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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 조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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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노 조에이는 무쓰국 센다이 번 출신의 난학자로, 의학, 과학, 정치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스기타 겐파쿠에게 난학을 배우고, 나가사키에서 지볼트의 문하생으로 수학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막부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고 《무술몽어》를 저술하여 투옥되었으나 탈옥에 성공했다. 이후 은신 생활을 하며 군사 서적을 번역했으나, 체포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는 박학한 지식과 진보적인 사상으로 가쓰 가이슈 등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현재 그의 생애는 소설, 드라마, 기념관 등을 통해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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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 조에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카노 초에이
다카노 초에이
본명고토 교사이
출생일1804년 6월 12일
출생지미즈사와 번, 일본
사망일1850년 12월 3일
사망지에도, 일본
국적일본
직업란학자
활동 기간불명
알려진 이유불명
주요 작품『무술몽이야기』
『잊지 못할 것들』
작가 정보
필명불명
출생지오슈 미즈사와
사망 장소에도 아오야마 햐쿠닌초
안장 장소불명
국적불명
교육불명
모교불명
장르불명
주제불명
사조불명
데뷔 작품불명
영향불명
영향을 받은불명
수상불명
서명불명
활동 년도불명
웹사이트불명
각주불명
로마자 표기
로마자 표기Takano Chōei
가나 표기たかの ちょうえい
한자 표기高野長英
한글 표기타카노 초에이

2. 생애

다카노 조에이 상. 쓰바키 친잔(椿椿山) 그림.


다카노 조에이는 무쓰국 미즈사와번무사 집안 출신으로, 숙부이자 양아버지인 다카노 겐사이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난학(蘭學)을 접했다. 에도나가사키에서 스기타 하쿠겐, 요시다 초슈쿠, 지볼트 등에게 네덜란드 의학과 학문을 배우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1828년 지볼트 사건에 연루될 위기에 처하자 나가사키를 탈출했다. 이후 양아버지 사후 가독 상속을 포기하고 무사 신분을 버렸다.

1830년 에도로 돌아와 의술과 난학을 가르치며 와타나베 카잔 등과 교류했다. 그는 피타고라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존 로크 등 서양 학자들의 사상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힘썼으며, 덴포 대기근 당시에는 상치회(尚歯会) 활동을 통해 구황 작물 보급에 기여하는 『구황이물고』(救荒二物考)를 저술했다. 조에이는 당대 최고의 네덜란드어 실력자로 인정받았는데, 술자리에서 동료 이토 겐보쿠가 장난으로 계단에서 밀었을 때조차 네덜란드어로 "위험해!"(GEVAARLIJK!nld)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37년 모리슨 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에이는 막부의 이국선 타격령과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무술몽어』(戊戌夢物語)를 저술했다. 이로 인해 1839년 만사의 옥 때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감옥에서도 동료 수감자들을 돌보며 신망을 얻었고, 옥중 기록 『와스레가타미』를 남겼다.

1844년 감옥 화재를 틈타 탈옥한 그는 지명수배를 피해 질산으로 얼굴을 태워 인상을 바꾸고[19][20] '사와 산파쿠'(沢三伯) 등 가명을 쓰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이요국 우와지마번의 비호 아래 군사 서적 번역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1850년 10월, 에도 아오야마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마치부교 관원들에게 체포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체포 과정에서의 격렬한 저항 끝에 구타당해 사망했다는 설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21] 등이 전해진다.

2. 1. 출생과 초기 수학

무쓰국 센다이번 미즈사와 영주 미즈사와 다테 가의 가신이자 시의(侍医)였던 고토 사네요시(後藤実慶)와 다카노 겐사이의 여동생 미요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아버지인 다카노 겐사이는 에도에서 스기타 겐파쿠에게 난학(蘭學) 의술을 배운 경험이 있어 집에 네덜란드 서적(蘭書)이 많았는데, 이 덕분에 조에이는 어릴 때부터 새로운 학문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분카 9년(1812년)에 아버지 고토 사네요시가 사망하였고, 분카 8년(1813년)에는 어머니의 오빠인 다카노 겐사이의 양자가 되었다.

분세이 3년(1820년) 17세 때, 친형 고토 간사이와 함께 에도로 가서 스기타 겐파쿠의 양자인 스기타 하쿠겐의 문하에 들어갔다.[3] 분세이 4년(1821년)에는 스기타 숙(塾)을 나와 요시다 초슈쿠(吉田長淑)의 문하생이 되어 네덜란드 의학을 배웠다.[3] 분세이 5년(1822년)에는 스승 요시다 초슈쿠에게 인정받아 그의 이름에서 '나가'(長) 자를 따와 '조에이'(長英)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닛코, 쓰쿠바산 등지에서 약초를 채집하고 네덜란드어 문법 연구를 시작했다.[3]

2. 2. 나가사키 유학과 지볼트 사건

분세이(文政) 8년(1825년) 22세의 나이로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지볼트가 운영하던 나루타키주쿠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의학난학(蘭學)을 배웠으며[4], 뛰어난 실력으로 숙두(塾頭, 우두머리 학생)가 되었다. 지볼트를 위해 일본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논문을 쓰거나 식물 채집, 네덜란드 서적 번역 등으로 학비를 충당했으며, 와타나베 카잔도 동료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분세이(文政) 9년(1826년)에는 네덜란드어로 작성한 논문을 지볼트에게 제출하여 박사 칭호를 받기도 했다[4].

그러나 분세이(文政) 11년(1828년), 지볼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니노미야 게이사쿠(二宮敬作)나 다카라 린사이(高良斎) 등 주요 제자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으나, 조에이는 기민하게 나가사키를 탈출하여 체포를 피했다[5]. 이후 분고국 히타로 가서 히로세 단소(広瀬淡窓)의 제자가 되었다.

한편, 분세이(文政) 10년(1827년) 양아버지 다카노 겐사이(高野玄斎)가 사망하자 고향에서 귀향하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조에이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덴포(天保) 원년(1830년)에 가독(家督) 상속을 포기하고 다른 가문에 봉직하지 않겠다고 맹세함으로써[6] 무사 신분을 잃게 되었다.

2. 3. 에도에서의 활동과 와타나베 가잔과의 만남

1830년(덴포 1년) 에도로 돌아와 고지마치(麹町) 가이분자카(会文坂)에서 의사로서 대관당(大観堂)이라는 난학 학숙을 열었다.[6] 1832년(덴포 3년)에는 일본 최초의 생리학 서적으로 평가받는 『서설의원수요』(西説医原枢要) 제1권을 간행했다.

같은 해, 근처에 살고 있던 미카와국 다하라번의 중역 와타나베 가잔과 알게 되었다. 가잔의 의뢰로 고세키 산에이, 스즈키 슌잔 등과 함께 네덜란드 학술 서적(난학서) 번역을 담당하며 다하라번의 고용 난학자가 되었다.[7] 이 시기 조에이는 일본 학자로는 처음으로 피타고라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존 로크, 볼프 등의 서양 사상가들의 저작을 요약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또한 1832년(덴포 3년), 기슈번의 유학자 엔도 가쓰스케(遠藤勝助)가 주도하여 덴포 대기근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결성된 상치회(尚歯会)에 참여했다. 여기서 와타나베 가잔, 후지타 도코 등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기근 구제 방안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조기 메밀감자 재배를 장려하는 내용의 『구황이물고』(救荒二物考, 또는 권농비황이물고)를 집필했으며, 가잔이 이 책의 삽화를 그렸다.[8]

2. 4. 모리슨 호 사건과 무술몽어

덴포 8년(1837년), 도쿠가와 막부의 이국선 타격령에 근거하여 미국 선적의 상선 모리슨 호를 격퇴한 모리슨 호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덴포 9년(1838년), 이 소식을 접한 조에이는 와타나베 가잔 등 동료 지식인들과 함께 막부의 강경한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러한 견해를 담아 『무술몽어』(戊戌夢物語)를 저술하여 막부의 대응이 어리석었음을 지적하고 쇄국 정책에 반대했다. 이 책은 처음에는 가까운 지인들 사이에서 공유되었으나, 조에이의 생각보다 더 널리 퍼져 많은 학자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2. 5. 만사의 옥과 투옥

덴포 10년(1839년), 만사의 옥이 일어나 초에이 역시 막부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그해 5월 체포되었다[9]。 같은 해 12월, 종신형 판결을 받고 덴마초 로야시키에 수감되었다[10]。 감옥 안에서 그는 동료 수감자들의 치료에 힘쓰고 열악한 수감 환경의 개선을 호소했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그는 수감자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어 로우나마에(牢名主, 감옥의 우두머리)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옥중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인 『와스레가타미』를 저술했다.

2. 6. 탈옥과 잠행

1844년 감옥에서 발생한 화재를 틈타 탈옥했다. 이 화재는 조에이가 감옥에서 일하던 사람을 부추겨 방화를 저지르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탈옥 당시 사흘 안에 돌아오면 사면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형이라는 경고를 들었으나 조에이는 이를 무시했다.[19] 당시 그는 지명수배 상태였기 때문에, 질산으로 얼굴을 태워 인상을 바꾸면서 도주했다.

탈옥 후의 정확한 경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이타마현 오마키(大間木)로 가서 다카노 류센(高野隆仙)에게 몸을 의탁했다.[20] 이때 숨어 지내던 집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공개되고 있다. 이후 잠시 에도로 와서 스즈키 하루야마(鈴木春山)의 도움을 받아 군사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으나, 스즈키 하루야마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 이요국 우와지마번의 번주 다테 무네나리의 비호를 받으며 군사 서적 번역을 계속했다. 이 시기의 결과물로 『포가필독』(砲家必読) 11권이 남아 있으며, 그가 기술 자문하여 쌓은 구라포대(久良砲台)는 당시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결과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잠행 생활을 이어가던 중, 조에이는 다시 에도로 돌아와 '사와 산하쿠'(沢三伯)라는 가명으로 의사 활동을 시작했다. 의사로 지내면 많은 사람과 접촉하게 되므로, 그는 이전처럼 질산을 이용해 수시로 얼굴 인상을 바꾸며 신분을 숨겼다. 1850년 3월에는 아오야마 햐쿠닌초(百人町, 현재의 미나미아오야마)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의료 행위를 이어갔다.

타카노 초에이의 은신처 표식, 미나미아오야마

2. 7. 체포와 죽음

1850년 3월, 에도로 돌아온 조에이는 아오야마 햐쿠닌초(현재의 미나미아오야마)에 숨어들었다. 이곳은 쇼군의 보병 관저가 밀집한 지역으로, 그는 「沢三伯」(사와 산파쿠)라는 가명을 쓰며 마을 의사로 행세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이전처럼 질산을 이용해 얼굴 인상을 종종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마지막 날, 정보원의 밀고로 은신처가 발각되었고, 에도 정봉행소 관원들이 체포를 위해 들이닥쳤다. 체포 과정의 정확한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한 기록에 따르면, 조에이는 체포 과정에서 관원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해 이미 빈사 상태였고, 결국 가마로 호송되던 중 자살했다고 한다.[21] 다른 기록에서는 조에이가 체포에 저항하다 ''짓테''로 심하게 구타당해 살해되었거나, 혹은 공식 보고서대로 스스로 단도를 꺼내 목숨을 끊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훗날 가쓰 가이슈는 조에이가 사망하기 한 달 전쯤 만났던 일화를 회고했다. 당시 조에이는 숨어 지내는 형편임을 밝히며, 자신이 직접 필사한 오규 소라이의 병법서 『軍法不審』을 가쓰에게 건넸다고 한다.[22]

현재 조에이가 숨어 지내던 곳에는 "의사 다카노 조에이 은신처"라고 새겨진 석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무덤은 기타아오야마의 젠코지 절에 있으며, 무덤에는 가쓰 가이슈가 쓴 비문이 남아있다.

3. 평가

가쓰 가이슈는 다카노 조에이를 "박학한 사무라이" 또는 "유식한 선비"라고 평가했다. 가쓰는 조에이가 죽기 한 달 전쯤 밤중에 찾아와 시사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돌아갈 때 숨어 지내는 형편이라 줄 것이 없다며 자신이 직접 필사한 오규 소라이의 『군법불신』(軍法不審)을 선물로 주었다고 회고했다.[22][17]

고향인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시에서는 고토 신페이, 사이토 마코토와 함께 3대 위인 중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다. 지역 초등학교에서는 총합적인 학습의 시간 등을 통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가르치고 있다. 2004년(헤이세이 16년)에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으며, 1971년(쇼와 46년)에는 오슈 시립 다카노 조에이 기념관이 세워졌다.[18]

4. 저서


  • 『의원추요』(医原枢要일본어, 의학의 요점) (1832년): 에도에 정착한 후 쓴 책으로, 서양 의학의 기초를 다루었다.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19]
  • 『구황이물고』(救荒二物考일본어, 기근 구제에 관한 두 가지) (1836년): 덴포 대기근 당시 기근 대책을 논의하는 모임인 상치회(尚歯会) 활동 중 저술한 책이다.
  • 『전염병 논고』 (1836년): 유행병 예방 방법을 포함한 의학 서적으로, 총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무술몽어』(戊戌夢物語일본어, 무술년 꿈 이야기) (1838년): 미국 상선을 격퇴한 모리슨 호 사건에 대해 쇄국 정책을 고수하는 도쿠가와 막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막부의 탄압 사건인 만사의 옥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 『와스레가타미』(わすれがたみ일본어, 잊기 어려운 기록): 만사의 옥으로 투옥되었을 때 쓴 옥중 일기이다.
  • 『반샤 소야쿠 쇼키』(蛮社遭厄小記일본어, 반샤의 재앙에 대한 작은 기록): 감옥에서 저술한 책으로, 센고쿠 시대부터 1830년대까지 일본에 서양 학문이 도입된 역사를 다루고 있다.
  • 『포가필독』(砲家必読일본어, 포술가의 필독서) (탈옥 후): 탈옥 후 이요국 우와지마번의 번주 다테 무네나리의 비호 아래 번역한 서양 군사 기술 서적이다. 총 1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집 및 논집'''

  • 『다카노 조에이 전집』(高野長英全集일본어, 전 6권), 제일서방, 1978년-1982년 발간. (수록 순서: "의서 1", "의서 2", "병서", "잡서", "포가필독", "난문")
  • 『화산·조에이 논집』(華山・長英論集일본어), 이와나미 문고, 1978년 발간. (사토 쇼스케 교주)
  • 일본의 명저 25 다카노 조에이 외』, 주오코론샤. (사토 쇼스케 책임 편집, 현대 일본어 번역 포함)

5. 다카노 조에이가 등장하는 작품

다카노 조에이는 소설, 드라마, 만화 외에도 희곡과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등장한다.

; 희곡


  • 마야마 세이카, 『겐바쿠와 장영』 (단편, 이와나미 문고 등)


; 애니메이션

5. 1. 소설


  • 야마다 후타로, 『덴마초에서 오늘 밤』(단편, 가와데 문고 등)
  • 요시무라 아키라, 『長英逃亡|장영 도망일본어』 (1983년 마이니치 신문 연재. 이후 신초 문고, 이와나미 서점 등에서 재간행)
  • 야마테 키이치로, 『화산과 장영』 (슌요도 문고로 재간행)
  • 나카무라 카츠유키(필명: 구로사키 유이치로), 『난과 개 장영 파뢰』 (코단샤 문고, 도쿠마 문고로 재간행)
  • 제임스 미키, 『닥터 장영』 (일본방송출판협회, 2004년)
  • 아오야마 쥰페이, 『장영 도망 잠복기 다카노 조에이와 다테 무네나리 이문』 (광인사, 2008년)
  • 카와치 와카, 『쿠니요시 일문 우키요에 소지』 (쇼가쿠칸 문고, 전 5권, 2007년~2011년)

5. 2. 텔레비전 드라마

드라마 제목방영 연도방송사 및 제작사다카노 조에이 역 배우
꽃의 생애1963년NHK 대하드라마스나가 히로시
천하당당1973년NHK테라다 미노루
가츠 가이슈1974년NHK 대하드라마토우라 로코
신 필살 카라쿠리인1977년아사히 방송쇼치쿠콘도 마사오미
그림자 군단 IV (제19화~20화)1985년KTV, 도에이나카노 세이야
부자매1994년니혼 TV・쇼치쿠야마우치 토시오
대추적! 에도~조슈~미치노쿠~시코쿠1997년아사히 방송쇼치쿠무라카미 히로아키
고키치의 아내22021년NHK BS 시대극야마구치 마키야


5. 3. 만화


  • 미나모토 타로 『풍운아들』(시오 출판, 신판 와이드판 리이드사)

6. 기념 시설

다카노 조에이가 17세에 에도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은 이와테현 오슈시에 오슈시립 다카노 조에이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에도 시대의 무사 저택은 1933년 4월 13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 1876년에 대대적으로 복원되었지만, 조에이가 사용했던 서쪽 앞뜰을 향한 두 개의 방은 원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집은 개인 소유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지는 않는다.[2]

참조

[1] 웹사이트 高野長英旧宅 たかのちょうえいきゅうたく http://bunka.nii.ac.[...]
[2] 웹사이트 Ōshū City tourist guide http://www.iwatabi.n[...]
[3] 논문 論集
[4] 논문 論集
[5] 문서 広瀬淡窓に弟子入りしたという(異説もある)
[6] 논문 論集
[7] 문서 わが国で初めて、ピタゴラスからガリレオ・ガリレイ、近代のジョン・ロック、ヴォルフに至る西洋哲学史を要約した
[8] 웹사이트 二物考(勧農備荒二物考) https://www.city.osh[...] 奥州市高野長英記念館 2024-01-22
[9] 문서 奉行所に自ら出頭したという説もある
[10]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08-24
[11] 문서 火災時には避難目的での一時釈放が制度化されていた。三日以内に戻って来れば減刑が戻って来なければ死罪に処すと言い渡された。石出帯刀も参照
[12] 논문 論集
[13]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 11 埼玉県 角川書店
[14] 웹사이트 旧高野家離座敷 https://www.city.sai[...] さいたま市
[15] 논문 論集
[16] 문서 何人もの捕方に十手で殴打され、縄をかけられた時には既に半死半生だったため、やむを得ず駕籠で護送する最中に絶命したという説もある(現場にいたある捕手役人の覚書による)。しかし、奉行所に提出された報告書によれば、長英は短刀を振るって奮戦した後、喉を突いて自害したとある。当時の奉行所としては、正式な取り調べもせずに容疑者を死亡させた不祥事を隠蔽する目的で虚偽の報告書を作成させた可能性も否定はできない
[17] 문서 海舟全集 第十巻
[18] 웹사이트 高野長英記念館 http://www.city.oshu[...] 2020-03-30
[19] 문서 「切放(きりはなし、きりはなち)」と呼ばれ、火災時には避難目的での一時釈放が制度化されていた。石出帯刀も参照
[20]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 11 埼玉県 角川書店
[21] 문서 現場にいたある捕手役人の覚書による。しかし、奉行所に提出された報告書によれば、長英は短刀を振るって奮戦した後、喉を突いて自害したとある。当時の奉行所としては、正式な取り調べもせずに容疑者を死亡させた不祥事を隠蔽する目的で虚偽の報告書を作成させた可能性も否定はできない
[22] 문서 海舟全集 第十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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