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바웅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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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꼰바웅 왕조는 1752년 알라웅파야가 건국한 버마의 마지막 왕조이다. 따웅우 왕조를 계승하여 버마 전역을 재통일하고, 시암(태국), 라오스, 청나라 등 주변국과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했다. 보도파야 왕 시기에는 아라칸, 마니푸르, 아삼을 병합하여 최대 영토를 확보했지만, 서쪽으로의 확장은 영국과의 충돌을 야기하여 세 차례의 영국-버마 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1885년 제3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패배하여 1886년 영국령 인도에 병합되면서 멸망했다. 꼰바웅 왕조는 절대 군주제 하에 중앙 집권적 정부 체제를 갖추었고, 불교를 중심으로 사회가 운영되었으며, 엄격한 계급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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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웅우 왕조는 16세기 미얀마에서 시작되어 18세기 중반에 멸망한 왕조로, 16세기 초 민찌뇨에 의해 왕국의 기틀을 다지고 타빈슈웨티와 바인나웅 시기에 팽창하여 동남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쇠퇴하여 1752년 몬족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 꼰바웅 왕조 - 알라웅파야
알라웅파야는 18세기 중반 버마를 통일하고 꼰바웅 왕조를 창건한 왕으로, 몬족의 공격을 격퇴하고 주요 도시를 함락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국내 통일을 완료했으며, 아유타야 왕조 공격 실패 후 병사했고, 영국과의 관계 모색 노력은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로 이어졌다. - 꼰바웅 왕조 - 9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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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바웅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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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통용 명칭 | 꼰바웅 |
시대 | 근세 |
지위 | 왕국 또는 제국 |
건국 | 1752년 2월 29일 |
멸망 | 1885년 11월 29일 |
이전 | 떠웅우 왕조 복원된 한타와디 왕국 므락우 왕국 아홈 왕국 디마사 왕국 란나 아유타야 왕국 청나라 무굴 제국 |
이후 | 벵골 관구 영국령 인도 제국 버마 성 시암 왕국 치앙마이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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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국가 | စံရာတောင်ကျွန်းလုံးသူ့ (전체 남쪽 섬은 그의 것) (1805년경-1885년) |
수도 | 쉐보 (1752년–1760년) 사가잉 (1760년–1765년) 아바 (1765년–1783년, 1821년–1842년) 아마라푸라 (1783년–1821년, 1842년–1859년) 만달레이 (1859년–1885년) |
공용어 | 버마어 |
종교 | 테라바다 불교 (국교) |
통화 | 짯 (1852년부터) |
현재 국가 | 미얀마 태국 인도 라오스 중국 |
정치 | |
정치 체제 | 전제 군주제 |
국가 원수 | 군주 |
주요 지도자 | 얼라웅퍼야 (1752년–1760년, 초대) 신뷰신 (1763년–1776년) 보도파야 (1782년–1819년) 민돈 민 (1853년–1878년) 티보 민 (1878년–1885년, 마지막) |
입법부 | 흘룻다우 |
역사 | |
주요 사건 | 미얀마의 재통일 (1752년–1757년) 버마-시암 전쟁 (1759년–1812년, 1849년–1855년) 청-버마 전쟁 (1765년–1769년) 므락우 왕국 정복 (1785년) 영국-버마 전쟁 (1824년–1826년, 1852년, 1885년) |
통계 | |
면적 (1824년) | 794,000 km² |
인구 (1824년) | 3,000,000명 |
2. 역사
꼰바웅 왕조는 1752년 알라웅파야 왕이 모소보(현재의 슈에보)에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알라웅파야 왕은 쇠퇴한 따웅우 왕조를 대신하여 일어섰으며, 하부 버마의 몬족을 격퇴하고 옛 수도 인와(아바)를 탈환했다. 1757년에는 몬 왕국의 수도 바고(페구)를 점령하고, 1758년에는 샨 주와 마니푸르까지 원정하는 등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초기 꼰바웅 왕조는 영토 확장에 주력했는데, 1760년부터 시암(태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여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알라웅파야의 후계자들은 아유타야 시암을 멸망시키고 (1765-1767), 라오스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1765), 청나라의 네 차례 침략을 막아냈다 (1765-1769). 그러나 청나라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버마가 20년간 전쟁에 휘말린 틈을 타, 시암은 1771년까지 재통일되었고, 1776년까지 란나를 점령했다. 버마와 시암은 1855년까지 전쟁을 계속했으며, 수십 년간의 전투 끝에 테나세림(버마)과 란나(시암)를 서로 교환했다.
제3대 왕인 신뷰신 왕은 1766년에 아유타야 왕조를 정복했지만, 운남성 남부의 타이족 소국들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청나라 군대와 교전하게 되었다. 이후 휴전 협정을 맺고 청나라와 책봉 관계를 맺었다. 1769년에는 청나라 군대와 아바 근교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꼰바웅 왕조는 버마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청나라와 네 차례에 걸쳐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1770년, 신뷔신 왕은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청나라와의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청나라는 1788년 버마와의 무역을 재개하고 시장을 개방하면서 양국 간에는 비교적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꼰바웅 왕조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왕조를 보존하는 데 주력했다.
1782년, 보도파야 왕은 전왕을 살해하고 즉위하여 아라칸 왕국을 정복하고, 마니푸르 왕국과 아삼 왕국을 지배하에 두어 버마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실현했다. 1785년 아라칸 왕국을 정복하고, 1814년에는 마니푸르 왕국을, 1817년에는 아쌈 왕국을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쪽으로의 확장은 인도를 지배하는 영국의 이익과 충돌하며 영-버마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꼰바웅 왕조는 동쪽의 강력한 중국과 부흥하는 시암에 맞서 서쪽으로 영토 확장을 꾀했다. 보도파야(Bodawpaya)는 서쪽의 아라칸 왕국(1784년), 마니푸르(Manipur)(1814년), 아쌈(1817년)을 병합하여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와의 국경을 불명확하게 만들었다.[10] 꼰바웅 왕실은 제1차 영국-버마 전쟁(First Anglo-Burmese War) 발발 당시 영국 벵골 정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버마는 세 차례에 걸친 영-버마 전쟁에서 패배했고, 마지막 왕인 티보 왕은 봄베이에 유폐되었다. 1886년에 버마는 영국령 인도 제국에 병합되었다. 제1차 영국-버마 전쟁(First Anglo-Burmese War)(1824~1826년)에서 영국은 막대한 인적, 재정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버마군을 패배시켰다. 버마는 아라칸, 마니푸르, 아쌈, 테나세림을 영국에 할양하고 1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1885년, 왕과 왕족이 인도로 강제 퇴위 및 망명당하면서 꼰바웅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프랑스 인도차이나 통합에 경계심을 느낀 영국은 1885년 제3차 영국-버마 전쟁(Third Anglo-Burmese War)에서 버마의 나머지 지역을 합병했다. 이 합병은 1886년 1월 1일 영국 의회에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드리는 새해 선물로 발표되었다.
역대 버마 왕조와 마찬가지로 꼰바웅 왕조는 일부다처제를 채택했고, 건국자인 알라웅파야가 모든 왕자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으며, 연령 순으로 즉위한다는 원칙을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자녀들 간의 내분이 자주 발생하여 왕권의 쇠퇴를 초래했다. 민돈 왕의 왕비 중 한 명이었던 은 1878년 민돈의 죽음과 티보의 즉위에 따라 티보의 이복형제 약 80명을 처형하여 반란을 막았지만, 불과 7년 만에 왕국은 멸망했다. 이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지만, 그 권력은 수도와 비옥한 이라와디 강 유역 평원으로 제한되었다. 꼰바웅 통치자들은 가혹한 부과금을 부과했고 내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샨 주들이 꼰바웅 왕조에 조공을 바쳤지만, 몬 지역과는 달리 버마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은 적은 없었다.
2. 1. 건립
1752년, 훗날 알라웅파야로 알려진 인물이 꼰바웅 왕조를 건국했다. 그는 타웅우 왕조를 무너뜨린 복고 한타와디 왕국에 맞서 싸우며 세력을 키웠다.알라웅파야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1759년까지 버마 전역과 마니푸르를 재통일하고, 한타와디에 무기를 지원했던 프랑스와 영국 세력을 몰아냈다.
알라웅파야의 둘째 아들인 신뷔신은 형인 낭다우기(1760~1763)의 짧은 통치 이후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아버지의 팽창 정책을 이어받아 7년간의 전투 끝에 1767년 아유타야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2. 2. 영토 확장
1760년부터 꼰바웅 왕조는 시암과의 전쟁을 시작하여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770년, 알라웅파야의 후계자들은 아유타야 시암을 멸망시키고 (1765-1767), 라오스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1765), 청나라의 네 차례 침략을 막아냈다 (1765-1769).청나라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버마가 20년간 전쟁에 휘말린 틈을 타, 시암은 1771년까지 재통일되었고, 1776년까지 란나를 점령했다. 버마와 시암은 1855년까지 전쟁을 계속했으며, 수십 년간의 전투 끝에 테나세림(버마)과 란나(시암)를 서로 교환했다.
2. 3. 청나라와의 관계
18세기 후반, 꼰바웅 왕조는 버마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청나라와 네 차례에 걸쳐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1770년, 신뷔신 왕은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청나라와의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청나라는 1788년 버마와의 무역을 재개하고 시장을 개방하면서 양국 간에는 비교적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꼰바웅 왕조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왕조를 보존하는 데 주력했다.2. 4. 영국과의 전쟁과 멸망
꼰바웅 왕조는 동쪽의 강력한 중국과 부흥하는 시암에 맞서 서쪽으로 영토 확장을 꾀했다.보도파야(Bodawpaya)는 서쪽의 아라칸 왕국(1784년), 마니푸르(Manipur)(1814년), 아쌈(1817년)을 병합하여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와의 국경을 불명확하게 만들었다.[10] 꼰바웅 왕실은 제1차 영국-버마 전쟁(First Anglo-Burmese War) 발발 당시 영국 벵골 정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 지역에 무역 기지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꼰바웅 왕조는 균형 외교(Balancing (international relations))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811년 영국은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며, 왕조는 영국과 세 차례의 전쟁을 치르고 패배하여 결국 버마는 영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제1차 영국-버마 전쟁(First Anglo-Burmese War)(1824~1826년)에서 영국은 막대한 인적, 재정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버마군을 패배시켰다. 버마는 아라칸, 마니푸르, 아쌈, 테나세림을 영국에 할양하고 1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1837년, 바기다우 왕의 동생인 타라와디 민(Tharrawaddy Min)이 왕위를 찬탈하여 바기다우를 가택 연금하고, 왕비 메 누(Me Nu)와 그의 형제를 처형했다. 타라와디는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지 않았다.
1846년 왕위에 오른 파간 민(Pagan Min)은 날조된 혐의로 수천 명(일부 자료에 따르면 6,000명)에 달하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신하들을 처형했다.[1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과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1852년 제2차 영국-버마 전쟁(Second Anglo-Burmese War)이 발발했다. 파간은 그의 동생이자 진보적인 왕이었던 민돈 민(Mindon Min)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민돈이 후계자를 지명하기 전에 사망하자, 주목받지 못했던 왕자 팁보 민(Thibaw Min)이 민돈의 왕비 중 한 명인 신뱜마신(Hsinbyumashin)과 그녀의 딸 수파얄라트(Supayalat)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그의 시 "만달레이"에서 수파얄라트를 팁보의 왕비로 언급하며 그녀의 이름을 사용했다. 새로운 왕 팁보는 수파얄라트의 지휘 아래 왕위 계승 경쟁자들을 모두 학살했다. 이 학살은 왕비에 의해 자행되었다.
1885년, 왕과 왕족이 인도로 강제 퇴위 및 망명당하면서 꼰바웅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프랑스 인도차이나 통합에 경계심을 느낀 영국은 1885년 제3차 영국-버마 전쟁(Third Anglo-Burmese War)에서 버마의 나머지 지역을 합병했다. 이 합병은 1886년 1월 1일 영국 의회에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드리는 새해 선물로 발표되었다.
이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지만, 그 권력은 수도와 비옥한 이라와디 강 유역 평원으로 제한되었다. 꼰바웅 통치자들은 가혹한 부과금을 부과했고 내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샨 주들이 꼰바웅 왕조에 조공을 바쳤지만, 몬 지역과는 달리 버마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은 적은 없었다.
3. 주요 연표
1752년, 알웅파야 왕이 모쏘보에서 즉위하며 꼰바웅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753년에는 버마의 옛 수도인 아바를 탈환했다. 1757년에는 하부르마와 몬 왕국의 수도인 파고(페구)를 점령하였고, 1758년에는 샨 지역과 마니푸르 원정을 진행했다.
1759년,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를 공격했으나 철수했고, 1766년에는 신표신 왕이 아유타야를 함락시켰다. 1769년에는 청나라 군대와 아바 근교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며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었다.
1782년, 싱구 왕이 외유 중인 틈을 타 왕족 마웅마웅이 쿠데타를 일으켜 즉위했으나, 수일 후 보도파야 왕이 마웅마웅 왕과 싱구 왕을 살해하고 아마라푸라에 새로운 왕도를 건설했다. 1785년에는 아라칸 왕국을 정복했다.
1814년에는 마니푸르 왕국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1817년에는 아쌈 왕국을 지배했다. 1824년부터 1826년까지 제1차 영국-버마 전쟁이 발발하여, 1826년 얀다보 조약으로 아라칸과 테나세림을 할양하고 아쌈과 마니푸르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했다.
1852년에는 제2차 영국-버마 전쟁이 일어나 영국군이 하부르마를 점령했다. 1885년에는 제3차 영국-버마 전쟁으로 왕도 만달레이가 함락되었고, 1886년 영국은 상부르마를 영국령 인도에 병합했다.
꼰바웅 왕조의 정부는 따웅우 왕조 시대에 확립된 방식을 따라 여러 왕실 자문 기관에 의해 중앙 집권적으로 운영되었다. 흘타우(လွှတ်တော်)는 입법, 행정, 사법 기능을 수행하며 왕이 위임한 권한으로 왕실 정부를 운영했다.
행정 구역은 주로 나뉘었고, 왕국의 주변 해안 주는 총독이 다스렸다. 왕국의 변방에 있는 외부 조공 봉토들은 자치적이었고 명목상으로 왕이 다스렸다.
꼰바웅 왕조의 군사 조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 국군 및 버마 왕국군 문서를 참고하라.
4. 정치
꼰바웅 왕조는 절대 군주제 국가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왕권은 만왕의 왕인 차크라바르틴을 지향하며, 만달라 또는 잠부디파 우주 내 권력 영역 구축을 목표로 했다. 흰 코끼리 소유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이를 통해 왕은 '흰 코끼리의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현실적인 문제로는 몬, 타이 샨, 마니푸리 인근 왕국들의 침략 위협과 내부 반란 가능성이 존재했다.
플타우(လွှတ်တော်)는 입법, 사법 기능을 수행하며 국왕의 위임을 받아 왕정을 운영했다. 뱌다이크(ဗြဲတိုက်)는 궁정 내정을 관할하는 추밀원 역할을 수행하며, 국왕과 왕실 기관 간의 소통을 담당했다. 쉐다이크(ရွှေတိုက်)는 왕실 보물 창고로서 국가의 귀금속과 보물을 보관하고, 주(မြို့)의 공문서 보관, 족보 및 인구조사 보고서 등 다양한 기록을 유지했다.
행정 구역은 ''myo''(묘, မြို့)라 불리는 주로 나뉘었고, 주지사인 ''Myosa''(미오사, မြို့စား)는 왕족이나 흘타우의 고위 관료가 임명되었다. 주지사들은 왕실 정부에 세수를 징수하여 납부하고 남은 금액을 가졌다. 각 주는 도시와 자치구로 나뉘었는데, 도시 역시 ''myo''(묘, မြို့)라 불리며 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도시는 도시 수장인 ''Myo thugyi''(묘 투지, မြို့သူကြီး) 또는 도시 관리자인 ''Myo Ok''(묘 오크, မြို့အုပ်)가 다스렸다. ''taik''(타이크, တိုက်)이라 불리는 자치구는 여러 마을인 ''ywa''(으와, ရွာ)를 포함했고, 자치구 수장인 ''Taik thugyi''(타이크 투지, တိုက်သူကြီး)와 마을 수장인 ''Ywa thugyi''(으와 투지, ရွာသူကြီး)가 각각 다스렸다.
아라칸, 버마, 마르타반, 타보이와 같은 해안 지역의 주는 왕이 임명한 총독인 ''Myowun''(묘운, မြို့ဝန်)이 다스렸으며, 그는 행정, 사법, 재정, 군사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주 의회(''myoyon'')는 읍 서기(''myo saye''), 왕명 수령인(''nakhandaw''), 전쟁 지휘관(''sitke''), 간수(''htaunghmu''), 구역장(''ayatgaung''), 문지기(''dagahmu'')로 구성되었다. 버마의 총독은 세무관(''akhunwun''), 세관장(''akaukwun''), 항만 관리관(''yewun'') 등 여러 고위 관리의 보좌를 받았다.
왕국 변방의 조공 봉토들은 자치적으로 운영되었고, 왕은 명목상으로만 다스렸다. 샨, 팔라웅, 카친, 마니푸리 공국 등이 이에 해당하며, 이들 봉토의 왕자들은 정기적으로 꼰바웅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gadaw pwedaw'' 의식을 통해). 또한 왕실 특권을 부여받고 ''sawbwa''(사우브와)로 지정되었다. 특히 샨 ''sawbwa'' 가문은 버마 귀족과 혼인하여 꼰바웅 궁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꼰바웅 왕조의 군사 조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 국군 문서를 참고하라. 또한 버마 왕국군 문서에서도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4. 1. 정부 기구
꼰바웅 왕조의 정부는 따웅우 왕조 시대에 확립된 방식을 따라 여러 왕실 자문 기관에 의해 중앙 집권적으로 운영되었다.흘타우(လွှတ်တော်)는 "왕실 해방의 장소"라는 의미로, 입법, 행정, 사법 기능을 수행하며 왕이 위임한 권한으로 왕실 정부를 운영했다. 흘타우의 회의는 매일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열렸다. 흘타우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의회 수장 – 왕, 왕세자 또는 흘타우의 명목상 수장으로서 의장직을 수행하는 고위 왕족.
- ''운신다우'' (ဝန်ရှင်တော်, 총리) – 흘타우의 수상으로서, 민돈 민 통치 시대에 설립된 직책이며, 킨운 민이 우 카웅이 가장 유명하게 역임했다.
- 네 명의 ''웅이'' (ဝန်ကြီး, 장관) – 흘타우의 행정 업무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왕국의 행정에 대한 공동 책임을 공유했다.
- 네 명의 ''운다욱'' (ဝန်ထောက်, 차관) – ''웅이''의 부관으로 일했다.
- ''민주기 운'' (မြင်းဇူးကြီးဝန်, 문자 그대로 "기병 연대 장관") – 최고 정규군 직책으로 타트마다를 감독했다.
- ''아티 운'' (အသည်ဝန်, 문자 그대로 "아티 장관") – 전시에 ''아티''라고 불리는 조세 납세 농민들을 동원하고, 징용 노동력 자원을 할당하는 책임을 맡았다.
비에다이크(ဗြဲတိုက်)는 궁정 내부 문제를 처리하는 추밀원 역할을 수행했으며, 왕과 다른 왕실 기관 간의 중개자 역할도 했다. 비에다이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여덟 명의 ''아트윈운'' (အတွင်းဝန်, 비슷한 말로 '내무 장관') – 흘타우의 업무를 왕에게 전달하고, 왕실과 관련된 일반적인 업무의 내부 거래를 관리했다.
- ''탄다우진'' (သံတော်ဆင့်, "전령") – 서기 업무를 수행하고 왕의 접견에 참석하여 왕의 명령을 기록하고 흘타우에 전달하여 기록했다.
- ''시미툰무'' (ဆီမီးထွန်းမှူး, 문자 그대로 "등불 켜는 사람") – 궁궐에서 자는 모든 사람의 명단을 작성했다.
- ''테인데인얀무'' (ထိန်းသိမ်းရေးမှူး, "왕실 임명 관리인") – 궁궐 가구, 드레이프 및 기타 용품 관리와 같은 잡무를 수행했다.
슈웨다이크(ရွှေတိုက်)는 왕실 금고였으며, 국가의 귀금속과 보물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또한 슈웨다이크는 국가 기록 보관소 역할을 수행하고, 세습 관리들의 상세한 계보와 인구조사 보고서를 포함한 다양한 기록을 유지했다. 슈웨다이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슈웨다이크 운'' (ရွှေတိုက်ဝန်) – 재무장관
- ''슈웨다이크 사우'' (ရွှေတိုက်စော) – 재무부 총독
- ''슈웨다이크 꺄트'' (ရွှေတိုက်ကြပ်) – 감독관
- ''슈웨다이크 사예'' (ရွှေတိုက်စာရေး) – 재무부 서기
- ''슈웨다이크 타우카잉'' (ရွှေတိုက်သော့ကိုင်) – 왕실 금고 열쇠 관리인
각 왕실 기관에는 일상 업무를 담당하는 많은 중하급 관리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낙한도(Nakhandaw, နားခံတော်) – 왕과 흘타우 사이의 의사소통을 담당했다. 또한 왕실 기관들 사이, 그리고 왕과 장관들 사이의 중개 역할을 했다. 보고서를 수집, 분류, 해석하고, 공식 모임에서 선포문을 낭독하고, 지방 의회에 명령을 전달했다.
- 사예다우기(Sayedawgyi, စာရေးတော်ကြี้); 고위 서기관 – 행정 업무와 재판 예비 조사를 수행했다.
- 사예(Saye, စာရေး); 서기
- 아메인다우기(Ameindawgyi, အမိန့်တော်ကြီး); 칙령 작성관 – 필요한 예비 단계가 완료된 후 왕실 명령을 작성하고 발표했다.
- 아톤사예(Athonsaye, အသုံးစာရေး); 공사 서기 – 모든 공공 건물의 건설 및 수리를 감독했다.
- 아흐마다우예(Ahmadawye, အမှတ်တော်ကြီး); 명령 기록관 – 흘타우가 발행할 명령서와 편지를 작성했다.
- 아웨야욱(Awayyauk, အဝေးရောက်); 원거리 도착 서류 담당관 – 장관에게 제출하기 전에 원거리에서 온 편지를 받고 읽었다.
- 탄도우간(Thandawgan, သံတော်ခံ) – 왕을 대신하여 편지를 받는 의전 담당관이었다.
그리고 3개의 의전 담당관 등급이 있었다.
# 렛사웅사예(Letsaungsaye, လက်ဆောင်စာရေး); 하사품 서기 – 왕실 행사에서 왕에게 바쳐진 헌물 목록을 읽었다.
# 욘조(Yonzaw, ယောင်္ကျား); 의전장 – 왕실 행사와 왕의 접견을 주관했다.
# 티싸다우게(Thissadawge, သစ္စာတော်ကြီး); 대맹세 기록관 – 왕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충성 맹세를 집행했다.
4. 2. 행정 구역
꼰바웅 왕조는 ''myo''(묘, 미얀마어: မြို့)라 불리는 주로 나뉘었다. 이 주들은 ''Myosa''(미오사, 미얀마어: မြို့စား)라 불리는 주지사가 다스렸는데, 이들은 왕족이나 흘타우의 고위 관료였다. 주지사들은 왕실 정부에 세수를 징수하여 정해진 할부로 왕실 재무부에 납부하고 남은 것은 자신들이 보유했다. 각 주는 다시 도시와 자치구로 나뉘었다. 도시 또한 ''myo''(묘, 미얀마어: မြို့)라고 불렸는데, 이는 주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Myo thugyi''(묘 투지, 미얀마어: မြို့သူကြီး)라 불리는 도시 수장 또는 ''Myo Ok''(묘 오크, 미얀마어: မြို့အုပ်)라 불리는 도시 관리자가 다스렸다. ''taik''(타이크, 미얀마어: တိုက်)이라 불리는 자치구는 ''ywa''(으와, 미얀마어: ရွာ)라 불리는 여러 마을을 포함했다. 자치구는 ''Taik thugyi''(타이크 투지, 미얀마어: တိုက်သူကြီး)라 불리는 자치구 수장이, 마을은 ''Ywa thugyi''(으와 투지, 미얀마어: ရွာသူကြီး)라 불리는 마을 수장이 다스렸다.왕국의 주변 해안 주인 아라칸, 버마, 마르타반, 타보이(Tavoy)는 왕이 임명한 ''Myowun''(묘운, 미얀마어: မြို့ဝန်)이라 불리는 총독이 다스렸는데, 총독은 행정, 사법, 재정, 군사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주 의회(''myoyon'')는 ''myo saye''(묘 사예, 미얀마어: မြို့စာရေး)(읍 서기), ''nakhandaw''(나칸다우, 미얀마어: နာခံတော်)(왕명 수령인), ''sitke''(시트케, 미얀마어: စစ်ကဲ)(전쟁 지휘관), ''htaunghmu''(흐타웅흐무, 미얀마어: ထောင်မှူး)(간수), ''ayatgaung''(아야트가웅, 미얀마어: အရံခေါင်း)(구역장), ''dagahmu''(다가흐무, 미얀마어: တံခါးမှူး)(문지기)로 구성되었다. 버마의 총독은 ''akhunwun''(아쿤운, 미얀마어: အခွန်ဝန်)(세무관), ''akaukwun''(아카우크운, 미얀마어: အကောက်ဝန်)(세관장), ''yewun''(예운, 미얀마어: ရေဝန်)(항만 관리관) 등 여러 고위 관리의 보좌를 받았다.
왕국의 변방에 있는 외부의 조공 봉토들은 실제로는 자치적이었고 명목상으로 왕이 다스렸다. 여기에는 샨, 팔라웅, 카친, 마니푸리 공국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봉토의 조공 왕자들은 정기적으로 꼰바웅 왕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gadaw pwedaw''(가다우 프웨다우, 미얀마어: ကန်တော့ပွဲ)라 불리는 의식을 통해). 그리고 왕실 특권을 부여받고 ''sawbwa''(사우브와, 미얀마어: စော်ဘွား)(샨어 saopha, '하늘의 군주'에서 유래)로 지정되었다. 특히 샨 ''sawbwa''의 가문은 정기적으로 버마 귀족과 혼인하여 꼰바웅 궁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4. 3. 군사
꼰바웅 왕조의 군사 조직에 대해서는 미얀마 국군 문서를 참고하라.자세한 내용은 버마 왕국군 문서를 참고하라.
5. 사회와 문화
꼰바웅 왕조 시대의 사회는 불교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토착 신앙과 힌두교의 영향 또한 존재했다. 브라만들은 왕실 의례에서 힌두교 의식을 주관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왕실은 거대한 가족을 형성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지만,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왕실에서는 엄격한 의례와 관습이 존재했으며, 이는 왕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왕조는 백성들의 삶과 소비를 규정하는 사치 금지법인 "yazagaing"을 시행했다. 이 법은 주택 양식부터 의복, 장례식, 심지어 화법까지 규제했는데, 특히 왕궁의 사치법은 매우 엄격했다. 예를 들어, 일반 백성들은 돌이나 벽돌로 집을 짓는 것이 금지되었고, 주택 위에 허용되는 장식용 첨탑 지붕(피야타트(pyatthat))의 층수도 규제되었다. 왕궁과 사찰은 9층까지 허용되었고, 강력한 조공 왕자(sawbwa)의 경우 최대 7층까지 허용되었다. 의복과 장식에 있어서도 공작(peacock) 휘장이 있는 디자인은 왕족에게만, 긴 꼬리가 달린 재킷은 관리들에게만 허용되는 등 철저한 규제가 이루어졌다.
왕실 가족 구성원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성대한 의례가 펼쳐졌다. 브라만교 사제들은 왕궁 건설, 궁궐 봉헌식, 궁중 경작 의식, 작명식, 첫 쌀 먹이기 의식, 요람 의식, 압히세카 즉위식, 띤잔 축제 참여 등 길조로운 의식들을 주관했다. 국왕 재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궁중 의식은 여러 차례 거행되는 봉헌 의식(abhiseka)이었다. 이 의식은 국왕의 종교와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거행되었다.
버마 문학과 연극은 높은 읽고 쓰는 능력 덕분에 발전했다. 특히 1765년-1767년 미얀마-시암 전쟁의 결과로 아유타야에서 잡혀온 시암 포로들은 미얀마 연극과 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야마 자타우와 에나웅 자타우와 같은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17] 꼰바웅 왕조 시대에는 유럽 회화 기법이 미얀마 회화 양식에 더욱 확립되었고, 사찰 그림에 그림자와 원근법이 사용되었다.[17]
또한, 꼰바웅 시대에는 만달레이와 같은 계획 도시 건설을 통해 도시 계획이 절정에 달했다. 알웅파야는 주요 방어 시설을 갖춘 많은 작은 요새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그중 하나인 양곤은 1755년 요새이자 항구 도시로 건설되었다. 이 시대에는 회반죽 기술의 발전과 함께 탑과 사찰이 증가했다.[17]
5. 1. 사회 계층
꼰바웅 왕조 시대 버마 사회는 계급 구분이 엄격했다. 힌두교의 바르나 제도를 본떠, 사회는 출신에 따라 네 가지 계급으로 나뉘었다.- 지배 계급(မင်းမျိုး) 또는 크샤트리아(ခတ္တိယ)
- 사제 계급(ပုဏ္ဏားမျိုး) 또는 브라만(ဗြာဟ္မဏ)
- 상인 계급(သူဌေးမျိုး) 또는 바이샤(ဝေဿ)
- 평민 계급(ဆင်းရဲသားမျိုး) 또는 수드라(သုဒ္ဒ)
사회는 자유민과 노예(ကျွန်မျိုး)를 구분했는데, 노예는 채무자 또는 전쟁 포로(아라칸 왕국, 아유타야 왕국, 마니푸르 등에서 끌려온 사람들)였지만 네 계급 중 하나에 속할 수 있었다. 또한 납세자와 비납세자를 구분했는데, 납세하는 평민은 아티(အသည်)라고 불렸고, 왕실이나 정부에 소속된 비납세자는 아무탄(အမှုထမ်း)이라고 불렸다.
세습 직위를 제외하고 군대(မင်းမှုထမ်း)에 들어가거나 사원의 불교 승가에 들어가는 것이 주요 출세 경로였다. 왕실에는 많은 수의 시종과 환관이 있었고, 푸냐(ပုဏ္ဏား)라 불리는 제사장과 점성술사, 기도 의식 전문가들이 있었다.
5. 2. 사치 금지법
꼰바웅 왕조는 백성들의 삶과 소비를 규정하는 사치 금지법인 "yazagaing"을 시행했다. 이 법은 주택 양식부터 사회적 지위에 맞는 의복, 장례식, 관, 사용하는 화법까지 모든 것을 규제했다. 특히 왕궁의 사치법은 매우 엄격했다.예를 들어, 일반 백성들은 돌이나 벽돌로 집을 짓는 것이 금지되었고, 주택 위에 허용되는 장식용 첨탑 지붕(피야타트(pyatthat))의 층수도 규제되었다. 왕궁의 대회의장, 왕궁의 4개의 주요 관문, 그리고 사찰은 9층까지 허용되었고, 강력한 조공 왕자(sawbwa)의 경우 최대 7층까지 허용되었다.
사치법은 5가지 종류의 장례식과 그에 따른 의례를 규정했는데, 왕, 왕족, 장관직을 가진 자, 상인과 작위를 가진 자, 그리고 농민(사후 의례를 받지 않음)으로 구분되었다.
의복과 장식에 관한 규정도 철저히 준수되었다. 공작(peacock) 휘장이 있는 디자인은 왕족에게만 허용되었고, 긴 꼬리가 달린 허리까지 내려오는 재킷은 관리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벨벳(Velvet) 샌들은 왕족만이 신을 수 있었고, 금(Gold) 발찌는 왕족 자녀만 착용할 수 있었다. 비단(Silk) 천에 금과 은으로 꽃과 동물 그림이 브로케이드(brocade)된 것은 왕족과 장관의 아내들만 착용할 수 있었다. 보석과 귀금속 장식, 주사(vermilion) 염료인 진사(cinnabar)로 만든 ''hinthapada'' 사용도 규제되었다.
5. 3. 종교
꼰바웅 왕조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사회였으며, 왕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하지만 토착 신앙과 힌두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브라만들은 왕실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힌두교 의식을 주관했다.꼰바웅 왕조 사회는 왕을 중심으로 거대한 왕실 가족을 형성하여 왕조의 권력 기반이 되었지만,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하여 왕실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라우카 뷰하 꺄》( လောကဗျူဟာကျမ်းmy), 《인용 사단》( အင်းယုံစာတန်းmy)으로도 알려진 책은 미얀마 왕실 의례와 관습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1] 이 책은 꼰바웅 왕조의 창시자 알라웅파야 통치 시대에 인용 웅기 티리 우자나가 저술했다.[2]
꼰바웅 왕조의 왕실 궁중 생활은 규정된 의식과 의례뿐만 아니라 왕조의 발전과 함께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로 구성되었다. 많은 의례들은 힌두교 사상이 현지화되어 미얀마와 불교의 기존 전통에 적용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의례들은 꼰바웅 왕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꼰바웅 왕들은 마하 삼마타를 통해 샤크야족(고타마 붓다가 속한 족속)과 비자야 왕가로부터 계승되었다고 주장했다.[12] 왕실 궁중 생활은 엄격하게 규제되었으며, 내시들은 왕실 가족과 궁녀들을 감독했다.[3] 낮은 계급의 왕비와 첩들은 주요 궁전 건물에 거주할 수 없었다.[3]
일반적으로 미얀마어로 ''폰나''( ပုဏ္ဏားmy)로 알려진 브라만들은 꼰바웅 궁정에서 의례, 점성술, 힌두교 신들에게 대한 헌신적인 의식을 담당하는 전문가였다.[4] 그들은 왕을 위한 의례, 즉위식 및 ''압히세카''( ဗိဿိတ်my)라고 불리는 세정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5] 궁정 브라만( ပုရောဟိတ်my, ''파로히타'')은 궁정의 일상생활에 깊이 관여하여 다양한 문제에 대해 왕에게 조언하고 상담했다.[6] 브라만들 사이의 사회적 계급은 그들의 각각의 의무와 기능을 결정했다.[6] ''후야''( ဟူးရားmy)라고 불리는 점성술사 브라만들은 새로운 수도, 새로운 궁전, 탑의 기초를 놓는 길일, 왕실 거처의 취임, 임명 발표, 장소를 떠나는 것, 탑 방문 또는 군사 작전 개시 등의 길일을 결정하는 점성술 계산을 담당했다.[7] 또한 종교력을 수립하고, 역서를 작성하고, 다가오는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고, 음력 주기에 따라 주요 축제일을 식별하고, 길일과 날짜를 전달했다.[7] ''압히세카'' 의식을 수행한 특별한 브라만들은 ''핀냐 시''( ပညာရှိmy)로 선발되어 왕실 고문으로 임명되었다.[8]
꼰바웅 왕조의 브라만들은 토착 정령(낫)과 힌두교 신들에게 다양한 대규모 종교 의식을 정기적으로 거행했다.[9] 가장 중요한 숭배 의식은 다음과 같다.
- 가네샤(미얀마어: 마하 페인네) – 미얀마 달력 11월에서 12월에 해당하는 나다우 달에는 가네샤를 위한 축제가 열렸다. 왕실 농장에서 처음 수확한 곡식은 가네샤에게 제물로 바쳐졌다.[10] 공작새를 탄 가네샤는 의식 행렬에 참여하여 왕 앞에 왔고, 왕은 존경을 표한 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 조각과 옷을 나눠주었다.[10][11] 가네샤는 특히 코끼리의 수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왕실 의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13]
- 파야 코 주 (ဘုရားကိုးဆူmy, 문자 그대로 "아홉 신") – 이것은 켓타라 브라만들이 행한 종교 의식이었다. 언급된 신들은 불교 신인 부처와 8명의 아라한이거나, 찬디와 가네샤를 포함한 5명의 힌두교 신과 4명의 낫을 포함한 비불교 신들이었다.[14]
- 스칸다 (Sakanta or Sakanta Tattikamy) – 보도파야 왕은 바라나시 출신 브라만의 조언에 따라 스칸다를 기리는 연례 의식 행렬을 가네샤를 기리는 의식 행렬에서 개편했다. 이 행렬은 타바웅 달에 열렸다.[15] 스칸다는 치트라발리-마라라고 불리는 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15]
- 힌두교 신들: 찬디(Canni), 인드라(타기야민), 시바, 비슈누, 아수라 및 4명의 로카팔라 – 이 신들은 수도, 왕궁 또는 사원 입구의 특정 장소에 배치되어 악을 막았다.[16]
- 다른 정령들 (낫): 행성, 하늘, 태양, 달, 혼(불의 정령)[17][18]
꼰바웅 왕조의 왕들, 특히 보도파야 치세의 승려 및 속인 엘리트들은 수담마 개혁으로 알려진 미얀마 지식 생활과 승려 조직 및 관행의 주요 개혁을 시작했다. 이는 미얀마 최초의 국가 역사로 이어졌다.[19]
5. 4. 왕실 의례
왕실 가족 구성원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성대한 의례가 펼쳐졌다. 브라만교 사제들은 왕궁 건설, 궁궐 봉헌식, 궁중 경작 의식, 작명식, 첫 쌀 먹이기 의식, 요람 의식, 아비세카 즉위식, 띤잔 축제 참여 등 길조로운 의식들을 주관했다. 띤잔 기간에는 8명의 브라만교 사제들이 8명의 불교 승려가 축복한 물을 궁궐 경내, 흘타우, 여러 법정, 주요 성문, 수도 네 귀퉁이에 뿌렸다. 왕은 요람 의식부터 귀뚫기 의식, 결혼식, 장례식까지 왕실 가족 구성원과 관련된 여러 의식에 참석했다.왕궁 내 특정 건물들은 다양한 의례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대조회장은 어린 왕자들이 신비우 성인식을 치르고 파바자 수행승으로 서임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또한 어린 왕자들이 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묶는 곳이기도 했다. 함난다우기(거울의 궁전)에서는 정교한 버마 설날 축제가 열렸는데, 설날 3일째에 왕과 왕비는 옥좌에 앉아 차가운 향수에 적신 찐 쌀인 띤잔 쌀을 먹었다. 음악, 연극 공연 및 연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국왕 재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궁중 의식은 여러 차례 거행되는 봉헌 의식(abhiseka)이었다. 이 의식은 국왕의 종교와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거행되었다. 모든 abhiseka 의식에는 소라 껍데기에서 물을 붓는 행위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국왕에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치고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겪을 수 있는 고난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세정 의식은 자격 있는 8명의 엘리트 브라만 승려 집단의 책임이었으며, 그들은 의식 전에 순결을 유지해야 했다. 또 다른 브라만 승려 집단은 왕세자의 봉헌식을 담당했다.
총 14가지 종류의 abhiseka 의식이 있었다.
# Rājabhiseka (ရာဇဘိသိက်my) – 국왕의 즉위식
# Muddhabhiseka (မုဒ္ဓဘိသိက်my) – 불교의 가르침(Sasana) 전파를 위한 국왕의 서약; 즉위 5년 후 거행
# Uparājabhiseka (ဥပရာဇဘိသေကmy) – 왕세자 책봉식
# Mahesībhiseka (မဟေသီဘိသေကmy) – 왕비 책봉식
# Maṅgalabhiseka (မင်္ဂလာဘိသေကmy) – 흰 코끼리 소유 기념
# Siriyabhiseka (သီရိယဘိသေကmy) – 국왕의 영광을 새롭게 하기 위해 거행
# Āyudighabhiseka (အာယုဒီဃဘိသေကmy) – 장수를 얻기 위해 거행
# Jayabhiseka (ဇေယျာဘိသေကmy) – 전쟁 승리와 성공 보장
# Mahābhiseka (မဟာဘိသေကmy) – 경제적 번영 증진, 즉위 7년 후 거행
# Sakalabhiseka (သကလာဘိသေကmy) – 왕국 평화 보장
# Vijayabhiseka (ဝိဇယဘိသေကmy) – 적 정복
# Mandabhiseka (Manda beittheitmy) – 왕족 출신 왕비와 결혼
# Singabhiseka (Thenga beittheitmy) – 국왕이 법 준수 재확약, 국가 통치 및 행정에 대한 완전한 권한 부여
''라자비세카'' (ရာဇဘိသိက်my) 즉, 브라만이 주관하는 국왕의 즉위식은 왕실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일반적으로 미얀마력 카손(Kason)월에 거행되었지만, 반드시 통치 초기가 아니더라도 시행될 수 있었다. 보도파야(Bodawpaya)는 아버지처럼 왕국 행정권을 장악하고 종교 기관을 정화한 후에야 즉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 의식의 중요한 요소는 즉위식 물을 가져오는 것, 의식적인 목욕, 기름 부음, 국왕의 맹세 등이다.
의식을 위해 세 개의 의식용 파빌리온 (사자 왕좌; 코끼리 왕좌; 공작 왕좌)이 특별히 지정된 땅 (공작 정원)에 건설되었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불교 빠릿따(paritta)가 염송되었다. 상인과 브라만을 포함한 고위 인사들의 딸들이 강 중간에서 즉위식 물을 구하는 임무를 맡았고, 물은 각 파빌리온에 놓였다.
길일이 되면 국왕은 브라흐마(Brahma)의 복장을 하고 왕비는 데발로카(devaloka)의 왕비 복장을 했다. 왕과 왕비는 흰 말이나 흰 코끼리를 타고 행렬을 이루어 파빌리온으로 향했다. 국왕은 먼저 마라사나 파빌리온에서 몸을 씻고, 가자사나 파빌리온에서 머리를 씻었다. 그런 다음 사자 왕좌 파빌리온으로 들어가 연꽃을 닮은, 무화과나무로 만들고 금박을 입힌 왕좌에 앉았다. 브라만들은 그에게 다섯 가지 즉위식 왕관을 전달했다.
# 흰 우산 (ထီးဖြူmy, ''hti byu'')
# 볏이 달린 머리 장식 모양의 왕관 (မကိုဋ်my, ''magaik'')
# 홀 (သန်လျက်my, ''thanlyet'')
# 샌들 (ခြေနင်းmy, ''che nin'')
# 야크 꼬리로 만든 채찍(Fly-whisk) (သားမြီးယပ်my, ''thamyi yat'')
왕좌에서 여덟 명의 공주가 특별히 구한 물을 그의 머리 위에 붓는 방식으로 국왕에게 기름을 부었고, 각자 보석으로 장식된 소라 껍데기를 사용하여 공정하게 통치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그런 다음 브라만들은 국왕의 머리 위에 흰 우산(white umbrella)을 들었다. 이 기름 부음 의식은 순수 혈통의 브라만 여덟 명과 상인 여덟 명에 의해 반복되었다. 그 후 국왕은 붓다가 태어날 때 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으뜸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다!" 그리고 금 항아리에서 물을 붓는 의식을 행했다. 의식은 국왕이 삼보(Three Jewels)에 귀의하는 것으로 끝났다.
즉위식의 일환으로 죄수들이 석방되었다. 국왕과 그의 행렬은 궁궐로 돌아왔고, 의식용 파빌리온은 해체되어 강에 버려졌다. 의식 7일 후, 국왕과 왕족들은 금으로 장식된 국가용 배를 타고 도시 해자를 순회하는 개막 행렬을 벌였고, 축제 음악과 관중들로 북적였다.
''우파라자비세카''(ဥပရာဇဘိသေကmy), 즉 버마어로 ''아인셰 민''(အိမ်ရှေ့မင်းmy)이라고 하는 왕세자 책봉식은 왕의 통치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의례 중 하나였다. 책봉식은 ''비다이크''(추밀원)에서 거행되었다. 왕세자는 책봉을 받고, 봉토와 휘장을 받았으며, 많은 선물을 받았다. 왕은 또한 왕세자의 공적 및 사적 문제를 감독할 가신들을 공식적으로 임명했다. 그 후, 왕세자는 새로운 궁궐로 행렬을 이루어 새 지위에 걸맞게 되었다. 새로운 왕의 왕비가 될 특별히 단련된 공주와의 왕실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레툰 민갈라'' (လယ်ထွန်မင်္ဂလာmy) 즉 왕궁 경작 의식은 왕궁 동쪽의 왕실 경작지에서 쟁기를 이용하여 땅을 갈아 1년 동안 충분한 강우를 확보하기 위해 비를 관장한다고 믿어지는 모크하웅 낫(Moekhaung Nat)을 달래는 연례 행사였다. 이 의식은 고타마 붓다의 삶의 한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수도다나 왕이 왕실 경작지를 갈던 중, 어린 붓다는 일어서서 결가부좌하고 자바플럼 나무 그늘 아래서 명상을 시작했다.
이 의식은 6월 초 남서 계절풍이 시작될 무렵에 거행되었다. 의식을 위해 왕은 궁정 예복(공작 문양이 있는 파소', 보석이 박힌 긴 비단 외투 또는 튜닉, 첨탑 모양의 왕관, 가슴에 걸친 24줄의 살웨, 이마에 금판이나 장식판)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레야''(왕실 경작지)로 행렬을 했다. 특별히 지정된 토지인 ''레다우기''(ledawgyi)에서 흰색의 소가 금박으로 덮인 왕실 쟁기에 매달려 장관, 왕자, 왕이 경작할 준비를 했다. 소는 금색과 진홍색 띠로 장식되었고, 고삐는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었으며, 금으로 도금된 뿔에는 무거운 금색 술이 달려 있었다. 왕이 경작을 시작했고, 자신, 장관, 왕자들과 함께 의무를 공유했다. ''레다우기''의 의식적인 경작이 끝난 후, 왕궁 전역에서 축제가 벌어졌다.
가다우 알현식은 1년에 세 차례 대조전에서 열리는 성대한 의식으로, 속국 왕족과 신하들은 조공을 바치고 꼰바웅 왕조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의식은 다음 세 번 열렸다.
- ''Hnit Thit Gadaw'' (နှစ်သစ်ကန်တော့my) – 버마의 설날(4월) 시작
- ''Wa-win Gadaw'' (ဝါဝင်ကန်တော့my) – 불교 사순절(6월 또는 7월) 시작 – 왕족, 장관, 시 관리들의 참석이 요구됨
- ''Wa-gyut Gadaw'' (ဝါကျွတ်ကန်တော့my) – 불교 사순절 끝(10월) – 주지사와 속국 왕족(sawbwa)의 참석이 요구됨
의식 동안 국왕은 사자 옥좌에 앉았고, 그의 오른쪽에는 왕비가 앉았다. 왕세자는 요람과 같은 자리에 옥좌 바로 앞에 앉았고, 그 뒤에는 왕족이 앉았다. 참석자는 속국 출신의 신하와 고관들로, 버마어로 ''Neya Nga Thwe'' (နေရာငါးသွယ်my)라고 알려진 계급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그곳에서 참석자들은 군주에게 경의를 표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왕비를 제외한 여성들은 이 의식 동안 보이지 않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낮은 계급의 왕비들, 장관의 부인들, 다른 관리들은 옥좌 뒤 방에 앉았다. 왕비들은 계단을 둘러싼 난간 안 중앙에 앉았고, 장관의 부인들과 다른 사람들은 난간 밖 공간에 앉았다.
꼰바웅 왕조 전반에 걸쳐 왕실은 직계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조상 제례를 거행했다. 이러한 제례는 1년에 세 번 제타반나 홀에서 거행되었는데, 이곳에는 곤봉 의식 직전에 놓이는 흰죽지 왕좌가 있었다. 홀 서쪽 방의 플랫폼에서 국왕과 왕족들은 꼰바웅 왕조의 국왕과 왕비들의 초상화에 경배를 올렸다. 또한 시가집에서 가져온 공물과 팔리어 기도문을 초상화에 바쳤다. 높이의 이 초상화들은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초상화는 꼰바웅 왕조의 국왕이 사망했을 때(즉위 중 사망한 경우) 또는 꼰바웅 왕조의 왕비가 사망했을 때(그녀의 배우자가 즉위 중인 경우)에만 만들어졌고, 폐위 후 사망한 국왕이나 남편보다 오래 산 왕비의 초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망한 인물이 사용했던 물품(예: 칼, 창, 빈랑 갑)은 관련 초상화와 함께 보존되었다. 영국이 상부 버마를 정복한 후, 11개의 초상화가 벵갈 주지사 관저 관리의 손에 넘어가 녹여졌다.
기초 제물은 버마의 관습으로, ''미오사데''로 알려진 인간 희생자들을 왕궁의 기초를 세울 때 매장하여 수호신을 달래고, 수도의 난공불락을 보장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희생시키는 행위였다. 희생자들은 각 관문 근처와 도시 성벽의 네 귀퉁이에 세운 거대한 티크 목재 기둥 아래에서 깔려 죽었고, 이를 통해 도시의 안전과 난공불락을 확보했다. 이러한 관습은 불교의 근본적인 교리와 모순되었지만, 폭력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낫(정령)이 되어 죽은 장소를 보호하고 소유한다는 당시의 애니미즘적 신앙과 일치했다. 이러한 처형에 적합한 장소는 도시의 가장 취약한 방어 지점인 모서리와 관문이었다.
꼰바웅 왕조의 군주들은 새로운 왕궁을 건설할 때 고대의 선례와 전통을 따랐다. 브라만들은 희생 의식을 계획하고 점성술적 계산과 희생에 가장 적합한 개인의 징후에 따라 길일을 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반적으로 희생자는 다양한 사회 계층에서 선택되었거나, 희생 당일 불운하게도 강제로 체포되었다. 임신 후기의 여성이 선호되었는데, 희생을 통해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수호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생은 1676년 아바의 웽베 인 궁전 기초 공사 때 이루어졌고, 1857년 만달레이 기초 공사 때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왕실 관리들은 이 전통이 완전히 사라졌고, 인간 희생 대신 꽃과 과일을 바쳤다고 주장했다. 버마 연대기와 당대 기록에는 확인된 장소에 매장된 대형 기름 항아리만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정령이 도시를 계속 보호할 것인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슈웨 요의 ''버마인''은 52명의 남녀아이들이 매장되었으며, 도시 성벽의 12개 관문 근처 기둥 아래에 3명, 성벽의 각 모서리에 1명, 티크 나무 울타리의 각 모서리에 1명, 궁전의 네 입구 각각에 1명, 사자 옥좌 아래에 4명이 매장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타우 세인 코의 인도 고고학 조사 1902~1903년 연례 보고서에는 도시 성벽의 모서리에 매장된 희생자 4명만 언급되어 있다.
5. 5. 문학과 예술
버마 문학과 연극은 성인 남성의 높은 읽고 쓰기 능력(전체 남성의 절반, 여성의 5%) 덕분에 계속 발전했다. 마이클 심스와 같은 외국 관찰자들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읽고 쓰는 능력이 널리 퍼져 있음을 언급했다.[17]1765년-1767년 미얀마-시암 전쟁의 결과로 아유타야에서 잡혀온 시암 포로들은 미얀마 연극과 춤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89년, 왕실 위원회는 시암어와 자바어 극을 미얀마어로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유타야에서 잡힌 시암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위원회는 시암판 라마야나와 에나오(자바판 판지 이야기의 시암 버전)를 미얀마어로 각색하여 ''야마 자타우''와 ''에나웅 자타우''를 만들었다.[17] ''요다야 아카''(아유타야식 춤)는 전통 미얀마 춤 중 가장 섬세한 것으로 여겨진다.
꼰바웅 왕조 시대에는 유럽 회화 기법인 선원근법, 명암법, 스푸마토가 미얀마 회화 양식에 더욱 확립되었다.[17] 이 시대 사찰 그림들은 전통적인 미얀마 양식에 그림자와 원근법을 사용했다. 꼰바웅 시대에는 궁정과 왕실 활동을 흰색 파라바이크에 그림으로 기록하는 ''파라바이크'' 접이식 책 필사본 양식이 발전했다.[17]
1789년부터 1853년 사이 왕조 초기에는 아마라푸라 양식의 불상 조각 예술이 발전했다. 장인들은 금박과 붉은 칠을 한 독특한 목재 양식을 사용했다. 둥근 얼굴을 한 이 시대의 부처 형상은 마하무니 불상이 아라칸에서 잡힌 것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17] 민돈 민이 수도를 만달레이로 옮긴 후 새로운 만달레이 양식의 불상이 등장했는데, 곱슬머리 부처의 형상을 묘사하고 석고와 청동을 재료로 사용했다. 이후의 양식은 영국 식민지 시대까지 유지되었다.[17]
5. 6. 건축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버마 왕조는 이라와디 강 유역을 따라 계획적으로 도시를 건설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꼰바웅 시대에 만달레이와 같은 도시들을 통해 도시 계획이 절정에 달했다. 알웅파야는 주요 방어 시설을 갖춘 많은 작은 요새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그중 하나인 양곤은 1755년 요새이자 항구 도시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땅에 축조된 성벽 위에 티크 나무 통나무로 만든 울타리로 불규칙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양곤에는 6개의 성문이 있었고, 각 성문에는 십자가 모양의 사격구가 있는 전형적인 여자(merlon)가 있는 거대한 벽돌 탑이 측면에 있었다. 쉐다곤 파고다, 술레 파고다, 보타타웅 파고다의 탑은 도시 성벽 외부에 위치해 있었다. 도시에는 벽돌로 포장된 주요 도로와 측면에 배수로가 있었다.[16]
또한 이 시대에는 회반죽 기술의 발전과 함께 탑과 사찰이 증가했다. 정교하게 나무를 조각하여 자타카 이야기를 장식한 목조 사원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전통 버마 건축의 가장 두드러진 예 중 하나이다.[17]
6. 인구와 면적
꼰바웅 왕조 시기 1824년 인구는 300만 명, 면적은 794,000km²였다. 이후 영토 변화에 따라 면적이 감소했다.
- 1826년: 584,000km²
- 1852년: 470,000km²
- 1875년: 460,000km²
7. 역대 국왕
번호 | 팔리어 공식 칭호 | 연대기에 사용된 칭호 | 혈통 | 재위 기간 | 비고 | |
---|---|---|---|---|---|---|
칭호 | 뜻 | |||||
1 | Sīri Pavara Vijaya Nanda Jatha Mahādhammarāja | 알라웅파야 (Alaungpaya) | 미래의 부처 왕 | 마을 지도자 | 1752–1760 | 꼰바웅 왕조와 제3 버마 제국의 창시자. 아유타야를 침공하였다. |
2 | Siripavaradhammarāja | 낭도기 (Naungdawgyi) | 왕실의 장남 | 아들 | 1760–1763 | 아버지와 함께 아유타야를 침공하였다. |
3 | Sirisūriyadhamma Mahadhammarāja Rājadhipati | 신뷔신 (Hsinbyushin) | 백상의 군주 | 형제 | 1763–1776 | 아유타야를 침공하여 함락시켰고, 치앙마이와 라오스를 침공하였으며, 마니푸르를 침공하였다. 네 차례의 중국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
4 | Mahādhammarājadhirāja | 싱구민 (Singu Min) | 싱구 왕 | 아들 | 1776–1781 | |
5 | - | 마웅마웅왕 (Phaungkaza Maung Maung) | 파웅카의 젊은 형제 | 사촌 (낭도기의 아들) | 1782 | 꼰바웅 왕조 역사상 가장 짧은, 1주일 남짓한 재위 기간을 가졌다. |
6 | Siripavaratilokapaṇdita Mahādhammarājadhirāja | 보도파야 (Bodawpaya) | 왕실의 조부 | 삼촌 (알라웅파야의 아들) | 1782–1819 | 아라칸을 침공하여 병합하였고, 랏타나코신(방콕)을 침공하였다. |
7 | Siri Tribhavanaditya Pavarapaṇdita Mahādhammarajadhirāja | 바기다우 (Bagyidaw) | 왕실의 장삼촌 | 손자 | 1819–1837 | 조부와 함께 아유타야를 침공하였고, 아삼과 마니푸르를 침공하였으며,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
8 | Siri Pavarāditya Lokadhipati Vijaya Mahādhammarājadhirāja | 따야와디왕 (Tharrawaddy Min) | 타라와디 왕 | 형제 | 1837–1846 | 타라와디 왕자로서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 참전하였다. |
9 | Siri Sudhamma Tilokapavara Mahādhammarājadhirāja | 바강왕 (Pagan Min) | 파간 왕 | 아들 | 1846–1853 | 제2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패배한 후 민돈에게 폐위되었다. |
10 | Siri Pavaravijaya Nantayasapaṇḍita Tribhavanāditya Mahādhammarājadhirāja | 민돈왕 (Mindon Min) | 민돈 왕 | 이복형제 | 1853–1878 | 영국과 평화를 맺었다. 두 아들의 궁궐 반란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그의 형제인 카나웅 왕세자는 사망하였다. |
11 | Siripavara Vijayānanta Yasatiloka Dhipati Paṇḍita Mahādhammarājadhirāja | 띠버왕 (Thibaw Min) | 티보 왕 | 아들 | 1878–1885 | 버마의 마지막 왕. 제3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패배한 후 퇴위당해 인도로 망명하였다. |
참고: 낭도기는 신뷔신과 보도파야의 형이었으며, 보도파야는 바기다우의 조부였고, 바기다우는 민돈의 삼촌이었다. 그들은 후대에 이러한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관례적으로 즉위식에서 사용된 공식 칭호는 팔리어로 매우 길었다. ''Mintayagyi paya'' (대왕)는 폐하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Hpondawgyi paya'' (대영광)는 왕족이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8. 왕가 계보
- 알라웅파야(재위: 1752년 ~ 1760년)
- 디배잉왕(재위: 1760년 ~ 1764년)
- 싱뷰싱왕(재위: 1763년 ~ 1776년)
- 싱구왕(재위: 1776년 ~ 1782년)
- 마웅마웅왕(재위: 1782년)
- 바둥왕(재위: 1782년 ~ 1819년)
- 자가잉왕(재위: 1819년 ~ 1837년)
- 따야와디왕(재위: 1837년 ~ 1846년)
- 바강왕(재위: 1846년 ~ 1853년)
- 밍둥왕(재위: 1853년 ~ 1878년)
- 띠버왕(재위: 1878년 ~ 1885년)
9. 왕위 요구자
왕정 폐지 후 꼰바웅 왕조의 왕실 가주 칭호는 형식적으로 티보 왕의 둘째 딸인 먄 파야 라트(Myat Phaya Lat)에게 넘어갔다. 티보 왕의 큰딸은 인도의 평민과 함께하기 위해 왕족 칭호를 포기했기 때문이다.[9]
티보 왕의 셋째 딸인 먄 파야 갈레이(Myat Phaya Galay)는 1920년대에 버마로 돌아와 영국으로부터 왕위 반환을 요구했다. 그녀의 큰아들인 타우 파야 지(Taw Phaya Gyi)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꼭두각시 왕으로서의 잠재력 때문에 일본 제국에 의해 이용당할 뻔 했다. 그러나 타우 파야 지가 일본을 싫어했고, 1948년 공산 반군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에 일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20]
먄 파야 라트 사후 그녀의 손자 사위인 타우 파야(Taw Phaya)가 명목상 왕실 가주가 되었다. 타우 파야는 먄 파야 갈레이의 아들이자 타우 파야 지의 형제였으며, 먄 파야 라트의 손녀인 테이크 수 지 파야(Hteik Su Gyi Phaya)의 남편이었다.[21]
2019년 타우 파야 사망 후 왕실 가주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타우 파야 지의 큰아들인 소 윈(왕자)(Soe Win (prince))이 타우 파야의 자녀들에 대한 공개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왕실 가주로 추정된다.[22]
10. 참고 문헌
- Hall, D.G.E. (1960). ''Burma'' (3rd ed.). London: Hutchinson University Library. ISBN 978-1-4067-3503-1.
- Harvey, G. E. (1925). ''History of Burma: From the Earliest Times to 10 March 1824''. London: Frank Cass & Co. Ltd.
- Htin Aung, Maung (1967). ''A History of Burma''. New York and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 Lieberman, Victor B. (2003). ''Strange Parallels: Southeast Asia in Global Context, c. 800–1830, volume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80496-7.
- Myint-U, Thant (2006). ''The River of Lost Footsteps—Histories of Burma''. Farrar, Straus and Giroux. ISBN 978-0-374-16342-6.
- Phayre, Lt. Gen. Sir Arthur P. (1883). ''History of Burma'' (1967 ed.). London: Susil Gup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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