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슈바벤계 분가로, 1576년 촐레른 백작령 분할에 따라 설립된 공국이다. 1191년 촐레른 백작 프리드리히 3세의 영토 분할로 프랑켄계와 슈바벤계로 나뉘었고, 슈바벤계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호엔촐레른헤힝겐 공국을 통치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은 신성 로마 제국 봉토로 시작하여, 1806년 제국 해체 후 독립 왕국이 되었다. 1848년 혁명 이후 프로이센에 병합되었고, 마지막 공작 카를 안톤의 차남 카롤 1세는 루마니아 국왕이 되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은 독일과 루마니아에서 군주로 통치했으며, 독일 지역과 루마니아 왕국에서 각기 다른 문장을 사용했다.

2. 역사

1576년 촐레른 백작령이 분할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인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백작령이 설립되었다. 호엔촐레른의 마지막 백작 카를 1세가 사망하면서 영토는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름비고
아이텔 프리드리히 4세호엔촐레른-헤힝겐
카를 2세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크리스토프호엔촐레른-하이거로흐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후 1815년에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은 주권 국가가 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립 왕국이 되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슈바벤 분가는 다음 영토를 통치했다.

영토연도
촐레른 백국1061년
뉘른베르크 변경백1192년
페링겐 백국1535년
하이거로흐 영주령1634년
베어슈타인 영주령1634년
베르흐 백국1781년



1061년부터 1806년까지 이 봉토들 중 5개(뉘른베르크 제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 아래 제국 직속령인 촐레른 백작령을 구성했다.

1806년부터 1813년까지 호엔촐레른 영지는 나폴레옹 1세 보나파르트가 세운 단명 국가인 라인 동맹왕국이었다. 1815년부터 1849년까지 공국은 주권 국가였으며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다. 1849년 독립을 잃고 프로이센 왕국에 호엔촐레른 주로 편입되었다.

독일 연방1866년 북독일 연방으로 대체되었고, 북독일 연방은 1871년 독일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1918년 프로이센 왕국은 프로이센 자유국이 되었고, 독일 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1933년 공화국은 제3제국으로 대체되었다. 나치의 패배 이후 호엔촐레른 주는 다른 영토와 합병되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주가 되었다. 이 주는 1952년까지 연합군 점령 독일의 일부였다. 그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주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 중 하나인 바덴-뷔르템베르크로 합병되었다.

카를 프리드리히, 호엔촐레른 공


카를 프리드리히, 호엔촐레른 공이 현재 호엔촐레른 공 슈바벤 가문의 수장이다.

현대 루마니아1859년 몰다비아왈라키아 공국이 알렉산드루 이온 쿠자 공작 아래에서 연합하여 형성되었다. 1866년 알렉산드루 이온 쿠자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카를 아이트로 교체되었으며, 그는 루마니아의 카롤 1세 공작으로 즉위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인 독립 봉신이었던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 군 사령관이 루마니아의 지원을 요청한 후, 카롤은 플레브나를 포위하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조건으로 전쟁 참전을 수락했다. 루마니아 독립 전쟁1878년에 종료된 후, 베를린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열강에 의해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루마니아는 크림 전쟁 이후 몰다비아가 되찾았던 세 개의 남부 베사라비아 지구를 러시아 제국에 반환하는 대가로 도브루자를 얻었다.

루마니아의 영토 변천

2. 1. 슈바벤계 호엔촐레른 가문

1191년 촐레른의 백작 프리드리히 3세가 프랑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 후, 그의 영지는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이로써 호엔촐레른가는 프랑켄계(프로이센 왕가)와 본가인 슈바벤계(지크마링겐 가)로 나뉘게 되었다.

1415년 콘라트의 후손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충성하고 오스만 제국을 격파한 공으로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위를 획득하고, 1871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제국 황제도 겸하였다.

반면 슈바벤계는 독일 남서부의 작은 영방 국가들을 통치했으며, 1849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호엔촐레른헤힝겐 두 공국은 프로이센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의 마지막 군주 카를 안톤의 차남 카를루마니아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이 왕조는 1947년 루마니아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존속하였다.

지크마링겐 성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군주들은 지크마링겐 성을 거점으로 독일 남서부의 작은 공국을 통치했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으며, 호엔촐레른-헤힝겐과 호엔촐레른-하이거로흐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1848년 혁명으로 통치자 카를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 카를 안톤이 프로이센의 도움을 받아 1850년 3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을 프로이센에 병합시켰다. 카를 안톤은 1858년부터 1861년까지 프로이센의 수상을 지냈으며, 그의 차남 카를은 1881년부터 1914년까지 루마니아 국왕으로 즉위하여 1947년까지 왕위를 유지했다.

1869년 헤힝겐 가문이 단절되자, 지크마링겐 방계의 수장 카를 안톤은 '호엔촐레른 공' 칭호를 얻었다. 카롤의 형 레오폴트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대한 프랑스의 반대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을 촉발했고, 이는 1871년 1월 독일 제국 건국으로 이어졌다.

2. 2. 프랑켄계 호엔촐레른 가문

1191년 촐레른의 백작인 프리드리히 3세가 프랑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 후, 그의 영지는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이에 따라 호엔촐레른가는 분가인 프랑켄계(프로이센 왕가)와 본가인 슈바벤계(지크마링겐 가)로 나뉘게 되었다.

촐레른 백작 프리드리히 4세는 뉘른베르크와 호엔촐레른을 물려받았고, 동생인 프랑켄계의 콘라트는 프랑켄 지역을 중심으로 바이로이트, 안스바흐 등을 통치하였다. 프리드리히 4세는 뉘른베르크 영지를 동생 콘라트에게 주고 자신은 호엔촐레른과 독일 남부만을 차지했다.

1415년 콘라트의 후손인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스만 제국을 격파한 공으로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위를 획득하였으며, 1871년부터는 독일 제국 황제도 겸하여 1918년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

2. 3. 루마니아 왕국

1881년, 공국은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카롤 공작은 카롤 1세 국왕이 되었다.[2] 그는 1914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으며, 조카인 페르디난트가 계승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페르디난트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 신자였지만, 자녀들을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양육하는 데 동의했다.[3]

1918년 트란실바니아베사라비아가 합병되었다.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1919년베르사유 조약1920년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확인된 바와 같이, 바나트의 대부분이 루마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1918년에는 부코비나가 합병되었다.

페르디난트는 1927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남인 카롤 황태자는 권리를 포기했고, 카롤의 외아들 미하이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930년, 카롤은 왕위를 되찾아 카롤 2세로 즉위했다. 카롤은 1940년에 퇴위해야 했고, 미하이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와 왕조는 1947년 공산 정권에 의해 퇴위당하면서 종결되었다.[2]

2011년 5월 10일, 미하이는 독일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비롯된 그와 그의 가족이 사용하던 모든 공작 작위를 중단하고, 그의 사위인 라두 두다에게 '호엔촐레른-페링겐 공자' 작위를 부여한 것에 대해 독일에서 소송을 제기한 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작 가문과의 왕실 관계를 단절하고, 가문의 이름을 "루마니아"로 변경했다.[2][3]

3.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자

슈바벤의 방계 가문은 프랑켄 방계보다 역사가들에게 덜 알려져 있다. 프랑켄 방계는 뉘른베르크 변경백령의 변경백이 되었고, 나중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 프로이센, 독일 제국을 통치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은 지크마링겐 성을 거점으로 독일 남서부의 작은 공국을 통치했다. 이들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과는 달리 로마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백작령은 1576년 촐레른 백작령이 분할되면서 설립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였다. 마지막 백작인 카를 1세가 사망했을 때 영토는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 아이텔 프리드리히 4세
  • 카를 2세
  • 크리스토프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폐지된 후 1815년에 주권 국가가 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립 왕국이 되었다. 1848년 혁명으로 통치자 카를이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 카를 안톤이 프로이센에 도움을 요청하여 1849년 프로이센군이 도착했다. 1849년 12월 조약에 따라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은 1850년 3월부터 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마지막 공작인 카를 안톤은 1858년부터 1861년까지 프로이센의 수상을 지냈다. 그의 차남 카를 아이텔은 1866년부터 1881년까지 루마니아 공작이 되었고, 1881년 루마니아 국왕으로 즉위하여 1947년까지 왕위를 유지했다.

1869년 호엔촐레른의 맏형인 헤힝겐 가문이 단절되자, 지크마링겐 방계의 수장인 카를 안톤은 (모든) 호엔촐레른의 공(Fürst) 칭호를 얻었다. 카롤의 형인 레오폴트 공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대한 프랑스의 반대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을 촉발했고, 이는 1871년 1월 독일 제국 건국으로 이어졌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슈바벤 분가는 다음 영토를 통치했다.

  • 촐레른 백국 (1061)
  • 뉘른베르크 변경백 (1192)
  • 페링겐 백국 (1535)
  • 하이거로흐 영주령 (1634)
  • 베어슈타인 영주령 (1634)
  • 베르흐 백국 (1781)


1061년부터 1806년까지 이 봉토들 중 5개(뉘른베르크 제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 아래 제국 직속령을 구성했다. 1806년부터 1813년까지 호엔촐레른 영지는 라인 동맹왕국이었다. 1815년부터 1849년까지 공국은 주권 국가였으며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다. 1849년 독립을 잃고 프로이센 왕국에 호엔촐레른 주로 편입되었다.

독일 연방은 1866년 북독일 연방으로 대체되었고, 북독일 연방은 1871년 독일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1918년, 프로이센 왕국은 프로이센 자유국이 되었고, 독일 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1933년 공화국은 제3제국으로 대체되었다. 나치의 패배 이후 호엔촐레른 주는 다른 영토와 합병되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주가 되었다. 이 주는 1952년까지 연합군 점령 독일의 일부였다. 그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주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 중 하나인 바덴-뷔르템베르크로 합병되었다.

카를 프리드리히, 호엔촐레른 공이 호엔촐레른 공 슈바벤 가문의 수장이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수장'''은 다음 칭호의 역사적 계승자이다.

  • 공작 (''Fürst'') 호엔촐레른
  • 뉘른베르크 성백 (''Burggraf'')
  • 제국 백작 (''Reichsgraf'') 호엔촐레른
  • 지크마링겐 백작 (''Graf'')
  • 페링겐 백작 (''Graf'')
  • 베르흐 백작 (''Graf'')
  • 하이거로흐 영주 (''Herr'')
  • 베어슈타인 영주 (''Herr'')


호엔촐레른 가문 통치자들의 역사적 칭호는 다음과 같다.

  • 독일어: Seine Durchlaucht (S.D.)
  • 한국어: 전하 [이름] 신의 은총으로, 호엔촐레른 공, 뉘른베르크 부르크라프, 지크마링겐, 페링겐 및 베르크 백작, 하이거로흐 및 베어슈타인 영주

3. 1. 호엔촐레른 백작

3. 2.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후작

3. 3.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 수장

카를 안톤 공작(1849년–1885년)은 1869년 호엔촐레른-헤힝겐의 마지막 공작이 사망하자 호엔촐레른 공이 되었다. 그의 상속자들은 "호엔촐레른 공(Fürst)"이라는 작위를 계속 사용했다.

  • '''레오폴트''' (1885–1905년 공작)
  • '''빌헬름''' (1905–1927년 공작)
  • '''프리드리히''' (1927–1965년 공작)
  • '''프리드리히 빌헬름''' (1965–2010년 공작)
  • '''카를 프리드리히''' (2010년–현재 공작)
  • 상속자 알렉산더 (1987년 출생)
  • 호엔촐레른의 알브레히트 공자 (1954년 출생)
  • 호엔촐레른의 페르디난트 공자 (1960년 출생)
  • 호엔촐레른의 알로이스 공자 (1999년 출생)
  • 호엔촐레른의 피델리스 공자 (2001년 출생)
  • ''호엔촐레른의 요한 게오르크 공자'' (1932–2016)
  • 호엔촐레른의 카를 크리스티안 공자 (1962년 출생)
  • 호엔촐레른의 니콜라스 공자 (1999년 출생)
  • 호엔촐레른의 후베르투스 공자 (1966년 출생)
  • ''호엔촐레른-엠덴의 프란츠 요제프 공자'' (1891–1964)
  • ''호엔촐레른-엠덴의 에마누엘 공자'' (1929–1999)
  • 호엔촐레른-엠덴의 카를 알렉산더 공자 (1970년 출생)

3. 4. 호엔촐레른가 수장

이름재위 기간
카를 안톤1869년 ~ 1885년
레오폴트1885년 ~ 1905년
빌헬름1905년 ~ 1927년
프리드리히1927년 ~ 1965년
프리드리히 빌헬름1965년 ~ 2010년
카를 프리드리히2010년 ~ 현재
알렉산더후계자


3. 5. 루마니아 국왕

1866년 몰다비아왈라키아 공국이 알렉산드루 이온 쿠자 공작 아래 연합하여 루마니아가 형성되었다. 같은 해,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카를 아이텔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이 돔니토르(공작)로 즉위하여 루마니아의 카롤 1세 공작이 되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에서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었던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카롤 1세는 플레브나 공방전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조건으로 참전했고, 루마니아 독립 전쟁 이후 1878년 베를린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루마니아는 크림 전쟁 이후 몰다비아가 되찾았던 남부 베사라비아 지구를 러시아 제국에 반환하는 대가로 도브루자를 얻었다.

1881년, 루마니아는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카롤 공작은 카롤 1세 국왕이 되었다. 그는 1914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으며, 조카인 페르디난트가 계승했다. 페르디난트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지만, 자녀들을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양육하는 데 동의했다.

1918년 트란실바니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가 루마니아에 합병되었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과 1920년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바나트의 대부분이 루마니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1927년 페르디난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 카롤 황태자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여 카롤의 아들 미하이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930년, 카롤은 왕위를 되찾아 카롤 2세로 즉위했다. 1940년 카롤 2세는 퇴위했고, 미하이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 1947년 공산 정권에 의해 미하이 1세가 퇴위당하면서 루마니아의 왕조는 종결되었다.

2011년 5월 10일, 미하이 1세는 독일 친척들과의 왕실 관계를 단절하고, 가문의 이름을 "루마니아"로 변경했으며, 독일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비롯된 모든 공작 작위의 사용을 중단했다.[2][3]

루마니아 국왕의 칭호는 Majestatea Sa (M.S.) N.N., Regele Românilor|마제스타테아 사 (M.S.) N.N., 레젤레 로므닐로르ro 또는 Maiestatea Sa (M.S.) N.N., Regele României|마이에스타테아 사 (M.S.) N.N., 레젤레 로므니에이ro 이며, 두 형식 모두 루마니아 아카데미에서 허용된다. 영어 번역은 ''His Majesty (H.M.) N.N., King of the Romanians''이다.

루마니아의 역대 국왕은 다음과 같다.

  • 카롤 1세: 1866년 ~ 1881년 (공작), 1881년 ~ 1914년 (국왕)
  • 페르디난트 1세: 1914년 ~ 1927년
  • 미하이 1세: 1927년 ~ 1930년, 1940년 ~ 1947년
  • 카롤 2세: 1930년 ~ 1940년

3. 5. 1. 루마니아 왕가의 수장



'''루마니아 지부의 수장'''은 군주제 폐지 이후에도 재위 당시 사용했던 세습 작위를 계속 사용했다.[2][3]

카롤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그의 아들 미하이 1세는 Măria Sa (M.S.) Marele Voievod de Alba Iuli|마리아 사 (M.S.) 마렐레 보이보드 데 알바 율리아|알바 율리아 대공 전하ro로 불렸다.

4. 호엔촐레른 가문의 문장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통합 문장 (1849)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문장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통합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명칭설명추가 정보
첫 번째 6분할뉘른베르크 부르크라비에이트 (1214), 금색 바탕에 검은색 사자 한 마리가 일어나 있고, 테두리는 은색과 빨간색.
두 번째 6분할신성 로마 제국의 세습 챔벌린 (1504), 빨간색 바탕에 두 개의 금색 이 교차되어 있음. ||
[4]
세 번째 6분할하이거로흐와 베어슈타인 영지 (1634), 빨간색과 은색으로 양분됨.
네 번째 6분할지크마링겐 백작령 (1535), 빨간색 바탕에 금색 사슴.
다섯 번째 6분할페링겐 백작령 (1535), 금색 바탕에 수평으로 된 세 개의 사슴 뿔, 두 번 네 개, 한 번 세 개의 이 빨간색.
여섯 번째 6분할베르크 백작령 (1781), 흰색 바탕에 빨간색 사자 한 마리가 일어나 있고, 검은색 테두리에는 금색 원반이 있음.
안쪽 방패촐레른 백작령 (1061), 검은색과 은색으로 분기됨.
투구금색, 바가 있는 투구, 독일 공작의 으로 씌워져 있음.
문장검은색과 흰색, 사냥개의 머리와 어깨 부분 (1317).
화환검은색과 흰색.
망토검은색, 은색 이중, 빨간색 발데킨 위에 관이 씌워져 있음, 겨울 흰담비 이중.
모토19세기까지: Hie guet Zollere allwegede (우리는 항상 좋은 촐레른이었습니다)
19세기부터: Nihil Sine Deo (신 없이는 아무것도 없음)


4. 1. 독일 지역

1191년 촐레른의 백작인 프리드리히 3세가 프랑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 이후, 그의 영지는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이에 따라 호엔촐레른 가는 분가인 프랑켄계(프로이센 왕가)와 본가인 슈바벤계(지크마링겐 가)로 나뉘게 되었다.

촐레른 백작 프리드리히 4세는 뉘른베르크와 호엔촐레른을 물려받았고, 동생인 프랑켄계의 콘라트는 프랑켄 지역을 중심으로 바이로이트, 안스바흐 등을 통치하였다. 프리드리히 4세는 뉘른베르크 영지를 콘라트에게 주고 자신은 호엔촐레른과 독일 남부만을 차지했다.

1415년 콘라트의 후손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충성하고 오스만 제국을 격파한 공으로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으며, 이후 프로이센의 왕위를 획득하였다. 1871년 이후에는 독일 제국 황제도 겸하여 1918년까지 이 지위가 이어졌다.

이와 달리 슈바벤계가 통치하는 독일 남서부 공국들은 독일 내 작은 영방 국가들로 존재하였고, 1849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호엔촐레른헤힝겐 두 공국은 프로이센에 흡수된다. 하지만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의 마지막 군주 카를 안톤의 차남 카를루마니아 왕국의 국왕이 된다. 이 왕조는 1947년 루마니아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존속하였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호엔촐레른 지역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슈바벤 분가의 수장은 다음 영토를 통치했다.

  • 촐레른 백국 (1061)
  • 뉘른베르크 변경백 (1192)
  • 페링겐 백국 (1535)
  • 하이거로흐 영주령 (1634)
  • 베어슈타인 영주령 (1634)
  • 베르흐 백국 (1781)


1061년부터 1806년까지 이 봉토들 중 5개(뉘른베르크 제외)는 촐레른 백작, 즉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 아래 제국 직속령을 구성했다.

1806년부터 1813년까지 호엔촐레른 영지는 나폴레옹 1세 보나파르트가 세운 단명 국가인 라인 동맹왕국이었다. 1815년부터 1849년까지 공국은 주권 국가였으며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다. 1849년 독립을 잃고 프로이센 왕국에 호엔촐레른 주로 편입되었다.

독일 연방은 1866년 북독일 연방으로 대체되었고, 북독일 연방은 1871년 독일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1918년, 프로이센 왕국은 프로이센 자유국이 되었고, 독일 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1933년 공화국은 제3제국으로 대체되었다. 나치의 패배 이후 호엔촐레른 주는 다른 영토와 합병되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주가 되었다. 이 주는 1952년까지 연합군 점령 독일의 일부였다. 그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주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 중 하나인 바덴-뷔르템베르크로 합병되었다.

카를 프리드리히, 호엔촐레른 공이 호엔촐레른 공 슈바벤 가문의 수장이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의 통합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명칭설명추가 정보
첫 번째 6분할뉘른베르크 부르크라비에이트 (1214), 금색 바탕에 검은색 사자 한 마리가 일어나 있고, 테두리는 은색과 빨간색.
두 번째 6분할신성 로마 제국의 세습 챔벌린 (1504), 빨간색 바탕에 두 개의 금색 이 교차되어 있음. || [4]
세 번째 6분할하이거로흐와 베어슈타인 영지 (1634), 빨간색과 은색으로 양분됨.
네 번째 6분할지크마링겐 백작령 (1535), 빨간색 바탕에 금색 사슴.
다섯 번째 6분할페링겐 백작령 (1535), 금색 바탕에 수평으로 된 세 개의 사슴 뿔, 두 번 네 개, 한 번 세 개의 이 빨간색.
여섯 번째 6분할베르크 백작령 (1781), 흰색 바탕에 빨간색 사자 한 마리가 일어나 있고, 검은색 테두리에는 금색 원반이 있음.
안쪽 방패촐레른 백작령 (1061), 검은색과 은색으로 분기됨.
투구금색, 바가 있는 투구, 독일 공작의 으로 씌워져 있음.
문장검은색과 흰색, 사냥개의 머리와 어깨 부분 (1317).
화환검은색과 흰색.
만토검은색, 은색 이중, 빨간색 발데킨 위에 관이 씌워져 있음, 겨울 흰담비 이중.
모토19세기까지: Hie guet Zollere allwegede (우리는 항상 좋은 촐레른이었습니다)
19세기부터: Nihil Sine Deo (신 없이는 아무것도 없음)


4. 2. 루마니아 왕국

1849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호엔촐레른헤힝겐 두 공국은 프로이센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의 마지막 군주 카를 안톤의 차남 카를루마니아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이 왕조는 1947년 루마니아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계속되었다.[2][3]

1859년 몰다비아왈라키아 공국이 알렉산드루 이온 쿠자 공작 아래에서 연합하여 현대 루마니아가 형성되었다. 1866년 그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카를 아이트로 교체되었으며, 루마니아의 카롤 1세 공작으로 즉위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었던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 군 사령관이 루마니아의 지원을 요청한 후, 카롤은 플레브나를 포위하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조건으로 전쟁 참전을 수락했다. 루마니아 독립 전쟁1878년에 종료된 후, 베를린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열강에 의해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크림 전쟁 이후 몰다비아가 되찾았던 세 개의 남부 베사라비아 지구를 러시아 제국에 반환하는 대가로 도브루자를 얻었다.

1881년, 공국왕국으로 승격되었고, 카롤 공작은 카롤 1세 국왕이 되었다. 그는 1914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으며, 조카인 페르디난트가 계승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페르디난트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 신자였지만, 자녀들을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양육하는 데 동의했다.

1918년 트란실바니아베사라비아가 합병되었다.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1919년베르사유 조약1920년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확인된 바와 같이, 바나트의 대부분이 루마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1918년에는 부코비나가 합병되었다.

페르디난트는 1927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남인 카롤 황태자는 권리를 포기했고, 카롤의 외아들 미하이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930년, 카롤은 왕위를 되찾아 카롤 2세로 즉위했다. 카롤은 1940년에 퇴위해야 했고, 미하이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와 왕조는 1947년 공산 정권에 의해 퇴위당하면서 종결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Metropolitan Magazine Saunders and Otley 1835
[2] 뉴스 King Michael I announces the severance of all historical and dynastic ties to the House of Hohenzollern http://www.adevarul.[...] Adevarul 2011-05-11
[3] 뉴스 The history of the conflicts between the Royal House of Romania and the Princely House of Hohenzollern http://www.adevarul.[...] Adevarul 2011-05-11
[4] 문서 Eitel Frederick II, Count of Hohenzollern and Burgrave of Nuremberg became Hereditary Chamberlain of the Holy Roman Empire by appointment of Joachim I, elector and margrave of Brandenburg, Arch-Chamberlain of the Holy Roman Empire, and confirmed by Maximilian I, Holy Roman Empero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