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맨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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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스 맨쿠소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한 포수이다. 1927년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타율 0.372를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1928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데뷔했다. 1930년에는 지미 윌슨의 백업 포수로 활약하며 타율 0.366을 기록했고,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뉴욕 자이언츠에서 주전 포수로 뛰며 1933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35년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통산 도루 저지율 50.69%를 기록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코치, 야구 해설가, 스카우트 등으로 활동했으며, 텍사스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과 이탈리아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거스 맨쿠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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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의 맨쿠소(1941년)
본명August Rodney Mancuso 오거스트 로드니 맨쿠소
별칭Blackie 블랙키
출생일1905년 12월 5일
출생지미국 텍사스주 갤버스턴
사망일1984년 10월 26일
사망지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신장178cm
체중83kg
타석
투구
수비 위치포수
프로 입단 연도1925년
첫 출장 리그MLB
첫 출장 날짜1928년 4월 30일
첫 출장 팀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마지막 출장 리그MLB
마지막 출장 날짜1945년 9월 11일
마지막 출장 팀필라델피아 필리스
선수 경력
소속 팀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28, 1930–1932)
뉴욕 자이언츠 (1933–1938)
시카고 컵스 (1939)
브루클린 다저스 (1940)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41–1942)
뉴욕 자이언츠 (1942–1944)
필라델피아 필리스 (1945)
수상 경력
주요 수상올스타 (1935, 1937)
2× 월드 시리즈 우승 (1931, 1933)
통계
타율0.265
홈런53
타점543
코치 및 스카우트 경력
코치, 스카우트, 방송인Baseball
외부 링크
Baseball ReferenceGus Mancuso statistics
Baseball DigestCatching: Is It A Lost Art?
Texas Sports Hall of FameTexas Sports Hall of Fame
미국 야구 연구 협회The Baseball Biography Project: Gus Mancu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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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이전

거스 맨쿠소는 텍사스주 갤버스턴에서 시칠리아계 이민자의 아들과 독일계 이민자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맨쿠소의 아버지는 40대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산파로 일하면서 가족을 지탱했다. 맨쿠소는 9살에 야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에서 금전 출납계 직원으로 일하면서 은행 야구팀에서 활동했다. 이를 통해 텍사스 리그휴스턴 버펄로스 구단 회장의 눈에 띄어 1925년부터 프로 야구 선수로 뛰기 시작했다.

2.1. 출생과 성장

거스 맨쿠소는 텍사스주 갤버스턴에서 시칠리아계 이민자의 아들과 독일계 이민자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맨쿠소의 아버지는 40대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산파로 일하면서 가족을 지탱했다. 맨쿠소는 9살에 야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에서 금전 출납계 직원으로 일하면서 은행 야구팀에서 활동했다. 이를 통해 텍사스 리그휴스턴 버펄로스 구단 회장의 눈에 띄어 1925년부터 프로 야구 선수로 뛰기 시작했다.

3. 선수 경력

맨쿠소는 1927년에 인터내셔널 리그시러큐스 스타스에서 뛰며 .372의 타율을 기록했다. 1928년 4월 30일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7월까지 카디널스 소속으로 있다가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미니애폴리스 밀러스로 보내졌다. 1929년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 속한 카디널스 구단의 팜팀로체스터 레드윙스와 휴스턴 버팔로스에서 뛰었다.

1930년에 카디널스의 브랜치 리키 단장이 연루된 계약 분쟁으로 말미암아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커미셔너가 맨쿠소의 마이너 리그 계약을 무효화했고, 이로 인해 카디널스 구단은 맨쿠소를 메이저 리그로 불러들여야 했다. 이해 시즌 맨쿠소는 지미 윌슨의 백업 포수 역할을 했다. 그 둘은 하나의 포지션을 두고 경쟁하는 처지였지만, 베테랑이었던 윌슨이 맨쿠소가 메이저 리그에서 포수로서 뛰기 위한 자질을 기르는데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또한 맨쿠소는 상대 팀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매 경기마다 박스스코어를 분석했다. 그해 9월 12일에 윌슨이 발목을 접지르는 부상을 당하면서 남은 시즌 뛰지 못하게 되었다. 맨쿠소는 윌슨의 자리를 대신해 경기에 나서 .366의 시즌 타율을 기록했다. 1930년 시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1930년 월드 시리즈에서 코니 맥 감독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 패배했다.

1931년, 맨쿠소는 여전히 윌슨의 뒤를 받치는 백업 포수였으나 54.3%의 도루 저지율을 기록했고, 소속팀 카디널스는 2년 연속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31년 월드 시리즈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리턴 매치였고, 카디널스가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맨쿠소가 시리즈 내내 타석에 들어선 건 1차전 경기 후반에 대타로 나섰을 때가 유일했다.

1932년 시즌에 들어서 32세가 된 윌슨은 포수로 75경기에 출전하면서, 포수로 82경기에 출전해 .284의 타율을 기록한 맨쿠소와 경기 지분을 나눠 가졌다.

3.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28-1932)

1927년에 인터내셔널 리그의 시러큐스 스타스에서 뛰며 .372의 타율을 기록했다. 1928년 4월 30일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7월까지 카디널스 소속으로 있다가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미니애폴리스 밀러스로 보내졌다. 1929년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 속한 카디널스 구단의 팜팀로체스터 레드윙스와 휴스턴 버펄로스에서 뛰었다.

1930년에 카디널스의 브랜치 리키 단장이 연루된 계약 분쟁으로 말미암아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커미셔너가 맨쿠소의 마이너 리그 계약을 무효화했고, 이로 인해 카디널스 구단은 맨쿠소를 메이저 리그로 불러들여야 했다. 이해 시즌 맨쿠소는 지미 윌슨의 백업 포수 역할을 했다. 그 둘은 하나의 포지션을 두고 경쟁하는 처지였지만, 베테랑이었던 윌슨이 맨쿠소가 메이저 리그에서 포수로서 뛰기 위한 자질을 기르는데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또한 맨쿠소는 상대 팀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매 경기마다 박스스코어를 분석했다. 그해 9월 12일에 윌슨이 발목을 접지르는 부상을 당하면서 남은 시즌 뛰지 못하게 되었다. 맨쿠소는 윌슨의 자리를 대신해 경기에 나서 .366의 시즌 타율을 기록했다. 1930년 시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1930년 월드 시리즈에서 코니 맥 감독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 패배했다.

1931년, 맨쿠소는 여전히 윌슨의 뒤를 받치는 백업 포수였으나 54.3%의 도루 저지율을 기록했고, 소속팀 카디널스는 2년 연속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31년 월드 시리즈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리턴 매치였고, 카디널스가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맨쿠소가 시리즈 내내 타석에 들어선 건 1차전 경기 후반에 대타로 나섰을 때가 유일했다.

1932년 시즌에 들어서 32세가 된 윌슨은 포수로 75경기에 출전하면서, 포수로 82경기에 출전해 .284의 타율을 기록한 맨쿠소와 경기 지분을 나눠 가졌다.

3.2. 뉴욕 자이언츠 (1933-1938)

1933년 시즌을 앞두고 맨쿠소는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뉴욕 자이언츠는 존 맥그로 감독의 사임 이후 새로 선임된 빌 테리 감독이 리빌딩을 추진하고 있었다. 테리 감독은 주루와 수비, 투수진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려 했으며, 발이 느린 샨티 호건 대신 민첩한 맨쿠소를 주전 포수로 낙점했다. 그는 맨쿠소가 칼 허벨스크루볼, 할 슈마커싱커, 프레디 피츠시먼스너클볼, 그리고 로이 파르멜리의 다양한 구질을 책임지도록 했다.

맨쿠소의 리드 아래 뉴욕 자이언츠 투수진은 그해 내셔널 리그 최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팀은 9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맨쿠소는 리그 포수 중 가장 많은 실책패스트 볼을 기록했지만, 출전 경기 수, 도루 저지, 풋아웃에서 1위를, 어시스트레인지 팩터에서 2위를 기록했다. 뉴욕 자이언츠는 1933년 월드 시리즈에서 워싱턴 세너터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테리 감독은 직전 시즌 6위였던 팀이 월드 시리즈 우승팀이 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 맨쿠소를 꼽았다. AP 통신사의 여론조사에서 맨쿠소는 투수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을 바탕으로 뉴욕 양키스빌 디키에 이어 메이저 리그 올스타 포수 2위에 뽑혔고, 1933년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 투표에서 6위에 이름을 올렸다.

1934년 시즌에 뉴욕 자이언츠는 1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2경기 뒤진 2위로 시즌을 마쳤고, 맨쿠소는 타율과 타점이 감소하며 다소 부진했다. 1935년 시즌에는 .298의 타율과 5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올스타전에서 내셔널 리그 백업 포수로 선정되었다. 1936년 시즌에는 .301의 타율과 커리어 하이인 9홈런, 63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소속팀은 다시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리그 포수 중 풋아웃과 도루 저지 부문 1위, 어시스트 2위를 기록했으며, 팀 투수진이 리그 최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1936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는 뉴욕 양키스에 패했다. 맨쿠소는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 투표에서 8위에 올랐다.

1937년, 맨쿠소는 올스타전에 내셔널 리그 예비 선수로 뽑혔으나, 경기 중 파울 팁에 오른손 손가락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다. 해리 대닝이 그를 대신해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남은 시즌 두 선수가 경기를 나눠 맡았다. 그해 뉴욕 자이언츠는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1937년 월드 시리즈에서 다시 뉴욕 양키스와 맞붙었으나, 맨쿠소는 부진했고, 양키스가 우승했다. 1938년, 대닝이 주전 포수로 자리 잡았고, 맨쿠소는 52경기에 출전해 .348의 타율과 .411의 출루율을 기록했다.

3.3. 시카고 컵스, 브루클린 다저스, 그리고 복귀 (1939-1945)

1939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뉴욕 자이언츠시카고 컵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맨쿠소를 컵스로 보냈고, 이적한 팀에서 38세의 선수 겸 감독 가비 하트넷과 번갈아 가며 포수로 출전했다. 이해 맨쿠소는 .231의 타율과 함께 2홈런, 17타점을 기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메이저 리그 선수 숫자가 부족해지면서, 맨쿠소의 현역 생활도 연장되었다. 1940년에는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뛰었으며, 1941년, 맨쿠소는 팀의 루키 포수이자 미래의 스타가 될 잠재력을 지닌 워커 쿠퍼가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쿠퍼가 부상을 당하면서 소속팀 경기에서 대부분의 포수 지분을 차지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그해 시즌 2위를 차지했으며, 맨쿠소는 루키 투수인 어니 화이트(17승 7패)와 하위 크리스트(10승 무패) 등을 잘 이끌었다. 하지만 시즌 타율은 .229에 그쳤다.

1942년 시즌에는 뉴욕 자이언츠로 복귀해 백업 포수이자 투수 코치 역할을 했다. 이후 해리 대닝이 미국 육군에 징집되면서 37세의 나이에 팀의 주전 포수가 되었고, 1943년과 1944년에는 후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35세의 어니 롬바디와 함께 포수로 나섰다.

1944년 시즌이 끝나고 39살이 되기 한 달이 남은 시점에 맨쿠소는 뉴욕 자이언츠에서 방출되었다. 1945년, 과거 팀 동료였던 프레디 피츠시먼스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을 맡고 있었는데, 맨쿠소로 하여금 한 시즌 더 포수이자 풀타임 투수 코치의 역할을 해달라고 설득했다. 그해 맨쿠소는 앤디 세미닉과 포수로 번갈아가며 모두 70경기에 출전했는데, 피츠시먼스 감독이 해고당하면서 마침 40세였던 9월 11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시즌이 끝나기 전에 팀을 떠났다.

4. 선수 경력 이후

1946년, 맨쿠소는 마이너 리그 팀 털사 오일러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으며, 1948년에는 샌안토니오 미션스의 감독이 되었다. 1950년에는 루크 스웰 신시내티 레즈 감독이 그를 팀의 투수 코치로 임명했다. 루크 스웰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감독을 맡았던 1944년에 거스 맨쿠소의 동생 프랭크 맨쿠소를 브라운스에 스카우트한 이력이 있었다.

1951년이 되자 맨쿠소는 고향 팀인 텍사스 리그의 휴스턴 버펄로스 팀에서 야구 해설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팀의 스폰서를 맡은 맥주 회사 그리즈딕 브라더스 비어는 그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옮겨 실황 중계 아나운서 해리 캐리와 함께 팀의 라디오 중계를 맡도록 했다. 1953년에 카디널스를 인수한 맥주 회사 앤하이저부시는 라디오 중계진을 일신하고자 했는데, 맨쿠소가 바로 그 대상이 되었다. 이에 1954년에 맨쿠소는 카디널스의 스카우트로 자리를 옮겼다가,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텍사스 리그의 라디오 해설자로 복귀할 수 있었다.

1960년부터 잠깐의 공백기를 지낸 뒤, 맨쿠소는 1962년 신생팀 휴스턴 콜트 .45s에서 비상근 스카우트를 맡았고, 일간지 《휴스턴 프레스》에 여러 차례 칼럼을 기고하였으며, 그리즈딕 브라더스는 그를 휴스턴 콜트 .45s의 경기 전후에 진행되는 방송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1962년의 어느 날 맨쿠소는 교통사고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의 부인 로레나는 이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 그는 몇 년 후에 에스텔 슈메이커(Estelle Deshazo Schumaker)라는 이름의 과부와 재혼했다. 교통사고 이후 맨쿠소는 휴스턴의 이사업체에서 비상근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선수 시절 저축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을 종종 후회했던 맨쿠소는 가족들에게 대학에서 상경계 강좌를 수강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맨쿠소는 1981년에는 텍사스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1984년에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되었다. 1984년에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78세의 나이로 폐기종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휴스턴의 공동묘지에 뭍혔다.

4.1. 지도자 및 해설가 경력

1946년, 맨쿠소는 마이너 리그 팀 털사 오일러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으며, 1948년에는 샌안토니오 미션스의 감독이 되었다. 1950년에는 루크 스웰 신시내티 레즈 감독에 의해 팀의 투수 코치로 임명되었다.

1951년, 맨쿠소는 고향 팀인 텍사스 리그의 휴스턴 버펄로스 팀에서 야구 해설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팀의 스폰서를 맡은 맥주 회사 그리즈딕 브라더스 비어는 그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옮겨 해리 캐리와 함께 팀의 라디오 중계를 맡도록 했다. 1953년에 카디널스를 인수한 맥주 회사 앤하이저부시는 라디오 중계진을 일신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1954년에 맨쿠소는 카디널스의 스카우트로 자리를 옮겼다가, 1950년대 말에 텍사스 리그의 라디오 해설자로 복귀했다.

1960년부터 잠깐의 공백기를 지낸 뒤, 1962년 신생팀 휴스턴 콜트 .45s에서 비상근 스카우트를 맡았고, 일간지 《휴스턴 프레스》에 여러 차례 칼럼을 기고하였으며, 그리즈딕 브라더스는 그를 휴스턴 콜트 .45s의 경기 전후에 진행되는 방송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1962년, 맨쿠소는 교통사고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의 부인 로레나는 이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몇 년 후에 에스텔 슈메이커(Estelle Deshazo Schumaker)라는 이름의 과부와 재혼했다. 교통사고 이후 맨쿠소는 휴스턴의 이사업체에서 비상근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선수 시절 저축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을 종종 후회했던 맨쿠소는 가족들에게 대학에서 상경계 강좌를 수강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맨쿠소는 1981년에는 텍사스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1984년에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되었다. 1984년에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78세의 나이로 폐기종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휴스턴의 공동묘지에 뭍혔다.

4.2. 개인적인 삶과 사망

1946년, 맨쿠소는 마이너 리그 팀 털사 오일러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으며, 1948년에는 샌안토니오 미션스의 감독이 되었다. 1950년에는 루크 스웰 신시내티 레즈 감독이 그를 팀의 투수 코치로 임명했다. 루크 스웰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감독을 맡았던 1944년에 거스 맨쿠소의 동생 프랭크 맨쿠소를 브라운스에 스카우트한 이력이 있었다.

1951년, 맨쿠소는 텍사스 리그의 휴스턴 버펄로스 팀에서 야구 해설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후 해리 캐리와 함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라디오 중계를 맡았다. 1954년에는 카디널스의 스카우트로 자리를 옮겼다가, 1950년대 말에 텍사스 리그의 라디오 해설자로 복귀했다.

1960년부터 잠깐 공백기를 지낸 뒤, 1962년 신생팀 휴스턴 콜트 .45s에서 비상근 스카우트를 맡았고, 《휴스턴 프레스》에 칼럼을 기고하였으며, 휴스턴 콜트 .45s의 경기 전후 방송에도 참여했다.

1962년,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고, 그의 부인 로레나는 이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에스텔 슈메이커와 재혼했다. 선수 시절 저축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던 맨쿠소는 가족들에게 상경계 강좌 수강을 권유하기도 했다.

맨쿠소는 1981년 텍사스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1984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같은 해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78세의 나이로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휴스턴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5. 업적 및 평가

맨쿠소는 17시즌 동안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하며 1,460경기에 출전, 4,505타수 1,194안타, 타율 .265, 53홈런, 543타점, 출루율 .328를 기록했다. 통산 수비율은 .977였다. 올스타에 두 차례 선정되었고, 내셔널 리그 포수 중 풋아웃 부문에서 세 차례 1위, 도루 저지와 레인지 팩터 부문에서 두 차례 1위를 기록했다. 통산 도루 저지율은 50.69%로 메이저 리그 역대 포수 중 10위에 해당한다. 페넌트 우승은 다섯 차례 경험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칼 허벨,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디지 딘, 벌리 그라임스, 제시 헤인스의 공을 받아본 포수였다. 야구 역사가 빌 제임스는 저서 《The Bill James Historical Baseball Abstract》에서 맨쿠소를 메이저 리그 역대 포수 중 74위로 평가했다.

6. 통산 기록

거스 맨쿠소는 17년간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하며 통산 1460경기에 출전, 4505타수 1194안타, 타율 .265, 53홈런, 543타점, 출루율 .328, 장타율 .351, OPS .679를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977의 수비율을 기록했으며, 통산 도루 저지율은 50.69%로 메이저 리그 포수 역대 10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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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P
S
1928년STL11403827010930020005.184.184.237.421
1929년메이저 리그 기록 없음
1930년STL762542273983172712559118181116.366.415.551.965
1931년67208187134916117023203181013.262.327.374.701
1932년1033443102588231512843024301015.284.347.413.760
1933년NYG14454048139127172616656001148502115.264.331.345.676
1934년122422383329414071294601122720199.245.295.337.632
1935년12848944733133182517056111230501616.298.342.380.722
1936년1395655195515621392106303539112816.301.351.405.755
1937년8630728730801714111391031720204.279.319.387.706
1938년52178158195580269150031730134.348.411.437.848
1939년CHC802822511758100274170362420194.231.298.295.593
1940년BKN6015914416338004116000134074.229.293.285.578
1941년STL1063753282575131296370393741199.229.309.293.601
1942년NYG44139122422110259113142075.180.265.205.470
1943년942912521150502612000828121613.198.284.242.526
1944년78231195154941158250063010204.251.351.297.649
1945년PHP70206176113550040162022820108.199.309.227.536
통산: 17년14605030450538611941971653158254381597418375264111.265.328.351.679


올스타에 두 번 선정되었으며, 내셔널 리그 포수 부문에서 3번의 아웃 횟수, 2번의 도루 저지 횟수 및 수비 범위 지수 1위를 기록했다. 그는 페넌트 우승팀에서 5번 활동을 하였으며,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5명의 투수(칼 허벨,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디지 딘, 벌리 그림스, 제시 헤인스)의 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