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당의 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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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민주당의 파벌은 일본 자유민주당 내의 공식, 비공식 조직으로, 당내 의원들의 정치적 성향, 인맥, 정책 노선에 따라 형성된다. 파벌은 회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조각, 개각 시 각료 및 당직 배분, 정치 자금 관리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자민당은 1955년 보수합동 이후 파벌 정치를 통해 다양한 가치관을 수용하며 장기 집권의 기반을 다졌지만, 파벌 간 항쟁, 금권 정치 등의 폐해도 존재했다. 2024년 현재 지공회, 헤이세이 연구회, 지수회 등 파벌이 존재하며, 파벌 해소 시도와 정책 집단으로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 정치,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계파 정치와 비교하여, 다양성 확보와 갈등 심화라는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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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당의 파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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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자유민주당 파벌 (自由民主党の派閥, Jayūminshutō no Habatsu) |
로마자 표기 | Jayuminshutang-ui Pabeol |
정의 | 일본 자유민주당 내의 정치적 하위 그룹 |
성격 | 계파 정치 자금 및 직위 배분 정책 결정 영향력 행사 |
역사 | |
기원 | 전전 일본 정당의 배경 전후 보수합동 과정에서 형성 |
주요 사건 | 파벌 영수들의 총리 경쟁 정치 스캔들 연루 (최근 스캔들) 파벌 해소 및 재편 (최근 주요 파벌 해산) |
기능 | |
자원 배분 | 정치 자금, 당직, 공직 배분 |
정책 결정 | 당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 행사 |
인재 육성 | 차세대 정치인 양성 및 지원 |
특징 | |
세력 기반 | 국회의원 중심 지역 기반 특정 산업 또는 이익 단체와 연계 |
조직 구조 | 영수를 중심으로 한 수직적 구조 사무소 및 자금 관리 시스템 보유 |
운영 방식 | 정기적인 회합 및 연수 파벌 간 연합 및 대립 |
규모 | 과거 거대 파벌 존재 현재 소규모 그룹화 추세 |
주요 파벌 (2024년 해산 시점) | |
세이와 정책 연구회 (清和政策研究会) | 별칭: 아베파 (安倍派) 과거 최대 파벌 후쿠다 다케오, 모리 요시로, 아베 신조 등 총리 배출 |
시코카이 (志公会) | 별칭: 아소파 (麻生派) 아소 다로가 이끄는 파벌 정책 논쟁 활발 |
고치카이 (宏池会) | 별칭: 기시다파 (岸田派) 기시다 후미오가 이끄는 파벌 온건 보수 성향 |
스이요카이 (水曜会) | 별칭: 모리야마파 (森山派) 중견 의원 중심 정책 중심의 활동 |
지수카이 (二階派) | 별칭: 니카이파 (二階派) 니카이 도시히로가 이끄는 파벌 영향력 있는 정책 결정 |
파벌 해소 움직임 (최근) | |
배경 | 정치 자금 스캔들 국민적 비판 당내 쇄신 요구 |
경과 | 기시다파 해산 (2024년 1월) 니카이파 해산 (2024년 6월) 아베파 해산 (2024년 1월) |
전망 | 파벌 정치 약화 정책 중심의 정당 운영 가능성 새로운 정치 세력 등장 가능성 |
비판적 시각 | |
폐해 | 정경 유착 부패 정책 결정 왜곡 당내 민주주의 저해 |
긍정적 기능 | 정치인의 성장 발판 정책 다양성 확보 당내 견제와 균형 |
2. 통칭
자민당 파벌은 정식 명칭이 있지만, 언론 등에서는 각 파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의원의 성씨를 따서 '~파'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6] 파벌 회장이 총재가 되면 파벌을 이탈하는 관행이 있지만, 이 경우에도 파벌 명칭은 바뀌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민당의 당칙에는 파벌에 대한 규정이 없지만, 각 파벌은 대체로 비슷한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다.[6]
예외적으로, 다나카 가쿠에이는 록히드 사건으로 자민당을 탈당한 후에도 파벌의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다나카파'로 불렸다.[30] 다나카 가쿠에이는 파벌 회장을 맡은 적은 없었지만, 파벌 운영 자금 등 모든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조직
파벌의 영수는 회장이라 부르며 회장은 파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조각·개각 때 각료와 당직을 배분하고 정치 자금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 외에 중요 간부로는 회장대행, 좌장, 사무총장 등이 있다.
자민당 내 파벌의 직책은 대략 다음과 같다.
4. 역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보수 정치권은 입헌정우회의 계보를 이은 일본자유당, 입헌민정당의 계보를 이은 일본진보당, 일본협동당으로 재편되어 출발했다. 이후 세 정당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을 탄생시켰다. 이 과정에서 인맥·경력·사상·정책 등이 가까운 의원들끼리 모이면서 형성된 것이 현재 자민당 파벌의 뿌리다.
1956년 12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계기로 8개 파벌이 정립되었지만, 파벌 간의 극심한 대립을 겪었다. 당시 시행되던 중선거구제는 이러한 파벌 간 대립을 심화시켰고, 소규모 파벌들은 도태되어 1970년대에는 5개 파벌로 수렴되었다.
과거에는 파벌 내 결속을 위해 여름에는 "빙과 비용", 겨울에는 "떡값" 등으로 불리는 자금을 소속 의원에게 지원하기도 했다. 신인 의원은 진갓 의원으로서 각 파벌에 들어가 당선 횟수와 직책을 거듭하며 파벌의 의향에 따라 정치 활동을 했다. 당시 중선거구제에서 자민당은 각 선거구에 복수 후보자를 옹립했지만, 같은 선거구에서 같은 파벌 소속 후보자가 복수로 출마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같은 선거구에서 자민당 후보자끼리 표를 빼앗는 일은 있었다.
파벌 정치는 연립 정권과 유사하며, 자민당에 다양성을 부여하여 정치 변동에 대응할 수 있는 넓은 지지 기반을 가진 정당으로 만들었다. 가치관이 다양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정당제는 지지 기반 다양화에 맞춰 다당화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고, 군소 정당 난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파벌 간 관계는 험악했지만, 일본 사회당이 야당으로 남는 것을 선택한 상황에서 정치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공명당을 포함하여 여당으로 남았던 측면이 있다. 파벌 해소가 요구되던 시기에는 공부회나 신인 의원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했고, 그룹이라는 명분으로 실질적인 파벌 유지가 이루어졌다.
파벌 정치는 정당 정치 관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파벌 영수는 정치 자금이나 포스트 알선 등으로 지원을 기대받고, 자금이 부족한 젊은 의원이나 입각 적령기 중견 의원은 파벌 영수 의향에 크게 좌우된다. 이로 인해 총재 판단을 무시한 파벌 영수 의향이 영향력을 갖는 경우가 많아 장로 지배, 밀실 정치, 금권 정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쿠후쿠 전쟁처럼 파벌 항쟁이 각 파벌 사정("원념")을 중심으로 다투어져 정책 과제가 뒷전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당선된 신인 의원은 파벌로부터 권유를 받지만, 파벌 사상이나 지지 단체 의향과 맞지 않는 자에게는 권유가 오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37]
1970년대에는 다나카 파와 후쿠다 파 간의 가쿠후쿠 전쟁이 벌어졌다. 다나카 파가 세력을 얻고, 조정과 로비 등 인심 장악술로 여러 번 자파벌 의원의 총재 취임을 획책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모여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청람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고노 요헤이의 "정치 공학 연구소", 고사카 토쿠사부로의 "신풍 정치 연구회", 나카가와 이치로의 "자유 혁신 동우회", 이시하라 신타로의 "여명의 회", 타케무라 마사요시의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 83회 소속 고이즈미 아이들을 지원한 타케베 츠토무의 "새로운 바람" 등은 대표자를 영수로 하는 파벌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시바 시게루의 "사와라비회"와 야마모토 유지의 "노조미", 그리고 이시바 시게루를 중심으로 한 야마모토 유지의 "무파벌 연락회"가 모체가 되어 이시바 파가 결성되었으나, 이후 이시바 그룹으로 조직 형태를 변경했다.
4. 1. 5대 파벌 시대
1956년 12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계기로 8개 파벌이 정립되었지만, 1960년 이케다 하야토가 총재가 될 무렵, 신안보조약 발표, 전국민 사회보험 제도 등의 정책 문제와 총재직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파벌 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당시 시행되던 중선거구제는 이러한 파벌 간 대립을 심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고, 중선거구제에 적응하지 못한 소규모 파벌들은 도태되어 1970년대에는 5개 파벌로 수렴되었다. 당시 5대 파벌은 십일회(후쿠다파), 목요연구회(다나카파), 굉지회(오히라파), 춘추회(나카소네파), 정책연구회(미키파)였다.[39]5대 파벌이 자민당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파벌 회장들이 번갈아 총재 자리를 차지했고, 파벌 간 항쟁도 치열했다.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 총재의 급서 이후 스즈키 젠코가 파벌 회장이 아니면서 총재직에 오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스즈키 젠코 내각은 5대 파벌을 모두 참여시키는 총주류 체제를 구축하여 파벌 간 항쟁은 다소 진정되었다.
4. 2. 파벌의 변용
1989년 리크루트 사건을 계기로 파벌 회장이 아닌 우노 소스케가 총재로 취임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후에도 파벌 회장이 아닌 사람이 총재로 당선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선거를 앞두고 총재가 당을 대표하는 얼굴로서의 가치에 무게가 실리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49][50] 하지만 이 시기에도 다케시타 노보루의 파벌인 경세회의 지배는 계속 이어졌다.1990년대 중선거구제가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로 바뀌면서 파벌의 역할도 변화했다. 중앙당이 강력한 공천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파벌은 총재 자리를 다투는 집단에서 각료와 당직을 차지하는 역할로 바뀌었고, 이는 파벌 회장이 반드시 총재직을 차지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다.[49][50]
4. 3. 최근 동향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면서 의석이 크게 줄었고, 각 파벌에서 이탈하는 의원이 잇따랐다.[51] 2010년에는 신당 창당과 공천 싸움을 둘러싸고 탈당자가 계속 발생하여 파벌 탈퇴로 이어졌다. 하토야마 구니오 등의 탈당으로 무파벌 의원이 33명이 되어, 누카가 파벌을 제치고 자민당 내 제2 세력이 되었다. 2011년에는 무파벌 의원이 48명으로 늘어나 자민당 내 제1 세력이 되었다.하지만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의원 수가 크게 증가했고, 각 파벌은 다시 내실을 다졌다.[51][52][53][54][55]
2023년~2024년 일본 정치 자금 스캔들의 결과로, 2024년 1월에 세 개의 주요 파벌이 해산을 발표했다.[15]
파벌명 | 이념 | 정치적 입장 | 해산 당시 리더 | 해산 당시 구성원 |
---|---|---|---|---|
세이와 정책 연구회 | 일본 민족주의, 국가 보수주의 | 우익에서 극우 | 집단 지도 체제 | 98명 |
고치카이 | 온건 보수주의 | 중도[7]에서 중도 우파 | 기시다 후미오 | 46명 |
시스이카이 | 보수주의, 다원주의 | 우익 | 니카이 토시히로[16] | 39명 |
2024년 1월 19일, 정치 자금 파티를 둘러싼 뒷돈 문제를 이유로[56], 고치 정책 연구회(기시다파)[57], 지수회(니카이파)[58], 세이와 정책 연구회(아베파)[59]가 해산 방침을 결정했다. 종래의 "파벌"은 "정책 집단"[60]으로 개편되어 사실상 존속하는 형태가 되었다.[61] 한편, 당내 무파벌 의원 연맹은 자민당에 존재하는 모든 파벌의 해소를 제창했다.[62]
같은 해 1월 23일, 고치회는 임시 총회를 열어 파벌을 공식적으로 해산했다.[26] 같은 날 23시, 모리야마파는 근미래 정치 연구회를 해산할 의향을 굳혔다.[64] 1월 25일, 모리야마파는 임시 총회를 열어 파벌을 공식적으로 해산했다.[65]
1월 26일, 파벌 형식을 취하지 않은 타니가키 그룹(유린회)이 해산을 결정했다.[67]
2월 1일, 세이와 정책 연구회가 마지막 의원 총회를 열어 청산 위원회 설치를 확인했다.[68]
4월 17일, 모테기파의 모테기가 정치 단체로서의 신고 철회 방침을 결정하고, "앞으로는 국내외 과제 해결을 위해, 동료들이 문제 의식과 정책 방향성을 공유할 수 있는 즐거운 그룹을 목표로 하고 싶다"고 향후 방침에 대해 말했다.[69]
4. 4. 계보

자유민주당의 파벌은 점령기 동안의 전신 정당과 정치적 발달에서 시작되었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자신의 자유당을 이끌고 1946년 일본 총선에서 승리(4월 10일)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숙청되었다. 하토야마는 당의 지휘권을 요시다 시게루에게 넘겼고, 요시다는 하토야마가 복귀하면 다시 지휘권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하토야마는 1951년 8월 6일에 숙청에서 해제되었지만, 요시다는 지휘권을 넘겨줄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954년 11월 24일, 하토야마는 요시다의 당에서 이탈한 하토야마 지지자들의 파벌과 민주당을 결성하는 것을 도왔다. 1955년, 자유당(요시다)과 민주당(하토야마)이 합당하여 자유민주당을 결성했을 때, 각 당은 4개의 파벌을 가져와 새 당에는 총 8개의 파벌이 형성되었다.[1]
자민당 파벌은 크게 보수본류와 보수방류로 나눌 수 있다.
- '''보수본류'''
- 요시다 시게루 계열
- '''굉지회 계''' : 이케다 파 → 마에오 파 → 오히라 파 → 스즈키 파 → 미야자와 파 → 가토 파 (고노 그룹 → 아소 파 → 아소 파) (오자토 파 → 다니가키 파 → 고가 파에 합류) → 호리우치 파 → 니와・고가 파 → 고가 파 → 기시다 파 (다니가키 그룹)
- '''목요연구회 계''' : 사토 파 (호리 파 → 후쿠다 파에 합류) → 다나카 파 (니카이도 파) → 다케시타 파 → 오부치 파 (하타・오자와 파 → 신생당에 합류) → 오부치 파 → 하시모토 파 → 쓰시마 파 → 누카가 파 → 다케시타 파 → 모테기 파
- 오가타 파 → 이시이 파
- 오노 파 (무라카미 파 → 미즈타 파)
- '''보수방류'''
- 하토야마 이치로 계열
- '''십일회 계''' : 기시 파 (후지야마 파 → 미즈타 파에 합류) (난조・히라이 파 → 후쿠다 파에 합류) (가와시마 파 → 시나 파) - 후쿠다 파 → 아베 파 → 미쓰즈카 파 (가토 파 → 신생당에 합류) → 미쓰즈카 파 (가메이 그룹 → 무라카미・가메이 파에 합류) → 모리 파 → 마치무라 파 → 호소다 파 → 아베 파
- '''춘추회 계''' : 고노 파 (모리 파 → 소노다 파 → 후쿠다 파에 합류) → 나카소네 파 → 와타나베 파 (야마사키 파 → 이시하라 파 → 모리야마 파) → 무라카미 파 → 무라카미・가메이 파 → 에토・가메이 파 → 가메이 파 (히라누마 그룹 → 일본의 마음에 합류) → 이부키 파 → 니카이 파
- 이시바시 파 → 이시다 파 → 미키 파에 합류
- '''정책연구회 계''' : 마쓰무라・미키 파 (마쓰무라 파) → 미키 파 (하야카와 파 → 후쿠다 파에 합류) → 고모토 파 → 고무라 파 → 오시마 파 → 산토 파 → 아소 파에 합류
- 니카이 파 → 이부키 파에 합류
- 이시바 그룹 → 이시바 파 → 이시바 그룹
5. 파벌 일람
2024년 현재, 자민당에는 다음과 같은 파벌들이 존재한다.[6]
명칭 | 통칭 | 회장 | 중의원 의원 수 | 참의원 의원 수 | 총 의원 수 | 비고 |
---|---|---|---|---|---|---|
지공회 | 아소파 | 아소 다로 | 40 | 15 | 55 | 굉지회와 정책연구회의 흐름을 잇는 파벌. |
헤이세이 연구회 | 모테기파 | 모테기 도시미쓰 | 31 | 17 | 48 | 자유당의 사토 에이사쿠를 뿌리로 하는 파벌. |
지수회 | 니카이파 | 니카이 도시히로 | 30 | 9 | 39 | 일본민주당의 고노 이치로를 뿌리로 하는 파벌. |
무파벌 | - | - | 157 | 76 | 233 | |
합계 | 259 | 117 | 376 | - |
각 파벌은 공식 명칭이 있지만, 언론에서는 주로 현재 지도자의 이름으로 불린다.[6] 보도 기관에서는 파벌의 호칭을 각 파벌 회장의 성씨를 따서 "○○파"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30] 회장이 공석일 경우, 전 회장의 성씨를 따서 "구○○파"라고 부르기도 한다.[31] 예외적으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사망한 후에는 "아베파"라는 통칭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32]
내각총리대신이나 자유민주당 집행부에 취임한 사람은 재임 기간 동안 파벌을 이탈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 경우, 복귀를 고려하여 파벌 명칭을 변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단기간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다카무라 마사히코 부총재 취임 및 오시마 리모리 중의원 의장 취임으로 파벌 명칭이 변경된 예도 있으며, 회장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파벌 명칭이 변경되기도 한다. 총재 취임 후에도 파벌 회장직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으나,[33] 2023년 12월, 파벌의 뒷돈 문제로 인해 기시다 후미오 총재는 파벌을 이탈했다.[34][35][36] 파벌에 복귀하지 않은 예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재 등이 있다.
1993년 하야 이후, 총재 자리는 파벌 회장이 경쟁하는 것에서 선거의 얼굴로서의 가치에 더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변화했다.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 도입으로 후보자 선정 과정에서 자유민주당 본부의 역할이 커지면서, 파벌의 존재 목적이 변질되었다는 지적도 있다.[49][50]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하면서, 각 파벌에서 탈퇴자가 속출했다. 파벌이 점심 식사 모임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2011년에는 무파벌 의원이 자민당 내 제1 세력이 되기도 했다.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파벌의 내실에 큰 변화가 생겼다.[51][52][53][54][55]
2022년 시점에는, 대부분의 파벌 영수가 총재 후보조차 아니고, 친목회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39]
명칭 | 통칭 | 회장 | 세력 | 중의원 | 참의원 | 비고 | 선대 회장 | 선선대 회장 |
---|---|---|---|---|---|---|---|---|
지공회 | 아소파 | 아소 다로 | 45 | 31 | 14 | 고치카이에서 분열된 대용회와 정책 연구회의 흐름을 잇는 자민당 유일의 파벌. | 산토 아키코[70] 아소 다로[71] | 오시마 타다모리[70] 고노 요헤이[72] |
무파벌 | - | - | 258 | 159 | 99 | |||
중의원 의장・참의원 의장 | - | - | 2 | 1 | 1 | |||
계 | 305 | 191 | 114 |
- 굵은 글씨는 총재 경험자이다. (2024년 7월 30일까지의 세력 관계)
이 외에도, 무파벌 의원 간의 연계를 모색하는 다양한 그룹들이 존재한다. 제2차 아베 내각에서는 의원 연맹인 『창생 "일본" (아베 신조 회장) 』에 참가하는 의원이 많이 등용되었다. 또한, 자유민주당 청년국 주최 공부회가 열리면서 파벌의 역할이 분담되고 있다.
6. 쇠퇴와 해소의 움직임
자유민주당의 파벌은 오랜 기간 동안 많은 폐해를 누적해왔기 때문에, 파벌 해소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963년 가을 이케다 하야토 총재 때 파벌 해소가 제안되었지만, 실질적인 해소로 이어지지 않았다.[56]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1976년 총선에서 대패한 자민당은 파벌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했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파벌이 다시 부활했다. 1979년 총선 패배 후 1980년에도 파벌 해소 주장이 있었지만, 총선 대승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면서 파벌 이탈자가 속출했고, 2011년에는 무파벌 의원이 최대 파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의석을 회복하면서 각 파벌은 다시 내실을 다졌다.
2024년 1월, 정치 자금 파티를 둘러싼 비자금 문제[56]로 세이와 정책 연구회(아베파)[59], 고치카이(기시다파)[57], 시스이카이(니카이파)[58]가 파벌 해소를 결정했다. 하지만 종래의 파벌이 정책 집단[60]으로 개편되어 사실상 존속하는 형태였다.[61] 한편, 당내 무파벌 의원 연맹은 자민당에 존재하는 모든 파벌의 해소를 제창했다.[62] 근미래정치연구회(모리야마파)와 파벌 형식을 취하지 않던 유린회(타니가키 그룹)도 파벌 해소를 선언했지만,[67] 지공회(아소파)와 헤이세이 연구회(모테기파)는 파벌 존속 방침을 세웠다.
해산 당시 3개 파벌의 상세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이념 | 정치적 입장 | 해산 당시 리더 | 해산 당시 구성원 |
---|---|---|---|---|
세이와 정책 연구회 | 일본 민족주의, 국가 보수주의 | 우익에서 극우 | 집단 지도 체제 | 98 |
고치카이 | 온건 보수주의 | 중도[7]에서 중도 우파 | 기시다 후미오 | 46 |
시스이카이 | 보수주의, 다원주의 | 우익 | 니카이 토시히로[16] | 39 |
2024년 1월 23일, 고치카이는 파벌을 공식적으로 해산했고,[26] 같은 날 근미래정치연구회도 해산 의향을 굳혔다.[64] 1월 25일, 근미래정치연구회는 파벌을 공식 해산했다.[65]
2월 1일, 세이와 정책 연구회는 청산 위원회 설치를 확인했고,[68] 4월 17일, 모테기 도시미쓰는 헤이세이 연구회의 정치 단체 신고 철회 방침을 결정하고, 앞으로는 동료들과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그룹을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다.[69]
7. 평가와 폐해
파벌 정치는 자유민주당에 다양성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양한 가치관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여, 정치적 변동 속에서도 자민당이 장기 집권하며 폭넓은 지지 기반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또한, 초선 의원들을 위한 학습 모임 및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하지만 파벌은 회장과 간부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자금과 조직력이 부족한 소장파 의원들은 파벌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기 쉬워 소신 있는 정치를 펼치기 어려웠다. 파벌 간 갈등이 발생하면 총재라도 다른 파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 당의 단합을 저해했다. 원로 정치인들에 의한 지배, 밀실 정치, 금권 정치의 원인으로도 지적받으며, 각복전쟁과 같은 파벌 간 항쟁은 정책을 등한시하고 당의 통합을 방해하기도 했다.[6]
파벌 영수는 정치 자금이나 요직 배정 등으로 지원을 기대받았고, 자금이 부족한 젊은 의원이나 입각 적령기의 중견 의원은 파벌 영수의 의향에 크게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총재의 판단을 무시한 파벌 영수의 의향이 영향력을 갖는 경우가 많아 장로 지배, 밀실 정치, 금권 정치의 원인이 되었다. 가쿠후쿠 전쟁으로 대표되는 파벌 항쟁은 각 파벌의 사정("원념")을 주제로 다투어져, 정책 과제가 뒷전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당선된 신인 의원은 파벌로부터 권유를 받지만, 파벌의 사상이나 지지 단체의 의향과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권유가 오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37]
8. 한국 정치와의 비교 (4단계, 더불어민주당 관점 반영)
한국 정치에서도 정당 내 계파 갈등은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친문, 비문, 친명, 비명 등 다양한 계파가 존재하며, 이들 간의 갈등이 당내 분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자유민주당의 파벌은 공식적인 조직으로 인정받고 각 파벌이 독자적인 사무실과 직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비공식적인 모임 형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 한국의 계파 정치와 차이가 있다. 자민당 내 주요 파벌로는 굉지회와 지수회가 있었다. 굉지회는 기시다 후미오 현 총재가 이끌었던 파벌로, 국내 및 외교 문제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대해서는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성향을 보였다. 지수회는 니카이 도시히로 전 간사장이 이끌었던 파벌로, 주요 파벌 중 가장 친중국적이고 우익 성향으로 평가받지만, 케인즈주의적이며 우익 자유주의적이고 국제 협력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두 파벌은 2024년 1월 18일에 해산되었다.[19][15]
파벌 정치는 자유민주당에 다양성을 가져왔다는 평가가 있다. 다양한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닦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는 수많은 정치 변동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이 장기 집권하며 광대한 지지 기반을 유지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19] 그러나 파벌은 회장과 간부에 의해 주도되다 보니 자금과 조직력이 부족한 소장파 의원들은 파벌의 뜻에 좌우되기 쉬워 소신있는 정치를 펼칠 환경이 마련되지 못했다. 또한 파벌 간 항쟁이 일어나면 총재라 하더라도 다른 파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어 당이 단합하여 행동하기 어려웠다. 원로 정치인들에 의한 지배, 밀실 정치, 금권 정치의 원인으로도 지목받으며 각복전쟁과 같은 파벌 항쟁은 정책이 등한시되고 당의 일체화를 저해하기도 했다.[19]
8. 0. 1. 한국 정치의 계파 문제
한국 정치에서도 정당 내 계파 갈등은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친문, 비문, 친명, 비명 등 다양한 계파가 존재하며, 이들 간의 갈등이 당내 분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8. 0. 2. 자민당 파벌 정치와의 비교
자유민주당(자민당)의 파벌은 공식적인 조직으로 인정받고 각 파벌이 독자적인 사무실과 직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비공식적인 모임 형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 한국의 계파 정치와 차이가 있다.자민당 내 주요 파벌로는 굉지회와 지수회가 있다.
- 굉지회(宏池会): 기시다 후미오 현 총재가 이끌었던 파벌로, 2024년 1월 18일에 해산되었다.[19] 굉지회는 국내 및 외교 문제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대해서는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성향을 보였다. 역사적으로 명망있는 파벌로, 많은 회원들이 엘리트 관료 출신이었다. 관료 출신 자유당, 화이트칼라 노동자, 의사, 소상공인 등의 지지를 받았으며, 1960년부터 1988년까지 경제 개발을 주도했다. 또한 중국 및 한국과의 국제 협력, 국립 의료를 위한 국채/소비세 및 소규모 기업 지원, 자유 무역 정책을 장려했다. 이케다 하야토가 창설했으며, 미야자와 기이치, 타니가키 사다카즈, 코가 마코토 등이 굉지회를 이끌었다.
- 지수회(志帥会): 니카이 도시히로 전 간사장이 이끌었던 파벌이다. 지수회는 주요 파벌 중 가장 친중국적이고 우익 성향으로 평가받지만, 케인즈주의적이며 우익 자유주의적이고 국제 협력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카메이 시즈카 등이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우정 민영화 법안에 반대하여 탈당한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굉지회와 같은 날 해산되었다.[15]
8. 0. 3. 긍정적 측면
파벌 정치는 자유민주당에 다양성을 가져왔다는 평가가 있다. 다양한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닦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는 수많은 정치 변동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이 장기 집권하며 광대한 지지 기반을 유지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19] 초선 의원들을 위한 스터디 그룹 및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19]8. 0. 4. 부정적 측면
파벌은 회장과 간부에 의해 주도되다 보니 자금과 조직력이 부족한 소장파 의원들은 파벌의 뜻에 좌우되기 쉬워 소신있는 정치를 펼칠 환경이 마련되지 못했다. 또한 파벌 간 항쟁이 일어나면 총재라 하더라도 다른 파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어 당이 단합하여 행동하기 어려웠다. 원로 정치인들에 의한 지배, 밀실 정치, 금권 정치의 원인으로도 지목받으며 각복전쟁과 같은 파벌 항쟁은 정책이 등한시되고 당의 일체화를 저해하기도 했다.[19]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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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階派 事務所を閉鎖/森山、岸田派に続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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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党・二階派、事務所を閉鎖 森山・岸田派に続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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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脱派閥」を目指したはずが…「重鎮詣で」や「投票指示」が公然と 総裁選で明らかになった自民党の限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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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渡辺派」と「村上派」、「旧加藤派」と「小里派」などがこれに当た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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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平正芳]]の死去による「[[宏池会|旧大平派]]」、[[渡辺美智雄]]の死去による「[[政策科学研究所|旧渡辺派]]」、[[河本敏夫]]の政界引退による「[[番町政策研究所|旧河本派]]」、[[小渕恵三]]の死去による「[[平成研究会|旧小渕派]]」、[[加藤紘一]]の[[加藤の乱|倒閣運動]]による「[[宏池会 (谷垣派)|旧加藤派]]」、[[橋本龍太郎]]の派閥離脱による「[[平成研究会|旧橋本派]]」、[[亀井静香]]の離党による「[[志帥会|旧亀井派]]」、[[堀内光雄]]の離党による「[[新財政研究会|旧堀内派]]」、[[竹下亘]]の死去による「[[平成研究会|旧竹下派]]」などがこれに当たる。なお、[[第43回衆議院議員総選挙|第43回衆議院選挙]]で落選した[[山崎拓]]は非議員のままで[[近未来政治研究会]]会長を務めたものの、この時における通称は総じて「山崎派」のまま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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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倍派、現体制維持を決定 元首相死去後初の総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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岸田首相 自民党岸田派の会長職に今後もとどま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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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相、岸田派を離脱 裏金疑惑、信頼回復へ派閥と距離―対応後手、批判強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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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相、在任中は岸田派離脱の意向 会長空席、今夕表明首相、在任中は岸田派離脱の意向 会長空席、今夕表明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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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漫画表現の一ジャンルを全滅させない」国会議員になった赤松健が描く「文化交流」の理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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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 安倍派 最後の議員総会 派閥としての活動終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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茂木派、政治団体の届け出を取り下げへ 政策集団として存続方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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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身の為公会会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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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界徒然草]額賀派クーデター全内幕「けんかは勝たねば」参院側が突きつけた最後通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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