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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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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이 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7월 19일, 미국 육군 항공대의 B-29 폭격기들이 일본 후쿠이시에 가한 대규모 공습이다. 후쿠이시는 철도 교통의 요지이자 섬유 산업 중심지였으며, 이 공습으로 인해 시가지의 80% 이상이 파괴되고 1,756명이 사망하는 등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후쿠이시는 효과적인 방공 체제를 갖추지 못했고, 865톤 이상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화염 폭풍으로 인해 피해가 더욱 커졌다. 공습 이후 후쿠이시는 도시 기능 회복을 위한 응급 복구 작업을 진행했고, 1948년 후쿠이 지진으로 도시 부흥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이후 도시 재건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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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 공습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습 후의 후쿠이 시의 항공 사진
공습 후의 후쿠이 시의 항공 사진
명칭후쿠이 공습
원어 명칭福井空襲 (ふくいくうしゅう)
위치후쿠이현 후쿠이시
날짜1945년 (쇼와 20년) 7월 19일
결과후쿠이 시의 괴멸
전투 정보
지휘관 1(정보 없음)
지휘관 2커티스 르메이
병력 규모 1(거의 무방비)
병력 규모 2미국 육군 항공군 제20항공군 제21폭격기집단 제58항공단 소속 B-29 127기 (선도기 11기, 폭격기 116기)
작전 참가 인원 1,513명
소이탄 953.4톤
피해 규모 1사망자 1,684명 (중상 후 사망자 108명 포함)
부상자 6,419명 (중상 1,210명, 경상 5,209명)
소실 23,086호 (전소 23,009호, 반소 77호) (니시후지도마에무라, 아소즈무라, 가와이무라 포함)
피해 규모 2부상자 1명
항공기의 손상 1기
관련 정보
관련 항목일본 본토 공습

2. 배경

후쿠이시는 후쿠이현의 현청 소재지이자 호쿠리쿠 본선 철도가 지나가는 호쿠리쿠 지역의 상업 중심지였다. 중요한 군사적 목표는 없었지만, 일본의 전쟁 수행에 기여하는 여러 소규모 산업단지가 모여 있었다.[1]

2. 1.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

1945년 초,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일본 본토의 태평양 연안 지역 도시들을 집중 폭격했다. 이 지역들은 인구가 많고 산업화되어 있었으며,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기지와 가까웠다. 1945년 7월 12일 밤 쓰루가시 폭격 이후, 동해 연안 도시들도 폭격 대상이 되었다.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출격 거점으로 삼아 B-29 폭격기를 이용한 대일 전략 폭격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시기내용
1944년 11월 24일 - 1945년 3월 4일항공기 공장 및 군수 공장에 대한 주간 고고도 정밀 폭격.
1945년 3월 10일 - 1945년 6월 15일인구 밀집 지역을 융단 폭격하는 야간 저고도 소이탄 공습.
1945년 6월 17일 - 1945년 8월 15일지방 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반복 공습하는 중소 도시 소이탄 공습.



초기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은 낮에 1만 미터 고고도에서 항공기 공장이나 기반 시설을 공격하는 정밀 폭격이었다.[1] 그러나 일본 열도 상공의 제트 기류와 구름 때문에 육안 폭격의 정확도가 낮았다.[2]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 이후, 야간에 낮은 고도로 진입하여 도시 전체를 무차별 융단 폭격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1]

오키나와 전투 지원을 위해 4월 16일부터 5월 11일까지 대도시 소이탄 공습이 일시 중단되었지만, 그 사이 테니안 기지에 제58 항공단이 증강되어 작전 규모가 커졌다.

이후 공습 목표는 주요 대도시에서 공업 생산 및 병참을 지원하는 중소 도시로 옮겨갔다. 미국군은 일본 측의 방어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하룻밤에 4개 중소 도시를 동시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지만, 일본 측의 야간 방공 체제는 매우 빈약했다.

미군은 중소 도시 공습 작전 보고서에서 일본 측 방공 전력이 약했던 요인으로, 전투기 보존, 항공기용 가솔린 부족, 야간 전투기 부족 및 장비 미흡 등을 꼽았다.

2. 2. 후쿠이시의 상황

후쿠이시는 호쿠리쿠 본선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지이자 후쿠이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호쿠리쿠 지역의 상업 중심지였다. 비록 중요한 군사적 목표는 없었지만, 일본의 전쟁 수행에 기여하는 여러 소규모 산업단지가 모여 있었다.

1945년 당시의 후쿠이시 시가지 지도


후쿠이시는 성시 시절부터 이어져 온 구 시가지를 중심으로, 교외에 새로운 시가지를 형성하며 점차 확장되었다. 당시 후쿠이시는 "섬유 왕도"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직물 산업이 발달했으며, 시 외곽과 주변 마을에는 섬유 관련 공장이 많이 있었다.[1]

미국군 전략공군 최고사령관 커티스 르메이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후쿠이시를 공격 목표로 삼은 이유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2]

Fukui is an important hub of the railway network, with a population of 97,967, about 40 miles north of Lake Biwa, about 70 miles southwest of Toyama, and 13 miles inland from the Sea of Japan coast of Honshu. The city is 3 miles north-south and 2 miles east-west, with an area of 3.25 square miles, of which 2 square miles are densely populated. There are 95 known industrial facilities within the target area, and the city's main industrial products include aircraft parts, electrical equipment, machine motors, various metal products, and textiles. A successful attack on this target area would destroy its industry and disrupt the railway network, thereby reducing Japan's ability to recover its fighting power.|후쿠이시는 철도망의 중요한 거점이며, 인구 97,967명, 비와호의 북방 약 약 64.37km, 도야마의 서남방 약 약 112.65km, 혼슈의 일본해 연안에서 내륙 약 20.92km에 위치한다. 시는 남북 약 4.83km, 동서 약 3.22km에 걸쳐 있으며, 그 면적은 약 8.42km2이며, 그 중 약 5.18km2는 인가 밀집 지역이다. 잘 알려진 95개의 산업 시설이 목표 지역 내에 있으며, 시의 공업 생산물의 주요 품목은 비행기 부품, 전기 설비, 기계 모터, 각종 금속 제품 및 섬유류 등이다. 이 목표 지역의 공습에 성공하면, 그 공업을 파괴하고, 철도망을 분단함으로써, 그것에 의해 일본의 전투력 회복 능력을 저하시킬 것이다.영어

2. 3. 주변의 군부대 및 관련 기관

1897년(메이지 30년)부터 이마다테군신메이 정(현재의 사바에시 산로쿠쵸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는 제국 육군 제9사단 소속의 보병 제36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940년(쇼와 15년) 9월, 보병 제36연대는 만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10월 10일부로 영구히 사바에를 떠나게 된다. 이 주둔지를 인수한 보병 제136연대(독립 제63보병단 소속)도 1943년(쇼와 18년) 4월 개편으로 5월에 사바에를 떠나 기후로 이동한다. 같은 해 6월, 새롭게 박격 제3연대가 편성되어 사바에를 주둔지로 한다.

1945년(쇼와 20년) 전반의 개편으로 박격 제3연대는 폐지되고, 박격 제3연대 보충대 (중부 제80부대)로 개편되었다. 이 보충대는 박격 제3연대의 요원으로 편성되었으며, 본부 인원은 대대장 이하 33명이었다. 박격 중대는 경박격포 6문, 2식 12cm 박격포 2문, 군수차 20량, 35필을 장비하고, 중대장 이하 장교 4명을 포함한 총 199명을 정원으로 하여, 박격 3개 중대 (인원 597명)로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본토 결전에 대비해 전개하고 있던 각 사단에 속하는 박격 부대 요원에 대한 교육 훈련 및 보충 동원의 편성을 임무로 하고, 박격 제17, 제25, 제26대대의 편성을 담당했다.

1941년(쇼와 16년) 4월 이후, 후쿠이현 전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는 후쿠이 연대구는 중부군관구교토 사관구에 속했으며, 1945년(쇼와 20년)에 사령부가 설치되자, 각각 중부군관구 사령관은 제15방면군 사령관을, 후쿠이 연대구 사령관은 후쿠이 지구 사령관을 겸임했다.

공습 당시 후쿠이 시내에는 후쿠이 연대구 사령부 및 후쿠이 지구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시내 각 곳에는 중부 제80부대의 일부가 분산 주둔하고 있었다. 샤촌고야마타니의 솟타니석 채굴 갱에 정비한 지하 공장 (후쿠이 55공장)에는 마이즈루에서 해군 공창 조기 공장이 이전해 있었다. 또한 근교에는 사바에에 육군 병원, 아시하라의 여관 "베니야"에 육군 병원 분원, "카이카테이"에 해군 병원 분원이 있었다.

3. 경위

1945년 초,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일본 본토 태평양 연안의 인구가 많고 산업화된 도시들을 집중 폭격했다. 이 도시들은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기지와 가까웠다. 같은 해 7월 12일 밤, 쓰루가시소이탄 폭격으로 시가지 70% 이상이 파괴되면서[3] 동해 연안 도시들도 폭격 대상이 되었다.

7월 19일,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133기가 티니언섬에서 이륙하여 후쿠이를 공습했다. 현지 시각 23시 24분, 맑은 밤하늘 아래 후쿠이에 도착한 B-29들은 후쿠이성 유적 서북쪽 반경 1.2km 내에 865톤 이상의 소이탄을 투하, 화염폭풍으로 시가지 대부분을 파괴했다.[4][5]

당시 후쿠이시의 민방위는 매우 조잡했다. 방공호는 땅에 구멍을 파고 나무 지붕 위에 흙을 덮은 급조된 형태였다. 공습으로 인한 화재폭풍으로 1,756명이 사망하고(여성 915명, 남성 661명), 6,527명이 부상당했으며, 부상자 중 107명은 후에 사망했다. 건물 25,691채 중 21,992채가 파괴되었고, 인구 103,049명 중 85,603명이 집을 잃었다. 종전 후, 미군 조사에 따르면 후쿠이 시가지의 84.8%가 파괴되었다.[6]

같은 시각, 이바라키현 히타치시, 지바현 조시시, 아이치현 오카자키시도 공습을 받았다.

3. 1. 현 내 공습 피해

1945년 5월부터 8월 초까지 미군의 B-29 전략폭격기는 와카사 만 및 후쿠이현 주변 공역에 자주 진입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수백 개 이상의 기뢰를 투하했다.[3] 와카사 만에 기뢰를 투하한 목적은 동해 측 일본 제국 해군의 요새 지대였던 마이즈루조선과의 3대 정기 연락 항구 중 하나로서 해상 수송의 거점이었던 쓰루가 두 항구의 해상 봉쇄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3][4]

연안부에서는 기뢰 폭발로 인한 피해가 있었다. 1944년 12월에는 뉴군 아유카와(현재의 후쿠이시) 해안에서 기뢰가 폭발하여 근처 학교 유리창이 깨졌고, 1950년에도 뉴군 카모(현재의 후쿠이시 코시노 지구) 해안에서 기뢰가 폭발하여 학교에 피해가 발생했다.[5]

쓰루가시에서는 기뢰 투하가 있을 때마다 경보가 발령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5] 1945년 7월 12일 밤, B-29 폭격기 94기에 의한 소이탄 공격으로 쓰루가 공습이 발생하여 시가지의 약 70%가 불에 타 초토화되었다.[5] 이는 동해 측 도시로서는 최초의 대공습이었다.[6] 같은 해 7월 30일에는 P-47 함재기 6기에 의한 기총 소사와 소형 폭탄 투하로 3채가 소실, 15명이 사망, 1명이 부상당했으며, 선박에도 피해가 있었다. 8월 8일에는 B-29 폭격기 1기에 의한 공습으로 도요보세키 공장에서 학도 동원된 중학생·여학생 16명과 인솔 교사 2명을 포함하여 총 33명이 사망했다. 3차례에 걸친 공습으로 쓰루가시의 피해는 피해자 수 19,300명, 피해 가구 수 4,119호, 사망자 수 225명, 부상자 수 201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8월 2일 밤, 이마다 군 아지마노 촌 미야다니 및 기타히노 촌 니시오(현재의 에치젠시 남동부)에 B-29가 소이탄을 투하하여 5채가 전소되었다.

쓰루가 공습 당시 동양 방적 공장 광장에 고사포 진지가 설치되어 적기와 교전을 벌였지만, 쓰루가시에 비해 후쿠이시에는 대공 전력이 거의 배치되지 않았다. 시 중심부의 후쿠이 은행 창고와 고노리 운송점 창고 옥상에 대공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을 뿐, 방공 체제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4] 미군의 비행 계획서에서도 후쿠이시 지역에 대공 방위 시설이 전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쿠이시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사카이군카도무라(현재의 사카이시미쿠니초 카도 지구)에는 비행장이 있었지만, 나가노현 아래 비행대에 소속된 몇 대의 비행기와 비행 장교(육군 중위)가 상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후쿠이시 공습 방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4]

따라서 후쿠이시의 방공 대책은 疎開 (소개)와 소화 (소화)를 중심으로 하는 소극적인 대책에 머물렀고, 총후의 수호에 의존하는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3. 2. 방공 대책

1945년 7월 19일 후쿠이 공습 당시, 후쿠이시의 민방위는 매우 조잡한 대책을 가지고 있었다. 후쿠이의 방공호는 땅에 구멍을 파고 나무로 지붕을 덮은 목조건물 위에 얉은 흙과 진흙을 덮은 급조된 형태였다.[6] 이로 인해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폭풍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후쿠이시는 1944년 11월부터 방공호 건설을 독려했지만, 지하 수위가 높아 지하호를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지상호도 시가지에 인가가 밀집되어 빈터가 적었고, 자재와 인력 부족으로 건설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공습 당시에도 2000기 정도만 만들어졌을 뿐, 교외 지역에는 전혀 없는 곳도 있었다.

1945년 7월 10일,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공습 격화에 따른 긴급 방위 대책 요강"을 각의 결정하고, 전국적으로 건물 철거를 철저하고 신속하게 실시하는 방침을 정했다. 방공법에 따라, 중요 시설 주변 및 철도 연선 민가를 강제 철거하는 사업 대상 도시로 후쿠이시와 쓰루가시가 지정되었다. 7월 9일, 후쿠이현은 지구를 지정하고 즉시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사바에의 구원 부대(중부 제80부대)는 요청에 따라 장교 이하 약 100명, 짐말 약 50필, 수송차 약 50량을 후쿠이시에 파견하여 시내 학교 및 사찰을 임시 숙소나 마구간으로 활용하며 철거 활동을 지원했다. 쓰루가 공습 다음 날인 7월 13일, 현은 수송 정진대 510명, 학생 620명, 영업 마차 50대, 화물 자동차 15대를 동원하여 철거에 협력시켰다. 그러나 노동력과 수송력은 매우 부족했고, 시가지에서 교외로 가는 길은 중요 물자 철거로 정체되었다.

7월 16일, 철거 지정 지구의 약 80%가 철거를 완료했고, 19일부터 건물 철거 작업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당일 밤 후쿠이시는 공습을 받았다.

3. 2. 1. 총후

1932년(쇼와 7년), 후쿠이현의 계획에 따라 후쿠이시와 쓰루가시에서 현내 최초의 방공 훈련이 실시되었다.[1] 1934년(쇼와 9년)에는 민간 방공 단체인 방호단을 결성하고, 방공 감시소 설치도 추진되었다.[1] 감시소는 현내 약 50개소에 설치되었지만, 후쿠이시에서는 시청 옥상의 1개소뿐이었다.[1]

1939년(쇼와 14년)에는 경방단령이 발령되어, 후쿠이시에서도 경방단 본부, 특설 분단 및 13개의 분단을 조직하고, 시 지정 방호 감시소를 시내 13개소 (기다, 게요, 아스와, 구보, 가게츠, 이누이, 가타마치, 에키마에, 신메이, 오노에, 신호, 아사히, 가쓰미)에 설치했다.[1][2] 가정 방공 조직으로서 정내회마다 방공 담당 및 방공 린보 반이 조직되었다.[1][2]

1944년(쇼와 19년) 3월, 후쿠이현 방공 본부가 설치되었다.[1][2] 같은 해 11월부터 방공호 건설이 독려되었으나, 후쿠이시는 지하 수위가 높아 지하호를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2] 지상호도 시가지에는 인가가 밀집되어 빈터가 적었고,[2] 자재와 노력 부족으로 건설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2] 공습 시점에도 2000기 정도만 만들어졌을 뿐, 교외 지역에는 전혀 없는 곳도 있었다.[2]

1945년(쇼와 20년) 1월 3일, 후쿠이시에서 최초의 공습 경보가 발령되었고, 같은 달에만 3번 있었다.[1] 3월 18일에는 미군기가 시 상공을 통과했고, 7월에는 경보가 빈번하게 발령되었다.[1] 6월 29일, 현은 "결전 방공 긴급 강화에 관한 통첩"을 발송하고,[1] 등화 관제, 대피 훈련, 방화 용수 준비, 초기 방화, 긴급 피난, 이재자 수용 방법 등을 지시했다.[2] 후쿠이시 방공 본부도 실시 요강을 책정, 7월 4일부터 19일까지 방공 훈련을 반복 실시했다.[1][2]

7월 10일,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공습 격화에 따른 긴급 방위 대책 요강"을 각의 결정하고, 전국 규모로 건물 철거를 철저하고 신속하게 실시하는 방침을 정했다.[3] 방공법에 따라, 중요 시설 주변 및 철도 연선 민가를 강제 철거시키는 사업 대상 도시로 후쿠이시와 쓰루가시가 지정되었다.[4] 7월 9일, 현은 지구를 지정하고 즉시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4]

사바에의 구원 부대(중부 제80부대)는 요청에 따라 장교 이하 약 100명, 짐말 약 50필, 수송차 약 50량을 후쿠이시에 파견, 시내 학교 및 사찰을 임시 숙소나 마구간으로 하여 시의 철거 활동을 지원했다.[4] 쓰루가 공습 다음 날인 7월 13일, 현은 수송 정진대 510명, 학생 620명, 영업 마차 50대, 화물 자동차 15대를 동원하여 철거에 협력시켰다.[5] 노동력과 수송력은 매우 부족했고, 시가지에서 교외로 가는 길은 중요 물자 철거로 정체되었다.[4]

7월 16일, 철거 지정 지구의 약 80%가 철거를 완료했고, 19일부터 건물 철거 작업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당일 밤 후쿠이시는 공습을 받았다.[6]

4. 공습의 개황

1945년 초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일본 본토의 태평양 연안 지역 폭격에 집중했다.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은 인구가 많고 산업화되었으며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기지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1945년 7월 12일 밤 쓰루가시가 폭격당하면서 동해 연안 지역의 도시들도 폭격 대상이 되었다. 당시 쓰루가의 대공 방어 시설은 거의 없었고 소이탄 폭격으로 시가지 70% 이상이 파괴되었다.[3]

일주일 후인 7월 19일, 후쿠이가 공습을 당했다.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133기가 마리아나 제도 티니언섬에서 이륙하여 현지 시각 23시 24분에 후쿠이에 도착했고, 당시에는 맑은 밤하늘이었다.[4] 후쿠이성 유적 서북쪽을 중심으로 반경 1.2km 내 지역에 865톤 이상의 소이탄이 투하되었다. 폭격으로 발생한 화염폭풍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5]

후쿠이시의 민방위는 매우 조잡했다. 후쿠이의 방공호는 땅에 구멍을 파고 나무로 지붕을 덮은 목조건물 위에 얉은 흙과 진흙을 덮은 급조된 형태였다.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폭풍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같은 시각 후쿠이시 외에도 이바라키현 히타치시, 지바현 조시시, 아이치현 오카자키시가 공습을 당했다.

작전 당일 미군기의 항로도(실선이 후쿠이 공습기)


공습 목표 지역이 된 후쿠이시


7월 19일, 제20항공군 사령부는 제21폭격군단의 제58, 제73, 제313, 제314, 제315폭격항공단에 혼슈 4개 도시(후쿠이, 히타치, 초시, 오카자키)와 아마가사키의 일본석유 간사이 정제소 공격을 지시했다.

후쿠이시 상공에서 주력 부대에 선행한 11기의 선도기는 후쿠이성 터 북서쪽 변두리를 폭격 중심점으로 삼고 시 북부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했다. 그 등화를 표적으로 삼아 뒤따르는 B-29 폭격기 116기가 약 3779.52m에서 약 4267.20m의 저고도에서 총 953.4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기는 편대를 짜지 않고 개별 비행기로 폭격했다고도 하고, 28기와 99기의 2단으로 나뉘어 파상적으로 기습했다고도 한다. B-29 부대는 대략 남쪽에서 후쿠이로 비행했으나, 후쿠이시 상공에서 여러 소편대로 나뉘어 선회하며 다방면에서 시가지에 접근하여 폭격했을 것이라는 시민들의 목격담도 있다.

B-29 폭격기는 왕복 중 쓰루가, 다테이시 곶, 다케후에서 일본 측의 빈약하고 불정확한 대공포화를 만났지만, 작전 참가기 절반 이상은 대공포화가 전혀 없었다고 보고했다.

4. 1. 미국 측

1945년 초,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일본 본토의 태평양 연안 지역 폭격에 집중했다. 1945년 7월 12일 밤 쓰루가시 폭격을 시작으로 동해 연안 도시들도 폭격 대상이 되었다.[3]

일주일 후인 7월 19일,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133기가 마리아나 제도 티니언섬에서 이륙하여 후쿠이에 도착했다. 이들은 후쿠이성 유적 서북쪽을 중심으로 반경 1.2km 내 지역에 865톤 이상의 소이탄을 투하했다.[4][5]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전략폭격 사후조사에 따르면, 후쿠이 공습으로 시가지의 84.8%가 파괴되었다.[6]

미국군은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을 당초에는 주간 고고도에서 정밀 폭격을 하였으나, 일본 열도 상공에 부는 제트 기류의 영향과 낮은 공격 정밀도로 인해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 이후에는 야간 저고도 융단 폭격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오키나와 작전 지원을 위해 4월 16일부터 5월 11일까지 B-29에 의한 대도시 소이 공습은 일시 중단되었지만, 테니안 기지에 제58 항공단이 이주하면서 5월 중순 이후 공습 작전 규모가 대폭 강화되었다.

B-29의 폭격 목표가 된 도시


이후 공습 목표는 주요 대도시에서 공업 생산 및 병참을 지원하는 중소 도시로 이행했고, 전국 57개 지방 도시도 시가지 공습 피해를 입었다. 후쿠이 공습은 제3기 전략 폭격 중 10번째 작전에 해당한다.

미국군은 하룻밤에 4개의 중소 도시를 동시 공격하는 작전을 통해 일본 측 방어 전력을 분산시키려 했으나, 일본 측의 야간 방공 체제는 매우 빈약했다. 총 16회에 걸친 중소 도시 공습에서 일본 측 공격으로 손실된 B-29는 3기에 불과했고, 손상된 B-29 84기 중 대부분은 경미한 손상이었다.

미국군은 중소 도시 공습 작전 임무 보고서에서 일본 측 방공 전력이 약했던 요인으로 본토 결전을 대비한 전투기 보존, 항공기용 가솔린 부족, 야간 전투기 기술 부족 등을 꼽았다.

7월 19일, 제20항공군 사령부는 제21폭격군단의 제58, 제73, 제313, 제314, 제315폭격항공단에 혼슈 4개 도시(후쿠이, 히타치, 초시, 오카자키)와 아마가사키의 일본석유 간사이 정제소 공격을 지시했다.

마리아나 시각 19일 17시부터 18시 43분 사이 테니안 섬 기지를 이륙한 제58항공단은 이오 섬 상공을 거쳐 기이 반도 기모토 동쪽 지점, 비와 호 북단 쓰즈라오 곶을 경유하여 남쪽에서 후쿠이시를 기습했다.

후쿠이시 상공에서는 선도기 11기가 후쿠이성 터 북서쪽 변두리를 폭격 중심점으로 삼고 조명탄을 투하, 후속 B-29 폭격기 116기가 약 3779.52m에서 약 4267.20m 고도에서 총 953.4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은 일본 시각 19일 오후 11시 24분부터 다음날 0시 45분까지 81분 동안 진행되었다.

제20항공군 사령부 통계 자료에 따르면, 후쿠이에 투하된 폭탄의 종류와 양은 다음과 같다.

폭탄 종류수량무게
M69 집속 소이탄3,785발757톤
M47 bomb|M47 콜로이드 가솔린 소이탄영어5,651발195톤
30형 소이탄30발2톤
고성능 폭탄(500파운드 M64 준철갑 폭탄)5발-
조명탄5발-



집속 소이탄은 M69(자탄) 48발을 E46(모탄) 용기에 넣어 공중에서 분해, 가솔린이 충전된 M69 육각형 탄통을 살포하는 방식이었다. 소이탄 수는 후쿠이시 인구 1인당 2발, 1가구당 7~8발에 해당한다.

소이탄 외 고성능 폭탄 5발 투하 목적은 일본 측 방재 대책 교란으로 추측된다.

공습 목적은 공업병참 파괴였으나, 실제 폭격 중심은 공장이 아닌 시가지(주택지)였다. 평균 탄착점은 후쿠이 성곽 북서쪽 부근으로, 당시 후쿠이 시가지 대부분이 반경 약 1219.20m 범위 내에 있었다.

B-29 폭격기는 쓰루가, 다테이시 곶, 다케후에서 일본 측의 대공포화를 만났으나, 작전 참가기 절반 이상은 대공포화가 없었다고 보고했다.

4. 2. 일본 측

1945년 7월 19일, 미국 육군 항공대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133기가 티니언섬에서 이륙하여 후쿠이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후쿠이 시는 후쿠이성 북서쪽을 중심으로 반경 1.2km 내 지역에 865톤 이상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는 화염폭풍을 겪었다.[5]

후쿠이시의 민방위는 매우 조잡한 수준이었다. 방공호는 땅에 구멍을 파고 나무 지붕을 덮은 후 얇은 흙과 진흙을 덮은 급조된 형태였다.[6] 이러한 방공호는 화염폭풍 속에서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역부족이었다.

공습으로 인해 1,756명이 사망하고(여성 915명, 남성 661명), 6,52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부상자 중 107명은 나중에 사망했다.[6] 시가지 건물 25,691채 중 21,992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인구 103,049명 중 85,603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6]

미군은 소이탄과 함께 고성능 폭탄 5발을 투하했는데, 이는 일본 측의 소방 및 민방위 활동을 방해하고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6] 후쿠이 우편국 전화실에서는 전화 회선을 지키기 위해 20명의 젊은 여성 교환수들이 업무를 계속했고, 이들을 구출하려던 경방단원 3명과 함께 순직했다.

공습 이후, 후쿠이 시내의 학교들은 임시 수용소로 사용되었으나, 대부분 파괴되어 많은 시민들이 주변 지역으로 피난해야 했다.[6]

5. 피해의 개요

1945년 7월 19일 공습으로 1,756명(여성 915명, 남성 661명)이 사망하고 6,52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부상자 중 107명이 나중에 사망했다.[6] 건물 25,691채 중 21,992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인구 103,049명 중 85,603명이 집을 잃었다.[6] 종전 1년 후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전략폭격 사후조사에서는 후쿠이 시가지의 84.8%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분석했다.[6]

구분사망부상전체 피해
인명1,756명6,527명8,283명
구분전체 건물 수파괴된 건물 수피해율
건물25,691채21,992채84.8%


6. 구원

후쿠이 공습 직후, 여러 부대와 단체들이 피해 복구와 시민 지원을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 특설 경비대는 불타는 창고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다친 사람들을 돌보았으며, 다음 날 바로 도로를 정비했다.
  • 아와라사바에에 있던 육군과 해군 병원은 다른 부대보다 먼저 달려와 부상자를 치료했다.
  • 중부 제80부대는 불발탄 처리반을 운영하며 경방단과 협력하여 위험을 막았다. 또한 주먹밥 3만 개를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제공하고, 피해 지역 경비 및 급수 지원을 했다.

6. 1. 군

1897년 이마다테군 신메이 정(현재의 사바에시)에 제9사단 소속 보병 제36연대가 주둔하였다. 1940년 보병 제36연대가 만주로 이동하고, 보병 제136연대, 박격 제3연대가 차례로 주둔하였다. 1945년 박격 제3연대는 박격 제3연대 보충대(중부 제80부대)로 개편되었다.

1941년 이후, 후쿠이현 전역을 관할하는 후쿠이 연대구는 중부군관구 교토 사관구에 속했다. 1945년에는 사령부가 설치되어 중부군관구 사령관은 제15방면군 사령관을, 후쿠이 연대구 사령관은 후쿠이 지구 사령관을 겸임했다.

공습 당시 후쿠이 시내에는 후쿠이 연대구 사령부 및 후쿠이 지구 사령부가 있었고, 중부 제80부대 일부가 분산 주둔하고 있었다. 샤촌 고야마타니의 솟타니석 채굴 갱에는 마이즈루 해군 공창 조기 공장이 있었다. 근교에는 사바에에 육군 병원, 아시하라에 육군 병원 분원과 해군 병원 분원이 있었다.

군 각 부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특설 경비대는 창고 구조, 부상자 수용, 도로 개통 작업을 했다.
  • 아와라사바에의 육해군 병원은 부상자를 진료했다.
  • 중부 제80부대는 경방단과 협력하여 불발탄을 처리하고, 주먹밥 3만 개를 만들어 재해자에게 제공했다. 또한 재해 지역 경비 및 급수 지원을 했다.


다이묘초 교차로(7월 30일 촬영)


사바에에서 후쿠이로 파견된 구원 부대는 공습으로 인해 시 외곽으로 피난 후 사바에 연대로 복귀하려 했다. 사바에 연대 보충대는 비상 태세를 갖추고 후쿠이시 구원을 위해 출동, 도중에 구원 부대와 합류했다. 선발대는 화재 진압을 위해 하시나미 지구에 2개 중대를 투입하고, 다른 1개 중대는 시 동부에서 물자 반출을 지원했다.

6. 1. 1. 중부 제80부대

1945년(쇼와 20년) 전반, 박격 제3연대는 박격 제3연대 보충대(중부 제80부대)로 개편되었다. 이 부대는 본토 결전에 대비해 박격 부대 요원 교육 훈련 및 보충 동원 편성을 담당했다. 중부 제80부대는 본부 인원 33명, 박격 중대는 경박격포 6문, 2식 12cm 박격포 2문, 군수차 20량, 35필을 갖추고 총 199명으로 구성되었다. 박격 3개 중대(총 597명)로 편성되어 박격 제17, 제25, 제26대대의 편성을 맡았다.

후쿠이 공습 당시, 사바에에 주둔하던 중부 제80부대는 후쿠이시 구원을 위해 출동했다. 이들은 시내 화재 진압, 식량 및 군수품 반출 지원, 불발탄 처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 화재 진압: 하시나미 지구에 2개 중대를 투입하여 건물 파괴 소화 활동을 벌여 잔존 가옥의 연소를 막았다.
  • 물자 반출 지원: 시 동부에서 창고 및 격납고에 보관된 식량, 군수품 등의 반출을 돕고 시설 방화 활동을 했다.
  • 주먹밥 제공: 사바에에 잔류한 연대 감시 요원은 군용 쌀로 주먹밥 약 3만 개를 만들어 후쿠이시 피해주민에게 전달했다.
  • 불발탄 처리: 불발탄 처리반 2개 반을 편성하여 후쿠이시에 급파, 불발탄 처리를 담당했다.


중부 제80부대는 후쿠이 공습으로 큰 피해를 본 시민들을 돕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6. 2. 경방단

1939년(쇼와 14년), 경방단령 발령에 따라 후쿠이시에 경방단 본부, 특설 분단 및 13개 분단이 조직되었다. 시 지정 방호 감시소는 기다, 게요, 아스와, 구보, 가게츠, 이누이, 가타마치, 에키마에, 신메이, 오노에, 신호, 아사히, 가쓰미 등 시내 13곳에 설치되었다.[1][2] 가정 방공 조직으로는 정내회마다 방공 담당 및 방공 린보 반이 편성되었다.[1][2]

각 지역 경방단, 군 특설 경비대, 경찰은 소화, 구호, 피난 유도 등에 힘썼다. 후쿠이시 경방단은 후쿠이 우체국 전화실에서 여성 직원을 구조하다 단원 3명이 순직했고, 시내 각지에서 피난민을 유도하다 단원 5명이 순직했다.[3]

아스와군 토고촌, 요시다군 마츠오카정·시모시히촌, 이마다테군 사바에정, 나카가와촌, 뉴군 타치마치촌·세안고촌·미카타촌[4], 멀리 사카이군 미쿠니정이나 이시카와현 다이쇼지정 등 각 촌에서도 경방단이 달려와 유해 수습과 소화 활동을 도왔다.[3]

6. 3. 구호대

아와라사바에의 육해군 병원은 다른 부대보다 먼저 달려와 상병자를 진료했다.[1] 사바에 육군 병원, 동 분원, 해군 병원 분원의 각 구호반을 비롯한 구호대가 부상자 구호에 참여하여 20일 저녁까지 일련의 응급 처치가 완료되었다.[2] 지구 사령부도 시 위생과 내에 임시 구호소를 개설했다.[3] 중상자는 후쿠이 적십자 병원, 고바야시 병원, 후쿠이 중앙 병원(히라오카 뇌 병원), 도묘 국민학교 내 임시 구호소, 후쿠이 중학교 내 가설 병원, 모리타 정 제1국민학교 내 가설 병원에 수용되었다.[4]

6. 4. 인근 촌락의 주민

현(県) 및 시(市) 당국의 요청에 따른 취사 지원 외에도 주먹밥, , 감자 등, 다른 시정촌(市町村) 주민들의 린애(隣人愛)에 의한 자발적인 식량 지원도 많이 쏟아져, 재해를 입은 시민들을 격려했다[1]배급이 순조롭게 진행되기까지 치안이 회복되어, 자립 복구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22일에는, 주먹밥 대신 쌀이나 소금, 매실 장아찌 등의 부식 배급도 이루어졌다[2]

이불, 모포모기장 등의 침구, 의복이나 취사 용구, 화장지 등의 일용품도 현에서 시에 할당되어 배급되었다[3]。 또한, 현 안팎의 각 시정촌, 각종 단체, 개인으로부터도 지원 물품 및 위문금이 다수 쏟아졌다[4]

7. 응급 복구

1945년 7월 19일 후쿠이 공습 직후, 후쿠이시는 도시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긴급 복구 활동에 착수했다.

후쿠이시청은 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하고 피해 복구에 나섰다. 피해자들에게 재해 증명서를 발급하고, 식량 공급, 부상자 구호, 유해 처리, 피해자 수용, 원조 물자 배급 등의 업무를 시작했다.[1] 청소 사업을 장려하고 잔해 처리를 지원했으며, 전시재해보호법에 따른 급여금 지급도 시작했다.[2][3]

시 수도국은 수도 시설 복구에 총력을 기울여 7월 27일부터 일부 지역에 물 공급을 재개했고, 11월 중순에는 누수 지점 응급 수리를 완료했다.[1] 호쿠리쿠 배전은 공습 직후부터 복구 작업을 진행하여 20일 오전에는 주요 시설에 전력 공급을 재개했다.[1][2]

주택 재건도 진행되어, 자력으로 집을 짓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후쿠이 경찰서 조사에 따르면 1948년 10월 중순 기준으로 완공된 주택은 1,190호, 건축 중인 주택은 821호, 판자집은 1,804호였다.[1] 학교 수업은 8월 5일부터 재개되었으며, 민가나 사찰 등을 임시 교실로 활용하고 오전/오후 교대제나 2부제 수업을 실시했다.[1][2]

국철 호쿠리쿠 본선은 7월 20일 후쿠이역 - 후쿠이 조차장 구간 하행선 운행을 재개하여 간사이 방면으로 이동이 가능해졌다.[1] 초기에는 정기권 소지자, 군 및 공무 관련 승객에게 우선적으로 승차가 허용되었고, 25일부터 일반 승객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2] 재해 증명서를 제시하면 운임은 무료였다.[3]

게이후쿠 전철 전차는 시내 구간을 제외하고 7월 20일부터 운행을 재개했고,[4] 현영 버스(후쿠이현 승합 자동차)는 7월 25일부터 운행을 재개했다.[1]

7. 1. 시청

20일 새벽, 후쿠이시청은 시장실에 후쿠이시 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하고 긴급 과장 회의를 열어 응급 대책을 결정했다. 즉시 피해자에게 재해 증명서 발급 사무를 시작했으며,[1] 피해자 식량 공급, 부상자 구호, 유해 처리, 피해자 수용, 원조 물자 배급 등에도 착수했다.[1]

처음 착수한 응급 대책은 청소 사업으로, 시는 평당 5JPY을 교부하여 청소를 장려하는 동시에 잔해 처리는 국고 보조를 받아 현과 시에서 분담하여 실시했다.[2]

같은 해 8월 20일부터 시는 전시재해보호법에 근거한 각종 급여금 신청을 접수하고 12월부터 지급을 시작했다.[3]

7. 2. 수도

시 수도국은 국원 총출동하여 수도 시설의 수리를 실시하여 7월 27일에 일부 통수를 시작했다.[1] 누수 지점의 응급 수리는 11월 중순에 완료되었다.[1]

7. 3. 전기

호쿠리쿠 배전 후쿠이 지점은 공습 직후부터 밤낮으로 복구 작업을 진행하여,[1] 날이 밝은 20일 오전에는 하루에 변전소, 마키시마 변전소, 교난 변전소 등 인근 변전소에서 후쿠이 시 중심부로 송전했고,[1] 관공서, 방송국, 우체국의 업무가 일부 시작되었다.[2]

7. 4. 주택

피난처에서 돌아와 자력으로 재건하는 사람도 늘어나, 후쿠이 경찰서의 조사에 따르면 1948년 10월 중순경 완공된 본 건축이 1,190호, 건축 중인 주택이 821호, 판자집 주거가 1,804호였다.[1]

7. 5. 학교

학교 수업은 불에 타 남은 학교 교사에 소실된 학교의 아동·학생을 수용하거나, 민가나 사찰 등을 임시 교실로 하여 8월 5일부터 일제히 재개되었다[1]。수업은 오전과 오후 교대제나 2부 수업 등 학교별로 위임되었다[2]。원래 다니던 아동의 약 절반은 피난처 학교로 전학했기 때문에, 교원 일부는 9월 1일 자로 시외 학교로 전임되었다[3]

7. 6. 철도

20일 오전 10시, 국철 호쿠리쿠 본선후쿠이역 - 후쿠이 조차장 구간 하행선이 개통되어 간사이 방면으로 기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1]。 21일에는 정기권 소지자, 23일부터는 군 및 공무 관련 여객, 25일에는 일반 여객의 승차가 허용되었다[2]。 재해 증명서를 제시하면 재해자는 운임이 무료였다[3]

게이후쿠 전철 전차는 역이 소실된 시내 구간을 제외하고, 에치젠 본선(오노선)은 20일부터 개발역과 오노 산반역 사이, 미쿠니 아와라선(산로선)도 같은 날부터 니타즈카역과 미쿠니역 사이에서 영업을 재개했다[4]

7. 7. 버스

25일부터 현영 버스(후쿠이현 승합 자동차)는 운행을 재개했다.[1]

8. 부흥과 전후

1945년(쇼와 20년) 10월 20일, 후쿠이시 부흥 본부가 발족했고, 같은 달 취임한 쿠마가이 타이사부로 시장의 지휘 아래 부흥 도시 계획이 추진되었다.[1] 주택 건설을 신속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야타 쇼우나이 현 지사와 달리, 쿠마가이는 도시 계획 수립, 특히 도로 계획 결정을 서둘렀다.[1]

부흥 계획의 기본 방침에는 산업 발전과 방화 도시 실현이 포함되었으며, 이를 위해 도로 폭을 대폭 확대하여 교통 속도를 높이고자 했다.[2] 또한, 시가지 전역에 총 연장 약 172km의 하수도를 부설하여 환경 위생을 개선하고, 배수가 좋지 않은 시가지의 아스와 강 유역 수해 방지에도 활용했다.[2]

1946년(쇼와 21년) 1월, 사이토 타케오 지사가 부임하면서 후쿠이시는 후쿠이현과 공동으로 전재 부흥 사업을 추진했다.[1] 당시 전례 없는 대규모 부흥 도시 계획 사업 및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은 현이 시행을 담당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2] 같은 해 10월 9일, 후쿠이시는 특별 도시 계획법에 의거한 전재 도시 지정을 받았고, 1947년(쇼와 22년) 4월 7일에는 토지 구획 정리 설계가 인가되었다.[1]

전재로부터 2년 후인 1947년(쇼와 22년) 7월에는 후쿠이시 전재 부흥 기념제가 개최되었다.[3] 1948년(쇼와 23년) 2월, 후쿠이시는 구획 정리의 환지 지정을 완료했는데, 이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빠른 부흥이었다.[1] 그러나 실제로 이주한 가구는 50호 정도에 불과했다.[1]

같은 해 6월 28일, 후쿠이 대지진이 후쿠이시를 덮쳐 시가지가 다시 폐허가 되었다.[1] 그러나 이 지진으로 인해 도시 계획 수행에 방해가 되었던 이주 대상 가옥 대부분이 붕괴되어, 오히려 도시 부흥이 촉진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4][1] 전재 부흥 도시 계획은 지진 부흥 도시 계획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적으로 수행되었다.[4][1]

이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의 총 사업비는 약 7.06억이었고, 시행 구역 면적은 약 557 ha, 총 이주 호수는 약 6000호, 정비된 공원 녹지는 42곳(총 면적 약 13ha), 평균 감보율은 약 17%였으며, 1966년(쇼와 41년)에 환지 처분되었다.[2]

해당 공습과 이어진 지진으로 인한 후쿠이시의 전재・지진 희생자 추도식은 매년 6월 28일 후쿠이시 코야마타니쵸에 있는 아스와 산 서쪽 묘지의 전재・지진 희생자 위령비 탑 앞에서 거행된다.

8. 1. 미국 군 자료

미국 전략 폭격 조사단의 보고서에는 1945년 7월 19일에서 20일에 걸쳐 후쿠이, 히타치, 초시, 오카자키, 일본 석유 정유 시설에 대한 작전 임무 보고서와 공습 피해 평가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8. 2. 일본 측 자료

1945년(쇼와 20년) 10월 20일, 후쿠이시 부흥 본부가 발족했고, 같은 달 취임한 쿠마가이 타이사부로 시장의 지휘 아래 부흥 도시 계획이 추진되었다.[1] 주택 건설을 신속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야타 쇼우나이 현 지사와 달리, 쿠마가이는 도시 계획 수립, 특히 도로 계획 결정을 서둘렀다.[1]

부흥 계획의 기본 방침에는 산업 발전과 방화 도시 실현이 포함되었으며, 이를 위해 도로 폭을 대폭 확대하여 교통 속도를 높이고자 했다.[2] 또한, 시가지 전역에 총 연장 약 172km의 하수도를 부설하여 환경 위생을 개선하고, 배수가 좋지 않은 시가지의 아스와 강 유역 수해 방지에도 활용했다.[2]

1946년(쇼와 21년) 1월, 사이토 타케오 지사가 부임하면서 후쿠이시는 후쿠이현과 공동으로 전재 부흥 사업을 추진했다.[1] 당시 전례 없는 대규모 부흥 도시 계획 사업 및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은 현이 시행을 담당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2] 같은 해 10월 9일, 후쿠이시는 특별 도시 계획법에 의거한 전재 도시 지정을 받았고, 1947년(쇼와 22년) 4월 7일에는 토지 구획 정리 설계가 인가되었다.[1]

전재로부터 2년 후인 1947년(쇼와 22년) 7월에는 후쿠이시 전재 부흥 기념제가 개최되었다.[3] 1948년(쇼와 23년) 2월, 후쿠이시는 구획 정리의 환지 지정을 완료했는데, 이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빠른 부흥이었다.[1] 그러나 실제로 이주한 가구는 50호 정도에 불과했다.[1]

같은 해 6월 28일, 후쿠이 대지진이 후쿠이시를 덮쳐 시가지가 다시 폐허가 되었다.[1] 그러나 이 지진으로 인해 도시 계획 수행에 방해가 되었던 이주 대상 가옥 대부분이 붕괴되어, 오히려 도시 부흥이 촉진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4][1] 전재 부흥 도시 계획은 지진 부흥 도시 계획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적으로 수행되었다.[4][1]

이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의 총 사업비는 약 7.06억이었고, 시행 구역 면적은 약 557 ha, 총 이주 호수는 약 6000호, 정비된 공원 녹지는 42곳(총 면적 약 13ha), 평균 감보율은 약 17%였으며, 1966년(쇼와 41년)에 환지 처분되었다.[2]

해당 공습과 이어진 지진으로 인한 후쿠이시의 전재・지진 희생자 추도식은 매년 6월 28일 후쿠이시 코야마타니쵸에 있는 아스와 산 서쪽 묘지의 전재・지진 희생자 위령비 탑 앞에서 거행된다.

참조

[1] 웹인용 図説福井県史 近代23 敦賀・福井空襲(1) http://www.library-a[...] 2021-06-13
[2] 웹인용 総務省|一般戦災死没者の追悼|福井市における戦災の状況(福井県) https://www.soumu.go[...] 2021-06-13
[3] 보고서 Summary Report(Pacific War) http://www.anesi.com[...] 1946-07-01
[4] 서적 The Army Air Forces in World War II: Combat Chronology, 1941–1945
[5] 서적 No Strategic Targets Left
[6] 서적 The Decision to Drop the Atomic B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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