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웅우 왕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따웅우 왕조는 16세기 미얀마에서 시작되어 18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왕조이다. 1280년 버마족 형제가 따웅우 산맥에 마을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6세기 초 민찌뇨가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민예뇨 왕은 1510년 따웅우 왕조를 세웠다. 타빈슈웨티와 바인나웅 시기에 팽창하여 동남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바인나웅 사후 쇠퇴하여 여러 차례의 전쟁과 내분으로 분열되었다. 냐웅얀 왕조 시기에 재통일의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1752년 몬족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따웅우 왕조는 중앙 집권화를 시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했으며,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맺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얀마의 왕조 - 꼰바웅 왕조
알라웅파야 왕이 따웅우 왕조를 대체하며 건립된 꼰바웅 왕조는 불교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버마 역사상 최대 영토를 실현했으나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멸망한 버마의 마지막 왕조이다. -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분류 - 공 (악기)
공은 금속으로 제작된 타악기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의식, 신호, 음악 연주 등에 사용되며, 형태와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분류 - 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분류2 - 공 (악기)
공은 금속으로 제작된 타악기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의식, 신호, 음악 연주 등에 사용되며, 형태와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분류2 - 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따웅우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 | taungnguumainn saat |
유형 | 제국/왕국 |
시작 사건 | 아바 왕국으로부터 독립 |
시작 날짜 | 1510년 10월 16일 |
종료 사건 | 한타와디 정복 |
종료 날짜 | 1752년 3월 23일 |
이전 사건 | 타웅우 왕조 설립 (1485년) |
사건 1 | 바인나웅의 확장 (1510년–1599년) |
사건 2 | 냐웅얀 복원 (1599년–1752년) |
이전 국가 1 | 아바 왕국 |
이전 국가 2 | 한타와디 왕국 |
이전 국가 3 | 샨 연맹 |
이전 국가 4 | 란나 왕국 |
이전 국가 5 | 아유타야 왕국 |
이전 국가 6 | 란상 |
이전 국가 7 | 마니푸르 (왕국) |
후계 국가 1 | 복원된 한타와디 왕국 |
후계 국가 2 | 꼰바웅 왕조 |
후계 국가 3 | 아유타야 왕국 |
수도 | 타웅우 (타웅우) (1510년–1539년) |
공용어 | 공식: 버마어 |
지역 언어 | 타이어, 팍 타이 (아유타야) 몬어 (하부 버마) 샨어 (샨주) 란나 (란나) 라오어 (란상) 메이테이어 (마니푸르) |
종교 | 공식: 상좌부 불교 |
소수 종교 | 애니미즘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 |
정부 형태 | 절대 군주제 |
통화 | 은 |
입법부 | 없음 |
오늘날의 국가 | 미얀마 태국 인도 라오스 중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
지도 | |
![]() | |
![]() | |
통치자 | |
군주 1 | 밍기 뇨 (1485년–1530년) |
군주 2 | 타빈슈웨티 (1530년–1550년) |
군주 3 | 바인나웅 (1550년–1581년) |
군주 4 | 아나욱페틀룬 (1605년–1628년) |
군주 5 | 탈룬 (1629년–1648년) |
군주 6 | 마하담마라자 디파디 (1733년–1752년) |
인구 | |
인구 조사 | 1,982,000 - 2,313,000명 |
2. 왕조의 기원과 형성
1280년 두 명의 버마족 형제가 따웅우 산맥 사이에 방벽을 치고 마을을 만든 것이 따웅우 왕국의 수도 따웅우의 시초이다.[1] 당시 따웅우 산맥은 버간 왕조의 영향권 안에 있었는데, 버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버마족들이 이주하여 대도시 따웅우를 형성하였다.[1] 이곳은 험준한 버고 산맥의 한가운데에 있어 동북부의 샨족과 중앙 평원지로부터의 공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천혜의 요지였다.[1] 그러나 잉와 왕국의 통일 정책에 휩쓸려 따웅우는 얼마간 잉와의 지배 아래 놓였다가 16세기 들어 잉와가 약해지자 독립하게 되었다.
16세기 초 따웅우의 지도자 '''민찌뇨'''는 잉와의 왕 슈웨난쪼신과 협상하여 그의 딸을 아내로 맞고 짜욱세를 얻어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주변의 잉와 왕국 관할지를 점령해 버마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따웅우 성 안에 거대한 인공 호수를 조성하여 식수 문제를 해결하고, 농토와 과수원 개간 사업을 펼쳤다.
1510년 민예뇨(Mingyi Nyo) 왕은 시타웅 강(Sittaung River) 남쪽 상류의 토운구(Taungoo)에 따웅우 왕조(Taungoo Dynasty)를 세웠다. 1527년 모힌(Mohnyin)이 이끄는 샨족 ''사오바(sawbwa)''들이 인와(Inwa)를 정복한 후, 많은 버마어 사용자들이 토운구로 이주하여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민예뇨(Mingyi Nyo)의 아들인 타빈슈웨티(Tabinshwehti) 왕은 버마 대부분을 통일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를 장악하고 바고(Bago, Myanmar)의 한타와디(Hanthawaddy) 수도를 함락시켰다. 1544년 타빈슈웨티는 고대 수도 바간(Bagan)에서 버마 전체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 무렵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샨족은 북쪽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여 세력을 얻었고,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Kingdom)은 차오프라야 강 유역 주변의 패권 국가로 자리 잡았으며, 포르투갈 제국(Portuguese Empire)은 남쪽에 도착하여 말라카(Portuguese Malacca)를 정복했다.
유럽의 민족 집단(Ethnic groups in Europe) 무역상들이 들어오면서 버마는 다시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타빈슈웨티는 상업에 유리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수도를 바고로 옮겼다. 그는 서쪽 해안의 라카인주(Rakhine State) 공격을 위한 군대를 모았으나 아라칸에서 패했지만 하부 버마(Lower Burma)의 피에(Pyay)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Kingdom)으로 진격했지만, 버마-시암 전쟁 (1547-49)(Burmese–Siamese War (1547–49))에서 다시 패했다. 다른 정복된 민족들의 불안과 반란이 이어졌고, 타빈슈웨티는 1550년 암살당했다.
2. 1. 따웅우의 시초
1280년 버마족 형제들이 따웅우 산맥 사이에 방벽을 치고 마을을 만든 것이 따웅우의 시초이다.[1] 당시 버간 왕조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버마족들이 따웅우 산맥으로 이주하여 대도시 따웅우를 형성하였다.[1] 버고 산맥의 험준한 한가운데에 있는 따웅우는 동북부의 샨족과 중앙 평원지로부터의 공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천혜의 요지였다.[1]바간 왕조가 멸망하자, 버마 난민들이 따웅우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샨족의 왕조들이 잇달아 할거했기 때문에, 그 압박을 피해 난민들이 계속해서 따웅우로 몰려들었다. [4]
2. 2. 민찌뇨의 통치와 왕국 기틀 마련
민찌뇨는 16세기 초 따웅우의 지도자이자 용맹한 무사였다. 그는 쇠락한 잉와의 왕 슈웨난쪼신과 협상하여 그의 딸을 아내로 맞고 중부 버마 관계수의 공급지 짜욱세를 얻어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1503년 와족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짜욱세 지역을 확보했다.[3]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주변의 잉와 왕국 관할지인 야메띤, 따웅뇨, 뺘가웅, 슈웨묘, 낀따 등을 손에 넣어 버마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민찌뇨는 도성인 따웅우 성 안에 거대한 인공 호수를 조성하여 식수 문제를 해결하고, 농토와 과수원 개간 사업에 열의를 보이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 이러한 노력으로 버고와 란나 왕국은 민찌뇨를 한 왕국의 지배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3. 따웅우 왕조의 팽창과 전성기
1527년 모힌이 이끄는 샨족이 아바 왕국을 정복한 후, 많은 버마인들이 따웅우로 이주하여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떠빈슈웨티는 이라와디 삼각주를 장악하고 바고를 함락시켰으며, 1544년에는 바간에서 버마 전체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는 샨족이 북쪽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고, 아유타야 왕국이 차오프라야 강 유역의 패권 국가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제국이 남쪽에 도착하여 말라카를 정복하는 등 지정학적 상황이 크게 변화하였다.
유럽인 무역상들이 들어오면서 버마는 다시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떠빈슈웨티는 상업에 유리한 바고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라카인주를 공격했으나 아라칸에서 패배하였다. 하부 버마의 피에까지는 장악했지만, 아유타야 왕국과의 버마-시암 전쟁 (1547-49)에서 패배하고, 1550년 암살당했다.
떠빈슈웨티의 뒤를 이어 그의 매형인 바인나웅이 1550년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 통치하며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마니푸르(1560년)와 아유타야 왕국(1564년)을 포함한 여러 국가를 침략했다. 그는 따웅우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고, 영토는 라오스에서 아유타야까지 확장되었다. 바인나웅은 아라칸 서쪽 왕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던 중 1581년 사망했다.
3. 1. 떠빈슈웨티의 통일 전쟁
떠빈슈웨티는 1527년 모힌이 이끄는 샨족이 아바 왕국을 정복한 후, 많은 버마인들이 따웅우로 이주하여 새로운 중심지가 되자 버마 대부분을 통일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이라와디 삼각주를 장악하고 바고를 함락시켰다. 1544년, 떠빈슈웨티는 바간에서 버마 전체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 시기 샨족은 북쪽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고, 아유타야 왕국은 차오프라야 강 유역의 패권 국가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제국은 남쪽에 도착하여 말라카를 정복하는 등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이 크게 변화하였다.유럽의 민족 집단 무역상들이 들어오면서 버마는 다시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떠빈슈웨티는 상업에 유리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수도를 바고로 옮겼다. 이후 라카인주 공격을 위한 군대를 모았으나 아라칸에서 패배하였다. 하지만 하부 버마의 피에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후퇴하는 군대를 동쪽의 아유타야 왕국으로 이끌었지만, 버마-시암 전쟁 (1547-49)에서 다시 패배했다. 이후 다른 정복된 민족들의 불안과 반란이 이어졌고, 떠빈슈웨티는 1550년 암살당했다.
3. 2. 바인나웅의 정복 전쟁과 제국 건설
바인나웅은 따웅우 왕조 타빈슈웨티의 매형으로, 1550년 왕위를 계승하여 30년 동안 통치하며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마니푸르(1560년)와 아유타야 왕국(1564년)을 포함한 여러 국가를 침략했다. 정력적인 지도자이자 효율적인 군 지휘관이었던 그는 따웅우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고, 영토는 라오스에서 아유타야까지 확장되었다.1548년 제1차 미얀마-태국 전쟁(1548년 - 1549년)에서 바인나웅이 아유타야 왕조를 침공하자 차크라팟 왕이 위기에 처했으나, 시술리요타이 왕비가 목숨을 걸고 구출했다. 1558년에는 란나 왕국을 침공하여 속국(현재 샨 주)으로 만들었다. 제2차 미얀마-태국 전쟁(1563년 - 1564년)에서는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아유타야를 함락시켜 차크라팟 왕이 미얀마의 속국(1564년–1568년)이 되는 것을 인정했다. 제3차 미얀마-태국 전쟁(1568년 - 1569년)에서 다시 아유타야 왕조는 미얀마의 속국(1569년–1584년)이 되었다.
바인나웅은 아라칸 서쪽 왕국에 대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1581년 사망했다.
4. 쇠퇴와 멸망
바인나웅의 강력한 법치에 기반한 점령지 통합 정책은 그의 군사적 능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후 정복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그의 후계자인 '''난다버인'''(재위 1581~1599)은 라카인 공격에 나섰던 군대를 소환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삼촌이 왕위 찬탈을 노리던 잉와 지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잉와 지역의 반란은 계속되었다.
이후 난다버인은 아유타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나레수안 대왕의 활약으로 번번이 패배했다. 계속되는 전쟁 실패로 민심이 악화되었지만, 난다버인은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각지의 영주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아유타야의 나레수안은 치앙마이를 복속시키는 등 왕조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난다버인 사후, 버마 지역은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인 드 브리투가 하부 버마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삐, 따웅우, 잉와 등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버고 중심의 정통 정권에 대항했다. 난다버인의 동생 '''냐웅얀'''(재위 1599~1605)은 냐웅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잉와를 점령하고, 버고와 삐의 잔존 세력을 흡수하여 잉와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그는 버마 통일을 위해 정복 전쟁을 벌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냐웅얀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따웅우 왕조를 '''냐웅얀 왕조'''라고도 하는데, 이는 따웅우 지역이 독립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았고, 폐허가 된 버고는 정치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 왕국의 중심이 잉와 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냐웅얀 왕조는 아나욱펫룬(1605~1628)과 탈룬(1629~1648) 시기에 재통일과 국가 재건을 이루었으나, 이후 왕권 약화와 외세의 개입으로 점차 쇠퇴하였다. 1635년 탈룬의 세입 조사에 따르면 이라와디 강 유역의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2]
냐웅얀 왕조는 마하담마야자의 1752년 서거까지 1세기 반 이상 지속되었다. 인도의 프랑스의 부추김을 받은 바고가 마침내 인와에 반란을 일으켜 국가를 더욱 약화시켰고, 1752년에 멸망하였다. 따웅우 왕조의 몰락은 수도의 제도적 약점, 즉 당파싸움과 계승 분쟁의 심화, 그리고 증가하는 무역과 잠재적인 물가 상승이 엘리트 계층의 소득에 미치는 불균형적인 영향으로 더 광범위하게 설명되어 왔다.[3]
4. 1. 난다버인의 실정과 아유타야 전쟁 패배
바인나웅의 뒤를 이은 '''난다버인'''(재위 1581~1599)은 선왕의 군사적 수완에 의존하던 통치 체제의 한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바인나웅 사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난다버인은 라카인 공격에 나섰던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고 왕위 찬탈을 노리던 잉와 지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잉와 지역의 반란은 계속되었다.이때 잉와 정벌에 동참한 아유타야의 나렛 왕자는 아유타야의 독립을 위해 난다버인의 군대를 공격하려 했다. 난다버인은 이를 눈치채고 거짓으로 패배한 척 소문을 퍼뜨렸고, 나렛 왕자는 버고 지역으로 들어갔으나 곧 추격을 피해 아유타야로 돌아갔다.
1584년, 난다버인은 아유타야를 공격했으나, 나렛 왕자는 청야 전술을 사용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후방 공격으로 인해 따웅우군을 국경 밖으로 추격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1585년과 1586년에 난다버인은 다시 아유타야를 공격했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연이은 전쟁 패배에도 불구하고 난다버인은 반대자를 숙청하며 다시 아유타야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590년 4차 침공과 1592년 5차 침공에서도 나레수안 대왕에게 대패하였다. 오히려 나레수안 왕은 캄보디아를 복속시키고 하부 버마를 공격하며 기세를 올렸다.
난다버인에 대한 불만은 임계점에 달하여, 삐의 영주였던 난다버인의 아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따웅우, 치앙마이, 잉와의 영주도 독립을 선포하였다. 나레수안은 치앙마이를 복속시켰다. 따웅우의 영주는 라카인을 끌어들여 수도 버고를 점령하고 난다버인을 생포하였으며, 라카인군은 버고를 약탈했다. 나레수안이 버고를 공격했으나 폐허가 된 버고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난다버인의 항복을 받기 위해 따웅우-라카인군을 공격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4. 2. 냐웅얀 왕조의 등장과 재통일 노력
냐웅얀 왕(재위 1599~1605)은 아유타야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버마 지역에서 여러 군벌이 난립하던 시기에 등장했다. 그는 냐웅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잉와를 점령하고, 버고와 삐의 잔존 세력을 흡수하여 잉와에서 즉위했다. 냐웅얀은 버마 재통일을 위해 정복 전쟁을 벌였으나, 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그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따웅우 왕조를 '''냐웅얀 왕조'''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따웅우 지역이 독립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폐허가 된 버고는 정치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 왕국의 중심이 잉와 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냐웅얀의 아들 아나욱펫룬(재위 1605~1628)은 다시 통일 전쟁을 벌여 1610년까지 삐와 따웅우를 재통합하고, 드 브리투가 이끄는 포르투갈 세력을 공격하여 진압했다. 또한 라카인 왕이 포르투갈 잔여 세력을 섬멸하여, 버마에 세력권을 구축하려던 포르투갈의 시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2] 아나욱펫룬은 치앙마이를 다시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하고, 버고에 왕성을 다시 지어 부흥시키려 했으나, 아들과의 불륜 사건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따룬 왕(재위 1629~1648)은 이전 왕들과 달리 팽창 정책 대신 현상 유지를 목표로 했다. 라카인과 동맹을 맺고, 타이의 아유타야 왕국과 우호를 증진하며, 아유타야가 샨족의 반란을 자극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1634년 몬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수도를 하부의 버고에서 상부의 잉와로 옮겼다. 이후 네덜란드와 우호 관계를 맺어 국내외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2]
따룬은 내치에 힘써 짜욱세의 관개 시설을 개선하고 전국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세법을 명확히 하고, 지역별 인구와 농지 크기에 따른 세금 징수 체계를 확립했다. 또한 관습법을 정리하고 새로운 법전을 편찬했는데, 이 법전은 팔리어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읽을 수 있도록 버마어로 작성되었다. 따룬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불교 건축물 조성에 힘썼으며, 승려들이 계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여 불교 정화에 노력했다.
4. 3. 왕조의 쇠퇴와 멸망
삔들레(재위 1648~1661) 시기, 남명의 마지막 황제를 따르는 패잔병들이 북동부에서 약탈을 일삼았으나, 따웅우 왕조는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들은 삐(재위 1661~1672) 왕 때 청으로 인도되었지만, 왕의 권위는 이미 크게 약화된 뒤였다.[2] 민예쪼틴(재위 1673~1698) 왕은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아유타야 정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2]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에서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상황이 계속되었다.[2]결국 따웅우 왕조는 몬족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왕궁을 점령당하고 왕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으며 멸망했다.[2]
5. 통치 체제와 행정 개혁
따웅우 왕조의 따룬(재위 1629~1648)은 이전 왕들과 달리 팽창 정책 대신 현상 유지에 힘썼다. 1634년 몬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수도를 하부의 버고에서 상부의 잉와로 옮겼다. 라카인, 아유타야 왕국, 네덜란드와 우호 관계를 맺어 국내외 정치를 안정시켰다.
따룬은 짜욱세의 관개시설을 보수하고 전국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세법을 명확히 했다. 1635년부터 버마 왕실은 포괄적인 인구 조사를 시작하여 지방 인력과 세금 징수에 대한 접근을 통합했다.[3] 지역별 인구 수와 농토 크기에 따른 세금 징수 체계를 확립하고, 관습법을 정리하고 팔리어와 버마어로 작성된 새로운 법전을 편찬했다. 또한, 불교 건축물 조성과 승려들의 계율 준수를 통해 불교 정화에도 노력하였다.[2]
5. 1. 중앙 집권화 노력
따룬(재위 1629~1648)은 이전 왕들과 달리 팽창 정책 대신 현상 유지에 힘썼다. 그는 라카인과 동맹을 맺고, 타이의 아유타야 왕국과도 우호 관계를 증진했다. 1634년 몬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수도를 하부의 버고에서 상부의 잉와로 옮겼다. 이후 네덜란드와도 우호 관계를 맺어 국내외 정치를 안정시켰다.이러한 안정 속에서 따룬은 내치에 힘썼다. 짜욱세의 관개시설을 보수하여 농토를 넓히고 전국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세법을 명확히 하고, 지역별 인구 수와 농토 크기에 따른 세금 징수 체계를 확립했다. 또한 관습법을 정리하고 새로운 법전을 편찬했는데, 이 법전은 팔리어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읽을 수 있도록 버마어로도 작성되었다. 1635년부터 버마 왕실은 포괄적인 인구 조사를 시작하여 지방 인력과 세금 징수에 대한 접근을 통합했다.[3]
5. 2. 법전 편찬과 불교 장려
따룬(재위 1629~1648)은 내치에 주력하여 짜욱세의 관개시설을 개수하고 전국적인 인구조사를 시행하여 세법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관습법을 정비하고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법전은 이전과 달리 팔리어뿐만 아니라 버마어로도 작성되어 일반 민중도 읽을 수 있었다. 따룬은 신실한 불교 신자로, 불교 건축물 조성에 힘쓰고 승려들이 계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는 등 불교 정화에도 노력하였다.[2]6. 대외 관계
따웅우 왕조는 주변국 및 유럽 세력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명나라는 타이족 소규모 국가들을 간접 지배하고 있었는데, 1557년 치앙마이를 시작으로 여러 타이족 국가들이 따웅우 왕조에 복속되면서 양국 간 갈등이 발생했다. 1573년 명나라 군대가 따웅우 군대를 격퇴하고 점령지를 회복한 이후, 1598년까지 운남 변방을 둘러싸고 분쟁(명묘전쟁)이 지속되었다. 1644년 명나라 멸망 후,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가 따웅우 왕조로 피신했으나 1662년 청나라에 넘겨졌다. 1749년 청나라의 조공 요구에 1750년 육로로 조공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
타빈슈웨티 시기에는 포르투갈인의 철포대를 도입하여 아유타야 왕조 점령을 꾀했으나 실패했다.[2] 아나욱펫룬은 포르투갈 잔여 세력을 평정하여 버마 내 세력 확장을 저지했다. 민예쪼틴 왕은 아유타야 정벌에 실패하고,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 외교적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1] 결국 따웅우 왕조는 몬족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1]
6. 1. 주변국과의 관계
난다버인은 아유타야 왕국이 반기를 들자 1584년 대규모로 아유타야를 공격했다. 초기에는 따웅우군이 밀고 들어왔으나, 나레수안 대왕은 청야 전술을 사용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버마에 우호적이었던 속국 캄보디아의 후방 공격으로 아유타야군은 퇴각하는 따웅우군을 국경 밖으로 추격하지 못하였다.[1] 1585년과 1586년, 난다버인은 다시 아유타야를 공격했지만 두 번 모두 패배했다.[1] 연이은 전쟁 패배로 버마의 민심은 흉흉해졌으나, 난다버인은 반대자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다시 한번 아유타야 공격을 준비했다.[1] 그러나 1590년의 4차 침공과 1592년의 5차 침공에서도 나레수안 대왕에게 연이어 대패했다.[1] 오히려 나레수안 왕은 캄보디아를 공격해 복속시키고, 하부 버마를 공격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1]난다버인이 계속 전쟁을 하면서도 한 번도 이기지 못하자, 이에 대한 불만은 임계점에 달했다. 삐의 영주였던 난다버인의 아들이 삐 지역의 독립을 선포하고, 이어 따웅우, 치앙마이, 잉와의 영주도 독립을 선포하였다.[1] 또한, 이를 틈타 아유타야의 나레수안은 치앙마이를 복속시켰다.[1]
민예쪼틴 왕은 아유타야 정벌을 시도했지만 무참히 실패하여 왕권이 더욱 약화되었다.[2]
바인나웅 시대에 복속시켰던 인도 동부의 마니푸르와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국왕 뜨닌가누웨가 전사하는 등 주변 세력에게 지속적으로 영토를 잠식당했다.[2]
6. 2. 중국과의 관계
명나라는 타이족 소규모 국가들의 통치자들에게 토사로서 위소의 각급 지휘관 칭호를 부여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1557년 치앙마이(란나 왕국)를 시작으로 치앙센(란나 왕국), 치엔통(란상 왕국)[5], 십손판나(Chin Haw 왕국) 등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여러 소규모 타이족 국가들이 차례로 따웅우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따웅우 왕조의 팽창은 명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명나라는 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 1573년 유택(劉綎)과 등자룡(鄧子龍)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따웅우 군대를 격퇴하고 점령지를 회복했다. 이후 1598년까지 운남 변방을 둘러싸고 명나라와 따웅우 왕조 간의 분쟁(명묘전쟁)이 지속되었다.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자, 명나라 왕족들은 중국 남부에서 남명을 세워 저항했다. 1659년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청나라 군대에 밀려 운남에서 따웅우 왕조로 피신했다. 당시 따웅우 왕조는 피에 민 왕의 통치 시기였으며, 영력제와 황태자 주자훤(朱慈炫) 부자 등 일가를 수도 아바 근교에 유폐했다. 남명 측의 이정국(李定國) 군대가 이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화력에서 우세한 따웅우 군대에 패배했다.
1662년 오삼계(吳三桂)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영력제 인도를 요구하며 아바 근교에 접근하자, 따웅우 왕조는 영력제 부자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이후 따웅우 왕조는 청나라와 관계가 없었으나, 1749년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하자 1750년 육로로 조공 사절을 베이징에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1752년 베이징에 도착하여 건륭제의 환대를 받았다.
6. 3. 유럽 세력과의 관계
아나욱펫룬은 드 브리투의 세력을 평정하고 포르투갈계 잔여 세력을 라카인 왕이 섬멸하여, 버마에 세력권을 구축하려던 포르투갈의 시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타빈슈웨티 시기에는 포르투갈인의 철포대를 도입하여 아유타야 왕조 점령을 꾀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2]따룬 왕 이후 따웅우 왕조가 몰락하면서, 민예쪼틴 왕은 아유타야 정벌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왕권이 약화되었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세력에 대해서도 외교적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상황이 지속되었다.[1] 결국 따웅우 왕조는 몬족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1]
7. 따웅우 왕조 가계도
wikitext
참조
[1]
서적
Burmese Administrative Cycles: Anarchy and Conquest, c. 1580-1760
https://play.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1-01-18
[2]
학술지
Administration Under King Thalun
1968-12
[3]
서적
Southeast Asia in the Early Modern Era: Trade, Power, and Belief
https://muse.jhu.edu[...]
Cornell University Press
2020-06-03
[4]
문서
냐웅얀 왕조, 인와 왕조, 아와 왕조 등とも呼ばれる。
[5]
문서
현・루앙파방.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