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크반트
1. 개요
귄터 크반트는 독일의 기업인이자, 나치 시대에 군수 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그는 1883년 부유한 섬유 제조업자의 딸과 결혼하여 사업을 확장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복 공급으로 이익을 얻었다. 이후 여러 기업을 인수하며 사업을 확장했으나, 나치 정권에 협력하여 강제 노동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는 미트러이퍼로 분류되어 기소되지 않고 경제계에 복귀했으며, 1954년 사망했다. 2007년, 그의 가족의 나치 협력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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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반트가 -
마그다 괴벨스
마그다 괴벨스는 나치 독일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부인으로, 히틀러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나치 정권의 비공식적 대표자 역할을 수행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총통 벙커에서 남편과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했다. -
크반트가 -
요한나 크반트
요한나 크반트는 독일 기업가로 헤르베르트 크반트의 비서에서 아내가 되어 BMW 대주주가 되었고, BMW 감독 이사회 활동과 요한나 크반트 스티프퉁 재단 설립, 독일연방공화국 공로 훈장 수훈 등의 활동을 했으나, 귄터 콴트의 며느리로서 나치 협력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
1954년 사망 -
앨런 튜링
앨런 튜링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에니그마 암호 해독에 기여하고 컴퓨터 과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국의 수학자, 컴퓨터 과학자이며, 동성애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1954년 사망 -
마르마두케 그로베 바예호
마르마두케 그로베 바예호는 1878년 칠레에서 태어나 군사 쿠데타로 칠레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12일 만에 무너졌고, 사회당 창당 및 상원의원을 역임하다 1954년 사망했다. -
나치 당원 -
마르틴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는 1889년에 태어나 1976년에 사망한 독일의 철학자이며, 현상학과 실존주의, 언어와 기술 비판을 탐구했고, 대표작으로 『존재와 시간』이 있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나치즘 협력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나치 당원 -
카를 슈미트
카를 슈미트는 20세기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독일 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로, 나치 정권에 협력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주권, 독재, 전쟁 등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을 담은 저서를 통해 현대 정치 이론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가족
귄터 크반트는 독일 제국 프리츠발크에서 아버지 에밀 크반트(1849년 ~ 1925년)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밀은 1883년 부유한 섬유 제조업자의 딸과 결혼하여 1900년에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귄터에게는 게르하르트, 베르너라는 형제와 에디트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크반트 가는 독일군에 제복을 공급하여 부를 축적했다. 전쟁 후 귄터는 이 재산을 VARTA, 화분 광업 회사, 금속 작업 회사(IWKA 포함) 및 BMW의 지분을 인수하는 데 사용했다.
크반트는 안토니 '토니' 에발트와 처음 결혼하여 헬무트 크반트(1908년 ~ 1927년)와 헤르베르트 크반트 두 아들을 두었다. 안토니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헬무트는 1927년 맹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1921년 1월 4일, 크반트는 마그다 리첼과 재혼하여 하랄트 크반트를 낳았다. 마그다는 귄터보다 나이가 반밖에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29년에 이혼했고, 2년 후 마그다는 요제프 괴벨스와 재혼했다.
2.1. 가족 관계
귄터 크반트는 독일 제국 프리츠발크에서 에밀 크반트(1849년 ~ 1925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밀은 1883년 부유한 섬유 제조업체 기업인의 딸과 결혼했으며, 1900년 회장을 맡았다. 귄터에게는 게르하르트, 베르너라는 형제와 에디트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크반트는 안토니 '토니' 에발트와 처음 결혼하여 헬무트 크반트(1908년 ~ 1927년)와 헤르베르트 크반트 두 아들을 두었다. 안토니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고, 헬무트는 1927년 맹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1921년 1월 4일, 크반트는 마그다 리첼과 재혼하여 하랄트 크반트를 낳았다. 마그다는 귄터보다 나이가 반밖에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29년에 이혼했다. 2년 후 마그다는 요제프 괴벨스와 재혼하였다.
3. 사업 확장과 제1차 세계 대전
귄터 크반트는 독일 제국 프리츠발크에서 에밀 크반트(1849–1925)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밀은 1883년에 부유한 섬유 제조업자(Reichswolle AG)의 딸과 결혼했고, 1900년에 회사를 맡게 되었다. 귄터에게는 게르하르트, 베르너, 그리고 에디트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베르너는 엘레오노어 크반트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매제인 귄터가 연합군의 기소로부터 보호받도록 도왔다. 귄터의 여동생 에디트는 또 다른 섬유 회사의 소유주와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귄터 크반트의 지휘 아래 그의 가족은 독일군에게 군복을 공급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 후, 귄터는 이 재산을 사용하여 하겐에 본사를 둔 배터리 제조업체인 Accumulatorenfabrik AG (AFA)를 인수했다. AFA는 이후 VARTA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귄터는 칼륨 채굴 회사, 금속 가공 회사(IWKA 포함)에 투자했으며, BMW와 다임러 벤츠의 지분을 인수했다.
4. 나치 시대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후 귄터 크반트는 나치당에 가입하여 히틀러의 강력한 재정적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나치 정권과의 관계를 통해 사업을 확장하고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독소전 발발 후, 귄터가 경영하는 DWM은 무기 제조, AFA는 군용 배터리 제조, 섬유 공장은 군복을 제조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귄터의 사업은 확대되었고, 전쟁 포로와 포즈난 주민 등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으며, 그 인원은 추정 5만 7500명에 달했다.
1945년 4월 25일, 귄터는 베를린을 탈출하여 스위스로 도망을 시도했지만, 스위스 측은 귄터가 히틀러의 자금 지원자임을 파악하고 입국을 거부했다. 귄터는 바이에른 주로 도망갔다가 1946년 6월 중순 CIC에 구금되었고,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 피고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관계자들을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발언과 서류를 수집했고, 그 중에는 미국으로의 여행 경비를 마련해 준 게오르크 작스도 있었다. 또한, 구금 중에 회고록을 집필하여 자신을 나치의 희생자로 만들고, 강제 노동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 피고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탈나치화 재판에서 귄터는 무기 제조는 나치의 명령에 의한 것이고, 나치 입당은 요제프 괴벨스에게 강요받은 것이라는 등 허위 증언과 허위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미리 확보했다. 결국 판결은 귄터가 나치에 의해 선동되었고, 나치 입당도 강요받은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독일 공영 방송은 2007년 10월 1일, 크반트 가문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과 나치 정권 지원, 그리고 그 이후의 책임 회피를 추궁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방송은 예고 없이 진행되었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4.1. 강제 노동과 전쟁 범죄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후, 귄터 크반트는 나치당에 가입했다. 1937년 히틀러는 전쟁경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다른 산업주의자들처럼 그에게 '위르워츠샤프트 총통'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크반트의 사업체들은 적어도 세 곳의 공장에서 강제 수용소의 노예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탄약, 소총, 포, 배터리를 공급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죽었다. AFA의 하노버 공장 구내에 처형장이 설치되었다. 크반트는 또한 독일의 침략 이후 유럽 전역의 공장들을 전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미 상원은 전쟁 중 독일 경제의 운영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다. 그들은 크반트가 많은 연동 회사, 신디케이트, 그리고 기업들을 거느린 독일 산업에서 중요한 이사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보험, 은행, 자동차, 탄약, 직물, 전기, 배터리 그리고 다른 분야들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위르워츠샤프트 총통' 작위를 알아냈다.
2007년 10월 독일 공영방송 ARD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반트 가의 역할을 묘사한 한스-요아힘-프리드리히스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영화 "크반트가의 침묵"을 방영했다. 이 가족의 정치적 과거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이것을 공개했고, 2차 세계대전 동안 가족의 공장에서 노예 노동자들의 사용에 관한 크반트 가문과 대립했다. 그 결과, 크반트 가문 전체를 대표하여 역사학자가 아돌프 히틀러 독재 시절 가족의 활동을 조사할 연구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4명의 가족 구성원이 2011년에 발표된 1,200페이지 분량의 독자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크반트가는 나치의 범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관되어 있었다." 이 연구를 편집하고 연구한 본의 역사학자 요아힘 숄티세크의 말이다. 2008년 현재 그들의 공장 중 한 곳에 대한 보상, 사과, 기념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BMW는 보고서에 관련되지 않았다.
4.2. 유대인 직원 해고와 지원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된 후, 귄터 크반트는 나치당에 입당했다. 당원 번호는 263만 6406번이었다. 1933년 5월 3일, 해외 자금 유출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400만 라이히스마르크를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유대인 임원을 해고했다.
귄터는 DWM 사의 임원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야금학 교수 게오르크 작스를 고용했지만, 뉘른베르크법 시행 후 유대인이었던 그를 해고했다. 귄터는 게오르크의 미국 이주 비용과 출국세 등을 금전적으로 지원했고, 1936년 가을 게오르크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는 전후 귄터가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에서 피고에서 제외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1937년 히틀러는 귄터에게 '위르워츠샤프트 총통'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크반트의 사업체들은 적어도 세 곳의 강제 수용소에서 노예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탄약, 소총, 포, 배터리를 공급했다.
5. 전후 활동과 유산
1946년 귄터 크반트는 요제프 괴벨스와의 관계 때문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1948년 1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지만 범죄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미틀로이퍼(동조자)'로 판단받았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검사 중 한 명인 벤자민 페렌츠는 현재 크반트에 대한 증거가 그 당시에 법원에 제출되었더라면 크반트는 IG 파르벤의 이사들과 같은 범죄로 기소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사들은 최고 8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크반트는 석방 이후 여러 독일 기업의 감독 위원회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1951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대학교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는 1954년 12월 30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휴가 중에 사망했다.
그의 두 아들, 헤르베르트 크반트와 하랄트 크반트는 함께 유산을 관리했지만, 하랄트 크반트는 기계 공학 및 무기 제조에 관여했던 카를스루에 아우크스부르크 AG(IWKA)의 산업 플랜트에 집중했고, 헤르베르트 크반트는 바타, 다임러-벤츠 및 BMW에 대한 투자를 관리했다.
나치 독일 패전 후, 크반트 가문의 소유 회사는 일시적으로 몰수되었지만 나중에 되찾았고, 일족은 차남인 헤르베르트 크반트를 중심으로 다시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했다. 귄터의 유산은 5550만 마르크로, 2024년 통화 가치로 135에 해당한다.
현재 독일 부자 순위 1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일가 인물은 8명에 달하며, 헤르베르트의 아내 요한나 크반트, 그의 아들 슈테판 크반트와 딸 수잔네 클라텐은 경제 잡지 포브스가 발표하는 세계 부자 순위의 단골이기도 하다.
한편, 일부 언론에서는 콴트 가문이 나치 시대의 강제 징용과 강제 노동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생존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도 받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독일 공영 방송은 2007년 10월 1일, 크반트 가문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과 나치에 대한 정권 지원을 폭로하고 그 이후의 책임 회피를 추궁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방송은 예고 없이 진행되었으며, 동 가문에 의한 방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1. 뉘른베르크 재판 회피 논란
1946년 귄터 크반트는 괴벨스와의 관계 때문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지만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동조자'(미틀로이퍼)로 판단되어 1948년 1월 석방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검사였던 벤자민 페렌츠는 만약 당시에 크반트에 대한 증거가 법원에 제출되었더라면, IG 파르벤의 이사들과 같은 범죄로 기소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IG 파르벤 이사들은 최고 8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크반트는 석방 후 도이치 은행과 같은 여러 독일 기업의 감독 위원회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1951년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명예 시민이 되기도 했다.
5.2. 경제계 복귀와 사망
1946년 크반트는 요제프 괴벨스와의 관계로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1948년 1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지만 범죄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미틀로이퍼'(Mitläufer, 동조자)로 판단받았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검사였던 벤자민 페렌츠는 만약 당시 크반트에 대한 증거가 법정에 제출되었다면, IG 파르벤 이사들과 같은 혐의로 기소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IG 파르벤 이사들은 최대 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크반트는 석방 후 도이치 은행 등 여러 독일 기업의 감독 위원회에 복귀할 수 있었고, 1951년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크반트는 1954년 12월 30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사망했다.
5.3. 크반트 가문의 유산과 논란
1946년 귄터 크반트는 요제프 괴벨스와의 관계로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1948년 1월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지만 범죄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미트러이퍼(동조자)'로 판단되어 석방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검사였던 벤자민 페렌츠는 현재 크반트에 대한 증거가 그 당시에 제출되었다면 IG 파르벤의 이사들과 같은 범죄로 기소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반트는 석방 후 도이치 은행 등 여러 독일 기업의 감독 위원회에 복귀했으며, 195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1954년 12월 30일 카이로에서 휴가 중 사망했다. 그의 두 아들 헤르베르트와 하랄트는 유산을 함께 관리했는데, 하랄트는 기계 공학 및 무기 제조에 관여했던 카를스루에 아우크스부르크 AG(IWKA)에, 헤르베르트는 바타, 다임러-벤츠, BMW에 대한 투자를 관리했다.
나치 독일 패전 후, 크반트 가문의 소유 회사는 일시적으로 몰수되었지만 나중에 되찾았고, 일족은 차남인 헤르베르트 크반트를 중심으로 다시 부를 축적했다. 귄터의 유산은 5550만 마르크(2024년 가치로 135)에 달했다.
현재 포브스의 세계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크반트 가문 인물은 8명에 달하며, 헤르베르트의 아내 요한나 크반트, 그의 아들 슈테판 크반트와 딸 수잔네 클라텐 등이 있다.
그러나 일부 언론에서는 크반트 가문이 나치 시대의 강제 징용과 강제 노동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생존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도 받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독일 공영 방송은 2007년 10월 1일 크반트 가문의 과거 악행과 나치 정권 지원, 책임 회피를 폭로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