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크 보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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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크 보가드는 1921년 런던에서 태어난 배우이자 작가이다. 1939년 영화계에 데뷔하여, 1950년대 《닥터 인 더 하우스》 등의 영화로 인기를 얻었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희생》, 《하인》, 《베니스에서의 죽음》 등 예술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하인》과 《달링》으로 BAFTA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1977년부터 작가로도 활동하며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1999년 사망하기 전까지 63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92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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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교육
더크 보가드는 울릭 반 덴 보가르데(Ulrick van den Bogaerde, 1892–1972)와 마거릿 니븐(Margaret Niven, 1898–1980)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녀 중 장남이었다. 플레미쉬 혈통의 아버지 울릭은 버밍엄 페리 바 출신으로, ''더 타임스''의 미술 편집자였다.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마거릿은 글래스고 출신의 전직 배우였다. 보가드는 런던 웨스트 햄프스테드의 한 요양원에서 태어났으며, 1921년 10월 30일 킬번의 성 메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는 여동생 엘리자베스(1924년생)와 광고 영화 제작자인 남동생 개러스 울릭 반 덴 보가르데(Gareth Ulric van den Bogaerde, 1933년생)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데릭 "핍" 보가드는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처음에는 왕립 통신대에서 복무했다. 이후 1943년 4월 2일, 22세의 나이로 여왕 친위 연대(웨스트 서리)에 소위 계급으로 임관했다.[8] 그는 주로 정보 장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더크 보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화계에 진출하여 1950년대 영국 최고의 인기 스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상업 영화뿐만 아니라 조셉 로지, 루키노 비스콘티 등 거장 감독들과 함께 예술성이 높은 작품에 도전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의 주요 출연작으로는 《송 위다웃 엔드》, 《지옥에 떨어진 용감한 자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프로비던스》, 《머나먼 다리》 등이 있으며, 자세한 활동 내역은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북런던의 집이 비좁아지자 보가드는 어머니의 친척들과 지내기 위해 글래스고로 보내져 3년 넘게 머물다가 1937년 말에 돌아왔다. 그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과 글래스고의 앨런 글렌 과학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이 시기를 자서전에서 불행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첼시 예술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2년간 무대 미술 등을 공부했다.
1939년, 보가드는 런던 무대에서 "주급 7실링 6펜스로 차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배우 한 명이 갑자기 출연하지 못하게 되자 대역으로 무대에 서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추가적인 기본 훈련이 필요하다"고 느껴 지방 레퍼토리 극단에 합류했다. 같은 해 조지 폼비 주연의 코미디 영화 ''컴 온 조지!''(1939)에 크레딧에 오르지 않은 엑스트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러나 배우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군에 입대했다. 그는 전쟁 중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에 도착한 최초의 연합국 장교 중 한 명이 되는 경험을 했다.[41] 또한 공식 명령에 따라 전쟁화를 그렸으며, 그중 두 점은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7년에야 배우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보가드는 버나드 몽고메리 육군 원수가 지휘하는 제21 육군 집단군 소속 정보 장교로 유럽 해방 작전에 참여했다.[9] 테일러 도닝의 저서 ''하늘의 스파이''에 따르면, 보가드는 D-데이 이후 노르망디에서 캐나다 공군 부대와 함께 이동하며 사진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 7월까지 그들은 바유 근처 솜메르비유의 "B.8" 비행장에 주둔했다. 이후 대위 계급의 항공 사진 해석 장교로서 제2군에 배속되어, 프랑스, 홀란드, 독일 내 지상 목표물을 제2 전술 공군과 RAF 폭격 사령부를 위해 선정하는 임무를 맡았다.[10] 독일 기갑 부대가 연합군의 침공 교두보 지역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요 경로에 있는 마을들이 집중 폭격 대상이 되었다.[11] 보가드는 1986년 러셀 하티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폭격 목표로 삼았던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충격적인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나는 폐허 속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일렬로 늘어선 공이었지만, 그들은 공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아이들의 머리였다... 한 학교 전체, 수녀원이 학교에서 끌려 나와 폭격을 피하기 위해 건물 사이의 이 좁은 골목길에 줄 세워졌고, 모든 것이 그들 위에 덮쳤다."[10]
1945년 4월 20일, 보가드는 독일의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에 처음으로 도착한 연합군 장교 중 한 명이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수년 동안 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12]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 "문이 열렸고, 나는 내가 단테의 ''지옥''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영어를 하는 한 소녀가 다가왔는데, 그녀는 배지 중 하나를 알아봤고, 그녀는 ... 그녀의 가슴은 일종의 빈 지갑 같았고, 상의는 없었고, 남자 파자마 한 벌, 그러니까 감옥 파자마와 머리카락도 없었다 ...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죽은 사람들의 산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산더미였고, 축축하고 미끄러웠다."[10]

일각에서는 그가 실제로 벨젠을 방문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의 전기를 쓴 존 콜드스트림은 추가 연구를 통해 "이제 그가 적어도 수용소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13]
보가드가 목격한 잔혹 행위와 비인간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는 그에게 독일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을 남겼다. 1980년대 후반에는 자신의 세대 독일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조차 꺼려진다고 쓰기도 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역할 중 세 편은 독일인 역할이었으며, 그중 하나는 영화 ''야간 열차''(1974)에서의 전 SS 장교 역할이었다.[15]
전쟁 중의 경험은 그의 가치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노르망디에서 지뢰를 밟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애원하던 동료 병사를 목격한 경험은 훗날 그가 자발적 안락사를 지지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오랜 동반자이자 매니저였던 앤서니 포우드가 1988년 고통 속에 사망하는 것을 지켜본 후, 자발적 안락사 협회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노르망디에서의 경험을 언급하며 말했다.
: "제 견해는 노르망디에서 24세의 장교였을 때 형성되었습니다... 한번은 앞서가던 지프가 지뢰를 밟았습니다... 다음 순간, 저 옆 풀밭에 이 친구가 있었습니다. 컥컥거리는 목소리로 "도와줘. 죽여줘."라고 했습니다. 손을 떨며 작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탄알을 장전하려 했습니다... 탄알을 찾아야 했는데, 그 동안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를 처리했습니다.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여전히 그 컥컥거리는 소리가 기억납니다. 죽음을 애원하는 목소리."
4. 배우 경력
4. 1. 초기 경력 및 스타덤
첼시 예술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은 후, 보가드는 무대 뒤에서 일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지방 레퍼토리 극단에 합류하여 연기 경험을 쌓았다. 그의 첫 스크린 출연은 조지 폼비의 코미디 영화 ''컴 온 조지!''(1939)에서 크레딧에 오르지 않은 엑스트라 역할이었다.
보가드는 1939년 런던 웨스트 엔드 극장에서 "데릭 보가르데"라는 예명으로 J. B. 프리스틀리의 연극 ''코르넬리우스''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더크 보가드"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영화계에 진출했다. 1947년에는 포춘 극장에서 마이클 클레이턴 허튼의 연극 ''영광 없는 권력''에 출연했다.[16] 그의 초기 영화 주연작 중 하나는 1949년 영화 ''즐거운 스웨그맨''으로, 스피드웨이 선수 역할을 맡았다.
이후 보가드는 독립 영화 제작자 베티 박스의 도움으로 랭크 오가니제이션과 계약을 맺었으며, 이곳에서 베티 박스는 보가드의 초기 영화 대부분을 제작하며 그의 마티네 아이돌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랭크와의 계약 후 첫 크레딧 역할은 스튜어트 그레인저를 대신하여 출연한 ''에스더 워터스''(1948)였다.[18]
그는 ''푸른 등불''(1950)에서 경찰관(잭 워너)을 살해하는 폭력배 역할, 필름 누아르 ''페어에서 너무 오래''(1950)에서는 진 시몬스를 구하는 예술가 역할 등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또한 ''헌티드''(1952), ''런던의 약속''(1953), ''데스퍼레이트 모먼트''(1953)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았다.
보가드가 1950년대 영국 최고의 인기 스타 중 한 명이 되는 계기가 된 작품은 ''닥터 인 더 하우스''(1954)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의대생 사이먼 스패로우 역을 맡아 케네스 모어, 도널드 신든 등과 호흡을 맞췄다. 제작자 베티 박스는 리처드 고든의 원작 소설을 발견하고 영화화를 추진했으며, 랭크 경영진을 설득하여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의 성공은 ''닥터''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닥터 인 더 하우스''의 성공 이후 보가드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며 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미국 망명 감독 조셉 로지의 영국 첫 작품인 ''슬리핑 타이거''(1954)에서는 신경질적인 범죄자를 연기했고, ''바다의 닥터''(1955)에서는 브리짓 바르도와 함께 출연했다. 이 외에도 케냐의 마우마우 봉기를 배경으로 한 ''심바''(1955), 스릴러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다''(1955), 드라마 ''스페인 정원사''(1956), 또 다른 ''닥터'' 시리즈인 ''닥터 앳 라지''(1957) 등에 출연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크레타섬에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파월과 프레스버거 제작의 ''달빛 아래 만났네''(1957), 찰스 디킨스 원작의 ''두 도시 이야기''(1958), 일본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바람은 읽을 수 없다''(1958), 조지 버나드 쇼 희곡 원작의 ''의사의 딜레마''(1959),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와 함께 출연한 ''명예 훼손''(1959)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4. 2. 예술 영화로의 전환
1960년대 초 랭크 기구(Rank Organisation)를 떠난 후 보가드는 자신의 인기 스타 이미지를 버리고 "기존의 도덕관념에 도전하고 영화의 범위를 넓히는 역할을 선택했다."[2] 그는 1961년 영화 《희생자(Victim)》에 출연하여 런던의 변호사 역할을 맡아, 깊은 감정적 관계를 맺었던 젊은 남자를 협박하는 이들과 맞선다. 이 젊은 남자는 횡령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사랑하는 사람의 경력을 망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협박범들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보가드의 캐릭터는 정의를 위해 자신의 평판과 결혼 생활을 희생한다. 《희생자》는 동성애자들이 당시 차별적인 법률 아래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묘사한 최초의 영국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이후 1967년 성범죄법 제정을 통해 남성 간 동성애 행위가 부분적으로 비범죄화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보가드는 조셉 로지 감독과 다시 손잡고 해롤드 핀터가 각본을 쓴 《하인(The Servant)》(1963)에서 타락한 집사 휴고 배럿 역을 맡아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개봉한 《마인드 벤더스(The Mind Benders)》에서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감각 차단 실험을 하는 교수 역을 연기했다. 이듬해에는 로지 감독과 다시 협력하여 반전 영화 《왕과 나라(King and Country)》(1964)에 출연, 군법회의에서 탈영병(톰 코트니)을 마지못해 변호하는 군 장교 역을 맡았다. 존 슐레진저 감독의 《달링(Darling)》(1965)에서는 텔레비전 방송인이자 작가인 로버트 골드 역으로 두 번째 BAFTA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보가드, 로지, 핀터는 《사고(Accident)》(1967)에서 다시 뭉쳐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스티븐의 내면적 고뇌를 그렸다.
잭 클레이턴 감독의 필름 누아르 《우리 어머니의 집(Our Mother's House)》(1967)에서는 어머니가 죽은 뒤 남겨진 일곱 아이들에게 나타난 아버지 역을 연기했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과는 《지옥에 떨어진 자들(The Damned)》(1969)에서 처음 협력하여 독일 산업가 프레데릭 브루크만 역을 맡았다. 2년 후,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1971)에서 작곡가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 역을 맡아 국제적인 명성을 더욱 높였다.[19]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의 논쟁적인 작품 《밤의 포터(The Night Porter)》(1974)에서는 샬롯 램플링과 함께 전직 나치 장교 맥스 알도르퍼 역을 연기했다.
이후 알랭 레네 감독의 호평받은 프랑스 영화 《프로비던스(Providence)》(1977)에서는 죽음을 앞둔 작가(존 길구드)의 변호사 아들 클로드 역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절망(Despair)》(1978)에서는 광기에 사로잡히는 산업가 헤르만 헤르만 역을 맡았다. 보가드는 《절망》에서의 연기를 "내 인생 최고의 연기"라고 회상했지만, 파스빈더 감독의 편집에 실망하여[20] 오랜 공백기를 가졌다. 그는 14년 만인 1991년,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의 《아버지의 향기(Daddy Nostalgie)》(1991)에서 제인 버킨과 부녀 관계로 출연하며 마지막 스크린 연기를 선보였다.
4. 3. 기타 활동
1977년, 보가드는 작가로서 두 번째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벼락에 맞은 우편 마부』(A Postillion Struck by Lightningeng)를 시작으로, 총 15권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했다. 이 책들에는 9권의 회고록, 6권의 소설을 비롯하여 에세이, 평론, 시, 저널리즘 모음집 등이 포함되었다. 작가로서 보가드는 재치 있고 우아하며, 박식하고 사려 깊은 문체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9]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5. 사생활
보가드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결혼하지 않았다.[42] 그는 자신의 사업 매니저이자 오랜 동반자였던 앤서니 '토트' 포우드(Anthony Forwood)와 수십 년간 함께 살았다.[28] 두 사람은 런던을 떠나 버킹엄셔 리틀 찰폰트에 있는 포우드 가족 소유지의 별장을 임대한 것을 시작으로[28], 이후 인근의 빌 하우스(Beel House)를 4000GBP에 매입하여 함께 거주하며 개조하기도 했다.[1] 1960년대에는 비컨스필드 인근으로 이사했으며[1], 이후 프랑스 프로방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1988년 포우드가 사망하기 직전 런던으로 돌아왔다.[29]
보가드와 포우드의 오랜 동거 생활과 보가드가 결혼하지 않은 점 때문에 그가 게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42] 그러나 보가드 본인은 포우드와의 관계를 항상 친구 사이라고 설명했다. (포우드는 1942년부터 1948년까지 배우 그리니스 존스와 결혼한 이력이 있다.) 앤서니 포우드는 1988년 5월 18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29] 보가드는 1999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6. 죽음
보가드는 1987년 11월, 그의 오랜 매니저이자 동거인이었던 앤서니 포우드가 간세포 암종과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일 때 가벼운 뇌졸중을 겪었다. 이후 1996년 9월, 심장으로 가는 동맥을 뚫는 혈관 성형술을 받았으나 수술 후 심각한 뇌졸중이 발생했다.[30] 이 뇌졸중으로 인해 신체의 한쪽이 마비되어 언어 능력에 장애를 겪었고,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뇌졸중 이후 그는 뇌졸중의 영향을 다룬 마지막 자서전 권을 완성했고, 주로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실린 자신의 저널리즘 모음집을 출판했다.
1999년 5월 8일, 런던 자택에서 심장 마비로 7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날 친구인 로렌 바콜과 시간을 보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프랑스 남부 그라스에 있는 그의 옛 저택 르 피제니에에 뿌려졌다.[31]
7. 수상 및 서훈
더크 보가드는 BAFTA 남우주연상 후보로 총 5번 지명되었으며, 이 중 두 차례 수상했다. 또한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는 등 영화계에서 다양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상과 훈장을 받았다.
주요 수상 및 서훈 내역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