편의 시 모음집으로 헤이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었다. 헤이가 어린 시절 학교에 다녔던 일리노이주 파이크 카운티의 방언으로 쓰였으며, 브렛 하트의 유사한 시들과의 선후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시는 "짐 블루드소"로, 미시시피강과 일리노이에 각각 아내를 둔 "성인이 아닌" 뱃사공 이야기다. 증기선 화재 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승객들을 구하는 짐의 행동을 통해 헤이는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에게/그리스도가 너무 가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시는 일부 성직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고 시집에도 포함되었다.

《빵을 얻는 자들》은 1883년 익명으로 출판된 소설로(1916년에야 헤이의 이름이 표기됨), 노동 운동에 반대하는 관점을 취한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자본과 노동, 그리고 신흥 부유층과 구 귀족 자본가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헤이는 1870년대 장인 스톤이 소유한 기업의 파업 등 노동 불안을 겪으며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주요 등장인물 아서 팜햄은 헤이 자신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있는 부유한 남북 전쟁 참전 용사이다. 그는 폭력적인 총파업을 주도하는 노동 조합 '빵을 얻는 자들'에 맞서 싸우며 구세력 자본가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 소설은 당시 큰 인기를 얻었으나, 상류층 편향적인 반노동 논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저자에 대한 추측(헨리 애덤스부터 그로버 클리블랜드까지)이 무성했으며, 이는 판매량 증가에 기여했다.
헤이와 존 G. 니컬레이는 링컨 대통령 임기 초반에 그의 전기를 쓰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1874년 로버트 토드 링컨은 아버지의 서류 사용을 공식적으로 동의했고, 1875년부터 두 사람은 연구에 착수했다. 헤이와 니컬레이는 1947년까지 비공개였던 링컨의 서류에 독점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헤이는 1876년부터 집필을 시작했으며, 《빵을 얻는 자들》 집필 등으로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1885년 링컨의 초기 생애 부분을 완성하여 로버트 링컨의 승인을 받았다. 친구 리처드 길더가 편집하는 《센추리 매거진》에 연재 권리를 판매한 것이 프로젝트 완수에 큰 동기가 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역사》는 1886년 11월 《센추리 매거진》 연재를 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1890년 총 10권의 세트로 출판되었으며, 방문 판매 방식으로 5,000부가 빠르게 판매되었다. 이 책은 링컨의 삶과 업적을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당시의 정치, 사회적 맥락을 함께 다루었다. 수어드와 같은 부하들에게 공을 돌리는 다른 전기들과 달리, 링컨을 위대한 전쟁 지도자로 묘사하여 오늘날 링컨에 대한 평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역사가 조슈아 자이츠는 "헤이와 니컬레이가 국가의 집단적 역사적 기억 속에서 (사망 당시 과소평가되었던) 링컨의 위치를 높이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잊기 쉽다"고 평가했다.
5. 유산
헤이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스페인 전쟁을 "훌륭한 작은 전쟁(a splendid little war)"이라고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2] 이 발언은 전쟁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미국의 팽창주의적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해석도 있다. 또한 루스벨트와 마크 한나 사이의 오해에 대해 "이 장황한 도시는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서로 독살한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헤이는 고어 비달의 역사 소설 《링컨(Lincoln)》과 《제국(Empire)》에 등장하며, 1904년 모로코에서 일어난 퍼디캐리스 사건을 허구화한 영화 《바람과 라이온》(1975)에서는 존 휴스턴이 헤이 역을 맡았다. 1997년 미니시리즈 《러프 라이더(Rough Riders)》에서는 배우이자 전 미국 해병대 상사인 R. 리 어메이가 그를 연기했다.
헤이는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자인 헨리 애덤스와 가까운 친구였다. 두 사람은 워싱턴 D. C.의 라파예트 스퀘어에 H. H. 리처드슨이 설계한 집을 나란히 지었다. 이 건물들은 철거되었지만, 그 자리에는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헤이-애덤스 호텔이 들어서 있다.
브라운 대학교의 존 헤이 도서관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10년 처음 건설되어 1964년 존 D. 록펠러 주니어 도서관이 지어질 때까지 대학의 모든 도서를 소장했다. 1971년 이후로는 대학의 특별 수집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8]
그의 딸 앨리스 에벌린 헤이는 제임스 월콧 워즈워스 주니어와 결혼했고, 다른 딸 헬렌 줄리아 헤이는 페인 휘트니와 결혼하여 존 헤이 휘트니와 조앤 휘트니 페이슨을 낳았다.
주미 대사 시절 헤이는 미국과 영국 간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독립 혁명과 미국 남북 전쟁 중 영국의 역할(영국 항구에서 CSS 앨러배마 같은 남부 사략선 건조를 허용한 것 등) 때문에 영국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는 1897년 런던에서 열린 추수감사절 연설에서 "미국과 영국의 대다수 국민은 친구이며... 질서, 자유, 법에 대한 강한 존중심을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양국 간 우호 증진에 기여했다. 비록 해상 포획 문제나 복본위제 같은 특정 현안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임기는 양국 관계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평가받는다.
스페인-미국 전쟁 발발 직전, 헤이는 영국 총리 솔즈베리 경으로부터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일 경우 영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약을 받았다. 전쟁 중에는 미영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영국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점령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 정부는 필리핀이 독일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는 것보다 미국이 차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1902년 헤이는 자신이 죽으면 "아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으나, 그의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헨리 애덤스는 헤이가 루스벨트와 상원의원들에게 시달렸다고 비난하면서도, 그가 지루함을 두려워해 국무장관직에 머물렀다고 인정했다. 애덤스는 자신의 자서전 《헨리 애덤스의 교육》 마지막 페이지에서 헤이를 추모하며 그의 죽음으로 자신의 교육이 끝났다고 적었다.
역사가 게일(Gale)은 헤이가 "국제 외교 분야에서 많은 것을 성취했으며... 눈부신 대사였다"고 평가하면서도, 부유한 클라라 스톤과 결혼한 후 "편안함에 대한 깊은 사랑이 중서부 출신의 근면함과 공정한 기회 제공에 대한 헌신보다 우세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의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종종 게을렀으며, 초기 시가 최고였다"고 덧붙였다.
존 탈리아페로(John Taliaferro)는 "헤이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면, 그것은 미국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라며, "그가 루스벨트가 아니라 국가와 국무부가 세계적인 성숙에 도달했을 때 책임자였다"고 평가했다.
헤이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개인 비서로서 존 니콜라이와 함께 링컨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이 공동 집필한 10권짜리 링컨 전기는 링컨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의 전기 작가들도 그들이 제시한 기본적인 이야기를 크게 수정하지 않았다. 역사가 조슈아 자이츠(Joshua Zeitz)는 "오늘날 미국인들은 니콜라이와 헤이가 바랐던 것처럼 에이브러햄 링컨을 이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국무장관으로서 헤이는 헤이-파운스풋 조약, 헤이-에란 조약, 헤이-뷰노-바리아 조약 등 파나마 운하 관련 조약을 포함하여 50개 이상의 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삼국 협약을 통해 사모아 제도 분쟁을 해결하여 미국이 현재의 아메리칸사모아 지역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5] 1900년에는 덴마크와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할양 조약을 협상했으나, 덴마크 의회에서 부결되었다.[6]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장소와 사물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캐나다-미국 국경의 헤이 산(Mount Hay)은 알래스카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한 조약 협상에서의 역할을 인정받아 명명되었다.[7] 뉴햄프셔에 있는 그의 저택은 보존 단체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며,[9][10] 클리블랜드의 헤이-맥킨니 하우스는 클리블랜드 역사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11] 제2차 세계 대전 중 건조된 자유선 중 한 척인 SS 존 헤이도 그의 이름을 땄다.[12] 1903년 필리핀 바기오에 설립된 미군 기지 캠프 존 헤이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1991년 필리핀에 반환된 후에도 그 이름이 유지되고 있다.[13]
역사가 루이스 L. 골드(Louis L. Gould)는 헤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국무부를 운영했던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편지 작가 중 한 명인 재치 있고 세련되고 수염이 난 헤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대한 풍부한 문서적 증거를 남겼다. 그의 이름은 국가의 아시아 정책 진실, 문호개방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는 영국과의 오랜 문제 해결에 많은 기여를 했다. 참을성 있고 신중하며 공정한 헤이는 국무장관 중 최고의 자리에 서야 할 자격이 있다."
1904년 헤이는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의 초대 회원 7명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905년에 사망했으며,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레이크뷰 묘지에 안장되었다.
6. 평가
미국-스페인 전쟁을 "훌륭한 작은 전쟁"이라고 묘사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로 유명하다.[5] 루스벨트와 마크 한나 사이의 오해에 대해서는 "이 장황한 도시는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서로 독살한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자인 헨리 애덤스와는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헤이와 애덤스는 워싱턴 D. C.의 라파예트 스퀘어에 건축가 H. H. 리처드슨이 설계한 집을 나란히 지었다. 이 건물은 후에 철거되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헤이-애덤스 호텔이 들어서 있다.
1902년, 헤이는 자신이 죽으면 "아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6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보다 오래 살았다. 친구였던 헨리 애덤스는 루스벨트와 많은 상원의원들에게 시달린 헤이의 직책이 그를 힘들게 했다고 비난하면서도, 헤이가 지루함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렀다는 점을 인정했다. 애덤스는 자신의 자서전 《헨리 애덤스의 교육》 마지막 페이지에서 친구 헤이를 기리며, 헤이의 죽음으로 자신의 교육이 끝났다고 적었다.
역사가 게일은 헤이가 "국제 외교 분야에서 많은 것을 성취했으며, 그의 국무장관으로서의 노력 덕분에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었을 수 있다... 그는 눈부신 대사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부유한 클라라 스톤과 결혼한 후 "중서부 출신의 근면함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려는 그의 헌신보다 편안함에 대한 깊은 사랑이 이겼다"는 점과 "종종 게을렀으며 그의 초기 시가 최고였다"는 부정적인 면도 지적했다.
존 탈리아페로는 "헤이가 역사에 어떤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면, 아마도 미국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루스벨트가 아니라 국가와 국무부가 세계적인 성숙에 도달했을 때 책임자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영국의 언론인 존 세인트 로이 스트레이치의 말을 인용하여, "세상이 본 것은 완벽한 취향, 완벽한 상식, 그리고 완벽한 유머 감각으로 국가와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위대한 신사이자 위대한 정치가였다"고 덧붙였다.
헤이는 존 니콜라이와 함께 에이브러햄 링컨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노력은 암살된 대통령과의 관계를 더욱 주목하게 만들며 그의 명성을 높였다. 자이츠에 따르면, "링컨이 죽음으로써 더욱 위대해질수록, 그들(헤이와 니콜라이)은 생전에 그를 그렇게 잘, 그리고 친밀하게 알았기 때문에 더욱 위대해졌다." 게일은 그들이 쓴 10권짜리 링컨 전기가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1974년 링컨 학자 로이 P. 바슬러는 칼 샌드버그와 같은 후대의 전기 작가들이 "니콜라이와 헤이가 말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수정하지 않았다"고 언급했으며, 자이츠는 "오늘날 미국인들은 니콜라이와 헤이가 바랐던 것처럼 아브라함 링컨을 이해하고 있다"고 동의했다.
헤이는 국무장관으로서 운하 관련 조약을 포함하여 50개 이상의 조약을 체결했으며, 사모아 분쟁을 해결하여 미국이 아메리칸사모아로 알려진 지역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5] 1900년에는 덴마크와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할양 조약을 협상했으나, 이 조약은 덴마크 의회에서 동수 표결로 부결되었다.[6]
역사가 루이스 L. 골드는 매킨리 대통령 재임 기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국무부를 운영했던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편지 작가 중 한 명인 재치 있고 세련되고 수염이 난 헤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대한 풍부한 문서적 증거를 남겼다. 그의 이름은 국가의 아시아 정책 진실, 문호 개방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는 영국과의 오랜 문제 해결에 많은 기여를 했다. 참을성 있고 신중하며 공정한 헤이는 국무장관 중 최고의 자리에 서야 할 자격이 있다.
헤이는 고어 비달의 역사 소설 《링컨》과 《제국》에 등장인물로 나온다. 1904년 모로코에서 일어난 퍼디캐리스 사건을 허구화한 영화 《바람과 라이온》(1975)에서는 존 휴스턴이 헤이 역을 맡았다. 1997년 미니시리즈 《러프 라이더》에서는 배우이자 전 미국 해병대 상사인 R. 리 어메이가 연기했다.
헤이를 기리기 위해 여러 장소와 기관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브라운 대학교의 존 헤이 도서관은 1910년 건설되어 1964년 존 D. 록펠러 주니어 도서관이 지어질 때까지 대학의 주요 도서관 역할을 했으며, 현재는 특별 소장품 보관소로 사용되고 있다.[8] 1923년 캐나다-미국 국경에 있는 헤이 산은 미국-캐나다 조약 협상과 알래스카 국경 중재 재판소 설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7] 그의 뉴햄프셔 저택은 여러 단체에 의해 보존되고 있으며,[9][10] 클리블랜드의 헤이-맥킨니 하우스는 클리블랜드 역사 센터의 본거지로서 그의 오랜 봉사를 기념한다.[1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자유선 존 헤이호가 건조되어 그의 이름을 땄다.[12] 1903년 필리핀 바기오에 설립된 미군 기지 캠프 존 헤이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1991년 필리핀 당국에 반환된 후에도 그 이름이 유지되고 있다.[13]
1904년, 헤이는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의 초대 회원 7명 중 한 명이 되었다. 1905년 사망 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레이크뷰 묘지에 안장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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