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에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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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에누스는 253년부터 268년까지 로마 황제로 재위했다. 그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공동 황제로 시작하여,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후 단독 황제가 되었다. 갈리에누스는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서방의 게르만 부족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재위 기간 동안 여러 반란과 분열을 겪었다. 그는 군사 개혁을 통해 기병 부대를 강화하고 기사 계급을 등용했지만, 결국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로마 제국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의 통치를 거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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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누스는 3세기 위기 시대에 로마 황제로서 아들 갈리에누스와 공동 통치하며 사산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했으나, 샤푸르 1세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겪고 기독교 박해 정책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리키니우스 씨족 - 마르쿠스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
마르쿠스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2세기 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여러 속주 총독을 역임하며 군사적, 정치적으로 활약했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아르메니아를 정복했으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알렸다.
갈리에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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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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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
전체 이름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
출생일 | 218년경 |
사망일 | 268년 9월 (50세) |
사망 장소 | 메디올라눔, 이탈리아, 로마 제국 |
배우자 |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
자녀 | 발레리아누스 살로니누스 마리니아누스 |
아버지 | 발레리아누스 |
어머니 |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
왕조 | 발레리아누스 왕조 |
통치 | |
즉위 | 로마 황제 |
재위 기간 | 253년 9월 – 268년 9월 |
이전 통치자 | 아이밀리아누스 |
다음 통치자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공동 황제 | 발레리아누스 (253–260) 살로니누스 (260년 7월) |
사망 시 칭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페르시쿠스 폰티펙스 막시무스 트리부니키아에 포테스타티스 XVI 임페라토르 I 콘술 VII 파테르 파트리아에 |
가계도 | |
가계도 | 리키니아 가문의 가계도 참조 |
2. 초기 생애
갈리에누스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6세기 그리스 연대기 작가인 요한 말라라스와 《황제 연대기 요약》에 따르면, 사망 당시 약 50세였으므로 대략 218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3] 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마리니아나의 아들이었는데, 마리니아나는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마리니아누스의 딸이었을 수도 있다. 동전에 새겨진 비문은 그를 에트루리아의 팔레리와 연결시키는데, 이곳이 그의 출생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서는 그의 어머니 가문인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관련된 많은 비문이 발견되었다.[4] 그의 형제는 발레리아누스 미노르였다.
갈리에누스는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와 결혼하여 세 명의 황태자를 낳았다.[5]
그의 세 아들의 사망 시기 및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사망 시기 및 원인 |
---|---|
발레리아누스 2세 | 258년 사망 |
살로니누스 | 260년 포스투무스 장군의 군대에 의해 살해됨 |
마리니아누스 | 268년 아버지가 암살된 직후 살해됨 |
2. 1. 유년기와 가족
갈리에누스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6세기 그리스 연대기 작가인 요한 말라라스와 《황제 연대기 요약》에 따르면, 그는 사망 당시 약 50세였으므로, 약 218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다.[3] 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마리니아나의 아들이었는데, 마리니아나는 원로원 계급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마리니아누스의 딸이었을 수도 있다. 그의 형제는 발레리아누스 미노르였다. 동전에 새겨진 비문은 그를 에트루리아의 팔레리와 연결시키는데, 이곳이 그의 출생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서는 그의 어머니 가문인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관련된 많은 비문이 발견되었다.[4] 갈리에누스는 즉위하기 약 10년 전에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와 결혼하여 세 명의 황태자를 낳았다.이름 | 사망 시기 및 원인 |
---|---|
발레리아누스 2세 | 258년 사망 |
살로니누스 | 260년 포스투무스 장군의 군대에 의해 살해됨 |
마리니아누스 | 268년 아버지가 암살된 직후 살해됨 |
[5]
253년 발레리아누스가 황제로 선포되면서 갈리에누스는 상원의 승인을 거쳐 공동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임명되었다.[6] 그는 또한 254년의 집정관으로 지명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처럼 갈리에누스와 그의 아버지는 제국을 분할하여 통치했다. 발레리아누스는 동방의 페르시아 위협에 대처하고, 갈리에누스는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게르만족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에 남았다.[6] 이러한 분할 통치는 제국의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3. 통치
256년,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가 로마 제국령 카파도키아를 침공하자, 발레리아누스는 259년 시리아 속주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삼아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히면서, 갈리에누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로마 황제가 포로로 잡힌 사건은 제국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갈리아 제국을 세운 포스투무스, 동방 속주의 티투스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등이 황제를 칭하며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갈리에누스는 팔미라의 세프티미우스 오다이나투스와 협력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퇴하고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오다이나투스의 암살 이후 팔미라 제국이 로마에 반기를 들면서 제국은 삼분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갈리에누스는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기사 계급 출신 기병 부대를 등용하여 이민족 침입에 대응하고,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를 포기하는 대신 알레만니족에게 거주를 허락하고 방어를 맡기는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군인과 문관의 경력을 분리하여 전문성을 강화하려 했으나, 이는 로마의 전통적인 인재 육성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3. 1. 초기 통치
갈리에누스는 253년부터 258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라인 지역 속주들(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레티아, 노리쿰)에서 보냈지만, 도나우 지역과 일리리쿰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6] 에우트로피우스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253년 발레리아누스가 아이밀리아누스에 대항하여 이탈리아로 진군하면서 발생한 약화에도 불구하고, 침입자들이 게르마니아 속주들과 갈리아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데 특히 활동적이고 성공적이었다.[6] 화폐 증거에 따르면 그는 그곳에서 많은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이며,[7] 로마 다키아에서의 승리 또한 그 시기에 해당될 수 있다. 적대적인 라틴 전통조차도 이 시기에 그의 성공을 인정한다.[8]
255년 또는 257년에 갈리에누스는 다시 집정관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그때 로마를 잠시 방문했음을 시사하지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9] 드링크워터는 갈리에누스가 도나우에 체류한 기간을 255년 또는 256년으로 추정하는데,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장남 발레리아누스 2세를 카이사르로 선포하여 자신과 발레리아누스 1세의 공식 상속자로 삼았다. 발레리아누스 2세는 아마도 그 당시 갈리에누스와 함께 원정에 참여했을 것이며, 갈리에누스가 257년 라인 지역으로 서쪽으로 이동했을 때, 그는 황제 권위의 상징으로 도나우 지역에 남았다.[10]
3. 2. 반란과 찬탈자들
258년에서 260년 사이,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동방에서 사산 왕조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서방에서는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히면서 로마 제국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이는 각지에서 반란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갈리에누스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반란과 외침이 발생하여 로마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3. 2. 1. 잉게누우스의 반란
258년과 260년 사이(정확한 날짜는 불분명함), 발레리아누스가 동방에서 사산 왕조 샤푸르 1세의 침입에 휘말려 있고 갈리에누스가 서방 문제에 몰두하던 틈을 타 판노니아 속주(최소 한 곳 이상)의 총독 잉게누우스가 황제를 자칭했다.[11] 발레리아누스 2세는 다뉴브 강에서, 아마도 258년에 사망했을 것이다.[12] 잉게누우스가 발레리아누스 2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또는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의 패배와 포로 생활이 잉게누우스, 레갈리아누스, 포스투무스의 반란을 촉발했을 가능성도 있다.[13]
어찌 되었든 갈리에누스는 매우 신속하게 대응했다. 그는 아들 살로니누스를 알바누스(혹은 실바누스)의 감독 하에, 포스투무스의 군사 지휘 아래 쾰른에서 카이사르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그는 서둘러 발칸 반도를 건너 아우레올루스의 지휘 아래 새로 편성된 기병대(comitatus)를 이끌고 무르사[15] 또는 시르미움[16]에서 잉게누우스를 격파했다.[14] 잉게누우스는 수도 시르미움이 함락된 후 자신의 근위병에게 살해당하거나, 자살로 익사했다.[17]
3. 2. 2. 알레만니족의 침입
258년에서 260년 사이(정확한 시기는 특정하기 어려움), 알레만니족과 다른 게르만 부족들이 대규모 침입을 감행했다.[18] 이는 갈리에누스가 인게누우스에 대한 원정에서 지원군을 철수시킨 후 생긴 공백 때문으로 추정된다. 프랑크족은 라인강 하류를 돌파하여 갈리아를 침략했고, 일부는 남부 스페인까지 진출하여 타라코(현재의 타라고나)를 약탈했다.[19] 알레만니족은 아마도 아그리 데쿠마테스(라인강 상류와 도나우강 상류 사이 지역)[20]를 통해 침입했으며, 유퉁기족이 뒤따랐을 가능성이 높다.[21]
이들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와 라에티아(남부 프랑스와 스위스 일부 지역)를 황폐화한 후 이탈리아로 진입했는데, 이는 한니발 이후 500년 만에 이탈리아 반도가 침략을 받은 첫 사례였다(가장 외곽 북부 지역 제외). 침입자들이 로마 외곽에 도달했을 때, 상원이 소집한 즉석 군대(아마도 근위대와 민간인 중 강한 사람들로 구성)에 의해 격퇴되었다.[22] 이후 북부 이탈리아를 통해 후퇴하던 이들은 갈리아 또는 프랑크족을 처리한 후 발칸 반도에서 진군해 온 갈리에누스의 군대에 의해 메디오라눔 전투(현재의 밀라노 근처)[23]에서 섬멸당했다. 메디오라눔 전투는 결정적이었고, 그 후 10년 동안 알레만니족은 제국을 괴롭히지 않았다. 유퉁기족은 이탈리아에서 약탈품과 포로들을 데리고 알프스를 넘는 데 성공했다.[24]
3. 2. 3. 레갈리아누스의 반란
같은 시기에 발칸 반도에서 어느 정도의 지휘권을 가진 레갈리아누스가 황제로 선포되었다.[26] 그 이유는 불분명하며, 이 사건에 대한 거의 유일한 자료인 ''로마 황제 전기''는 신빙성 있는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반란은 속주민들 (민간인과 군인)의 불만 때문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들은 속주의 방어가 소홀히 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27]
레갈리아누스는 약 6개월 동안 권력을 잡고 자신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를 발행했다. 사르마티아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후, 록솔라니가 파노니아를 침략하여 시르미움을 함락시키고 레갈리아누스를 죽이면서 그의 반란은 끝났다.[28] 갈리에누스가 록솔라니를 부추겨 레갈리아누스를 공격하게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이러한 비난을 일축한다.[29]
3. 2. 4. 발레리아누스의 포로
253년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즉위한 갈리에누스는 서부 전선을 담당하였고, 발레리아누스는 동부 전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동방에서 발레리아누스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는데, 스키타이 무리들이 소아시아 북부의 폰투스를 해상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지역을 약탈한 후 남쪽으로 카파도키아로 이동했다. 안티오크 출신의 발레리아누스 지휘하의 로마 군대가 그들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이 군대는 전염병에 감염되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이 군대는 사산 왕조의 지배자 샤푸르 1세의 메소포타미아 주에 대한 새로운 침략을 격퇴해야 했다. 이 침략은 아마도 260년 초봄에 일어났을 것이다.[1] 로마 군대는 에데사 전투에서 패배했고, 발레리아누스는 포로로 잡혔다. 샤푸르의 군대는 킬리키아와 카파도키아 (오늘날 터키)를 습격하여 샤푸르의 비문에 따르면 36개 도시를 약탈했다.[1]
256년, 사산 왕조(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가 로마 제국령 카파도키아에 침공하였다. 발레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259년 시리아 속주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였다. 이곳을 전선 기지로 삼아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이자 황제인 발레리아누스가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 패하여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히자, 갈리에누스는 공동 황제에서 단독 황제로 등극하였다.
3. 2. 5. 마크리아누스의 반란
칼리스투스라는 장교,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라는 재정 관리, 동방의 로마군 잔여 병력, 그리고 오데나투스와 그의 팔미라 기병대의 반격으로 사포르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31] 사산조 페르시아는 격퇴되었지만, 마크리아누스는 자신의 두 아들, 퀴에투스와 마크리아누스(때때로 마크리누스로 잘못 표기됨)를 황제로 선포했다.[32] 동방의 주요 도시에서 발행된 그들의 주화는 이러한 찬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마크리아누스는 퀴에투스, 칼리스투스, 그리고 아마도 오데나투스에게 페르시아인들을 상대하도록 맡기고, 『로마 황제들의 역사』에 따르면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유럽을 침략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31][32]
판노니아의 군단들은 갈리에누스의 부재에 분노하여 침략자들에게 합류했다. 그러나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성공적인 사령관 아우레올루스를 반란군에게 보냈고, 결정적인 전투는 261년 봄이나 초여름에, 일리리쿰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조나라스는 판노니아에서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찬탈자들의 군대는 패배하고 항복했으며, 두 지도자는 살해되었다.[33]
전투 이후 포스투무스의 반란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갈리에누스는 나머지 찬탈자들, 즉 칼리스투스와 퀴에투스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오데나투스와 합의를 보았다. 오데나투스는 로마의 지도자(dux Romanorum)라는 칭호를 받았고, 엠사에 주둔하고 있던 찬탈자들을 포위했다. 결국 엠사의 백성이 퀴에투스를 죽였고, 오데나투스는 261년 11월경 칼리스투스를 체포하여 처형했다.[34]
3. 2. 6. 포스투무스의 반란
에데사 전투에서 패배한 갈리에누스는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게르마니아 일부, 그리고 갈리아의 상당 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다른 장군인 포스투무스가 자신의 영토(오늘날 일반적으로 갈리아 제국으로 알려짐)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 반란은 동방에서 막리아누스의 반란과 부분적으로 일치했다. 258년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아들 살로니누스와 그의 후견인 실바누스를 콜로뉴에 배치했다. 라인 강변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장군 포스투무스는 침입자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전리품을 차지했다. 그는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소식이 실바누스에게 전해지자 그는 전리품을 자신에게 보낼 것을 요구했다. 포스투무스는 항복하는 시늉을 했지만, 그의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의 지휘하에 그들은 콜로뉴를 포위했고, 몇 주 후 도시 방어자들은 성문을 열고 살로니누스와 실바누스를 포스투무스에게 넘겨주었고, 포스투무스는 그들을 죽였다.[35] 이 사건들의 연대는 오랫동안 불확실했지만,[36] 1992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발견된 비문은 포스투무스가 260년 9월까지 황제로 선포되었음을 나타낸다.[37] 포스투무스는 자신과 그의 동료인 호노라티아누스를 위해 집정관직을 주장했지만, D.S. 포터에 따르면 그는 갈리에누스를 몰아내거나 이탈리아를 침략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
아들의 살해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포스투무스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막리아누스의 침공으로 인해 그는 아우레올루스를 대규모 군대와 함께 파견하여 그들과 맞서 싸워야 했고, 따라서 포스투무스와 싸울 병력이 부족했다. 초기 몇 차례 패배 후, 막리아누스를 물리친 아우레올루스의 군대가 갈리에누스와 합류했고, 포스투무스는 몰락했다. 아우레올루스는 추격을 맡았지만 고의적으로 포스투무스를 놓아주어 새로운 군대를 모으게 했다.[38] 갈리에누스는 263년[39] 또는 265년에 돌아와 무명의 갈리아 도시에서 포스투무스를 포위했다. 포위 공격 중 갈리에누스는 화살에 심하게 부상당해 도망쳐야 했다. 교착 상태는 그의 후기 사망까지 지속되었고, 갈리아 제국은 274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3. 2. 7. 아이밀리아누스의 반란
262년, 알렉산드리아 조폐국은 다시 갈리에누스를 위한 주화 발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마크리아니의 반란 진압 후 이집트가 그의 통제하에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같은 해 봄, 새로운 반란으로 도시는 내란에 휩싸였다. 이번 반란의 주동자는 이전에도 마크리아니 반란을 지원했던 이집트 총독 루키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주교의 서신은 당시 침략, 내전, 전염병, 기근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41]
갈리에누스는 이집트의 중요한 곡창 지대를 잃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테오도투스 장군을 보내 아이밀리아누스를 진압하게 했다. 테오도투스는 아마도 해상 원정을 통해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전투는 테베 근처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전투에서 아이밀리아누스는 패배했다.[42] 이후 갈리에누스는 262년, 264년, 266년에 세 차례 더 집정관이 되었다.
3. 2. 8. 헤룰리족의 침입
267년에서 269년 사이, 고트족과 헤룰리족 등 야만족들이 로마 제국을 대규모로 침략했다.[43] 이 침략의 시기, 참여 세력, 목표 등에 대한 기록은 매우 혼란스러워서 현대 역사학자들조차도 이 침략이 두 번 이상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한 번의 장기간 침략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43]
처음에는 흑해 북쪽에서 출발한 헤룰리족이 주도한 대규모 해상 원정이 있었고, 이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을 약탈했다.[43] 그 후, 더 많은 수의 침략자들이 제국에 대한 두 번째 해상 침략을 시작했다.[43]
로마군은 먼저 바다에서 야만족들을 격퇴했고, 갈리에누스의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전투에서 승리한 후 침략자들을 추격했다.[43] 일부 역사가는 갈리에누스가 나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군대의 지휘관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대다수는 그 승리가 그의 후계자인 클라우디우스 2세의 공이라고 믿는다.[43]
3. 2. 9. 아우레올루스의 반란
268년, 나이수스 전투 전이나 직후 어느 시점에 갈리에누스의 권위는 아우렐리우스에게 도전받았다. 아우렐리우스는 밀라노에 주둔하며 포스투무스를 감시해야 할 기병대 사령관이었는데, 반란의 마지막 날까지 포스투무스의 부관 역할을 하다가 스스로 황제 자리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44] 결정적인 전투는 현재 밀라노 근처 폰티롤로 누오보에서 벌어졌고, 아우렐루스는 명백하게 패배하여 밀라노로 밀려났다.[45] 갈리에누스는 도시를 포위했지만 포위 중에 살해당했다.
4. 암살
달마티아 군의 사령관 케크로피우스는 아우렐루스의 군대가 도시를 떠나고 있다는 소식을 퍼뜨렸고, 갈리에누스는 호위병 없이 텐트를 나섰다가 케크로피우스에게 살해당했다.[47] 한 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음모자들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고, 다른 설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죽음 직전에 클라우디우스를 지명했다고 한다. 《황제전》은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혈통이 클라우디우스에게서 이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이것이 클라우디우스를 살인에 연루시키지 않는 기록을 남긴 이유일 수 있다. 다른 자료들(조시무스 i.40 및 조나라스 xii.25)은 헤라클리아누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음모를 조직했다고 전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조나라스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 상원은 클라우디우스가 그의 생명을 구하고 그의 전임자를 신격화하라는 메시지를 받기 직전에 그의 가족(형제 발레리아누스와 아들 마리니아누스 포함)과 추종자들의 처형을 명령했다.[48] 갈리에누스의 무덤은 로마 남쪽, 앱피아 가도 9마일 지점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49]
5. 유산
갈리에누스는 고대 역사가들에게 호의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50] Historia Augusta에 나오는 편향되고 상당 부분 허구적인 묘사에 따르면, 그는 사치를 즐기고 자주색 옷을 입으며 머리에 금가루를 뿌리는 등의 행동을 일삼았다고 한다.[51] 율리아누스 황제의 ''카이사르들''에서는 갈리에누스를 "여성의 옷차림과 나른한 걸음걸이를 가진 자"로 묘사하는데,[52] 이는 ''Gallienae Augustae''라는 문구가 새겨진 특이한 동전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53]
이러한 부정적인 묘사는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의 분리 독립을 막지 못하고, 이들을 되찾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패트 서던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이 갈리에누스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며, 그가 추진한 몇 가지 유용한 개혁들에 주목하고 있다.[54]
5. 1. 역사적 평가
갈리에누스는 고대 역사가들에게 호의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50] Historia Augusta에 나오는 편향되고 상당 부분 허구적인 갈리에누스 치세에 대한 묘사는 그를 사치를 즐기고, 자주색 옷을 입고, 머리에 금가루를 뿌리고, 사과로 성을 쌓았던 인물로 묘사한다.[51] 율리아누스 황제의 ''카이사르들''은 갈리에누스를 "여성의 옷차림과 나른한 걸음걸이를 가진 자"로 묘사하는데,[52] 이는 아마도 특이한 상징물이 새겨지고 ''Gallienae Augustae''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전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53]이러한 자료들의 부정적인 묘사는 부분적으로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의 분리 독립을 막지 못하고, 이들을 되찾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에서 기인한다. 갈리에누스 사망 당시 팔미라는 명목상으로는 로마에 충성했지만, 오다이나투스의 지도 아래 거의 모든 면에서 독립적이었다. 팔미라는 오다이나투스 사후 그의 미망인 제노비아가 즉위한 후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몇 년 후 아우렐리아누스 치세가 되어서야 떨어져 나간 속주들이 진정으로 로마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현대 학자 패트 서던에 따르면, 일부 역사가들은 이제 갈리에누스를 좀 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54] 갈리에누스는 군사력 강화를 위해 기사 계급 출신 기병 부대를 등용하고,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를 포기하는 등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군인과 문관의 경력을 분리하여 원로원 계급 대신 기사 계급을 등용했다는 「갈리에누스 칙령」은 존재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로마의 전통적인 인재 육성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철학에도 관심을 가져 철학자 프로티노스와 교류하기도 했다.
5. 2. 군사 개혁
갈리에누스는 기병 중심의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를 창설하여 제국 어디든지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개혁은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영향을 주었다.[56]갈리에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의 군 지휘관 임명을 금지하고, 능력을 갖춘 기사(Eques) 계급 출신 지휘관들을 등용하여 원로원의 권력을 약화시켰다.[56] 이러한 군사 개혁과 원로원 영향력 감소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와 함께 갈리에누스를 지배 시대(Dominate)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황제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57]
「갈리에누스 칙령」의 존재 여부와 실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기사 신분 출신 군인들이 원로원 관직에 진출한 것은 발레리아누스 황제 시대부터 시작되었다.[59] 황제가 제국 방위를 위해 군대와 함께 전선 근처의 전략적 중요 도시에 상주하게 되면서, 원로원 의원들과의 관계는 멀어지고 황제와 군인 사이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이러한 통치 구조의 변화는 정치와 군사의 분리를 가져왔고, 이후 일리리아 출신 황제의 등장을 예고하는 역사적 요인이 되었다.[59]
5. 3. 관용 칙령
259년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히자, 갈리에누스는 기독교도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관용 선언을 발표하여, 그들의 예배 장소와 묘지를 복구하고 교회 재산을 인정하였다.[58] 그러나 이 칙령이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58]5. 4. 문무관 분리 논쟁
갈리에누스가 문관과 무관의 경력을 분리했다는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4세기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황제사(Caesares)』에만 나타나는데,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낮게 평가된다.[59]기사 계급 출신 인사들이 원로원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갈리에누스 이전 발레리아누스 황제 시대부터였다.[59] 제정 시대에는 재정에 밝은 인물들이 주로 등용되었지만, 갈리에누스 시대에는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군인 출신들이 중용되었다.[59]
발레리아누스 시대부터 황제는 제국 방어를 위해 로마를 떠나 군대와 함께 전선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에 머물렀다. 이로 인해 로마 원로원 의원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진 반면, 황제와 군인들의 관계는 밀접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군인 계층의 부상을 촉진했고, 정치와 군사의 분리는 이러한 통치 구조 변화의 결과였다. 이는 이후 일리리아 출신 황제들의 등장을 예비하는 역사적 요인이 되었다.[59]
6. 주화
갈리에누스 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주화가 발행되었으며, 그의 군단들을 기념하는 주화도 있었다. 1980년대 프랑스 코르시카 섬의 라바 보물에서 갈리에누스의 희귀한 금화 약 40개가 발견되었다.[55]
7. 가계도
아울루스 에그나티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 ||||
---|---|---|---|---|
철학자 | ||||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 | |||
수펙투스 집정관 | ||||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마리니아누스 | 발레리아누스 1세 로마 황제 (253년–260년) | 마리니아나 | ||
수펙투스 집정관 | -- |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 ||
이전 아이밀리아누스 로마 황제 (253년) | ||||
-- 갈리에누스 로마 황제 (253년–268년)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 발레리아누스 2세 수펙투스 집정관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로마 황제 (268년–270년) | 퀸틸루스 로마 황제 (270년) | 아우렐리아누스 로마 황제 (270년–275년) 울피아 세베리나 |
다음 아우렐리아누스 로마 황제 (270년–275년) | ||||
발레리아누스 2세 카이사르 | 살로니누스 공동 황제 | 마리니아누스 268년 집정관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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