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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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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은 1983년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저항하며 김영삼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인 23일간의 단식 투쟁이다. 1980년대 초, 정치적 탄압 속에 김영삼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고, 언론 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등을 포함한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 통제를 시도했지만, 김영삼의 단식은 국내외에 알려졌고,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인사들과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정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단식을 이어갔고, 건강 악화로 병원에 강제 입원했으나 투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재야 원로들의 권유로 단식을 중단했으며,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 유린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민주화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2. 단식 투쟁의 배경 (1980년대 초)

12·12 사태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구금하며 권력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은 '서울의 봄'이 왔다고 오판했다. 전두환의 의도를 알아챈 대학생 10만여 명은 서울역에 모여 전두환 퇴진을 외쳤으나, 양김의 설득과 전두환의 약속으로 해산했다.[2] 이후 전두환은 계엄을 선포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했다. 김대중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다.[2]

1983년 김영삼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였다.[4] 정계에서 강제 은퇴 후 자택에 칩거하던 김영삼은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아 단식 투쟁에 돌입하며,[5] 함석헌, 문익환 등이 상도동 자택을 방문하여 위로했고, 각지의 재야 인사들이 호응하였다.

2. 1. 민주화 5개항 요구

김영삼은 광주 민주화 운동 3주년이 되는 1983년 5월 18일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정부에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을 선언한다.[5]

  • 언론 통제 전면 해제
  • 정치범 석방
  • 해직 인사 복직
  • 정치활동 규제 해제
  • 대통령 직선제 개헌[5]


전두환에 의해 강제로 정계에서 은퇴당한 김영삼박정희의 의원 제명 파동을 겪은 이후 "다시 한번 나 김영삼은 죽지 않았다."[6]는 것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순간이었다.

3. 단식 투쟁의 전개 (1983년 5월 - 6월)

1983년 5월 18일, 김영삼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아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23일간의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4] 김영삼박정희에게 의원직을 제명당한 이후 "다시 한번 나 김영삼은 죽지 않았다.[6]"를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김영삼의 단식 농성은 전두환 정부의 언론 통제로 인해 초기에는 대한민국 내에서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8] 이에 김영삼의 부인 손명순과 상도동계 인사들은 외신 기자들에게 알리고, 재야 인사들과 대학가를 돌며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단식 투쟁을 알렸다.[7] 5월 19일 상도동계 인사들의 모임인 '민주산악회' 인사 70여 명이 '김영삼 단식 대책위'를 구성하고 동조 단식에 들어갔으며,[7] 5월 26일에는 상도동계 의원 23명이 동조 단식에 참여했다.[6]

문익환, 고은, 지학순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의 지지와 학생들의 시위도 이어졌다.[7] 미국에 있던 김대중은 '김영삼 총재 단식투쟁 전 미국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뉴욕타임즈에 'Kims, Hunger Strike'라는 글을 기고하는 등 김영삼 지지 운동을 펼쳤다.[7][6] 한민통 역시 김영삼 단식에 호응하여 동조 단식 농성을 벌였다.[9]

단식 8일째인 1983년 5월 25일, 김영삼은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강제 입원되었으나, "의식이 살아있는 한 나의 투쟁은 중단될 수 없다."며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을 이어갔다.[6] 병원 측은 김영삼이 물과 소금만 섭취했다고 발표했다.[6] 5월 19일부터 6월 15일까지 신민당과 야당 인사, 학생운동가들은 김영삼 단식의 실황과 사진을 담은 인쇄물을 서울 각지에 배포했다.

3. 1. 정부의 대응과 회유

1983년 5월 27일,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김영삼을 찾아가 대통령의 뜻이라며 단식 중단과 건강 회복을 요청했다.[6] 권익현은 가족 동반, 외국 주택 제공, 생활비 지원 등을 제시하며 일본, 유럽, 미국 등 해외로 갈 것을 제안했다.[6]

그러나 김영삼은 "우리 국민이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외국에 나갈 수가 있겠소? 나에 대한 연금 해제가 문제가 아니오. 내가 요구한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이 정권도 이승만, 박정희를 따라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란 말이요."라며 제안을 거절하고, 권익현에게 이 말을 대통령에게 전하라고 했다.[11]

전두환은 김영삼이 굶어 죽을 경우 미국의 반응을 우려하여 연금 해제를 선언했고, 권익현은 이를 김영삼에게 알렸다. "80년 5월부터 가택연금을 당하셨으니까 벌써 만 2년이 지났네요. 오늘 밤 12시를 기해서 총재님의 연금은 완전히 해제되었습니다."[11] "이제 총재님은 자유로운 몸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도 어디든 가실 수가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12]

하지만 김영삼은 "연금 해제야 당연한 것 아니오? 내가 연금 해제 풀어달라고 단식한 것도 아니고, 처음 제시한 민주화 5개항을 들어주면 단식 농성을 해제하겠소."라며 연금 해제 조치를 거부했다.[12] 권익현은 재차 해외 방문과 경비 지원을 제안하며 회유했다.[12]

이에 김영삼은 "나를 해외로 보내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라고 말했고, 권익현이 방법을 묻자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시오."라고 답했다.[12] 결국 정부는 김영삼의 단식 중단 설득을 포기했다.[12]

단식 8일째인 1983년 5월 25일, 김영삼은 몸무게가 14kg이나 빠지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되었다.[6] 김영삼은 입원 후에도 "의식이 살아있는 한 나의 투쟁은 중단될 수 없다."며 치료를 거부했다.[6]

3. 2. 단식 중단과 그 이후

6월 9일, 함석헌, 윤보선, 김수환, 강원룡, 문익환 등 재야 원로 인사들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한 김영삼은 병상에 누워 단식 중단을 선언한다.[13] 김영삼은 단식을 중단하며 "국민 여러분,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 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13]

6월 10일 단식 23일째 되는 날 단식 중단을 밝히고 단식 농성을 중단하였다. 같은 날부터 단식으로 인한 영양실조탈수 증세, 쇼크 등에 대한 병원 진료를 받고 1983년 6월 30일 퇴원하였다.

4. 단식 투쟁의 영향과 의의

김영삼의 단식 농성으로 전두환 정권은 인권을 유린, 침해하는 독재 정권이라는 이미지가 미국과 유럽에 각인되었다.[14] 제5공화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김영삼의 단식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막았다. 단식이 길어지자 언론이 ‘재야인사 문제’, ‘현안 문제’라는 해괴한 제목을 단 게 고작이었다.[16]

지명관 교수는 “그(김영삼)의 단식과 주변의 대응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평하였다.[14] 김수환 추기경은 김영삼을 방문하고 "나이는 비록 DJ보다 젊지만 먼저 대통령 하는 게 낫다는 말도 했었다"고 한다.[15]

김영삼의 단식은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잠자던 저항의식을 깨우는데 일조했다.[16] 그의 단식투쟁은 전두환, 노태우의 워커발에 무참히 짓밟힌 민주화의 열망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게 만든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다.[13]

5. 단식 투쟁 관련 논란

이후 단식농성 중 김영삼이 보름달 을 먹다가 문병 온 문익환에게 걸렸다는 야사가 전해진다.[6] 그러나 이는 군사정권에서 깎아내리려고 만든 헛소문[6]이라는 반론도 있다. 한때 연예인 김구라는 모 방송에서 이를 풍자하기도 했다. 한편 보름달빵 소문이 확산되자 신민당과 야당 인사들은 1970년함석헌의 단식 농성 때 "단식때 통닭에 인삼차를 비밀리에 먹었다"는 루머가 돌았다며 루머라고 일축했다.

6. 기타

2003년 최병렬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특검법 통과를 위해 열흘간 단식투쟁을 했을 때 김영삼은 "굶으면 학실히(확실히) 죽는다.[17]"라며 만류했다.[8]

2006년 공개된 김대중의 비밀문서에는 1979년 5월 30일 YS(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당선을 축하하는 DJ(김대중) 논평, DJ가 문동환 목사 등과 함께 미국에서 주도한 '민주화를 위한 단식투쟁 지원 궐기대회'(김영삼 단식지원대회), 1983년 8월 9일 YS가 미국에 있던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었다. 이는 민주화운동 시기 두 사람의 협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참조

[1] 뉴스 정치인 단식농성 사례 http://news.naver.co[...] 경향신문 2003-11-26
[2] 뉴스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http://www.polinews.[...] 폴리뉴스 2011-08-10
[3] 뉴스 오늘의 소사-6월 9일 http://news.naver.co[...] 대전일보 2008-06-08
[4]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5] 서적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서재 2011
[6] 서적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서재 2011
[7] 서적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서재 2011
[8] 뉴스 "[한마당-이흥우] “굶으면 죽는다”" http://news.kukinews[...] 국민일보 2010-02-08
[9] 뉴스 민주화운동 불구 '친북활동' 누명 '한통련', 꿈에도 가고픈 고국 산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02-23
[10] 뉴스 "[책갈피속의 오늘] 1983년 YS 단식 23일만에 중단" http://news.naver.co[...] 동아일보 2005-06-09
[11] 서적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서재 2011
[12] 서적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서재 2011
[13] 서적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서재 2011
[14] 뉴스 지명관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http://weekly.hankoo[...] 한국일보 2008-03-20
[15] 뉴스 "[선종 김수환 추기경 추모] “사랑하라시던 말씀 생생”… 3∼4시간 기다려 조문" http://news.kukinews[...] 국민일보 2009-02-17
[16] 뉴스 정치인 단식도 급이 다르네…카스테라 먹는 것도 단식?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09-04-24
[17] 뉴스 정동영式 대장정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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