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제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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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이제이가는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6대손인 후지와라노 타메이에의 넷째 아들 레이제이 타메스케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가마쿠라 막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가마쿠라 가단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무로마치 시대에 카미레이제이가와 시모레이제이가로 분열되었다.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를 거치며 카미레이제이가는 도쿠가와 쇼군가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고, 시모레이제이가는 쇠퇴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대부분의 공가가 도쿄로 이주했지만, 카미레이제이가는 교토에 남아 저택을 유지했으며, 현재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레이제이가는 와카 명문가로서 레이제이가 시구레테이 문고를 운영하며, 교토에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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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제이가 - 후지와라 세이카
후지와라 세이카는 1561년에 태어나 1619년에 사망한 일본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기반으로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고 하야시 라잔 등을 제자로 두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유학을 강의하고 『촌철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 일본의 백작가 - 시마즈씨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규슈 지역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 일본의 백작가 - 우에스기씨
우에스기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까지 번영하며 간토 간령, 슈고 다이묘, 요네자와 번주 등을 역임했고,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서임되었다. - 일본의 자작가 - 우에스기씨
우에스기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까지 번영하며 간토 간령, 슈고 다이묘, 요네자와 번주 등을 역임했고,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서임되었다. - 일본의 자작가 - 오다씨
오다 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시바 씨를 섬기다 독립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 오다 노부나가 시대에 전국 통일을 목전에 두었으나 몰락 후 에도 시대에 여러 분파가 존속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네 가문이 자작 작위를 받은 일본의 무가이다.
레이제이가 | |
---|---|
가문 정보 | |
성씨 | 레이제이 가 |
일본어 성씨 | 冷泉 |
가문 문양 | 가타바미, 유키사사 |
본성 | 후지와라 북가미코히다리 류 적류 |
종별 | 공가 (우린 가) |
화족 | 가미레이제이 가 (백작) |
화족 | 시모레이제이 가 (자작) |
출신지 | 야마시로 국 |
근거지 | 가미레이제이 가: 교토부 |
근거지 | 시모레이제이 가: 도쿄부 |
가조 | 레이제이 타메스케 (가미레이제이 가) |
가조 | 레이제이 모치타메 (시모레이제이 가) |
현재 당주 | 레이제이 타메히토 |
창시 연도 | 14세기 |
폐지 연도 | 현존 |
모가 | 후지와라 가문 |
주요 인물 | |
가미레이제이 가 | 레이제이 타메무라 |
분가 | |
가미레이제이 가 분가 | 후지타니 가 (우린 가, 자작) |
가미레이제이 가 분가 | 이마키 가 (구 나카야마레이제이 가, 우린 가) |
가미레이제이 가 분가 | 마츠바야시 가 (남작) |
가문 문양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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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아들인 미코히다리가 6대 타메이에의 아들 레이제이 타메스케에서 시작한다. 가명(家名)은 헤이안쿄의 레이제이 코지에서 유래한다. 가업(家業)은 가도(歌道)와 축국이다. 가풍(歌風)은 같은 미코히다리류에 속하는 니죠가(셋케의 니조가와는 별개) 및 교고쿠가(무가의 교고쿠씨와 별개)에 비하면 특징적이지 않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자손은 사다이에의 손자 대에서 미코히다리가(니죠가)에서 교토 교고쿠가, 레이제이가가 갈라져 3가가 되었지만, 교토가는 일찍 단절되었고, 적류인 니죠가도 무로마치 시대에 단절되었다. (가도의 가문으로서, 니죠파는 산죠니시가가 외가 상속)
레이제이가는 처음에는 사다이에의 적류 자손이 아니었으나, 종국에는 레이제이가만 남게 되었다. 레이제이가는 남북조 시대에 카미레이제이가와 시모레이제이가로 나뉘었다.
레이제이 가문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여섯째 아들 나가이에(1005-1064)를 통해 이어져 내려왔으며, 이 계통은 타메스케가 레이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까지 미코히다리로 알려졌다. 나가이에의 둘째 아들 타다이에(1033-1091)는 둘째 아들 토시타다(1071-1123)를 두었고, 그의 넷째 아들 토시나리(후지와라노 슌제이, 1114-1204)는 둘째 아들 사다이에(후지와라노 테이카, 1162-1241)를 두었으며, 그의 셋째 아들 타메이에(1198-1275)는 레이제이 타메스케의 아버지였다.
8세기 동안 이 가문은 황실의 명령에 따라 중요한 문서 컬렉션을 비밀리에 보존해 왔다. 1980년 4월 4일, 약 20만 점에 달하는 이 컬렉션은 레이제이 타메토(1914-1986)에 의해 공개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보존을 위해 도쿄에 특별히 도서관이 설립되었다. 모든 문서가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일부는 이미 국보로 지정되었다.
레이제이 저택은 교토 고쇼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교토에 남아 있는 마지막 원본 귀족 저택이다. 이곳은 중요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2. 1. 레이제이 가문 성립과 분열 (가마쿠라 ~ 무로마치 시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아들인 미코히다리가 6대 후지와라노 타메이에의 넷째 아들 레이제이 타메스케를 시조로 한다.[1] 타메스케는 가마쿠라 막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가미국 가마쿠라에 거주하며 가마쿠라 가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1]난보쿠초 시대를 거치며 미코히다리류의 다른 분가인 니조가(二条家)와 교고쿠가(京極家)는 단절되고 레이제이가만 남았다.[1] 무로마치 시대에 레이제이 타메마사가 차남 레이제이 모치타메에게 영지를 분할 상속하면서 카미레이제이가와 시모레이제이가로 분열되었다.[1]
레이제이 가문의 분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물 | 관계 | 설명 |
---|---|---|
후지와라노 타메이에 | 레이제이 타메스케의 아버지 | 미코히다리가 6대손 |
레이제이 타메스케 | 레이제이 가문의 시조 | 가마쿠라 막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음 |
레이제이 타메마사 | 차남 레이제이 모치타메에게 영지 분할 상속 | |
레이제이 모치타메 | 레이제이 타메마사의 차남 | 영지 상속으로 시모레이제이가 성립 |
2. 2.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
센고쿠 시대에 카미레이제이가와 시모레이제이가 양가 모두 전란을 피해 교토를 떠나 지방으로 피난했다.[3]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카미레이제이가에 교토에 저택 부지를 하사했고, 카미레이제이가는 에도 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번영했다.[3] 시모레이제이가는 모리씨와 카토씨(요시아키계(도시히토류))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3] 에도 시대 카미레이제이가와 시모레이제이가의 가격(家格)은 모두 우림가였다.[3]2. 3.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대부분의 공가는 메이지 천황을 따라 도쿄로 이주했지만, 카미레이제이가는 교토에 남아 저택을 유지했다.[10] 시모레이제이가는 도쿄로 이주했다.[4] 화족령에 따라 카미레이제이가의 레이제이 타메모토는 백작[8], 시모레이제이가의 레이제이 타메토우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7]카미레이제이가 저택은 교토 교엔 내 구게마치(공가정)에 있던 다른 공가 저택들과 달리 철거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0] 쇼와 시대에 카미레이제이가의 레이제이 타메오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카미레이제이가 24대 당주 레이제이 타메토우는 레이제이가 시구레테이 문고를 설립하여 가문에 전해지는 고문서와 고전을 보존하고 공개하는 데 힘썼다. 현재 카미레이제이가 25대 당주 레이제이 타메히토는 도시샤여자대학 객원교수로 재직하며, 레이제이가 시구레테이 문고 이사장을 맡고 있다.
3. 분가
레이제이가에서 분가한 가문은 다음과 같다.
- 이리에가: 메이지 시대에 이리에 타메모리(카미레이제이가 레이제이 타메모토의 친동생)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4]
- 후지타니가: 후지타니 타메치카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 나카야마레이제이가(中山冷泉家) → 이마케가: 레이제이 타메미츠가 칙한을 받고 교토를 떠난 후, 나카야마 치카츠나의 아들 타메치카가 가미레이제이가의 당주가 되었으나, 1599년 타메미츠가 복귀하면서 타메치카는 당주 자리에서 물러나 나카야마 레이제이가를 세웠다.[3] 이후 이마케가로 가명을 바꾸고 가잔인류로 옮겨갔다.[3]
3. 1. 이리에가(入江家)
메이지 시대에 이리에 타메모리(카미레이제이가 레이제이 타메모토의 친동생)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4] 이리에 타메모리는 다이쇼 천황의 동궁 시종장을 지냈고, 그의 아들 이리에 스케마사는 쇼와 천황의 시종장을 역임했다.[4]3. 2. 후지타니가(藤谷家)
후지타니 타메치카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3. 3. 나카야마레이제이가(中山冷泉家) → 이마케가(今城家)
레이제이 타메미츠가 칙한을 받고 교토를 떠난 후, 나카야마 치카츠나의 아들 타메치카가 가미레이제이가의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1599년 타메미츠가 복귀하면서 타메치카는 당주 자리에서 물러나 나카야마 레이제이가를 세웠다.[3] 이후 이마케가로 가명을 바꾸고 가잔인류로 옮겨갔다.[3]나카야마 레이제이가는 이마케가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나카야마 레이제이 타메치카, 타메나오 부자도 각각 "이마키 타메치카", "이마키 타메나오"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이마키"를 칭하게 된 것은 타메나오의 아들인 사다아츠(타메츠구) 대부터이다.[3]
이름 | 비고 |
---|---|
나카야마 레이제이 타메치카 | 레이제이 타메미츠가 실각하고 추방당하여 카미레이제이가의 당주가 되었지만, 이후 그 지위를 잃고 나카야마 레이제이가를 세웠다.[3] |
나카야마 레이제이 타메히사 | |
나카야마 레이제이 타메츠구 | 가호를 "이마시로"로, 휘를 "테이쥰"(사다아츠)으로 고쳤다.[3] |
4. 역대 당주
이름|한국어 발음일본어
(1263년-1328년)|1263년 - 1328년일본어)
(?-1372년)|? - 1372년일본어)
(1361년-1417년)|1361년 - 1417년일본어)
(1393년-1439년)|1393년 - 1439년일본어)
(증정2위)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압력으로 불우
(1425년-1497년)|1425년 - 1497년일본어)
(1450년-1526년)|1450년 - 1526년일본어)
(1486년-1549년)|1486년 - 1549년일본어)
(1516년-1570년)|1516년 - 1570년일본어)
(1559년-1619년)|1559년 - 1619년일본어)
(1592년-1627년)|1592년 - 1627년일본어)
(1626년-1650년)|1626년 - 1650년일본어)
(1631년-1668년)|1631년 - 1668년일본어)
(藤谷為賢)|후지야 다메카타일본어의 아들

(1654년-1722년)|1654년 - 1722년일본어)
(1686년-1741년)|1686년 - 1741년일본어)

(1712년-1774년)|1712년 - 1774년일본어)

(1736년-1816년)|1736년 - 1816년일본어)
(1752년-1822년)|1752년 - 1822년일본어)
(1777년-1848년)|1777년 - 1848년일본어)
(1802년-1845년)|1802년 - 1845년일본어)
(1824년-1885년)|1824년 - 1885년일본어)
(1854년-1905년)|1854년 - 1905년일본어)
귀족원 의원
이세 신궁 대궁사
(1881년-1946년)|1881년 - 1946년일본어)
(1911년-1944년)|1911년 - 1944년일본어)
(1914년-1986년)|1914년 - 1986년일본어)
(西四辻公堯)|니시요쓰지 기미타카일본어의 아들
타메츠구 딸 후미코의 남편
(1944년-)|1944년 - 일본어)
(松尾正雄)|마쓰오 마사오일본어의 아들
타메토 딸 기미코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