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국경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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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정국경지대는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국경 방어를 위해 설치된 지역으로,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존재했다. 헝가리 왕국의 국경 변화로 인해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우소라 지역에 군사 야영지가 설치되었고, 이후 군사적 전통을 가진 블라흐족과 세르비아인들이 이주하면서 군사 국경이 형성되었다. 1627년에는 크로아티아 의회 통제에서 벗어나 합스부르크 군대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1630년 발라코룸 법령을 통해 정착민의 지위와 군사적 의무가 규정되었다. 군정국경지대는 18세기 중반 재편성되었고, 다양한 민족 집단이 거주하며 1873년과 1881년에 폐지되어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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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국경지대 | |
---|---|
개요 | |
![]() | |
일반 명칭 | 보이나 크라이나 |
지위 | 군사 지방 |
존속 기간 | 1553년 ~ 1881년 |
역사 | |
이전 국가 | 해당 사항 없음 |
이후 국가 | 해당 사항 없음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해당 사항 없음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
정치 | |
정부 형태 | 해당 사항 없음 |
통치자 | |
지도자 | 해당 사항 없음 |
부관 | 해당 사항 없음 |
기타 | |
통화 | 해당 사항 없음 |
2. 역사적 배경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전쟁으로 헝가리 왕국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국경이 북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옛 크로아티아 영토 상당수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거나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15세기 초, 지기스문트 국왕은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방어를 위해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우소라에 군사 야영지(tabor|타보르sl)를 설치했다. 마차시 코르비누스 국왕은 야이체와 스레브레니크에 반을, 세니에 군사 캡틴시를 설치해 방어력 향상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판두르 보병과 후사르 기병이 발전했다.[11]
"마르톨로스"와 "보이누크"로 알려진 블라흐족은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위협적인 군사 세력이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도망친 블라흐족과 세르비아인은 합스부르크가가 국경에서 활용한 군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보스니아 출신 블라흐족과 합류, 합스부르크 치하 군사 국경을 형성했다. 군사 국경은 주요 전쟁 작전 지역이었지만, 대부분 오스만-합스부르크 블라흐족 간 충돌로 특징지어졌다.[11]
1526년 크로아티아 의회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크로아티아 왕으로 선출한 후, 페르디난트 1세는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비하치에 사령부를 설치했으나, 1529년 오스만 제국이 부다를 점령하고 빈을 포위하면서 크로아티아 국경 지역은 혼란에 빠졌다.
1530년대부터 합스부르크가는 새 방어 전략을 채택,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일부에 국경 요새 주변 별도 방어 구역을 설치했다. 1560년대 말, 새 국경 시스템은 아드리아 해에서 트란실바니아까지 뻗어 있었으며, 6개 국경 요새 사령부(Grenzgeneralatde)로 구성되었다. 1530년대부터 마르톨로스, 발라흐 군사 식민지 개척자 등 다양한 병력이 군사 국경으로 이주했다.[12] 1578년 내부 오스트리아 영토 의회는 군사 지출을 각 영토별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16세기 후반,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경 요새에는 약 20,000명 병력이 주둔했다.
16세기 말, 슬라브화된 발라흐족, 기타 발라흐족, 세르비아인이 오스만 영토에서 군사 국경과 달마티아로 도망쳤다.[3] 크로아티아 군사 국경은 cat=no|카를로바치 총사령부de, 상 슬라보니아 군사 국경은 바라주딘 generalatde로 알려졌다.
1627년, 군사 변경 지역은 크로아티아 사보르 통제에서 벗어나 합스부르크 군대 직접 통치를 받았다.[13] 1630년, 페르디난트 2세 황제는 ''발라코룸 법령''(Vlach Statute)을 선포,[14] 오스만 제국에서 온 발라흐 정착민 지위를 규정했다. 변경 지역 인구는 원주민 크로아티아인, 오스만 제국 탈출 크로아티아 농노, 세르비아인, 발라크인 난민 등 다양하게 혼합되었다. 새 군사 계급 창설로 영토는 크로아티아 의회, 반에게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17세기 동안 군사 변경 지역은 동쪽으로 확장, 새 구역이 창설되었다.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독일인 식민지 개척자(''grenzer'', ''graničari'')들이 정착,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제국을 방어했다.[15]
1699년, 1718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영토가 오스만 제국에서 반환되며 대부분 군정 국경지대가 되었다. 18세기 중반, 국경지대는 제국 군대와 정규 연대에 맞춰 재편, 1737년 블라흐 법령이 공식 폐지되었다.
일반 사령부 | 연대 |
---|---|
바라주딘 | 크리제브치 연대, 주르제바츠 연대 |
카를로바츠 | 리카 연대, 오토차츠 연대, 오굴린 연대, 슬룬 연대 |
자그레브 | 글리나 연대, 페트리냐 연대 |
슬라보니아 | 노바 그리슈카 연대, 슬라본스키 브로드 연대, 페트로바라딘 연대 |
바나트 | 세르비아 (일리리아) 구역, 독일 구역, 루마니아 (블라흐) 구역 |
1767년 이후, 군정 국경지대 주민 12명 중 1명이 군인(합스부르크 군주국 나머지 지역은 62명 중 1명)이었다. 국경지대 군인들은 전문 군인으로 유럽 전장으로 이동할 준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 난민 추가 이주, 영토 확대로 국경지대 인구는 더욱 혼합되었다.
1783년,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국경은 자그레브 본부 크로아티아 일반 사령부 통일 통제를 받았다.[19][20] 세르비아 자유 군단이 바나트에 설립, 세르비아 해방과 합스부르크 통치 아래 통일을 위해 싸웠다.[21]
1787년 민간-군사 행정 분리, 1800년 재통합되었다. 18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군정국경지대는 유용성을 잃기 시작했다. 1848년, 요십 옐라치치가 군정국경지대 사령관이 되었다. 1850년부터 국경지대,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는 공식 단일 지역이었으나, 별도 행정, 대표 체제를 유지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터키 전쟁 후 국경지대 비무장화를 여러 차례 요청했다. 비무장화는 1869년 시작, 1881년 8월 1일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국경지대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 편입되며 군정국경지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2. 1. 초기 발전 (15세기 ~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전쟁으로 인해 헝가리 왕국의 국경, 그리고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국경이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옛 크로아티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오스만 영토가 되거나 새로운 오스만 영토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1435년,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지기스문드 국왕은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그리고 우소라에 각각 군사 야영지, 즉 tabor|타보르sl를 설립했다. 1463년, 마차시 코르비누스 국왕은 야이체와 스레브레니크에 반을 설립했고, 1469년에는 보스니아 주의 오스만 군사령부를 본떠 세니에 군사 캡틴시를 설립했다. 이 모든 조치는 방어력 향상을 목표로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판두르 보병과 후사르 기병이 발전하게 되었다.[11]
"마르톨로스"와 "보이누크"로 알려진 블라흐족은 오스만 제국 아래에서 가장 위험한 군사 세력이었고,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도망친 블라흐족과 세르비아인은 합스부르크가가 국경 너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유사한 군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보스니아에서 온 일부 블라흐족과 합류하여, 합스부르크 치하에서 토지 소유와 군사 조직의 특별한 시스템, 즉 군사 국경이 만들어졌다. 이 군사 국경은 몇몇 주요 전쟁 작전이 벌어진 지역이었지만, 대부분 오스만 블라흐족과 합스부르크 블라흐족 간의 영원한 충돌로 이루어졌다.[11]
2. 2.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와 군사 국경 확대 (16세기)
크로아티아 의회가 152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크로아티아 왕으로 선출한 후,[12] 페르디난트 1세는 크로아티아 의회에 기병 200명과 보병 200명을 제공하고 크로아티아인이 지휘할 기병 800명의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곧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비하치에 또 다른 사령부를 설립했다. 그러나 1529년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휩쓸고 부다를 점령한 후 빈을 포위하여 크로아티아 국경 지역 전체에 혼란을 야기하면서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없었다.합스부르크가는 오스만군이 오스트리아에 도달하기 전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붙잡아 두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명확한 방어 계획은 없었다. 1530년대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국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에만 상당한 증원군이 파견되었다. 1540년대와 1552년 오스만 원정 이후, 새로운 방어 전략이 채택된 여러 회의가 열렸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일부 지역에 국경 요새 주변에 별도의 방어 구역이 설치될 예정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주는 1550년대부터 이 새로운 시스템의 재정 지원을 의무적으로 돕게 되었다. 1560년대 말, 새로운 국경 시스템은 약 100~120개의 요새로 구성되었으며 아드리아 해에서 트란실바니아까지 뻗어 있었다. 이 시스템은 6개의 국경 요새 사령부(Grenzgeneralatde)로 구성되었다.
1530년대부터, 군사 국경으로의 이주에는 오스만 군사 시스템의 일부였던 다수의 마르톨로스, 발라흐 군사 식민지 개척자 및 기타 불규칙한 병력이 포함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일부는 무슬림이었다.[12]
새로운 군사 지출은 상당한 문제가 되었고, 1578년 부르크 안 데어 무르에서 열린 내부 오스트리아 영토 의회는 군사 지출을 충당하는 각 영토의 의무를 정의하고 방어 전략 개선의 우선순위를 정의했다. 슈타이어 공국은 슬라보니아 및 헝가리 국경에 자금을 지원하고, 카르니올라 공국은 크로아티아 국경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었다. 케이른텐 공국은 자금이 필요한 곳에 돈을 지출하기 위해 슈타이어 및 카르니올라에 자금을 제공했다. 16세기 후반에는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국경 요새에 약 20,000명의 병력이 주둔했다.
16세기 말에 슬라브화된 발라흐족, 기타 발라흐족 및 세르비아인은 오스만 영토에서 군사 국경과 달마티아로 도망쳤다.[3] 동시에 크로아티아 군사 국경은 cat=no|카를로바치 총사령부de로 알려지게 되었고, 1630년대부터 상 슬라보니아 군사 국경은 바라주딘 generalatde로 알려지게 되었다.
2. 3. 군사 국경의 제도화와 발라코룸 법령 (17세기)
1627년에 군사 변경 지역은 크로아티아 사보르의 통제에서 벗어나 합스부르크 군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변경 지역은 폐지될 때까지 민간 및 군사 권한을 모두 가졌다.[13] 1630년 11월, 페르디난트 2세 황제는 이른바 ''발라코룸 법령''(Vlach Statute)을 선포했는데,[14] 이는 군사 지휘, 의무, 내부 자치 관리 권리에 관해 오스만 제국에서 온 소위 발라흐 정착민(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발라크인 포함)의 지위를 규정했다.시간이 지나면서 변경 지역의 인구는 원주민 크로아티아인과 오스만 제국 영토에서 탈출한 크로아티아 농노, 그리고 땅의 방어에 주요 기여를 하고자 노력한 세르비아인과 발라크인의 다수의 소수 민족(나중에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으로 동화됨) 난민들 사이에서 혼합되었다. 변경 지역에 새로운 군사 계급을 창설함으로써, 변경 지역의 영토는 결국 크로아티아 의회와 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부여됨에 따라, 그들은 가톨릭 국가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회 신앙을 보존했다.
17세기 동안 군사 변경 지역의 영토는 동쪽으로 확장되었고 새로운 구역이 창설되었다. 그 당시에는 서쪽의 크로아티아에서 동쪽의 트란실바니아까지 뻗어 있었고, 현재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일부를 포함했다.[15] 이 지역은 주로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독일인 식민지 개척자(''grenzer'' 및 ''graničari''로 알려짐)들이 정착했는데, 그들은 토지 교환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제국을 방어하는 군사 부대에서 복무했다.[15]
2. 4. 군사 국경의 재편과 폐지 (18세기 ~ 19세기)
1699년과 1718년에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영토가 오스만 제국에게서 반환되면서, 해당 지역의 대부분은 군정 국경지대가 되었다. 이 국경지대에는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이 정착했으며, 이들은 모두 블라흐(Vlachs)라고 불렸다.[17] 1718년부터 1739년까지는 오늘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 지역도 군정 국경지대에 포함되었다.[18]18세기 중반, 국경지대는 제국 군대와 정규 연대에 맞춰 재편성되었다. 1737년에는 블라흐 법령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이전의 모든 캡틴직과 보이보드직이 폐지되었다. 그 대신 이 지역은 일반 사령부, 연대 및 중대로 세분화되었다.
일반 사령부 | 연대 |
---|---|
바라주딘 | 크리제브치 연대, 주르제바츠 연대 |
카를로바츠 | 리카 연대, 오토차츠 연대, 오굴린 연대, 슬룬 연대 |
자그레브 | 글리나 연대, 페트리냐 연대 |
슬라보니아 | 노바 그리슈카 연대, 슬라본스키 브로드 연대, 페트로바라딘 연대 |
바나트 | 세르비아 (일리리아) 구역, 독일 구역, 루마니아 (블라흐) 구역 |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만 제국과의 국경 지대에 군정 국경지대를 설치했다. 이 지역은 특정 강이나 지역의 이름을 따서 여러 구역으로 나뉘었다.
1767년 이후, 군정 국경지대 주민 12명 중 1명이 군인이었는데, 이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나머지 지역의 62명 중 1명과 대조적이었다. 국경지대 군인들은 전문 군인이 되어 유럽 전장으로 이동할 준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온 난민의 추가 이주와 영토 확대로 인해 국경지대의 인구는 더욱 혼합되었다. 슬라보니아와 오늘날 보이보디나의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많은 자생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있었지만, 이 시기에 그들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블라흐 난민/이민자보다 수가 적어졌다. 일부 독일계, 폴란드인, 마자르인과 슬로바키아인도 주로 행정 인력으로 국경지대에 왔으며,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등도 도착했다.
1783년에는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국경이 자그레브에 본부를 둔 크로아티아 일반 사령부의 통일된 통제를 받게 되었다.[19][20] 5,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세르비아 자유 군단이 바나트에 설립되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의 이전 분쟁에서 도망쳐 온 난민들로 구성되었다.[21] 이 군단은 세르비아의 해방과 합스부르크 통치 하의 통일을 위해 싸울 것이었다.[21] 여러 ''자유 군단''이 합스부르크-오스만 국경을 따라 활동했다.[22] 오스트리아는 이 군단을 사용하여 1787년 말과 1788년 초에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려는 두 번의 실패한 시도를 했다.[21]
세르비아는 그 후 해방되어 합스부르크 보호령으로 조직되었다. 1789년 10월 8일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이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세르비아를 점령했고,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합스부르크 자유 군단에서 싸우며 조직 및 군사 기술을 습득했다.[23] 그러나 1791년까지 오스트리아군은 도나우강과 사바강을 건너 철수해야 했고, 수천 명의 세르비아 가족들이 합류했다. 시스토바 조약 (1791)은 1787년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을 종결시켰다.
1787년에는 민간 행정이 군사 행정과 분리되었지만, 1800년에 다시 뒤집혔다. 18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사바 강 이북으로 더 이상 침략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군정국경지대는 그 유용성을 잃기 시작했다. 1848년, 요십 옐라치치는 군정국경지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및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국경지대의 통일을 추진했다. 그는 이를 폐지할 권한은 없었지만, 개혁에 대한 승인을 얻어 1848년 군정국경지대는 크로아티아 사보르에 대표를 파견했지만,[24] 1850년대에 이는 철회되었다.[25] 1850년부터 국경지대,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는 공식적으로 단일 지역을 구성했지만, 별도의 행정 및 대표 체제를 유지했다. 군정국경지대 전체는 군사 행정 하에 있었으며, 모든 인구는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군대에 속했으며 오스트리아 군사 법률의 적용을 받았다. 주 사령부는 자그레브에 있었지만 비엔나의 전쟁부에 직접 종속되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터키와의 전쟁이 끝난 후 국경지대의 비무장화를 여러 차례 요청했다. 비무장화는 1869년에 시작되었고 1873년 8월 8일, 프란츠 요제프 치하에서 바나트 국경지대가 폐지되어 헝가리 왕국에 편입되었으며, 크로아티아 국경지대의 일부(크리제브치와 주르제바츠 연대)는 이미 1871년 8월 1일에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 편입되었다. 나머지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 국경지대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 편입되는 법령은 1881년 7월 15일에 선포되었으며, 크로아티아 반(총독) 라디슬라프 페야체비치가 자그레브 총사령부로부터 인수를 시작한 1881년 8월 1일에 편입이 시작되었다.
3. 행정 구역
구역 기간 비고 다뉴브 군사 국경 1702년–1751년 남부 바치카와 북부 스레미아 일부 포함. 티사 군사 국경 1702년–1751년 북동부 바치카 일부 포함. 무레슈 군사 국경 1702년–1751년 포모리셰 지역 포함. 사바 군사 국경 1702년–1751년 사바 강을 따라 위치. 바나트 군사 국경 1751년–1873년 현재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국경에 위치. 세르비아인, 독일인, 루마니아인 구역으로 나뉨. 슬라보니아 군사 국경 1745년–1881년 크로아티아 동부에서 세르비아 국경까지 사바 강을 따라 뻗어 있음. 크로아티아 군사 국경 1553년–1881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국경에 위치.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지역 포함. 샤이카슈 대대 1763년–1873년 이전 폐지된 다뉴브 및 티사 구역 일부에서 형성. 트란실바니아 군사 국경 1762년–1851년 트란실바니아 동부와 남부에 위치. 두 개의 세케이인 및 두 개의 루마니아인 연대로 구성.
18세기 중반, 군정 국경지대는 제국 군대와 정규 연대에 맞춰 재편성되어 바라주딘, 카를로바츠, 자그레브, 슬라보니아, 바나트 등의 일반 사령부로 세분화되었다.
3. 1. 주요 행정 구역
1718년부터 1739년까지 군정국경지대에는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하던 오늘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지역도 포함되었다.[18] 18세기 중반에 국경지대는 다시 제국 군대와 정규 연대에 맞춰 재편성되었다. 1737년에는 블라흐 법령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이전의 모든 캡틴직과 보이보드직은 폐지되었고, 그 대신 이 지역은 일반 사령부, 연대 및 중대로 세분화되었다.
1783년에는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국경이 자그레브에 본부를 둔 크로아티아 일반 사령부의 통일된 통제를 받게 되었다.[19][20]
18세기와 19세기에 군정 국경지대는 여러 지역으로 나뉘었다.
구역 | 기간 | 비고 |
---|---|---|
다뉴브 군사 국경 | 1702–1751 | 남부 바치카 (바치카 팔란카, 바치키 페트로바츠, 페트로바라딘스키 사나츠, 티텔 등 포함)와 북부 스레미아 (페트로바라딘, 시드 등 포함)의 일부로 구성되었다. 이 국경 구역이 폐지된 후, 그 영토의 일부는 민정 행정 하에 놓였고, 다른 일부는 국경의 다른 구역에 통합되었다. |
티사 군사 국경 | 1702–1751 | 북동부 바치카 (솜보르, 수보티차, 칸지자, 센타, 베체이 등 포함)의 일부로 구성되었다. 이 국경 구역이 폐지된 후, 그 영토의 대부분은 민정 행정 하에 놓였고, 남쪽의 작은 지역은 샤이카슈 대대의 일부로서 군정 행정 하에 남았다. |
무레슈 군사 국경 | 1702–1751 | 이 국경은 포모리셰 지역, 즉 무레슈 강 북쪽 제방 지역을 포함했다. 이 구역이 폐지된 후, 그 전체 영토는 민정 행정 하에 놓였다. |
사바 군사 국경 | 1702–1751 | 사바 강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
바나트 군사 국경 | 1751–1873 | 현재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국경에 위치해 있었다. 세르비아인 (일리리아), 독일인 (폴크스도이치) 및 루마니아인 (블라흐) 구역으로 나뉘었다. |
슬라보니아 군사 국경 | 1745–1881 | 포사비나를 따라, 동부 크로아티아에서 시작하여 사바 강을 따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 국경을 따라 위치해 있었으며, 제문 인근 다뉴브 강으로 유입될 때까지 스레미아로 뻗어 있었다(오늘날 베오그라드의 일부). 북동쪽 경계는 다뉴브 강을 따라 페트로바라딘까지 이어졌다. |
크로아티아 군사 국경 | 1553–1881 |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국경에 위치해 있었다. 이 군사 국경은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 "반스카 크라이나"에서 유래)의 지리적 지역을 포함했으며, 서쪽으로는 아드리아 해, 남쪽으로는 베네치아 공화국, 서쪽으로는 합스부르크 크로아티아, 동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접해 있었다. 우나 강과 사바 강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의 슬라보니아 군사 국경까지 뻗어 있었다. |
샤이카슈 대대 | 1763–1873 | 이 국경의 작은 부분으로, 이전에 폐지된 다뉴브 및 티사 구역의 일부에서 1763년에 형성되었다. 1852년, 샤이카슈 대대는 티텔 보병 대대로 개편되었다. 1873년에 폐지되었고, 그 영토는 바치카-보드로그 군에 편입되었다. |
트란실바니아 군사 국경 | 1762–1851 | 트란실바니아의 동부와 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두 개의 세케이인 및 두 개의 루마니아인 연대로 구성되었다. 이 국경의 설정 후 마데팔바 학살 또는 시쿨리치디움이 발생했다. |
18세기 중반, 국경지대는 제국 군대와 정규 연대에 맞춰 재편성되어 다음과 같이 세분화되었다.
4. 인구 구성
1699년과 1718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영토가 반환되면서, 이 지역 대부분은 군정 국경지대가 되었다. 이 국경지대에는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정착했으며, 이들은 모두 블라흐(Vlachs)라고 불렸다.[17]
18세기 중반, 국경지대는 제국 군대와 정규 연대에 맞춰 재편성되었다. 1737년에는 블라흐 법령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이전의 모든 캡틴직과 보이보드직은 폐지되었다. 그 대신 이 지역은 일반 사령부, 연대 및 중대로 세분화되었다. 1767년 이후, 군정 국경지대 주민 12명 중 1명은 군인이었는데, 이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나머지 지역(62명 중 1명)과 대조적이었다. 국경지대 군인들은 전문 군인이 되어 유럽 전장으로 이동할 준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온 난민의 추가 이주와 영토 확대로 인해 국경지대의 인구는 더욱 다양해졌다. 슬라보니아와 오늘날 보이보디나의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많은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있었지만, 이 시기에 이들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블라흐 난민/이민자보다 수가 적었다. 독일계, 폴란드인, 마자르인과 슬로바키아인도 주로 행정 인력으로 국경지대에 왔으며,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등 다른 정착민과 군인들도 도착했다.
4. 1. 19세기 인구 통계
1828년 군정국경지대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26]
1846년 오스트리아 통계 연감에 따르면 군정국경지대의 인구는 1,226,408명이었다.[27]
종교 | 인구 | 비율(%) |
---|---|---|
동방 정교회 | 598,603명 | 48.82% |
로마 가톨릭 | 514,545명 | 41.96% |
그리스 가톨릭 | 62,743명 | 5.12% |
개신교 | 49,980명 | 4.08% |
유대교 | 537명 | 0.05% |
1857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인구의 종교가 기록되었다. 군정 국경 지대의 인구는 1,062,072명이었으며, 종교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종교 | 인구 | 비율(%) |
---|---|---|
동방 정교회 | 587,269명 | 55.30% |
로마 가톨릭 | 448,703명 | 42.26% |
개신교 | 20,139명 | 1.91% |
그리스 가톨릭 | 5,533명 | 0.53% |
유대교 | 404명 | 0.05% |
분할별 인구 데이터는 다음과 같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군정 국경 지대 (총 675,817명)
종교 | 인구 | 비율(%) |
---|---|---|
로마 가톨릭 | 396,843명 | 58.72% |
동방 정교회 | 272,755명 | 40.36% |
그리스 가톨릭 | 5,486명 | 0.81% |
기타 | 733명 | 0.11% |
바나트 군정 국경 지대 (총 386,255명)
종교 | 인구 | 비율(%) |
---|---|---|
동방 정교회 | 314,514명 | 81.43% |
로마 가톨릭 | 51,860명 | 13.43% |
복음주의 | 19,418명 | 5.03% |
유대교 | 393명 | 0.1% |
기타 | 70명 | 0.01% |
5. 유산
레오폴트 1세 황제는 헝가리로 이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그들이 자신들의 통치자인 ''보이보다''(Vojvoda)를 선출할 수 있도록 칙령을 내렸고, 여기서 ''보이보디나''(Vojvodina)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15] 1690년, 약 3만에서 7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이 대 세르비아 이주로 알려진 동 슬라보니아, 바치카, 바나트에 정착했다.[15]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세르비아인들이 자신들의 보이보다를 선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 지역을 동 슬라보니아와 바나트의 군사 국경에 통합시켰다.[15] 그러나 이 지역에 세르비아인들이 강력하게 존재하면서 보이보디나는 19세기 세르비아 르네상스의 요람 역할을 했다.[15]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기 8개월 전인 1990년 10월부터 구 군정 국경(보이나 크라이나) 지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반란을 시작하여 자신들의 미승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크라이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점령된 영토는 군정 국경의 영토와 거의 동일했지만 크닌 시가 있는 북부 달마티아와 같이 구 군정 국경의 일부가 아니었던 영토도 포함했다. 군정 국경을 구성했던 다른 영토는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통제하에 남았다. 크로아티아군은 1995년 폭풍 작전 이후 세르비아 점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자세한 내용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참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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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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