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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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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울 힐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홀로코스트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가이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절멸 과정을 관료제, 군대, 산업, 정당 등 4개의 권력 집단이 상호 작용하는 "절멸 기구"를 통해 분석했으며, 특히 《유럽 유대인의 파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가 히틀러의 의도뿐 아니라, 관료제의 기능적 측면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보았으며, 유대인 평의회의 역할을 비판하여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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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힐베르크
기본 정보
라울 힐베르크
라울 힐베르크
출생일1926년 6월 2일
출생지, 오스트리아
사망일2007년 8월 4일
사망지윌리스턴, 버몬트주, 미국
국적미국
거주지해당사항 없음
배우자크리스틴 헤먼웨이 (이혼)
그웬돌린 몽고메리 (1980년 결혼)
학력
학사브루클린 칼리지
석사컬럼비아 대학교
박사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지도교수윌리엄 T. R. 폭스
프란츠 노이만
경력
직장버몬트 대학교
학문
분야역사학
정치학
관심사해당사항 없음
주요 저서《유럽 유대인의 파괴》 (1961년)
서명
라울 힐베르크 서명
라울 힐베르크 서명

2. 생애

라울 힐베르크는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오스트리아 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갈리시아의 한 마을 출신으로 10대에 빈으로 이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복무하여 훈장을 받았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부차치 출신이었다.

어린 힐베르크는 지리학, 음악, 기차 수집을 즐겼으며, 종교를 혐오했다. 시온주의 학교에 다니며 나치즘에 굴복하지 않고 방어해야 할 필요성을 배웠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가족은 집에서 쫓겨났고,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서의 복무 기록으로 인해 석방되기 전까지 나치에 체포되었다. 1939년 4월 1일, 13세의 힐베르크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탈출, 프랑스를 거쳐 쿠바로 가는 배에 올랐다. 쿠바에서 4개월을 머무른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발발한 날인 1939년 9월 1일에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그 후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동안 힐베르크 가족의 26명이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당했다.

힐베르크 가족은 뉴욕 브루클린에 정착했고, 라울은 에이브러햄 링컨 고등학교와 브루클린 칼리지에 다녔다. 화학 분야에서 경력을 쌓으려고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에서 일했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 육군에서 복무했다. 1942년 이른 시기에, 힐베르크는 나중에 나치 학살로 알려지게 될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읽은 후, 스티븐 사무엘 와이즈에게 전화하여 "유럽 유대인의 완전한 절멸"에 대해 무엇을 할 계획인지 물었으나, 와이즈는 전화를 끊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45 보병 사단에서 복무했지만, 독일어에 능통하여 전쟁 문서 부서에 배속, 유럽 전역의 기록 보관소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브라운 하우스에 주둔하면서 뮌헨에 있는 히틀러의 개인 도서관을 발견했다. 이 발견과 그의 가족 26명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힐베르크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1951년부터 1년간 연구를 겸하여 워싱턴의 전시 문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55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 버몬트 대학교 부교수가 되었고, 1967년 정교수가 되어 1991년 퇴직했다. 2005년 4월 26일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이주

라울 힐베르크는 1926년 오스트리아 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갈리시아 출신으로 10대에 빈으로 이주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부차치 출신이었다. 힐베르크는 종교를 혐오했지만, 시온주의 학교에 다니며 나치즘에 대한 방어의 필요성을 배웠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가족은 집에서 쫓겨나고 아버지는 나치에 체포되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기록으로 석방되었다. 1939년 4월 1일, 13세의 힐베르크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탈출하여 프랑스를 거쳐 쿠바로 향했다.[1] 쿠바에서 4개월을 머무른 후, 1939년 9월 1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이후 힐베르크 가족은 뉴욕 브루클린에 정착했다. 한편, 유럽에 남았던 힐베르크의 친인척 26명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했다.

2. 2. 학업 및 군 복무

1944년 귀화와 함께 육군에 입대하여 유럽 전선에 참전했다. 종전 직후 추축국 군인에 대한 심문 담당 장교로 임명되어 1946년 제대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45 보병 사단에서 복무했지만, 독일어에 능통하고 학문적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에 곧 유럽 전역의 기록 보관소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은 전쟁 문서 부서에 배속되었다. 그는 브라운 하우스에 주둔하면서 뮌헨에 있는 히틀러의 개인 도서관을 발견했다. 이 발견과 그의 가족 26명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힐베르크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1951년부터 1년간 연구를 겸하여 워싱턴의 전시 문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55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프란츠 노이만의 지도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한스 로젠버그가 프로이센 문관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들으면서 엘리트와 관료제의 중요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2. 3. 학술 경력

힐베르크는 1955년 버몬트 대학교에서 첫 학술직을 얻었고 1956년 1월에 그곳에 정착했다. 그는 대부분의 교직 생활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정치학과 소속이었다. 1967년 정교수가 되었고, 1991년에 퇴임하면서 명예 교수로 임명되었다.[1] 2006년, 이 대학은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연구 석좌 교수를 설립했다. 매년 버몬트 대학교의 캐롤린 및 레너드 밀러 홀로코스트 연구 센터는 라울 힐베르크 기념 강연회를 개최한다.

1961년에 그의 대표작인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영어(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이후 영어로 두 번에 걸쳐 수정·증보되었으며, 한국어판을 포함하여 9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9개 언어로 번역 출간될 때마다 책의 내용을 수정·증보하였는데, 한국어판 출간을 마지막으로 그가 사망했기에 한국어판은 이 책의 최종본이다.

힐베르크는 이 책 외에 1979년에 The Warsaw Diary of Adam Czerniakow영어(아담 체르니아쿠프의 바르샤바 게토 일기), 1992년에 Perpetrators Victims Bystanders영어(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1996년에 The Politics of Memory: The Journey of a Holocaust Historian영어(기억의 정치, 어느 홀로코스트 역사가의 일생), 2001년에 Sources of Holocaust Research: An Analysis영어(홀로코스트 사료의 분석) 등을 썼다.

이러한 홀로코스트 연구 공로로 1976년에는 미국 대통령 홀로코스트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2002년에 독일의 숄 남매상과 독일연방대공훈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5년에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미국 홀로코스트 위원회 위원으로 있던 당시 워싱턴 D.C.의 홀로코스트 기념관(US Hmm) 설립에 관여하였다. 홀로코스트 기념관(US Hmm)의 전시 구성은 상당 부분 그의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

3. 학술적 관점 및 연구 방법

힐베르크는 유럽 유대인에 대한 국가사회주의의 범죄를 다룰 때, 다음 두 가지 전제를 제시했다.

# 4개의 권력 집단(관료, 군, 산업, 정당)의 관료적인 집합체는 절멸 기구이다.

# 느슨한 조치는 그 후에 이어지는 더욱 가혹한 처치를 수행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 된다. 이는 절멸 과정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힐베르크는 완성된 유대인 절멸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각 지역에서 동일한 단계와 순서로 작전이 실행된 사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나치즘 연구에서는 히틀러의 의도를 중시하는 "의도주의"와 독소전 이후의 특이한 상황에서 부분적인 절멸 작전이 점차 전면적으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기능주의"의 입장이 대립한다. 힐베르크는 히틀러를 유대인 절멸의 추진력으로 보았기 때문에 "의도주의자"로 여겨지지만, 그가 제시하는 "절멸 과정"은 한 개인의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관료들은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으며, 4개의 권력 집단은 자신들의 결단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독자적으로 행동하면서, 때로는 서로 방해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전인미답의 범죄로 나아갔다. 이는 "기능주의"의 해석과 유사하며, 주범은 한 명이 아니라 독일 관료 전체였다.

힐베르크는 또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지적을 했다.

# 유대인의 절멸은 "국책"이며, 독일 전체가 국가를 걸고 담당한 사업이다.

# 독일인은 행정 면에서 유대인에게 의존했고, 유대인은 스스로 절멸의 공모자가 되었다.

특히 후자의 결론은 유대인 평의회를 독일 관료 기구의 연장으로 파악한 힐베르크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신·왕·법률·계약을 신뢰하는 유대인의 전통"과 "경제적으로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을 수행자가 파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유대인의 계산"을 언급하며,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태도가 저항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힐베르크는 미국에서 유대인 평의회의 "가해 책임"을 물음으로써 비판받았다.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연구는 시대를 앞서 발표되었고, 당시에는 도발적이었지만, 현재에는 이 분야에서 그의 업적이 평가받고 있다.

3. 1. 관료제와 절멸 과정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가 나치즘 하에서 만들어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파괴 메커니즘"을 통해 실행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나치의 관료제, 군대, 산업, 정당이라는 4개의 권력 집단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절멸 기구"를 통해 유대인 절멸이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

힐베르크는 유대인 절멸 계획이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각 단계별로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절멸 과정"을 통해 실행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은 느슨한 조치에서 시작하여 점차 가혹한 처벌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힐베르크는 이러한 절멸 과정이 각 지역에서 동일한 순서로 단계적으로 실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독일 관료 전체가 이 과정에 연루되었으며, 각 권력 집단은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때로는 서로 충돌하면서, 때로는 협력하면서 전례 없는 범죄를 향해 나아갔다고 보았다.

힐베르크는 또한 유덴레테(유대인 평의회)가 독일 관료 기구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했으며, 유대인들이 스스로의 절멸에 공모하게 되었다는 논쟁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는 "경제적으로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을 수행자가 파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유대인의 계산"과 "신·왕·법률·계약을 신뢰하는 유대인의 전통"이 이러한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3. 2. 기능주의 vs. 의도주의 논쟁

힐베르크는 나치즘 연구에서 히틀러의 의도를 중시하는 "의도주의(Intentionalism)"와 독소전 이후의 상황 속에서 절멸 정책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중간적 입장을 취했다. 초기에는 히틀러의 명령을 강조했으나, 후기 연구에서는 관료제 내 하위 계층의 역할과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기능주의적 해석으로 전환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계획을 세웠고, 모든 일은 그 계획의 전개였다는 극단적 의도론적 입장을 지지했다. 이는 힐베르크가 프란츠 노이만의 가르침을 통해 흡수한 내용과 충돌했는데, 노이만의 저서 ''베헤모스: 국가 사회주의의 구조와 실천''(1942/1944)는 나치 정권을 관료주의적 내부 투쟁과 영역 다툼이 특징인 사실상 무국가적 정치 질서로 묘사했다. 힐베르크는 나치 파벌의 충돌하는 정치 속에서 어떻게 전반적인 대량 학살 정책이 설계되었는지를 분석했다.

힐베르크는 후대 학자들에게 기능주의 홀로코스트 역사학파의 주요 대표자로 여겨졌다. 의도론자들은 홀로코스트를 히틀러가 결정하고 미리 계획한 계획으로 보았고, 기능주의자들은 "최종 해결책"을 다른 계획들이 유지될 수 없을 때 발생한 진화로 보았다. 의도론자들은 홀로코스트의 주도권이 상부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반면, 기능주의자들은 그것이 관료주의 내 하위 계층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힐베르크의 대표작은 의도론적 명제로 시작하여 점차 기능주의적 입장으로 이동했다. 1985년 개정판에서는 히틀러가 파괴의 기계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원격 인물로 묘사되면서 기능주의적 해석으로 추가 전환이 이루어졌다. '기능주의자'와 '의도론자'라는 용어는 1981년 티모시 메이슨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논쟁은 1969년 마틴 브로자트의 ''히틀러 국가''와 칼 슐로네스의 ''아우슈비츠로 가는 뒤틀린 길''이 출판되면서 시작되었다.

힐베르크는 나치 독일 지도부와 대량 학살 집행자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켰다. 초기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발령하고 헤르만 괴링이 선포한 명령에 기반한 해석이었으나,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최종 해결책의 기원''과 일치하는 이론으로 진화했다. 이는 고위 관리들의 일반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중간급 관리들이 주도권을 잡은 내용이다. 이러한 주도권은 고위 관리들의 명령에 의해 확대되었고, 점점 더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전파되었다. 이러한 주도권을 수행하면서 얻은 경험은 관료주의 내에서 급진적인 목표가 달성 가능하다는 이해를 심어주었고, 지시의 필요성을 점진적으로 감소시켰다. 힐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치 정권이 수년에 걸쳐 발전하면서 의사 결정 구조 전체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법률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법률을 시행하는 법령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법률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그 다음에는 서면으로 작성되었지만 여전히 장관 관보에 게재된 명령과 지침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발표에 의한 정부가 있었는데, 명령이 신문에 실렸다. 그 다음에는 조용한 명령, 즉 출판되지 않고 관료주의 내부에 있던 구두 명령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명령은 전혀 없었다. 모든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초기 판본에서 힐베르크는 유대인을 살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대해 논의했지만, 최근 판본에서는 직접적인 명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1999년 인터뷰에서 힐베르크는 "증거에 대한 정확성을 위해 이러한 변화를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의 필수적인 원동력으로서 관료적 추진력에 초점을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학살이 히틀러의 목표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힐베르크는 유덴레테(유대인 평의회)와 같은 유대 사회의 일부가 대량 학살에 공모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이는 이스라엘 당국이 그에게 야드 바셈 기록 보관소 접근을 거부하도록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유대인 전략이 적응을 지시하고 저항을 배제했다고 말했다.

3. 3. 유대인 평의회(유덴라트) 비판

힐베르크는 유덴라트(유대인 평의회)가 독일 관료 기구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하며, 유대인 절멸에 협력했다고 비판했다.[1] 이러한 주장은 이스라엘 당국이 그에게 야드 바셈 기록 보관소 접근을 거부하게 할 정도로 논쟁적이었다. 그는 유대인 사회 일부가 대량 학살에 협력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독일은 유대인 지도부를 통제했고, 그 지도부는 다시 유대인 공동체를 통제했다. 이 시스템은 완벽했다. 진정으로, 유대인 공동체 조직은 자기 파괴적인 기계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힐베르크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신, 왕, 법률, 계약 등을 신뢰하고, 경제적 효용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저항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하나님, 군주, 법률, 계약을 신뢰하는 유대인의 전통을 조사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나는 박해자가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것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대인의 계산을 숙고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 전략이 적응을 지시하고 저항을 배제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힐베르크의 주장은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불경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죽은 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의 석사 학위 지도교수는 그에게 이 내용을 논문에서 삭제하도록 설득했지만, 그는 결국 다시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원고를 읽은 아버지조차 당황했다고 한다.

4. 주요 저서

제목출판 연도출판사비고
Documents of Destruction: Germany and Jewry, 1933–1945|파괴의 문서: 독일과 유대인, 1933–1945영어1971쿼드랭글 북스
The Holocaust today|오늘날의 홀로코스트영어1988시라큐스 대학교 출판부
Perpetrators, Victims, Bystanders: The Jewish Catastrophe, 1933–1945|가해자, 희생자, 방관자: 유대인 재앙, 1933–1945영어1992아론 아셔 북스
도시에 사는 유대인의 운명1995미국 대학교 출판부리차드 L. 루벤스타인 기념 에세이
The Politics of Memory: The Journey of a Holocaust Historian|기억의 정치: 홀로코스트 역사가의 여정영어1996아이반 R. 디
유럽 유대인의 파괴: 선례2000루틀리지홀로코스트: 기원, 실행, 여파
Sources of Holocaust Research: An Analysis|홀로코스트 연구의 자료: 분석영어2001아이반 R. 디
유럽 유대인의 파괴2003예일 대학교 출판부3차 개정판, 초판 1961년 출판
The Anatomy of the Holocaust: Selected Works from a Scholarly Life|홀로코스트의 해부: 학문적 삶에서 발췌한 작품영어2019베르그한 북스
The Warsaw Diary of Adam Czerniaków: Prelude to Doom|아담 체르니아코프의 바르샤바 일기: 파멸의 서곡영어1979Stein and Day


4. 1. 《유럽 유대인의 파괴》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1961년, 힐베르크의 대표작 '''《유럽 유대인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영어)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영어로 두 번 수정 및 증보되었고, 한국어판을 포함하여 9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힐베르크는 번역 출간될 때마다 내용을 수정 및 증보했으며, 한국어판이 그의 사망으로 인해 이 책의 최종판이 되었다.

1985년판 ''유럽 유대인 학살'' 표지


힐베르크는 나치 독일이 유럽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사용한 정치적, 법적, 행정적, 조직적 메커니즘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는 쇼아(Shoah, 홀로코스트)가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후기 인터뷰에서 "나는 홀로코스트가 광대하고 단일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유일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조각내기 시작하면 완전히 인식 가능하고 평범한 구성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힐베르크의 박사 학위 논문은 클라크 F. 앤슬리 상을 수상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될 자격을 얻었지만, 힐베르크는 전체 연구를 출판하고자 했다. 야드 바셈은 출판에 반대했고, 다른 학자들도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힐베르크는 타협하지 않고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했으나 거절당했다.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는 한나 아렌트의 조언에 따라 원고를 거절했다. 결국 1961년, 시카고의 작은 출판사인 쿼드랭글 북스에서 출판되었다. 야드 바셈은 시오니스트 서술에서 핵심적인 무장 유대인 저항을 부차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출판 합의를 철회했다. 다행히 독일계 체코 유대인이자 부유한 후원자인 프랭크 페체크가 출판 비용을 지원했다.

노먼 핀켈스타인에 따르면, 힐베르크의 저작에 대한 반대와 출판의 어려움은 당시 냉전 시대 분위기 때문이었다. 핀켈스타인은 나치 홀로코스트가 미국의 대 서독 동맹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언급했다.

독일어판은 1963년 드로머 크나우어가 판권을 인수했으나, 유대인 당국이 홀로코스트 실행자들과 협력한 사건들을 기록했다는 이유로 출판을 거부했다. 힐베르크는 이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독일어판은 1982년에야 베를린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유럽 유대인의 파괴》는 나치즘 하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파괴 메커니즘"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묘사였다. 힐베르크는 집단 학살을 실행하기 위한 관료적 수단을 탐구하여, 그 과정의 내재된 공포가 스스로 말하게 했다.

힐베르크는 제럴드 레이틀링거와 달리 최종 책임보다는 집단 학살의 기계에 대한 기능적 분석에 집중했다. 그는 관리자, 서기, 경비원 등이 스스로를 "자행자"라고 지칭하지 않았지만, 파괴 과정에 대한 연루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힐베르크의 평생의 적이자 친구였던 예후다 바우어는 힐베르크가 홀로코스트의 '어떻게'에만 집중하고 '왜'에는 집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바우어에 따르면, 힐베르크는 "대답이 너무 작을까 봐 큰 질문을 하지 않았다." 클로드 란츠만의 영화 쇼아에서 힐베르크는 "나는 항상 작은 대답을 얻을까 두려워서 큰 질문으로 시작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힐베르크의 접근 방식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영향을 미쳤지만, 유대인 평의회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힐베르크는 아이제이아 트렁크의 《유대인 평의회》 연구에 정중하게 답했다.

4. 2. 기타 저서

힐베르크는 1979년에 The Warsaw Diary of Adam Czerniakow(아담 체르니아쿠프의 바르샤바 게토 일기)영어를 출간했다. 1992년에는 Perpetrators Victims Bystanders(가해자, 피해자, 방관자)영어를, 1996년에는 The Politics of Memory: The Journey of a Holocaust Historian(기억의 정치, 어느 홀로코스트 역사가의 일생)영어을, 2001년에는 Sources of Holocaust Research: An Analysis(홀로코스트 사료의 분석)영어 등을 썼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저서 및 논문, 챕터 등을 출간했다.

제목출판 연도출판사비고
Documents of Destruction: Germany and Jewry, 1933–1945|파괴의 문서: 독일과 유대인, 1933–1945영어1971쿼드랭글 북스
The Holocaust today|오늘날의 홀로코스트영어1988시라큐스 대학교 출판부
Perpetrators, Victims, Bystanders: The Jewish Catastrophe, 1933–1945|가해자, 희생자, 방관자: 유대인 재앙, 1933–1945영어1992아론 아셔 북스
도시에 사는 유대인의 운명1995미국 대학교 출판부리차드 L. 루벤스타인 기념 에세이
The Politics of Memory: The Journey of a Holocaust Historian|기억의 정치: 홀로코스트 역사가의 여정영어1996아이반 R. 디
유럽 유대인의 파괴: 선례2000루틀리지홀로코스트: 기원, 실행, 여파
Sources of Holocaust Research: An Analysis|홀로코스트 연구의 자료: 분석영어2001아이반 R. 디
유럽 유대인의 파괴2003예일 대학교 출판부3차 개정판, 초판 1961년 출판
The Anatomy of the Holocaust: Selected Works from a Scholarly Life|홀로코스트의 해부: 학문적 삶에서 발췌한 작품영어2019베르그한 북스
The Warsaw Diary of Adam Czerniaków: Prelude to Doom|아담 체르니아코프의 바르샤바 일기: 파멸의 서곡영어1979Stein and Day


5. 영향 및 평가

라울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 연구의 선구자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구는 홀로코스트가 단순한 증오 범죄가 아니라, 근대 국가의 복잡한 시스템과 기술이 동원된 결과임을 보여주었다. 그의 유대인 평의회 비판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홀로코스트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 피해자들의 복잡한 딜레마와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촉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힐베르크는 클로드 란츠만의 영화 《쇼아》에 출연하여 홀로코스트의 물류를 묘사하는 데 핵심적인 영향을 미쳤다.[1] 그는 노먼 핀켈스타인의 연구를 지지하고, 다니엘 골드하겐의 연구를 비판하는 등, 홀로코스트 관련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부상에 대해서는 과거와 비교하기 어렵다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힐베르크는 유럽 유대인에 대한 국가사회주의의 범죄를 다룰 때, 다음의 두 가지를 전제로 했다.

# 4개의 권력 집단(관료, 군, 산업, 정당)의 관료적인 집합체 = 절멸 기구

# 느슨한 조치가 그 후에 이어지는 더욱 가혹한 처치를 수행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 된다 = 절멸 과정

그는 완성된 유대인 절멸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지역에서도 똑같이 단계적으로 순서대로 작전이 실행된 사실을 설명하려고 했다.

나치즘 연구에서는, 유대인 절멸 정책에서의 히틀러의 의도를 중시하는 "의도주의(Intentionalism)"와, 독소전 이후의 특이한 상황 속에서 부분적인 절멸 작전이 점차 전면적인 것으로 확대되었다고 하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입장이 있다. 힐베르크는 히틀러를 유대인 절멸의 추진력으로 전제하고 있으므로 "의도주의자"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힐베르크가 그리는 "절멸 과정"은, 한 독일인의 악의에 의해 일거에 창조된 것은 아니다. 관료들은 유대인들을 "증오"하지 않았다. 힐베르크가 제시하는 절멸 과정에서의 현장의 상황에서는, 4개의 권력 집단은 자신들의 결단이 어디로 이끌지 모른 채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어떤 때는 서로의 일을 방해하고, 어떤 때는 조율하며, 전인미답의 범죄로 매진해 간다. 이것은 "기능주의"에 의한 해석과 흡사하다. 여기서의 주범은 한 명이 아니라, 독일 관료 전체에 미친다.

더욱이 힐베르크는 (1) 유대인의 절멸은 "국책"이며, 독일 전체가 국가를 걸고 담당한 사업이다, (2) 독일인이 행정 면에서 통달에 순종하는 유대인에게 의존했고, 유대인은 스스로의 절멸의 공모자가 되었다, 라는 2가지 중대한 지적을 했으며, 특히 후자의 결론을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힐베르크가 유대인 평의회를 독일 관료 기구의 연장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점에서 불가피한 결론이었다. 더욱 나아가 그는 "신·왕·법률·계약을 신뢰하는 유대인의 전통"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을 수행자가 파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유대인의 계산"에 대해서도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힐베르크는, 가장 먼저 난을 피한 안전한 미국에서 유대인 평의회의 "가해 책임"을 물음으로써 규탄받았다.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연구는 시대를 앞서 발표되었고, 논쟁에 휘말린 당시에는 도발적이기까지 했지만, 현재에는 이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평가받고 있다.

6. 한국의 관점과 힐베르크

힐베르크의 연구는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인류 보편의 가치와 역사적 교훈을 성찰하게 한다. 그의 관료제 비판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가 시스템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유대인 평의회에 대한 비판은, 일제 강점기 친일 협력자 문제와 관련하여 복잡한 역사적 논쟁을 상기시킨다.[1]

홀로코스트 연구는 한국 사회가 과거사 문제,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 문제 등을 해결하고,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 교육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힐베르크의 연구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함을 일깨워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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