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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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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몽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군으로, 용맹함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했고, 매형 등당을 따라다니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손책에게 발탁되어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손권 대에 이르러서는 단양 토벌, 조조군의 침공 격퇴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특히 관우의 형주 공략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과로로 인해 4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는 처음에는 무식한 장수였으나, 손권의 권유로 학문에 힘써 '괄목상대'라는 고사성어를 남겼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혼령에 사로잡혀 죽는 비극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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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여몽
한자 표기呂蒙
로마자 표기Lǚ Méng
자명(子明)
별명아몽
생애
출생178년
출생지예주여남군 부피현
사망219년 12월 (음력, 42세)
사망 원인병사
사인(死因) 장소공안현, 형주
가계
자녀여종
여파
여목
경력
주요 직위별부사마
평북도위 겸 광덕현장
횡야중랑장
편장군 겸 심양현령
여강태수
좌호군, 호위장군
한창태수
남군태수
최종 직위남군태수
작위잔릉후
소속 세력
주군손책
손권
군사 경력
주요 전투강하 전투
적벽 대전
남군 전투
유수구 전투
환성 전투
익양 대치
합비 전투
형주 공방전
기타 정보
여몽
여몽의 그림
적수관우

2. 생애

208년 강하태수 황조를 정벌할 때 진취를 직접 베어 손권군이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주유와 정보를 따라 적벽 대전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남군 전투에서 조인을 몰아냈다.

210년 주유 사후, 노숙이 육구(陸口)로 가던 중 여몽의 공명이 높아졌다는 말을 듣고 그를 방문했다. 여몽은 관우에 대한 방비책을 묻고, 노숙이 즉흥적으로 대처하겠다고 하자 몇 가지 방책을 제시했다. 노숙은 여몽의 재략에 감탄하며 친구가 되었다. 이전에 손권은 여몽과 장흠에게 학문을 닦기를 권유했고, 여몽은 학업에 정진하여 옛 학자들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렀다. 노숙은 여몽에게 “무용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박학다식하다”며 감탄했고, 여몽은 “선비란 사흘만 떨어져도 을 비비며 다시 대해야 한다”고 답했다. 여기서 괄목상대(刮目相對)와 오하아몽(吳下阿蒙)이란 한자성어가 생겼다.[92]

기춘의 전농(典農) 사기(謝奇)가 환현(皖縣, 지금의 안후이성 첸산 현) 일대를 침입하자, 여몽은 그를 축출하고 투항해 온 노약자들을 받아들였다. 212년 조조가 남하한다는 소식에 유수오(濡須塢)를 건축하였다. 장수들이 의문을 제기하자, 여몽은 “싸움이란 항상 이길 수는 없는 법, 만에 하나 로 돌아올 겨를도 없이 적들의 보병기병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배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93] 213년 조조는 별 소득없이 물러났다.

214년 조조 휘하의 여강태수 주광(朱光)이 환(皖)에서 대규모 을 개간하자, 여몽은 이를 조기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권은 장수들과 작전을 수립했고, 여몽은 토산과 공성 병기 대신 전군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속공을 제안했다.[94] 감녕을 선봉에 세우고 새벽에 총공세를 펼쳐 아침 무렵 성을 정복하였다. 합비의 장료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공으로 여강태수와 많은 상을 받고, 여릉(廬陵)의 도적들도 진압하여 수괴만 베고 나머지는 석방하였다.

215년 손권유비에게 형주를 요구하며 여몽에게 2만 명을 주어 장사, 영릉, 계양을 취하게 했다. 장사와 계양은 항복했으나 영릉태수 학보는 항전했다. 유비도 군사를 동원하고 관우가 남하하자, 손권은 여몽에게 노숙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몽은 학보의 친구 등현지(鄧玄之)를 이용해 학보를 속여 항복시켰다. 익양에서의 대치는 조조가 한중으로 내려오면서 종료되었고, 상수를 경계로 영토를 나누었다. 여몽은 심양현과 양신현(陽新縣)을 봉읍(奉邑)으로 받았다.[27][28][29][30]

217년 조조가 또 유수구를 넘보자, 유수오에 강노 10,000장을 배치하여 대항하고 그 선봉을 무찔렀다. 전후 좌호군(左護軍), 호위장군(虎威將軍)에 임명되었다.

노숙이 죽자 그 군대와 식읍을 물려받고 육구에 주둔하였다. 여몽은 관우오나라를 합칠 마음이 있다고 보고, 은밀히 계책을 올려 형주 확보를 주장했다.[34] 겉으로는 관우와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였다. 219년 관우가 북진하자, 여몽은 을 핑계로 연기하며 건업으로 귀환하는 척했다. 관우가 안심하고 번성에 총력을 기울이자, 여몽은 즉시 출격하여 강변의 관우군 초병들을 포박하고 공안의 사인, 강릉의 미방을 항복시켰다.[98]

관우군의 가속들을 예로써 대하고 군기를 확립하여 인가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 여남군 출신 부하가 삿갓 하나를 취했는데 동향 사람이라도 봐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참수하기도 하였다. 군사들은 길에 떨어진 것도 줍지 않았다. 노인들에게 위문하고, 병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과 양식을 베풀었다. 뒤늦게 관우가 내려오면서 탐문을 벌였으나, 관우의 장병들은 가족이 무탈하다는 소식에 투지가 없어졌다.

손권도 강릉에 이르렀으며 육손의도군을 접수하였다. 사면초가에 빠진 관우는 맥성(麥城)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주연반장이 퇴로를 끊어놓았다. 결국 관우와 관평 부자는 마충에게 포획되어 죽고 관우가 통치하던 땅은 오나라로 넘어왔다. 손권으로부터 성대한 대접을 받아 남군태수에 잔릉후(孱陵侯), 1억 전, 황금 500 등 어마어마한 상을 받았다. 과 금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채 봉작이 완료되기도 전에 병이 들었다. 손권은 여몽을 공안의 내전에 들여 만방으로 치료책을 찾고, 성공하는 자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했다. 에 구멍을 뚫어 안색을 살피고, 조금이라도 음식을 들면 기뻐하고 그러지 못하면 을 이루지 못했다. 잠깐 차도가 있어 사면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내 위중해져 향년 42세로 사망하였다. 도사들의 기도는 소용이 없었으며 양양은 여전히 조조의 수중에 있었다. 손권의 슬픔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2. 1.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여몽은 유남군 부포현(富陂縣, 현재의 안후이성 푸난현 동남쪽) 출신이다. 어릴 적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와 손책 휘하의 매형 등당에게 의탁했다.[3] 등당은 산월 토벌에 종사한 손책의 부장이었다.[58] 15세 때, 여몽은 등당의 군대에 몰래 따라갔다. 등당은 여몽을 꾸짖었지만, 여몽은 "가난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렵습니다. 노력하면 부를 얻을 것입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돌아가지 않았다.[3][59]

등당을 섬기던 관리가 어린 여몽을 비웃자, 여몽은 분노하여 그를 죽이고 도망쳤다가 나중에 교위 원웅(袁雄)에게 자수했다.[4][60] 손책은 이 사건을 듣고 여몽을 불러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측근으로 삼았다.[4][60]

몇 년 후 등당이 죽자, 장소의 추천으로 여몽은 등당의 뒤를 이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군대를 지휘했다.[5][61] 200년(건안 5년),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었다. 손권이 군대를 통폐합하려 하자, 여몽은 뇌물을 써서 병사들에게 진홍색 을 입혔다. 사열하는 날, 여몽의 군대는 화려하고 질서 정연하게 움직여 손권은 기뻐하며 병사를 늘려주었다.[5][62] 이후 여몽은 단양(丹楊) 토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평북도위(平北都尉) 겸 광덕현장(廣德―)이 되었다.[6][63]

2. 2. 전장에서의 활약

208년 강하 태수 황조 정벌에 참전한 여몽은 진취수군을 이끌고 맞서자 선두에서 돌격하여 직접 베었다. 이로 인해 손권군은 승리하여 을 점령하였다. 손권은 이 승리가 진취를 먼저 잡은 덕분이라며 여몽에게 횡야중랑장(橫野中郞將) 직책과 천만 전을 주었다.[7]

주유와 정보를 따라 오림(烏林)에서 조조격파하고 조인이 있는 남군포위하였다. 주유가 감녕에게 이릉(夷陵)을 점거하게 하자 조인은 병력 일부를 떼어 감녕을 공격했다. 감녕이 구원을 청했지만 장수들은 병력이 부족하다며 난색을 표하였다. 그러나 여몽은 능통이 10일은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하며, 그 사이에 감녕을 구하러 가고 300명으로 나무를 잘라 퇴로를 막으면 적들이 을 버릴 수밖에 없어 노획이 가능하다고 진언하였다. 주유가 이를 채택하여 이릉에 다다른 날 바로 교전, 절반 이상을 죽였다. 적들은 에 달아났고 주유군은 버려진 말 300필을 챙겼다. 209년 사기가 오른 주유군은 장강을 건너 조인을 격퇴하고 남군에 깃발을 꽂았다. 여몽은 돌아와 편장군에 심양현령(尋陽―, 지금의 후베이성 황메이 현)을 겸하였다.[8][10]

여몽은 부포현(富陂縣) 출신으로, 유남군에 속했으며, 현재의 안후이성 푸난현 동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양쯔강 남쪽으로 이주한 여몽은 손책 휘하의 무관이었던 매형 등당(鄧當)과 함께 살았다. 14세 또는 15세에 등당을 몰래 따라 산월 부족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등당은 어린 매형이 전투에 참여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여몽을 꾸짖으며 그만둘 것을 경고했다. 여몽은 말을 듣지 않았고, 등당은 여몽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가 그를 벌주려 하자 여몽은 "가난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렵습니다. 노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다면 결국 부가 따를 것입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여몽의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었다.[3]

당시 한 관리가 여몽의 어린 나이를 비웃으며 모욕하자, 여몽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어느 날 그 관리를 살해했다. 처음에는 정창(鄭長)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나중에 손책 휘하의 교위 원웅(袁雄)에게 자수했다. 원웅은 여몽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그의 주군에게 간청했다. 손책은 여몽을 직접 면담했고,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여몽을 사면하고 측근으로 임명했다.[4]

몇 년 후, 등당이 죽자 장소는 여몽을 등당의 후임으로 추천했고, 여몽은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었다. 200년, 손책이 암살된 후 그의 동생 손권강동 지역을 다스리는 군벌의 자리를 계승했다. 손권은 작은 부대를 병합하여 더 큰 수비대로 재편성할 계획을 세웠다. 여몽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위해 정교하게 디자인된 갑옷을 구입하기 위해 자금을 모았다. 손권이 여몽의 부대를 시찰하러 왔을 때,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아 여몽의 지휘 아래 더 많은 병사들을 배치했으며, 이로 인해 여몽의 부대는 다른 부대에 합병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5]

여몽은 손권의 단양군(丹楊郡; 현재 안후이성 쉬안청시 주변) 정복에 참여하여 전투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평북도위(平北都尉)로 승진하고 광덕현의 현장(長)으로 임명되었다.[6]

208년 봄, 손권강하군 (현재의 후베이성 동부)의 태수 황조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을 때, 여몽은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투 중에 능통동희는 황조의 대형 맹충 2척을 파괴했고, 여몽의 부대는 황조의 해군을 격파했다. 여몽은 전투 중에 황조의 부하 진취를 죽였다. 황조는 진취의 죽음을 알고 도주하려 했으나, 손권의 군사들에게 붙잡혔다.[7]

같은 해 겨울, 여몽은 손권유비 연합군이 북방 군벌 조조의 군대를 무림(烏林, 현재 후베이성 홍후시)에서 격파한 적벽 전투에 참전했다. 조조는 형식적으로 중국 북부로 퇴각하여 남군 (南郡, 현재 징저우시, 후베이성 일대)을 방어하기 위해 그의 장수 조인을 남겨두었다. 손권의 군대는 주유정보가 이끌었고 남군에서 조인을 포위했다.[8]

그 무렵, 익주 (현재의 쓰촨성충칭시를 포함) 출신의 군사 장교 습숙(襲肅)은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손권 측으로 귀순했다. 주유는 손권에게 여몽에게 습숙의 군대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몽은 습숙을 용감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그의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는 습숙이 먼 길을 와서 그들과 합류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손권은 여몽에게 동의하여 습숙의 군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9]

남군 포위전 동안, 주유는 감녕에게 별동대를 이끌고 이릉(夷陵, 현재 이창시, 후베이성)을 점령하도록 명령했지만, 감녕은 조인의 부하들이 이끄는 별도의 적군에게 공격을 받았다. 감녕이 구원 병력을 요청하기 위해 주유의 진영에 사자를 보냈을 때, 손권의 대부분의 장교들은 병력이 부족하다며 감녕을 돕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여몽은 감녕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유와 정보에게 능통을 남겨두고 자신이 감녕을 돕겠다고 제안하며, 능통이 최소한 10일 동안은 현재 위치를 방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여몽은 또한 주유에게 적의 퇴각로를 거대한 통나무로 막기 위해 300명의 병사를 보내라고 제안했다. 구원군이 이릉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적군의 절반 이상을 죽였고 살아남은 적군은 밤에 퇴각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적군은 거대한 통나무와 마주쳐 말로 건널 수 없었기에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손권의 추격군은 차단 지역에 도착하여 적이 남긴 약 300마리의 말을 빼앗아 배로 그들의 진영으로 수송했다. 주유 군대의 사기는 크게 향상되었고, 그들은 양쯔강을 건너 적 기지 근처에 수비대를 설치한 후 조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조인은 전투에서 패배했고 결국 그의 군대에게 그들의 위치를 포기하고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손권의 군대는 남군을 점령하고 중앙 형주 (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포함)를 장악했다. 여몽은 귀환 후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하고, 尋陽縣(현재 황메이현, 후베이성 남서쪽)의 현령(令)으로 임명되었다.[10]

210년, 주유가 사망한 후, 노숙이 손권 군대의 전선 사령관으로 주유를 승계한 뒤, 육구(陸口, 현재 적벽, 후베이성)로 가는 길에 여몽의 주둔지를 지나갔다. 노숙은 줄곧 여몽을 경멸했지만, 누군가 그에게 "여 장군의 명성과 영광이 날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그를 봐서는 안 됩니다. 곧 그를 방문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노숙은 여몽의 진영으로 향했다. 술을 약간 마신 후, 여몽은 노숙에게 "중요한 임명을 받으시고 관우 근처에 주둔하실 텐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할 비상 계획을 세우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숙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때가 되면 상황에 적응하겠습니다." 여몽은 관우를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다섯 가지 전략을 노숙에게 제안했다. 노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몽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여자명, 내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자네에게 그런 통찰력이 있는 줄 몰랐네."라고 말하며 여몽의 어머니를 방문하고 여몽과 친구가 되었다.

《강표전(江表傳)》은 여몽과 노숙의 만남에 대한 약간 다른 기록을 담고 있다. 노숙은 여몽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전에는 그저 무사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학문에 힘쓰고 있으니 더 이상 오나라의 그 여몽이 아니오." 여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관우를 상대하는 세 가지 전략을 노숙에게 제시했다. 노숙은 여몽을 존경하여 그 전략을 자신만 간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밝히지 않았다.

중국어 속담인 "오하아몽(吳下阿蒙)"과 "괄목상대(刮目相看)"는 이 대화에서 유래했다. 전자는 부지런히 공부하여 향상된 무식한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18] 후자는 특히 사람이 현저한 발전을 이룬 후에 그 사람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조조는 사기(謝奇)를 기춘현의 전농으로 임명하고 완현(皖縣,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현)에 주둔하게 하여 손권의 영토 변경을 괴롭히도록 명령했다. 여몽은 사기를 항복시키려 했지만 실패했고, 사기를 공격했다. 사기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했다. 그의 부하인 손자재(孫子才)와 송호(宋豪)는 여러 민간인들과 함께 여몽에게 항복했다.[20]

213년, 여몽은 손권을 따라 유수(濡須, 현재 안후이성 우웨이현 북쪽)로 가서 조조의 진격을 막았다. 손권은 유수에 부두를 건설하려 했지만, 부하들은 "우리는 강의 반대편에 상륙하여 적을 공격한 다음 배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부두를 건설해야 합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몽은 부두 건설을 지지하며 "전투는 예측할 수 없으며 항상 이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패배하고 적이 좁혀오면 강둑으로 후퇴할 시간도 없을 텐데, 어떻게 배를 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손권은 여몽에게 동의하여 승하선이 더 편리하도록 부두를 건설했다. 이로 인해 손권의 군대는 적을 극복하려는 몇 차례의 실패 시도 끝에 후퇴한 조조의 접근하는 군대에 맞서 그들의 위치를 방어했다.[21][22]

214년경, 조조는 여숙에서 철수하면서 주광(朱光)을 여강군(廬江郡; 현재의 안후이성, 루장현 일대) 태수(太守)로 임명하고 완현(皖縣;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현)에 주둔하도록 명령했다. 주광은 농업을 발전시키는 한편, 파양현의 산적들에게 뇌물을 주어 손권의 영토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했다. 여몽은 손권에게 "완현의 토지는 매우 비옥하여 적이 풍성한 수확을 얻으면 그들의 병력이 증가할 것입니다. 몇 년 안에 조조의 군사적 역량이 크게 증가할 것이니, 조속히 그들을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경고했다. 손권은 여몽의 조언을 받아들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여강군을 공격했다.[23]

전투 전에 손권은 모든 장수를 소집하여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장수들은 흙을 쌓아 작은 언덕을 만들고 장비를 보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여몽은 반대했다. "언덕을 쌓고 장비를 보충하는 데 며칠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면 적은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구원병이 도착하여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빗물이 흘러들어 물이 불어날 것이고, 며칠 동안 지체하면 수위가 낮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배가 퇴각하기 매우 어려워지고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요새의 방어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대의 사기가 여전히 높을 때 모든 방향에서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수로를 통해 퇴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한 승리를 확보하는 방법입니다." 손권은 여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24]

여몽은 감녕에게 완현 공격을 지휘하도록 추천하고, 자신은 정예 부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새벽에 공격을 시작했을 때, 여몽은 직접 징을 쳐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들은 정오까지 요새를 점령했다. 그 무렵, 조조의 장수 장료는 합비에서 주광을 돕기 위해 증원군을 이끌고 있었다. 그가 가석(夾石)에 도착했을 때, 완현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철수했다. 손권은 여몽의 용맹을 칭찬하며 그를 여강군 태수로 임명했다. 여몽은 순양현(尋陽縣; 현재의 후베이성, 황메이현 남서쪽)에서 600호의 가구를 얻어 그의 둔전 시스템을 운영했으며, 30명의 부하를 더 지휘하게 되었다.[25]

여몽이 순양현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일부 산적들이 로릉군(廬陵郡; 현재의 장시성, 지안시 남서쪽)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손권의 많은 장수들이 그들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권은 "백 마리의 맹금류가 한 마리의 물수리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몽에게 산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여몽은 성공하여 산적 두목들을 죽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풀어주고 그들이 정상적인 민간인 생활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26]

214년, 형주에서 돌아온 후, 여몽은 합비를 정복하기 위한 손권의 원정에 참여했는데, 합비는 조조의 장수 장료가 지키고 있었다. 215년, 손권의 군대는 합비의 성벽을 돌파하지 못했고, 이전의 전투에서도 많은 사상자를 냈다. 군대에 역병이 돌자 손권은 철수를 결정했다. 퇴각하는 동안 손권은 장료의 격렬한 반격에 휘말렸지만, 여몽을 포함한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주군을 보호하며 포위망을 뚫고 안전하게 탈출했다.[31]

217년, 조조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손권의 주둔지인 유수(濡須, 현재 안후이성 우웨이현 북쪽)를 침공했다. 손권은 군대를 이끌고 적에 맞서 싸웠고, 여몽에게 군대를 맡겼다. 여몽은 213년에 건설된 부두에 도착하여, 적이 접근하면 수천 명의 궁병을 배치하여 화살을 쏟아붓게 했다. 그는 또한 적이 발판을 마련하기 전에 조조 선봉 부대의 진영을 공격하여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조조는 손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결국 철수했다. 여몽은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승진하고 좌호군(左護軍)으로 임명되었다.[32]

2. 3. 조조군과의 격전

212년 조조가 남하한다는 소식에 여몽은 손권에게 여러 기책을 헌책하고 유수구(濡須口)를 방어할 유수오(濡須塢)를 건축하였다. 장수들이 ‘뭍에 올라 적을 습격하고 잽싸게 로 돌아오면 그만인데 오(塢)가 무슨 소용이냐’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여몽은 “싸움이란 날카로울 때가 있으면 무딜 때도 있듯이 항상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 로 돌아올 겨를도 없이 적들의 보병기병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배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라 답하였다.[93] 213년 조조는 별다른 소득없이 물러났다.

건안 18년 조조는 40여 만의 군세로 유수를 침공했고, 손권은 7만 군세로 적군을 맞이했다. 조조와 손권이 장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다(유수구 전투). 여몽이 헌책하여 미리 축조해 둔 유수오가 큰 공을 세웠다.

214년 조조 휘하의 여강태수 주광(朱光)이 환(皖)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을 개간하고 장강 이남의 파양 지역 사람들과 내통하였다. 환의 토질은 기름지기 때문에 한 번 수확할 때마다 그만큼 병력도 많이 지탱할 수 있어 그대로 몇 년이 지나면 매우 강력해질 것이었다. 여몽은 이를 조기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손권도 이를 받아들여 장수들과 작전을 수립했다.

토산을 쌓고 공성 병기도 동원하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그러면 시간이 너무 소요돼서 환성은 방비가 강화되고 적의 원군도 오는 데다 물마저 말라버려 함락은커녕 돌아오기도 어렵다며 반대하였다. 오히려 아직 수비가 견고하지 않은 때에 전군이 사방에서 몰아치면 금방 무너뜨리고 물길로 귀환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94] 덧붙여 감녕을 승성독(升城督)으로 추천하여 선봉에 세우고자 하였다. 손권이 그대로 실행하였다. 새벽을 기해 총공세를 펼쳐 여몽이 손수 을 치며 독려하니 병사들도 분전하여 아침 무렵 성을 정복하였다. 합비의 장료는 협석(夾石)에 닿았던 터라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손권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합비 성을 공격했지만, 역병에 걸려 철수했다. 그 때 장료의 추격을 받았지만, 적은 병력으로 여몽·능통 등이 뒤를 맡아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끝에 손권을 지켰다(합비 전투).

건안 21년-22년, 조조는 직접 26군(10만 이상의 군세)을 이끌고 다시 유수구를 공격하여, 장료·장패 등을 선봉으로 손권을 공격했고, 손권의 작업대가 책(柵)을 쌓기 전에 강력한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 손권은 여몽과 장흠을 전군 제장으로 임명했고, 여몽은 유수구에서 이전의 유수오(수상 요새) 위에 강력한 쇠뇌 1만 대를 배치하여 조조의 진격을 막았다. 조조군 선봉이 둔진(屯陣)을 마치기도 전에, 여몽은 이를 엿보고 틈을 타 기습하여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73] 결국 조조는 유수오에서 강을 건널 수 없어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권 군에게 격퇴되어 물러갔다.[74]

2. 4. 영릉 태수 학보를 속이다

215년 손권유비익주를 차지하고도 형주를 내어주지 않자 분개하여 여몽에게 선우단(鮮于丹), 서충(徐忠), 손규(孫規)와 2만 명을 주어 장사, 영릉, 계양을 취하게 했다. 노숙은 1만 명을 이끌고 파구(巴丘)로, 손권은 육구로 갔다. 장사와 계양은 여몽의 편지에 바로 항복했으나 영릉태수 학보만은 항전했다. 당시 유비도 5만 명을 동원하여[95] 공안(公安)으로 진군하고 관우는 세 군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손권은 노숙을 익양(益陽)으로 보내 관우를 저지하고 여몽에게도 영릉은 포기하고 급히 노숙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몽은 회군하기 전에 영현(酃縣)에서 데려왔었던 학보의 친구 鄧玄之|등현지중국어를 이용해 학보를 속이기로 했다. 그날 밤 북상하라는 명령을 숨긴 채 영릉 공성전에 대한 작전 회의를 하며 등현지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학보는 충의를 행하고 싶어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습니다.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당했고, 관우는 남군에서 우리 주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영현을 구하려던 움직임은 손규에게 박살났습니다. 저들조차 극도로 위태로운데 영릉을 신경쓸 여력이나 있겠습니까? 우리 군은 정예인 데다 사기도 높고 후속병은 끊이지가 않습니다. 학보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가망 없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학보가 영릉의 사람들을 일치단결시켜 고립무원의 성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제가 보건대 금세 무너질 것이 뻔하고 그러면 자신은 물론 그 노모까지 죽을 테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다 외부 사정을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께서 그를 만나 잘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학보는 낚시에 걸려들어 성문을 열고 등현지를 따라나와 항복하였다. 여몽이 그 을 잡아 환영하고는 실제 명령서를 보여 주며 크게 웃었다. 학보는 속았다는 부끄러움에 속으로 숨고 싶었다. 후속 조치를 취하고 곧바로 익양으로 올라갔다. 익양에서의 대치는 조조가 한중으로 내려오면서 종료되었다. 익주를 잃을까 염려한 유비가 손권에게 화의를 청했고 결국 장사군과 영릉군의 중앙을 흐르는 상수를 경계로 그 동쪽은 손권이, 서쪽은 유비가 영유하기로 합의하였다. 여몽은 심양현과 陽新|양신중국어현을 봉읍(奉邑)으로 받았다.[27][28][29][30]

2. 5. 관우의 형주를 노리다

노숙이 죽자 그 군대 1만여 명, 한창태수(漢昌―), 식읍 하전(下雋)·유양(劉陽)·한창·주릉(州陵) 4을 물려받고 육구에 주둔하였다. 노숙은 조조가 존재하는 한 관우와 협력해야 한다고 했었다. 반면에 여몽은 관우가 효웅으로 오나라를 합칠 마음이 있는 데다 장강 상류까지 점유하고 있어 관계가 오래갈 수 없다고 여겼다. 여몽은 은밀히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정로장군(征虜―) 손교[97] 가 남군을, 반장이 백제성을, 여몽이 양양을 틀어쥐고 장흠이 유격병 만 명으로 장강을 순행하며 상황에 따라 대처한다면 조조가 무슨 걱정이고 관우가 무슨 필요겠습니까? 게다가 관우는 자꾸 을 바꿔 마음 놓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일이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서주에 대해서는 일단 공략할 수 있겠지만 뻥뻥 뚫린 육로로 기병들이 내달리는 터라 칠팔만 명을 쏟아부어 고수해도 근심만 될 뿐이라고 보았다. 손권도 형주를 확보하기로 결심하였다.[34]

겉으로는 관우와의 우호 관계를 더욱 증진하였다. 219년(건안 24년) 관우가 공안과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에 병력을 남겨두고 의 번성(樊城)으로 북진하였다. 여몽은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리고 위독한 척 연기하였다.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면서도 수비병을 많이 남겨놓은 것은 제가 그 뒤를 덮칠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에 시달리므로 그 요양을 핑계 삼아 건업으로 귀환한다면 관우도 수비병을 거두어 몽땅 양양에 투입할 것입니다. 그 틈에 우리가 밤으로 질주하면 텅 빈 남군과 관우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손권은 여몽을 중앙으로 소환하고 몰래 형주를 칠 계획을 짰다.[40]

관우는 안심하고 번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욱이 강릉에서 우금포로 3만 명의 식량이 부족하다며 손권이 소유한 상관(湘關, 영릉군 소재)의 을 노략질했다. 여몽은 이를 빌미로 즉시 출격하였다. 그동안 명분이 없어서 관우를 직접 공략하지 못했던 여몽이었으나, 관우의 노략질로 인해 여몽은 관우를 공략할 명분이 생겼다. 심양에서 상선으로 위장한 에 정예병들을 태워 쉬지 않고 재빠르게 나아가 강변의 관우군 초병들을 포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우가 다시 노략질을 하기 위해 설치한 관측소를 모두 철거했다. 공안의 사인, 강릉의 미방도 항복시켰다.[98] 미방은 진작에 손권군과 내통하고 있었고,[92] 관우는 남군이 순식간에 넘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43]

2. 6. 형주 평정과 죽음

219년, 관우조조의 번성(樊城; 현재의 후베이성, 샹양시, 판청 구)을 공격하자, 여몽은 손권에게 관우의 빈틈을 노려 형주를 공략할 것을 제안했다.[40]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러 갈 때 많은 예비 병력을 남겨둔 것은 자신이 그의 부재를 틈타 영토를 빼앗을까 두려워서인데, 자신은 병을 앓고 있으니 치료를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는 척하여 관우를 방심하게 하고, 그 틈에 약하게 방어된 영토를 공격하면 남군을 정복하고 관우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41] 손권은 여몽의 계획에 동의했다.[42]

관우는 속임수에 넘어가 예비 병력을 철수하고 번성으로 진격했다. 여몽은 정예 병사들에게 상인으로 위장하여 남군으로 항해하도록 명령했고, 항해하는 동안 강을 따라 관우가 세운 망루를 점령하여 방어자들이 그들의 접근을 알지 못하게 했다.[43] 공안현을 방어하던 사정유반의 설득으로, 남군을 지키던 미방은 여몽의 설득으로 항복했다.[44][45]

남군에 입성한 여몽은 민간인들을 잘 대했고, 부하들에게 엄격한 명령을 내려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금지했다. 여남군 출신 부하가 삿갓 하나를 훔치자 동향 사람이라도 봐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참수하기도 하였다. 여몽은 노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류를 제공하고, 환자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는 등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46]

관우형주가 여몽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군으로 돌아오면서 여몽에게 사자를 보냈는데, 여몽은 사자들을 데리고 성을 둘러보게 했다. 사자들이 돌아와 가족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관우의 군대는 전투 의지를 잃었다. 관우는 맥성(麥城; 현재의 량허진, 당양시, 후베이성 맥성촌 일대)으로 퇴각했다가, 장향(漳鄉)에서 부하들이 도망쳐 손권 군대에게 항복했다. 손권주연반장을 보내 관우의 퇴각로를 막았고, 관우관평 부자는 마충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47]

여몽은 형주 정복의 공로로 남군태수로 임명되고, 찬령후(孱陵侯)에 봉해졌으며, 1억위안과 황금 500을 하사받았다.[48] 손권은 공안현에서 연회를 열어 승전을 축하했지만, 여몽은 병 때문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손권은 웃으며 여몽에게 관우를 사로잡은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하며, 병사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직접 여몽을 위해 부하들을 선정하고 의식에 필요한 장비를 골랐다. 의식이 끝난 후, 여몽이 떠날 때 모든 병사들이 길을 따라 줄을 섰고, 배경에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49]

여몽은 돈과 금을 거절했지만, 손권은 굳이 받으라고 했다. 여몽은 후작으로 봉해지기 전에 병이 났는데, 당시 손권은 공안현에 있었기에 여몽을 자신의 개인 저택으로 데려와 함께 머물게 했다. 손권은 여몽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에게 황금 1000을 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여몽의 상태가 악화되자 손권은 벽에 구멍을 뚫어 여몽의 방을 관찰했다. 여몽이 식사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몽의 상태가 호전되자 손권은 신하들에게 여몽을 방문하여 안부를 전하게 하고, 도사들을 초청하여 여몽의 수명을 늘리기 위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몽은 결국 공안현에서 42세(만 나이)로 사망했다. 손권은 여몽의 죽음에 극도로 슬퍼했다.

여몽은 죽기 전에 가족에게 손권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포함한 모든 귀중품을 금고에 보관하고, 죽은 후에 주군에게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또한 간소한 장례를 치러달라고 요청했다. 손권은 여몽이 죽기 전에 그런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슬퍼했다.[50]

3. 평가

진수는 여몽을 용맹하면서도 지략에 능한 인물로 평가하며, 무장으로서 여몽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평하였다.[92] 특히 호포를 속이고 관우를 사로잡은 것을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꼽았다. 처음에는 경솔하고 무모했지만, 결국 자제력을 갖추고 훌륭한 정치가의 풍모를 보였다고 평가했다.[56]

손권은 여몽과 장흠을 나이가 들면서 발전하는 훌륭한 본보기로 칭찬했다. 그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학문에 힘쓰고, 재물보다 의를 중시하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54] 또한 여몽이 젊었을 때는 용맹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지혜와 지략이 더해져 주유에 버금가지만, 토론과 문학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 그러나 관우를 격파한 일은 노숙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55]

여몽은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군주와 동료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처리했다. 사사로운 원한을 품지 않았으며, 과거 부곡 문제로 강하군 태수 채이에게 고발당했으나 원망하지 않았다. 예장군 태수 고소가 사망하자 손권에게 채이를 후임으로 추천했고, 손권은 여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52]

감녕의 난폭한 행동에 불만을 품었지만, 손권에게 감녕과 같은 맹장은 구하기 어렵다며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손권은 여몽의 조언을 받아들여 감녕을 관대하게 대했고, 감녕은 죽을 때까지 손권을 충실히 섬겼다.[53] 노숙, 감녕과는 각각 같은 당에 올라 어머니에게 배례하고 두터운 우정을 맺었다.

4. 가계

呂蒙중국어의 아들 呂霸중국어가 작위를 상속받았다. 呂霸중국어는 50경[1]의 토지와 300호의 백성을 받아 아버지의 묘를 지키게 했다. 呂霸중국어가 죽은 후에는 그의 형인 呂琮중국어이 작위를 계승했다. 呂琮중국어이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인 呂睦중국어이 작위를 이었다.[1]

이름관계비고
呂琮중국어장남呂霸중국어가 죽자 그 뒤를 이음
呂霸중국어아들아버지 呂蒙중국어작위를 이음
呂睦중국어아들呂琮중국어의 동생으로 呂琮중국어이 죽고 그 뒤를 이음


5. 삼국지연의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여몽은 형주 정복을 축하하는 연회 도중 관우의 혼령에 사로잡힌다. 관우의 혼령은 여몽에게 "푸른 눈깔! 자색 수염의 겁쟁이, 아직도 날 알아보겠느냐?"라고 외치며, "나는 한수정후 관운장이다."라고 쩌렁쩌렁 외친다. 여몽은 쓰러져 일곱 개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다.[57]

삼국지연의에는 정사 여몽전이 단 한 글자도 반영되지 않았다. 적벽 대전, 오림 전투, 남군 전투, 형주 평정의 전투에서 주유의 왼팔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손권의 권유로 학문을 시작하여 독학으로 문무를 겸비한 지휘관이 되었다. 노숙은 여몽을 경멸했으나, 독학한 여몽을 보고 태도를 바꾸었다.

오장원 전투에서 사마의사마사에게 "촉군을 항복시킨 것은 여몽의 심리 모략을 본받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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