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후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후조는 319년 석륵에 의해 건국되어 351년 멸망한 오호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석륵은 전조로부터 독립하여 조왕을 칭하며 후조를 건국했고, 전조를 멸망시키고 화북 대부분을 통일했다. 석륵 사후, 석호가 권력을 잡았으나 폭정과 무리한 토목 공사로 국력이 쇠퇴했다. 석호 사후, 내분과 혼란 속에 염민의 난이 일어나 갈족이 학살당했으며, 석민은 염위를 건국했다. 이후 후조는 석지의 부활 시도에도 불구하고 멸망했다. 후조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으며, 석륵과 석호의 통치 방식, 관료 기구 정비, 독특한 양자 제도 등이 특징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조 - 갈족
    갈족은 4세기 초 중국 북부에 존재했던 민족으로, 흉노의 별부 강거의 후손이라는 설 등 기원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있으며, 후조를 건국한 석륵이 갈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염민의 학살 이후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후조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명 (공식 명칭)조(趙)
통칭후조(後趙)
존속 기간319년 - 351년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샹궈 (319년–335년, 350년–351년)
예청 (335년–350년)
사용 언어갈어
역사
건국한조 멸망 (329년)
석륵의 황제 즉위 (330년)
석호석홍으로부터 왕위 찬탈 (335년)
염민의 염위 건국 (350년)
이전한조
이후염위
전진
전연

단기
지도
중국 북부의 후조
중국 북부의 후조
통치자
군주석륵 (319년–333년)
석홍 (333년–334년)
석호 (334년–349년)
석세 (349년)
석준 (349년)
석감 (349년–350년)
석지 (350년–351년)
칭호왕 → 천왕 → 황제
면적 및 인구
면적 (추정, 329년)2,500,000 제곱킬로미터
기타
현재 국가중국

2. 역사

303년 병주에 큰 기근이 발생하여 갈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이 흩어졌고, 석륵은 사마등에 의해 노예로 팔렸다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산적 두목으로 활동하다 307년 유연에게 귀순하여 한의 실력자로 성장했다. 311년 영가의 난 당시 낙양 함락에 공을 세우고 왕미를 제거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319년 유요전조를 재건하자, 석륵은 왕을 칭하며 자립하여 후조를 건국했다.

후조는 전조와 화북을 양분하여 대립했으며, 325년 동진으로부터 회하 이북의 영토를 빼앗았다. 328년에는 낙양 전투에서 유요를 사로잡고, 329년 석호를 파견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 석륵황제에 즉위했다. 고구려전량 등이 후조에 조공했다.[2]

333년 석륵 사후, 석호석홍을 폐위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석호는 338년 단부를 멸망시키고, 339년 동진을 공격하여 장강 이북 지역을 장악했으나, 340년342년 대규모 원정 및 346년 전량 공격은 실패했다.

348년 후계자 문제로 숙청이 벌어졌고, 349년 석호 사후 내분이 격화되었다. 석민석감을 폐위하고 염위를 건국하며 갈족을 학살했다. 351년 석지가 살해되면서 후조는 멸망했다.

2. 1. 건국기

303년, 병주에 큰 기근이 발생하여 지역의 갈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이 흩어졌다. 당시 병주 자사였던 사마등은 이들을 붙잡아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노예로 팔았으며, 이들은 하북성과 산동성으로 흩어졌다. 석륵도 산동성의 부유한 집에 팔려갔지만 곧 자유의 몸이 되었다.

305년 무렵, 석륵은 산적이 되어 이름을 알렸고, 친구 기상과 함께 사병을 일으켰다. 그는 진나라 정부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반란군 장군 공사번에 가담하여 성도왕 사마영에게 복수했고, 공사번이 죽은 후에는 그 지위를 이어받아 307년에는 업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패배한 후, 석륵은 군대를 이끌고 흉노가 이끄는 한(漢)나라에 합류했다.

한나라에서 석륵은 빠르게 승진하여 하북성에 있는 많은 갈족과 여러 부족을 끌어들였다. 한나라 조정은 실제적인 권한을 행사할 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한나라에 합류한 많은 반란군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군대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졌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화북 평원을 약탈했지만, 오랫동안 점령하거나 머물지는 않았다. 311년, 그는 영가의 난에서 한나라 군대가 낙양을 점령할 수 있도록 영평 전투에서 10만 명의 진나라 황실 군대를 학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륵은 자신의 라이벌 왕미를 암살하고 그의 군대를 흡수했다. 한나라 조정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꾸짖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왕미가 죽자, 석륵은 산동성을 제외하고 제국의 동부를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다. 312년, 석륵은 양국에 근거지를 구축했다. 그는 또한 진나라의 총독 왕준과 유곤을 격파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318년, 그는 유요와 힘을 합쳐 근준의 쿠데타를 진압했는데, 근준은 평양에서 황제와 황실 가족을 학살했다.

319년, 유요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조(趙)로 변경하자, 석륵은 사신을 보내 축하했다. 그러나 유요는 석륵의 반란이 이미 진행 중이라고 믿고 사신을 살해했다. 석륵은 즉시 독립을 선언했고, 유요는 수도를 장안으로 옮기면서 제국은 둘로 갈라졌다. 319년 11월, 석륵은 조왕(趙王)을 선포했다. 역사학자들은 유요의 국가를 전조, 석륵의 국가를 후조라고 부른다.

2. 2. 석륵의 통치 (319년 ~ 333년)

319년, 석륵왕에 즉위하여 후조를 건국하고 전조와 대립했다. 석륵은 주로 낙양 동쪽 지역을 장악하며 영토를 확장했고, 325년에는 전조 군대를 격파하여 낙양 동쪽 지역 패권을 확보, 동진으로부터 회하 이북 영토 대부분을 빼앗았다. 328년 낙양 전투에서 유요를 포로로 잡아 처형하고, 329년 석호를 시켜 전조를 멸망시켜 화북 대부분을 통일했다.

330년 2월, 석륵은 조천왕(趙天王)에 즉위하고, 9월에는 황제(皇帝)에 즉위했다. 석륵은 장빈 등 한족(漢族) 출신 인재들을 등용하고, 구품중정제를 다시 도입했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고, "호(胡)"라는 단어 대신 "국인(國人)"을 사용하도록 하고, 부족들이 한족 학자 관료를 억압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민족 융합 정책도 추진했다.[1] 불도징이 석륵의 궁정에서 고위직을 맡으면서 불교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1]

고구려, 전량, 우문부 등 주변 국가들이 후조에 조공하며 복속했다.[2]

333년 7월, 석륵이 사망했다.[2]

2. 3. 석호의 통치 (334년 ~ 349년)

333년, 석륵이 죽자 태자 석홍이 즉위했으나, 석륵의 조카이자 양자인 석호승상 등의 직책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석호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334년에 석홍을 폐위시키고 나중에 살해했다. 석호는 스스로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을 자처하며 후조를 다스렸다. 335년에는 수도를 으로 옮겼다.

석호는 불교를 진흥하고, 와 강과 같은 사람들을 수도 주변에 거주하도록 옮기는 정책을 추진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폭군으로 묘사되며, 여자와 술에 빠져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업에서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고,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여자들을 빼앗아 자신의 후궁을 크게 확장했다. 반면, 그는 자신의 신하와 군 장군들에게는 관대하여 그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처벌하지 않았다.

석호는 국가 확장을 위해 대규모로 백성들을 징집했지만, 군사 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338년 전연과 연합하여 단부를 공격하고, 이후 연나라를 공격했지만 계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339년에는 동진을 공격하여 몇몇 도시를 점령했으나 철수했다. 346년에는 전량을 침공했지만 격퇴되었으나, 황하 이남의 영토를 점령했다.

340년342년에는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여 가혹한 징병과 징발을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48년에는 후계자 문제로 대규모 숙청이 벌어졌다. 349년황제에 즉위한 석호는 곧 사망했다.

2. 4. 염민의 난과 멸망 (349년 ~ 351년)

349년, 석호가 죽은 후 후계자 분쟁이 격화되었다. 어린 석세가 황제에 즉위했으나 곧 쿠데타가 일어나 석준이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석호의 양자 석민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석준은 석민을 숙청하려다 오히려 공격받고 폐위, 살해되었다. 석민은 석감을 황제에 옹립하고 후조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350년, 석민은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염위를 건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석민은 "호족(胡族) 학살령"을 내려 갈족을 포함한 수많은 비한족(非漢族)들을 학살했다. 기록에 따르면 총 20만 명 정도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양국에서 석지가 황제를 칭하며 저항했으나, 351년 부하 유현에게 살해당하면서 후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3. 후조의 특징

후조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으며, 석륵석호는 개인적인 카리스마와 군사력으로 이들을 통치했다. 이들은 이성(異姓) 양자(養子) 제도를 통해 종실(宗室)을 구성했는데, 이는 "이성불양(異姓不養)"을 따르는 중국 한족의 전통적인 예제(禮制)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이었다.[6]

석륵과 석호는 독자적인 관료 기구를 정비하고 관리 임용법을 제정하여 국가 체제를 확립하려 노력했다. 석륵은 황제 즉위 후 이러한 노력을 더욱 가속화했으며, 장빈 등 한족 지식인을 등용하고 농업 생산력 회복에 힘썼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는 등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6]

반면 석호는 과도한 토목공사와 후궁 확장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하고, 민족 갈등을 심화시켜 국가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6]

4. 역대 황제

묘호시호이름재위 기간연호
고조명제석륵319년–333년조왕(趙王) 319년–328년
태화(太和) 328년–330년
건평(建平) 330년–333년
해당 없음석홍333년–334년연희(延熙) 334년
태조무제석호334년–349년건무(建武) 335년–349년
태녕(太寧) 349년
해당 없음석세349년없음
해당 없음석준349년없음
해당 없음석건349년–350년청룡(青龍) 350년
해당 없음석지350년–351년영녕(永寧) 351년


5. 평가

석륵의 융합 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석호의 폭정과 차별 정책은 국가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받는다. 후조의 멸망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고구려는 후조의 혼란을 틈타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참조

[1] 논문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1979
[2]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3] 서적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Caves Books, Ltd
[4] 서적 Nauka
[5] 문서 Book of Jin
[6] 문서 '"The Consenantal System of Old Chines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