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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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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수(東壽)는 336년 전연의 모용황에게 패한 모용인의 측근으로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안악 3호분 묘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며, 묘지에는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라는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백제와의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동수와 같은 중국계 이민을 활용하여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의 유민들을 회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구려 왕권과 낙랑군·대방군 유민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고구려가 4세기 전연의 공격을 받아 왕도를 빼앗겼을 때, 낙랑군·대방군 유민과의 협력을 통해 고구려 부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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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 (고구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동수
원어명冬壽
그로 추정되는 벽화
그로 추정되는 벽화
국가고구려
직책사지절도독제군사평동장군호무이교위낙랑상창려현토대방태수도향후
군주고국원왕
군주 칭호국왕
생애
출생일289년
출생지유주 요동군
사망일357년
사망지미상
매장지미상
국적전연→고구려
가족 관계
부모미상
형제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기타 정보
본관미상
경력미상
성별남성
직업미상
별명미상
서훈미상
웹사이트미상

2. 생애

모용인의 부하였던 동수는 336년 모용인이 동생 모용황에게 패하자 곽충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했다.[2]

고구려에서 그의 정확한 지위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묘로 추정되는 안악 3호분에는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使持節都督諸軍事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鄕侯)’라는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동수가 가진 중국식 직위허호로 보는 것이 유력하며, 고구려는 중국과의 통교에서 신하에게 관작 제정을 요구한 사례가 없고, 고구려가 부관제적 질서 자체를 국내 질서 형성에 도입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수가 "낙랑상"을 칭하는 것은 고구려 왕이 "낙랑공" 관작을 얻었던 것과 관계가 있으며, 그 신료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4]

고구려는 4세기에 전연의 공격을 받아 왕도를 빼앗기고 평양으로 피난했지만, 고구려의 후퇴와 그 후의 부흥은 낙랑군, 대방군의 중국 유민과 해당 기간의 중국 유민의 지원과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동수와 같은 중국으로부터의 망명 고관이 양자를 매개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국원왕은 전연에 사로잡힌 왕모 주씨와 왕비와 전연에 빼앗긴 미천왕의 유해 반환 요구와 동진과의 통교를 이루었는데, 동수가 이들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3]

안악 3호분 묘지(동수 묘지, 357년)는 동진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4]

1932년, 평양역 구내 공사 중에 발견된 전축분에 "영화 9년 3월 10일 요동 한현토태수령 퉁리조"라고 명문이 새겨진 퉁리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5]

3. 안악 3호분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안악 3호분은 복잡한 구조의 회랑과 석실 벽면에 채색된 벽화가 있는 고분으로 유명하며,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중 하나이다. 1932년 평양역 구내 공사 중 발견된 명문이 새겨진 퉁리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5]

고구려는 4세기에 전연의 공격으로 왕도가 함락되고 평양으로 피난했지만, 이후 고구려의 부흥에는 낙랑군, 대방군의 중국 유민과 해당 시기 중국 유민들의 지원과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동수와 같은 중국계 망명 고관들이 이들 사이의 매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국원왕은 전연에 사로잡힌 왕모 주씨와 왕비, 미천왕의 유해 반환을 요구하고 동진과의 외교를 성사시켰는데, 동수가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3]

3. 1. 묘지명과 피장자 논란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안악 3호분은 복잡한 구조의 회랑과 석실 벽면에 채색된 벽화 고분으로 유명하며,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중 하나이다. 도굴로 인해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벽면에 "영화 13년[6]…동수…" 등 68자의 묵서 명문이 발견되었다. 이 명문에는 동진의 연호, 생전 관직, 출신지, 동수가 69세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최대의 분실 면적을 가진 안악 3호분의 피장자는 묘지가 발견된 동수로 추정되지만,[7] 미천왕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 발견된 21기의 동위-북제 벽화묘 중, 유여공주, 고윤, 루예, 사적회락, 고양 등 5기의 북방계 민족 출신자(선비족 또는 선비화된 한족으로 추정)의 묘에서 묘실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1기(사적회락)를 제외한 4기는 모두 묘실 옥벽 중앙에 정면을 향한 묘주상이 그려져 있었다.[8] 반면, 정면향 묘주상이 없는 4기의 벽화묘 피장자는 모두 한족이며, 최분의 임구 최씨와 최앙의 평산 최씨는 모두 당시 북방 명문 호족이었다. 따라서 정면향 묘주상은 동위-북제 시대 북방계 민족 출신자 벽화묘의 특징으로 보인다.[8] 동수의 묘는 황해북도에서 발견되었지만, 묘주상은 오른쪽 실 오른쪽 벽에, 묘주 부인상은 그 전벽에 그려져 있어 정면향 묘주상이 측실에 그려져 있다.[9]

한반도에서는 안악 3호분을 비롯하여 정면향 묘주 또는 묘주 부부 좌상이 그려진 벽화 고분이 몇몇 발견되었지만, 현재까지 발굴 조사 결과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고구려 왕릉으로 벽화분이 채택된 것은 호남리 사신총으로 추정되며, 묘실 사벽에 사신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고구려 왕족의 묘에는 정면향 묘주상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9] 이러한 이유로, 정면향 묘주상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의 피장자는 안악 3호분의 동수와 마찬가지로 후연, 남연, 북연 등 선비족 국가에서 망명한 선비족으로 추정할 수 있다.[9]

안악 3호분이 있는 황해도 안악군낙랑군대방군이 있던 지역이며, 동수는 낙랑군・대방군 고지에 안치되어 있다. 313년경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접수했지만, 지배는 순조롭지 않았다.[10] 고구려는 낙랑군・대방군 고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낙랑군・대방군민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구려는 낙랑군・대방군 고지에 동수와 같은 중국계 이민을 안치하여 회유를 시도했다. 즉, 동수는 고구려 왕권과 낙랑군・대방군민 관계 구축에 매개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10] 평양역 구내에서 분묘가 출토된 동리도 비슷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보이며, 여러 중국계 이민이 고구려의 낙랑군・대방군 고지 지배와 관련되어 있었고, 고구려가 직면한 국가적 문제 해결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0]

3. 2. 벽화의 특징과 선비족 묘제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안악 3호분은 회랑과 석실 벽면에 채색된 벽화가 있는 고분으로 유명하다(세계유산고구려 고분군」 중 하나).[6] 도굴로 인해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벽면에서 "영화 13년…동수… " 등 68자의 묵서명이 발견되었다.[7] 여기에는 동진의 연호, 생전 관직, 출신지, 동수가 6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안악 3호분의 피장자는 묘지명이 발견된 동수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7] 다만, 피장자가 고구려 미천왕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 발견된 21기의 동위-북제 벽화묘 중, 유여공주, 고윤, 루예, 사적회락, 고양 등 5기의 북방계 민족 출신자(선비족 또는 선비화된 한인으로 추정)의 묘에서 묘실 벽화가 없는 1기(사적회락)를 제외한 나머지 4기는 모두 묘실 정면에 묘주상이 그려져 있거나 그려져 있었다.[8] 반면, 정면향 묘주상이 없는 4기의 벽화묘 피장자는 모두 한인이며, 최분의 임구 최씨와 최앙의 평산 최씨는 모두 당시 북방의 명문 호족이었다. 따라서 정면향 묘주상은 동위·북제 시대 북방계 민족 출신자 벽화묘의 특징으로 보인다.[8]

동수의 묘는 북한황해북도에서 발견되었지만, 묘주상은 오른쪽 벽에, 묘주 부인상은 그 맞은편 벽에 그려져 있다. 즉, 정면향 묘주상이 측실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9] 한반도에서는 동수의 안악 3호분을 비롯하여 정면향 묘주 또는 묘주 부부 좌상이 그려진 벽화 고분이 몇몇 발견되었지만, 현재까지 발굴 조사 결과 고구려 왕릉 벽화는 호남리 사신총에서 처음 나타나며, 묘실 사방 벽에 사신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고구려 왕족의 묘에는 정면향 묘주상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9] 이러한 이유로, 정면향 묘주상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의 피장자는 안악 3호분의 동수처럼 후연, 남연, 북연 등 선비족 국가에서 망명한 선비족으로 추정할 수 있다.[9]

4. 동수의 역할과 역사적 의의

동수는 전연모용인의 부하였으나, 336년에 모용인이 동생 모용황에게 패하자 곽충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했다.[2] 고구려에서 그의 정확한 지위는 알 수 없지만, 안악 3호분에 기록된 그의 관직은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였다.

1932년, 평양역 구내 공사 중 발견된 전축분에 "영화 9년 3월 10일 요동 한현토태수령 퉁리조"라고 명문이 새겨진 퉁리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5]

4. 1. 낙랑군, 대방군 통치와 중국계 유민

336년 모용인이 동생 모용황에게 패하자 곽충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는[2] 안악 3호분 묘지명에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使持節都督諸軍事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鄕侯)’라는 관직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수가 가진 중국식 직위는 허호로 보는 것이 유력하며, 고구려는 중국과 통교할 때 신하에게 관작 제정을 요구한 사례가 없고, 부관제적 질서 자체를 국내 질서 형성에 도입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동수가 "낙랑상"을 칭한 것은 고구려 왕이 "낙랑공" 관작을 얻었던 것과 관계있으며, 그 신료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4]

4세기 고구려는 전연의 공격으로 왕도를 빼앗기고 평양으로 피난했지만, 고구려의 후퇴와 부흥은 낙랑군·대방군의 중국 유민과 당시 중국 유민의 지원과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동수와 같은 중국 망명 고관이 양자를 매개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국원왕은 전연에 사로잡힌 왕모 주씨와 왕비, 미천왕의 유해 반환 요구와 동진과의 통교를 이루었는데, 동수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3]

안악 3호분이 있는 황해도안악군낙랑군·대방군이 있던 지역이며, 동수는 낙랑군·대방군 고지에 안치되어 있다.[10]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을 접수한 것은 313년경이지만, 지배는 순조롭지 않았다.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 고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낙랑군·대방군민의 협력이 필요하며, 고구려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서도 낙랑군·대방군민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낙랑군·대방군 고지에 동수와 같은 중국계 이민을 안치하여 회유를 시도했다. 즉, 동수는 고구려 왕권과 낙랑군·대방군민 관계 구축에 매개적 역할을 했다고 추정된다.[10] 평양역 구내에서 분묘가 출토된 퉁리도 마찬가지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보이며, 복수의 중국계 이민이 고구려의 낙랑군·대방군 고지 지배와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중국계 이민이 고구려가 직면했던 국가적 문제 해결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4. 2. 고국원왕 대 외교 활동

336년전연모용인이 동생 모용황에게 패하자 곽충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했다.[2] 안악 3호분에는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使持節都督諸軍事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鄕侯)’라는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동수가 가진 중국식 직위허호로 보는 것이 유력하며, 고구려는 중국과의 통교에서 신하에게 관작 제정을 요구한 사례가 없고, 고구려가 부관제적 질서 자체를 국내 질서 형성에 도입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동수가 "낙랑상"을 칭하는 것은 고구려 왕이 "낙랑공" 관작을 얻었던 것과 관계가 있으며, 그 신료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4]

4세기에 고구려는 전연의 공격을 받아 왕도를 빼앗기고 평양으로 피난했지만, 고구려의 후퇴와 그 후의 부흥은 낙랑군, 대방군의 중국 유민과 해당 기간의 중국 유민의 지원과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동수와 같은 중국으로부터의 망명 고관이 양자를 매개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국원왕은 전연에 사로잡힌 왕모 주씨와 왕비, 전연에 빼앗긴 미천왕의 유해 반환 요구와 동진과의 통교를 이루었는데, 동수가 이들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3] 안악 3호분 묘지(357년)는 동진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4]

참조

[1] 간행물 高句麗古墳壁画における鎧馬図考--鎧馬騎乗人士の階層的位置づけをめぐって https://archives.buk[...] 2006-09
[2] 서적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岩波書店 1998-03-25
[3] 서적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岩波書店 1998-03-25
[4] 뉴스 古代王権の成長と日韓関係 ―4~6世紀― https://www.jkcf.or.[...] 日韓歴史共同研究 2010
[5] 뉴스 “永和九年”銘塼 https://www.museum.g[...] 国立中央博物館
[6] 문서 東晋の年号「永和」は12年までしかないが、13年は西暦357年に当たる。
[7] 서적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岩波書店 1998-03-25
[8] 서적 東魏北斉壁画墓の研究--正面向き墓主像を中心として http://www.lib.kobe-[...] 神戸大学美術史研究会 2002-02
[9] 서적 東魏北斉壁画墓の研究--正面向き墓主像を中心として http://www.lib.kobe-[...] 神戸大学美術史研究会 2002-02
[10] 뉴스 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http://contents.nahf[...] 国史編纂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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