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질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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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질은 조위의 장수로, 어려서부터 명성이 있었으며, 장제의 천거로 조조를 섬기게 되었다. 그는 돈구령, 승상속, 이부랑, 상산태수, 동관태수를 거쳐 형주자사, 진위장군, 관내후에 봉해졌다.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정동장군으로 청주와 서주 제군사를 도독했다. 농업과 방비에 힘썼으며, 가평 2년(250년)에 사망하여 정후의 시호를 받았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석정 전투에 참전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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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질 (조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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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호질 |
한자 | 胡質 |
로마자 표기 | Hu Zhi |
자 | 문덕 |
생년 | 생년 미상 |
몰년 | 가평 2년 (250년) |
출신지 | 양주 초국 수춘현 |
칭호 및 직책 | 정동장군 가절 도독청서주제군사 |
주군 | 조조 조비 조예 조방 |
시호 | 정후 |
2. 행적
호질은 젊은 시절 장제, 주적과 함께 회수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조조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백성들을 위한 행정과 사건 해결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한번은 자신의 아들 호위가 방문 후 돌아갈 때, 호질 휘하의 장하도독이 휴가를 얻어 신분을 숨기고 호위를 보살폈다. 도독의 신분을 알게 된 호위는 호질에게 받은 비단을 주었는데, 이를 안 호질은 도독에게 곤장을 때리고 파면했다. 이 일로 호질 부자는 청렴함으로 칭송받으며 명성을 높였다.
이후 정동장군으로 승진하여 청주와 서주 지역의 군사를 통솔하며 농업 발전에 힘썼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아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가평 2년(250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군공으로 받은 상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은 재산이 없었다. 사후 양릉정후에 봉해지고 '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1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어릴 때부터 장제, 주적과 함께 회수(淮水) 일대에서 명성이 있었다.[11] 장제가 별가가 되어 조조에게 호질을 천거하여 돈구령(돈구현의 현령)이 되었다.[11] 현에서 간통 ·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용의자가 자백하지 않고 도리어 고소한 군리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하여 죄를 뒤집어썼다. 호질은 부임하여 자세히 조사하고 사실을 밝혀내었다.[11]중앙으로 들어가 승상동조의령사가 되었으나, 양주의 요청으로 양주에 남아 치중이 되었다.[11] 장군 장료가 호군 무주와 사이가 벌어져, 양주자사 온회에게 호질을 구했으나, 호질은 무주가 본디 장료와 사이가 좋았음에도 좋게 마치지 못했는데 자신은 무주만도 못하다며 거절했고, 장료는 이에 감동받아 다시 무주와 화합했다.[11]
조조의 초빙으로 승상속이 되었고, 황초 연간(222년 ~ 227년)에 이부랑으로 옮겼다.[11] 외직으로 나가 상산태수가 되었고, 동관태수(東莞太守)를 지냈다.[11] 여기에서도 살인사건을 해결했고, 자주 군공을 세웠으나 받은 상은 모두 나누어주어 집에 두지 않았다. 9년 재임 중에 관민이 모두 편안했고, 장졸들도 명령에 복종했다.[11] 태화 2년(228년), 위나라가 오나라를 세 방향으로 공격하면서 전장군 만총 등과 함께 동관 공격에 참가했다. 그러나 환성 방면으로 출진한 조휴가 오나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깊이 들어갔다 대패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12]
2. 2. 오나라와의 전투
태화 2년(228년), 위나라가 오나라를 세 방향으로 공격하면서 전장군 만총 등과 함께 동관 공격에 참가했으나, 환성 방면으로 출진한 조휴가 오나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깊이 들어가 대패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12] 같은 해, 가규의 지휘 아래 석정 전투에 종군했으나, 조휴가 오의 주방의 거짓 항복에 속아 위군은 패배했다. 하지만 가규의 군세는 조휴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4]229년, 오나라의 파양태수 주방이 조휴를 석정으로 꾀어냈을 때 가규의 지휘 하에 만총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유수로 진군했으나 석정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청룡 4년 (236년)[5], 형주 자사·진위장군·관내후가 되었다.
경초 원년 (237년) 7월, 병사 2만 명을 이끌고 강하군을 포위한 오의 주연을 격파했다.[6] 가화 6년(237년),[13] 포충과 함께 조중을 공격했으나, 오의 장수 주연이 과감히 포충을 공격하니 포충은 패배했고 호질도 물러났다.[14]
정시 2년 (241년) 5월[7],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자,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장의 군대를 이끌고 원군을 위해 급히 달려가 성내를 안정시켰다 (작피의 역).[11][15] 정시 3년 (242년), 주연의 초중 침공을 요격했으나, 포충을 선봉으로 하고 그 뒤에서 지원했지만, 포충이 격파당했기 때문에 철수해야 했다.[8]
2. 3. 청주, 서주 도독과 죽음
황초 연간(222년 ~ 227년)에 이부랑을 거쳐 상산 태수·동관 태수를 역임하였다. 태화 2년(228년), 위나라가 오나라를 세 방향으로 공격하면서 전장군 만총 등과 함께 동관 공격에 참가했으나, 조휴가 오나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대패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12]형주자사가 되었고 진위장군이 더해졌으며 관내후에 봉해졌다.[11] 가화 6년(237년),[13] 포충과 함께 조중을 공격했으나, 오의 장수 주연이 과감히 포충을 공격하여 패배했고 호질도 물러났다.[14] 경초 원년(238년), 주연이 2만 명을 이끌고 강하군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했다.[15] 정시 2년(241년), 주연은 번성을 포위했다. 호질은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번성의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하여 경병을 꾸리고 속도를 내어 번성의 포위망에 이르러 성을 안정시켰다.[11][15] 이후 정동장군(征東將軍)이 되어 청주(靑州)와 서주(徐州) 일대의 군사를 장악했고 농업 발전에 전력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아 임지로 가는 곳마다 존경받았다고 한다.[11]
가평 2년(250년)에 사망하였고,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사후 100읍의 양릉정후를 받았고, 시호를 정후(貞侯)라 했다.[11]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4. 평가
호질은 젊은 나이에 장제, 주적[1]과 함께 양주의 명사로 이름을 떨쳤다. 조조는 호질, 유엽 등 주의 명사 5명을 초빙하여 토론을 벌이게 했는데, 유엽은 "함부로 여러 사람을 자리에 앉혀 대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했다.[3]
현민 곽정이 살인을 저지르자, 호질은 그들의 태도로 진실을 간파하고 곽정의 죄를 밝혀냈다.
장료는 호질의 평판을 듣고 부하로 삼고 싶어 했으나, 호질은 무주와의 관계를 언급하며 거절했다. 장료는 호질의 말에 감탄하여 무주와 화해했다.
석정 전투에서 조휴가 오의 주방의 거짓 항복에 속아 패배했지만, 가규의 군세는 조휴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4] 호질은 태수로서 9년간 재임하며 관민의 생활을 안정시켰고, 장병들은 그의 명령에 잘 따랐다.
청룡 4년 (236년)[5], 호질은 아들 호위와 관련된 일화로 청렴함을 칭찬받아 명성을 높였다.
경초 원년 (237년) 7월, 오의 주연을 격파했다.[6] 정시 2년 (241년) 5월[7],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자, 호질은 경장의 군대를 이끌고 원군을 위해 급히 달려가 성내를 안정시켰다 (작피의 역).
정시 6년 (245년)[5], 정동장군으로 승진하여 농업과 방비의 충실에 힘썼다. 그는 침착하고 돈후했지만 타인의 삶에는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각 임지에서 칭송받았다.
가평 2년 (250년)에 사망한 후, '''정후'''로 시호되었고, 청렴함을 인정받아 서막, 전예 등과 함께 현창되었다.[9]
서진 시대, 사마염 (무제)은 호위에게 아버지 호질과의 청렴함을 비교하는 질문을 던졌는데, 호위는 아버지의 청렴함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은 미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호위 또한 아버지처럼 칭찬받았다.[10]
5. 친족 관계
참조
[1]
문서
呉の朱績とは別人の可能性もある。
[2]
문서
徳の高い人物。
[3]
서적
傅子
[4]
서적
賈逵伝
[5]
간행물
魏方鎮年表
[6]
서적
明帝紀
[7]
서적
斉王紀
[8]
서적
朱然伝
[9]
서적
徐邈伝
[10]
서적
胡威伝
[11]
서적
서호2왕전
[12]
서적
유사마양장온가전
[13]
서적
주연전
[14]
서적
주치주연여범주환전
[15]
서적
명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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