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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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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현은 장수 황씨 출신으로, 자는 운경, 호는 매천이며, 대한제국 시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저술가이다. 1892년 운현궁 화약 폭발 사건과 관련하여 명성황후를 비판했으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간섭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개화 사상을 수용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비판하고 근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통탄하여 자결했으며, 그의 저서 《매천야록》은 대한제국 말기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전라남도 구례군에는 그의 사당인 매천사와 유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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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황현 정보
한글 이름황현
한자 이름黄 玹
일본어 가나 이름こう げん
일본어 가타카나 이름ファン・ヒョン
로마자 표기Hwang Hyun
기본 정보
이름황현
원래 이름황현(黃玹)
초상화채용신이 그린 황현의 초상화
출생일1855년 12월 11일
출생지조선 전라도 광양군 (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양시)
사망일1910년 9월 7일
사망지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구례군 (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구례군)
별명자(字)는 운경(雲卿), 호(號)는 매천(梅泉)
경력유학자, 시인, 문장가, 역사 저술가
정당무소속
부모아버지: 황시묵, 어머니: 풍천 노씨
직책조선국 전라도 구례 관청 동몽교관 (朝鮮國 全羅道 求禮 官廳 童蒙敎官)
군주조선 고종 이형
임기1890년 2월 1일 ~ 1891년 2월 1일
학력1888년 생원시 복시에 장원 급제
종교유교(성리학)
친인척황기주(6촌 아우), 황의돈(재종질), 황윤석(삼종손녀)
서훈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형제자매황원(아우)

2. 생애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매천(梅泉)이다. 사학자 황의돈은 그의 7촌 재종질이다. 그는 전라도 광양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전라도 함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전라도 구례에서 성장했다.[5][1] 1892년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했다. 그에 의하면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였다.[5][1]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겪은 후, 청나라의 적극적인 간섭 정책 아래 수구파 정권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개화적인 입장에서 고종명성황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양에 대항하기 위해 근대화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 체결 16일 후 구례군 자택에서 음독 자결했다.[6]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장지연(張志淵)이 주필로 있던 《경남일보》에 실렸고, 이는 경남일보 필화 사건의 원인이 됐다. 이는 조선총독부 경무부가 해당 기사 게재를 문제 삼은 사건으로,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폐간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장수(長水)를 본관으로 하는 황현은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매천(梅泉)이다. 황의돈은 그의 7촌 재종질이다.[5] 그는 전라도 광양에서 출생하여, 전라도 함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전라도 구례에서 성장했다.[5][1] 1892년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고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한 시도로 보았다.[5][1]

2. 2. 과거 급제와 낙향

1883년 보거과(保擧科)에 합격하고, 1885년 생원시 초시에 2등, 1888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였다.[1]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자랐다.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폭발 사건이 발생하여 여러 건물에 화약이 설치된 것이 발각되었는데, 황현은 배후에 명성황후가 있으며,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암살하려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겪은 후, 청나라의 적극적인 간섭 정책 아래 수구파 정권에 환멸을 느껴 과거 급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왔다.[1]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개화적인 입장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서양에 대항하기 위해 근대화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1]

2. 3.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비판

황현은 1892년 봄 운현궁 폭발 사건의 배후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 사건이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암살하려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1] 그는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겪은 후 청나라의 간섭과 수구파 정권에 환멸을 느껴 낙향하였으며,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개화적인 입장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1]

2. 4. 한일 병합과 자결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1892년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고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한 기도였다고 주장했다.[5]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낙향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지내다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 체결 16일 후 구례군 자택에서 음독 자결했다[6]. 그는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겪은 후, 청나라의 적극적인 간섭 정책 아래 수구파 정권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개화적인 입장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양에 대항하기 위해 근대화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나라가 빼앗긴 것에 분개하여, 조약 체결 1주일 후 구례 자택에서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장지연(張志淵)이 주필로 있던 《경남일보》에 실렸고, 이는 경남일보 필화 사건의 원인이 됐다. 이는 조선총독부 경무부가 해당 기사 게재를 문제 삼은 사건으로,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폐간되었다.[1]

3. 사상과 저술 활동

매천야록》(梅泉野錄)은 편년체의 역사서로서 사료 가치가 풍부하다.[2] 흥선대원군 시대가 시작된 1864년부터 1910년 일한 병합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으며,[2] 대한제국 말기 연구에 있어 필수적인 문헌으로 여겨진다.[3] 내정·외교상 중요 사건, 흥선대원군 정권과 민씨 정권의 실태, 과거 시험의 부정과 매관매직, 민중 운동·민족 운동, 지방관의 부패와 폭정, 문화·풍속 등 내용이 다양하다.[2] 친청 성향이 있으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군의 군기는 청국군의 난잡함에 비해 훌륭했다고 평가하고 있다.[4]

《매천집》(梅泉集)은 문집이며 유고집으로 출간됐다.

3. 1. 《매천야록》

매천야록》(梅泉野錄)은 편년체의 역사서로서 사료 가치가 풍부하다.[2] 1864년 흥선대원군 시대가 시작된 때부터 1910년 일한 병합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으며,[2] 대한제국 말기 연구에 있어 필수적인 문헌으로 여겨진다.[3] 내정·외교상 중요 사건, 흥선대원군 정권과 민씨 정권의 실태, 과거 시험의 부정과 매관매직, 민중 운동·민족 운동, 지방관의 부패와 폭정, 문화·풍속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있다.[2] 친청 성향이 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군기는 청국군의 난잡함에 비해 훌륭했다고 평가하고 있다.[4]

《매천집》(梅泉集)은 문집이며 유고집으로 출간됐다.

3. 2. 《매천집》

매천야록》(梅泉野錄)은 편년체의 역사서로서 사료 가치가 풍부하다.[2] 흥선대원군 시대가 시작된 1864년부터 1910년의 일한 병합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으며,[2] 대한제국 말기 연구에 있어 필수적인 문헌으로 여겨진다.[3] 내정·외교상 중요 사건, 흥선대원군 정권과 민씨 정권의 실태, 과거 시험의 부정과 매관매직, 민중 운동·민족 운동, 지방관의 부패와 폭정, 문화·풍속 등 내용이 다양하다.[2] 친청 성향이 있으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군의 군기는 청국군의 난잡함에 비해 훌륭했다고 평가하고 있다.[4] 《매천집》(梅泉集)은 유고집으로 출판된 문집이다.

4. 사후 평가와 기념 사업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전남 구례군 황현의 집터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 매천사, 그리고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구례 황현 자택 터에는 현재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매천사가 세워져 있으며,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도 설치되어 있다.

4. 1. 대한민국 정부의 추서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전남 구례군 황현의 집터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 매천사, 그리고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이 있다.

4. 2. 매천사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전라남도 구례군 황현의 집터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 매천사와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이 있다.

5. 연보

참조

[1]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2] 백과사전 梅泉野録(ばいせんやろく) https://kotobank.jp/[...]
[3] 뉴스 賄賂の話 http://www.toyo-keiz[...] 東洋経済日報 2008-04-18
[4] 논문 日本のエコロジズムと教育 : (3)昭和の農本主義とその行動 https://hdl.handle.n[...] 1992-03
[5]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6] 서적 근대를 말하다 http://blog.city.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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