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마사아키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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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마사아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선수 시절에는 포수로 활약했으며, 195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974년 은퇴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하여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세이부 라이온즈의 코치를 거쳐, 1985년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했다. 세이부 감독 시절 8번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6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001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을 맡았으나 2002년 중도에 사임했다. 200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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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마사아키 (야구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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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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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37년 1월 9일 |
출생지 | 기후현 기후시 |
포지션 | 포수 / 감독 |
타석 | 좌타 |
투구 | 우투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NPB |
데뷔일 | 1955년 10월 8일 |
데뷔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최종 리그 | NPB |
최종일 | 1974년 10월 14일 |
최종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선수 생활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5–1974) |
감독/코치 경력 | |
감독 경력 | 세이부 라이온스 (1986–199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01–2002) |
코치 경력 | 야쿠르트 스왈로스 (1978–1979) 세이부 라이온스 (1982–1984) |
기타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2-1974, 코치 겸임) |
수상 | |
일본 시리즈 우승 | 21회 (1955, 1961, 1963, 1965-1973, 1978, 1982, 1983 1986-1992) |
베스트 나인 | 8회 (1961–1968) |
일본 시리즈 MVP | 1967년 |
쇼리키 마쓰타로 상 | 2회 (1986, 1990) |
NPB 올스타 | 11회 (1960–1970) |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2005년 (경기자 표창) |
NPB 통산 성적 (1974년) | |
타율 | .236 |
홈런 | 81 |
안타 | 1341 |
개인 정보 | |
본명 | 모리 마사히코 (森 昌彦) |
2. 선수 시절
기후 시립 나가모리 중학교 출신으로, 중학생 때 야구를 시작해 처음에는 내야수였으나 2학년 때 포수로 전향했다. 기후고등학교에서는 이토 토시오 감독의 지도로 기량이 발전하여, 3학년이던 1954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센요고에 완봉패를 당했다. 이때 모리는 타구에 사타구니를 맞아 도중 퇴장당하는 불운을 겪었다.[2]
195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테스트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2] 1년 차에는 2군에서 시작했지만, 6월에 1군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에이스였던 벳쇼 다케히코를 만나 훈련에 동행하며 프로 선수로서의 자세를 배웠다.
1956년부터 서서히 출전 기회를 늘려갔다. 당시 주전 포수였던 후지오 시게루의 벽을 넘기 위해 인사이드 워크 등을 연마했다. 1959년 후지오가 중견수로 컨버트되면서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은 모리의 수비력을 높이 평가하여 레귤러로 기용했고, 이후 은퇴할 때까지 주전 포수 자리를 지켰다.
1960년에는 다이요와의 우승 경쟁에서 패하며 2위에 머물렀고, 팀 방어율과 개인 타율 모두 부진했다. 하지만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은 모리의 두뇌와 인사이드 워크를 높이 평가하여 계속 신뢰했다.
1961년에는 젊은 투수들을 이끌며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승리하며 6년 만에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
가와카미 감독은 모리에게 경쟁을 붙이기 위해 아마추어 야구계의 유력한 포수들을 영입했지만, 모리는 은퇴할 때까지 주전 자리를 지키며 8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등 V9 시대를 이끌었다.
1965년에는 타격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며 일본 시리즈 타격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호리우치 쓰네오의 개막 13연승을 도왔고, 1967년에는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70년과 1972년에는 상대 팀 강타자들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며 팀 승리에 기여했다.
1972년부터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고, 1973년 V9 달성 직후 한신 팬에게 마스크를 빼앗기는 사건을 겪었다. 1974년 V10을 달성하지 못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유년 시절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에서 태어나 기후현 기후시에서 자랐다. 기후 현립 기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포수를 맡았다. 기후 시립 나가모리 중학교 출신으로, 중학생 때 야구를 시작해 처음에는 내야수였으나 2학년 때 포수로 전향했다. 기후고등학교에서 이토 토시오 감독의 지도로 기량이 발전하여,[3] 3학년이던 1954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센요고에 완봉패를 당했다. 이때 모리는 타구에 사타구니를 맞아 도중 퇴장당하는 불운을 겪었다.[2]원래 대학 진학을 생각하여 도쿄 6대학에서 뛰고 싶어 릿쿄 대학 진학도 고려했지만,[2] 무역상이었던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프로 야구단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11월 1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테스트 입단, 계약금 50만엔과 월급 3만엔을 받으며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보냈다.[2]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5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프로 5년차인 1959년에는 팀 동료인 후지오 시게루로부터 주전 포수 자리를 빼앗았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팀의 주전 포수 자리를 계속 지켰다. 당시 감독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는 모리의 치밀한 수비력을 높게 평가하여 주전으로 기용했다.[2]미즈하라 감독의 후임인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은 모리의 두뇌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사키 이사오, 오하시 이사오, 쓰치다 마코토, 요시다 다카시 등 아마추어 야구계의 유력 포수를 계속 영입했다. 모리는 요미우리에 아마추어 유력 포수가 입단할 때마다 불안감을 느꼈지만, 현역 은퇴까지 주전 포수 자리를 지켜내며 8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팀의 V9 시대를 이끌었다.[2]
모리는 통찰력이 뛰어나고 두뇌가 명석하며 연구에도 열심이었다. 당시 프로 야구계 포수 중에서도 배터리 간의 리드력이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상대 타자의 약점과 볼 배합을 정확히 암기하는 기억력을 바탕으로 치밀한 볼 배합을 실행하여 상대 타자를 농락했다. 캐칭도 뛰어나 현역 시절 통산 42개의 패스볼만을 기록했다 (참고로 노무라 가쓰야는 현역 시절 통산 206개의 패스볼을 기록했다). 부상에도 강해 장기 결장이나 전력 이탈이 거의 없었다.
경기 외적인 정보 수집에도 열심이어서, 일본 시리즈 대책으로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 강세를 보이던 한큐 브레이브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난카이 호크스의 간판 포수였던 노무라 가쓰야의 자택에 드나들며 야구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후 모리와 노무라는 친구처럼 지냈으며, 노무라의 신사복을 몇 벌 가져갔다는 일화도 있다. 모리 역시 다른 명포수들과 마찬가지로 현역 시절 ‘속삭임 전술’의 명인이었다.
후지타 모토시는 모리가 투수의 컨트롤을 끌어내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반면, 투수가 안타를 맞았을 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 대해 가와카미 감독이나 다키 야스하루는 비판적인 언급을 하기도 했다. 다만 가와카미 감독은 모리의 이러한 면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비정한 보고는 승부를 맡는데 있어서 매우 귀중했다”라고 평가했다.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에 이어 5번 타자로도 활약하는 등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순간에 강한 면모를 보였고, 196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MVP를 수상했다. 야구계에서는 모리를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사상 최강의 명포수”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고, 모리의 현역 시절 등번호 ‘27’번은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 포수를 대표하는 등번호로 정착되었다.[105] 현역 선수 중에서도 팀의 주전 포수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106]
1960년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이끄는 다이요(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의 우승 경쟁에서 패하여 2위가 되었다. 이 해는 팀 방어율이 리그 5위, 모리 자신의 타율도 .197에 그치는 등 공수 양면에서 부진했다. 미즈하라는 이 해에 퇴임했지만, 뒤를 이은 가와카미 감독도 포수로서의 두뇌와 인사이드 워크를 높이 평가하여, 수비의 핵심으로 신뢰했다.
1961년 에이스 후지타와 호리모토 리쓰오가 부상으로 부진한 가운데, 모리는 나카무라 미노루와 이토 요시아키, 9월에 급하게 입단한 무라세 히로키와 같은 젊은 투수들을 이끌었다. 지난 4년간 3승밖에 거두지 못했던 나카무라는 17승을, 이토도 13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2년 만에 우승을 결정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나카무라 등의 활약으로 난카이를 꺾고 6년 만에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
1965년 나카무라, 조노우치 구니오, 미야타 세이텐 3명이 모두 20승을 거두고, 고쿠테쓰에서 이적해 온 가네다 마사이치가 최우수 방어율을 획득하는 등 투수진의 활약으로 우승했다. 모리는 이 해 다른 선수들의 부진으로 5번 타자를 맡아 타율 .277, 5홈런, 58타점으로 타격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난카이를 꺾고 타격상을 받았다.
1966년 루키 호리우치 쓰네오의 개막 13연승을 도왔고, 팀도 그 기세로 V2를 달성했다. 1967년 캠프에서 다리를 다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호리우치, 조노우치, 가네다 등 투수진을 이끌며 V3를 달성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서 홈런을 터뜨리는 등 타율 .227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1970년 롯데전에서는 강타자 조지 알트만과의 승부를 철저히 피하며 타선을 봉쇄했고, 1972년 한큐전에서는 시즌 106도루를 기록한 후쿠모토 유타카에게 도루를 거의 허용하지 않아 한큐 타선을 무력화시켰다.
1972년부터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고, 1973년 10월 22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최종전에서 요미우리가 승리하며 V9을 달성한 직후, 흥분한 일부 한신 팬들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포수 마스크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1974년 팀이 10년 연속 리그 우승 달성에 실패하자,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같은 해 은퇴한 나가시마 시게오와 같은 은퇴식은 없었지만, 조용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 3. 은퇴
1974년 팀이 10년 연속 리그 우승 달성에 실패하면서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했고, 같은 해에 은퇴한 나가시마 시게오와 같은 은퇴식은 없었지만 '조용하게'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105]3. 지도자 시절
퇴임 후 1995년부터 2000년까지 NHK 야구 해설가와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를 맡았다. 1995년에는 글리코 교도 유업의 'Big 요구르트 건강' 광고에 출연, 현역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1998년 요미우리 감독 취임설이 보도되었으나, "감독 취임 요청이 있더라도 받지 않겠다"라고 밝혀 실현되지 않았다.[60] 이후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을 맡았다.
3. 1. 코치 시절
2000년 10월 13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에 취임했다.[61] 모리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머신건 타선"의 공격력은 인정했지만, 한 개의 안타로 득점하는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하며 전임 감독 곤도 히로시의 야구를 비판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62] 특히 타니시게를 다시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62] 곤도 전 감독은 이에 대해 "모리 씨는 전 감독이 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말한 것 같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반박했다.[63]코치진으로는 현역 시절 동료이자 세이부에서 콤비를 이뤘던 쿠로에 토시오를 헤드코치로 임명했고, 타카기 유타카가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취임했으며, 투수 코치 엔도 카즈히코, 타격 코치 타카기 요이치는 유임되었다.
2001년에는 주포 로버트 로즈가 퇴단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감독 주도로 하루 토시오를 주니치로 보내고 타네다 히토시를 영입했으며,[64] 스기야마 겐토를 긴테츠에서 영입하는 등 선수단 개편에 힘썼다. 중반에는 10연승을 거두며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65] 팀 평균자책점은 3.92에서 3.75로 향상되었지만,[66] 10월 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8월 16일 야쿠르트전에서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여 현역 시절을 통틀어 처음으로 퇴장 처분을 받았다.[67]
2002년에는 세이부 시절 제자인 모리 시게카즈를 투수 코치, 츠지 하츠히코를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초빙했다. 그러나 모리와의 불화로 타니시게,[68] 코미야마 사토루 등 주축 선수들이 FA로 이적하면서 전력이 약화되었다. 개막부터 13연패를 당하는 등 최하위를 기록했고, 9월 25일 계약을 1년 남기고 해임 통보를 받았다.[69] 모리 감독은 해임 다음 날 기자 회견을 가졌지만, "팬들에게 죄송한 성적으로 가장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라고 짧게 말하고 질의응답 없이 회견을 마쳤다.[70] 관객 동원도 크게 감소했다.[71] 감독 대행은 헤드 겸 타격 코치였던 쿠로에가 시즌 최종전까지 맡았다. 팀 평균자책점은 4.09로, 팀 실책도 81로 악화되었다. 투수진에서는 요시미 유지가 유일하게 11승을 거두며 신인왕 경쟁을 했지만, 팀은 리그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야쿠르트, 세이부 코치 시절에는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다쓰로의 엄격한 지도를 받았다. 선수들은 모리 코치의 지나친 관리에 불만을 품고 "모리 CIA", "모리 KGB" 등으로 불렀다. 찰리 매뉴얼은 주간 아사히에서 노무라 가쓰야와의 대담을 통해 "히로오카는 좋은 감독이었지만, 코치 모리는 싫은 놈이었다"라고 말했다. 모리는 히로오카의 생각을 충실히 실행했지만, 그라운드 밖까지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에 대해 내면적으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에가와 스구루는 주간 베이스볼 칼럼에서 모리가 호텔에서 선수들의 방을 순찰한 후, 자신의 방에 들어와 "나도 이런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아"라고 한탄했다고 증언했다. 히로오카는 모리 코치에 대해 "유능한 헤드코치"이자 "명참모"였다고 평가했지만,[80] "지도는 할 수 없었다"는 단점을 지적했다.[4] 1984년 투수진 붕괴를 계기로 히로오카와 대립하여 헤드코치직을 사임했다. 이후 모리가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히로오카가 캠프를 방문했지만 화해하지 못했고, 히로오카는 1998년 모리가 요미우리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을 때 "요미우리 감독은 나가시마 시게오나 오 사다하루처럼 화려한 사람이 해야 한다"라고 비판했다.[81]
3. 2.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시절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모리 마사아키의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시절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3. 3.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감독 시절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을 맡았다.[60] 퇴임 후에는 NHK 야구 해설가,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1995년 - 2000년)를 맡았다.4. 은퇴 이후
모리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 지도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일본 프로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을 맡아 뛰어난 성과를 거두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주요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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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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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도 스타일
모리 마사아키는 현역, 코치, 감독 시절을 통틀어 총 24번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다. 특히 1961년부터 1992년까지는 20회 연속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 현역 선수(포수)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으로 1961년, 1963년, 1965년~1973년까지 11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 (V9)
- 코치 시절: 야쿠르트 스왈로스(1978년), 세이부 라이온스(1982년, 1983년)에서 3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
- 감독 시절: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1986년~1988년, 1990년~1992년까지 6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
1957년, 1959년(이상 현역 시절), 1993년, 1994년(이상 세이부 감독 시절)에는 일본 시리즈에서 패배했다.
5. 1. 히로오카 다쓰로와의 관계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 아래서 야쿠르트와 세이부 코치 시절, 모리 마사아키는 선수들의 경기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 엄격하게 관리했다. 이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는 "모리 CIA", "모리 KGB"와 같은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80] 찰리 매뉴얼은 주간 아사히에서 노무라 가쓰야와의 대담을 통해 "히로오카는 좋은 감독이었지만, 코치 모리는 싫은 놈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모리는 승리를 위해 히로오카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지만, 경기장 밖에서의 엄격한 관리는 내키지 않았고 내면적으로 괴로워했다. 1984년 세이부에 있던 에가와 스구루는 주간 베이스볼 칼럼에서, 모리가 호텔에서 선수들의 방을 순찰한 후 자신의 방에 와서 "나도 이런 역할은 하고 싶지 않다"라며 한탄했다고 밝혔다.
히로오카는 모리에 대해 "내가 야쿠르트와 세이부 감독일 때 유능한 헤드코치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에 공헌한 명포수이며, 투수에 대해 잘 아는 명참모였다"라고 평가했다.[80] 그러나 "지식과 선수 보는 눈은 확실했지만, 지도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단점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4]
히로오카와의 협력으로 3번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지만, 1984년 투수진 붕괴를 계기로 히로오카와 대립하여 헤드 코치직을 사임했다. 이후 모리가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히로오카가 캠프를 방문했지만 화해하지 못했다. 1998년 모리가 요미우리의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을 때, 히로오카는 "요미우리 감독은 나가시마 시게오나 오 사다하루처럼 화려한 사람이 해야 한다"라는 비판적인 코멘트를 남겼고, 이후에도 둘은 화해하지 못했다.[81]
6. 평가
모리 마사아키는 일본 시리즈에 24번 출장했다. 현역 시절 13번(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시절 3번(야쿠르트 스왈로스 1번, 세이부 라이온즈 2번), 감독 시절 8번(모두 세이부 라이온즈)을 기록했다. 1961년 3번째 출장부터 1992년 22번째 출장까지 20회 연속 우승(일본 제일)을 경험했다.
구분 | 연도 | 비고 |
---|---|---|
현역 시대 11연승 | 1961년, 1963년, 1965년~1973년 | V9 |
코치 시대 3연승 | 1978년(야쿠르트 스왈로스), 1982년, 1983년(세이부 라이온즈) | |
감독 시대 6연승 | 1986년~1988년, 1990년~1992년 | |
시리즈 패배 4회 | 1957년, 1959년(이상 현역 시대), 1993년, 1994년(이상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시대) |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는 니시테츠에게 3연승 후 4연패를 당했지만, 모리는 이 시리즈에 출전하지 않아 1958년은 출장 횟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세이부는 1985년 일본 시리즈에서 한신에게 패배했지만, 모리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년에 코치를 사임했고,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에 복귀한 것은 이듬해인 1986년이었으므로, 자신의 시리즈 연승 기록은 멈추지 않았다.
V9 이후 요미우리는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 한큐에 패배하여, 1959년 이래 17년 만에 시리즈 패자가 되었다. 한편 모리는 20연승 후, 1993년 일본 시리즈에서 야쿠르트에게 패배하여, 34년 만에 시리즈 패자가 되었다.
7. 수상 및 경력
- 베스트 나인: 8회 (1961년 ~ 1968년) ※포수 부문 8년 연속은 역대 2위, 센트럴 리그 최장 기록 (아베 신노스케와 동일)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2005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67년)
- 일본 시리즈 타격상: 1회 (1965년)
- 쇼리키 마쓰타로상: 2회 (1986년, 1990년) ※감독으로서 표창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3회 (1987년, 1988년, 1990년)
- 도민 문화 영예상 (1991년)
- 기후 시민 영예상 (1995년)
7. 1. 선수 시절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에서 태어나 기후현 기후시에서 자랐으며, 기후 현립 기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포수를 맡았다. 본인은 대학 진학을 생각했지만, 집안의 경영이 어려워져 대학 진학 대신 프로 야구단 입단을 선택했다.프로 5년 차인 1959년, 팀 동료 후지오 시게루로부터 주전 포수 자리를 빼앗았다(이후 후지오는 중견수로 이동). 은퇴할 때까지 팀의 주전 포수 자리를 지켰다. 타격은 후지오가 우수했지만,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은 모리의 치밀한 수비력을 높게 평가하여 주전으로 기용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은 모리의 두뇌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사사키 이사오, 오하시 이사오, 쓰치다 마코토, 요시다 다카시 등 아마추어 유망주 포수들을 영입하여 경쟁을 유도했다. 하지만 모리는 은퇴할 때까지 주전 포수 자리를 지키며 8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 팀의 V9 시대를 이끌었다.
모리는 통찰력이 뛰어나고 두뇌가 명석하며 연구에 열심이었다. 배터리 리드 능력은 당시 프로 야구 최고 수준이었다. 상대 타자의 약점과 볼 배합을 정확히 기억하여, 이를 바탕으로 치밀한 볼 배합을 구사해 타자를 농락했다. 캐칭도 뛰어나 현역 시절 패스볼은 42개에 불과했다(노무라 가쓰야는 통산 206개). 부상에도 강해 장기 결장이나 전력 이탈이 거의 없었다.
경기 외적으로도 정보 수집에 열심이었다. 일본 시리즈 대책으로 한큐 브레이브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난카이 호크스의 간판 포수 노무라 가쓰야의 자택에 드나들며 야구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후 모리와 노무라는 친구처럼 지냈다. 노무라의 신사복을 가져가는 에피소드도 있다. 다른 명포수들처럼 모리도 '속삭임 전술'의 명인이었다.
후지타 모토시는 모리가 투수의 컨트롤을 끌어내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반면 투수가 안타를 맞으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가와카미 감독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비정한 보고는 승부에 매우 귀중했다"라고 평가했다.
모리는 좌타자였지만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에 이어 5번 타자로도 활약했다(1964년에는 1경기 4번 타자). 낮은 타율에도 불구, 1967년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야구계에서는 모리를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사상 최강의 명포수"로 평가하며, 그의 등번호 '27'번은 일본 프로야구 포수의 대표적인 등번호로 여겨진다.[105] 현역 선수 중 팀의 주전 포수에게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106]
1972년부터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고, 1973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최종전에서 V9 달성 직후, 흥분한 한신 팬들에게 포수 마스크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1974년 팀의 10년 연속 리그 우승 실패 후 은퇴를 결심, 나가시마 시게오와 같은 은퇴식 없이 조용히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모리 마사아키의 선수 시절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27 (1955년 ~ 1974년)
주요 기록
- 1000경기 출장: 1966년 6월 30일 (역대 109번째)
- 올스타전 출장: 11회 (1960년 ~ 1970년)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5 | 요미우리 | 1 | 1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000 |
1956 | 13 | 14 | 13 | 0 | 1 | 0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1 | 6 | 0 | .077 | .143 | .077 | .220 | |
1957 | 42 | 105 | 97 | 5 | 21 | 3 | 0 | 1 | 27 | 12 | 1 | 0 | 1 | 0 | 7 | 0 | 0 | 20 | 1 | .216 | .269 | .278 | .548 | |
1958 | 30 | 66 | 64 | 6 | 19 | 6 | 1 | 1 | 30 | 6 | 0 | 1 | 0 | 0 | 2 | 0 | 0 | 17 | 2 | .297 | .318 | .469 | .787 | |
1959 | 105 | 363 | 329 | 17 | 75 | 7 | 1 | 3 | 93 | 26 | 5 | 0 | 3 | 2 | 28 | 3 | 1 | 52 | 8 | .228 | .291 | .283 | .573 | |
1960 | 115 | 384 | 355 | 18 | 70 | 14 | 0 | 2 | 90 | 18 | 5 | 2 | 6 | 3 | 20 | 6 | 0 | 46 | 11 | .197 | .240 | .254 | .494 | |
1961 | 113 | 344 | 323 | 17 | 72 | 15 | 1 | 4 | 101 | 29 | 0 | 4 | 1 | 1 | 17 | 3 | 2 | 24 | 6 | .223 | .266 | .313 | .579 | |
1962 | 134 | 508 | 469 | 43 | 116 | 24 | 1 | 6 | 160 | 44 | 4 | 6 | 3 | 2 | 32 | 4 | 2 | 35 | 15 | .247 | .298 | .341 | .639 | |
1963 | 132 | 452 | 419 | 26 | 83 | 10 | 2 | 4 | 109 | 38 | 3 | 0 | 2 | 4 | 27 | 4 | 0 | 30 | 11 | .198 | .247 | .260 | .507 | |
1964 | 123 | 459 | 426 | 35 | 115 | 17 | 1 | 12 | 170 | 65 | 1 | 1 | 3 | 2 | 27 | 1 | 1 | 22 | 8 | .270 | .315 | .399 | .714 | |
1965 | 135 | 511 | 484 | 47 | 134 | 19 | 2 | 5 | 172 | 58 | 2 | 0 | 3 | 3 | 19 | 0 | 2 | 25 | 18 | .277 | .307 | .355 | .662 | |
1966 | 125 | 454 | 425 | 25 | 103 | 13 | 2 | 5 | 135 | 62 | 1 | 1 | 3 | 4 | 21 | 8 | 1 | 19 | 12 | .242 | .280 | .318 | .597 | |
1967 | 109 | 360 | 331 | 28 | 92 | 10 | 0 | 6 | 120 | 31 | 3 | 0 | 1 | 3 | 22 | 6 | 3 | 22 | 11 | .278 | .329 | .363 | .691 | |
1968 | 127 | 468 | 439 | 35 | 100 | 10 | 1 | 11 | 145 | 46 | 2 | 2 | 3 | 2 | 21 | 1 | 3 | 31 | 15 | .228 | .268 | .330 | .598 | |
1969 | 115 | 372 | 340 | 22 | 87 | 13 | 0 | 8 | 124 | 39 | 0 | 1 | 1 | 2 | 26 | 6 | 3 | 29 | 11 | .256 | .314 | .365 | .679 | |
1970 | 97 | 272 | 243 | 11 | 51 | 10 | 0 | 0 | 61 | 15 | 0 | 3 | 1 | 4 | 23 | 8 | 1 | 21 | 8 | .210 | .281 | .251 | .532 | |
1971 | 95 | 285 | 256 | 19 | 55 | 8 | 2 | 4 | 79 | 22 | 1 | 1 | 1 | 2 | 26 | 8 | 0 | 28 | 8 | .215 | .287 | .309 | .596 | |
1972 | 120 | 372 | 338 | 20 | 71 | 10 | 0 | 4 | 93 | 33 | 0 | 0 | 0 | 3 | 26 | 6 | 5 | 27 | 13 | .210 | .276 | .275 | .552 | |
1973 | 97 | 241 | 223 | 11 | 49 | 5 | 0 | 3 | 63 | 19 | 1 | 0 | 2 | 1 | 14 | 2 | 1 | 10 | 7 | .220 | .269 | .283 | .551 | |
1974 | 56 | 118 | 111 | 7 | 27 | 2 | 0 | 2 | 35 | 19 | 0 | 1 | 0 | 2 | 5 | 1 | 0 | 5 | 6 | .243 | .276 | .315 | .591 | |
통산: 20년 | 1884 | 6149 | 5686 | 392 | 1341 | 196 | 14 | 81 | 1808 | 582 | 29 | 23 | 34 | 40 | 363 | 67 | 26 | 469 | 171 | .236 | .285 | .318 | .603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7. 2. 지도자 시절
모리 마사아키는 선수 시절 엄격한 기본 지도와 함께 선수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야구 스타일을 추구하여 많은 선수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쓰지 하쓰히코는 자신의 저서에서 모리 감독이 경기 중 실수한 선수에게 심야에 걱정하는 전화를 걸거나, 원정 경기나 합숙소에서 선수들의 식사에 신경 쓰는 등 선수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회상했다.[82]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과 비교하며 "히로오카 감독은 선수를 칭찬하는 일이 없었지만, 모리 감독은 선수들의 좋은 플레이를 미팅에서 반드시 칭찬해 주었다"고 말했다. 또한 선수들이 게임보이와 같은 새로운 장난감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꾸짖기보다 먼저 자신이 직접 해보고 그 재미를 체험한 후 "적당히 하세요"와 같이 온건하게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모리 감독은 선수 관리에 대해 "시대 배경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젊은 선수들의 시대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저것을 하면 안 된다, 이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라고 말했다.모리 감독의 방식은 관리 야구에 철저했던 히로오카 감독의 방침과 크게 달랐다. 모리 감독은 히로오카 감독 시절 강제적으로 시행했던 건강식 관리도 즉시 폐지했다.[82] 우승 시 챔피언 플래그를 들고 구장을 한 바퀴 도는 모습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감독이 플래그를 들고 선두에 서지만, 모리 감독은 이시게 히로노리, 쓰지 등 주전 선수들에게 플래그를 들게 하고 자신은 항상 열의 맨 뒤를 걸었다. 이는 "선수가 주인공, 감독은 조연"이라는 모리 감독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토 쓰토무는 "히로오카 감독 시절에 단련된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팀이 완성되어 가던 시기에 모리 감독이 왔기 때문에, 모리 감독은 특히 할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83]고 말했으며, 이시게 히로노리는 "모리 감독은 키운다기보다는 팀 매니지먼트에 뛰어난 감독이었다"[84]고 평가했다. 반면, 타오 야스시는 "승부사였던 모리 감독과는 잘 맞지 않아, 네모토 리쿠오 구단 관리부장에게 트레이드를 요청하여 한신으로 가게 되었다"[85]고 말했다.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루키 시즌부터 주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선발로 계속 기용한 것은 모리 감독의 강한 의지였다.[86] 프로 첫 홈런을 기록한 이후 부진에 빠지자 코치진과 야구 평론가들은 기요하라를 2군에서 훈련시키는 것을 주장했지만,[86] 모리 감독은 기요하라의 스타성을 고려하여 "레벨이 높은 1군에서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다.[87] 기요하라는 모리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신인왕을 획득하고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기요하라는 모리 감독의 기용에 깊은 은혜를 느끼고 2005년 모리 감독의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 축하식에 참석하여 가장 먼저 축사를 전했다.
그러나 당시 타격 코치였던 도이 마사히로는 "기요하라를 2군에서 시작하자고 주장한 것은 모리 감독 자신이었다. 그런데 데이 쓰요시 오너의 지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태도를 바꿔, 내가 참고 썼다고 말했다"며 모리 감독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했다.[89] 또한, 기요하라의 문단속 위반이 발각되었을 때 모리 감독이 "결자해지니까 아래로 떨어뜨려야 한다"고 발언했지만, 도이 코치의 반대와 곤도 아키히토 코치의 옹호 덕분에 잔류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90] 기요하라에 따르면, 모리 감독은 기요하라에게 사인다운 사인을 내지 않고 기본적으로 노 사인이었다.[91]
2016년 기요하라가 각성제 단속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자, 히로오카와 노무라 가쓰야는 모리 감독이 기요하라를 현역 시절에 방임하고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것이 은퇴 후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히로오카는 "모리 감독이 야구는 가르쳤지만, 사회인으로서의 상식을 가르치지 않았다"며[92] "기요하라가 '무관의 제왕'으로 끝난 것은 모리 감독의 책임이 크다"[93]고 비판했다. 노무라 역시 "모리 감독에게 기요하라를 제대로 교육하라고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94]고 말했다. 모리 감독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그라운드 밖에서는 기요하라를 자유롭게 놔두었지만, 쓴맛을 보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모리 감독은 기요하라를 예의 바르고 꼼꼼하며 책임감이 강한 남자라고 평가했다.[95]
모리 감독은 "인(忍)"을 좋아하는 말로 꼽았다. 1989년 우승을 놓친 후 중국 뤄양 시를 여행하던 중 고승에게 "인(忍)"이라는 글자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경험은 그의 저서 『패도 - 마음에 칼날을 얹고』의 제목에 반영되었다.
연도 | 팀 | 순위 | 경기 | 승리 | 패배 | 무 | 승률 | 게임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나이 | |
---|---|---|---|---|---|---|---|---|---|---|---|---|---|
1986년 | 쇼와 61년 | 세이부 | 1위 | 130 | 68 | 49 | 13 | .581 | ― | 185 | .281 | 3.69 | 49세 |
1987년 | 쇼와 62년 | 1위 | 130 | 71 | 45 | 14 | .612 | ― | 153 | .249 | 2.96 | 50세 | |
1988년 | 쇼와 63년 | 1위 | 130 | 73 | 51 | 6 | .589 | ― | 176 | .270 | 3.61 | 51세 | |
1989년 | 헤이세이 원년 | 3위 | 130 | 69 | 53 | 8 | .566 | 0.5 | 150 | .271 | 3.86 | 52세 | |
1990년 | 헤이세이 2년 | 1위 | 130 | 81 | 45 | 4 | .643 | ― | 162 | .263 | 3.48 | 53세 | |
1991년 | 헤이세이 3년 | 1위 | 130 | 81 | 43 | 6 | .653 | ― | 155 | .265 | 3.22 | 54세 | |
1992년 | 헤이세이 4년 | 1위 | 130 | 80 | 47 | 3 | .630 | ― | 159 | .278 | 3.52 | 55세 | |
1993년 | 헤이세이 5년 | 1위 | 130 | 74 | 53 | 3 | .583 | ― | 114 | .260 | 2.96 | 56세 | |
1994년 | 헤이세이 6년 | 1위 | 130 | 76 | 52 | 2 | .594 | ― | 122 | .279 | 3.81 | 57세 | |
2001년 | 헤이세이 13년 | 요코하마 | 3위 | 140 | 69 | 67 | 4 | .507 | 8 | 94 | .267 | 3.75 | 64세 |
2002년 | 헤이세이 14년 | 6위 | 140 | 49 | 86 | 5 | .363 | 35.5 | 97 | .240 | 4.09 | 65세 | |
통산: 11년 | 1436 | 785 | 583 | 68 | .574 | A클래스 10회, B클래스 1회 |
- '''굵은 글씨'''는 일본 제일
- 1986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140경기제
- 2002년 9월 26일부터 휴양. 감독 대행은 쿠로에 토시오
- 2002년 결장한 14경기(6승 8패)는 통산 성적에 포함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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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への遺言プロ野球 生き残りの道
幻冬舎
2016
[81]
웹사이트
https://www.sponichi[...]
[82]
서적
1996
[83]
간행물
埼玉西武ライオンズ40周年黄金の記憶 [完全保存版:一軍全選手写真名鑑1979-2008]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18-07
[84]
간행물
西武ライオンズLEGEND対談廣岡達朗×石毛宏典
週刊ベースボール
2018-10-22
[85]
웹사이트
田尾安志 プロ野球チームをつくろう
http://www.yakyutsuk[...]
2021-01
[86]
웹사이트
森祇晶 言葉から見る監督という仕事と苦悩
https://column.sp.ba[...]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22-02-25
[87]
웹사이트
「1986年の清原和博」山田、村田ら名投手たちが体感したその凄さ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22-02-25
[88]
웹사이트
https://www.news-pos[...]
[89]
서적
監督論 日本シリーズを制した27人の名将
廣済堂出版
2013
[90]
웹사이트
教えられなかった死球の避け方
http://number.bunshu[...]
Number Web
2009-02-16
[91]
서적
清原和博 告白
文藝春秋
2018
[92]
뉴스
元西武ライオンズ監督・広岡達朗 清原逮捕に「この事件は球界に対する警告。指導者が常識教えなかった」
http://dot.asahi.com[...]
週刊朝日
2016-02-11
[93]
웹사이트
清原和博を語る第3回 広岡達朗の証言「巨人の伝統をしっかりと清原に教え込まなければいけなかった」
http://column.sp.bas[...]
[94]
뉴스
野村克也 清原逮捕に「天才だが考えられないバカ。野球人としての復帰は難しい」
http://dot.asahi.com[...]
週刊朝日
2016-02-10
[95]
웹사이트
https://www.news-pos[...]
[96]
서적
2016
[97]
서적
2016
[98]
웹사이트
中日・谷繁“布石を打って勝つ”新リーダー術(6)「兼任監督が機能する条件」
https://www.asagei.c[...]
朝日新聞出版
[99]
뉴스
引退の谷繁「中日移籍」秘話 陰に横浜・森監督との確執が…
日刊ゲンダイ
2015-09-30
[100]
웹사이트
横浜大洋時代の先輩・遠藤一彦氏が明かす「谷繁監督兼捕手の知られざる顔」
https://www.tokyo-sp[...]
東京スポーツ
[101]
서적
日本プロ野球監督列伝―1936ー2014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
[102]
웹사이트
歴代授賞者
http://www.jpsa.jp/a[...]
公益財団法人日本プロスポーツ協会
2017-11-25
[103]
웹사이트
東京都文化賞・都民文化栄誉章
http://www.seikatubu[...]
東京都生活文化スポーツ局
2017-12-04
[104]
웹사이트
岐阜市民栄誉賞
http://www.city.gifu[...]
岐阜市
2017-12-04
[105]
문서
대표적인 예는 후루타 아쓰야(야쿠르트), 모리의 세이부 감독 시절의 제자이기도 한 이토 쓰토무였다.
[106]
문서
다니시게 모토노부
[107]
문서
쓰쓰미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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