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히라 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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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히라 코우는 일본의 영화 감독으로, 1926년 도쿄에서 태어나 1978년 사망했다. 쇼치쿠와 닛카츠에서 조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1956년 영화 《표적이 된 남자》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미친 과실》, 《그 녀석과 나》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특히 실험적인 연출과 테크닉을 통해 "테크닉의 사람"으로 불렸다. 1971년 독립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칸 영화제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TV 드라마를 연출했으며 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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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히라 코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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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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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 수 없음 |
다른 이름 | 양수희 (楊樹希, Yeung Shu-Hei, 로마자 표기: Yang Su-hui) |
출생지 | 일본 도쿄도기타토시마군다키노가와마치 (현 도쿄도기타구) |
사망지 | 알 수 없음 |
국적 | 알 수 없음 |
민족 | 알 수 없음 |
신장 | 알 수 없음 |
혈액형 | 알 수 없음 |
출생 | 1926년 1월 3일 |
사망 | 1978년 9월 11일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
장르 | 영화 |
활동 기간 | 1956년 - 1976년 |
활동 내용 | 알 수 없음 |
배우자 | 알 수 없음 |
가족 | 다카하시 도라노스케 (아버지) 나카히라 마미 (딸) |
소속 극단 | 알 수 없음 |
소속사 | 알 수 없음 |
공식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주요 작품 | 알 수 없음 |
수상 내역 | |
아카데미상 | 알 수 없음 |
AFI상 | 알 수 없음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 알 수 없음 |
세자르상 | 알 수 없음 |
에미상 | 알 수 없음 |
제미니상 | 알 수 없음 |
골든 글로브상 | 알 수 없음 |
골든 라즈베리상 | 알 수 없음 |
고야상 | 알 수 없음 |
그래미상 | 알 수 없음 |
블루리본상 | 알 수 없음 |
로렌스 올리비에상 | 알 수 없음 |
미국 배우 조합상 | 알 수 없음 |
토니상 | 알 수 없음 |
일본 아카데미상 | 알 수 없음 |
기타 수상 | 알 수 없음 |
2. 감독 데뷔 이전
1926년 1월 3일 도쿄부 타키노가와 정(지금의 도쿄도 기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다카하시 토라노스케는 서양화가였고,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외동딸이었기에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할머니도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등 예술가의 길을 장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에 열중해서 좋아하는 르네 클레르 감독의 영화를 10번 이상 반복해서 보곤 했다. 구제 코치고등학교 이과를 졸업하고 재수하던 중 잡지 "인간 희극"에 풍자 시나리오(제목은 미스터 고에몽)를 응모하여 가작에 당선되었다. 1948년 도쿄 대학 미대에 입학해 영화동아리에서 활동했다. 함께 하던 인물들은 오기 마사히로, 와타나베 유스케, 와카바야시 에이지로 등이 있다.
1948년 대학을 중퇴하고 카와시마 유조를 동경하여 쇼치쿠의 감독모집에 응모한다. 1500명 중 8명 안에 들어 입사했다. 함께 입사한 사람들은 스즈키 세이준, 마츠야마 젠조, 사이토 타케시, 이노우에 카즈오, 이코마 치사토, 이마이 유고로, 아리모토 타다시이다. 카와시마 유조 외에도 사사키 야스시, 키노시타 케이스케, 오바 히데오, 하라 켄키치, 시부야 미노루,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조감독을 맡았다. 베레모를 주머니에 꼽고 작업복을 세련되게 차려입었지만 주머니에 이런저런 도구들을 찔러넣은 채 촬영장을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베레모는 그의 한평생 트레이드마크였다.
조감독을 하면서 구로사와나 카와시마 감독의 눈에 들었다. 당시 조감독은 후배들을 지도하고 각본 공부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나카히라는 편집 기술까지 익혀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영화 기술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카와시마 감독의 영화 진실 일로의 제1 조감독으로 예고편을 찍기도 했다.
하루빨리 자기 영화를 찍고싶어했던 그는 1954년 영화제작을 다시 시작한 닛카쓰로 이적했다. 닛카츠에서 신도 가네토, 타사카 구미타카, 니시카와 가쓰미, 타키자와 에이스케, 야마무라 사토시 등의 조감독을 지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926년 1월 3일 도쿄부 타키노가와 정(지금의 도쿄도 기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다카하시 토라노스케는 서양화가였고,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외동딸이었기에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4] 할머니도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등 예술가의 길을 장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중학생 때부터 영화에 열중해서 좋아하는 르네 클레르 감독의 영화를 10번 이상 반복해서 보곤 했다. 구제 코치고등학교 이과를 졸업하고 재수하던 중 잡지 "인간 희극"에 풍자 시나리오(제목은 미스터 고에몽)를 응모하여 가작에 당선되었다.[4] 1948년 도쿄 대학 미대에 입학해 영화동아리에서 활동했다. 함께 하던 인물들은 오기 마사히로, 와타나베 유스케, 와카바야시 에이지로 등이 있다.[4]
1948년 대학을 중퇴하고 카와시마 유조를 동경하여 쇼치쿠의 감독모집에 응모한다. 1500명 중 8명 안에 들어 입사했다. 함께 입사한 사람들은 스즈키 세이준, 마츠야마 젠조, 사이토 타케시, 이노우에 카즈오, 이코마 치사토, 이마이 유고로, 아리모토 타다시이다.[4] 카와시마 유조 외에도 사사키 야스시, 키노시타 케이스케, 오바 히데오, 하라 켄키치, 시부야 미노루,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조감독을 맡았다. 베레모를 주머니에 꼽고 작업복을 세련되게 차려입었지만 주머니에 이런저런 도구들을 찔러넣은 채 촬영장을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베레모는 그의 한평생 트레이드마크였다.
조감독을 하면서 구로사와나 카와시마 감독의 눈에 들었다. 당시 조감독은 후배들을 지도하고 각본 공부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나카히라는 편집 기술까지 익혀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영화 기술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카와시마 감독의 영화 진실 일로의 제1 조감독으로 예고편을 찍기도 했다.[4]
2. 2. 쇼치쿠 입사 및 조감독 시절
나카히라 코우는 1926년 도쿄시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어머니와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예술가의 길을 장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에 열중하여 르네 클레르 감독의 영화를 10번 이상 반복해서 보기도 했다. 구제 코치고등학교 이과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 미대에 입학하여 영화동아리에서 활동했다.1948년, 카와시마 유조를 동경하여 쇼치쿠의 감독 모집에 응모, 1500명 중 8명 안에 들어 입사했다. 스즈키 세이준이 함께 입사한 동기이다. 카와시마 외에도 사사키 야스시, 키노시타 케이스케, 오바 히데오, 하라 켄키치, 시부야 미노루,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조감독을 맡았다. 베레모를 주머니에 꼽고 작업복을 세련되게 차려입고 촬영장을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주위의 이목을 끌었으며, 베레모는 그의 평생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조감독 시절부터 편집 기술까지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영화 기술에 대한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 真実一路의 제1 조감독으로 예고편을 찍었을 때, 이를 본 시노다 마사히로와 타카하시 오사무가 그의 재능에 경악했다는 일화가 있다.
1954년, 영화 제작을 다시 시작한 닛카쓰로 이적하여,신도 가네토, 타사카 구미타카, 니시카와 가쓰미, 타키자와 에이스케, 야마무라 사토시 등의 조감독을 지냈다.
3. 감독 입봉 이후
나카히라 코우는 1956년 프로듀서 미즈노에 타키코의 추천으로 조감독 신분으로 영화 《표적이 된 남자》를 감독하게 되었다. 긴자 뒷골목을 통째로 오픈 세트로 활용하고 팬 포커스를 구사한 이 영화는 신인답지 않은 중편 스릴러였다. 이 영화는 《미친 과실》 개봉 이후에 공개되어 《미친 과실》이 데뷔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타협을 거부하는 잔소리형 감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후루카와 타쿠미의 영화 《태양의 계절》이 흥행하자, 나카히라는 17일 만에 두 번째 영화 《미친 과실》을 촬영했다. 이 영화는 빠른 전개, 참신한 편집, 센세이셔널한 소재로 프랑수아 트뤼포와 누벨 바그 작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신인이었던 이시하라 유지로는 이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나카히라는 르네 클레르, 빌리 와일더 등에게 심취했으며, 오카모토 기하치, 마스무라 야스조 등 모던파 감독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스펜스부터 미스터리까지 장르와 스타일을 가리지 않고 역량을 발휘했다.
1959년에는 이집트 합작 영화 《아랍의 폭풍》을 감독했다. 처음에는 통역이 있었지만, 나카히라는 '희로애락은 어디나 같으므로 말은 안 통해도 뜻은 통한다'며 통역 없이 촬영을 진행했다.
1960년 《학생 녀석과 딸들》에서는 주인공을 한 명으로 한정하지 않고 여러 인물을 동등하게 묘사하는 군상극 스타일을 선보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오버 심각 반대파', '일본 무한 경박파'라고 칭했던 그의 가벼운 스타일은 일본 영화계에서는 이단으로 여겨졌다. 그는 주제와 소재의 무거움 대신 세련되고 테크닉 위주의 묘사를 택했지만, 당시 영화 관객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했다.
나카히라는 에세이와 영화 평론에도 솜씨를 보여 사회파 영화가 영화상을 독식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영화를 원작이나 소재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어떻게 영상에 투영하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로 인해 영화 평론가들을 적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닛카츠의 스타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스타 중심의 영화 제작이 성행했지만, 나카히라는 '그래도 영화 우선'이라는 자세를 유지했다. 요시나가 사유리는 훗날 그를 '최고로 무서운 감독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엄격한 연출을 지향했다.
《지도가 없는 거리》는 나카히라가 스스로 기획한 영화였지만, 회사가 이시하라 유지로의 이미지 손상을 우려하여 하야마 료지를 주연으로 촬영했다. 이시하라와는 스크루볼 코미디인 《내일은 맑을까》와 나카히라 최대의 히트작인 《그 녀석과 나》를 찍었다. 1963년에는 《현대 아이》, 《진흙 투성이의 순수한 마음》을 감독했는데, 《진흙 투성이의 순수한 마음》은 한국에서 《맨발의 청춘》으로 리메이크되었다.
3. 1. 닛카츠 초기 (1956년 ~ 1963년)
나카히라 코우는 1956년 프로듀서 미즈노에 타키코의 추천으로 조감독 신분으로 영화 《표적이 된 남자》를 감독하게 되었다. 긴자 뒷골목을 통째로 오픈 세트로 활용하고 팬 포커스를 구사한 이 영화는 신인답지 않은 중편 스릴러였다. 이 영화는 《미친 과실》 개봉 이후에 공개되어 《미친 과실》이 데뷔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타협을 거부하는 잔소리형 감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후루카와 타쿠미의 영화 《태양의 계절》이 흥행하자, 나카히라는 17일 만에 두 번째 영화 《미친 과실》을 촬영했다. 이 영화는 빠른 전개, 참신한 편집, 센세이셔널한 소재로 프랑수아 트뤼포와 누벨 바그 작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신인이었던 이시하라 유지로는 이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나카히라는 르네 클레르, 빌리 와일더 등에게 심취했으며, 오카모토 기하치, 마스무라 야스조 등 모던파 감독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스펜스부터 미스터리까지 장르와 스타일을 가리지 않고 역량을 발휘했다.
1959년에는 이집트 합작 영화 《아랍의 폭풍》을 감독했다. 처음에는 통역이 있었지만, 나카히라는 '희로애락은 어디나 같으므로 말은 안 통해도 뜻은 통한다'며 통역 없이 촬영을 진행했다.
1960년 《학생 녀석과 딸들》에서는 주인공을 한 명으로 한정하지 않고 여러 인물을 동등하게 묘사하는 군상극 스타일을 선보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오버 심각 반대파', '일본 무한 경박파'라고 칭했던 그의 가벼운 스타일은 일본 영화계에서는 이단으로 여겨졌다. 그는 주제와 소재의 무거움 대신 세련되고 테크닉 위주의 묘사를 택했지만, 당시 영화 관객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했다.
나카히라는 에세이와 영화 평론에도 솜씨를 보여 사회파 영화가 영화상을 독식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영화를 원작이나 소재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어떻게 영상에 투영하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로 인해 영화 평론가들을 적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닛카츠의 스타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스타 중심의 영화 제작이 성행했지만, 나카히라는 '그래도 영화 우선'이라는 자세를 유지했다. 요시나가 사유리는 훗날 그를 '최고로 무서운 감독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엄격한 연출을 지향했다.
《지도가 없는 거리》는 나카히라가 스스로 기획한 영화였지만, 회사가 이시하라 유지로의 이미지 손상을 우려하여 하야마 료지를 주연으로 촬영했다. 이시하라와는 스크루볼 코미디인 《내일은 맑을까》와 나카히라 최대의 히트작인 《그 녀석과 나》를 찍었다. 1963년에는 《현대 아이》, 《진흙 투성이의 순수한 마음》을 감독했는데, 《진흙 투성이의 순수한 마음》은 한국에서 《맨발의 청춘》으로 리메이크되었다.
1964년에는 카가 마리코가 주연한 《월요일의 유카》, 《사냥꾼의 일기》, 《모래 위의 식물》 등 실험적인 작품들을 빠르게 찍어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시대를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았고, 앨프리드 히치콕도 상은 별로 못 받았다'고 말하며, 이마무라 쇼헤이나 浦山桐郎 등이 명성을 얻어가는 것에 비해 자신은 소외된다고 느껴 생활이 망가지고 촬영장에서 술을 마시는 등 좌절을 겪기도 했다.
1956년에 프로듀서 미즈노에 타키코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팬 포커스를 구사한 《표적이 된 남자》를 감독했다. 같은 해, 《태양의 계절》의 히트를 받아, 두 번째 작품 《미친 과실》이 히트작이 되었다. 1959년에는 이집트와의 합작 《아랍의 폭풍》을 감독했다. 1960년의 《학생 녀석과 딸들》에서는, 많은 등장인물을 등가로 그리는 나카히라류 군상극의 방법론을 영상화했다. 에세이나 영화 평론도 했으며, 영화상에서 "주제성이나 사회성이 있는 작품만 베스트 텐에 들어가는" 상황을 비판했다. 닛카츠의 스타 시스템이 확립됨에 따라, 프로그램 픽처를 양산했다. 《학생 녀석과 딸들》 다음에 찍은 《지도가 없는 거리》는 하시모토 시노부에게 각본 수정을 의뢰해 이시하라 유지로 주연작으로 직접 기획했지만, 유지로의 스타 이미지를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하야마 료지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같은 해, 이시하라의 《내일은 맑을까》부터 1961년에는 나카히라 최대의 히트작이 된 이시하라의 《그 녀석과 나》를 거쳐 1963년에는 요시나가 사유리의 순애 노선의 《현대 아이》까지, 오락 영화, 상업주의 영화가 이어졌다.
3. 2. 닛카츠 후기 (1964년 ~ 1968년)
나카히라 코우는 1964년에 카가 마리코가 주연한 『월요일의 유카』, 『사냥꾼 일기』, 『모래 위의 식물군』 등 여러 작품을 빠르게 촬영하며 이색작, 실험작에도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시대를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았고, 영화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앨프리드 히치콕도 상은 별로 못 받았다"고 주변에 말하기도 했다.같은 시기, 오카모토 기하치, 마스무라 야스조 뿐만 아니라 닛카츠에서 함께 작업하던 이마무라 쇼헤이, 우라야마 키리로 등이 명성을 얻어가는 것에 비해 자신은 소외된다고 느껴 생활이 망가지고 촬영장에서 술을 마시는 등 좌절하기도 했다.
1965년, 코바야시 아키라의 도박사 시리즈 감독을 맡게 된 나카히라는 기존 시리즈의 애수와 감정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모던한 터치로 노선을 변경했다. 『검은 도박사』에 이어 다음 편인 『검은 도박사 악마의 왼손』에서는 지나치게 황당한 영화 테크닉을 사용하여 결국 도박사 시리즈 자체가 끝나버리게 되었다.
1967년, 홍콩의 쇼브라더스에 초청받아 자신의 영화 『사나이에 국경은 없다』, 『미친 과실』, 『사냥꾼 일기』를 리메이크하고 『비천 여랑』을 감독했다. 일본과 홍콩을 오가며 영화를 찍었지만, 촬영장에서 술을 마시는 행동이 계속되어 『더 스파이더스의 대진격』 이후 닛카츠와의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나카히라는 닛카츠의 호리 사장과 영화 제작 관련 의견 차이로 다투었고, 이후 토호와 토에이 등 경쟁사 사장들에게 영화 일을 맡겨달라고 부탁했지만, 업계 관행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호리 사장은 나카히라에게 '노예같은 행동은 그만하라'는 말까지 했고, 나카히라는 자신과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4. 독립 프로덕션 시대 (1971년 ~ 1976년)
1971년 나카히라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신도 가네토의 각본으로 《闇の中の魑魅魍魎》를 제작하여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2] 그러나 일본에서 국가당 1편만 출품하기로 협의되어 있었는데, 오시마 나기사의 작품까지 두 편이 출품되어 문제가 되었다. 나카히라는 "프랑스 주최 영화제이므로 불평할 것도 없고, 항의는 타당하지 않다"라며 오시마 감독을 비판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상에는 실패했다.[2]
1972년에는 《混血児リカ》를, 다음 해에는 후속편인 《混血児リカ ひとりゆくさすらい旅》를 제작했다.[2] 이 두 작품은 스케반을 다룬 학원 액션물이었다. 1974년에는 한국의 신필름 초청으로 자신의 《紅の翼》을 리메이크한 《청춘불시착》을 감독했다.[2]
1976년에는 프랑스에서 촬영한 《変奏曲》을 제작했다.[7] 이 영화는 세계 최초로 골든섹션 사이즈(1:1.618)를 채택했지만, 영화가 성공하지 못해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술과 수면제를 혼용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영화계에서 멀어져 TV 드라마를 연출했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으나 본인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링거를 꽂은 채로 촬영한 TV 드라마 《土曜ワイド劇場 涙・暗くなるまで待って》가 유작으로 남았다.[2] 이 작품은 오드리 헵번 주연의 서스펜스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의 리메이크 작품으로, 미즈노에 타키코가 그에게 준 일이었다.
5. 말년과 사망
1971년 나카히라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신도 가네토의 각본으로 《어둠 속 도깨비》를 촬영했고, 이 작품은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4] 하지만 일본 내에서 국가당 1편을 출품하기로 협의되어 있었는데, 오시마 나기사의 작품까지 두 편이 출품되어 문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카히라는 수상하지 못했다.[4]
1972년에는 《혼혈아 리카》, 다음 해에는 후속편 《혼혈아 리카 외톨이 방랑 여행》 등 스케반을 다룬 학원 액션물을 찍었다.[4] 1974년에는 한국의 신필름 초청으로 자신의 《紅の翼》을 리메이크한 청춘불시착을 감독했다.[4]
1976년 프랑스 올로케로 만든 《변주곡》은 세계 최초로 골든섹션 사이즈(1:1.618)를 채택한 영화였다.[4] 하지만 영화가 성공하지 못해 여러 문제가 남았다.
이후 술과 수면제를 혼용하는 등 악재가 계속되어 건강이 나빠졌다.[4] 영화계에서 잠시 떨어져 TV용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 중 하나는 나카히라가 좋아했던 코넬 울리치 원작이었다.
위암 말기로 판명되었으나 본인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인지, 링거를 꽂은 채로 촬영한 TV 드라마 《土曜ワイド劇場 涙・暗くなるまで待って》가 유작으로 남았다.[4] 이것은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서스펜스물의 리메이크 작품으로, 그의 재능을 끝까지 믿어준 水の江滝子가 주선한 일이었다. 만년에는 《하오의 연정》같은 영화나 윌리엄 서머싯 몸의 《달과 육펜스》, 슈테판 츠바이크의 오노레 드 발자크 평전을 영화화하고 싶어했다.
1978년 9월 11일,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52세의 나이로 위암으로 사망했다.[4] 딸인 나카히라 마미가 쓴 평전과 평론가 田山力哉가 쓴 평전이 있다.
6. 작품 평가 및 영향
나카히라 코우는 "테크닉의 사람"으로 불렸으며, 영상의 빨리 감기, 화면 축소 등 다수의 테크닉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테크닉에 지나치게 편중된 면을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
1998년부터 나카히라 코우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시작되어, 1999년에는 나카히라 마미의 저서 『블랙 쉽 영화감독 "나카히라 코우" 전』 출간을 기념하여 그의 영화 8작품이 전국에서 상영되었다. 2003년에는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어둠 속의 망량』과 『변주곡』을 제외한 일본 내 영화 전 작품과 일본 최초로 공개되는 홍콩 영화 2편을 포함한 대규모 회고 상영이 개최되었다. 이 회고 상영 당시 토가와 마사코가 주최하는 문화 살롱 「푸른 방」에서 나카히라 코우 토크 이벤트가 열렸고, 유로 스페이스에서는 『월요일의 유카』 상영과 함께 카가 마리코가 토크쇼 게스트로 방문했다.
나카히라 코우의 후기 작품인 『어둠 속의 망량』과 『변주곡』은 과거 비디오화된 적이 있으며, 오기 마사히로는 『변주곡』을 그 해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베스트 3에 선정했다.
사상보다는 세련됨과 테크닉을 중시하는 나카히라 코우의 작품은 21세기의 관객에게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닛카츠 시대 후기에는 급격한 쇠퇴를 겪으며 회사에서 주어진 기획만을 맡게 되어 비약의 기회를 잃었다는 평가도 있다. 타야마 리키야의 평전에 따르면 이 시기 나카히라는 만취 상태로 일에 임하는 일이 잦아 스태프와 배우의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재기를 노렸던 『어둠 속의 망량』에서도 육체적 쇠퇴로 연출을 대충하는 경우가 많아져 후견인 신도 카네토를 짜증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의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광란의 과실』이 소개, 상영되었고, 「나카히라 코우 레트로스펙티브」가 개최되어 『그 녀석과 나』 등이 상영되었다. 2009년에는 도쿄 라퓨타 아사가야에서 닛카츠 시대 작품 34편이 상영되었다.
7. 작품 목록
나카히라 코우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그의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1956년 - 『표적이 된 남자』 (처녀작이지만 『광란의 과실』 이후 공개), 『광란의 과실』, 『여름의 폭풍』, 『우유 가게 프랭키』
- 1957년 - 『가로등』, 『죽인 것은 누구인가』, 『유혹』, 『미덕의 비틀거림』
- 1958년 - 『사계의 애욕』, 『붉은 날개』 (1950년대 일본 박스 오피스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 중 하나)[3]
- 1959년 - 『재녀 기질』, 『그 벽을 부숴라』 (신도 카네토 각본), 『밀회』
- 1960년 - 『학생 녀석과 딸들』, 『지도가 없는 마을』, 『내일 맑을까』
- 1961년 - 『그 녀석과 나』, 『아랍의 폭풍』 (이집트-일본 합작 영화)
- 1962년 - 『당첨 가게 대장』, 『어리고 악하고 굉장한 녀석들』, 『위험한 일이라면 돈이 된다』
- 1963년 - 『진흙투성이의 순정』, 『내 등에 햇볕이 비친다』, 『현대 아이』, 『빛나는 바다』
- 1964년 - 『월요일의 유카』, 『사냥꾼 일기』, 『모래 위의 식물군』, 『여자의 소용돌이와 연못과 흐름』
- 1965년 - 『현대 악당 의리』, 『검은 도박사』, 『녀석에게 국경은 없다』, 『결혼 상담』
- 1966년 - 『검은 도박사 악마의 왼손』, 『붉은 글라스』
- 1967년 - 『특수 경찰 009』 (홍콩 쇼 브라더스 제작), 『희극 큰 보자기』, 『청춘 타로』, 『비천 여걸』 (홍콩 쇼 브라더스)
- 1968년 - 『더 스파이더스의 대진격』 (비틀즈의 ''도와줘!''에서 영감을 받음), 『광연시』 (홍콩 쇼 브라더스), 『사냥꾼』 (홍콩 쇼 브라더스)
- 1970년 - 『영광을 향한 반역』
- 1971년 - 『어둠 속의 요괴』 (1971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
- 1972년 - 『혼혈아 리카』
- 1973년 - 『혼혈아 리카 홀로 가는 방랑 여행』
- 1974년 - 『청춘 불시착』 (한국 신필름 제작)
- 1976년 - 『변주곡』 (프랑스 촬영, 아트 시어터 길드 제작)





8. 조감독 작품
- 아가씨 사장(お嬢さん社長, 1953) (가와시마 유조 감독)
- 진실일로(真実一路, 1954) (가와시마 유조 감독)
- 지옥의 검호 히라테 미키(地獄の剣豪: 平手造酒, 1954) (다키자와 에이스케 감독)
참조
[1]
웹사이트
中平康
https://kotobank.jp/[...]
kotobank
2020-12-27
[2]
웹사이트
NAKAHIRA Ko (1926-1978)
https://jfdb.jp/en/p[...]
2024-10-12
[3]
간행물
Nakahira, Kō (1926–1978)
https://www.rem.rout[...]
2016-09-05
[4]
웹사이트
Yeung Shu-Hei
http://hkmdb.com/db/[...]
2020-06-26
[5]
웹사이트
Summer Heat (1968) Letterboxd
https://letterboxd.c[...]
1968-06-26
[6]
웹사이트
Summer Heat (1968) HKMDB
http://hkmdb.com/db/[...]
1968-06-26
[7]
웹사이트
Film Review: Variation (1976) by Ko Nakahira
https://asianmoviepu[...]
2024-10-12
[8]
서적
A Critical Handbook of Japanese Film Directors: From the Silent Era to the Present Day
Stone Bridge Press
[9]
웹사이트
高知県立美術館冬の定期上映会 - 「中平 康 映画祭」 - 映画をデザインした先駆的監督
http://www.kochi-bun[...]
高知県文化財団
2014-07-31
[10]
서적
A Critical Handbook of Japanese Film Directors: From the Silent Era to the Present Day
https://archive.org/[...]
[11]
웹인용
高知県立美術館冬の定期上映会 - 「中平 康 映画祭」 - 映画をデザインした先駆的監督
http://www.kochi-bun[...]
201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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