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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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미 관계는 19세기 후반 조선과 미국의 수교 이후,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온 관계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공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단절되었다. 한국의 해방과 남북 분단 이후,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원하며 군사적 동맹을 맺고 경제 원조를 제공했다. 한국 전쟁을 거치며 한미 동맹은 더욱 강화되었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공고해졌다. 이후 1970년대 주한미군 감축과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갈등이 있었으나, 경제 원조와 우호 외교를 지속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김영삼 정부 시기 북핵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국민의 정부에서 햇볕정책을 통해 관계가 개선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논란이 있었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드 배치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며 북미 대화를 지지했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있으며,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있다. 문화 교류와 경제 협력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긍정적인 여론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 주둔, 무역 불균형, 과거 사건 등으로 인해 양국 간 갈등과 논란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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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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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관계 명칭 | 한미 관계 |
로마자 표기 | Hanmi gwan'gye |
영어 명칭 | South Korea–United States Relations |
일본어 명칭 | 米韓関係 |
외교 공관 | |
대한민국 대사관 |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
미국 대사관 | 주한 미국 대사관 |
주요 인물 | |
대한민국 대사 | 조현동 |
미국 대사 | 필립 골드버그 |
정치 및 군사 관계 | |
동맹 | 한미 동맹 |
안보 협력 | 핵 기반 동맹 |
대한민국 국군 파병 | 이라크 파병 (2004년 3,000명) |
주요 비 나토 동맹국 | 주요 비 나토 동맹국 지위 부여 (미국) |
협력 및 현안 | |
중국 관련 협력 | 해양 안보 협력 |
러시아-북한 동맹 관련 협력 | 러시아-북한 동맹 대비 협력 |
우크라이나 지원 | 우크라이나에 간접적 포탄 지원 |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입장 |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에 대한 중립적 입장 |
상호 인식 | |
미국 내 대한민국 이미지 | 긍정적 이미지 상승 추세 |
미국 내 대한민국 호감도 | 최고 수준 기록 (2018년) |
연설 및 문서 | |
윤석열 대통령 미국 의회 연설 | https://en.yna.co.kr/view/AEN20230428000400315 (2023년 4월) |
2.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반, 조선은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개방하지 않았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 미국과의 초기 접촉은 갈등으로 이어졌다.[113][114]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침입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평양 군민들이 반격하여 배를 불태운 사건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양국 간 공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115] 1883년 조선은 최초의 미국 특사 파견단(보빙사)을 파견했다.[13] 그러나 1905년 러일 전쟁 중재를 맡았던 미국은 필리핀의 안전을 일본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116] 같은 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강탈당하며 양국 관계가 단절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미국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기도 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워싱턴 D.C.에 구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2. 1. 조선의 해방과 남북 분단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38선 이남에는 미국군이,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시까지 남한을 통치했다.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등을 인정하지 않고,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미군정은 통치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여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및 친일파 인사들을 그대로 등용, 실질적으로 조선총독부를 계승했다.[117]1946년 3월, 한국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1946년 5월 무기한 휴회하였다. 미국은 한반도가 친미적으로 통일되기를 원했고, 소련은 친소적으로 통일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다. 미군정은 38선 이남만의 입법기관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준비하여 1946년 12월 12일 개원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8월 아무런 성과 없이 해산되었다.[117]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이 실패하자,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 한국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당시 대다수 회원국들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므로, 미국의 제안은 1947년 11월 총회에서 통과되었다.[117]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총선거는 남한에서만 실시되었다. 1948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미군정은 통치권을 한국 정부에 이양하고 해체되었다.[118]
미군정은 1945년 9월 7일부터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했으며, 이는 제5공화국 시기인 1982년 1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 1946년 1월 15일, 미군정은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여 대한민국 육군의 기반을 마련했다.
2. 2. 초창기(1948년~1961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한국은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정파 간 갈등과 사회 혼란이 지속되었고, 38선 이북의 북한은 군사적 도발과 게릴라 침투, 선동을 일삼았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절실했고, 이에 따라 초기 외교는 국가 안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이승만 정부는 미국과의 정식 국교 수립 이후,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미국의 경제 원조와 군사 지원을 확보하는 데 외교적 노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내 사정으로 인해 군사비를 대폭 삭감해야 했고, 병력 감축이 불가피해지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했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과신하여 공산주의자들의 국지전이나 제한전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고, 이는 주한미군 철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사절단 파견과 주미대사관을 통해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한국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도 있으며, 한국 안보가 미국의 안보에도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의 남침 위협이 임박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1949년 1월, 이승만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특사를 파견했으나, 맥아더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129] 결국 미국은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KMAG) 500여 명만 남겨둔 채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129]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미국의 지원은 미미했다. 미군정 시기 한국에 제공되던 구호 성격의 가리오아 자금(GARIOA 資金, 미국 점령지역에 대한 구제자금)은 경제협조처(ECA,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로 이관되어 제공되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6월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 부흥을 위해 마셜 플랜을 모방한 장기원조계획을 입안했으나, 이 한국경제원조안은 1950년 1월 미국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이는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몰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공화당 의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이었다.[119] 1950년 회계연도에 9000만달러가 할당되었지만,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사용된 금액은 4500만달러에 불과하여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120]
1950년 1월,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하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한국의 안보에 매우 위험한 신호로 해석되었다.[120] 이러한 상황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20만 북한군과 경무장 상태의 한국군 간의 군사적 불균형을 심화시켜 북한의 남침을 부추기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120]
2. 2. 1. 한국 전쟁 (1950~1953년)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조선인민군의 대한민국(남한) 침공으로 38선을 넘나드는 소규모 충돌과 습격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88]한국 전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조선인민군은 개전 3일 후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였다(제1차 서울 전투). 이후 남하를 계속하였다. 유엔 회원국 16개국이 부산으로 몰린 이승만 정권을 방어하기 위해 참전하였는데, 이는 냉전 초기 가장 치열한 무력 충돌이었다.[89] 북진통일을 내세운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유엔군은 38선을 북상하였고, 대한민국 국군은 일시적으로 압록강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주석은 펑더화이 사령관이 이끄는 중국인민지원군(항미원조 의용군)의 참전을 결정하였다. 중국과 북한 연합군은 유엔군을 38선까지 밀어낸 후,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2. 2. 2.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953년)
1950년 한국 전쟁 종전 후, 대한민국과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양자동맹 조약을 맺었다.[20]"미국과 대한민국의 동맹은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태평양에서 소련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동맹과 군사 시설 네트워크의 일부로 기능한다. 둘째, 미군 지상군이 미국의 개입을 보장하는 '발단' 역할을 함으로써 북한의 재침공을 억제한다. 셋째, 대한민국의 모험주의를 억제한다."[21]
1953년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은 한국에 지속적으로 주둔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1953년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47] 이 동맹은 "피로써 맺어진 관계"로 불린다.[48] 약 29,000명의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2009년 한국과 미국은 미래 방위 협력을 위한 동맹의 비전을 개발하기로 약속했다.[49] 현재 전쟁이 재개될 경우 한국군은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된다. 2023년 9월 현재, 이러한 전시 작전통제권의 한국 이양은 무기한 “조건부” 일정으로 미뤄져 있다.[50]
2. 2. 3. 경제 원조 외교 촉진 (1953년~1961년)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미국의 경제 원조에 크게 의존하였다. 1950 회계연도에 9천만 달러가 할당되었으나,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는 4,500만 달러만이 사용되어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120]미군정 시기 한국에 제공되던 구호 성격의 가리오아 자금(GARIOA 資金, 미국 점령지역에 대한 구제자금)은 경제협조처(ECA,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로 이관되어 제공되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 부흥을 위해 마셜 플랜을 본뜬 장기원조계획을 1949년 6월에 입안하였으나, 이 한국경제원조안은 1950년 1월 미국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이는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몰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공화당 의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이었다.[119]
1949년 12월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옮기고, 중국 대륙을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면서, 소련 외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과 국경을 접하게 되어 북진통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은 군사력 증강보다는 경제 부흥을 최우선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는 어려웠다.[139]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두 개의 시금석 안'(1949년 6월)을 다시 언급하며,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 류큐 제도를 거쳐 필리핀에 이른다고 밝혔다. 한국과 타이완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는 이 발언은 한국의 입장에서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120] (→애치슨 선언)
애치슨 선언 일주일 후인 1950년 1월 19일, 미국 하원은 중국 국민당 정부 지원안과 연계된 대한(對韓)원조안을 부결시켰다.[143]
3. 제3공화국·제4공화국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면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통해 북한의 침략을 규탄하고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46]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 지원을 명령했고,[148] 미국 육군 제24사단이 부산에 상륙했다.[154]
미군은 초기에는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가 큰 피해를 입었고,[155] 대전 전투에서도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육군 24사단이 패배했다.[156]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켰고,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중국이 개입하면서 전황이 바뀌었다.[162] 이승만 정부는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중국과의 확전 및 유럽 안보 문제 등을 고려하여 휴전을 추진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경제 원조를 약속하며 한국 정부를 설득했고,[163]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에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163] 이 조약은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무력 공격 위협에 대한 협의 및 방지 수단 강화, 무력 공격 시 헌법 절차에 따른 공동 대응, 미국군의 한국 영토 및 주변 주둔 등을 규정하고 있다.[163]
3. 0. 1. 우호 외교 강화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표방하면서도, 한미 유대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국군을 파병하였다.[91]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은 군사 및 경제적 지원을 증가시켰고, 이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고도경제성장의 계기가 되었다.[91]이 시기 5차례의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경제 개발, 군사력 증강, 베트남 파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이 강화되었다. 1966년에는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이 체결되어 주한미군의 법적 지위가 규정되었다.[91]
3. 0. 2. 미군 감축 (1970년대)
1970년대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 감축이 이루어졌다. 이에 한국은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며 방위 산업 육성에 힘썼다. 1976년 박동선이 미국 하원 의원을 매수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각되어 한미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91] 그러나 지미 카터 행정부는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지원을 계속하였다.4.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는 친미 정책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미국 내에서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 대학생과 재야 인사를 중심으로 반미 운동이 확산되었다. 1988년 열린 광주청문회에서 미국 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한국군 부대가 미국의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174]
5. 김영삼 정부
김영삼 정부는 빌 클린턴 행정부와 초기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북핵 문제 해결 방식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체결 과정에서 한국이 배제되면서 한미 간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외환 위기 당시 미국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인해 양국 관계가 냉각되기도 했다.
6.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부는 빌 클린턴 행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대북 포용 정책(햇볕정책)을 추진하였다. 1999년 페리 프로세스를 통해 한미 양국은 대북 정책 공조를 강화하였다.[102]
2000년 2월 9일, 주한미군 미국 8군이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무단 방류하도록 지시한 사건(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한국어)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환경단체들은 수생 생물에 유해하다며 항의했지만, 미군은 포름알데히드가 강물에 희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2006년 한국 영화 괴물에서 풍자되었다.[102]
2002년 6월 13일에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이 발생하여 반미 감정이 고조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14세의 한국 여중생 두 명이 미국 육군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차량 운전자와 항해사는 미군 군사 재판에서 과실치사 혐의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는 한미행정협정에 대한 항의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회창 대통령 후보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사과를 촉구했고,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 대사가 부시 대통령을 대신하여 사과했다.[31]
7. 참여 정부 (2003년~2008년)
2003년 노무현 정부는 한미 관계를 수평적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기조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50]
그러나 이라크에 소규모 병력을 파병하고,[1] 2007년 한미 FTA를 타결하는 등의 행보는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7년 한미 FTA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추가 협상이 진행되었다.
8. 이명박 정부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동맹 강화를 외교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미국의 PSI와 MD 계획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191]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 중 최초로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숙박하였다.
2008년 4월에 열린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는 소해면상뇌증(광우병) 발생 후 수입 금지와 재개가 되풀이되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고 부위 대부분을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도록 합의하였다. 이 협상으로 인해 1개월여에 걸쳐 촛불시위와 정부 측의 설득, 국민들의 재협상 요구가 계속되었으며, 6월 19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는 워싱턴주에서 광우병이 발생함에 따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2008년에는 1980년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연상시키는 대규모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까지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국이 되었다. 수입량의 급증으로 대한민국은 일본을 제치고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국산 쇠고기 시장이 되었으며, 2016년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은 10억달러에 달했다.[32][33]
9. 박근혜 정부
박근혜 정부는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를 결정하였으나, 국내에서는 북한 위협 감소와 환경 문제를 이유로 반대 여론이 일었다.[43][44][45][46] 국민의당도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46] 반대자들은 박근혜 정부가 미국의 요청에 쉽게 굴복했다고 비판했다.[46]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가 성주를 방문해 사드 배치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진정시키려 했을 때, 시위대는 황 총리의 버스를 막고 계란과 물병을 던지기도 했다.[46]
10. 문재인 정부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며,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해 노력했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 조정,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 등을 놓고 미국과 협의를 진행했다.
11. 윤석열 정부
2022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하면서 미국은 사실상 중국을 견제하게 되었다. 펠로시 의장은 대만 방문 후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국회의장과 면담을 가졌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휴가 중이라는 이유로 전화 통화로 회담을 가졌다.[105]
펠로시 의장이 한국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한 직후, 한국은 8월 8일에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06] 대통령이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면담을 피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되었다.[107]
같은 해 8월에 개최된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국 측은 한국의 전 정권이 약속한 "3불 1한"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서 3불이란 THAAD 추가 배치를 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안보 협력을 군사 동맹으로 발전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1한은 배치된 THAAD 운용을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전 정권의 약속은 조약이 아니라는 이유로 협의를 거부했다.[108]
12. 정무
1949년 미국 워싱턴 D.C.에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는 1919년 8월 한인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9월 구미위원부로 정식 발족한 구미외교위원부가 미국 워싱턴 D.C에서 대사관 역할을 수행했다. 구미외교위원부는 해방 이후에도 워싱턴 D.C에 체류하며 미국과 유럽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역대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는 다음과 같다.
대수 | 이름 | 사진 | 임기 | 비고 |
---|---|---|---|---|
제1대 | 장면(張勉) | ![]() | 1949년 2월 - 1951년 2월 | 제3차 UN총회에 한국대표단 수석대표 파견 중에 임명. 1951년 2월, 국무총리직 수행을 위하여 귀국 |
임시 | 한표욱(韓豹頊) | 1951년 2월 - 1951년 4월 | ||
제2대 | 양유찬(梁裕燦) | ![]() | 1951년 4월 - 1960년 4월 29일 | 전(前) 하와이 교민. 이후 순회 대사로 활동 |
제3대 | 정일권(丁一權) | ![]() | 1960년 6월 8일 - 1960년 10월 | 전 주프랑스 대사. 장면 정권 출범으로 사임. |
제4대 | 장이욱(張利郁) | 1960년 10월 - 1961년 6월 | 전 서울대총장. | |
제5대 | 정일권(丁一權) | 1961년 6월 - 1963년 4월 | 5.16 군사정변 직후 발탁. 이후 외무부장관으로 영전. | |
제6대 | 김정렬(金貞烈) | 1963년 5월 - 1964년 10월 | 전 국방부 장관. | |
제7대 | 김현철 (金顯哲) | 1964년 12월 - 1967년 10월 | 전 대통령 고문,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 | |
제8대 | 김동조(金東祚)[193] | 1967년 10월 - 1973년 12월 | 전 주일본 대사. 외무부장관으로 발탁. | |
제9대 | 함병춘(咸秉春) | 1973년 12월 - 1977년 4월 | 전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 이후 연세대 교수로 복귀. | |
제10대 | 김용식(金溶植) | 1977년 4월 - 1981년 6월 | ||
제11대 | 류병현(柳炳賢) | 1981년 7월 - 1985년 11월 | ||
제12대 | 김경원(金瓊元) | 1985년 11월 - 1988년 4월 | 전 유엔 대사. | |
제13대 | 박동진(朴東鎭) | 1988년 4월 - 1991년 3월 | ||
제14대 | 현홍주(玄鴻柱) | 1991년 3월 - 1993년 4월 | 전 법제처 장관 | |
제15대 | 한승수(韓昇洙) | ![]() | 1993년 4월 - 1994년 12월 | 전 국회의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영전. |
제16대 | 박건우(朴健雨) | 1995년 1월 - 1998년 4월 | ||
제17대 | 이홍구(李洪九) | ![]() | 1998년 5월 - 2000년 8월 | 전 국회의원 |
제18대 | 양성철(梁性喆) | 2000년 8월 - 2003년 4월 | ||
제19대 | 한승주(韓昇洲) | ![]() | 2003년 4월 - 2005년 2월 | 전 고려대학교 총장 서리. |
제20대 | 홍석현(洪錫炫) | 2005년 2월 - 2005년 9월 | ||
제21대 | 이태식(李泰植) | ![]() | 2005년 10월 - 2009년 2월 | 전 외교통상부 차관. |
제22대 | 한덕수(韓悳洙) | ![]() | 2009년 2월 - 2012년 2월 20일 | 전 국무총리. |
제23대 | 최영진 | 2012년 2월 - 2013년 5월 | 전 유엔대사. | |
제24대 | 안호영 | 2013년 5월 - 2017년 10월 | 전 외교통상부 1차관 | |
제25대 | 조윤제 | 2017년 11월 - | 전 주영국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 |
제26대 | 이수혁 | 전 주독일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 ||
제27대 | 조태용 | 전 외교통상부 1차관 | ||
제28대 | 조현동 | 전 외교통상부 1차관 |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과 조선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883년 조선은 최초로 미국 특사 파견단(보빙사)을 파견했다.[13] 그러나 1905년 일본은 한국 외교권을 장악했고, 1910년부터 35년간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14]
1948년 남한에는 대한민국,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별개 국가가 수립되었다. 1949년 1월 1일 미국은 대한민국을 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하고, 같은 해 3월 25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14][16]
12. 1.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 및 대사관
1949년 미국 워싱턴 D.C.에 개설되었다.;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사관 역할을 수행했던 구미외교위원부는 1919년 8월 한인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9월 구미위원부로 정식 발족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워싱턴 D.C에 체류하며 미국과 유럽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 김규식 1919년 8월 - 1919년 9월
# 이승만 1919년 9월 - 1928년
# 이승만 1928년 - 1945년 10월 2일
# 임병직 1945년 10월 2일 - 1948년 10월, 구미위원부 해체
; 역대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
대수 | 이 름 | 사진 | 임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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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 장면(張勉) | 1949년 2월 - 1951년 2월 | 제3차 UN총회에 한국대표단 수석대표 파견 중에 임명. 1951년 2월, 국무총리직 수행을 위하여 귀국 | |
임시 | 한표욱(韓豹頊) | 1951년 2월 - 1951년 4월 | ||
제2대 | 양유찬(梁裕燦) | 1951년 4월 - 1960년 4월 29일 | 전(前) 하와이 교민. 이후 순회 대사로 활동 | |
제3대 | 정일권(丁一權) | 1960년 6월 8일 - 1960년 10월 | 전 주프랑스 대사. 장면 정권 출범으로 사임. | |
제4대 | 장이욱(張利郁) | 1960년 10월 - 1961년 6월 | 전 서울대총장. | |
제5대 | 정일권(丁一權) | 1961년 6월 - 1963년 4월 | 5.16 군사정변 직후 발탁. 이후 외무부장관으로 영전. | |
제6대 | 김정렬(金貞烈) | 1963년 5월 - 1964년 10월 | 전 국방부 장관. | |
제7대 | 김현철 (金顯哲) | 1964년 12월 - 1967년 10월 | 전 대통령 고문,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 | |
제8대 | 김동조(金東祚)[193] | 1967년 10월 - 1973년 12월 | 전 주일본 대사. 외무부장관으로 발탁. | |
제9대 | 함병춘(咸秉春) | 1973년 12월 - 1977년 4월 | 전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 이후 연세대 교수로 복귀. | |
제10대 | 김용식(金溶植) | 1977년 4월 - 1981년 6월 | ||
제11대 | 류병현(柳炳賢) | 1981년 7월 - 1985년 11월 | ||
제12대 | 김경원(金瓊元) | 1985년 11월 - 1988년 4월 | 전 유엔 대사. | |
제13대 | 박동진(朴東鎭) | 1988년 4월 - 1991년 3월 | ||
제14대 | 현홍주(玄鴻柱) | 1991년 3월 - 1993년 4월 | 전 법제처 장관 | |
제15대 | 한승수(韓昇洙) | 1993년 4월 - 1994년 12월 | 전 국회의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영전. | |
제16대 | 박건우(朴健雨) | 1995년 1월 - 1998년 4월 | ||
제17대 | 이홍구(李洪九) | 1998년 5월 - 2000년 8월 | 전 국회의원 | |
제18대 | 양성철(梁性喆) | 2000년 8월 - 2003년 4월 | ||
제19대 | 한승주(韓昇洲) | 2003년 4월 - 2005년 2월 | 전 고려대학교 총장 서리. | |
제20대 | 홍석현(洪錫炫) | 2005년 2월 - 2005년 9월 | ||
제21대 | 이태식(李泰植) | 2005년 10월 - 2009년 2월 | 전 외교통상부 차관. | |
제22대 | 한덕수(韓悳洙) | 2009년 2월 - 2012년 2월 20일 | 전 국무총리. | |
제23대 | 최영진 | 2012년 2월 - 2013년 5월 | 전 유엔대사. | |
제24대 | 안호영 | 2013년 5월 - 2017년 10월 | 전 외교통상부 1차관 | |
제25대 | 조윤제 | 2017년 11월 - | 전 주영국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 |
제26대 | 이수혁 | 전 주독일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 ||
제27대 | 조태용 | 전 외교통상부 1차관 | ||
제28대 | 조현동 | 전 외교통상부 1차관 |
12. 2. 주한 미국 대사 및 대사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과 조선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883년 조선은 최초로 미국 특사 파견단(보빙사)을 파견했다.[13] 그러나 1905년 일본은 한국 외교권을 장악했고, 1910년부터 35년간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14]1948년 남한에는 대한민국(ROK),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라는 두 개의 별개 국가가 수립되었다. 1949년 1월 1일 미국은 대한민국을 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하고, 같은 해 3월 25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14][16]
13. 군사
한국과 미국은 1953년 군사 동맹을 체결했으며,[47] 이 동맹은 "피로써 맺어진 관계"로 불린다.[48] 2009년 양국은 미래 방위 협력을 위한 동맹의 비전을 개발하기로 약속했다.[49] 현재 전쟁이 재개될 경우 한국군은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되며, 2023년 9월 현재 전시 작전통제권의 한국 이양은 무기한 “조건부” 일정으로 미뤄져 있다.[50]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으며,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외국군을 파병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지원을 증가시켰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소규모 병력을 이라크에 파병했다.[1]
2009년 이후 한국과 미국의 공군은 "맥스 썬더(Max Thunder)"라는 이름으로 연례 합동 훈련을 실시해왔다. 2018년 훈련은 5월 11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되었다.[51] 2018년 7월, 정부는 한반도의 정세 개선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단에 따라 예정되었던 을지훈련을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52]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해 대북 제재를 지속하는 것을 지지하면서도, "제재만으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53] 이는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유사하다.
2018년에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 분담에 관한 회담이 여러 차례 있었다.[54] 2019년 2월, 한국과 미국은 1년 계약을 체결하여 한국이 미국에 9.25억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2만 8,500명의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기로 했다.[57]
2018년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은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에 서명했다.[55]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미 군사훈련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이는 평양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며 훈련 규모 축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59]
2022년 5월, 조 바이든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은 회담에서 한반도 및 그 주변에서 합동 군사 훈련을 재개하고 확대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60]
2023년 4월 윤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은 북한을 겨냥한 핵억지 계획을 낳았다. 조 바이든은 이 합의에 따라 핵잠수함이 한국에 입항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능력은 1991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바이든은 "북한의 미국 또는 동맹국 및 파트너 국가에 대한 핵 공격은 용납할 수 없으며, 그러한 행동을 하는 어떤 정권이든 종식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위 워싱턴 선언은 한국이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핵 야망을 포기한 지 거의 50년 만에 나온 것이다.[61][62][63]
2024년 8월 미국과 한국은 북한의 무기와 사이버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대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64] 2024년 10월, 김용현 국방부 장관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강력한 방어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과의 합동 군사 훈련 강화를 촉구했다. 그는 미국 새뮤얼 파파로 제독과의 회담에서 두 번째 "프리덤 에지(Freedom Edge)" 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북한-러시아 군사 협력이 초래하는 안보 위험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65] 2024년 11월, 한국 대통령실은 새로운 미국 행정부와 "완벽한" 안보 파트너십을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66]
1991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해외에 배치된 모든 전술핵무기 철수를 발표한 이후, 미국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종식을 위한 협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교착 상태, 위기 및 불확실한 진전"으로 특징지어진다. 지속적인 긴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았지만,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자체 핵무기 개발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은 2017년 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미사일 방어 시스템 배치를 발표했다.[67]
13. 1. 주한 미군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미군은 안보상의 이유로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다. 대한민국과 미국은 1953년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한국과 미국은 1953년 군사 동맹을 체결했으며,[47] 이 동맹은 "피로써 맺어진 관계"로 불린다.[48] 약 29,000명의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1958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은 대한민국에 다양한 핵무기를 배치했다. 핵탄두 수는 1967년 950개로 최고점에 달했다.
대한민국과 미국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후 같은 해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여 군사 동맹을 맺었다.[91]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약 2만 9천 명의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다.
14. 경제
1956년부터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한국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166] 이는 한국의 식량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미국의 농업 공황 해소 목적도 있었다.[194] 이승만 정권은 정치자금 확보를 위해 필요 이상의 농산물을 들여와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194] 미국 원조로 성장한 산업은 제분업, 설탕, 면화 산업이며, 이 세 가지 산업을 삼백산업이라 불렀다.[194]
양국 간에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진에어, 델타항공, 유나이티드 항공 등이 항공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거점 도시 | 공항 IATA | 공항 ICAO | 거점 공항 이름 | 항공사 및 상대국 취항지 |
---|---|---|---|---|
서울/인천 | ICN | RKSI | 인천 | ○대한항공(12개) : 괌, 댈러스, 라스베이거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터코마), 시카고(오헤어), 앵커리지, 워싱턴 D.C., 애틀랜타, 뉴욕(케네디), 호놀룰루[196], 보스턴 ○아시아나항공(7개): 사이판,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케네디), 시애틀, 호놀룰루 ○진에어(1개): 괌 |
보스턴 | BOS | KBOS | 로간 | ○유나이티드 항공 : 서울(인천) (샌프란시스코 경유) |
디트로이트 | DTW | KDTW | 디트로이트 | ○델타 항공 : 서울(인천) |
뉴욕 | JFK | KJFK | 존 F. 케네디 | ○유나이티드 항공 : 서울(인천)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경유) |
로스앤젤레스 | LAX | KLAX | 로스앤젤레스 | ○유나이티드 항공 : 서울(인천) (도쿄(나리타) 경유) |
뉴욕 | LGA | KLGA | 라구아디아 | ○델타 항공 : 서울(인천) (디트로이트 경유) |
포틀랜드 | PDX | KPDX | 포틀랜드 | ○델타 항공 : 서울(인천) (도쿄(나리타) 경유) |
샌프란시스코 | SFO | KSFO | 샌프란시스코 | ○유나이티드 항공 : 서울(인천) |
미니애폴리스 | MSP | KMSP |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 | ○델타 항공 : 서울(인천) |
대한민국은 미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 중 하나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양국 간 교역 규모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통신, 자동차 산업, 지식재산권, 제약, 농업 등 분야에서는 무역 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76]
2008년 한국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2010년까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국이 되었다. 2016년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은 10억달러에 달했다.[32][33]
대한민국의 수출 주도 경제는 미국과의 무역 마찰을 야기하기도 했다. 특정 철강 및 비철강 제품 수입은 미국의 반덤핑 및 상계관세 조사 대상이 되었다.[77] 2022년 기준, 대한민국은 미국에 1101.7억달러 상당의 상품을 수출했다.[78]
1985 | 1990 | 1995 | 2000 | 2005 | 2010 | 2015 | 2020 | 2023 | |
---|---|---|---|---|---|---|---|---|---|
미국 → 대한민국 수출 | 600만달러 | 1440만달러 | 2540만달러 | 2780만달러 | 2760만달러 | 3879.9999999999995만달러 | 4350만달러 | 5100만달러 | 6509.999999999999만달러 |
미국 ← 대한민국 수입 | 1000만달러 | 1850만달러 | 2420만달러 | 4029.9999999999995만달러 | 4380만달러 | 4890만달러 | 7180만달러 | 7600만달러 | 1.161억달러 |
무역수지 | -400만달러 | -409.99999999999994만달러 | 120만달러 | -1250만달러 | -1620만달러 | -1010만달러 | -2830만달러 | -2500만달러 | -5100만달러 |
14. 1. 경제 원조
1956년부터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한국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166]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 곡물 생산량의 40%를 차지하였으며, 그 가운데 밀이 70%를 차지하여 밀가루값은 쌀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다.[166] 이는 한국의 농촌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1956년부터 들어온 미국 원조는 모두 농산물이었는데,[194] 이는 한국의 식량문제 해결이라는 উদ্দেশ্য도 있었지만, 1948년부터 계속된 미국의 농업 공황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이 더 컸다.[194] 게다가 이승만 정권이 정치자금 확보를 위해 필요 이상의 농산물을 들여와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194] 저렴한 밀 값으로 인해 짜장면, 과자, 빵, 국수 등이 한국 국민의 대용식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무상으로 제공된 밀을 밀가루로 제조하는 제분업도 성장하였는데, 제일제당, 삼양사, 조선제분, 대한제분 등이 대표적인 기업이었다.[195] 미국 원조로 성장한 산업은 제분업 외에도 설탕, 면화 산업이 있었으며, 이 세 가지 산업을 삼백산업이라 불렀다.[194]14. 2. 교통
IATAICAO
이름
○아시아나항공(7개): 사이판,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케네디), 시애틀, 호놀룰루
○진에어(1개): 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