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 하트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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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비 하트넷은 1922년부터 1941년까지 20년간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한 포수이다. 1900년 로드아일랜드주 운소켓에서 태어난 하트넷은 시카고 컵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38년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내셔널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1935년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6번의 올스타 선정과 4번의 월드 시리즈 출전 기록을 가지고 있다. 통산 타율 0.297, 236홈런, 1179타점을 기록했으며, 1972년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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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 하트넷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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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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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포수 / 감독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출생일 | 1900년 12월 20일 |
출생지 |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운소켓 |
사망일 | 1972년 12월 20일 |
사망지 | 미국 일리노이주 파크리지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22년 4월 12일 |
데뷔 팀 | 시카고 컵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 경기일 | 1941년 9월 24일 |
최종 팀 | 뉴욕 자이언츠 |
선수 기록 | |
타율 | 0.297 |
홈런 | 236 |
타점 | 1,179 |
감독 기록 | |
승-패 | 203–176 |
승률 | 0.536 |
선수 경력 | |
선수 | 시카고 컵스 (1922–1940) 뉴욕 자이언츠 (1941) |
감독 | 시카고 컵스 (1938–1940) |
수상 | |
올스타 | 6회 (1933–1938) |
MVP | NL MVP (1935) |
명예의 전당 | 시카고 컵스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헌액 | |
종류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
날짜 | 1955년 |
득표율 | 77.7% (12번째 투표) |
2. 어린 시절
가비 하트넷은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운소켓에서 14명의 자녀들 중 첫째(장남)로 태어났다.[71][4] 아버지 프레드를 따라 온 가족이 주의 경계를 넘어 매사추세츠주 밀빌로 이주했고,[71][4] 그곳에서 하트넷은 '배니건의 밀빌 고무 가게'Banigan’s Millville Rubber Shopeng에서 일했다.[71][4] 하트넷은 1921년, 20살의 나이에 이스턴 리그의 우스터 부스터스라는 팀에서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74][7] 뉴욕 자이언츠의 존 맥그로 감독은 스카우트 제시 버켓을 보내 하트넷의 선수로서의 재능을 알아보도록 했다.[75][8] 버켓은 맥그로 감독에게 하트넷이 메이저 리그 포수로 뛰기에는 손이 너무 작다고 보고했다.[75][8]
하트넷은 로드아일랜드주 운소켓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주 밀빌에서 성장했다.[4] 1921년 이스턴 리그의 우스터 부스터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7] 1922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 경력을 시작했다.[2] 초기에는 백업 포수였으나, 주전 포수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주전 자리를 꿰찼다.[2][10][12][13]
3. 선수 경력
하트넷은 뛰어난 수비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보살, 협살, 병살 등 여러 수비 지표에서 리그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동시에 강력한 타격 능력도 갖추어 1925년에는 24홈런(리그 2위)을 기록했고,[14][15] 1930년에는 타율 .339, 37홈런, 122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68] 그의 37홈런은 당시 포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81] 1929년의 팔 부상 이후에는 부상을 피하는 플레이에 집중하며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다.
1933년 시작된 올스타 게임에 첫 해부터 6년 연속으로 출전했으며,[68] 특히 1934년 올스타전에서는 칼 허벨과 배터리를 이루어 명예의 전당급 타자들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는 명장면을 연출했다.[84] 1935년에는 타율 .344를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고,[102] 1937년에는 커리어 하이인 .354의 타율을 기록했다.[68]
1938년부터는 선수 겸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그해 9월, 어둠이 내려앉는 리글리 필드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는데, 이는 '황혼 속의 홈런(Homer in the Gloamin'|호머 인 더 글로민eng)'으로 불리며 메이저 리그 역사에 길이 남았다.[112][47][48] 이 홈런에 힘입어 컵스는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46]
1940년 시즌 후 컵스 감독직에서 물러났고,[120][55] 1941년 뉴욕 자이언츠에서 한 시즌을 더 뛴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68][2] 은퇴 후에는 마이너 리그 감독을 맡았고, 1960년대에는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코치 및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1955년 기자단 투표를 통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72년 일리노이주에서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3. 1. 데뷔 초창기 (1922-1924)
하트넷은 1922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하여 밥 오패럴의 백업 포수로 활동했다.[2][68] 그는 수줍고 과묵한 성격 때문에 신인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가비'(Gabby|개비eng)라는 별명을 얻었다.[9][76]
1924년 7월 22일, 오패럴이 보스턴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두개골 골절상을 입자 하트넷이 주전 포수 자리를 이어받았다.[2][10] 그는 그해 .299의 타율과 16개의 홈런, 67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활약했다.[68][77] 포수 빌 킬레퍼가 은퇴한 후, 하트넷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가 가장 선호하는 포수가 되었다.[11][78] 1924년 9월 20일에는 알렉산더의 통산 300번째 승리를 합작하기도 했다.[11][78] 하트넷이 오패럴의 공백을 성공적으로 메우자, 컵스 구단은 그를 주전 포수로 낙점하고 1925년 5월 오패럴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했다.[12][13][79][80]
3. 2. 스타덤에 오르다 (1925-1927)
하트넷은 1925년 시즌 24홈런을 때리며 1893년 잭 클레먼츠가 세운 포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14][81] 이는 내셔널 리그 홈런 부문에서 39홈런을 친 로저스 혼즈비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15][82] 1925년 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많은 실책을 저지른 포수였지만, 동시에 레인지 팩터와 풋아웃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올랐다. 또한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어시스트 부문 리그 1위, 도루 저지율 부문 리그 3위를 기록했다.[16][83] 하트넷과 선수 시절 맞붙기도 했으며, 훗날 조니 벤치가 선수로 뛰던 시기 내셔널 리그 팀 감독을 맡았던 리오 더로셔는 하트넷과 벤치 모두 비슷하게 강한 송구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17][84] 1925년 12월 메이저 리그 윈터 미팅 기간에는 하트넷이 포수 프랭크 스나이더와 외야수 아이리시 뮤젤과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시카고 컵스 구단의 빌 비크 시니어 사장은 하트넷은 어느 팀으로도 트레이드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부인했다.[18][85]
하트넷은 1926년 시즌 타율이 .275로 하락하고 41타점만을 기록하며 다소 실망스러운 한 해를 보냈다.[19] 하지만 다음 해인 1927년에는 타율 .294와 10홈런, 80타점을 기록하며 공격 부문에서 다시 좋은 모습을 보였다. 수비에서는 풋아웃, 어시스트, 도루 저지 횟수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내셔널 리그 포수 가운데 가장 많은 실책과 패스트볼을 기록하며 아직 경험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9][86] 그해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 투표에서 10위에 이름을 올렸다.[19][87]
3. 3. 전성기 (1928-1937)
1928년 시즌, 하트넷은 타율 .302로 처음으로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14홈런을 때려냈으며,[68] 또한 메이저 리그 포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이었던 잭 클레먼츠의 72홈런을 넘어섰다.[81] 수비에서도 내셔널 리그 포수 가운데 어시스트와 도루 저지율 부문에서 1위에 이름을 올렸다.[88] 그는 선수로서 성숙해지면서 경기장에서 더 절제된 모습을 보였고 실책도 줄었다.[70] 두려움 없이 내야로 정확하게 송구하여 주자를 잡아냈으며, 1928년부터 1938년 사이에 내셔널 리그 포수들 가운데 일곱 차례나 수비율 1위를 차지했다.[70]
1929년 시즌, 하트넷은 워밍업 없이 강한 송구를 시도하다가 팔에 부상을 당했다. 이 부상으로 인해 그해 포수로는 단 한 경기에만 출전했고, 나머지 24경기는 주로 대타로 나섰다. 소속팀 시카고 컵스는 그해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다.[89] 하지만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맞붙은 1929년 월드 시리즈에서 하트넷은 3타수 동안 안타 없이 3개의 삼진만 당하며 부진했다.[76][90]
1930년 시즌에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타율 .339, 커리어 하이인 122타점, 장타율 .630, 그리고 37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이 세웠던 포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68][81] 수비에서도 내셔널 리그 포수 중 풋아웃, 어시스트, 수비율, 도루 저지 횟수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91] 그가 1930년에 세운 포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은 1953년 로이 캄파넬라가 40홈런을 치기 전까지 23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92]
1931년 9월 9일, 시카고 컵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비공식 경기에서 하트넷이 유명한 폭력조직 두목 알 카포네에게 사인을 해주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93] 이 사진이 미국 전역의 신문에 실리자, 당시 야구 커미셔너였던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는 하트넷에게 앞으로 카포네와 함께 사진을 찍지 말라는 전보를 보냈다.[93] 이에 하트넷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알 카포네와 사진 찍는 걸 원치 않으시면, 그에게 직접 말씀해주세요."라고 재치 있게 답장했다.[93]
1932년 시즌 동안 하트넷은 시카고 컵스 투수진이 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낮은 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데 기여했고, 팀은 2위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4경기 차로 따돌리고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다.[94] 1932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뉴욕 양키스와 맞붙었다. 10월 1일에 열린 3차전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가 포수 하트넷 앞에서 그 유명한 '예고 홈런'을 쳤을 때, 하트넷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84] 하트넷은 시리즈 동안 타율 .313과 1홈런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컵스는 양키스에게 4전 전패로 스윕 패배를 당했다.[95]
1933년 7월 6일에 열린 제1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하트넷은 내셔널 리그 팀의 예비 포수로 선정되었고,[96] 이를 시작으로 6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다.[68] 1934년 시즌 중반까지 타율 .336에 13홈런을 기록하며 그해 올스타전의 내셔널 리그 팀 선발 포수로 뽑혔다.[97][98] 이 경기에서 하트넷은 투수 칼 허벨과 호흡을 맞추었고, 허벨은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 알 시먼스, 조 크로닌 등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다섯 명의 강타자를 연속으로 삼진 처리하는 진기록을 세웠다.[84] 하트넷은 1934년 시즌을 타율 .299, 22홈런, 90타점으로 마감하며 공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고,[68] 수비에서는 내셔널 리그 포수들 가운데 어시스트, 풋아웃, 도루 저지 횟수, 도루 저지율, 레인지 팩터, 수비율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리그를 지배했다.[99]
1935년 시즌에는 타율 .344를 기록하며 이 부문 내셔널 리그 3위에 올랐고, 포수로서 어시스트, 병살타 연계, 수비율 부문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등 또 한 번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다.[68][100] 그는 컵스 투수진이 리그 최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도록 이끌었고, 팀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경기 차로 제치고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다.[101]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하트넷은 1935년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102] 하지만 193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미키 코크런 감독이 이끄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03]
소속팀 컵스가 3위로 내려앉은 1936년 시즌에는 타율 .307을 기록하고 4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지만, 7홈런과 64타점에 그치며 이전 시즌들에 비해 다소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다.[76][104] 수비에서는 리그 포수 중 수비율 1위를 기록했고, 뛰어난 투수 리드로 컵스 투수진이 리그 최다인 18번의 완봉 경기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105]
1937년 올스타전에서는 투수 디지 딘이 커브를 던지라는 하트넷의 사인을 계속 거부하다가 조 디마지오에게 안타를, 루 게릭에게 홈런을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얼 에이버릴의 강한 라인 드라이브 타구에 발가락을 맞는 부상까지 당했다.[106] 당시 내셔널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었던 딘은 이 발가락 부상 이후 선수 경력의 하락세를 겪었다.[84] 1937년 시즌, 하트넷은 자신의 커리어 하이인 .354의 타율을 기록했고,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조 메드윅에 이어 2위에 올랐다.[68][107] 그가 기록한 타율 .354는 1997년 마이크 피아자가 .362의 타율을 기록하기 전까지 60년 동안 깨지지 않은 메이저 리그 포수 단일 시즌 최고 타율 기록이었다.[108][109]
3. 4. 황혼 속에서의 홈런 (1938)
1938년 7월 20일, 컵스 구단주 필립 K. 리글리는 찰리 그림 감독을 대신해 37살의 하트넷을 팀의 선수 겸 감독으로 선임했다.[110][45] 하트넷이 감독에 임명될 당시 컵스는 파이 트레이너 감독이 이끄는 1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6경기 차 뒤진 3위에 자리하고 있었다.[111][46]
정규 시즌 종료를 일주일 앞둔 9월 27일, 컵스는 피츠버그와 1.5경기 차까지 따라붙은 상황에서 내셔널 리그 순위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3연전을 치르게 되었다.[111][46] 3연전의 첫 경기는 투수 디지 딘의 호투 속에 컵스가 2–1로 승리하며 피츠버그와의 경기 차를 반 게임으로 줄였고, 이는 야구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112][47]
다음날인 1938년 9월 28일, 3연전 중 두 번째 경기를 치르게 된 두 팀의 경기에서 하트넷은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조명이 없어 어둠이 깔린 리글리 필드에서 점수는 5–5 동점이었고, 심판은 9회를 마지막으로 경기가 종료될 것임을 예고했다. 당시 규칙에 따르면 동점이 계속 유지될 경우, 다음날 경기를 처음부터 다시 치러야 했다.[48]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하트넷이 타석에 들어섰다. 볼 카운트 0볼 2스트라이크에서 하트넷은 투수 메이스 브라운이 던진 공을 쳐서 어둠 속으로 보냈고, 공은 계속 날아가 외야 좌중간 관중석에 떨어졌다. 선수들과 팬들이 하트넷이 베이스를 도는 것을 돕기 위해 경기장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113][48] 하트넷의 이 끝내기 홈런은 '황혼의 홈런(Homer in the Gloamin')'이라는 이름으로 메이저 리그 역사에 남게 되었다.[112][47]
이 극적인 승리 덕분에 컵스는 1위로 올라섰고, 9월 한 달간 19승 3패 1무라는 인상적인 기록을 세우며 3일 뒤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확정지었다.[46] 이해 하트넷은 다시 한번 컵스 투수진이 리그에서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데 기여했고, .995의 수비율로 내셔널 리그 포수 중 1위를 차지했다.[114][115][49][50] 하지만 컵스는 1938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에게 스윕을 당하며 지난 10년간 네 번째 월드 시리즈 패배를 겪었다.[116][51]
3. 5. 커리어 말년 (1939-1941)
1939년은 하트넷이 감독으로서 선수단을 이끄는 가운데 선수들 간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은 시즌이었다. 일부 선수들은 하트넷이 디지 딘만 편애한다고 불평했으며, 투수 래리 프렌치는 하트넷 감독을 건너뛰고 필립 K. 리글리 구단주에게 직접 찾아가 더 많은 등판 기회를 달라고 항의하기도 했다.[117][52] 프렌치는 이러한 상황이 자신이 거스 맨쿠소를 전담 포수로 기용해 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했다.[117][52] 또한, 하트넷은 팀의 다른 포수들보다 타격 능력이 낫다고 판단하여 자신을 경기에 자주 투입시켰다.[117][52] 그해 8월 28일, 하트넷은 레이 샬크가 보유하고 있던 메이저 리그 포수 최다 출장 기록인 1,727경기를 경신했다.[118][53] 이 기록은 1945년 시즌에 알 로페스에 의해 다시 경신되었다.[119][54]
두 시즌 동안(1939년, 1940년) 팀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1940년 11월 13일 하트넷은 감독직에서 해임되었고, 이로써 19년간 이어졌던 컵스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120][55] 이후 1940년 12월 3일, 그는 뉴욕 자이언츠와 선수 겸 코치 계약을 맺었다.[121][56] 1941년 시즌에는 해리 대닝의 백업 포수로 활약하며 64경기에 출전해 타율 .300을 기록했다.[68][2] 하트넷은 1941년 9월 24일에 마지막 프로 경기를 치렀고, 40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68][2]
4.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하트넷은 1942년부터 5시즌 동안 마이너 리그에서 몇몇 팀의 감독을 맡았다.[130][65] 1946년에는 일리노이주 링컨우드에 정착했다.[130][65] 메이저 리그에서의 마지막 지도자 경력은 1960년대 중반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서 2년 동안 코치와 스카우트로 일한 것이었다.[134]
5. 평가 및 유산
하트넷은 20년의 메이저 리그 커리어 동안 총 1,990경기에 출전하여 6,432타수에서 1,912안타를 기록, 통산 타율 .297을 달성했다. 이와 함께 867득점, 396개의 2루타, 64개의 3루타, 236개의 홈런, 1,179타점, 703개의 볼넷을 기록했으며, 통산 출루율은 .370, 장타율은 .489이다.[68][2] 통산 수비율은 .984를 기록했다.[68][2]
포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한 시즌에 100경기 이상 포수로 출전한 시즌이 12번이나 되며, 이 중 8시즌은 연속 기록이다.[122][57] 내셔널 리그 포수로서 풋아웃 부문에서 4번, 어시스트와 수비율 부문에서 각각 6번 리그 1위를 차지했다.[68][2] 또한, 병살 연계 부문에서도 7번 리그 1위에 올랐으며, 통산 163번의 병살 연계는 내셔널 리그 기록이다.[123][58] 한때 포수 포지션에서 452번의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24][59]
은퇴 당시 하트넷이 기록한 통산 236홈런, 1,179타점, 1,912안타, 396개의 2루타는 모두 당시 포수 포지션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81][14] 이후 1943년 빌 디키가 타점과 안타 기록을 경신했고,[81][14] 통산 홈런 기록은 1956년 요기 베라가,[81][14] 통산 2루타 기록은 1983년 테드 시먼스가 넘어서기 전까지 유지되었다.[125][60] 하트넷은 또한 통산 7시즌 동안 내셔널 리그 장타율 부문 상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68][2]
그는 올스타에 6차례 선정되었고, 한 차례 최우수 선수(MVP)상을 수상했으며, 소속팀의 정규 시즌 우승을 4차례 경험했다.[68][2] 그의 통산 출루율 .370은 명예의 전당에 오른 다른 포수들인 조니 벤치(.342)나 요기 베라(.348)보다 높다.[126][127][61][62] 또한, 통산 도루 저지율 56.11%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로이 캄파넬라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뛰어난 기록이다.[128][63]
1938년 새로 개관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하트넷의 방망이와 포수 마스크가 최초의 유물로 기증되기도 했다.[89][21] 1955년 1월 26일, 하트넷은 조 디마지오, 테드 라이언스, 대지 밴스와 함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야구 통계 전문가 빌 제임스는 그의 저서 《The Bill James Historical Baseball Abstract》에서 하트넷을 역대 메이저 리그 포수 중 9위로 평가했다.[129][64] 1999년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의 최종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6. 통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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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플
넷
4
구
진
살
타
율
루
율
타
율
P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