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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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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통사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 성왕 시기 웅천주(공주)에 건립된 사찰이다. 양나라의 연호를 따서 대통사로 명명되었으며, 백제가 남조 문화 수용을 위해 양나라에 조공하고 불교 관련 서적과 기술을 요청한 배경에서 건립되었다. 공주시 반죽동 일대에서 '大通'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사찰의 위치를 추정하며, 일제강점기 발굴을 통해 가람 배치를 유추하고,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석조 등이 사찰의 유물로 확인되었다. 특히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기와가 발굴되어 남조의 제와 기술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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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사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명칭대통사
현지명大通寺
상세 정보
건립 연대알 수 없음
창건자알 수 없음
종파알 수 없음
본존알 수 없음
별칭알 수 없음
문화재알 수 없음
국가대한민국
소재지충청남도 공주시
역사적 정보
창건 시기백제
창건 배경위덕왕이 돌아가신 아버지인 성왕을 기리기 위해 창건
관련 인물법왕
기타황룡사 구층탑을 모방한 탑이 있었다고 전해짐
위치

2. 문헌 기록

大通|대통중국어 원년에 양제를 위하여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 웅천(熊川)은 곧 공주(公州)인데, 당시는 신라에 속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中大通|중대통중국어 원년 기유년(529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였다. 흥륜사를 처음 세우던 정미년(527년)에는 다른 곳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2. 1. 《삼국유사》 기록

삼국유사》에는 양제를 위하여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웅천은 곧 공주(公州)인데, 당시에 신라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정미년(527년)이 아니라 중대통 원년 기유년(529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3. 대통사 건립의 배경

삼국유사》에는 양제를 위하여 웅천주(공주)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대통(大通) 원년 정미년(丁未年)은 아닐 것이며, 중대통(中大通) 원년 기유년(己酉年)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38년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고, 중앙집권 국가 완성과 중국남조 문화를 직접 반영한 새로운 수도 건설을 목표로 양에 조공하였다.

3. 1. 양나라와의 교류

삼국유사》에 따르면, 양제를 위하여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 웅천은 곧 공주인데, 당시는 신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아마도 대통 원년 정미년은 아닐 것이며, 중대통 원년 기유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38년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고, 양에 조공하였다. 백제성왕 시대에 524년, 534년, 541년, 549년 네 차례 양나라에 조공한 기록이 있다. 특히 541년 조공은 백제가 불교, 유교를 비롯한 남조 문화의 종합적인 수용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준다. 『양서』에는 백제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만물을 바치고, 열반경 등의 경전과 모시박사, 공장, 화사 등을 청하였고, 양 무제가 이를 모두 하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다른 사료에는 백제가 양나라에 『예기』의 학자인 “강례박사”와 “오경박사” 파견을 요청했다는 기록도 있다.[2]

무제의 불교 사상의 중심은 반야경열반경이었으며, 특히 열반불성 학설에 깊이 경도되어 중국 강남에서 성행했던 열반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529년 무제의 사신은 동태사에서 직접 열반경을 강론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백제가 “열반 등의 경의” 하사를 요청한 것은 남조 불교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무제의 사상을 간파한 조치였다. 이는 백제의 수도에 사찰을 건립하고 양나라의 연호를 따서 대통사라고 명명한 것과도 연결되는 백제성왕사대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4. 고고학적 발굴

공주시 반죽동(班竹洞) 일대에서 ‘大通’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대통사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2] 대통사지에서 출토된 “대통사식(大通寺式)” 와당(軒丸瓦)중국남조 양(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백제에서 중심적인 와당 문양, 제작 기술로 발전하였다. 이 기술은 백제의 와박사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1]

4. 1. 일제강점기의 발굴

일제강점기에 목욕탕 공사 중 유물이 출토되어 가루베 지온이 처음 유물을 수습하고 가람 배치를 유추하였다.[2]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는 대통사의 당간지주로, 공주 반죽동 석조공주 중동 석조는 대통사의 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육조 시대 남조의 영향을 받은 수막새가 발굴되어 남조의 와공이 와서 기와를 대량생산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소조불상도 출토되었다.

4. 2. 주요 출토 유물

문헌을 통해서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공주시 반죽동(班竹洞) 일대에서 ‘大通’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그 일대를 대통사로 비정한다.[2] 일제강점기에 목욕탕을 공사하다가 유물이 출토되어 가루베 지온이 처음 유물을 수습하였고, 가람 배치를 유추하였다.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가 대통사의 당간지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 반죽동 석조, 공주 중동 석조 역시 대통사의 시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육조 시대남조의 영향을 받은 수막새가 발굴되어 남조의 와공이 와서 기와를 대량생산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소조불상도 출토되었다. 대통사지(大通寺址)에서 출토된 “대통사식(大通寺式)” 와당(軒丸瓦)의 성립과 전개 과정에서는 중국남조계 제와 기술의 전파 양상을 엿볼 수 있다.[1] “대통사식” 와당은 중국남조양(梁)에서 새롭게 도입된 와당 문양과 제작 기술에 의해 성립한 것이며, 백제의 사비(泗沘) 천도에 따른 불교 사찰을 비롯한 여러 시설의 조영을 계기로 중국남조양(梁)의 제와 기술이 도입되었다.[1] 중국남조양(梁)을 기원으로 하는 제와 기술에 의해 생산된 “대통사식” 와당은 이후 백제에서 중심적인 와당 문양, 제작 기술로 전개된다. 중국남조양(梁)에서 백제로 새로운 제와 기술이 전해지고, 그 중국남조양(梁)의 기술이 백제의 와박사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1]

4. 3. 대통사식 기와

공주 반죽동(班竹洞) 일대에서 ‘大通’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목욕탕 공사 중 유물이 출토되어 가루베 지온이 처음 유물을 수습하고 가람 배치를 유추하였다.[2] 육조 시대남조의 영향을 받은 수막새가 발굴되어 남조의 와공이 와서 기와를 대량생산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통사지(大通寺址)에서 출토된 “대통사식(大通寺式)” 와당(軒丸瓦)의 성립과 전개 과정에서는 중국남조계 제와 기술의 전파 양상을 엿볼 수 있다.[1] “대통사식” 와당은 중국남조양(梁)에서 새롭게 도입된 와당 문양과 제작 기술에 의해 성립한 것이며, 백제의 사비(泗沘) 천도에 따른 불교 사찰을 비롯한 여러 시설의 조영을 계기로 중국남조양(梁)의 제와 기술이 도입되었다.[1] 중국남조양(梁)을 기원으로 하는 제와 기술에 의해 생산된 “대통사식” 와당은 이후 백제에서 중심적인 와당 문양, 제작 기술로 전개된다. 중국남조양(梁)에서 백제로 새로운 제와 기술이 전해지고, 그 중국남조양(梁)의 기술이 백제의 와박사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1]

참조

[1] 논문 百済「大通寺式」軒丸瓦の成立と展開:東アジアにおける中国南朝系造瓦技術の伝播 https://doi.org/10.1[...] 日本考古学協会 2023-03-21
[2] 서적 대통사지 공주대학교박물관 2000-01-01 # 날짜 정보가 년도만 있으므로 1월 1일로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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