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 폰 호프만스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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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187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작가로, 시, 희곡, 오페라 대본,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상징주의와 유미주의를 거쳐 언어에 대한 회의를 겪으며 작품 세계를 변화시켰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협력하여 오페라를 제작하기도 했다. 호프만스탈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문화 비평과 편집 활동에 힘썼으며, 1929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번역, 소개되어 한국 문학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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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 폰 호프만스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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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후고 폰 호프만스탈 |
출생일 | 1874년 2월 1일 |
출생지 | 란트슈트라세, 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사망일 | 1929년 7월 15일 |
사망지 | 로다운, 리징, 오스트리아 |
직업 | 소설가 대본가 시인 극작가 해설가 수필가 |
언어 | 독일어 |
국적 | 오스트리아 |
시민권 | 오스트리아 |
교육 | 아카데미셰스 김나지움 |
모교 | 빈 대학교 |
사조 | 상징주의 |
배우자 | 게르트루트 슐레징거 |
자녀 | 크리스티아네 프란츠 라이문트 |
작품 | |
대표작 | 『차안도스 경의 편지』 (1902) 『장미의 기사』 (1911) 『예더만』 (1911) |
기타 정보 | |
영향 | 슈테판 게오르게 헤르만 바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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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1874년 빈의 란드슈트라세에서 유복한 은행가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1][20] 그의 가문은 유대계 혈통을 지녔으나 할아버지 대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증조부는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2][20] 어린 시절부터 가정교사에게 고전 문학을 배우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고, 아카데미셰스 김나지움 재학 중 이미 필명으로 시와 희곡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3][20] 그는 아르투어 슈니츨러, 슈테판 게오르게 등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며 젊은 빈( Jung–Wiende )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4][20]
빈 대학교에서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이후 문헌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1901년 학업을 마치고 작가 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4] 초기에는 상징주의와 탐미주의 경향의 시와 운문극을 주로 썼으나, 1902년 발표한 『챈들스 경의 편지』는 언어의 표현 능력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그의 예술관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23] 이후 그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전극과 중세 종교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했으며, 『엘렉트라』(1903), 『예더만』(1911) 등이 대표적이다.[23]
1900년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만남은 오페라 대본 작가로서 그의 활동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장미의 기사』(1911), 『그림자 없는 여인』(1919) 등 여러 작품을 함께 만들며 오랜 기간 협력했다.[6] 또한, 그는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192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창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8][26], 이 페스티벌에서 그의 작품 『예더만』은 대표적인 공연으로 자리 잡았다.[6][26]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애국적인 선전 활동에 참여했으며[1][7],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는 그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다.[7] 만년에는 과거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성찰을 담은 문화 평론과 서적 편집에 힘썼다. 1929년 7월, 아들 프란츠가 자살한 지 이틀 뒤 장남의 장례식 날 아침,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22][19]
2. 1. 출생과 청소년기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1874년 빈의 란드슈트라세에서 태어났다.[1][20]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이탈리아계 기독교인 은행 관리자 후고 아우구스트 페터 폰 호프만스탈 남작(1841–1915)이었고,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상류층 기독교인 안나 마리아 요제파 폴로이트너(1852–1904)였다.[1] 아버지 후고 아우구스트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 부모가 결혼한 후에야 합법적으로 호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빈 은행의 행장까지 올랐다.호프만스탈 가문은 보헤미아계, 유대계, 롬바르디아계(이탈리아계), 독일계 혈통을 지녔다. 그의 유대계 정통주의자였던 증조부 이자크 뢰프 호프만(Isaak Löw Hofmannde, 1759-1849)은 성공한 산업가로, 오스트리아에 견직산업을 도입했으며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Edler von Hofmannsthalde"이라는 귀족 작위를 받았다.[2] 그의 아들이자 호프만스탈의 조부인 아우구스틴 에밀 폰 호프만스탈(1815-1881)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850년 이탈리아 시민 출신의 페트로닐라 오르디오니(1815-1898)와 결혼했다. 호프만스탈의 아버지는 독일 농가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다.[20] 1873년 '창업자 시대'의 경제 공황으로 가문은 전 재산을 잃었고, 이후 가족은 아버지의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호프만스탈은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과 가난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그는 자신을 항상 가톨릭 귀족으로 여겼고 때로는 반유대주의적 언급도 했지만, 주변에서는 종종 그를 '유대계' 지식인으로 간주했다.

외아들이었던 호프만스탈은 어릴 적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 문학·라틴 문학을 비롯해 중세, 르네상스 문학 등 유럽 고전 문학을 폭넓게 접했다.[20] 1884년부터는 빈의 엘리트 학교인 아카데미셰스 김나지움에 다녔다.[3] 그는 그곳에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웠고, 특히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공부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3] 그는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고, 조숙하게 지식인들과 교류했으며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다.
김나지움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학생 신분으로는 작품 발표가 어려웠기 때문에, 로리스(Lorisde), 로리스 멜리코프(Loris Melikowde), 테오필 모렌(Theophil Morrende) 등의 필명으로 《디 프레세》( Die Pressede )와 같은 잡지에 시와 희곡, 수필 등을 발표하여 16세 무렵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20] 헤르만 바르는 그의 작품을 읽고 작가가 프랑스인이거나 파리에 오래 산 중년 남성일 것이라 생각했다가, 16세 소년인 호프만스탈을 만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20]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방가르드 문학 그룹 젊은 빈( Jung–Wiende )의 일원으로 분류되었다.[4] 이 그룹은 헤르만 바르, 아르투르 슈니츨러, 펠릭스 잘텐,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등 다양한 성향의 작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카페 그리엔슈타들( Café Griensteidlde )에 모여 정기적으로 교류했다.[24][25] 그는 헨리크 입센,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과 같은 기성 작가들과도 알게 되었다. 12살 연상이었던 아르투르 슈니츨러와는 특히 마음이 맞아 평생의 친구가 되었으며,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행하기도 했다.[21] 슈니츨러는 호프만스탈을 처음 만났을 때 "틀림없이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말했다고 한다.[20] 호프만스탈은 슈니츨러의 희곡 《아나톨》( Anatolde )(1890년)을 위해 "결국 우리가 연기하는 것은 연극 / 마음의 단편의 연극 / 조숙하고 섬세하고 슬프다 / 영혼의 희극"이라는 짧은 시를 썼으며, 이 구절은 당시부터 여러 번 인용되었다.[20]
1891년(17세),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5살 연상의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를 만났다. 게오르게는 호프만스탈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자신이 주재하는 저널 《Blätter für die Kunstde》(예술 초고)에 호프만스탈의 시를 게재했다. 파리의 스테판 말라르메 서클 출신이었던 게오르게는 호프만스탈의 김나지움 교실로 붉은 장미 꽃다발을 보내기도 했다.[20]
1892년, 호프만스탈은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나중에는 로만슈어를 비롯한 문헌학, 특히 시법 연구로 전공을 바꾸었다.[4] 그는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20] 그의 초기 작품들은 상징주의와 탐미주의 경향을 띠며 우아한 형식을 갖춘 시와 정교한 수필, 아름다운 운문극 등으로 나타났다.[23][22] 특히 《광인과 죽음》과 같은 작품은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잘 담아내어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게 했다.
2. 2. 대학 시절과 초기 문학 활동
김나지움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6세 무렵부터 '''Loris''', '''Theophil Morren''' 등의 필명으로 희곡이나 수필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저명한 문학가 헤르만 바르는 그의 시를 읽고 작가가 프랑스인이거나 오랫동안 파리에서 산 40~50대의 빈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실제 16세 소년인 호프만스탈을 만나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20] 아르투어 슈니츨러 역시 같은 시기에 그를 만나 평생 처음으로 천재를 만났다고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말했으며[20], 12살 연상이었음에도 호프만스탈과 깊이 교감하며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탈리아와 스위스까지 여행하기도 했다.[21] 호프만스탈은 슈니츨러의 희곡 『아나톨』(1890년)의 소개를 위해 다음과 같은 짧은 시를 쓰기도 했다.[20]> 결국 우리가 연기하는 것은 연극
> 마음의 단편의 연극
> 조숙하고 섬세하고 슬프다
> 영혼의 희극
이 구절은 당시부터 여러 번 인용되었다.[20]
1891년에는 예술 지상주의를 내세운 5살 연상의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고, 게오르게가 주재하는 『예술 초고』(Blätter für die Kunst)의 기고자가 되었다. 게오르게는 파리의 스테판 말라르메 서클 출신으로, 호프만스탈의 재능을 높이 사 그의 김나지움 교실로 심부름꾼을 보내 빨간 장미 꽃다발을 전달하기도 했다.[20]
1892년, 호프만스탈은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최우등'으로 통과했다. 법학도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첫 번째 사법 국가 시험에 합격한 후 학업을 중단하고 브륀과 괴딩에 있는 제6 경기병 연대에서 1년간 자원 복무했다. 베네치아 여행 후 복학했지만,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프랑스 문학과 로만슈어 연구로 전향했다. 대학 재학 중 시인 레오폴트 폰 안드리안을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에 능통했다.[20]
초기 그의 작품은 우아한 형식을 갖춘 상징주의적이고 유미주의적인 시, 정교한 수필 및 문예론, 아름다운 운문극 등으로 특징지어진다.[23][22] 특히 『광인과 죽음』(Der Tor und der Tod)과 같은 작품은 세기말적 분위기를 잘 담아내 명성을 얻었다. 또한 고대 비극이나 중세 전설을 현대적으로 번안하는 작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23] 이 시기 그는 슈니츨러, 게오르게,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등과 함께 카페 그리엔슈타들에 모여 정기적으로 교류했다.[24][25]
1898년에는 〈플레야드 파 시인들의 언어 사용에 관해서〉(Über den Sprachgebrauch bei den Dichtern der Plejade)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2년간 여행하며 교수 자격 시험 논문을 준비하는 한편, 중요한 인물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1898년 가을에는 베네치아, 1899년에는 파리를 여행하며 모리스 마테를링크와 오귀스트 로댕을 만났다. 같은 해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루돌프 카스너와도 교류를 시작하여 평생 편지를 주고받았다. 1900년에는 당시 베를린 궁정 오페라 악장이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났는데, 이는 호프만스탈에게 가장 풍성한 예술적 결실을 가져다준 만남이 되었다.
27세가 되던 1902년, 그는 세기 전환기 예술가의 정신적 위기를 가상의 편지 형식으로 기록한 『챈들스 경의 편지』(Ein Brief)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언어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러내며 근대 비평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23]
2. 3. 결혼과 언어 위기
1901년, 교수 자격 논문 〈시인 빅토르 위고의 발전에 관한 연구〉를 제출했으나, 교수직을 포기하고 자유 문필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같은 해 6월 1일, 은행가 집안의 딸인 게르트루트 슐레징거(Gertrud Schlesinger)와 결혼했다. 유대인이었던 게르트루트는 결혼 전 기독교로 개종했다.[14]
부부는 빈 교외 로다운(현재 리징의 일부)에 있는 바로크 양식 성으로 이사하여 정착했다. 그곳에서 세 자녀 크리스티아네 폰 호프만스탈(1902–1987), 프란츠 폰 호프만스탈(1903–1929), 라이문트 폰 호프만스탈(1906–1974)을 낳았다.

호프만스탈은 결혼을 사회 질서의 핵심이자 '성스러운 상태'로 여기는 다소 보수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 게르트루트는 일상적인 일로부터 남편을 보호하고 때로는 남편이 구술하는 편지를 받아 적는 역할을 했다. 그는 카를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혼은 숭고한 제도이며 인간의 가련한 존재 속에서 단 하나의 암벽으로 이루어진 성채처럼 우뚝 서 있다"고 쓰기도 했다.
외도와 관련된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신 교환을 통해 여성 작가들과 내밀한 '영혼의 친교'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혼 생활이나 여성과의 우정만으로는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했으며, 다음과 같이 남자들 사이의 우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남자들 사이의 우정이 삶의 내용을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믿기로는 그것은 삶이 포함하고 있는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게 주어진 직업 이외에 그것은 내가 내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내가 어떤 상태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우정을 찾았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900년을 전후하여 호프만스탈은 언어의 표현 능력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서 비롯된 심각한 내적 위기를 겪었다. 이 시기 가정은 그에게 정서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아이들의 탄생과 새로운 인물들과의 우정, 예를 들어 연극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 작가 루돌프 보르하르트, 루돌프 알렉산더 슈뢰더 등과의 관계를 통해 그는 새로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몇 년간 라인하르트 및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협력하여 자신의 대규모 연극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1903년 말과 1904년 초에는 카를 구스타프 폴묄러와 개인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아르투르 슈니츨러, 막스 라인하르트, 특히 알프레트 발터 하이멜의 도움으로 이들은 다소 기묘한 우정을 발전시켰다. 폴묄러는 호프만스탈과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지만, 호프만스탈은 폴묄러의 활동에 대해 다소 의구심을 품었다. 특히 폴묄러가 라인하르트와 긴밀히 협력하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3년과 1914년 사이에 두 작가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각자의 작품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1902년 10월 18일, 호프만스탈은 베를린 일간지 ''Der Tag''에 "Ein Brief" ("편지")라는 제목의 허구적인 편지를 발표했다. 이 글은 1603년 필립 찬도스 경이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보낸 편지 형식을 빌려, "어떤 것에 대해 일관성 있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글쓰기를 중단한다고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온전히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러내며, 당대의 언어에 대한 불신과 위기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10]
이러한 언어 위기는 호프만스탈의 예술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칼 쇼르스케가 "예술의 전당"이라 칭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그는 점차 예술이 현실과 유리되어 생명력을 잃고 인간의 본능이나 열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평면적인 기록이 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예술가의 역할이란 단순히 미적인 것을 창조하고 보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고 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정치에도 참여하는 '세상 속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1]
그는 예술가와 행동가(정치인, 군인 등)가 분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모델을 영국 문화에서 찾았다. 영국인들이 전쟁 영웅인 넬슨 제독과 시인 존 밀턴을 동시에 존경하면서도 확고한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며, 예술가와 사회가 통합된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점증하던 급진적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속에서 예술가와 정치 세력 간의 분열이 심화되던 상황과 대비되는 것이었다.[12][13]
1907년에는 주간 잡지 〈아침〉(Morgen)의 서정시 분야 편집을 맡았다. 같은 해, 빈에 있는 오스트리아 학술 아카데미는 그의 시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Manche freilich)를 낭송하는 목소리를 녹음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독일어권 시인의 목소리를 담은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여겨졌다.
1908년에는 하리 그라프 케슬러,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욜과 함께 그리스를 여행했다. 이 시기 그는 카를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토마스 만, 아르투르 슈니츨러,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인젤 출판사를 설립한 알프레트 발터 하이멜 등 수많은 지식인 및 예술가들과 편지를 통해 긴밀하게 교류했다. 또한 철학자 루돌프 판비츠(Rudolf Pannwitz)나, 이후 나치즘에 동조하게 되는 독문학자 요제프 나들러(Josef Nadler), 작가 막스 멜(Max Mell)과 같이 정치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인물들과도 관계를 맺고 후원하기도 했다.
2. 4. 오페라 대본 작가로서의 활동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1900년 호프만스탈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처음 만났다. 이후 그는 슈트라우스의 여러 오페라 대본을 집필하며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엘렉트라''(1909), 해리 그라프 케슬러와 함께 줄거리를 구성한 ''장미의 기사''(1911), ''낙소스의 아리아드네''(1912, 1916년 개정), ''그림자 없는 여인''(1919), ''이집트의 헬레네''(1928), 그리고 그의 사후 1933년에 초연된 ''아라벨라''(1929) 등이 있다.[6]호프만스탈은 고전 및 중세 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1911년에는 15세기 영국의 도덕극 ''에브리맨''을 독일어 연극 ''예데르만''으로 각색했다.[6] 이 작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음악을 작곡하고 막스 라인하르트가 연출을 맡아, 1920년 처음 개최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잘츠부르크 대성당 앞 광장을 무대로 상연되었다.[26] ''예데르만''은 이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상징적인 주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6]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호프만스탈은 창작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계속 협력하여 새로운 오페라 대본들을 썼으며, 1920년에는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공동으로 창설했다.[8][26] 그의 후기 연극에서는 종교, 특히 로마 가톨릭 신앙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한, 로베르트 비네가 감독한 오페라 ''장미의 기사''의 영화 버전(1925) 각본을 쓰기도 했다.[9]
2. 5. 제1차 세계 대전과 전후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호프만스탈은 40세였고 기혼 상태에 건강도 좋지 않았다.[1] 예비역 장교로 징집되어 이스트라반도로 보내졌으나, 곧 내무부의 전쟁 후생국으로 자리를 옮겨 전선 복무를 피했다. 대신 그는 전쟁을 선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는 글을 써서 발표했으며, 정부의 문화 관련 임무를 맡아 애국적인 연설과 저술 활동을 했다.[1][7] 전쟁 중에는 강연을 위해 여러 외국을 방문했고, 전쟁이 확대되자 크라쿠프, 브뤼셀, 베를린 등지로 공무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1915년에는 그릴파르처의 저작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문학 전집 발간을 시도했으나, 시장의 호응을 얻지 못해 1917년 중단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보수적인 애국자였던 호프만스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말과 함께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이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후 몇 년간은 문학적으로 매우 생산적인 시기였으며, 이전의 작업을 중단 없이 이어갔다.[7] 재정적인 이유로 발행인의 일을 맡기도 했다.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협력을 계속하여 ''그림자 없는 여인''(1919), ''이집트의 헬레네''(1928), ''아라벨라''(1929, 초연 1933) 등 여러 오페라 대본을 썼다.[6]
1919년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했고, 이후 세 차례 더 후보에 올랐지만 끝내 수상에는 실패했다. 스웨덴 작가 페르 할스트룀이 ''장미의 기사''와 같은 작품이 '음탕하다'고 주장하며 반대했고, 반유대주의적 논거까지 동원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1920년에는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창설했다.[8] 이 페스티벌에서는 그가 1911년에 각색한 중세 도덕극 ''예데르만''이 주요 작품으로 상연되었다.[6][8] 그의 후기 작품들은 종교, 특히 로마 가톨릭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경향을 보였다.[9]
1920년부터 1927년까지 베를린, 바르샤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그리고 여러 차례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행했다. 1925년에는 파리, 모로코, 런던, 옥스포드를, 이듬해에는 시칠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특히 이탈리아에 관심을 보였으며, 당시 많은 오스트리아 상류층과 마찬가지로 1922년부터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25년에는 루이 네르츠, 영화감독 로베르트 비네와 함께 ''장미의 기사''의 영화 각본을 집필했다.[9]
1929년, 아들 프란츠가 권총으로 자살한 지 이틀 뒤, 장남의 장례식 날 뇌졸중으로 사망했다.[22]
2. 6. 만년과 죽음
제1차 세계 대전 후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만년에는 과거의 문화와 전통에 결부된 문화 평론과 서적의 편집에 힘썼다. 1920년 처음으로 개최된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발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26], 이때 그의 작품 『예더만』(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음악, 막스 라인하르트 연출)이 잘츠부르크 대성당 앞에서 상연되었다[26].1929년 7월 13일, 그의 아들 프란츠 폰 호프만스탈이 26세의 나이로 권총 자살을 했다.[19] 아들이 자살한 지 이틀 후인 7월 15일, 호프만스탈은 로다운에 있는 자택에서 아들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옷을 입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19] 그는 칼크스부르크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생전에 성 프란체스코 세속 3회와의 유대감을 느꼈기에 그의 소원에 따라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을 입고 묻혔다.[6]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예술가, 정치가, 그리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묘비에는 "내 몫은 현세의 가냘픈 불꽃이나 좁은 칠현금보다는 많았다."라는 그의 말이 새겨졌다.
1938년 3월 12일 안슐루스로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자, 그의 가족들은 망명을 떠나야 했고 재산은 나치에 의해 몰수되었다. 호프만스탈의 부인 게르트루트 "게티" 슐레징어는 1939년 7월부터 옥스퍼드에서 거주했으며, 1947년 영국 국적을 취득한 후 1959년 11월 9일 사망할 때까지 영국에 머물렀다.[14]
아들 라이문트 폰 호프만스탈은 1933년 미국인 아바 앨리스 머리엘 애스터(존 제이콥 애스터 4세의 딸)와 결혼했으나[17] 1939년 이혼했고, 같은 해 영국 귀족 가문의 엘리자베스 파젯(제6대 앵글시 후작의 딸)과 재혼했다.[18] 라이문트는 1974년 3월 20일 사망했다. 딸 크리스티아네 폰 호프만스탈(Christiane von Hofmannsthal, 1902–1987)은 1928년 인도학자 하인리히 치머와 결혼하여[15][16] 하이델베르크에서 살았다. 그러나 남편 치머가 비아리아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자, 1940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포덤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활동했으며, 그녀의 뉴욕 자택은 오랫동안 미국과 유럽 지식인 및 예술가들의 교류 장소가 되었다.[15]
3. 작품 세계와 사상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작품 세계와 사상은 그의 생애에 걸쳐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초기에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유겐트슈틸, 문학적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탐미적인 경향을 보이며,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 시기 그는 슈테판 게오르게의 미학주의에 공감하면서도, 시와 삶의 간접적인 연결을 모색했다. 대표적인 초기작으로는 서정시들과 단편 드라마 《바보와 죽음》 등이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 그는 심각한 '언어 위기'를 겪게 된다. 이는 1902년 발표된 챈도스 경의 편지라는 허구적 편지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기존의 언어로는 더 이상 세계와 내면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드러낸다. 이 위기를 계기로 호프만스탈은 순수한 탐미주의에서 벗어나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연극, 특히 신비극 형식에 주목하며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사회 질서를 반영하는 예술을 추구했다. 《모든 사람》(1911년), 《잘츠부르크 대규모 세계극》(1922년)과 같은 작품을 통해 연극이 개인에게 사회적 위치를 깨닫게 하고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말년의 대표작인 비극 《탑》(1920년대 집필)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혼란스러운 정치·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며 정신과 권력, 정당한 지배와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다. 이처럼 호프만스탈의 문학 여정은 초기 탐미주의에서 출발하여 언어에 대한 깊은 성찰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예술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시대의 문제에 참여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3. 1. 초기 작품: 탐미주의와 상징주의
호프만스탈의 초기 작품 활동은 당대 다른 젊은 시인들처럼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업은 문학적 유겐트슈틸이나 문학적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17세의 호프만스탈은 스스로를 고독 속에서 진정한 존재 형식을 찾는, 향수에 젖은 인물로 여겼다. 그는 당시 자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8살이 되었을 때 그는 반쯤 잊힌 낮이 뿜어내는 향기에서 가장 커다란 매력을 발견했고, 많은 일들을 그저 미래의 아름다운 기억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둔한 본능에 따라서 행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체념하게 된 그는 현재의 가치와 매력을 과거가 되어버린(현재)로부터 기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초기 서정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독', '죽음', '삶'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며, 아름다움은 죽음과 몰락 속에 있고, 삶이 공허해지는 지점에서 몰락은 오히려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첫 8행시 〈삶〉은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태양이 생기가 사라져 공허한 낮을 향해서
:도시를 향해서 금빛 찬란하고 격렬하게 가라앉는다
:마찬가지로 태양이 이야기할 것과 선사할 것이 많은
:시간을 향해서 다양한 모습으로 가라앉는다.
:황금의 대기는 그림자를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라앉아버린 낮의 창백하고 부드러운 형상의 그림자를
:미끄러지듯 사라진 모든 시간을
:모습이 바뀐 가능성의 숨결이 휘감고 있다
이 시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뒤로 물러나 있으며, 인상의 세계는 상징적 의미를 담은 사물들(태양, 도시, 시간, 그림자) 속에 존재한다. 감정은 직접 묘사되기보다 사물을 통해 드러난다.
호프만스탈의 초기 작품은 많은 젊은 문학가들이 천재로 칭송받던 시기에 나왔지만, 소수만이 그 기대를 충족시켰다. 호프만스탈 역시 오랫동안 초기 서정시와 단편 드라마, 특히 18세 때 쓴 《바보와 죽음》으로 얻은 명성에 의해 평가받았다. 이 작품은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꼽히기도 했지만, 정작 호프만스탈 자신은 이러한 초기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그의 문학적 중요성은 일찍부터 시학적 성찰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기말의 다른 작가들처럼 체계적인 문학 이론보다는 에세이나 문학적 형식의 성찰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그의 초기 견해는 후기 언어에 대한 회의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젊은 호프만스탈은 슈테판 게오르게의 미학주의에 깊이 공감했다. 그는 시적 언어가 일상 언어와 구분되어야 하며, 자체적인 법칙을 가진 완결된 예술 세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예술은 외부 목적에 봉사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시로부터 삶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통로는 없다. 삶에서 시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통로도 없다. 삶의 내용을 담고 있는 단어와 시에서 존재하는 꿈과 같은 유사한 단어는 서로 떨어지려고 애를 쓰며, 우물에 있는 2개의 두레박처럼 서로의 곁을 낯선 존재처럼 지나쳐 간다."[28] 이는 게오르게의 주장, 즉 "의미가 아니라 형식이 (...) 시의 가치를 결정한다"[29]는 생각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게오르게와 달리 호프만스탈은 시가 분위기, 환상, 경험과 연관되어 있으며, '삶'을 완전히 부정하는 대신 간접적으로 삶으로 다시 이끈다고 강조했다. 독문학자 쿠프만(Koopmann)은 이를 시와 삶이 비유와 상징 속에서 모범적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호프만스탈 자신도 "비유가 소나기, 번개, 폭풍의 형태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위대한 세계의 연관관계를 예감하게 되고, 전율하면서 이념의 현존을 감지하게 되는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적 깨달음"의 상태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30]
1898년 작 〈시예술〉에서는 시 창작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시무시하군 이 예술은! 나는 내 몸에서 실을 자아낸다
:동시에 이 실은 공중에 걸린 내 길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신의 몸(정신이 아닌, 삶과 감정이 자리한 곳)에서 실을 뽑아 줄타기를 하는 존재에 비유된다. 테르치네, 아랍의 시형식(Ghasel), 8행시 등 엄격하고 이국적인 운율 체계는 이러한 균형 잡기, 즉 시 창작 행위의 성공을 돕는 장치로 여겨졌다. 시문학의 임무는 객관적 세계 묘사나 주관적 인상 수집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시인이 딛고 선 줄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인이 몸에서 뽑아낸 이 팽팽한 실은 끊어지고 만다. 1902년 10월, 베를린의 문학 잡지 〈대낮〉(Der Tag)에 발표된 〈챈도스의 편지〉는 호프만스탈이 청춘 시대의 시학을 부정하게 된 절망감을 상세히 드러낸다. 답장을 받지 못할 수신자에게 보내는 허구의 편지 형식을 빌려, 그는 말하기의 불가능성을 토로한다.
:연관성을 지닌 채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 '정신', '영혼', '육체'와 같은 단어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어떤 판단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입술이 사용해야만 하는 추상적인 단어들이 내 입안에서 부패한 버섯처럼 부서집니다(챈도스의 편지 1902년에서 인용)
〈챈도스의 편지〉는 호프만스탈의 예술관에 중요한 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과거의 삶을 언어, 삶, 자아가 분리되지 않은 통일체로 회상하지만, 이제 언어로는 삶을 재현할 수 없으며, 삶은 오히려 사물 속에 직접 현존한다고 느낀다.
:글을 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내게 주어진 언어는 라틴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이탈리아어도 아니고 스페인어도 아닌 언어, 말 없는 사물이 때때로 내게 말을 건낼 때 사용하고, 내가 향후 무덤에서 알지 못하는 심판관 앞에서 책임
:을 져야만 할지도 모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같은 곳에서 인용)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언어는 기호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계시'적인 것이어야 했다. 편지는 이러한 요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한 답 없이 화자의 침묵으로 끝나지만, 이를 통해 호프만스탈은 최종적으로 슈테판 게오르게와 그의 탐미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후 그는 언어와 화해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는 특히 그가 점차 관심을 기울인 연극 분야와 관련된다.
3. 2. 언어 위기와 『챈도스 경의 편지』
호프만스탈의 문학적 중요성은 그가 초기부터 자신의 작품과 시학에 대한 성찰을 꾸준히 해왔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기말의 다른 작가들처럼 체계적인 문학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에세이나 문학적 형식을 빌린 성찰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 그의 초기 견해는 후기의 언어에 대한 회의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젊은 시절 호프만스탈은 슈테판 게오르게의 미학주의에 깊이 공감했다. 그는 시적 언어가 일상 언어와 구분되어야 하며, 그 자체로 완결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믿었다. 예술은 외적인 목적에 봉사할 필요가 없으며, "시로부터 삶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통로는 없다. 삶에서 시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통로도 없다"고 단언했다.[28] 이는 리듬과 음향 같은 형식이 시의 가치를 결정하며, 의미는 부차적이라는 게오르게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29] 하지만 게오르게와 달리, 호프만스탈은 시가 분위기, 환상, 경험과 연결되어 있으며,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삶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시와 삶이 비유와 상징 속에서 결합될 수 있으며, '기이하게 진동하는 상태' 속에서 "잠시 동안 위대한 세계의 연관관계를 예감하게 되고, 전율하면서 이념의 현존을 감지하게 되는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30] 1898년에 쓴 짧은 시 〈시예술〉에서는 시인을 "내 몸에서 실을 자아내" 공중에 길을 만드는, 즉 언어라는 줄 위를 걷는 줄타기꾼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에 대한 믿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2년 10월 18일, 베를린의 문학 잡지인 〈대낮〉(Der Tag|더 타크de)에 "Ein Brief" ("편지")라는 제목의 허구적인 편지를 발표하면서, 그는 이전의 시학을 부정하고 깊은 언어 위기를 드러냈다. 이 글은 1603년 필립 챈도스 경이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려, 언어를 통한 소통과 사유의 불가능성을 고백한다. 챈도스는 "연관성을 지닌 채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라고 말하며, '정신', '영혼', '육체'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내 입안에서 부패한 버섯처럼 부서진다"고 토로한다.
챈도스 경의 편지는 호프만스탈의 예술관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편지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묘사하는 능력에 대한 회의이자, 당대의 지식인들이 느꼈던 언어에 대한 불신과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0] 그는 이전까지 믿었던 언어, 삶, 자아의 통일성이 깨졌음을 인정하고, 언어로는 더 이상 삶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사물 자체에 내재된, 기호를 통하지 않는 직접적인 언어, 즉 '계시'와 같은 새로운 소통 방식을 갈망하게 된다. 이 편지는 그가 슈테판 게오르게의 탐미주의에서 최종적으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호프만스탈은 언어와 화해하는 길을 모색하며, 특히 연극에 점차 관심을 기울였다. 《장미의 기사》(1911년)를 구상하며 그는 언어와 음악을 모든 생명력을 형상으로 불어넣는 일종의 '기운'으로 파악했다. 또한 언어가 사회적 지위와 시대를 특징짓는 '상상적' 힘을 지니며, 시의 새로운 임무는 과거의 세계(귀족 사회 등)를 창조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언어 위기와 성찰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칼 에밀 쇼르스케가 "예술의 전당"이라 묘사한 환경에서 자랐지만[11], 호프만스탈은 예술이 삶의 생생함을 포착하지 못하고 단지 평면적인 기록에 머무른다고 느꼈다. 그는 예술가가 단순히 현실을 모방하거나 보존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하며, 사회와 유리된 채 작업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세상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1]
호프만스탈은 이러한 이상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영국 문화에서 찾았다. 그는 영국이 전쟁 영웅인 넬슨과 위대한 시인 존 밀턴을 동시에 존경하며, 예술가와 행동가(정치가, 군인 등) 사이의 분열 없이 통일된 국가 정체성을 유지한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가 겪고 있던 급진적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의 대두, 그리고 진보적 예술가와 정치가 사이의 깊어지는 갈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12][13] 호프만스탈은 분열된 오스트리아의 현실 속에서 영국의 통합된 문화적 힘을 동경하며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3. 3. 연극과 사회적 역할
신비극은 원래 중세 후기에 생겨난 형식으로,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다시 사용하였고, 19세기에는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과 카를 임머만이 이를 발전시켰다. 호프만스탈은 이 형식을 독일 문학의 뿌리로 돌아가는 길이자, 관객을 단순한 '관중'이 아닌 공동체 의식을 지닌 '독일 민중'으로 다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으로 여겼다. 그는 "관중은 요동치고, 경솔하고 변덕스럽다. 민중은 오래되고 현명하며 자신에게 유익한 영양분을 알고 있는 거대한 몸뚱이"라고 구분하며, 민중이 가진 집단적 지혜와 공유의 힘을 강조했다.호프만스탈은 현재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우의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우의는 "흘러서 사라지는 세계의 본질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확실한 대조로 응축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대를 다시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대표적인 대규모 신비극으로는 《모든 사람》(Jedermann, 1911년)과 《잘츠부르크 대규모 세계극》(Das Salzburger große Welttheater, 1922년)이 있다.
호프만스탈에 따르면, 연극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이 세계와 사회 안에서 각자 자신이 차지하는 자리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능력에 있다. 그는 연극이 "사랑처럼 아주 도덕적인 훈육을 시킨다"고 보았다. 즉, 사랑과 연극 모두 개인의 특별함이나 우월함을 용납하지 않으며, 위대한 사람이든 보잘것없는 사람이든 모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복종하고 겸손해야 함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개인은 인류 전체와 분리될 수 없으며, 진정한 위대함은 인류 전체와 공유하는 것의 종류와 크기에 달려있다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고 설명했다.[31]
결론적으로 연극의 임무는 사회의 질서를 표현하는 동시에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개인은 사회보다 우위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연극은 개인에게 그에게 주어진 위치를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프만스탈은 "연극을 진지하게 다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정치적 장으로 남는다. 대중 앞에 등장함으로써 사람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연극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을 강조했다.[31]
3. 4. 비극 『탑』과 정치적, 사회적 현실
호프만스탈의 마지막 창작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비극 『탑』이었다. 그는 1920년 여름부터 1927년 늦가을까지 이 작품의 최종적인 형태와 무대 상연에 적합한 형식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했다. 작가가 생전에 여러 판본을 출간했는데, 초기 두 판본에서는 주인공 지기스문트가 평화의 제국을 건설한 신비로운 어린이 왕에게 통치권을 넘겨주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와 네 번째 판본에서는 반란자 올리비에가 승리하여 지기스문트를 교활하게 살해하고 폭력적인 지배를 확립하는 것으로 끝난다.호프만스탈은 이 비극을 통해 자신이 살던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담아내고 해석하고자 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이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으며, 정신과 권력 사이의 갈등, 그리고 정당한 지배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룬다. 드라마의 사건 전개는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역사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사건과 엮여 있으며, 이를 통해 작품은 독특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호프만스탈 자신도 이러한 형식 덕분에 "이 비극작품이 지닌 초역사적인 특성"과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부유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는 칼데론(Calderon)의 희곡 인생은 꿈에서 영감을 받아 구상되었으며, 호프만스탈은 1901년부터 이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보여왔다. 드라마의 형식적 측면에서는 고전주의 비극보다는 바로크 시대 비극의 특징을 따르고자 했는데, 이러한 점은 발터 벤야민이 서평에서 처음으로 지적한 바 있다.
4. 주요 작품 목록
=== 희곡 ===
- 《어제》 Gesternger (1891)
- 《티치아노의 죽음》 Der Tod des Tizianger (1892)
- 《어리석은 자와 죽음》 Der Tor und der Todger (1893) - 모리 오가이가 번역함
- 《황제와 마녀》 Der Kaiser und die Hexeger (1900, 운문극)
- 《엘렉트라》 Elektrager (1903) - 그리스 고전극에 기초
-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Ödipus und die Sphinxger (1906)
- 《창가의 여인》 Die Frau im Fensterger (1909)
- 《크리스티나의 귀향》 Christinas Heimreiseger (1910)
- 《예더만》 Jedermannger (1911)
- 《알케스티스》 Alkesisger (1916) - 그리스 고전극에 기초
- 《더 쉬비리게》 Der Schwierigeger (1921)
- 《잘츠부르크의 대 세계 극장》 Das Salzburger große Welttheaterger (1922)
- 《탑》 Der Turmger (1925)
=== 오페라 대본 ===
- 《엘렉트라》 Elektrager (1909)
- 《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ger (1911)
-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Ariadne auf Naxosger (1912, 개정 1916)
- 《그림자 없는 여인》 Die Frau ohne Schattenger (1919)
- 《이집트의 헬레나》 Die ägyptische Helenager (1928)
- 《아라벨라》 Arabellager (1933)
=== 서사 및 허구적 대화 ===
- 《672번째 밤의 이야기》 Das Märchen der 672. Nachtger (1895)
- 《기병 이야기》 Reitergeschichteger (1899)
- 《바솜피에르 원수의 경험》 Erlebnis des Marschalls von Bassompierreger (1900)
- 《어떤 편지 (챈도스 경이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보낸 편지)》 Ein Brief (Brief des Lord Chandos an Francis Bacon)ger (1902)
- 《길과 만남》 Die Wege und die Begegnungenger (1907)
- 《귀환자의 편지》 Die Briefe des Zurückgekehrtenger (1907-1908)
- 《낯선 소녀》 Das fremde Mädchenger (1911)
- 《북아프리카 여행》 Reise im nördlichen Afrikager (1925)
=== 소설 (단편) ===
- 《안드레아스 또는 연합》 Andreas oder Die Vereinigtenger (1907-1927, 미완)
=== 에세이, 연설, 산문 ===
- 《현대적 사랑의 생리학》 Zur Physiologie der modernen Liebeger (1891)
- 《시와 삶》 Poesie und Lebenger (1896)
- 《시에 대하여》 Über Gedichteger (1904)
- 《시인과 이 시대》 Der Dichter und diese Zeitger (1907)
- 《상류층에의 호소》 Appell an die oberen Ständeger (1914)
- 《전쟁과 문화》 Krieg und Kulturger (1915)
- 《우리 오스트리아인과 독일》 Wir Österreicher und Deutschlandger (1915)
- 《그의 시에 비친 오스트리아》 Österreich im Spiegel seiner Dichtungger (1916)
- 《프로이센인과 오스트리아인》 Preuße und Österreicherger (1917)
- 《유럽의 이념》 Die Idee Europager (1917)
- 《친구의 책, 격언》 Buch der Freunde, Aphorismenger (1922)
- 《초기 산문》 Früheste Prosastückeger (1926)
- 《독일어의 가치와 명예》 Wert und Ehre deutscher Spracheger (1927)
- 《문학은 국가의 정신적 공간이다》 Das Schrifttum als geistiger Raum der Nationger (1927)
=== 시 ===
- 《그대는 도시를 보는가?》 Siehst du die Stadt?ger (1890)
- 《산책》 Spaziergangger (1893)
- 《바깥 삶의 발라드》 Ballade des äusseren Lebensger (1894)
- 《3행시로 된 시》 Gedichte in Terzinenger (1894)
- 《거대한 마법의 꿈》 Traum von großer Magieger (1896)
- 《시집》 Gedichteger (1922)
5.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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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Fin-de-siècle Vienna: Politics and Culture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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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or Heiress Wed Quietly in Jersey. Princess Obolensky Becomes Bride of Raimund von Hof-mannsthal of Austria. Troth Not Announced. Ceremony Performed Saturday by Police Court Judge. Couple Left Immediately for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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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ce of Astor Wed in London To Art Director; Miss von Hofmannsthal Is Married to Roderick McEwen of Spect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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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IAN POET DIES AFTER SON'S SUICIDE; Hugo von Hoffmannsthal Succumbs to Heart Attack When Dressing for the Fu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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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トバンク「ホフマンスター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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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앞에서의 연극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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