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미국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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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틴아메리카–미국 관계는 19세기 초 먼로 독트린 발표를 시작으로,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 쿠바 및 파나마 운하 건설 등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20세기에는 선린 정책을 통해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냉전 시기에는 공산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개입을 지속했다. 냉전 이후, 북미 자유 무역 협정(NAFTA) 체결과 자유 무역 협정(FTA) 확대를 통해 경제적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핑크 타이드 시기에는 좌익 정당의 부상과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재까지 라틴 아메리카는 미주 기구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경제적, 정치적, 안보적 측면에서 미국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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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미국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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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개요 | |
![]() | |
관계 설명 |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 간의 양자 관계 |
역사적 맥락 | |
배경 | 1898–1936: 미국 개입에 대한 라틴 아메리카의 반대 제2차 세계 대전 냉전 시대 |
냉전 시대 주요 사건 | 쿠바 미사일 위기 콘도르 작전 |
주요 쟁점 | |
정치적 쟁점 | 미국의 간섭에 대한 라틴 아메리카의 반발 쿠바와의 관계 |
경제적 쟁점 |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 라틴 아메리카의 좌경화 경향 |
현대의 관계 | |
현재 상황 | 미국의 영향력 유지 라틴 아메리카의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 |
미래 전망 |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른 관계 변화 가능성 라틴 아메리카의 자체적인 성장 동력 확보 노력 |
추가 정보 | |
관련 연구 | 미국-라틴 아메리카 관계에 대한 다양한 연구 존재 |
참고 자료 | 미국 외교 관계 협의회 보고서 |
2. 역사
19세기 말까지 미국은 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멕시코 및 쿠바와 관계를 맺었다. 당시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영국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820년대 초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국과의 협력을 통해 1823년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여,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에 더 이상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정치적으로 간섭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팽창 과정은 멕시코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미국인 정착민들이 주도하여 세운 텍사스 공화국은 1836년 텍사스 혁명을 통해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1845년 미국이 텍사스를 합병하면서 결국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이 발발했다.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고,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따라 멕시코는 멕시코 할양을 통해 알타 캘리포니아와 산타페 데 누에보 멕시코 등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약 6만 명의 멕시코인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이후 미국 남북 전쟁(1861–1865) 시기를 틈타 프랑스가 멕시코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제국을 세우고 막시밀리안 1세를 황제로 앉혔다. 그러나 미국의 남북 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압력이 가해지자 프랑스군은 철수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베니토 후아레스가 이끄는 멕시코 공화파가 막시밀리안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회복했다.
2. 1. 초기 관계 (19세기 초 ~ 19세기 말)
19세기 초,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과의 협력을 통해 1823년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여,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에 더 이상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정치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경고했다.[16] 이는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향후 미국 외교 정책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동안 프랑스의 아르헨티나 해안 봉쇄(1839-1840), 라플라타 강 앵글로-프랑스 봉쇄(1845-1850), 스페인의 도미니카 공화국 침공 시도(1861-1865), 프랑스의 멕시코 개입(1862-1867) 등 유럽의 간섭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영국은 1833년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지배를 재확립하기도 했다.[18][19]미국은 초기 라틴 아메리카 신생 독립국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810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최고 헌정 회의는 미국에 외교 사절단을 보내 인정을 요청했고, 제임스 매디슨 행정부는 이를 지지했다. 1811년에는 조엘 로버츠 포인트세트가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칠레 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원 의사를 타진했다.[15] 1824년에는 대 콜롬비아(현재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와 앤더슨-과르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미국이 다른 아메리카 국가와 맺은 최초의 양자 조약으로, 상호 최혜국 대우를 보장했다.[20] 1826년 시몬 볼리바르는 아메리카 공화국 연맹을 구상하며 파나마 회의를 소집했지만, 미국의 대표단 파견이 늦어지고 내부 분열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1][22]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팽창은 멕시코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미국인 정착민들이 주도하여 세운 텍사스 공화국은 1836년 텍사스 혁명을 통해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1845년 미국이 텍사스를 합병하자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이 발발했다.
미국은 전쟁에서 쉽게 승리했고, 그 결과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통해 알타 캘리포니아와 산타페 데 누에보 멕시코 등 광대한 영토를 멕시코로부터 획득했다. 이 지역에 살던 약 6만 명의 멕시코인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이후 미국 남북 전쟁(1861-1865) 시기를 틈타 프랑스가 멕시코를 침공하여 제국을 세우고 막시밀리안 1세를 황제로 앉혔다. 미국은 이를 먼로 독트린 위반으로 간주했으나 내전으로 즉각 개입하지 못했다. 남북 전쟁이 끝난 1865년, 미국은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며 프랑스의 철수를 요구했고, 결국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베니토 후아레스가 이끄는 멕시코 공화파(미국의 지원을 받음)가 막시밀리안을 처형했다.[23]
쿠바 문제 역시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관계의 주요 쟁점이었다. 1854년 오스텐드 선언을 통해 미국 외교관들은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매입하거나, 거부 시 전쟁까지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미국은 쿠바가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되,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강대국의 손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본격화했다. 1879년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페루에 대한 자국의 상업적 이익 보호와 영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조기 종전을 시도했으나, 칠레의 반발로 실패하고 오히려 칠레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24][25] 1880년대 제임스 G. 블레인 국무장관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미국의 영향권 아래 두고 시장을 개방하려는 이른바 '빅 브라더 정책'을 추진했으며, 1889년 제1차 미주 국제 회의를 주최했다.


* 영국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국경
* 현재의 국경 (대략) 및
* 베네수엘라가 주장하는 극단적인 국경
1895년 베네수엘라와 영국령 기아나 간의 국경 분쟁(1895년 베네수엘라 위기)은 미국 외교 정책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영국이 분쟁 지역 전체에 대한 중재를 거부하자,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은 먼로 독트린을 근거로 강력하게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 결국 영국은 미국의 중재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 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고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26][27][28]

19세기 말, 쿠바에서 스페인 통치에 대한 독립 운동이 격화되자 미국 내 여론은 쿠바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특히 1898년 2월,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USS ''메인'' 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하여 26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29], 황색 언론의 반스페인 선동과 맞물려 미국 내 여론은 전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30][31] 윌리엄 매킨리 행정부는 스페인에 쿠바 통제권 포기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스페인이 이를 거부하자 1898년 4월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32][33]
전쟁은 미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10주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은 쿠바, 필리핀 등지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했다.[34][35][36] 전쟁 결과, 1898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으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했다. 필리핀 할양의 대가로 미국은 스페인에 2000만달러(1898년 기준)를 지불했다.[37]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카리브해와 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쿠바는 1901년 플랫 수정안에 따라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2. 2. 미국의 영향력 확대 (19세기 말 ~ 20세기 초)
- 영국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국경
* 현재의 국경 (대략) 및
* 베네수엘라가 주장하는 극단적인 국경]]
1895년 영국-베네수엘라 국경 분쟁은 미국의 외교 정책이 외부 지향적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근거로 분쟁에 개입하여 영국에게 중재를 강제했고, 이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과시하며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28] 이 사건은 먼로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개입주의 정책의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더욱 가속화했다. 쿠바의 독립 운동과 아바나 항구에서의 USS 메인호 침몰 사건[29]을 계기로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조지프 퓰리처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같은 언론인들은 황색 언론을 통해 반스페인 감정을 부추기며 전쟁 여론을 조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30][31] 전쟁은 미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10주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34][36] 1898년 파리 조약 결과,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했고, 미국은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획득했다. 필리핀 양도에는 미국이 스페인에 2000만달러 (1898년 기준)를 지불하는 조건이 포함되었다.[37] 쿠바는 명목상 독립했지만, 1901년 미국 의회가 통과시킨 플랫 수정안[41]을 쿠바 헌법에 포함시켜야 했다.[42] 이 수정안은 미국이 쿠바의 내정에 개입할 권리를 명시하고 관타나모 해군 기지 부지를 미국에 영구 임대하도록 규정하는 등 쿠바의 주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중앙 아메리카에 운하 건설을 강력히 추진했다.[43] 당초 니카라과 운하가 고려되었으나, 루스벨트는 프랑스로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 사업권을 인수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당시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일부였는데, 콜롬비아 상원이 운하 건설 관련 헤이-에르란 조약 비준을 거부하자, 루스벨트는 파나마 분리주의자들의 반란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다. 1903년 11월, 파나마는 USS 내슈빌 등 미 해군력 지원 하에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고,[43] 곧바로 미국과 헤이-부노-바릴라 조약을 체결하여 파나마 운하 지대의 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주었다. 운하는 1914년에 개통되어 세계 무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베네수엘라가 유럽 국가들의 부채 상환 요구를 거부하자 영국, 독일, 이탈리아는 베네수엘라 해안을 봉쇄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사태에 개입하여 봉쇄를 종결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루스벨트는 1904년 먼로 독트린에 대한 루스벨트 수정안을 발표했다.[45] 이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만성적인 문제나 잘못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국제 경찰력'으로서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으로, 미국의 일방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는 소위 거친 막대 외교(Big Stick Diplomacy)로 알려진 미국의 대외 정책 기조를 보여준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행정부(1909-1913)는 필랜더 녹스 국무장관과 함께 미국의 금융 자본과 상업적 이익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달러 외교(Dollar Diplomacy)를 추진했다. 이는 특히 중앙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 미국의 금융 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한 개입으로 나타났다. 베네수엘라에서는 1914년 마라카이보 호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후안 비센테 고메스 정권이 외국 석유 회사에 유리한 정책을 펼치면서 미국과의 경제적 유대가 강화되었다.[46]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카리브해와 중앙 아메리카 지역에서 자국의 경제적, 전략적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여러 차례 군사 개입을 감행했는데, 이를 통칭하여 바나나 전쟁(Banana Wars)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와 같이 바나나 등 농산물 생산에 막대한 이권을 가진 미국 기업들의 이익과 개입이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미국은 이들 국가의 정치적 불안정이나 재정 위기 등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여 정부를 교체하거나 재정을 통제하기도 했다.
국가 | 주요 개입 시기 및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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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사실상 보호국화, 플랫 수정안 강요, 수차례 군사 개입 |
도미니카 공화국 | 1904년 재정 관리권 장악, 1916년~1924년 미군 점령 |
아이티 | 1915년~1934년 미군 점령 |
니카라과 | 수차례의 군사 개입 및 점령 (1912년~1933년 미군 점령) |
온두라스 | 미국 기업 보호 명분으로 수차례 군대 파견 (1903년, 1907년, 1911년, 1912년, 1919년, 1924년, 1925년) |
파나마 | 1903년 독립 지원 및 운하 지대 확보, 이후 지속적인 정치적 간섭 |
콜롬비아 | 바나나 학살 관련 미국 기업 이익 보호 간접 개입 |
1910년 시작된 멕시코 혁명에도 미국은 복잡하게 개입했다. 혁명으로 인해 멕시코 내 미국 기업들의 이익(광산, 석유, 철도 등)이 위협받자, 미국 정부는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세력을 지원하거나 반대 세력을 견제하는 방식으로 혁명 과정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47][48]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 헨리 레인 윌슨은 1913년 프란시스코 I. 마데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암살한 군사 쿠데타에 연루되기도 했다. 우드로 윌슨 행정부 시기에는 두 차례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이 있었다. 1914년에는 독일로부터의 무기 반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멕시코의 주요 항구인 베라크루스를 점령했으며, 1916년에는 혁명 지도자 판초 비야가 미국 국경 도시를 공격하자 그를 체포하기 위해 멕시코 북부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 시기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정책은 경제적 이익 추구와 전략적 요충지 확보를 우선시하며 군사력을 동원한 노골적인 개입을 서슴지 않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미국의 팽창 정책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주권을 침해하고 민족 감정을 자극하여 뿌리 깊은 반미주의의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럽 열강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감소했고, 미국의 정치, 경제적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었다.[4]
2. 3. 선린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 (1930년대 ~ 194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은 해외 군사 원정에 드는 비용이 과도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1931년 1월, 당시 국무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은 1932년 니카라과 선거 이후 니카라과에 주둔한 모든 미국 군인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새로 선출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선린 정책(Good Neighbor Policy)이라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는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에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한 시도였다. 미국은 인기가 없어진 군사 개입 대신 범아메리카주의 정책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미국은 이 정책을 통해 강력한 현지 지도자 지원, 국가 방위군 훈련, 경제 및 문화적 침투, 수출입 은행 대출 제공, 재정 감독, 정치적 전복 지원 등 간접적인 방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며, 이는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평화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1933년 3월 4일, 루스벨트는 취임 연설에서 "세계 정책 분야에서 나는 이 국가를 선린 정책, 즉 자신을 확고히 존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이웃의 정책에 헌신하겠다"고 밝혔다.[50] 이 입장은 1933년 12월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미주 국가 회의에서 루스벨트의 국무 장관 코델 헐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헐은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내정 또는 외정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결의안을 지지했다.[51] 같은 해 12월, 루스벨트는 "지금부터 미국의 확고한 정책은 무력 개입에 반대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52]1939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책은 라틴아메리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주요 목표는 독일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며, 국제 연합 창설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는 브라질만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파병했다.[53] 영국 정보부는 루스벨트의 이러한 우려를 이용하여 1941년, 독일이 남아메리카를 장악하려 한다는 내용의 위조된 지도를 만들어 전달하기도 했다.[54] 루스벨트는 젊은 넬슨 록펠러를 새로 설립되어 자금 지원이 풍부했던 미주 문제 조정관실(Office of the Coordinator of Inter-American Affairs, OCIAA)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했다. 록펠러는 국무부를 거치지 않고 루스벨트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계로 운영되었다.[55] 반파시스트 선전 활동은 OCIAA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주도한 주요 사업이었다. 라디오 방송과 영화 제작에 수백만 달러가 투입되어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매디슨 애비뉴식 선전 기법은 미국의 과도한 영향력에 민감했던 멕시코 등지에서 반발을 사기도 했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는 전쟁에서 귀중한 동맹국이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코 시민 25만 명이 미군에 복무하고 그중 1,000명 이상이 전투 중 사망하는 내용의 협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57] 선전 활동 외에도 경제 지원과 개발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다. 전반적으로 루스벨트의 정책은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독일의 영향력을 용인하며 전쟁 막바지까지 미국의 요구에 협조하지 않았던 아르헨티나는 예외였다.[58][59]
1941년 12월, 미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후, 연방 수사국(FBI)은 15개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거주하며 전복 활동이 의심되는 독일인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을 억류하기 위해 미국으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여러 국가에서 총 4,058명의 독일인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들 중 약 10%에서 15%는 나치 당원이었으며, 나치의 해외 조직 모집책 12명과 간첩 혐의자 8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최근 탈출한 유대계 독일인 81명도 있었다. 추방된 이들 대다수는 수년 혹은 수십 년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거주해 온 평범한 독일인들이었다. 일부는 재산 몰수를 노린 부패한 현지 관리들이나, 미국 정보기관의 보상금을 노린 일반인들의 밀고로 인해 추방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멕시코는 미국의 이러한 추방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60]
2. 4. 냉전 시대 (1940년대 ~ 1980년대)
이는 공식적으로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어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봉쇄" 정책이 시작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냉전은 라틴 아메리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시작된 동서 진영 대립 구도 속에서 이른바 "자유 세계", 즉 서방 진영의 일부로 간주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무장한 소수 세력이나 외부 압력에 의한 정복 시도에 저항하는 자유 민족들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 원칙에 따라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의회에 4억달러 지원을 요청했으며, CIA (1947년 국가 안보법에 따라 창설됨)의 그리스 개입은 초기 활동 중 하나였다. 이는 미국이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명분 아래 억압적이고 부패한 정권까지 지원하는 선례를 남겼다.[62] 미국은 1949년 NATO를 창설한 북대서양 조약을 포함하여 전 세계 국가들과 방위 조약을 맺기 시작했고, 1951년에는 호주 및 뉴질랜드와 ANZUS 조약을 체결했다. 소련은 이에 맞서 유럽의 NATO와 마셜 플랜에 대응하여 COMECON 경제 협력체와 바르샤바 조약 군사 동맹을 창설하며 동유럽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 묶었다. 베를린 봉쇄 이후 발발한 한국 전쟁 (1950–1953)은 냉전의 주요 초기 분쟁 중 하나였으며,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민에 맞서 싸우던 프랑스의 역할을 이어받아 개입했다.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1947년 미주 상호 원조 조약 (일명 리우 조약 또는 TIAR)이 체결되어 "반구 방위"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1945년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 미주 전쟁 및 평화 문제 회의에서 채택된 차풀테펙 선언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미 먼로 독트린 하에 반구 방위 정책을 유지해 왔으며, 1930년대에는 추축국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군사 협력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 특히 파나마 운하에 대한 전략적 위협을 우려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은 중립을 지킨 우루과이를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부터 연합국 지지를 확보했으며, 전쟁 후 이러한 협력 관계를 영구화하고자 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1967), 벨리즈(1981), 바하마(1982)를 제외하고 1947년 이후 독립한 국가들은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1948년 4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린 제9차 미주 국가 국제 회의에서는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의 주도로 미주 기구(OAS)가 창설되었다. 회원국들은 미주 대륙에서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협력할 것을 약속했으며, 21개 미주 국가가 1948년 4월 30일 미주 기구 헌장에 서명했다.

1954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과테말라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를 전복시킨 PBSUCCESS 작전은 냉전 시대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 개입한 여러 사례 중 첫 번째 주요 사건이었다. 이는 1953년 이란에서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축출한 쿠데타 직후에 일어났다. 아르벤스는 소득 재분배와 경제적 민족주의에 초점을 맞춘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그는 과테말라 최초의 소득세를 도입하고 정부 주도 경쟁을 통해 독점을 해체하려 했으며, 특히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의 토지 400000acre 이상이 수용되었다. 과테말라 정부는 해당 토지 가치를 118.5만달러로 평가했지만,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실제 가치가 1935.5만달러라며 반발했다. 갈등의 핵심은 과테말라 정부가 당장 경작에 사용되지 않는 토지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 반면, 회사는 토양 고갈 방지와 병충해 확산 방지를 위해 여분의 토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데 있었다. 이 갈등은 아르벤스 정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미국 국무부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결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아르벤스를 공산주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온두라스에 주둔하던 과테말라 반군을 이용해 그를 축출하는 비밀 작전을 승인했다. 이는 이후 쿠바, 니카라과 등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개입에서도 반복된 논리, 즉 잠재적 공산주의 위협이 개입을 정당화한다는 논리에 기반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아르벤스는 축출되었으며 그의 개혁 조치는 무효화되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수용되었던 토지를 되찾았다.[63]
또한, 라틴 아메리카 경제 개발 지원을 목적으로 1959년 미주 개발 은행이 설립되었다.
1960년 6월, 미주 기구(OAS) 인권 위원회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권 침해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 국무부의 지지를 받은 이 위원회는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가 자국민에 대해 노골적이고 반복적인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고 비난했다. 트루히요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보고서 채택을 주도한 베네수엘라 대통령 로물로 베탕쿠르트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암살은 실패했고, OAS 조사 위원회는 트루히요 정권의 고위 관리들이 암살 시도에 연루되었음을 밝혀냈다. 베네수엘라의 집단 행동 요구에 따라 1960년 8월 20일, OAS 이사회는 트루히요 정권에 대한 외교 및 경제 제재를 결의했다. 이는 OAS가 회원국에 대해 제재를 가한 첫 사례였으며, 결의안은 14대 1(도미니카 공화국 반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아이티, 파라과이, 우루과이 기권)로 통과되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모든 경제 및 외교 관계를 단절하며 지지를 표명했다.
트루히요는 1961년 5월 31일 안토니오 데 라 마자와 안토니오 임베르트 바레라 등이 주도한 소규모 그룹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어진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고, 임베르트를 제외한 공모자들은 트루히요의 아들 람피스 트루히요에게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람피스는 이후 6개월간 군 사령관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트루히요의 형제들이 귀국하여 당시 대통령 호아킨 발라게르에 대한 음모를 꾸미자, 1961년 11월 18일 미국의 국무장관 딘 러스크는 트루히요 일가가 다시 독재 권력을 잡으려 할 경우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와 함께 14척의 미국 해군 함대가 산토 도밍고 앞바다에 나타나자, 람피스와 그의 삼촌들은 11월 19일 국고에서 2억달러를 챙겨 국외로 도피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끈 쿠바 혁명은 냉전 시기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영향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쿠바는 1961년 신생 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이 되었다. 쿠바 정부가 미국 자산을 포함한 광범위한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자,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 특히 쿠바 경제의 핵심인 설탕 수입을 중단하고 석유 공급을 거부하여 쿠바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60년 3월 아바나 항구에서 프랑스 화물선 ''라 쿠브르''호가 폭발하여 75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카스트로는 미국을 배후로 지목하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빌미가 된 USS ''메인''호 침몰 사건에 비유했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64] 같은 달,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CIA에 쿠바 망명자들을 조직, 훈련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도록 비밀리에 승인했다. 이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 중인 1961년 실행되었으나 실패로 끝난 피그스 만 침공으로 이어졌다.[65]
쿠바 정부가 미국 자산을 계속 국유화하자 미국은 1960년 10월 19일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수출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쿠바는 소련과의 관계를 급속도로 강화했고, 미국은 쿠바와의 모든 공식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해 말, 미국 외교관 두 명이 쿠바에서 "테러 조장, 망명 허가, 반체제 출판물 자금 지원, 무기 밀수" 혐의로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미국은 "쿠바 프로젝트"(일명 ''몽구스 작전'')라는 이름 아래 쿠바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한 다각적인 비밀 공작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정보 작전뿐만 아니라 주요 정치 지도자 암살 시도를 포함한 정치적, 심리적, 군사적 파괴 공작이 포함되었다. 쿠바 프로젝트는 심지어 미국이 자작극 테러 공격을 벌여 쿠바에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던 노스우즈 작전과 같은 가짜 깃발 작전까지 검토했다. 이후 미국 상원 정보 특별 위원회(처치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65년 사이에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 시도가 최소 8차례 있었으며, 다른 쿠바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 계획도 존재했다.[67]
이러한 공격적인 대(對)쿠바 정책과 병행하여, 존 F. 케네디는 1961년 8월 우루과이 푼타 델 에스테에서 열린 미주 회의에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 프로그램인 진보 동맹을 출범시켰으나, 그 규모와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로물로 베탕쿠르 대통령은 집권 기간 동안 극좌 세력과 군부 내 반대파의 도전에 직면했지만, 경제 및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집권당인 베네수엘라 민주 행동당(AD)에서 분리된 세력은 베네수엘라 혁명 좌익 운동(MIR)을 결성했다. 좌익 세력은 군 기지에서 ''엘 바르셀로나조'', ''엘 카루파나조'', ''엘 포르테냐조'' 등 여러 차례 실패한 봉기를 시도했다. 일부 좌익 세력은 민주 정부 전복을 목표로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인 베네수엘라 민족 해방군(FALN)을 결성했다.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농촌과 도시에서 송유관 파괴, 시어스 백화점 폭탄 테러, 미군 대령 납치, 축구 스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납치,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등 다양한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FALN은 농촌 빈민층의 지지를 얻거나 1963년 대통령 선거를 방해하는 데 실패했다.
잇따른 공격 이후, 베네수엘라 국회는 MIR과 베네수엘라 공산당(PCV) 소속 의원들을 체포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반군에게 무기를 제공했다는 증거가 드러나자 베네수엘라는 이를 OAS에 제소했다. 한편, 미국은 1961년부터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 일어난 1963년 사이에 아르헨티나, 도미니카 공화국, 에콰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페루 등 여러 독재 정권과의 경제 및 외교 관계를 일시적으로 단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3주에서 6개월 정도의 단기간에 그쳤다. 결국 미국은 서반구 안보 협력 학교(SOA)에서 라틴 아메리카 군대에 반군 진압 전술을 훈련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진보 동맹 프로그램에는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콜롬비아에서 시행된 라소 계획과 같이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 및 경찰 지원 프로그램도 포함되어 있었다.
핵무기 경쟁이 심화되면서 두 초강대국은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려 하자 해상 봉쇄로 대응했고, 이는 세계를 핵전쟁의 문턱까지 몰고 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이어졌다.[68] 이 사건은 양측 모두 상대방의 보복 능력, 즉 상호확증파괴(MAD)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제 핵무기 사용을 주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핵 군축과 관계 개선을 위한 첫 노력들이 시작되었다.

1964년 린든 B. 존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독재 정권에 대한 차별적 정책은 중단되었다. 1964년 3월, 미국은 브라질에서 좌파 성향의 주앙 굴라르 대통령을 축출한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형제 샘 작전에 따라 필요시 직접 개입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69] 1965년에는 파워팩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도미니카 공화국에 24,000명의 미군을 파병하여 좌파 세력의 집권을 막았다. 이에 앞서 OAS는 교전 당사자들에게 적대 행위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5월 5일 OAS 평화 위원회가 산토 도밍고에 도착하여 두 번째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내전의 주요 국면은 마무리되었다. 산토 도밍고 조약에 따라 OAS는 평화 협정 이행을 감독하고 수도 전역에 식량과 의약품을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소규모 교전과 저격 등 산발적인 충돌은 계속되었다. 다음 날 OAS 회원국들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평화 유지 활동을 수행할 미주 평화군(IAPF) 창설에 합의했다. IAPF는 브라질, 파라과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군인 1,748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브라질 장군 우고 파나스코 알빔이 지휘하고 미군 장성 브루스 팔머 주니어가 부사령관을 맡았다.[70]
5월 26일부터 미군은 점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1966년 7월 1일, 내전 이후 첫 선거가 치러져 개혁당 후보 호아킨 발라게르가 전 대통령 후안 보쉬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발라게르는 국민 화합을 내세우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 1966년 9월 21일 마지막 IAPF 평화 유지군이 철수하면서 도미니카 공화국 사태에 대한 외국의 개입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한편, 미국 국제 개발처(USAID) 산하 기관으로 CIA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공공 안전 사무소는 라틴 아메리카 각국 보안군에 심문 기술, 폭동 진압 훈련을 제공하고 관련 장비를 지원했다. 우루과이에서 활동한 댄 미트리오네와 같은 미국 요원들은 고문을 체계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1970년대 내내 미국은 소위 "공산주의 전복 세력"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라틴 아메리카의 우익 군사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73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축출하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집권한 1973년 칠레 쿠데타에 대한 지원이다. 1970년대 말까지 파라과이(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 1954년 집권), 브라질(1964년 주앙 굴라르 축출 쿠데타), 볼리비아(1971년 우고 반제르 쿠데타), 우루과이(1973년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쿠데타), 아르헨티나(1976년 쿠데타) 등 남미 대부분의 국가가 군사 독재 정권, 즉 "군부"의 통치하에 놓였다.[71] 페루에서는 1968년부터 집권한 좌파 성향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장군이 군대를 동원하여 피노체트 정권의 칠레 침공을 계획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는 남부 콘 지역을 중심으로 남미 국가들의 보안 기관들이 CIA의 지원 아래 협력하여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암살하는 콘도르 작전이라는 "더러운 전쟁"을 벌였다.[12] 미국은 또한 1980년 볼리비아에서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의 코카인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이후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이 집권(1979년)하자 콘트라 반군을 훈련시켰다. 미국은 1990년대까지 이어진 엘살바도르 내전과 과테말라 내전에서도 우익 정부를 강력하게 지원했다.[72]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지원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 미주 기구 산하의 미주 인권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미국 내에서도 1976년 전 칠레 장관 올란도 레텔리에가 워싱턴 D.C.에서 암살된 사건 이후 피노체트 정권의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2. 5. 냉전 이후 시대 (1990년대 ~ 현재)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냉전이 완화되면서 남미 여러 국가에서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진행되었다. 1991년 미주 기구(OAS)는 회원국에서 쿠데타 발생 시 사무총장이 10일 이내에 상설이사회를 소집하도록 요구하는 결의안 1080을 채택하며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 시기에도 "마약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1989년 파나마를 침공하여 마누엘 노리에가를 축출하는 등 군사적 개입을 계속했다. 노리에가는 과거 중앙정보국(CIA)과 협력했던 인물이다. "마약과의 전쟁"은 이후 1990년대 후반 콜롬비아 계획과 멕시코 및 중앙아메리카의 메리다 이니셔티브로 이어졌다.1982년 아르헨티나와 영국 간의 포클랜드 전쟁 당시,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영국에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아르헨티나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부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를 도와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훈련시키는 등(작전 찰리) 협력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큰 배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은 미주상호원조조약(TIAR)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결국 멕시코는 2001년 이 조약에서 탈퇴했다.[73]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회원국으로 남아있다.

1990년대는 라틴아메리카에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강요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시대였다. 1983년 멕시코의 부채 상환 거부로 촉발된 라틴 아메리카 부채 위기 이후, 많은 국가들이 수입 대체 산업화에서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 은행, 세계 무역 기구(WTO)가 권장하는 수출 지향 산업화로 전환했다. 1994년 마이애미에서 열린 제1차 미주 정상 회담에서는 2005년까지 미주 자유 무역 지대(ALCA)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1994년 발효된 미국, 캐나다, 멕시코 간의 북미 자유 무역 협정(NAFTA)을 미주 전체로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NAFTA 발효 당일(1994년 1월 1일) 멕시코에서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이끄는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이 봉기하여 NA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
2000년대 들어 라틴아메리카 정치 지형은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했다. 여러 국가에서 사회주의 또는 좌파 성향의 정부가 연이어 선출되는 이른바 "핑크 타이드" 현상이 나타났다.[74][75][76][77][78][79][80][81]
국가 | 지도자 | 집권 연도 |
---|---|---|
베네수엘라 | 우고 차베스 | 1998년 |
브라질 | 룰라 다 실바 | 2002년 |
아르헨티나 |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 2003년 |
우루과이 | 타바레 바스케스 | 2004년 |
볼리비아 | 에보 모랄레스 | 2005년 |
칠레 | 미셸 바첼레트 | 2006년 |
니카라과 | 다니엘 오르테가 | 2006년 |
에콰도르 | 라파엘 코레아 | 2006년 |
파라과이 | 페르난도 루고 | 2008년 |
우루과이 | 호세 무히카 | 2009년 |
페루 | 오얀타 우말라 | 2011년 |
코스타리카 |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 | 2014년 |
엘살바도르 | 살바도르 산체스 세렌 | 2014년 |
멕시코 |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 2018년 |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간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주요 쟁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무역 협정과 투자 조약, 천연자원 개발 및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정치 및 안보 분야에서는 미국의 역내 영향력 행사, 군사적 협력 및 개입, 민간 군사 기업 활용 등이 주요 현안으로 다뤄진다.
이들 좌파 정부는 정책 노선과 미국에 대한 태도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대체로 ALCA에 반대하고 미국 주도가 아닌 독자적인 지역 통합을 추구하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82] 특히 우고 차베스와 에보 모랄레스는 급진적인 반미 노선을 걸었고, 룰라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뉴욕 대학교의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2006년 인터뷰에서 "한쪽에는 온건한 경제 개혁에 전념하는 행정부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반발과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의 등장이 있었다"고 분석했다.[85] 미주 문제 협의회의 래리 번스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정부가 이념적으로는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와 가깝지만, 경제적으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의존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82]
미국의 영향력 약화는 2005년 미주 기구 사무총장 선거에서도 드러났다. 미국이 지지한 멕시코의 루이스 에르네스토 데르베스 후보가 칠레의 호세 미겔 인술사 후보에게 패배했는데, 이는 OAS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술사는 메르코수르 국가들과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의 지지를 받았다.
ALCA 추진은 2005년 마르델플라타 미주 정상 회담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동력을 잃었다. 하지만 미국은 개별 국가와의 자유 무역 협정(FTA) 및 양자 투자 조약(BIT) 체결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경제 통합을 계속 추진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칠레(2003), 콜롬비아(2006), 페루(2006) 등 다수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FTA를 체결했다.[86]
BIT는 외국인 직접 투자 조건을 규정하며, 투자 기업에게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수용으로부터의 보호, 자금 이체 자유 등을 보장한다. 비판가들은 미국이 다자 협상보다 양자 협상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용이하다고 지적한다.[96] 투자 기업과 국가 간 분쟁 발생 시, 기업은 세계 은행 산하 국제 투자 분쟁 해결 센터(ICSID)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0년 코차밤바 물 전쟁 당시 볼리비아에서 추방된 미국 기업 벡텔이 볼리비아 정부를 상대로 5000만달러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으나, 국제적인 반대 여론에 밀려 2006년 소송을 취하했다.[97] 미국은 아르헨티나(1994), 볼리비아(2001), 에콰도르(1997), 온두라스(2001) 등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BIT를 체결했다.
ALCA에 대한 대안으로 차베스는 아메리카 볼리바르 동맹(ALBA)을 출범시켰다. 베네수엘라, 쿠바, 볼리비아 등이 참여했으며, 니카라과도 2006년 다니엘 오르테가 집권 후 합류했다. 차베스는 또한 카리브해 국가들에 저렴한 석유를 공급하는 페트로카리브 동맹을 추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베스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를 입은 미국에 자회사 시토고를 통해 석유 지원을 제안하기도 했다.[98][99]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리우 조약(TIAR)을 발동했으나, 2003년 이라크 전쟁에는 도미니카 공화국,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등 소수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만이 스페인군과 함께 플러스 울트라 여단을 구성하여 파병에 참여했다. 스페인 철수 후 대부분의 국가가 병력을 철수했으며, 엘살바도르만 주둔을 유지했다. 한편, 미국의 민간 군사 기업(PMC)인 트리플 캐노피(Triple Canopy, Inc.)가 온두라스의 옛 콘트라 기지였던 레파테리케에서 라틴아메리카 출신 용병들을 훈련시켜 이라크에 파견한 사실이 2005년 드러나기도 했다.[100][101]
천연자원을 둘러싼 갈등 역시 지속되었다. 2003-2004년 볼리비아 가스 전쟁은 미국 캘리포니아로 천연가스를 수출하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시위대는 미주 자유 무역 지대(ALCA)에도 반대했다. 이 사건은 결국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대통령의 사임과 에보 모랄레스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모랄레스 정부는 2006년 주요 외국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던 가스 산업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는 볼리비아 정부의 에너지 수입을 크게 증대시켰지만,[103] 최대 투자국 중 하나였던 브라질 등 관련국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104][105] 미국의 미 국무부나 군부가 개입할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실제적인 군사 행동보다는 라틴아메리카 군대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통해 상황을 관리하려 할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다.[82]
2010년대에도 좌파 정부의 집권은 이어졌으나(페루,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멕시코 등), 동시에 우파 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치 지형은 계속 변화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CAFTA 반대를 내세운 중도 진보 성향의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가 당선되어 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미 진보 정부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87] 반면,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88][89][90]
지역 통합 노력은 계속되어, 메르코수르는 유럽 연합, 이스라엘[91], 이집트[92] 등과 FTA 협상을 진행했다.[93] 태평양 연안 국가들(칠레, 멕시코, 페루 등)은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함께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을 추진했으나, 2017년 미국의 탈퇴 후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CPTPP)으로 재편되었다.[94][95] 2019년에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브라질의 우파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만나 양국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기도 했다.
3. 주요 쟁점
3. 1. 경제 관계
미국은 양자 간 자유 무역 협정 외에도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다수의 양자 투자 조약(BIT)을 체결하여 외국인 직접 투자 조건을 설정했다. 이러한 조약에는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수용으로부터의 보호, 자금의 자유로운 이체, 완전한 보호 및 안전 보장 등이 포함된다. 일각에서는 미국 협상가들이 개별 국가와의 양자 협상을 통해 협상의 속도, 내용, 방향을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96]
다국적 기업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 간 특정 투자 관련 분쟁 발생 시, 해당 기업은 세계 은행 산하 국제 법원인 국제 투자 분쟁 해결 센터(ICSID)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0년 코차밤바 시위 당시 볼리비아에서 추방된 미국계 다국적 기업 벡텔의 소송이 있다. 당시 현지 주민들은 세계 은행의 요구에 따른 상수도 회사 민영화와 벡텔의 부실한 수자원 관리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벡텔은 볼리비아 정부에 5000만달러의 배상을 요구했으나, 국제적인 항의 여론에 밀려 2006년 소송을 취하했다.[97]
미국과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 간에 체결된 주요 BIT 현황은 다음과 같다. (날짜는 조약 발효일 기준)
구분 | 국가 | 발효 연도 (서명 연도) |
---|---|---|
비준 및 발효 | 아르헨티나 | 1994년 |
볼리비아 | 2001년 | |
에콰도르 | 1997년 | |
그레나다 | 1989년 | |
온두라스 | 2001년 | |
자메이카 | 1997년 | |
파나마 | 1991년 (2001년 개정) | |
트리니다드 토바고 | 1996년 | |
서명 (비준 미완료) | 엘살바도르 | 1999년 |
아이티 | 1983년 | |
니카라과 | 1995년 |
천연자원 확보를 둘러싼 갈등과 미국의 상업적 이익 보호는 과거 미국이 지원했던 바나나 공화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문제이다. 2003년에서 2004년 사이 발생한 볼리비아 가스 전쟁은 이러한 갈등의 현대적 사례이다. 남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한 볼리비아에서, 태평양 LNG 컨소시엄이 칠레를 경유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로 천연가스를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촉발되었다. 이는 태평양 전쟁(1879-1884)으로 태평양 연안 영토를 상실한 볼리비아 국민들의 반감을 자극했다. 볼리비아 노동자 연합(COB)과 펠리페 키스페가 이끄는 원주민 파차쿠티 운동(MIP) 주도의 시위에서는 미주 자유 무역 지대(FTAA, ALCA)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높았다. 결과적으로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대통령이 사임하고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배경이 되었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선거 공약에 따라 남아메리카 2위 규모의 가스 매장량 국유화를 발표했다. 그는 폭력적인 반발을 우려하여 수용이나 몰수와 같은 용어 사용을 피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알바로 가르시아 부통령에 따르면, 국유화 조치로 정부의 에너지 관련 수입은 다음 해 7.8억달러까지 급증하여 2002년 대비 거의 6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03]
이 조치는 볼리비아의 최대 외국인 투자자 중 하나이자 가스 매장량의 14%를 통제하던 브라질 국영 에너지 기업 페트로브라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104]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 중 하나인 볼리비아는 과거 정부가 시행한 충격 요법과 코카 재배 제한 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1980년대와 90년대에 대규모 시위를 겪은 바 있다. 실라스 론도 브라질 에너지 장관은 모랄레스의 발표를 "비우호적"이라고 비난했다.[105] 로이터 통신은 볼리비아의 조치가 우고 차베스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세계 5위 석유 수출국에서 시행한 강제 계약 변경 및 소급 과세 인상과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과거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전 대통령 시절 민영화되었던 볼리비아 국영 석유회사 YPFB는 외국 기업에 생산량의 약 50%를 제공하며 용역 비용을 지불했으나, 새로운 법령은 국가가 두 개의 가장 큰 가스전에서 생산량의 82%(외국 기업 지분 18%)를 확보하도록 규정했다. 초기에는 반발도 있었으나, 스페인계 에너지 기업 렙솔은 볼리비아 정부와의 협력 의사를 밝혔고, 페트로브라스 역시 신규 투자 취소 입장을 철회했다.[82]
하지만 래리 번스와 같은 분석가들은 국유화 조치가 큰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 국무부가 강경 노선을 택하도록 압박할 수 있으며, 심지어 CIA나 미군 개입 가능성까지 제기되지만, 실제로는 라틴 아메리카 군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82]
3. 2. 정치·안보 관계
2003년 6월, 도미니카 공화국,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군인 약 1,200명은 스페인 군대(1,300명)와 함께 이라크에서 플러스 울트라 여단을 결성했다. 이 여단은 스페인이 이라크에서 철수한 후인 2004년 4월 해체되었으며, 엘살바도르를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병력을 철수했다.2005년 9월에는 이라크에 주둔한 민간 군사 기업인 트리플 캐노피(Triple Canopy, Inc.)가 온두라스 레파테리케에서 라틴 아메리카 출신 용병들을 훈련시키는 사실이 드러났다.[100] 레파테리케는 과거 콘트라의 훈련 기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 사건으로 칠레 용병 105명이 온두라스에서 추방되었다. 온두라스 신문 ''라 트리부나(La Tribuna)''에 따르면, 유어 솔루션스(Your Solutions)라는 회사는 11월 하루 동안 온두라스인 108명, 칠레인 88명, 니카라과인 16명을 이라크로 보냈다.[101] 약 700명의 페루인, 250명의 칠레인, 320명의 온두라스인이 바그다드 그린존에서 트리플 캐노피 소속으로 일했으며, 이들은 북미 출신 직원들에 비해 절반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 또한 칠레에서는 퇴역 군인 마리나 오스카르 아스페가 트리플 캐노피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었다. 아스페는 과거 FPMR의 21세 회원 마르셀로 바리오스 안드라데 암살에 가담한 인물로, 안드라데는 레티그 보고서의 희생자 명단에, 아스페는 ''2001년 고문 반대 윤리 위원회'' 명단에 올라 있다. 트리플 캐노피는 페루에도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100]
2007년 7월, 당시 엘살바도르 대통령 안토니오 사카는 이라크 파병 병력을 380명에서 280명으로 감축했다. 2003년 파병 이후 엘살바도르 군인 4명이 다양한 상황에서 사망했으나, 이라크 재건을 목표로 한 200개 이상의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성과도 있었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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