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 야요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쓰이 야요리는 교토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여성 운동가로, 아사히 신문 기자, 아시아 여성 자료 센터 대표 등을 역임했다. 도쿄 외국어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 기자로 사회부에서 복지, 여성 문제 등을 취재했으며, 싱가포르 특파원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1977년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을 설립하고, 1998년에는 '전쟁 중 여성 폭력 네트워크' 일본 지부 설립을 돕는 등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제도를 심판하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의 일본 측 주최자 대표를 맡았으며, 2002년 아프가니스탄 방문 후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보도와 활동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건립에 기여하는 등 여성 운동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여권운동가 - 이치카와 후사에
이치카와 후사에는 일본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고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으며, 참의원에 당선되어 선거 개혁과 여성 관련 의제에 힘썼다. - 일본의 여권운동가 - 야마카와 키쿠에
일본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야마카와 키쿠에는 여성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도입하여 일본 여성 해방 운동의 사상적 원점으로 평가받으며,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모성 보호의 양립을 주장하고 전후에는 일본 사회당에서 여성 권익 향상에 기여했다. - 일본군 위안부 관련자 - 에다 사쓰키
에다 사쓰키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전직 판사로 사회민주연합 대표, 과학기술청 장관, 법무대신, 참의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아버지의 사망 후 정계에 입문하여 민주당에서 중의원 및 참의원 의원을 지내고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 의장을 역임, 간 내각에서 법무대신을 역임했다. - 일본군 위안부 관련자 - 가토 고이치 (1939년)
가토 고이치는 야마가타현을 대표하여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으로, 방위청 장관과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으며, 자민당 내 개혁파였으나 모리 요시로 내각 불신임안 찬동 시도인 '가토의 난' 이후 정치적 시련을 겪고 2012년 낙선 후 은퇴, 2016년 사망했다. - 아사히 신문사 사람 - 세나가 카메지로
세나가 카메지로는 오키나와 출신으로 노동운동가, 언론인,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나하시장, 입법원 의원, 중의원 의원을 역임하고 일본 공산당 부위원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 아사히 신문사 사람 - 이시이 미쓰지로
이시이 미쓰지로는 일본의 정치인, 기업인, 스포츠 행정가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상공상,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부총리를 역임하고 자유민주당 간사장과 중의원 의장을 지냈으며, 일본골프협회 회장과 일본체육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 마쓰이 야요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출생일 | 1934년 4월 12일 |
| 출생지 | 일본 교토 |
| 사망일 | 2002년 12월 27일 |
| 사망지 | 일본 도쿄 |
| 국적 | 일본 |
| 직업 | 언론인, 여성 운동가 |
| 알려진 업적 | 아시아 여성 권리 |
| 학력 | |
| 모교 | 도쿄 외국어 대학교 영미과 |
| 경력 | |
| 주요 활동 |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 대표 |
| 저서 | |
| 주요 저서 | 페미니스트 운동 (현대 일본) 현대 동아시아의 젠더 : 통합된 역사 그림자 속의 외침 : 일본 여성 해방 운동 |
| 일본어 정보 (참고) | |
| 이름 (일본어) | 松井 やより (마쓰이 야요리) |
| 한국어 정보 (참고) | |
| 이름 (한국어) | 마쓰이 야요리 |
2. 생애
마쓰이 야요리는 일본 교토의 기독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성장했다.[5] 결핵으로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했으나 도쿄 외국어 대학교 영미학과에 진학했다.[6] 대학 시절 미국과 유럽 여행 중 겪은 인종차별과 불평등 경험은 그가 페미니즘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3]
1961년 대학 졸업 후 아사히 신문 기자로 입사하여 공중 보건, 환경 문제, 여성 문제 등을 취재했다.[6][7] 1976년에는 아시아 여성들의 성 착취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이후 아시아 여성 연대로 발전)을 설립했으며,[7] 1981년 싱가포르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 취재했다.[7] 이로써 그는 아사히 신문 최초의 여성 아시아 총국 특파원이 되었다.[9]
1994년 아사히 신문을 퇴직한 후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95년 아시아-일본 여성 자원 센터를 설립했고,[4] 1998년에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일본 네트워크(VAWW-NET)를 창설하여 대표를 맡았다.[4] 같은 해부터 여러 여성 단체와 협력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 제국군의 전쟁 범죄를 다루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 조직을 주도했다.[10]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여 현지 여성 운동가들과 교류했으나,[5] 귀국 후 간암 진단을 받았다.[5] 투병 중에도 활동을 이어가다 2002년 12월 27일 도쿄에서 사망했다.[5][15] 그의 유지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건립과 '야요리상' 제정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2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마쓰이는 일본 교토에서 기독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5] 이후 가족과 함께 도쿄로 이사했고, 부모는 야마테 기독교 교회를 설립하여 여섯 자녀를 키웠다.[5] 아오야마가쿠인 중등부를 졸업했으나[18], 심각한 결핵으로 인해 고등학교 졸업은 하지 못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외국어 대학교 영미학과(영국 및 미국 연구과)에 입학하여 1961년 졸업했다.[6]대학 3학년 때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페미니즘 운동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바바라 몰로니, 재닛 테이스, 최혜월은 저서 ''Gender in Modern East Asia''에서 마쓰이가 여행 중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서구와 아시아 간의 부와 평등의 격차에 놀랐다고 언급했다.[3] 이러한 경험은 이후 마쓰이가 "범 아시아 페미니스트 연대"를 추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미국의 페미니즘이 단순히 남성과 동등한 권력을 추구하는 방식("남성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잡을 권리를 의미하는 미국의 권한 부여 모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4]
2. 2. 언론인 경력
1961년, 도쿄외국어대학교 영미학과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했다. 사회부 기자로서 복지, 공해, 소비자 문제, 여성 문제 등을 주로 취재했으며, 사회부 톱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이후 다치카와 지국장, 편집위원을 거쳐 1981년 11월부터 1985년 3월까지 싱가포르·아시아 총국원으로 활동했다. 1994년 아사히 신문사에서 정년 퇴직했다.2. 3. 여성 운동과 국제 연대
마쓰이는 대학교 3학년 때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며 페미니즘 운동을 처음 접했다. 바바라 몰로니, 재닛 테이스, 최혜월은 저서 ''Gender in Modern East Asia''에서 마쓰이가 여행 중 겪은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서구 사회와 아시아 간의 부와 평등의 불균형에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했다.[3] 이러한 경험은 이후 마쓰이가 "범아시아 페미니스트 연대"를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의 페미니즘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잡을 권리를 의미하는 미국의 권한 부여 모델"이라며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4]1961년 아사히 신문 기자로 입사한 마쓰이는 사회부 기자로서 복지, 공해(미나마타병 등), 소비자 문제 등과 함께 여성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취재 활동을 펼쳤다.[6][7] 그는 아사히 신문과 자신이 설립한 아시아 여성 협회의 대표 자격으로 1975년부터 1995년까지 모든 유엔 회의에 참석하며 국제적인 활동 경험을 쌓았다.[8]
1976년(1977년이라는 기록도 있음)에는 아시아 지역의 성 관광 문제에 반대하며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이후 아시아 여성 연대로 발전)을 설립했다. 1981년에는 싱가포르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군에 의해 성적 착취를 강요당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직접 만나 취재했다.[7] 이는 마쓰이가 아사히 신문 최초의 여성 아시아 총국 특파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9] 위안부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후 활동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1994년 아사히 신문을 정년 퇴직한 마쓰이는 일본 기업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동남아시아 성 관광 문제 등을 계기로 사회 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퇴직 직후인 1995년에는 아시아-일본 여성 자원 센터를 설립했고,[4] 1998년에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일본 네트워크(VAWW-NET)의 일본 지부 설립을 도왔다.[4] 또한 아시아-일본 여성 자원 센터 및 여러 일본, 동아시아 여성 단체들과 협력하여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 제국군의 위안부 제도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를 다루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도쿄 여성 전쟁 범죄 재판소)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0] 이 모의 법정에서 그는 국제 실행 위원회 공동 대표이자 일본 측 주최자 대표를 맡았다.
마쓰이는 국제 연대 활동에도 힘썼다.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여 현지 여성 페미니스트 활동가들과 교류했다.[5] 2002년 8월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아시아·미국·푸에르토리코의 네트워크'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군사주의를 강화하고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을 증폭시킨다고 비판하는 공동 성명 발표에 참여했다.[19]
마쓰이의 위안부 관련 활동에 대해서는 일부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프리 저널리스트 다치 마사코는 1992년 서울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 회의'에서 마쓰이와 후쿠시마 미즈호가 특정 발언을 제지하려 했다고 주장했으며,[26] 전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 나가오카 노보루는 마쓰이가 기자라기보다는 활동가에 가까웠으며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직업윤리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하기도 했다.[29] 전 마이니치 신문 기자 도쿠오카 타카오 역시 마쓰이가 위안부 강제 연행을 확신하고 아사히 신문이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고 언급했다.[30]
마쓰이의 유지를 이어받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 설립되었으며, 이곳에는 그의 장서를 모아둔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 NPO 법인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인권 기금'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05년 '야요리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21]
2. 4. 말년과 사망
1994년 아사히 신문을 정년 퇴직한 마쓰이는 일본 기업인들의 동남아시아 성 관광 실태 등을 접하며 사회 운동가로 전념하기로 결심했다.[4] 퇴직 직후인 1995년에는 아시아-일본 여성 자원 센터를 설립했고,[4] 1998년에는 전쟁 중 여성 폭력 네트워크(VAWW-NET) 일본 지부 설립을 도왔으며,[4]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일본 네트워크를 창설하여 대표를 맡았다. 같은 해부터 2000년까지는 여러 여성 단체와 협력하여 일본 제국군의 위안부 제도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 범죄를 다루는 도쿄 여성 전쟁 범죄 재판소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2000년 12월에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모의 재판)에서 국제 실행 위원회 공동 대표이자 일본 측 주최자 대표를 맡았다.2001년에는 여성 인권 운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는데,[5] 이때 얻은 병이 이후 간암으로 발전했다.[5] 2002년 8월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아시아·미국·푸에르토리코의 네트워크'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여,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이 군사주의를 강화하고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을 심화시킨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19] 마지막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002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여행 중 건강 이상을 느껴 귀국한 뒤 중증 간암 진단을 받았다.[15] 마쓰이는 암 투병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자서전 집필과 구상 중이던 여성 박물관 설계 작업을 계속했다.[6]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2개월 반의 투병 끝에 2002년 12월 27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5][6][15] 장례식은 12월 30일 도쿄 야마테 교회에서 열렸으며, 아사히 신문은 그의 유고를 게재했고 한국의 동아일보도 추도 기사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20]
마쓰이는 유언에 따라 자신의 자산을 여성 전쟁과 평화를 위한 인권 기금에 기부했다.[14] 이 기금은 2005년 8월 도쿄에 개관한 여성 전쟁과 평화 액티브 박물관(WAM) 건립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박물관은 도쿄 여성 전범 재판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14] '액티브 뮤지엄'이라는 이름처럼 역사를 통해 대중을 교육하고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6][14] 또한 마쓰이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NPO 법인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인권 기금'은 2005년 '야요리상'을 제정했다.[21] 나카하라 미치코, 이케다 에리코, 다케노부 미에코, 신숙옥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22]
사후 일부에서는 마쓰이가 투병 중 받은 기부금 150만엔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해당 기금은 실제로는 박물관 건립 비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10]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를 비롯한 전쟁 피해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마쓰이의 활동과 저술은 일본과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성 평등 운동에 지속적인 영감을 주고 있다.
3. 여성국제전범법정 (도쿄여자전범재판소)
마쓰이 야요리는 1998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여성 연대 회의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위한 정의 실현을 목표로 '여성 국제 전범 법정'(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개최를 제안했다.[11] 이 구상은 남한과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국가 여성 단체들의 지지와 협력을 통해 현실화되었다.[11]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준비 기간을 거쳐 2000년 12월, 도쿄에서 법정이 열렸다.[11] 이 법정은 법적 구속력은 없었으나, 실제 형사 재판 절차를 준용하여 진행되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과 관련 문서들을 통해 일본 정부와 당시 쇼와 천황의 책임을 묻고자 했다.[11][12] 특히 이전의 전범 재판들과 달리 쇼와 천황을 피고로 명시하여 전쟁 범죄의 책임을 직접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1] 일본 정부는 법정의 초청을 거부하고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다.[11]
재판부는 일본 정부와 쇼와 천황이 위안부 제도 운영을 통해 인류에 반한 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했다.[11] 비록 법적 강제력은 없었지만, 이 법정은 피해자들에게 상징적인 정의를 제공하고, 감춰졌던 역사적 사실과 기록들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2] 또한, 이는 전쟁 범죄에 대한 시민 사회의 적극적인 개입과 역사 정의 실현 노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12] 그러나 일본 내 보수 세력과 언론은 법정을 외면하거나 비판했으며, NHK의 관련 보도가 당시 아베 신조 총리 등 보수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수정되는 등 논란도 있었다.[13][10]
3. 1. 배경과 설립
1998년, 마쓰이 야요리는 '일본의 전쟁 중 여성 폭력 네트워크'(VAWW-NET)를 통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여성 연대 회의에서 중요한 제안을 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성 노예 제도로 고통받은 여성들을 위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인 재판, 즉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열자는 것이었다.[11] 마쓰이의 이러한 구상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재판을 현실화하기 위해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타이완,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여성 인권 단체 및 활동가들과의 국제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11]본격적인 법정 준비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도쿄와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은 위안소 제도가 피해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국제조직위원회가 주도했다.[11] 마침내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닷새간 도쿄에서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일본군에 의해 운영된 위안소에서 직접 피해를 겪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또한 동아시아 각국과 네덜란드 출신의 전직 위안부들을 대변하는 변호사들과 전문가들도 참여하여 증언의 신빙성을 더했다.[11]
이 법정은 과거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다룬 다른 재판들과는 다른 중요한 특징을 가졌다. 바로 쇼와 천황을 피고 중 한 명으로 명시하여, 그가 위안부 동원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직접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법정은 일본 정부와 천황 측에 대표 파견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며 재판 절차에 참여하지 않았다.[11]
3. 2. 준비 과정과 재판 진행
1998년, 일본의 전쟁 중 여성 폭력 네트워크(VAWW-NET)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여성 연대 회의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의 성 노예 제도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재판 개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11] 마쓰이 야요리는 이 구상을 지지하고, 재판을 현실화하기 위해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타이완,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그리고 남북한의 여성 단체 및 옹호자들과 협력했다.[11]재판 준비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도쿄와 서울에서 진행되었으며, '위안소 제도가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국제조직위원회가 주도했다.[11] 재판은 2000년 12월 8일부터 12월 12일까지 도쿄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일본군이 사용했던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들과 동아시아 및 네덜란드 출신의 전직 위안부를 대표하는 변호사 및 전문가들이 증언했다.[11] 이전의 일본군 전쟁 범죄 재판들과는 달리, 이 재판에서는 쇼와 천황을 피고 중 한 명으로 지명하고 위안부에게 저질러진 범죄에 공모했다고 비난했다.[11] 일본 정부는 초청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천황을 대표하는 인사를 재판 과정에 파견하는 것을 거부했다.[11]
재판은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표준 형사 재판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75명 이상의 피해 생존자들이 참석했고, 35명의 전직 위안부들이 증언했다.[12] 일본 제국 전역에서 이 여성들에게 저질러진 납치, 강간, 성적 학대 및 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포함한 만행에 일본 정부와 천황이 연루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이 제시되었다.[11] 재판을 주재한 재판관들은 일본 정부와 쇼와 천황이 위안부 제도라는 군사 정책의 형태로 인류에 반한 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했다. 이후 2001년에는 예비 판결을 확정하는 보다 완전한 판결이 내려졌다.[11] 비록 이 재판이 실제 법적 권한을 갖지 못했고 위안부 제도에 참여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이 그들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전직 위안부들에게 일종의 정의를 가져다주었고, 그 과정에서 일본과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전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역사적 문서와 기록들을 공개했다.[12] 이 재판은 정의와 법에 있어서 시민 사회의 힘을 대변했으며, 역사 발굴 및 보존에 대한 사회 참여의 가치를 보여주었지만, 비판과 공격도 받았다. 일본 주류 언론은 이 재판을 무시했고,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인 일본방송협회(NHK)의 보도는 당시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를 포함한 보수 지도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수정되었다.[13] "좌파 감시자"인 나카미야 다카시와 같은 이 재판의 비방자들은 재판의 가치와 마쓰이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이 재판을 '모의 재판'이라고 비난했다.[10] 다카라지마 잡지의 "리얼" 시리즈 판에는 '예외적으로 멍청한 여성'에 대한 기사가 실렸으며, 마쓰이를 그 여성들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나카미야는 그녀에 대한 부분을 작성하며 그녀를 "죄 많은 여자"라고 부르고, 그녀의 활동가적 활동이 탐욕과 자아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고 비판했다.[10] 이 기사는 주로 우익 성향의 남성들이 작성했으며, 저명한 좌파 및 여성 운동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10]
3. 3. 결과와 의의
재판은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표준 형사 재판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75명 이상의 피해자들이 참석했고, 35명의 전직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증언했다.[12] 재판 과정에서는 일본 제국 전역에서 여성들에게 자행된 납치, 강간, 성적 학대 및 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포함한 만행에 일본 정부와 쇼와 천황이 연루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이 제시되었다.[11] 재판을 주재한 재판관들은 일본 정부와 쇼와 천황이 위안부 제도라는 군사 정책의 형태로 인류에 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했다. 이후 2001년에는 예비 판결을 확정하는 보다 완전한 판결이 내려졌다.[11]비록 이 재판이 실제 법적 권한을 갖지 못했고 위안부 제도에 참여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이 그들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전직 위안부들에게 일종의 정의를 가져다주었고, 그 과정에서 일본과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전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역사적 문서와 기록들을 공개했다.[12] 이 재판은 정의와 법에 있어서 시민 사회의 힘을 대변했으며, 역사 발굴 및 보존에 대한 사회 참여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재판은 비판과 공격도 받았다. 일본 주류 언론은 이 재판을 무시했고, 일본 공영방송인 일본방송협회(NHK)의 보도는 당시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를 포함한 보수 지도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수정되었다.[13] "좌파 감시자"를 자처한 나카미야 다카시와 같은 이 재판의 비방자들은 재판의 가치와 마쓰이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이 재판을 모의 재판이라고 비난했다.[10] 다카라지마 잡지의 "리얼" 시리즈 판에는 "예외적으로 멍청한 여성"에 대한 기사가 실렸으며, 마쓰이를 그 여성들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나카미야는 그녀에 대한 부분을 작성하며 그녀를 "죄 많은 여자"라고 부르고, 그녀의 활동가적 활동이 탐욕과 자아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고 비판했다.[10] 이 기사는 주로 우익 성향의 남성들이 작성했으며, 저명한 좌파 및 여성 운동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10]
3. 4. 비판과 논란
마쓰이가 주도한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은 법적 구속력은 없었으나, 일본 제국의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일종의 정의를 제공하고,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들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12] 이 법정은 정의 실현과 역사 기록 보존에 있어 시민 사회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기도 한다.[12]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법정은 일본 내 보수 세력으로부터 상당한 비판과 공격에 직면했다. 일본의 주요 언론 매체들은 대체로 이 법정을 외면했으며,[13] 공영방송인 일본방송협회(NHK)의 경우, 법정에 대한 보도 내용이 당시 총리였던 아베 신조를 비롯한 보수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인해 수정되는 일까지 벌어졌다.[13]
또한, 법정을 폄하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우익 성향의 논객으로 알려진 나카미야 다카시는 이 법정을 '모의 재판'이라 비난하며 그 의미를 깎아내리고, 마쓰이 야요리의 활동이 개인적인 욕심과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10] 다카라지마 잡지 역시 "유난히 어리석은 여자들"이라는 특집 기사에서 마쓰이를 언급하며, 나카미야의 글을 통해 그녀를 "죄 많은 여자"로 몰아세웠다.[10] 이 기사는 주로 우익 성향의 남성 필진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진보적인 활동가나 여성 운동가들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10]
4. 유산
마쓰이 야요리는 2002년 12월 27일 사망했으며[6], 그녀의 유언에 따라 자산은 여성 전쟁과 평화를 위한 인권 기금에 기부되었다. 이 기금은 여성 전쟁과 평화 액티브 박물관(WAM) 건립에 사용되어[14] 그녀의 평생에 걸친 활동을 기리고 관련 자료를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사후 기부금 사용에 대한 일부 비판[10]이 있었으나, 마쓰이 야요리의 진정한 유산은 위안부를 비롯한 전쟁 피해 여성들의 인권 회복을 위한 헌신적인 활동과 이를 기록한 저술에 있다. 그녀의 노력은 일본과 동아시아 여성 문제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높였으며, 전 세계 젠더 평등 운동에 지속적인 영감을 주고 있다.
4. 1.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여 현지 여성 운동가들을 만나는 동안 마쓰이 야요리는 병을 얻었다.[5] 일본으로 돌아온 후 간암 진단을 받았으며, 이후 자서전 집필을 시작하고 여성 박물관 설립을 위한 설계를 계속 진행했다. 마쓰이는 2002년 12월 27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6]마쓰이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자산을 여성 전쟁과 평화를 위한 인권 기금에 기부했다. 이 기금은 그녀의 평생의 업적을 기리고 관련 자료를 보존하기 위한 사립 박물관인 여성 전쟁과 평화 액티브 박물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건립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박물관은 2005년 8월 도쿄에 문을 열었으며, 도쿄 여성 전범 재판과 관련된 모든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14] WAM의 명칭에 포함된 '액티브 뮤지엄'이라는 용어에 대해, 요시다 다카시는 저서 "전쟁 문화에서 평화 문화로"에서 "박물관이 대중을 계몽하고 각 방문객을 사회적으로 활동적인 시민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위원회의 바람을 상징하기 위해 선택되었다"고 설명했다.[6][14]
마쓰이의 사후, 나카미야 등 일부는 그녀가 투병 중 기부받은 150만엔을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금은 실제로는 여성 전쟁과 평화 액티브 박물관 건립 비용으로 사용되었다.[10]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거 위안부를 비롯한 전쟁 피해 여성들을 위해 싸웠던 마쓰이의 노력과 유산은 그녀가 남긴 일본 및 동아시아 여성에 관한 수많은 저서를 통해 이어지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젠더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4. 2. 저서 및 기고
마쓰이 야요리는 아시아 여성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세계화와 인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녀의 주요 저서와 기고는 다음과 같다.- '''주요 저서'''
- '''여성들의 아시아''' (1987, 이와나미 서점): 아시아 여성들의 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저작이다.
- '''새로운 아시아의 여성: 고통에서 힘으로''' (2000): 세계화가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일본, 태국, 필리핀, 대만, 중국, 네팔, 한국 여성들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
- '''일본, 전쟁 국가로 변모하다 - 전 세계 여성들과 함께 전쟁에 반대하여 외치자''' (2002): 일본의 재무장 움직임과 군사주의를 비판하며 평화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 - 여성의 초국적 연대의 힘으로 이룬 성공''' (2001):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의 의의와 성과를 기록했다.
-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 - 피해 여성에게 정의를 회복하고 미래의 여성 대상 전시 성폭력을 방지하려는 NGO의 시도''' (2001):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통한 피해 여성들의 정의 회복 노력과 NGO의 역할을 조명했다.
- '''기타 저서 목록'''
- 『여성 해방이란 무엇인가』 (1975, 미래사)
- 『인민의 침묵』 (1980, 스즈사와 서점)
- 『영혼에 닿는 아시아』 (1985, 아사히 신문사)
- 『아시아·여성·민중』 (1988, 신간사)
- 『시민과 원조』 (1990, 이와나미 서점)
- 『아시아에 사는 아이들』 (1991, 노동순보사)
- 『영혼에 닿는 아시아』 (1992, 아사히 신문사)
- 『아시아의 관광 개발과 일본』 (1993, 신간사)
- 『일본을 묻는 아시아』 (1994, 부락 해방 연구소)
- 『아시아·여성·어린이』 (1995, NCC 기독교 아시아 자료 센터)
- 『여성들이 만드는 아시아』 (1996, 이와나미 서점)
- 『베이징에서 불탄 여성들』 (1996, 이와나미 서점)
- 『아시아의 여성들』 (1998, 순보사)
- 『글로벌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 (2000, 임팩트 출판회)
- 『젊은 기자들에게 마쓰이 야요리의 "유언"』 (2003, 쥬카샤) - 사후 출간
- 『사랑과 분노, 싸우는 용기』 (2003, 이와나미 서점) - 사후 출간, 자서전적 성격
5. 비판적 시각
마쓰이 야요리의 활동과 보도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1984년 11월 2일 아사히 신문 석간에 마쓰이는 태국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이 기사는 여성이 부산 교외에서 일본인 순경에게 물을 튀겼다는 이유로 폭행당하고 강제로 연행되어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사에서는 "종군 위안부"가 8만 명에서 10만 명에 달하며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고, 위안부 생활은 낮에는 고된 노동, 밤에는 성적 착취를 당하는 "인간 이하의 생활"이었다고 묘사했다.[23] 30년 후인 2014년 8월 5일, 아사히 신문은 위안부 문제 검증 기사를 통해 "군 등이 조직적으로 인신매매처럼 연행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24], 마쓰이의 1984년 기사는 취소되지 않았다.[25]
프리 저널리스트 다치 마사코는 1992년 서울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 회의'에서, 대만 출신 전 위안부가 일본군에게 친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태국 여성이 일본군만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마쓰이와 후쿠시마 미즈호 등이 발언을 제지하려 했다고 증언했다.[26] (다만, 산케이 신문 기사에서는 발언을 제지한 인물을 다카하시 키쿠에라고 다르게 보도하기도 했다.)
전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이자 자카르타 지국장을 지낸 나가오카 노보루[27]는 마쓰이가 인도네시아 취재 당시 제공된 자료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반복했다며, 그녀를 기자가 아닌 활동가로 평가했다.[28] 나가오카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신문 기자로서의 직업 윤리를 벗어난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의 혼란을 야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29]
전 마이니치 신문 기자 도쿠오카 타카오는 마쓰이가 위안부 강제 연행과 쇼와 천황의 책임론을 확신했으며, 아사히 신문이 이를 그대로 보도하고 사설로 다루었다고 주장했다.[30]
마쓰이의 아사히 신문 입사 동기인 하세가와 히로시는 마쓰이의 말레이시아 학살 보도에 대해 비판했다. 하세가와에 따르면, 마쓰이가 인터뷰한 현지 화교 여성은 마쓰이가 "학살은 일본군이 한 것으로 해두세요"라고 말했다고 증언했으며, "일본군이 아기를 공중에 던져 찔러 죽이고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기사 역시 8세 증언자의 이야기를 충분한 검증 없이 작성했다고 주장했다.[31] 또한 하세가와는 마쓰이의 1984년 위안부 기사 내용(물을 튀겼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하세가와의 비판에 대해서는,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치안유지법 등을 통해 경찰이 자의적으로 체포·구금 및 고문을 행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32]과, 권력 남용을 통한 위안부 동원 가능성[33]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참조
[1]
뉴스
Yayori Matsui, 68; Japanese Journalist Became Noted Women's Rights Activist
https://www.latimes.[...]
2003-01-08
[2]
서적
Feminist movements in contemporary Japan
Routledge
[3]
서적
Gender in modern East Asia : an integrated history
Westview Press
[4]
서적
Scream from the shadows : the women's liberation movement in Japa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2
[5]
뉴스
Yayori Matsui Dies at 68; Championed Asian Women
https://www.nytimes.[...]
2018-02-09
[6]
웹사이트
Asia-Japan Women's Resource Center - Yayori Matsui
https://web.archive.[...]
2018-02-09
[7]
서적
Broken silence : voices of Japanese feminis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8]
서적
Feminism in modern Japan : citizenship, embodiment, and sexual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9]
간행물
Feminist forum
[10]
뉴스
Yayori Matsui's legacy lives on — as intended
https://www.japantim[...]
2018-02-09
[11]
웹사이트
Christine Chinkin - The Tokyo Tribunal 2000
http://www.iccwomen.[...]
2018-02-09
[12]
서적
The challenge of conflict : international law responds
Martinus Nijhoff Publishers
[13]
간행물
Who is Responsible? The Yomiuri Project and the Legacy of the Asia-Pacific War in Japan
2007
[14]
서적
From cultures of war to cultures of peace : war and peace museums in Japan, China, and South Korea
[15]
뉴스
松井やよりさん死去 「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代表
http://www.47news.jp[...]
47NEWS
2012-11-11
[16]
간행물
敗戦後の日本キリスト教婦人矯風会と大韓基督教女子節制会 : ―キリスト教宣教理念の比較―
https://doi.org/10.1[...]
名古屋学院大学総合研究所
2019-07
[17]
문서
平山基生[http://www.jicl.jp/hitokoto/backnumber/20100809.html 「何が常識だったのか―65年前の夏」](法学館憲法研究所サイト内)。平山基生『米軍違憲 「憲法上その存在を許すべからざるもの」』(本の泉社、2009年)135頁。[[長尾龍一]](東京大学名誉教授。平山基生の高校時代の友人)サイト「OURANOS -ウーラノス」内、 [http://book.geocities.jp/ruichi_nagao/DiaryApril2015.html April 12, 2015]。平山基生は[[ロシア科学アカデミー]]の元客員研究員で、[[日本ユーラシア協会]](ソ連邦崩壊後の日本・ロシア協会となった旧日ソ親善協会から1992年に分離した)の下部組織である[[ユーラシア研究所]](旧ソビエト研究所)事務局長・運営委員を務めたこともあり、渋谷区宇田川町の東京山手教会の隣にある山手マンション内に事務局を置く[http://www.kusanone.org 「沖縄・日本から米軍基地をなくす草の根運動」]を拠点に反米軍基地活動を展開している。日本ユーラシア協会は日ソ協会時代、[[安保闘争#60年安保|60年安保]]時に[[鶴見俊輔]]らの「声なき声の会」のデモの指揮を行ったほか(「回想・日ソ協会のあゆみ」編纂委員会編『回想・日ソ協会のあゆみ』日ソ協会、1974年、96頁)、現在は[http://jp-euras.org/images/2015/no_war.pdf 「戦争法の廃止を求める統一署名」]運動を展開している。ロシアのウクライナ侵攻ではウクライナ支持をとる。平山基生の妻知子は弁護士([http://www.acacialaw.org/index.html あかしあ法律事務所]所属。公益財団法人[[いわさきちひろ記念事業団]]理事)で、夫の基生とともに反米軍基地活動に従事しているほか、[[衆議院議員総選挙]]に、中選挙区時代の[[東京都第1区 (中選挙区)|東京都第1区]]から、1979年、1980年、1983年の3回にわたって、日本共産党の公認候補として立候補している。平山知子の父菊池(小林)邦作も[[小林多喜二]]ゆかりの共産党員([http://www.zenrouren-kaikan.jp/tosho/study20081101_fujita.html 藤田廣登「小林多喜二周辺研究 試論 Ⅰ「伊勢崎事件資料集」補追](産別会議記念・労働図書資料室サイト内))。
[18]
문서
『月刊婦人展望』1963年3月号、財団法人婦選会館出版部、8-11頁。
[19]
뉴스
米の軍事主義強化反対 東アジア、米らの女性たちが声明 ソウルで会見
https://www.jcp.or.j[...]
2010-03-15
[20]
뉴스
従軍慰安婦問題追求 松井やよりさんの美しい人生
http://japanese.dong[...]
2002-12-12
[21]
URL
http://www.wfphr.org[...]
[22]
URL
http://www.wfphr.org[...]
[23]
뉴스
朝日新聞 1984年11月2日記事
[24]
뉴스
朝日新聞 2014年8月5日記事
[25]
뉴스
産経新聞 2014年10月11日記事
[26]
잡지
週刊新潮 2014・7・3号
[27]
URL
山形大学 | 実践教育プログラム | グローバルスタディーズ
http://www.yamagata-[...]
[28]
문서
この時長岡はジャカルタ支局長
[29]
웹사이트
慰安婦報道、32年後の記事取り消し
https://www.bunanomo[...]
NPO法人「ブナの森」
2014-08-31
[30]
잡지
『諸君!』2005年11月号
[31]
문서
長谷川煕『崩壊 朝日新聞』(ワック、2015年)76頁、84頁。
[32]
서적
朝鮮の治安維持法
六花出版
2022-01-22
[33]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文藝春秋
1999-12-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