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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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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에티오피아의 군인, 정치인으로, 1974년 에티오피아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그는 데르그의 제1부의장, 의장을 거쳐 대통령을 역임하며, 적색 테러로 수많은 반대파를 탄압했다. 멩기스투는 1977년 쿠데타로 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살해하고,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을 겪었다. 1991년 짐바브웨로 망명하여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으며, 2006년 학살 혐의로 에티오피아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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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1937년 에티오피아 남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군인의 길을 걸었다.[55] 홀레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군 복무 중 미국영국 등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1974년 9월 에티오피아 혁명이 발발하자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PMAC) 제1부의장을 맡으며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혁명 이후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졌는데, 멩기스투는 급진파의 핵심 인물로서 당시 PMAC 의장이었던 온건파 아만 안돔 등과 대립했다. 1974년 11월, 그가 이끄는 급진파는 아만 안돔 의장을 비롯해 전직 총리 2명, 황족, 정부 고관 등 61명의 온건파 지도자들을 무력으로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56] 이 과정에서 학살의 배후로 지목된다. 이듬해인 1975년에는 폐위되어 연금 상태에 있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를 살해했다.

1977년 쿠데타를 통해 PMAC 의장 자리에 올라 사회주의 군사 정권을 공식적으로 수립했다. 그는 소련, 쿠바동구권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급진적인 사회주의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같은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던 소말리아시아드 바레 정권과 오가덴 전쟁을 벌였고,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개입, 극심한 기근과 폭정 등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와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을 발생시키는 등 국가적 혼란을 초래했다.

1984년에는 에티오피아 노동자당을 창당하고 초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9월에는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 통치로 이행한다며 국민 의회를 최고 기관으로 하는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군부에 기반하고 있었다.

1988년 티그레 인민 해방 전선(TPLF)을 중심으로 결성된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 민주 전선(EPRDF) 등 반정부 세력과의 내전이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1991년 5월, EPRDF의 공세로 수도 아디스아바바 함락이 임박하자 멩기스투는 짐바브웨로 망명했고, 그의 정권은 붕괴되었다.

망명 후 2006년 12월 12일, 에티오피아 고등 법원은 궐석재판을 통해 멩기스투에게 제노사이드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2008년 5월 26일에는 에티오피아 최고 법원이 이를 뒤집고 멩기스투와 그의 측근 1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57] 그러나 로버트 무가베 정권 시절부터 짐바브웨 정부는 멩기스투가 과거 짐바브웨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그의 신병 인도를 거부해왔다. 2017년 쿠데타로 집권한 에머슨 음난가그와 대통령 역시 멩기스투를 인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58] 멩기스투는 2020년 현재까지도 짐바브웨 당국의 비호 아래 망명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2018년에는 에티오피아의 전 총리 하이레마리암 데살렌이 짐바브웨에서 멩기스투와 함께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했다가 논란이 일자 삭제하는 일이 있었다.[59]

2. 1. 출생과 초기 배경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1937년 5월 21일 이탈리아 점령기 에티오피아 남부 웰라예타[11] 또는 카파[1][2]의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남부의 노예 가문 출신이라는 설[14][15]이 있으며, 카파주 남동부의 크로어(다우로어)나 콘타어를 사용하는 소수 부족 출신이라는 설[55]도 유력하게 제기된다. 그의 부모 민족성 역시 불분명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어, 전기 작가들은 그가 암하라족, 콘소족, 오로모족, 왈라이타족 등 다양한 민족 출신일 가능성을 제기한다.[13] 이러한 배경 정보의 불확실성은 그의 초기 사회적 위치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어렵게 한다.

1941년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에서 물러난 후,[16] 그의 가족은 데브레 마르코스로 이주했다. 아버지 하일레 마리암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신생 군대에 입대하여 병장 계급을 받았고, 이후 아디스아바바의 제국군 탄약 생산 부대로 전출되었다.[16] 멩기스투는 전 고자암 주지사였던 데자즈마치 케베데 테세마의 집에서 자랐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 집의 가정부였고 아버지는 경호원이었다고 전해진다.[16]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에티오피아 제국군의 군대 캠프와 귀족 가문의 저택을 오가며 성장기를 보냈다.[16]

데브레 마르코스에서 네구스 테클레 하이마노트 학교에 다녔으나, 학업에 열중하지 않고 문제아로 여겨져 결국 품행 불량으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다.[17] 이후 매우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했으며,[17] 홀레타 육군사관학교를 중위로 졸업했다. 아디스아바바의 제4사단, 아스마라의 제2사단을 거치며 대위로 승진했고, 하라르의 제3사단에 배속되었다. 이후 미국영국에서 군사 교육을 받으며 경력을 쌓았다.[55]

2. 2. 군 경력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에티오피아 남부의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55], 홀레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18] 이후 아디스아바바의 육군 부대, 아스마라의 제2사단에서 복무하며 대위로 승진했고, 하라르의 제3사단에 배속되었다.

야심 찬 젊은 군인이었던 그는 당시 제3사단장이던 에리트레아 출신 아만 안돔 장군의 눈에 띄어 상사로 진급했으며, 그의 사무실에서 심부름꾼 역할을 맡기도 했다. 아만 장군은 멩기스투의 멘토가 되어 그를 호레타 육군사관학교에 추천했고, 자신이 제3사단장으로 임명되자 멩기스투를 하라르로 데려가 제3사단의 군수 장교로 임명했다.[18]

멩기스투는 군 복무 중 미국영국 등에서 유학 및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64년에는 6개월 과정의 병기 시험 훈련을 위해 미국 일리노이주의 사바나 육군 병기창으로 파견되었다.[19] 이후 아만 장군이 아디스아바바로 갑작스럽게 전출되고 하일레 바이케다그 장군이 후임으로 부임했는데, 그는 멩기스투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승진시키지 말라는 비밀 보고서를 올리기도 했다. 멩기스투는 하일레 바예케다그 장군의 엄격한 규율 정책에 불만을 가졌고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멩기스투는 미국 메릴랜드 주의 애버딘 시험장에서 18개월간의 병기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메릴랜드 대학교 야간 수업을 통해 영어 실력도 향상시켰다. 1970년에는 캔자스주 포트레벤워스의 합동 군사 센터에서 세 번째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하라르에서 병기 하위 부서를 지휘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하일레 바예케다그 장군은 그의 과거 불복종을 이유로 이를 저지했다. 훗날 멩기스투는 하일레 바예케다그 장군을 포함한 60명의 장관과 장군들을 처형하게 된다.[19]

멩기스투가 미국 군사 훈련 중 겪은 인종 차별 때문에 강한 반미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폴 헨즈는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언급한다.[17] 그의 외모(평균적인 고지대 에티오피아인보다 더 '흑인'에 가까운 특징)는 콘소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로 인해 경멸적인 시선을 받고 열등감을 느꼈을 수 있다.[17] 권력을 잡은 후 그는 데르그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 나라에서는 일부 에티오피아 귀족 가문이 어두운 피부, 두꺼운 입술,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들을 자동으로 "바리아스"(암하라어로 노예를 의미)로 분류합니다... 나는 곧 이 무식한 자들이 굴복하여 옥수수를 갈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분명히 합시다![20]

바흐루 제우데는 멩기스투가 "상황과 사람을 파악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하며, 이를 단순한 지능이라기보다는 '현실 감각' 또는 현지어로 '아라다나트'라 불리는 거리의 영리함에 가깝다고 보았다.[21]

1974년 9월 에티오피아 혁명 당시, 멩기스투는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PMAC)의 제1부의장이 되었다. 이후 온건파(아만 안돔 의장 등)와 급진파(멩기스투 등)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1월 22일, 급진파는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 토벌 문제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아만 의장을 해임하고 연금했으며(다음 날 살해됨), 아디스아바바 각지에서 총격전을 벌여 아만 의장을 포함한 전 수상 2명,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의 손자인 에스킨델 데스타 해군 사령관 등 61명의 온건파 지도자, 정부 고관, 황족들을 처형했다.[56] 이 학살의 배후로 여겨지는 멩기스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에티오피아의 실권을 장악했다.

3. 데르그의 부상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는 월로 주에서 발생한 가뭄과 흉작에 대한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 정부의 대처 실패로 국민적 불만이 고조되었고, 결국 에티오피아 혁명이 일어나 황제 정부가 전복되었다. 이 권력 공백기에 군부 내 하급 장교와 사병들을 중심으로 데르그(Derg, 공식 명칭: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 PMAC)라는 위원회가 조직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원래 제3사단을 대표하여 데르그에 파견된 하위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17] 그러나 그는 1974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정치적 선동과 책략을 통해 데르그 내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하며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18]

데르그 내부에서는 혁명 이후 노선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심각한 대립이 발생했다. 온건파의 대표격인 아만 안돔 PMAC 의장은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황태자 아스파 워센의 복귀를 주장하며 지식인층과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았으나, 멩기스투를 비롯한 급진파는 공화제 수립을 주장하며 군 일부와 학생, 노동조합 등의 지지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유혈 충돌로 이어졌다. 1974년 11월, 멩기스투가 이끄는 급진파는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 토벌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를 명분으로 아만 안돔 의장을 해임하고 살해했으며, 곧이어 전직 총리, 황족을 포함한 61명의 온건파 지도자 및 정부 고관들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56] 이 숙청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멩기스투는 이를 통해 데르그 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멩기스투는 아트나푸 아바테와 함께 데르그 부의장을 역임하다가[22], 1977년 쿠데타를 통해 타파리 벤티 의장을 제거하고 마침내 PMAC 의장 자리에 올라 사회주의 군사 독재 정권의 기반을 마련했다.

3. 1. 혁명과 권력 장악

월로 주에서 발생한 가뭄과 흉작으로 인해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의 정부는 에티오피아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결국 1974년 에티오피아 혁명으로 전복되었다. 혁명 이후 권력은 아트나푸 아바테가 이끄는 하급 장교와 사병들로 구성된 위원회, 즉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PMAC)로 넘어갔다.

멩기스투는 원래 제3사단을 대표하여 데르그에 파견된 하위 구성원 중 한 명이었으나[17], 1974년 7월부터 9월까지 정치적 책략을 통해 데르그 내에서 빠르게 입지를 다지며[18] PMAC 제1부의장 자리에 올랐다.

혁명 이후 데르그 내부에서는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온건파는 당시 스위스에서 병 치료 중이던 황태자 아스파 워센의 영접을 주장했으며, 아만 안돔 PMAC 의장을 중심으로 지식인층과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멩기스투를 비롯한 급진파는 공화제를 주장하며 학생, 대학 교수, 노동조합 등의 지지를 얻었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왼쪽)과 동료 데르그 구성원들 타파리 벤티(가운데)와 아트나푸 아바테(오른쪽) 1975년경


1974년 11월 22일, 급진파는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 토벌 문제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명분으로 아만 안돔 의장을 해임하고 연금했으며, 다음 날 살해했다.[56] 이어 11월 23일, 급진파는 온건파 세력과 총격전을 벌이며 아만 의장을 포함해 전 총리 엔달카추 마콘넨과 아클릴루 합테볼트, 황제의 손자인 해군 사령관 에스킨델 데스타 등 61명의 온건파 지도자, 정부 고관, 황족들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56] 이 학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멩기스투는 이 사건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멩기스투는 아트나푸 아바테와 함께 1975년 3월부터 1977년 2월까지 데르그의 부의장을 역임했다.[22] 1975년에는 폐위되어 연금 상태에 있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가 사망했는데, 멩기스투가 베갯잇으로 질식시켜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23] 데르그는 1977년 에티오피아 정교회 총대주교 아부나 테오필로스를 포함한 수많은 구체제 인사들을 추가로 처형했다. 멩기스투는 데르그가 이러한 처형을 명령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적인 책임은 부인했지만, 다른 데르그 구성원들은 감옥 인터뷰를 통해 그가 처형 결정에 공모했고 전적으로 동의했다고 증언했다.

1977년, 쿠데타를 통해 타파리 벤티 장군이 피살되면서 멩기스투는 마침내 PMAC 의장에 취임하여 사회주의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 쿠바동구권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에티오피아의 급격한 사회주의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이나 소말리아와의 오가덴 전쟁, 기아 확산 등으로 약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비극을 낳았다.[64]

3. 2.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처형

1974년 에티오피아 혁명으로 월로 주의 가뭄과 흉작 대처에 실패하며 국민의 신뢰를 잃은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이후 권력은 하급 장교와 사병들로 구성된 위원회, 즉 데르그(Derg, 공식 명칭: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 PMAC)에게 넘어갔다. 멩기스투는 원래 제3사단을 대표하는 하위 구성원이었으나, 정치적 책략을 통해 1974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데르그 내에서 빠르게 입지를 다져 1975년 3월부터는 부의장직을 맡았다.[17][18][22]

데르그 내부에서는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대립이 있었다. 온건파는 당시 스위스에서 요양 중이던 황태자 아스파 워센의 복귀를 주장하며 지식인층과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았으나, 공화제를 주장한 급진파는 군 일부와 학생,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았다. 1974년 11월 22일, 멩기스투가 속한 급진파는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 토벌 문제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온건파 아만 안돔 PMAC 의장을 해임하고 연금했으며, 다음 날 살해했다. 이후 아디스아바바 각지에서 온건파와의 총격전이 벌어져 아만 안돔 의장을 포함해 전직 총리 2명(엔달카추 마콘넨, 아클릴루 합테볼트), 황제의 손자인 해군 사령관 에스킨델 데스타 등 61명의 온건파 지도자, 정부 고관, 황족들이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56] 이 학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멩기스투는 이 사건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1974년 혁명 이후 폐위되어 연금 상태에 있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는 1975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을 둘러싸고 멩기스투가 직접 베개로 황제를 질식시켜 살해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으나, 멩기스투 자신은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23]

데르그는 1974년 11월 황실 정부 고위 관리 61명 처형, 1977년 에티오피아 정교회 총대주교 아부나 테오필로스를 포함한 귀족 및 전직 관리 처형 등 수많은 숙청을 자행했다. 멩기스투는 데르그가 이러한 처형들을 명령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자신에게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부인했다. 그러나 감옥에 수감된 다른 데르그 구성원들은 인터뷰를 통해 멩기스투가 처형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공모했다고 증언하여 그의 주장과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4. 에티오피아 통치

멩기스투는 1974년 에티오피아 혁명 이후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 (PMAC, 이하 데르그) 제1부의장이 되었다. 데르그 내 권력 투쟁 과정에서 1974년 11월 아만 안돔 의장을 비롯한 온건파 지도자 61명을 처형하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56]. 1975년에는 폐위된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를 살해했다.

1977년 2월, 타파리 벤티 의장이 총격전으로 사망하자 멩기스투는 공식적으로 데르그 의장이자 국가 원수가 되었다[24]. 같은 해 11월에는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처리 문제 등에서 이견을 보인 부의장 아트나푸 아바테와 다른 장교 40여 명을 "반혁명적" 활동을 이유로 처형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25].

권력을 공고히 한 멩기스투는 사회주의 군사독재 체제를 수립하고 소비에트 연방, 쿠바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급격한 사회주의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정치 탄압인 '적색 테러'가 자행되었고, 소말리아와의 오가덴 전쟁(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격화, 기아 확산 등으로 약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등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었다[64].

1984년 에티오피아 노동자당(WPE)을 창설하고 서기장이 되었으며, 1987년 9월에는 국명을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으로 바꾸고 초대 대통령 겸 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여 독재 체제를 이어갔다.

그러나 1988년 티그레 인민 해방 전선(TPLF) 중심의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 민주 전선(EPRDF) 결성 이후 내전이 격화되었고, 결국 1991년 5월 EPRDF의 공세에 밀려 멩기스투는 짐바브웨로 망명하며 정권은 붕괴되었다.

망명 후인 2006년 12월 12일, 에티오피아 고등 법원은 멩기스투에게 제노사이드와 반인도적 죄 혐의로 본인 부재 상태에서 종신형을 선고했다. 2008년 5월 26일에는 최고 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57], 짐바브웨 정부는 멩기스투의 과거 짐바브웨 독립 운동 지원 등을 이유로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 2017년 쿠데타로 집권한 에머슨 음난가그와 대통령 역시 인도 거부 방침을 유지하고 있으며[58], 2020년 현재까지도 멩기스투는 짐바브웨 당국의 보호 하에 있다. 2018년에는 에티오피아 전 총리 하이레마리암 데살렌이 멩기스투와 함께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했다가 논란이 일자 삭제하는 일이 있었다[59].

4. 1. 정치적 갈등과 탄압

아디스아바바에 위치한 적색 테러 희생자 추모 박물관


1977년 타파리 벤티 장군 피살 후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PMAC) 의장이 된 멩기스투는 사회주의 군사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당(EPRP)을 중심으로 멩기스투 정권(데르그)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EPRP는 1976년 가을부터 데르그와 그 협력 세력인 메이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공공 건물 폭탄 테러, 공무원 및 메이슨 회원 암살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27]

이에 멩기스투 정권은 EPRP와 다른 반대 세력을 겨냥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는데, 이는 '적색 테러'로 알려지게 되었다.[26] 데르그는 EPRP의 저항 활동을 '백색 테러'라고 비난하며 자체적인 대테러 캠페인을 벌였다. 멩기스투는 공개적으로 모든 "진보주의자"에게 혁명의 적을 제거할 "행동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선언하며 탄압을 부추겼고, 특히 EPRP를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정권에 충성하는 농민, 노동자, 공무원, 학생들에게 무기가 지급되어 탄압에 동원되었다.[27]

1977년 4월, 멩기스투는 공개 연설에서 "반혁명가에게 죽음을! EPRP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제국주의자와 반혁명가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 세 개를 땅에 깨뜨려 앞으로 벌어질 숙청을 예고했다.[28] 이후 몇 달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는 수많은 젊은 남녀의 시신이 거리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은 최하위 지역 정부이자 감시 단위 역할을 했던 이웃 감시 위원회, 즉 케벨레 소속 민병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낭비된 총알 값'이라는 명목의 비용을 케벨레에 지불해야만 했다.[29]

적색 테러의 참상은 국제 사회에도 알려졌다. 1977년 5월, 세이브 더 칠드런의 스웨덴 사무총장은 "1,000명의 아이들이 살해되었고, 그들의 시신이 거리에 버려져 점박이하이에나에게 먹히고 있다. 아디스아바바 외곽에서는 11세에서 13세 사이의 살해된 아이들 시체가 도랑에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증언했다.[30] 국제앰네스티는 적색 테러 기간 동안 최대 5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31][32][33]

한편, 데르그는 한때 주요 지지 세력이었던 사회주의 학생 운동 단체 메이슨에 대해서도 탄압을 가했는데, 이는 '백색 테러'로 불리게 되었다.

이 외에도 멩기스투 정권은 여러 정치적, 군사적 갈등에 직면했다. 군주주의 성향의 에티오피아 민주 연합은 베겜데르 지역에서 군사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내부 분열로 곤다르 점령에는 실패했다. 또한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이 오가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나, 소비에트 연방과 쿠바의 대규모 군사 지원에 힘입어 이를 격퇴할 수 있었다. 데르그 정권은 소말리아 침공을 막아낸 뒤 에리트레아 분리주의 세력과 티그레이 인민 해방 전선(TPLF)에 대해서도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1970년대 말 에티오피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군대와 강력한 공군 및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4. 2. 마르크스-레닌주의 채택과 사회주의화

집권 후 멩기스투는 당시 아프리카 전역과 제3세계의 많은 민족주의자 및 혁명가들 사이에서 점차 인기를 얻고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받아들였다. 멩기스투의 지도 아래 1970년대 중반, 데르그 정권은 급진화되었고 에티오피아의 시스템을 혼합 봉건 자본주의 신흥 경제에서 동구권 스타일의 계획 경제로 바꾸는 공격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모든 농촌 토지는 국유화되었고, 에티오피아 교회, 황실 가족, 귀족들은 상당한 토지와 재산의 대부분을 박탈당했다. 같은 기간 동안, 국가의 부를 재분배한다는 명목 하에 모든 외국 소유 및 현지 소유 회사가 보상 없이 국유화되었다. 모든 미개발 도시 재산과 모든 임대 재산도 국유화되었으며, 은행, 보험 회사, 대형 소매업체 등과 같은 개인 사업체 역시 정부에 의해 인수되었다. 이 모든 국유화된 재산은 이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대규모 관료 기구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한때 부재 지주의 토지에서 일했던 농부들은 이제 집단 농장에 가입해야 했으며, 모든 농산물은 더 이상 자유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정부가 통제하고 배분하게 되었다.

데르그 정권 하에서 이러한 급진적인 농업 개혁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량은 에티오피아 내전, 에티오피아 기근과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1984년에는 데르그 정권 10주년을 기념하는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다.

1986년 베를린에서 열린 SED 당 대회에서 멩기스투


소련은 에티오피아가 후진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 체제를 채택함으로써 혁명적으로 변모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며 칭찬했고, 기꺼이 지원할 모델적인 하위 동맹국으로 환영했다. 모스크바는 에티오피아와 소련 간의 문화적, 역사적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했다.[34] 그러나 1980년대 에티오피아는 더 큰 혼란에 빠졌고, 1990년 소련 체제 자체가 붕괴하자 러시아 평론가들은 에티오피아 정권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34]

1984년 초, 멩기스투의 지시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에티오피아 노동자당(WPE)이 국가의 유일 합법 정당으로 창설되었고 멩기스투가 사무총장을 맡았다. 1987년 9월 10일, 새로운 소련식 헌법이 채택되었고, 국가는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으로 개명되었다. 멩기스투는 광범위한 행정 및 입법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되었으며, 민주 집중제 교리에 따라 그는 사실상 독재자였다. 그는 데르그의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군에서 퇴역했지만, 민간인이 된 후에도 WPE의 정치국을 지배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1980년대 후반, 헤리티지 재단의 마이클 존스를 포함한 일부 서방 비평가들은 멩기스투의 경제, 군사, 정치 정책과 소련의 지원이 궁극적으로 5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1980년대 중반 에티오피아 기근의 주요 원인이라고 비난했다. 멩기스투는 1977년에서 1984년 사이에 소련을 일곱 번 방문했으며, 정치적 동맹국인 쿠바, 동독, 남예멘, 모잠비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멩기스투는 아프리카 통일 기구의 의장을 역임했다.

4. 3.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과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1977년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PMAC) 의장에 오르며 사회주의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한 멩기스투는 소비에트 연방, 쿠바동구권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에티오피아의 급격한 사회주의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같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소말리아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정권과의 오가덴 전쟁(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 및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에리트레아 내전)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쟁들과 기아 문제 등이 겹치면서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는 인도적 위기를 초래했다[64]. 멩기스투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 초기에도 에리트레아 해방 전선 토벌 문제가 내부 정적과의 갈등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다.

5. 권력 축출과 짐바브웨 망명

1988년,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을 중심으로 한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 민주 전선(EPRDF, 초기에는 에티오피아 인민해방전선(EPLF)으로 언급되기도 함)이 결성되면서 에티오피아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1990년 무렵 소련이 멩기스투 정권에 대한 지원을 거의 중단하면서 정권의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다.[65]

1991년 2월 이후 EPRDF는 강력한 군사 공세를 펼쳤고, 같은 해 5월에는 사방에서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향해 진격했다. 결국 멩기스투는 50여 명의 가족 및 데르그(Derg) 구성원들과 함께 국외로 도피했으며,[65] 짐바브웨의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의 공식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망명을 허가받았다. 멩기스투가 떠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EPRDF 군이 아디스아바바를 함락시키면서 멩기스투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EPRDF는 멩기스투를 제외한 데르그와 에티오피아 노동자당(WPE) 지도부 대부분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멩기스투는 자신의 정권 붕괴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그가 소련 해체와 에티오피아에 대한 원조 중단을 방치했다고 비난했다.

멩기스투는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에 머물며 로버트 무가베의 보호를 받았다. 1995년에는 망명지에서 암살 시도를 겪기도 했다.[36] 짐바브웨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무가베에게 안보 문제에 대해 조언했으며, 2005년 빈민가 철거 작전인 무람바츠비나 작전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관련 회의를 주재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39][38] 그러나 당시 국무 장관이었던 디디무스 무타사는 멩기스투의 작전 관여설을 강력히 부인했다.[38]

에티오피아에서는 멩기스투에 대한 궐석재판이 진행되었다. 2006년 12월 12일, 에티오피아 고등 법원은 그에게 제노사이드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후 2008년 5월 26일, 에티오피아 최고 법원은 이 판결을 뒤집고 멩기스투와 그의 정권 고위 관료 1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57] 하지만 짐바브웨 정부는 멩기스투가 과거 짐바브웨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그의 신병 인도를 계속 거부했다. 2017년 쿠데타로 무가베가 실각한 후 집권한 에머슨 음난가그와 대통령 역시 멩기스투를 인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58]

2018년, 에티오피아의 전 총리 하일레마리암 데살렌이 짐바브웨에서 멩기스투와 만나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가 비판 여론에 직면하자 삭제하는 일이 있었다.[59] 2022년 5월, 짐바브웨 정부는 멩기스투의 에티오피아 인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으나,[40] 2020년대 초반까지도 그는 여전히 짐바브웨 당국의 보호 아래 망명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58]

5. 1. 암살 시도

1995년 11월 4일, 멩기스투는 부인 우반치 비샤우와 함께 짐바브웨 하라레 교외의 건힐에 있는 자택 근처에서 산책하던 중 암살 시도를 당했다. 이 공격에서 멩기스투는 다치지 않았으나, 암살 시도범으로 지목된 에리트레아 국적의 솔로몬 하일레 게브레 마이클은 멩기스투의 경호원에게 총격을 받고 체포되었다.[36]

솔로몬 하일레 게브레 마이클은 이후 암살 시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며, 1996년 7월 8일 짐바브웨 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했다.[37] 남아프리카 공화국 주재 에리트레아 대사 체가예 테스파 치온이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하라레를 방문했다.[36] 재판 결과, 솔로몬 하일레 게브레 마이클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경찰의 급습으로 체포된 그의 공범 아브라함 골레톰 조셉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멩기스투 정권 하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항소심에서는 "정상 참작 사유"가 인정되어 형량이 각각 2년으로 감형되었다.[38]

당시 짐바브웨 주재 에티오피아 대사 판타훈 하일레 마이클은 에티오피아 정부가 이 암살 시도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36]

6. 학살 재판

1991년 짐바브웨로 망명한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1994년부터 에티오피아 정부에 의해 부재중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멜레스 제나위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정부는 멩기스투가 약 2,000명을 살해한 혐의를 포함하여 학살죄, 불법적인 투옥, 살인, 재산 몰수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41][5] 그의 범죄 혐의와 증거를 담은 문서는 8,000페이지에 달했으며, 여기에는 멩기스투가 직접 서명한 사형 집행 명령서, 고문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피해자들의 개인적인 증언 등이 포함되었다.[41]

멩기스투 정권 하에서의 폭력은 '적색 테러'로 알려져 있으며,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포함한 수십만 명의 대학생, 지식인, 정치인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한다.[41] 국제앰네스티1977년1978년의 적색 테러 기간에만 총 5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산했으며,[31][32][33] 휴먼 라이츠 워치는 이를 "아프리카에서 목격된 국가 주도 대량 학살 중 가장 체계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41] 멩기스투 통치 기간 동안 희생된 총 사망자 수는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7][8] 멩기스투 자신이 직접 반대파를 교살하거나 총살했다는 증언도 존재한다.[44]

재판은 12년 동안 진행되어 2006년에 마무리되었다. 멩기스투와 함께 106명의 데르그 관리들이 학살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이 중 36명만이 법정에 출석했다.[45] 미국의 변호사이자 에티오피아 전문가인 마이클 클러프는 멩기스투의 행위가 특정 민족 집단을 겨냥했다기보다는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학살죄 적용에 대한 법리적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43]

2006년 12월 12일, 에티오피아 고등 법원은 멩기스투에게 학살죄 등으로 유죄를 선고했으며,[66] 2007년 1월에는 종신형을 선고했다.[42] 이후 2008년 항소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멩기스투는 여전히 짐바브웨에 머물며 에티오피아로 인도되지 않고 있다.

6. 1. 멩기스투의 유죄 판결과 짐바브웨의 입장

2006년 12월 12일 에티오피아 고등 재판소는 멩기스투에게 학살죄 등 여러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66] 멜레스 제나위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정부는 멩기스투가 부재한 상태에서 약 2,000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진행했다. 그의 범죄 혐의와 증거 목록은 8,000페이지에 달했으며, 여기에는 멩기스투가 서명한 사형 집행 명령서, 고문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개인적인 증언 등이 포함되었다.[41]

재판은 1994년에 시작되어 2006년에 마무리되었다. 법원은 2006년 12월 12일 멩기스투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며, 2007년 1월에는 종신형을 선고했다.[42] 법원은 학살죄 외에도 불법적인 투옥, 살인, 재산 몰수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5] 미국의 변호사이자 에티오피아 전문가인 마이클 클러프는 멩기스투의 행위가 특정 집단보다는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학살죄 적용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하며, 그의 탄압이 민족적이기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고 평가했다.[43]

일부 전문가들은 멩기스투 통치 기간 동안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포함한 수십만 명의 대학생, 지식인, 정치인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한다.[41] 국제앰네스티1977년1978년에 벌어진 적색 테러 기간 동안 총 5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산한다.[31][32][33] 휴먼 라이츠 워치는 이 적색 테러를 "아프리카에서 목격된 국가 주도 대량 학살 중 가장 체계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규정했다.[41] 멩기스투 집권기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학생이나 반군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가로등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흔했으며, 멩기스투 자신이 직접 반대파를 교살하거나 총살했다는 증언도 있다.[44] 그의 통치하에 발생한 사망자 수는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7][8]

106명의 데르그 관리들이 재판에서 학살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그중 36명만이 법정에 출석했다. 재판 결과, 여러 전직 데르그 구성원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45]

2006년 12월 멩기스투의 유죄 판결 이후, 짐바브웨 정부는 그가 여전히 자국 내에서 망명 중이며 에티오피아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짐바브웨 정부 대변인은 "멩기스투와 그의 정부는 우리의 독립 투쟁에서 핵심적이고 칭찬받을 만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며, 멩기스투가 로디지아 부시 전쟁 당시 짐바브웨 게릴라 전투원들에게 훈련과 무기를 제공하고, 전쟁 후에는 짐바브웨 공군 조종사 훈련을 지원했다고 언급했다. 대변인은 "우리에게 이런 헌신을 보여준 국가는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46]

2008년 5월 26일, 에티오피아 최고 법원은 항소심에서 멩기스투에게 부재중 사형을 선고하며 이전의 종신형 판결을 뒤집었다. 그의 측근 고위 관리 17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되었다.[57] 멩기스투의 가장 선임 보좌관 23명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들의 형량은 2011년 6월 1일에 감형되었다. 2011년 10월 4일 기준으로, 전직 멩기스투 관리 16명이 고령과 수감 중 모범적인 태도를 이유로 가석방되었지만, 멩기스투의 사형 선고는 변경되지 않았다.[47]

2017년 쿠데타로버트 무가베 정권을 축출하고 집권한 에머슨 음난가그와 대통령 역시 멩기스투를 에티오피아로 인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58] 2020년 기준으로 멩기스투는 여전히 짐바브웨 당국의 보호 아래 있다.

7. 회고록

2010년, 멩기스투는 회고록 출간 계획을 발표했다.[48] 2012년 초, ትግላችን|티글라친amh("우리의 투쟁"이라는 뜻)이라는 제목의 회고록 원고가 인터넷에 유출되었다.[49] 몇 달 뒤 첫 번째 분량이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2016년에는 두 번째 분량이 에티오피아에서 출판되었다. 멩기스투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당(EPRP)의 남은 세력이 자신의 출판을 방해하기 위해 첫 번째 분량을 유출했다고 주장했다.

8. 개인사

멩기스투는 에티오피아 남부의 카파주 출신으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55] 그의 출신 부족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남동부의 크로어(다우로어)나 그와 가까운 콘타어를 사용하는 소수 부족 출신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968년 우반치 비샤우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안디네와 딸 티기스트, 티미히르트를 두었다.[50]

1991년 5월,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 민주 전선 (EPRDF)의 공세로 정권이 붕괴되자 짐바브웨로 망명했다. 이는 당시 짐바브웨 대통령이었던 로버트 무가베와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었다. 멩기스투는 짐바브웨 독립 운동을 지원한 전력이 있었고, 무가베 정권은 이를 이유로 에티오피아의 인도 요구를 거부했다. 2006년 에티오피아 고등 법원에서 제노사이드 혐의 등으로 종신형을, 2008년 최고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57], 짐바브웨 정부는 그의 인도를 계속 거부했다. 2017년 무가베가 쿠데타로 실각한 이후에도 에머슨 음난가그와 대통령은 멩기스투를 인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58] 2020년 기준으로도 멩기스투는 여전히 짐바브웨 당국의 보호 아래 있다.

2018년에는 에티오피아의 전 총리 하이레마리암 데살렌이 짐바브웨에서 멩기스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개인 페이스북에 게시했다가 논란이 일자 삭제하는 일이 있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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