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부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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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부 선비는 선비족의 한 분파로,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중국 북부에 세력을 떨쳤다. 단부 선비는 오환족 가문에서 노예로 팔린 선비족 출신 단일주안(또는 단일륙권)의 후예들이 령지(현재 허베이성 첸안)에 근거지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단부 선비는 한족의 성인 '단'을 사용하였으며, 서진 시대에는 3만 가구 이상, 기병 4~5만 명에 달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팔왕의 난 동안 요서공에 봉해지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모용부와의 대립과 후조, 전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단부 선비의 마지막 지도자는 단요였으며, 단씨는 이후에도 전연의 후계 국가에서 모계 친족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단부어는 파라-몽골어군에 속하는 언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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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부선비 - 단감
단감은 후조의 혼란을 틈타 진류를 근거지로 세력을 확장하고 광고에서 스스로 제왕을 칭하며 할거했지만, 동진에 귀순 후 전연에 패배하여 항복했고, 모용준에게 살해당해 세력이 멸망한 단부 선비족 출신 인물이다. - 오호 십육국 시대 - 모용부
모용부는 3세기부터 5세기 초 화북 지역에서 활동한 선비족의 한 부족으로, 요서 지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병행하며 세력을 키워 여러 국가를 건국하고 토욕혼을 건국하기도 했으나, 5세기 초 북위의 화북 통일 과정에서 쇠퇴하였다. - 오호 십육국 시대 - 정령 (민족)
정령은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경 바이칼호 서쪽에서 남시베리아에 걸쳐 거주한 유목 민족으로, 흉노와 돌궐의 지배를 받으며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이동했고, 일부는 중국 북부에 정착하여 적위를 건국했으며, 이후 고차 또는 철륵으로도 불리며 튀르크족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선비 - 발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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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부는 3세기부터 5세기 초 화북 지역에서 활동한 선비족의 한 부족으로, 요서 지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병행하며 세력을 키워 여러 국가를 건국하고 토욕혼을 건국하기도 했으나, 5세기 초 북위의 화북 통일 과정에서 쇠퇴하였다.
단부선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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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국가 | 중국 |
민족 | 선비족 |
활동 시기 | 후한 ~ 북위 |
주요 활동 지역 | 랴오닝 성 서부 허베이 성 북부 |
역사 | |
기원 | 4세기 초 |
주요 사건 | 영가의 난 지원 후조와 대립 전연에 복속 북위에 복속 |
지도자 | |
주요 인물 | 단소 단필제 단무육권 단수찬 |
사회 | |
사회 구조 | 유목 사회 |
문화 | 선비족 문화 |
2. 역사
단부는 선비족의 일파로, 3세기 초부터 4세기 중반까지 요서 지방에서 활동한 부족 국가이다. 시조는 단일주안이며, 그는 오환족에게 노예로 팔렸다가 탈출하여 유랑민들을 모아 세력을 키웠다. 단부는 한나라 시대에 버려진 도시였던 령지(令支, 현재 허베이성 첸안시)를 근거지로 삼고, '단(段)'이라는 한족 성씨를 사용했다.[1]
서진 시대에 단부는 3만 가구, 4만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다.[1][2] 303년부터 338년까지는 요서공국을 세워 유주 자사 왕준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전연과의 전쟁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343년 단란(段蘭)이 후조로부터 요서군 영지현을 받아 단부를 부흥시켰으나, 후조에 종속되었다. 이후 단감(段龕)이 제왕을 자칭하며 자립하고, 단근(段勤)이 조왕을 자칭하며 전연에 귀순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결국 356년 단감이 전연에 항복하고 처형당하면서 단부는 완전히 멸망했다.
단부는 멸망했지만, 단씨 일족은 후연, 서연, 남연 등 전연의 후계 국가들에서 외척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후조로 도망친 단씨 일원들은 장군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 1. 배경
단부 선비 부족의 시조는 일주안(또는 구률주안)으로, 어양군의 오환족 가문에 노예로 팔린 선비족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쿠누관(庫辱官)으로 알려졌다. 어양에 기근이 발생하자 쿠누관은 일주안을 요서군으로 보내 식량을 구하게 했지만, 그는 이 기회를 틈타 도망쳤다. 그는 망명자들을 모아 한나라 시대에 버려진 도시였던 령지(令支, 현재 허베이성 첸안)에 근거지를 세웠다. 그들은 부족의 이름으로 "단"(段)이라는 한족 성을 채택했다.[1]일주안 사후, 그의 동생 기진이 뒤를 이었고, 그 다음에는 그의 아들 단무우진이 뒤를 이었다. 서진 시대에 이르러 단부 부족은 3만 가구와 약 4만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다.[1][2]
단부의 시조인 단일륙권은 어린 시절 어양군 오환의 어른인 고누관의 노예로 팔려갔다. 어양에서 대기근이 일어나자, 고누관은 단일륙권이 강건하다는 이유로 요서로 보내 양식을 모아오도록 했다. 단일륙권은 이를 기회로 고누관에게 반기를 들고 자립하여, 유망민들을 모아 세력을 강화하고, 한대(漢代)에 버려진 요서군 령지현 성곽을 근거지로 삼았다.[2]
2. 2. 요서공국 (303년–338년)
303년 12월, 유주 자사 왕준은 유주에서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딸 중 한 명을 단부물진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왕준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으며, 왕준의 상표에 의해 요서공에 봉해졌다.304년 8월, 왕준이 성도왕 사마영 토벌 군사를 일으키자, 단부물진은 군사를 파견하여 원조했다.
309년 9월, 한(후의 전조)의 장군 석륵이 상산군을 습격하자, 단부물진 등은 10만 명이 넘는 기병을 이끌고 비룡산에서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310년 10월, 이러한 공적으로 선우의 인수를 하사받았으며, 차남 단필저에게는 좌현왕의 인수를 하사했다. 단부물진이 죽자, 장남 단질륙전이 지위를 계승했다.
311년 12월, 서진 병주 자사 유곤이 유주 백성 3만 명을 약탈하자, 단질륙전은 이를 토벌하고 백성을 왕준에게 반환했다.
312년 12월, 왕준이 석륵의 본거지 상국으로 침공하자, 단질륙전은 종제 단말파, 동생 단필저, 단문앙 등과 함께 종군하여, 맞서 싸우러 온 석륵 군의 여러 장수를 모두 격파했다. 하지만, 석륵의 장군 공창에게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단말파가 포로로 잡혔다. 석륵이 단말파를 인질로 삼아 강화를 요청하자, 단질륙전은 갑옷, 말, 금은을 보내고 단말파의 동생 3명을 인질로 내놓아 단말파와 교환했다. 또한, 석륵과 동맹을 맺고, 그의 양자 석호와 의형제를 맺었다. 단말파 또한 석륵과 부자 맹세를 맺고, 석륵을 은인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준과 단부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당시 중원 혼란으로 인해 많은 유민이 단부에게 의탁했지만, 단질륙전과 그의 형제는 무용만 숭상하고 사대부를 예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모용부로 흘러갔다고 한다.
313년, 왕준은 단질육권과 함께 석륵을 공격하려 했으나, 단질육권은 석륵으로부터 두터운 뇌물을 받았기에 응하지 않았다. 4월, 왕준은 격노하여 대왕 탁발의로, 모용부의 어른 모용외에게 단부를 공격하게 했지만, 단질육권은 탁발부를 물리쳤다. 이로 인해 모용부도 병사를 물렸다.
314년 3월, 석륵은 계성을 공략하여 왕준을 멸망시켰다. 4월, 계성을 지키던 영삭장군 유한이 석륵을 배반하고 단필제를 맞이했다. 이로 인해 계성은 단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왕준의 부하였던 낙릉군 태수 소속 또한 한때 석륵에게 귀순했지만, 곧 이반하여 단필제에게 귀순했다. 분노한 석륵이 염차를 지키는 소속을 포위하자, 단필제는 동생 단문앙에게 구원하게 하여 석륵군을 크게 격파하고 다수의 백성을 약탈했다. 단필제는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유주자사에 임명되었고, 발해공에 봉해졌다. 이후 단필제는 단질육권으로부터 멀어져 차츰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316년 4월, 석호가 서진 후장군 유연이 지키는 름구를 공격하자, 단필제는 유연을 돕기 위해 소속과 단문앙을 구원하러 보냈으나, 름구는 함락되었다.
7월, 단필제는 서진 대장군 유곤과 동맹을 맺고, 단질육권, 숙부 단섭복진, 단말파에게 함께 석륵을 토벌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단말파는 석륵에 대한 옛 은혜 때문에 거절했고, 단질육권, 단섭복진도 응하지 않아 토벌은 중지되었다.
318년 1월, 단질육권이 병사하자, 그의 아들이 어렸기에 단섭복진이 임시로 뒤를 이었다. 계성을 통치하던 단필제는 상(喪)을 치르기 위해 영지(令支)로 향했지만, 이때 은밀히 단말파와 단린 (단무물진의 사촌)을 죽이고 국권을 장악하려 꾀했다. 그러나 그의 측근이 단말파에게 이 일을 밀고했기에, 단섭복진, 단말파, 단린 등은 군사를 일으켜 단필제를 공격했고, 전멸에 가까운 큰 손해를 입혔다. 단필제는 간신히 계성으로 도망쳤지만, 종군했던 유군 (유곤의 적자)은 붙잡혔다. 이때 단말파 또한 정권 장악을 꾀하고 틈을 노려 단섭복진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단섭복진과 그의 자제들을 비롯한 일파를 모두 주살하고, 스스로 선우를 칭하며 자립했다 (단린을 선우로 추대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단말파는 단필제와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단부는 분열되어 부중은 흩어지게 되었다.
2. 3. 이후 역사
338년 단요(段遼)가 전연에 항복하고 살해되면서 단부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343년 단란(段蘭)이 후조로부터 요서군 영지현을 받아 단부를 부흥시켰으나, 후조에 종속된 상태였다. 단란 사후, 아들 단감(段龕)이 뒤를 이었다.350년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단감은 광고(廣固)에서 제왕을 자칭하며 자립했고, 단근(段勤)은 여양(黎陽)에서 조왕을 자칭하며 전연에 귀순했다. 351년 단감은 동진으로부터 진북장군, 제공에 봉해졌다. 352년 단근은 전연에 항복했다가 살해되었다.
355년 전연의 모용각(慕容恪)이 단감을 공격했다. 단감은 동생 단비(段毘)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패배를 거듭하다 356년 항복하고 처형당했다. 이로써 단부는 완전히 멸망했다.
한편, 단요가 339년에 반란으로 살해당했지만, 단씨는 후연, 서연, 남연과 같은 전연의 후계 국가에서 모계 친족으로서 여전히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단원비와 단기비와 같은 여러 단씨 여성이 모용씨 가문에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다른 단씨 일원들은 후조로 도망쳐 장군이 되었는데, 특히 단람과 단진이 두드러졌다. 후조가 붕괴되는 동안 단람의 아들인 단간은 350년 산둥성에 단명한 단제를 세웠고, 단진은 352년 스스로 조나라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둘 다 결국 전연에 의해 포획되어 처형되었다.
3. 고구려와의 관계
313년 왕준은 탁발의로, 모용외에게 단부를 공격하게 했지만, 단질육권은 탁발부를 물리쳤고 모용부도 병사를 물렸다.[1]
314년 단필제는 왕준의 부하였던 소속과 함께 석륵에게서 이반하여 단부로 귀순하였다. 단필제는 동생 단문앙을 시켜 석륵군을 격파하고, 조정으로부터 유주자사에 임명되고 발해공에 봉해졌다. 이후 단필제는 단질육권에게서 멀어져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2]
316년 단필제는 유연을 돕기 위해 소속과 단문앙을 보냈으나, 름구는 함락되었다.
318년 단질육권이 죽자 단필제는 단말파와 단린을 죽이고 국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단말파는 단섭복진을 죽이고 스스로 선우를 칭하며 자립했다. 이후 단말파와 단필제는 서로 공격하며 단부는 분열되었다.
325년 단말파가 죽고 동생 단아(段牙)가 뒤를 이었다. 단아는 천도하였으나, 단요(段遼)는 단아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단요는 331년 북평공에 봉해졌다.
333년 모용황(慕容皝)의 서형 모용한(慕容翰)이 단부로 망명해오자 단요는 그를 후대했다. 모용황의 동생 모용인(慕容仁)이 반란을 일으키자, 단요는 우문부와 함께 모용인을 지원했다.
334년 단요는 모용부의 도하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단요의 동생 단란(段蘭)과 모용한은 유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모용한(慕容汗) 등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단란은 깊숙이 침입하려 했으나 모용한의 반대로 퇴각했다.
336년 단란과 우문부는 유성을 공격했으나, 모용황이 진군하자 퇴각했다.
337년 단부는 기근이 심각해졌고, 모용부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338년 단요는 후조와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4. 역대 수장
대 | 성(姓)·휘(諱) | 재위 기간 | 비고 |
---|---|---|---|
1 | 단일육권 | ?년 – ?년 | 『진서』에서는 "단취륙권(段就陸眷)"으로 표기됨. |
2 | 단걸진 | ?년 – ?년 | 단일육권의 동생. "단계(段階)"라고도 불림. |
3 | 단무물진 | ?년 – 311년경 | 단걸진의 아들. 『위서』에서는 "단무목진(段務目塵)"으로 표기됨. |
4 | 단질륙권 | 311년경 – 318년 | 단무물진의 아들. 『위서』에서는 "단취육권(段就六眷)"으로, 『진서』 "원제본기(元帝本紀)"에서는 "단권(段眷)"으로 표기됨. |
5 | 단섭복진 | 318년 | 단무물진의 동생. 『진서』 "석륵전(石勒載記)"에서는 "단절부진(段截附真)"으로, "원제본기(元帝本紀)"에서는 "단진(段辰)"으로 표기됨. |
단린 | 318년 – ?년 | 단무물진의 사촌. 『진서』 "석륵전(石勒載記)"에서는 "단홀발린(段忽跋隣)"으로, 『위서』에서는 "단우린(段羽鱗)"으로 표기됨. | |
6 | 단말파 | 318년 – 325년 | 단질륙권의 사촌. 『진서』에서는 "단말배(段末杯)", 『자치통감』에서는 "단말배(段末柸)"로 표기됨. |
7 | 단아 | 325년 – ?년 | 단말파의 동생. |
8 | 단요 | ?년 – 338년 | 단일육권의 손자[2] 『위서』에서는 "단호요(段護遼)"로 표기됨. |
9 | 단란 | 338년 – ?년 | 단요의 동생. 『위서』에서는 "단울란(段鬱蘭)"으로 표기됨. |
10 | 단감 | ?년 – 357년 | 단란의 아들. |
단근 | ?년 – 359년 | 단말파의 아들. |
5. 언어
시무넥은 단부어를 "세르비"(즉, 파라-몽골어군) 언어로 분류한다. 시무넥의 "세르비" 언어 분파에는 타그바흐어, 토욕혼어, 거란어도 포함된다.[1]
참조
[1]
서적
Languages of Ancient Southern Mongolia and North China: a Historical-Comparative Study of the Serbi or Xianbei Branch of the Serbi-Mongolic Language Family, with an Analysis of Northeastern Frontier Chinese and Old Tibetan Phonology
Harrassowitz Verlag
[2]
문서
『資治通鑑』では4代大人段疾陸眷の孫と記載されている。一方、『魏書』では初代大人段日陸眷の弟と記載されており、全ての記述が異な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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