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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S.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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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남북 전쟁에서 북군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1869년부터 1877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멕시코 전쟁 참전, 서부 전선에서의 활약, 빅스버그 전역 승리, 채터누가 전투 승리를 통해 북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남북 전쟁에서 총력전 전략을 통해 남부의 항복을 이끌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남부 재건 정책, 흑인 민권 보호, 경제 정책, 외교 정책을 추진했으며, 부정부패와 스캔들로 어려움을 겪었다. 퇴임 후에는 세계 여행을 하고, 회고록을 집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현재 50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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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S. 그랜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
그랜트, 1870–1880년경
본명하이럼 유"리시스 그랜트
출생일1822년 4월 27일
출생지오하이오주 포인트 플레전트
사망일1885년 7월 23일
사망지뉴욕주 윌턴
안장 장소그랜트의 무덤, 뉴욕시
정당공화당
배우자줄리아 덴트 (1848년 8월 22일 결혼)
자녀프레더릭
율리시스 주니어
넬리
제시 2세
직업군인
정치인
교육미국 육군사관학교
잉크로 된 필기 서명
서명
별명
무조건 항복
군사 경력
소속군미국 육군
북군
복무 기간1839년–1854년
1861년–1869년
최종 계급육군 대원수
지휘 부대미국 육군
미시시피 군관구
테네시 군
카이로 군관구
남동 미주리 군관구
제21 일리노이 보병 연대
제4 보병 연대
주요 전투멕시코-미국 전쟁
팔로 알토 전투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몬테레이 전투
몰리노 델 레이 전투
차풀테펙 전투
미국 남북 전쟁
벨몬트 전투
헨리 요새 전투
도넬슨 요새 전투
샤일로 전투
코린트 공성전
빅스버그 전역
포트 깁슨 전투
잭슨 전투
챔피언 힐 전투
빅스버그 공성전
채터누가 전역
미셔너리 리지 전투
오버랜드 전역
황무지 전투
스포칠베이니아 전투
노스 안나 전투
토토포토모이 크리크 전투
콜드 하버 전투
피터즈버그 전역
제2차 피터즈버그 전투
제2차 딥 바텀 전투
채핀스 농장 전투
다비타운 및 뉴마켓 로즈 전투
보이드턴 플랭크 로드 전투
트렌트 리치 전투
애포매톡스 전역
제3차 피터즈버그 전투
애포매톡스 코트 하우스 전투
정치 경력
미국 대통령제18대
임기 시작1869년 3월 4일
임기 종료1877년 3월 4일
전임 대통령앤드루 존슨
후임 대통령러더퍼드 B. 헤이스
부통령스카일러 콜팩스 (1869–1873)
헨리 윌슨 (1873–1875)
공석 (1875–1877)
미국 육군 총사령관임기 시작: 1864년 3월 9일
임기 종료: 1869년 3월 4일
전임: 헨리 할렉
후임: 윌리엄 테쿰세 셔먼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루 존슨
미국 육군 장관 대행임기 시작: 1867년 8월 12일
임기 종료: 1868년 1월 14일
전임: 에드윈 스탠턴
후임: 에드윈 스탠턴
대통령: 앤드루 존슨
미국 총기 협회 회장임기 시작: 1883년
임기 종료: 1884년
전임: E. L. 몰리뇌
후임: 필립 셰리던

2. 초기 생애와 교육

그랜트의 출생지인 오하이오주 포인트 플레전트


오하이오주 포인트 플레전트에서 태어난 그랜트의 아버지 제시 루트 그랜트는 휘그당 지지자이자 열렬한 폐지론자였다.[2] 제시와 한나 심프슨은 1821년 6월 24일에 결혼했고, 1822년 4월 27일에 첫째 아이인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가 태어났다.[3] 율리시스라는 이름은 추첨을 통해 정해졌으며, 제시는 장인을 기리기 위해 "하이럼 율리시스"라고 이름 지었지만 항상 "율리시스"라고 불렀다.[4] 1823년, 가족은 오하이오주 조지타운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심프슨, 클라라, 오빌, 제니, 메리 등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태어났다.[5]

다섯 살 때 사립학교에 다녔고, 이후 두 곳의 사립학교에 더 다녔다.[6] 1836년에서 1837년 겨울에는 메이즈빌 세미나리에서, 1838년 가을에는 존 랭킨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7]

어린 시절, 말을 타고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으며,[8] 아버지는 그에게 보급품 수송과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일을 맡겼다.[9] 감리교 신자였던 부모와 달리, 교회에 다니도록 강요받지 않았고,[10] 평생 개인적으로 기도했지만 특정 교파에 소속되지는 않았다.[11] 아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가지론자로 여겨졌다.[12] 전쟁 전까지는 정치에 대체로 무관심했지만, "정치적 성향을 꼽자면 휘그당이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고 썼다.[13]

2. 1. 가족 배경과 출생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Hiram Ulysses Grant)라는 본명으로 오하이오주 클러몬트군의 포인트플레전트에서 제시 루트 그랜트와 한나 심슨에게 태어났다.[1] 1823년 가을, 가족은 브라운군 조지타운 빌리지로 이주하여 17세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서 보냈다.[1]

그랜트의 아버지 제시 루트 그랜트는 휘그당 지지자이자 열렬한 폐지론자였다.[2] 제시와 한나 심프슨은 1821년 6월 24일에 결혼했고, 1822년 4월 27일에 첫째 아이인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가 태어났다.[3] 율리시스라는 이름은 모자에 넣은 추첨용지에서 뽑은 것이었다.[4] 제시는 장인을 기리기 위해 아이의 이름을 "하이럼 율리시스"라고 지었지만, 항상 "율리시스"라고 불렀다.[4] 1823년, 가족은 오하이오주 조지타운으로 이사했고, 심프슨, 클라라, 오빌, 제니, 메리 등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태어났다.[5] 5세 때 율리시스는 사립학교에 다녔고, 이후 두 곳의 사립학교에 더 다녔다.[6] 1836년에서 1837년 겨울, 그랜트는 메이즈빌 세미나리에 다녔고, 1838년 가을에는 존 랭킨의 아카데미에 다녔다.[7]

젊은 시절, 그랜트는 말을 타고 다루는 특별한 능력을 키웠다.[8] 아버지는 그에게 보급품 수송과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일을 맡겼다.[9] 형제자매들과 달리, 그랜트는 감리교 신자인 부모에게 강요받아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10] 평생 동안 개인적으로 기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어떤 교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11] 아들 등 다른 사람들에게 그랜트는 불가지론자로 보였다.[12] 전쟁 전까지는 대체로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만약 내가 정치적 동조심을 가졌다면 휘그당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다."라고 적었다.[13]

2. 2.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시절

17세 때 그랜트는 하원 의원 토머스 L. 헤이머를 통해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임명을 받았다. 헤이머는 실수로 그를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로 후보 지명했는데, 그랜트는 이름 변경에 항의했으나 관료주의 때문에 바꿀 수 없었다. 졸업할 때 그랜트는 중간 이름을 첫 글자만 사용한 새로운 이름 형식을 채택하여 "S"가 "심슨"을 상징하는 것을 전혀 승인하지 않았다. 그는 사교성이 없고 말수도 적고 조용한 성격에 친구를 사귈 줄 몰라서 학교에서는 늘 외톨이였고, 1843년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여 39명 중 21등을 하였다. 사관학교에서 그는 무서워하지 않는 전문가 기병으로서 평판을 얻었다.[1]

소위 명예 계급의 그랜트 (1843년)

3. 군 경력

율리시스 S. 그랜트는 군 경력을 통해 훗날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승리를 이끄는 기반을 다졌다. 특히, 멕시코-미국 전쟁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중요한 군사적 자산이 되었다.

그는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보급 담당관으로서 군사 보급로, 운송 시스템 및 물류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이를 통해 전쟁이 전장 뿐 아니라, 적대적인 영토에서 작전하는 대규모 기동 부대의 보급과 같은 요인에 의해서도 승패가 결정될 수 있다는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15]

3. 1. 미-멕시코 전쟁

도시 내 몬테레이 전투를 묘사한 미국의 그림
그랜트가 군사 행동을 목격한 몬테레이 전투


그랜트 부대는 잭슨 테일러 장군 휘하의 점령군으로 루이지애나에 주둔했다.[1] 1846년 9월, 제임스 K. 폴크 대통령은 테일러에게 남쪽으로 약 241.40km 이동하여 리오그란데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멕시코의 포위 공격을 막기 위해 포트 텍사스로 진군하는 동안 그랜트는 1846년 5월 8일 팔로알토 전투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경험했다.[2] 그는 연대의 사무관으로 복무했지만 전투 역할을 갈망하여,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돌격을 이끌었다.[3] 몬테레이 전투에서는 저격수를 지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원, 말의 옆에 매달려 말을 자신과 적 사이에 두는 기승 실력을 보여주었다.[4] 테일러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경계한 폴크는 그의 부대를 나누어 일부(그랜트의 부대 포함)를 윈필드 스콧 장군 휘하의 새로운 군대로 보냈다.[5]

스콧의 군대는 바다를 통해 베라크루스에 상륙하여 멕시코시티로 진격했다.[6] 이들은 몰리노 델 레이와 차풀테펙 전투에서 멕시코군과 만났다.[7] 그랜트는 몰리노 델 레이에서의 용감한 행동으로 9월 30일 소위로 임명되었다.[8] 산 코스메에서는 부하들에게 분해된 곡사포를 교회 첨탑으로 끌어올린 다음 재조립하여 근처 멕시코군을 포격하도록 지시했다.[9] 이러한 용기와 주도력으로 그는 대위로 임명되었다.[10] 1847년 9월 14일, 스콧의 군대는 멕시코시티로 진군했고, 멕시코는 광대한 영토(캘리포니아 포함)를 1848년 2월 2일 미국에 양도했다.[11]

전쟁 중 그랜트는 대담하고 유능한 군인으로서 훌륭한 기록을 세웠고, 군 경력을 고려하기 시작했다.[12] 그는 스콧과 테일러의 전술과 전략을 연구했고, 훗날 회고록에서 이를 통해 군사 지도력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썼다.[13] 그는 스콧을 존경했지만, 자신의 지도력 스타일은 테일러의 스타일과 동일시했다. 그랜트는 훗날 멕시코 전쟁이 도덕적으로 부당했고 영토 확장은 노예제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남북 전쟁이 미국이 멕시코에 대해 공격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다.[14]

역사가들은 전쟁 중 그랜트의 보급 담당관 경험이 중요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처음에는 그 직책을 꺼렸지만, 전기 작가 로널드 화이트에 따르면 군사 보급로, 운송 시스템 및 물류, 특히 "적대적인 영토에서 작전하는 대규모 기동 부대의 보급"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되었다.[15] 이를 통해 그랜트는 전쟁이 전장 너머의 요인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16]

3. 2. 전후 복무와 제대

미국-멕시코 전쟁 동안, 그랜트는 재커리 테일러윈필드 스콧 장군 휘하에서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 팔로알토 전투, 몬테레이 전투, 베라크루스 포위전 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몰리노 델 레이 전투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중위로 진급했고, 차풀테펙 전투 이후 대위로 명예 진급했다.[1]

1854년 7월 31일, 그랜트는 과음을 이유로 군대에서 퇴역했다.[1] 이후 7년간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세인트루이스에서 농장 경영과 부동산 중개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일리노이주 갈레나에서 아버지의 가죽 및 금속 제품점 경리 보조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

4. 남북 전쟁

준장 그랜트, 1861


미국 남북 전쟁은 1861년 4월 12일, 남부 동맹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1]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7만 5천 명의 자원병을 요청했고, 그랜트는 모병을 독려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애국심을 고취했다.[2]

그랜트는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승리를 이끈 위대한 사령관이었다.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링컨 대통령의 재선에도 기여했다.

남북 전쟁 발발 직후, 그랜트는 자원병들을 이끌고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갔다. 리처드 예이츠 주지사는 그랜트를 제21 일리노이 보병연대 연대장(대령)으로 임명했고, 이후 미주리주에서 철도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1861년 8월, 그랜트는 준장으로 승진, 존 C. 프레몬트 소장 휘하에서 미주리주 남동부 전선을 맡았다. 1862년 2월에는 헨리 요새 전투, 도넬슨 요새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부 전선 교통 요충지를 확보, 북군이 미시시피강을 통해 남부 연합을 분단하는 전략을 가능하게 했다. 이후 샤일로 전투에서 남군의 기습을 격퇴했다.

1863년 4월, 빅스버그 요새를 함락시켜 남부를 동서로 분단하고 북군의 공세를 완수했다. 이는 게티즈버그 전투 다음 날의 일이었다.

1864년 3월, 그랜트는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동부 전선을 지휘했다. 윌리엄 셔먼 장군은 서부 전선에서 애틀랜타를 거쳐 사바나로 진군하며 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켰다.

그랜트는 인구와 생산력 우위를 바탕으로 로버트 E. 리와 대결하며 리치먼드로 진격했다. 황무지 전투, 스팟실베이니아 전투, 콜드하버 전투 등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소모전과 우회 전략으로 피터즈버그를 포위, 남군의 전략적 고립을 이끌었다.

리는 피터즈버그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려 했으나, 아포마톡스 방면 작전에서 북군에 포위되어 아포매톡스 코트하우스에서 항복했다. 이로써 남북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그랜트는 전쟁 영웅이 되었다.

전후, 미국 연방 의회는 1866년 7월 25일 그랜트를 육군 대장(General of the army of the United States)으로 임명하여 그의 공을 치하했다.

4. 1. 서부 전선에서의 활약

1861년 4월 12일 남군섬터 요새에 발포하여 적대감이 고조된 직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7만 8천 명의 지원군을 요청했다. 갤리나에서 그랜트는 이 요청에 응하여 전쟁에 참전하고자 했다. 그는 지원군 보병 중대를 소집하고, 부대의 장 직책이 쇠퇴함에도 불구하고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부대를 이끌었다.

그곳에서 그랜트는 주지사를 만나 지원군 소집 직위를 제안받고 수락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장교 임무였고, 여러 번의 실패 후 주지사는 그랜트가 웨스트포인트 졸업생임을 인정하여 6월 17일 일리노이 21 연대의 대령으로 임명하였다.

미주리주에서 의견이 분열되자, 반대 세력들이 주에서 집결하기 시작했다. 사령관직을 맡은 직후, 그랜트의 연대는 미주리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도착 즉시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규율을 확립하는 데 집중했다. 8월 7일, 아직 적군과 교전하기 전이었지만, 그는 지원군 준장으로 임명되었다. 몇몇 작은 사령부에서 복무한 후, 그랜트는 미주리주 남동부의 중요한 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62년 2월, 그랜트는 테네시주에서 헨리 요새와 도널슨 요새를 점령하여 합중국에 전쟁의 첫 주요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는 요새 주둔군을 포로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도널슨 요새에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여 북부 주들을 열광시켰다.

4월 초, 그는 실로 전투에서 앨버트 시드니 존슨과 P.G.T. 보리거드 장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남군의 맹렬한 공격에 북군은 밀려났으나, 그랜트는 꾸준히 후퇴를 거부했다. 그는 굳은 결의로 전선을 안정시켰고, 다음 날 시기적절한 증원군의 도움으로 반격하여 심각한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실로 전투는 북군의 승리였지만, 2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그랜트의 전선 사령관 헨리 W. 홀럭은 그랜트가 기습과 전투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고 판단하여 불만을 품었다. 홀럭은 직접 장교직을 맡았고, 전략 기획에서 제외된 그랜트는 사임을 고려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이자 좋은 친구인 윌리엄 T. 셔먼의 설득으로 그와 함께 남았다. 홀럭이 북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하자, 그랜트는 서부 테네시주 육군 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되찾았다.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에서 미시시피강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에서, 그랜트는 일련의 작전을 지휘하고 1862년~63년 겨울 동안 늪지대에도 불구하고 접근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1863년 , 그랜트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고, 이어진 작전은 군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4. 2. 빅스버그 전역과 남부 분단

빅스버그 캠페인 중의 일부인 잭슨 전투 (1863년 5월 14일)


그랜트는 미시시피강 서쪽 언덕으로 자신의 군대를 이동시키고, 미국 해군 군함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넜다. 이 작전은 미국-멕시코 전쟁의 베라 크루스 전투 이후 미군 역사상 가장 큰 수륙양용 작전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노르망디 전투까지 그 기록을 유지했다. 그랜트는 군대를 내륙으로 이동시키면서 보급선 대부분을 끊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적진에서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랜트는 신속하게 움직여 존 C. 펨버턴 휘하의 남군이 전력을 집중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랜트 군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잭슨을 점령하고 빅스버그로 가는 철도를 끊었다.

남군이 더 이상 빅스버그 주둔지에 증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랜트는 서쪽으로 돌아와 챔피언힐 전투에서 승리했다. 패배한 남군은 빅스버그의 방어 시설 안으로 후퇴했고, 그랜트는 즉시 도시를 포위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그는 빅스버그 전투로 이어진 6주간의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1863년 7월 4일, 고립되고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었던 펨버턴은 그랜트에게 항복했다. 이는 남부에게 큰 타격이었고, 남군을 효과적으로 둘로 나누었다. 이 승리는 전날 게티스버그 전투에서의 북군 승리와 함께 남북 전쟁의 전환점으로 널리 여겨진다.

4. 3. 채터누가 전투와 북군 총사령관 임명

1863년 11월, 그랜트는 채터누가에서 남군을 패퇴시켜 서부에서 남군이 조직적인 반격을 할 능력을 거의 상실하게 만들었다.[3]

링컨 대통령은 수도 방위와 적 공략을 겸하는 포토맥 군 사령관을 얻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고민이었다. 사단장급에서는 뛰어난 전술가라도 사령관이 되면 곧바로 약점을 드러내는 장군이 많았다. 맥도웰(アービン・マクドウェル), 매클렐런(ジョージ・マクレラン), 후커(ジョセフ・フッカー), 번사이드(アンブローズ・バーンサイド), 할렉 등이 잇달아 기대를 저버렸고, 게티즈버그에서 리(ロバート・E・リー)를 격퇴한 미드(ジョージ・ミード)도 이 직책을 오래 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부에서 남군을 격파한 그랜트에게 백지가 돌아갔다.[3]

1864년 3월, 미드는 그대로 포토맥 군 사령관으로 남고, 그 상급 사령관 형태로 그랜트가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로 동부 전선의 지휘를 맡았다.[3]

4. 4. 총력전 전략과 남부 항복

그랜트의 전투 방식은 동료 장군이 "불독의 싸움"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끈질겼다. 기동성이 부족한 상대에 대한 전투의 명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랜트는 남군이 공격해 올 때 직접적인 공격이나 견고한 포위 공격을 명령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일단 공격이나 포위가 시작되면, 그랜트는 적군이 항복하거나 전투에서 물러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전술은 때때로 그랜트 부하들에게 큰 사상자를 초래했지만, 동시에 대체 불가능한 손실을 입은 남군을 소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랜트는 특히 1864년의 전략 때문에 "도살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전 지휘관들이 수년간 비슷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달성하지 못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1864년 3월, 그랜트는 윌리엄 셔먼 소장을 서부 전선 전체 군단들의 즉시 사령관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버지니아주로 본부를 옮겨 로버트 E. 리 장군의 부대를 격파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북군은 장기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 장군의 부대를 격파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랜트의 보조 목표는 버지니아주의 주도 리치먼드를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리 장군의 부대가 격파되면 리치먼드 점령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랜트는 여러 지휘관의 지휘 아래 남부 연합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공동 전략을 고안했다. 이 전략에는 리치먼드 근처에서 리를 상대하는 그랜트, 조지 미드, 벤저민 프랭클린 버틀러, 셰넌도어 계곡에서 프란츠 지겔, 조지아주를 침입하여 조지프 E. 존스턴을 물리치고 애틀랜타를 점령하는 셔먼,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철도 보급선을 공격하는 조지 크룩과 윌리엄 W. 애버렐, 그리고 앨라배마주 모빌을 점령하는 너새니얼 뱅크스가 포함되었다. 그랜트는 전쟁에서 이러한 공동 전략을 시도한 첫 번째 장군이었으며, 전쟁터에서의 전략적 승리만큼이나 적군의 경제적 기반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총력전의 개념을 이해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오벌랜드 작전은 남군을 꺾기 위해 북군이 필요로 했던 군사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위대한 사령관 로버트 E. 리와 그랜트가 맞붙는 서사시적인 대결이었다. 이 작전은 1864년 5월 4일 포토맥 군이 래피던 강을 건너 덤불과 "황무지"라고 알려진 이차적으로 자란 나무 지역으로 행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곳은 싸우기에 끔찍한 장소였지만, 리는 폐쇄적인 지형이 그랜트가 다수의 이점을 완전히 활용하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의 북버지니아 군대를 보냈다.

황무지 전투는 완고하고 를 흘리는 이틀간의 싸움이었다. 이 전투는 북군에게 불길한 시작이었다. 그랜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 작전을 이끌어 남군의 주요 전투 부대를 파괴해야 했다. 5월 7일 전투가 중단되면서 역사의 흐름이 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는 드문 순간 중 하나가 왔다. 리는 그랜트가 이전 포토맥 군 사령관들이 했던 것처럼 후퇴하도록 허용했다.

전쟁에서 역전된 군인들은 그랜트가 참모에게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반군에게 경고하기 위해 응원을 멈추라고 말할 때까지 무관심한 사령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작전은 계속되었지만, 그랜트의 움직임을 예상한 리는 5월 8일 전투가 다시 벌어진 버지니아주 스포칠베이니아로 그를 꺾었다. 스포칠베이니아 코트 하우스 전투는 14일 동안 계속되었다. 5월 11일 그랜트는 "만약 전투가 전부의 여름을 끈다면 나는 이 선을 따라 싸울 것을 제안한다."라는 유명한 급파를 썼다.

이 말은 전투에 대한 그의 태도를 요약했으며, 바로 다음 날인 5월 12일 리의 전선을 거의 무너뜨린 대규모 기습 공격을 명령했다.

북군 사상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전투의 역학은 그랜트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리의 대부분의 승리는 공격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놀라운 움직임과 격렬한 공격을 활용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방어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콜드 하버 전투에서 끔찍한 사상자를 낸 후에도 그랜트는 압박을 유지했다. 그는 리를 속이고 제임스강을 건너 군대를 이동시켰다.

버지니아주 피터스버그에 도착한 그랜트는 처음에 비접합 도시를 점령해야 했지만, 부하 윌리엄 F. "볼디" 스미스의 지나치게 신중한 행동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3일 동안 여러 차례 북군의 공격이 시도되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6월 18일 리의 베테랑들이 도착했다. 완전한 유인 참호와 마주한 그랜트는 포위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랜트는 막다름을 깨기 위해 앰브로스 번사이드 군단의 혁신적인 계획을 승인했다. 7월 30일 새벽 전에 그들은 남군의 업무 아래 광산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계획에서 공격을 이끌 아프리카계 미국인 군인들의 분열을 허용하는 데 미드와 그랜트의 싫음을 연루한 마지막 순간의 변화로 인해 공격은 제대로 조율되지 않았고 활력이 부족했다. 재편성할 기회를 얻은 남군은 상황을 이용하여 역습하여 크레이터 전투에서 승리했고, 연방 정부는 전쟁을 끝낼 기회를 잃었다.

여름이 지나면서 그랜트와 셔먼의 군대가 각각 버지니아주와 조지아주에 갇히면서 정치가 중심 무대에 올랐다. 가을에 대통령 선거가 열렸고, 북부 시민들은 전쟁 노력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링컨의 상황을 악화시키기 위해 리는 주벌 A. 얼리 소장 휘하의 소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그랜트가 병력을 분산시키도록 강요하려 했다. 얼리는 셰넌도어 계곡을 지나 북부를 점령하고 워싱턴 D. C. 교외에 도달했다. 도시를 점령할 수는 없었지만, 주민들을 위협하는 것만으로도 행정부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링컨의 재선 전망을 어둡게 만들었다.

9월 초, 그랜트의 공동 전략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먼저 셔먼이 애틀랜타를 점령했다. 그 후 그랜트는 필립 셰리든 장군을 셰넌도어 계곡으로 보내 얼리를 상대하게 했다. 이로써 북부인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고, 링컨은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11월 말, 셔먼은 "바다로의 행진"을 시작했다. 셰리든과 셔먼은 모두 계곡의 경제 시설과 조지아주 및 캐롤라이나의 넓은 지역을 파괴하며 그랜트의 총력전 전략을 따랐다.

그랜트에게 항복하는 로버트 E. 리 장군 (1865년 4월 9일)


1865년 4월 초, 그랜트의 끊임없는 압박으로 리는 결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를 포기해야 했다. 9일간의 후퇴 후, 리는 4월 9일 애포매톡스 코트 하우스에서 자신의 군대를 항복시켰다. 그랜트는 군대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전쟁 수행의 양측을 화해시키는 데 필요한 남부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한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6월 2일 트랜스미시시피 부에서 커비 스미스가 자신의 군대를 항복할 때까지 소수의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몇 주 안에 남북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남부의 최종 항복은 스탠드 웨이티 장군이 자신의 체로키족 군대를 북군의 중령 A. C. 매슈스에게 항복했을 때 인디언 준주에서 6월 23일에 일어났다. 마지막 남군 공격선 CSS 셰넌도어는 잉글랜드 리버풀에서 11월까지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리의 항복 직후, 그랜트는 자신의 위대한 옹호자 링컨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관을 드는 슬픈 영예를 안았다. 링컨은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후에도 "나는 이 장군을 포기할 수 없다. 그는 싸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율리시스 S. 그랜트의 본질을 완벽하게 포착한 두 문장의 묘사였다.

5. 대통령 재임 (1869-1877)

하와이 국왕 칼라카우아가 백악관을 방문하여 그랜트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그랜트 대통령 재임 기간(1869-1877)은 여러 스캔들로 얼룩졌지만,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다루었다. 특히 재건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미국 헌법 수정 제15조를 비준하여 흑인 투표권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해밀턴 피시 국무장관의 주도로 1871년 워싱턴 조약을 체결하여 앨라배마 청구를 포함한 미국과 영국 간의 갈등을 해결했다.[7] 이로써 영국과의 평화를 확보하고, 영국을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만들었다.[9] 1875년에는 하와이와 자유 무역 조약을 체결하여 하와이의 설탕 산업을 미국 경제권에 편입시켰다.[13]

1873년에는 1873년 주화법에 서명하여 사실상 금은 복본위제를 종식시키고 금본위제를 확립했다. 이 조치는 디플레이션을 야기하여 농민들의 부채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18] 같은 해 1873년 공황이 발생하여 경제가 침체되고 많은 철도 회사가 파산했다.[20]

1869년 그랜트 대통령 취임 당시, 25만 명이 넘는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370개의 조약에 따라 통치받고 있었다.[15] 그랜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명화와 기독교화를 추구하는 "평화 정책"을 추진했다.[15] 세네카족 출신 엘리 S. 파커를 인디언 사무국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인디언 위원회를 설립하여 인디언 정책의 개혁을 시도했다.[15] 그러나 이 정책은 마리아스 학살, 모독족과의 갈등, 대수우 전쟁 등 여러 사건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5. 1. 1868년 대통령 선거

그랜트의 대통령 취임식 (1869년 3월 4일)


그랜트는 군에서 퇴역한 후 1868년 5월 20일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택되었다. 그해 총선에서 그는 총 5,716,082표 중 3,012,833표(52.7%)를 얻어 승리했다.[18]

5. 2. 재건 정책과 흑인 민권 보호

그랜트 행정부는 미국 재무부의 샌본 사건, 법무장관 사이러스 I. 스코필드와의 문제 등 여러 스캔들로 어려움을 겪었다.[19] 가장 유명한 스캔들은 연방 정부 세금 3백만 달러 이상을 횡령한 위스키 링 사건이었다.[19] 대통령 비서 오빌 E. 배브콕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되었으나, 그랜트의 대통령 사면으로 풀려났다.[19] 위스키 링 사건 이후, 또 다른 연방 수사에서 그랜트의 전쟁 장관 윌리엄 W. 벨크냅이 아메리카 인디언 교역소 판매 대가로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19]

그랜트 자신이 부하들의 부패로부터 이익을 얻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그는 범죄자들에게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유죄가 확정된 후에도 미온적으로 대처했다.[19] 그의 약점은 부하를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19] 그는 당 지도자들의 추천을 듣기보다 친구와 정치적 기부자들에게 많은 직위를 주어 당을 소외시켰다.[19] 적절한 정치적 동맹을 맺지 못한 것이 통제 불능의 스캔들을 야기한 주요 원인이었다.[19]

이러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랜트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중요한 사건들을 처리했다.[19]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재건의 지속적인 진행이었다.[19] 그랜트는 남부에 주둔한 연방군을 제한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지지했다.[19] 그는 남부 흑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쿠 클럭스 클랜의 폭력적인 전술을 억압하기에 충분한 군대를 허용했지만, 많은 이들이 의심을 품었다.[19] 1869년1871년에 그랜트는 투표권을 보장하고 클랜 지도자들을 처벌하는 법안에 서명했다.[19] 투표권을 확립한 미국 헌법 수정 제15조는 1870년 그의 첫 임기 동안 비준되었다.[19]

5. 3. 경제 정책과 1873년 공황

그랜트는 1868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1869년 3월 4일부터 1877년 3월 3일까지 미국의 18대 대통령을 지냈다. 취임 직후, 그는 전쟁 이전의 통화 기준으로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보수적인 조치를 취했다.[1] 전쟁 중 의회는 미국 재무부에 금이나 은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지폐인 "그린백(Demand Note)"을 발행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린백은 전쟁 채무를 지불하는 데 필요했지만,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금본위제 통화를 유통에서 몰아냈다.[2] 1869년 3월 18일, 그랜트는 채권 보유자들에게 "금화 또는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상환을 보장하는 1869년 공공 신용법(Public Credit Act of 1869)에 서명했다. 이 법은 정부가 10년 이내에 금본위제로 완전히 복귀할 것을 약속했다.[3] 이는 "경화, 경제 및 국가 부채의 점진적 감소" 정책을 따른 것이었다. 그랜트는 경제에 대한 생각이 단순했고, 사업가들의 조언에 의존했다.[4]

검은 금요일의 금값 폭락을 보여주는 뉴욕시 골드룸의 칠판 사진.


1869년 4월, 철도 거물 제이 굴드와 짐 피스크는 뉴욕의 금 시장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5] 그들은 에리 철도를 장악하고 있었고, 높은 금값은 에리 철도의 노선을 통해 동쪽으로 수출되는 농산물을 구매하는 외국 농업 구매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6] 그러나 조지 S. 보트웰 재무부의 격주 금 매각 정책은 금값을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했다.[7] 보트웰을 매수할 수 없었던 음모자들은 그랜트의 처남인 아벨 코빈과 관계를 맺고 그랜트에게 접근했다.[8] 굴드는 재무부의 내부 정보를 얻기 위해 보조 재무관 대니얼 버터필드에게 뇌물을 제공했다.[9]

7월, 그랜트는 재무부 금 매각량을 월 200만달러로 줄였다.[10] 피스크는 그랜트에게 그의 금 매각 정책이 국가를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11] 9월까지 재정에 대해 무지했던 그랜트는 낮은 금값이 농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고, 9월의 금 매각량은 감소되지 않았다.[12] 9월 23일, 금값이 143 1/8에 달했을 때, 보트웰은 백악관으로 달려가 그랜트와 이야기했다.[13] 검은 금요일로 알려진 9월 24일, 그랜트는 보트웰에게 금을 매각하라고 명령했고, 보트웰은 버터필드에게 400만달러 상당의 금을 매각하라고 전보를 보냈다.[14] 굴드의 골드룸에서 강세장이 붕괴되었고, 금값은 160에서 133 1/3로 폭락했으며, 약세장 공황이 발생했고, 굴드와 피스크는 도망쳤으며, 경제적 피해는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다.[15] 1870년 1월까지 경제는 전후 회복세를 재개했다.[16]

그랜트는 1873년 주화법에 서명하여 사실상 금은 복본위제의 법적 근거를 종식시켰다.[17] 주화법은 표준 은화 달러를 중단하고 금화 달러를 통화 기준으로 설정했는데, 금 공급이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농민들이 받는 가격을 인상하기 위해 유통되는 화폐량을 늘리기를 원했던 은본위제 지지자들은 이 조치를 "1873년의 범죄"라고 비난하며,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농민들의 부채 부담이 가중되었다고 주장했다.[18]

그랜트가 1874년 "인플레이션 법안"을 거부한 것에 대해 축하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만화.


그랜트의 두 번째 임기 동안 경제적 혼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1873년 9월, 뉴욕의 증권 회사인 제이 쿡 & 컴퍼니는 노던 퍼시픽 철도가 발행한 채권을 모두 판매하지 못하고 파산했다. 철도 주식과 채권을 소유했던 다른 은행과 증권 회사들도 파산했다.[19] 재정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던 그랜트는 뉴욕으로 가서 주요 사업가들과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상담했는데, 이 위기는 1873년 공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0] 그랜트는 1869년 골드 링(Gold Ring) 붕괴와 마찬가지로 이 공황도 단순한 경제적 변동이라고 생각했다.[21] 그는 재무부에 1000만달러의 국채를 매입하도록 지시했고, 이로 인해 공황은 진정되었지만 장기 불황이 전국을 휩쓸었다.[22] 전국의 364개 철도 중 89개가 파산했다.[23]

1874년,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의회는 토마스 W. 페리 법안을 통과시켰다.[24] 많은 농민과 노동자들은 이 법안을 지지했는데, 이 법안은 그린백 6400만달러를 유통에 추가했을 것이지만, 일부 동부 은행가들은 달러 가치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25] 윌리엄 워스 벨납, 조지 헨리 윌리엄스, 콜럼버스 델라노는 그랜트에게 거부권 행사가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에 피해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랜트는 이 법안이 국가 신용을 파괴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랜트의 거부권 행사는 그를 공화당 보수파에 위치하게 했고, 금본위 달러에 대한 당의 약속을 시작하게 했다.[26] 그랜트는 나중에 유통되는 그린백을 점진적으로 줄여 달러를 강화하는 법안을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1874년 선거 이후 민주당이 하원에서 다수당이 되자, 권한 대행 공화당 의회는 민주당이 취임하기 전에 그렇게 했다.[27] 1875년 1월 14일, 그랜트는 금본위제 회복법에 서명했는데, 이 법은 유통되는 그린백의 감소를 요구했고 1879년 1월 1일부터 금으로 상환될 것이라고 선언했다.[28]

5. 4. 외교 정책

해밀턴 피시 국무장관이 주도한 그랜트 행정부의 주요 외교 성과는 1871년 워싱턴 조약 체결이었다. 이 조약은 앨라배마 청구를 포함하여 미국과 영국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7] 찰스 서머를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은 영국이 남북 전쟁 중 남부 연합에 무기를 제공하여 전쟁을 장기화시켰다고 주장하며 강경한 배상을 요구했다.[8] 그러나 피시와 조지 부틀웰 재무장관은 영국과의 평화적 관계가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그랜트를 설득했고, 양국은 협상에 합의했다.

그랜트는 쿠바 독립 운동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협상을 보호했다. 이는 영국이 남부 연합에 교전권을 부여한 것에 대한 미국의 반대와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워싱턴 위원회는 국제 중재 재판소가 피해 금액을 결정하는 조약을 작성했고, 영국은 유감을 표명했다. 서머와 칼 슈르츠 등 그랜트 비판자들을 포함한 상원은 어업권과 해상 경계 분쟁을 해결한 워싱턴 조약을 승인했다. 앨라배마 청구 해결은 영국과의 평화를 확보한 그랜트의 가장 성공적인 외교 업적이었다. 앨라배마 청구 해결(1,550만 달러)은 불안정한 영국-미국 관계를 해결하고 영국을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으로 만들었다.[9]

수염 난 남성의 정식 사진 초상화
국무장관 해밀턴 피시와 그랜트는 조약과 중재를 통해 앨라바마 청구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1869년, 그랜트는 도미니카 공화국(당시 산토 도밍고) 합병을 추진했다. 그는 합병이 미국의 천연자원을 늘리고, 몬로 독트린을 강화하며, 미 해군의 보호를 강화하고, 영국의 방해를 막고, 미래의 해상 운하를 보호하며, 쿠바와 브라질의 노예 제도를 종식시키고, 미국의 흑인들에게 "쿠 클럭스 클랜의 범죄"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부에나벤투라 바에스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을 대리하는 미국의 투기꾼 조셉 W. 파벤스는 피시 장관에게 합병을 제안했다. 그랜트는 군사 보좌관 오빌 E. 배복을 파견하여 섬의 자원, 현지 상황, 바에스의 합병 조건을 평가하게 했지만, 외교적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배복이 허가받지 않은 합병 조약을 가지고 돌아오자, 그랜트는 내각에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랜트는 피시에게 정식 조약을 작성하도록 명령했고, 배복이 섬나라로 돌아가면서 바에스에게 보냈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150만달러에 합병되고, 사마나 만은 200만달러에 임대 구매될 예정이었다. D.B. 새킷과 러퍼스 잉골스 장군이 배복과 동행했다. 11월 29일, 바에스 대통령은 조약에 서명했다. 12월 21일, 조약은 그랜트와 그의 내각에 제출되었다.

산토 도밍고 시; 제임스 E. 테일러의 수채화, 1871년


그러나 찰스 서머 상원의원이 합병 계획에 반대했다. 그랜트는 서머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지만, 서머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는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이 서로 달랐다. 1870년 1월 10일, 그랜트는 상원 외교 관계 위원회에 비준을 위해 조약을 제출했지만, 서머는 법안을 보류했다. 그랜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머의 위원회는 조치를 취했지만 5대 2로 법안을 부결했다. 서머는 합병에 반대했고, 상원 비공개 회의에서 도미니카인들을 "격렬하고 배신적인 종족"이라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서머는 전체 상원 투표를 위해 조약을 보냈고, 그랜트는 다른 상원의원들에게 직접 로비를 했다. 그랜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원은 조약을 부결했다.

그랜트는 격분했고, 1870년 7월 1일, 서머의 친구이자 동맹인 영국 주재 미국 대사 존 로스롭 모틀리를 해임했다. 1871년 1월, 그랜트는 합병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 파견에 대한 공동 결의안에 서명했다. 그는 프레더릭 더글러스를 위원회 서기로 임명하는 등 세 명의 중립적인 인물을 선택하여 서머로부터 도덕적 우위를 점했다. 위원회가 결과를 승인했지만, 상원은 여전히 ​​반대하여 그랜트는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해야 했다. 보복을 추구하며 1871년 3월, 그랜트는 서머를 그의 강력한 상원 의장직에서 축출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산토 도밍고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그랜트의 외교 정책을 압도했다. 비평가들은 그랜트가 그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군인들에게 의존한 것을 비난했다.

그랜트 행정부 시절 미국의 정책은 쿠바에서 벌어진 10년 전쟁(1868~1878)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피시와 서머의 권고에 따라 그랜트는 반군을 승인하지 않고, 사실상 스페인 식민 통치를 묵인하면서 쿠바에서 노예 제도 폐지를 촉구했다.[12] 이는 미국 상업을 보호하고 스페인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1873년 10월, 스페인 순양함이 미국 국기를 게양한 상선 버지니아스호(''Virginius'')를 나포하면서 불안정한 정책은 깨졌다. 버지니아스호는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한 물자와 인원을 싣고 있었다. 스페인 당국은 이들을 해적으로 간주하고 8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53명의 포로를 재판 없이 처형했다. 미국인 선장 조셉 프라이와 그의 승무원들은 처형되었고 시체는 훼손되었다. 분노한 미국인들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요구했다. 그랜트는 미국 해군 함대에 쿠바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27일, 피시는 외교적 해결책을 마련하여 스페인 대통령 에밀리오 카스텔라르 이 리폴(Emilio Castelar y Ripoll)이 유감을 표명하고 버지니아스호와 생존자들을 넘겨주도록 했다. 스페인은 처형된 미국인들의 유족들에게 8만달러를 지급했다.

영접 행렬
1874년, 칼라카우아 하와이 국왕이 미국을 국빈 방문 중 백악관에서 그랜트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그랜트와 피시는 1875년에 하와이와 자유 무역 조약을 체결하여 하와이의 설탕 산업을 미국 경제권에 편입시켰다. 칼라카우아 국왕은 91일간의 국빈 방문을 했는데, 이는 재위 중인 군주가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사례였다.[13] 미국산 쌀과 설탕 생산자를 보호하려는 남부 민주당과 이 조약을 섬 병합 시도로 보고 하와이인들을 "열등한" 종족이라고 언급한 민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을 이행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 조약은 1876년 9월부터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 및 기타 상품에 대한 미국 시장 접근을 자유롭게 허용했다. 미국은 나중에 진주만 해군 기지가 될 푸오키나우 로아 지역의 토지를 확보했다. 이 조약은 미국인들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대한 대규모 투자로 이어졌다.[14]

그랜트는 외교 정책 경험이 제한적이었기에 해밀턴 피시 국무장관에게 크게 의존했다. 그랜트와 피시는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다. 그랜트 외에 외교 문제의 주요 인물은 피시와 상원 외교 관계 위원회 위원장 찰스 서머였다. 그랜트를 싫어했던 서머는 알래스카 매입을 전적으로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산토 도밍고 합병 계획에 반대했다.

그랜트는 해외 미국 이익을 보호하려는 확장주의적 충동을 가지고 있었고 몬로 독트린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예를 들어, 1872년 토마스 프리아스가 볼리비아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랜트는 볼리비아와 미국 간의 좋은 관계 유지를 강조했다.[6] 그는 외교 정책에 이상주의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랜트는 루마니아의 유대인 박해에 대응하여 유대인 변호사 벤자민 F. 페이크소토를 미국 영사부쿠레슈티에 임명했다. 그랜트는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인권 존중이 최우선 의무"라고 말했다.

5. 5. 인디언 정책

앉아 있는 콧수염을 기른 남성의 정식 사진 초상화
아메리카 원주민 최초의 인디언 사무국 위원장으로 그랜트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세네카족인 엘리 새뮤얼 파커


1869년 그랜트 대통령 취임 당시, 25만 명이 넘는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370개의 조약에 따라 통치받고 있었다.[15] 그랜트는 "창조주"가 인류의 여러 종족을 지구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파괴하기 위해 놓은 것이 아니라고 믿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의 관습, 관행 및 언어를 채택하고 민주 정부를 받아들여 결국 시민이 되기를 바라는 동화주의자였다.[15] 1869년 취임식에서 그랜트는 "나는 그들의 문명화, 기독교화 및 궁극적인 시민권으로 이어지는 그들에 대한 어떤 방침도 지지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5] 그는 전시 참모였던 세네카족 출신 엘리 S. 파커를 인디언 사무국 위원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이 직책을 역임한 최초의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다.[15]

1869년 4월, 그랜트는 부패를 줄이고 그의 "평화" 정책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무보수 인디언 위원회를 설립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 정책은 아메리카 원주민 대리인으로 일하는 기업가들을 선교사들로 대체하고, 보호구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보호하며 농업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870년, 마리아스 학살로 인해 그랜트의 정책은 좌절을 겪고 여론의 분노를 일으켰다. 1871년, 그랜트는 주권 부족 조약 제도를 종식시키고, 개별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연방 정부의 피보호자로 간주했다. 그랜트의 정책은 1871년 파커의 사임, 종교 대리인들 사이의 종파 간 갈등, 그리고 뿌리 깊은 경제적 이익에 의해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랜트의 첫 번째 임기 동안 인디언 전쟁은 전반적으로 감소했으며, 1872년 10월 1일,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소장은 아파치 지도자 코치스와 평화 협상을 맺었다. 그러나 1872년 12월 28일, 조지 크룩 장군과 제5기병대가 애리조나주 스켈레톤 동굴에서 약 75명의 야바파이 아파치 인디언들을 학살하면서 또 다른 좌절이 발생했다.[16]

1873년 4월 11일, 에드워드 캔비 소장이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모독족 지도자 킨트푸아시에게 살해당했다. 그랜트는 자제를 명령했고, 군대는 킨트푸아시와 그의 추종자들을 체포하여 캔비 살인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10월 3일에 교수형에 처했으며, 나머지 모독족은 인디언 준주로 이주했다. 이 사건은 인디언 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1874년, 군대는 팔로 두로 협곡 전투에서 코만체족을 물리쳐 1875년 포트 실 보호구역에 정착하도록 강요했다. 그랜트는 1874년 들소를 보호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대신 내무장관 콜럼버스 델라노를 지지했는데, 그는 들소를 죽이는 것이 대평원 인디언들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1875년 4월, 미국 군대가 캔자스에서 27명의 체예네족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7]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고 명분론에 따라 백인 정착민들이 수우족 보호 구역을 침범하자, 레드 클라우드는 1875년 5월 26일 협상에 참여했지만, 다른 수우족 추장들은 전쟁을 준비했다. 그랜트는 수우족 지도자들에게 "백인들이 블랙힐스로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고"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고 영어를 말하며 "백인들의 삶을 준비"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


1875년 11월 3일, 셰리던의 조언에 따라 그랜트는 광부들을 블랙힐스에서 제외하는 것을 시행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수우족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셰리던은 그랜트에게 미국 군대의 병력이 부족하고 관련 지역이 광대하여 많은 병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수우 전쟁 동안 앉은 황소가 기관 토지로 이주하는 것을 거부한 후, 크레이지 호스가 이끄는 전사들은 조지 아머스트 커스터와 그의 부하들을 리틀 빅혼 전투에서 학살했다. 분노한 백인 정착민들은 보복을 요구했고, 그랜트는 언론에서 커스터를 비난하며 "나는 커스터의 학살을 커스터 자신이 초래한, 전적으로 불필요한 병력 희생으로 간주합니다."라고 말했다. 1876년 9월과 10월, 그랜트는 부족들이 블랙힐스를 포기하도록 설득했고, 의회는 그랜트가 1877년에 퇴임하기 3일 전에 이 합의를 비준했다.

그랜트의 평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200회가 넘는 전투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벌어졌다.

6. 퇴임 이후

1885년 6월 사망하기 한 달 전에 자신의 회고록을 쓰고 있는 그랜트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대통령 퇴임 후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하며, 부인과 함께 딸 넬리의 출산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이후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갈레나 등지를 여행했지만 정착하지는 못했다.

퇴임 후 그랜트는 세계 여행, 정계 복귀 시도, 사업 실패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시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부, 부동산 중개인, 가죽 가게 보조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빚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헌신적인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시계를 팔아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기도 했다.

1881년, 그랜트는 아들의 제안으로 퍼디낸드 워드와 투자 회사를 설립하고 전 재산을 투자했으나, 1884년 워드의 사기로 파산하고 두경부암 진단까지 받으며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크 트웨인의 권유로 회고록 집필을 시작, 센추리 잡지의 제안을 거절하고 트웨인의 파격적인 조건을 수락했다.

그랜트 부부의 붉은 화강암 사르코파구스


죽음을 앞두고 고통과 싸우며 회고록을 완성, 사망 직전에 출간된 회고록은 30만 부 이상 판매되며 가족에게 450000USD를 안겨주었다. 트웨인은 이 회고록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회고록 이래 동종 최고의 작품"이라 칭송했으며, 현재까지도 최고의 회고록 중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1885년 7월 23일 목요일 아침 8시 6분, 그랜트는 뉴욕주 새러토가군 마운트맥그레거에서 63세의 나이에 후두암으로 사망, 뉴욕 그랜트 묘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랜트의 초상화는 50달러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

6. 1. 세계 여행

자신의 두 번째 임기 기간에 이어 그랜트와 줄리아 여사는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2년을 보냈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을 방문한 첫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랜트의 명성은 빅토리아 여왕, 영국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 독일 제국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벨기에레오폴 2세, 러시아알렉산드르 2세로부터 개인적인 초청을 받았다. 그랜트는 1879년 7월 일본 천황에게 따뜻하게 환영받았고, 일본 왕실 역사상 엄격히 금지되었던 천황과의 악수를 하였다.[33]

도쿄의 시바코엔 역 지구에는 그랜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심은 나무가 아직도 자라고 있다. 1879년 일본의 메이지 천황 정부는 류큐 제도의 병합을 공고하였다. 청나라는 항의하였고 그랜트는 이 문제를 중재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는 일본이 섬들에 대해 더 강력한 주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에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J. S. 켐프가 1879년에 그린 그랜트의 세계 순방 지도


네바다주 광산 회사 투자금을 청산하여 얻은 2.5만달러(1877년 기준)를 사용하여, 그랜트 부부는 약 2년 반 동안 세계 순방을 떠났다.[34] 5월 16일, 그랜트와 그의 아내는 SS ''인디애나''호를 타고 영국으로 떠났다.[35] 순방 중에 그랜트 부부는 유럽, 아프리카, 인도, 중동극동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여왕, 알렉산드르 2세, 레오 13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리홍장, 메이지 천황 등 저명한 인사들을 만났다.[36]

러더퍼드 B. 헤이즈 행정부의 지원으로, 그랜트의 순방단은 미 해군 함선 3척을 이용한 연방 차원의 수송 지원을 받았다. 지중해에서 5개월간 순방을 한 USS ''반달리아''호, 홍콩에서 중국으로 이동할 때 이용한 USS ''애슈얼럿''호, 그리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이동할 때 이용한 USS ''리치먼드''호가 그것이다.[37] 헤이즈 행정부는 그랜트가 순방 기간 동안 비공식적인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고 해외에서 미국의 이익을 강화하도록 장려했다.[38] 향수병을 느낀 그랜트 부부는 SS ''시티 오브 도쿄''호를 타고 일본을 떠나 1879년 9월 20일 환호하는 군중의 환영 속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랜트의 순방은 유럽과 아시아에 미국이 부상하는 세계 강국임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대통령 임기 종료 후, 그랜트는 2년간 세계를 여행했다. 첫 방문지는 1877년 영국이었다. 1879년 5월 28일에는 톈진에 도착하여 6월 12일에는 류큐 처분 문제를 놓고 리홍장과 회담했다. 같은 해 7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국빈으로 일본에 체류하며 요코하마 항에 입항했고, 8월 20일에는 하마리큐 정원에서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여 환대를 받았다. 그랜트는 미국 대통령 출신으로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랜트 전 대통령 부부는 체류 중이던 8월 25일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환영식에 참석하여, 부인 줄리아와 함께 방일 기념으로 편백나무를 심었다. 조조지에서는 소나무를 심었다. 또한 닛코 도쇼구를 방문했을 때에는 천황만 건널 수 있는 다리를 특별히 건너도록 허락받았으나, 이를 사양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6. 2. 정계 복귀 시도

1880년 그랜트는 정치 복귀를 시도하여 다시 한번 공화당 후보 지명을 노렸다. 그러나 그해 188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제임스 A. 가필드가 후보로 선출되면서 실패했다.[20] 그랜트는 스톨워츠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그랜트의 부활한 인기를 기회로 보고 1880년 대통령 후보로 그를 지명하려고 했다. 반대자들은 조지 워싱턴 이후 비공식적으로 사용되어 온 2임기 제한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전당대회에서 그랜트에게 맹세한 대의원이 다른 어떤 후보보다 많았지만 과반수 표에는 미달했다. 36차례의 투표 끝에, 블레인의 대의원들은 다른 후보들의 대의원들과 합쳐 타협 후보인 제임스 A. 가필드를 지명했다. 절차적 동의안으로 가필드에 대한 표결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그랜트는 가필드를 위해 연설했지만, 그와 함께 복무했던 장군인 민주당 후보 윈필드 스콧 핸콕을 비판하는 것은 거부했다. 가필드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랜트는 가필드에게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하고 그에게 스톨워츠를 행정부에 포함시킬 것을 압력을 가했다. 1881년 7월 2일, 가필드는 암살자에게 총을 맞았고 9월 19일에 사망했다. 기자로부터 가필드의 죽음을 알게 된 그랜트는 울었다.

6. 3. 사업 실패와 회고록 집필

시민 생활 7년 동안 그랜트는 농부, 세인트루이스부동산 중개인, 일리노이주 갤리나에서 부친과 동생이 소유한 가죽 가게 보조인 등 다양한 직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빚에 시달렸지만, 헌신적인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남았다. 그는 가족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려고 자신의 시계를 팔기도 했다.[21]

1880년 그랜트는 정치 복귀를 시도하며 공화당 후보 지명을 다시 노렸으나, 그해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제임스 A. 가필드가 후보로 선출되면서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21]

1881년 그랜트는 월스트리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던 아들 벅(율리시스 2세)의 제안으로 퍼디낸드 워드와 투자 은행 파트너십을 맺고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투자했다. 워드는 "협력 금융의 어린 나폴레옹"으로 불렸으며, 그랜트는 또 다른 "어린 나폴레옹" 조지 B. 매클렐런 장군이 있었기에 이 명칭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워드는 1884년 그랜트를 속이고 '그랜트 앤드 워드' 회사를 파산시킨 후 도주했다. 이와 동시에 그랜트는 자신이 두경부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와 그의 가족은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다.[21]

워드의 배신은 역설적이게도 후손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랜트의 회고록은 문체와 역사적 내용 모두에서 걸작으로 평가받았는데, 그랜트는 파산 전까지 회고록 집필을 완강히 거부했다. 가족의 미래 재정적 독립에 대한 의구심만이 그가 글을 쓰도록 설득했다.[21]

그는 처음에 센추리 잡지를 위해 호평받은 두 개의 기사를 썼다. 이후 센추리 잡지 발행인들은 그에게 회고록 집필을 제안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신인 작가들에게 표준 계약을 제시했다. 잡지 발행인들과 별개로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이 그랜트에게 접근했다. 발행인들의 정통성에 의문을 품은 트웨인은 잡지의 제안에 경멸을 표하며, 그랜트에게 책 판매 수익의 75%를 저작권료로 주는 파격적인 계약을 제안했다. 그랜트는 트웨인의 제안을 수락했다.[21]

시한부 জীবনের 투병 중인 그랜트는 회고록을 완성하기 위해 분투했다. 고통에 시달리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망하기 불과 며칠 전에 회고록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회고록은 3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성공을 거두었고, 그랜트의 가족에게 450000USD를 벌어다 주었다. 트웨인은 회고록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회고록 이래 동종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송했으며, 회고록은 지금까지 쓰인 최고의 회고록 중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21]

7. 유산과 평가

그랜트는 북부에서 "연방을 구원한" 장군으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군사적 명성은 대체로 잘 유지되어 왔다. 빅스버그에서의 승리와 애포매톡스에서의 항복으로 큰 명성을 얻은 그랜트는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군과 남군을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장군이었다.[24] 그는 남부에서 과도한 무력 사용으로 비판을 받았으며,[25] 그의 음주는 언론에 의해 과장되고 경쟁자와 비평가들에 의해 고정관념화되곤 했다.[26] 역사가들은 또한 그랜트가 부패를 막는 데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해 논쟁한다.[27] 그의 행정부 시절의 스캔들은 그의 정치적 명성에 오명을 남겼다.[28]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그랜트의 명성은 "패배자 신화" 운동과 더닝 학파에 의해 손상되었다.[29] 그랜트에 대한 견해는 그가 실패한 대통령이자 운이 좋은, 설령 서투른 장군으로 여겨짐에 따라 최저 수준에 도달했다.[30] 1950년대에 일부 역사가들은 그랜트의 군사 경력을 재평가하여 무력으로 승리한 자라는 분석에서 능숙한 현대적 전략가이자 지휘관이라는 분석으로 전환했다.[31] 역사가 윌리엄 S. 맥필리의 전기, ''그랜트''(1981)는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그랜트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켰다. 맥필리는 그랜트가 19세기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려고" 노력한 "평범한 미국인"이라고 믿었다.[32] 21세기에 역사가 진 에드워드 스미스의 ''그랜트''(2001) 출판 이후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랜트의 명성이 현저하게 향상되었다.[33] 그랜트 대통령직에 대한 견해는 그랜트의 개인적 청렴성, 재건 노력, 그리고 인디언에 대한 평화 정책에 대한 더 나은 평가를 보여준다. 비록 그것들이 부족했을지라도.[34] H. W. 브랜즈의 ''연방을 구원한 사람''(2012), 로널드 C. 화이트의 ''아메리칸 율리시스''(2016), 그리고 론 체르노의 ''그랜트''(2017)는 그랜트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35] 화이트는 그랜트가 "독특한 겸손함, 도덕적 용기, 그리고 결단력을 보여주었다"고 말했고, 대통령으로서 그는 "특히 쿠 클럭스 클랜이 자행한 유권자 억압에 맞서 싸우면서 흑인들을 위해 옹호했다"고 말했다.[36] 화이트는 그랜트가 "뛰어난 인물이자 지도자"라고 믿었다.[37] 역사가 로버트 퍼리는 "리 장군 숭배"와 더닝 학파의 그랜트에 대한 적개심(리 장군의 패배와 재건의 강력한 시행)이 역사가들에 의한 그랜트의 부당한 처우로 이어졌다고 썼다.[38]

2021년 C-SPAN 설문조사 최악에서 최고까지 대통령 순위 매기기에서 그랜트는 44명의 대통령 중 20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2017년 33위에서 상승한 것이다.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이미지와 유산이 재평가되었고, 그랜트가 이제 "그의 주장되는 부패에 대한 비난보다 재건과 그의 외교에 대한 더 많은 공로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8. 한국과의 관계

1871년, 미국은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과 무역을 개방하고, 1866년 대동강에서 실종된 미국 상선 SS ''General Sherman''호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에 원정대를 파견했다.[10] 그랜트 대통령은 중국 주재 미국 대사인 프레더릭 로우가 이끄는 외교 사절단을 지원하기 위해 존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군함 5척과 1,200명 이상의 병력으로 구성된 해상 및 육상 병력을 파견했다.[10]

6월 1일, 미군 함선들은 한강강화해협에 진입했다. 외국 함선의 강 진입이 금지되었기에 해안에 주둔하던 조선 수비대는 함선에 사격을 가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로저스 제독은 사과와 조약 협상 개시를 요구했지만, 조선 정부는 거부했다. 6월 10일, 로저스 제독은 여러 조선 요새를 파괴했고, 그 결과 강화도 전투가 벌어져 조선군 250명이 사망하고 미국군 3명이 전사했다. 이 원정은 무역 개방에 실패했고, 오히려 조선의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결과만 가져왔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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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Republican Party Platform of 1868 https://www.presiden[...] 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Barb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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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뉴스 TimesMachine: Sunday March 1, 1885 - NYTimes.com https://times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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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現代に生きる故事ことわざ辞典 旺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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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웹사이트 The height differences between all the US presidents and first ladies https://www.business[...]
[37] 뉴스 The only other arrest of a U.S. president involved a speeding horse.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38] 간행물 생전에 받은 계급은 General of the Army가 맞는데, 1866년 당시에는 별4개로 대장이었습니다. General of the Army 계급이 별5개 원수가 된 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입니다. 2022년 12월 22일 제정된 NDAA 2023에 따라 최종 계급은 대원수로 추서되었습니다. 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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